그분과 그분의 말씀을 사랑함으로 율법을 지켜 그분과 하나 되는 것
아침
주님의 보석 2011-10-24 , 조회 (412) , 추천 (0) , 스크랩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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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과 그분의 말씀을 사랑함으로 율법을 지켜
그분과 하나 되는 것
 
아가서가 성경에 포함된 것은 주님의 주권이다. 소위 그리스도인이라 하는 몇몇 사람들은 아가서를 신성한 책으로 보지 않고 성경에 포함하는 것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러나 사실 아가서는 가장 신성한 책이다. 이 책에서 추구하는 자는, 『나는 나의 사랑하는 자에게 속하였고 나의 사랑하는 자는 내게 속하였다』(6:3)고 말한다. 만일 우리에게 아가서가 없었다면 주님과 우리의 관계에 관한 그러한 표현이 없었을 것이다.
『나는 그의 것 그는 나의 것』이라는 후렴이 있는 찬송가가 있다. 이것은 아가서에 대한 말이다. 『나는 나의 사랑하는 자에게 속하였고』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그분이 주인으로서 우리를 그분의 하인으로 소유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가 그분의 사랑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관계는 주종 관계가 아니라 남편과 아내의 애정 관계이다. 아가서는 지금까지 쓰여진 책 중에서 가장 로맨틱한 책이다. 이 책은 하나님과 그분의 택하신 백성과의 사랑 관계에 관한 책이다. 이 책은 그리스도와 그분을 사랑하는 자들의 결혼 생활에 대한 묘사를 나타낸다.
하나님의 율법을 지킴은 아내가 남편을 사랑함과 같이 그분을 사랑하는 것과 깊은 관계를 갖고 있다. 우리가 반복해서 지적했듯이, 율법을 주신 것은 하나님이 그분의 백성에게 구혼하시는 것이다. 율법은 약혼 계약으로 주어졌으므로 우리는 율법을 주님을 사랑하고 그분과 하나 되는 것과 분리해서 지키려고 해서는 안 된다.
몇몇 기독교 교사들은 신약에서 하나님이 율법을 포기했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진리와는 거리가 먼 것이다. 구속과 함께 율법의 내용이 성경 전체의 알맹이로 여겨질 수 있다. 더욱이 하나님의 율법에 관하여, 신약은 십계명의 내용과 본질적으로 같다. 예를 들어, 성경 전체에서는 우리가 참 하나님 한 분 외에 다른 신을 가져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은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시며 우리는 그분 외에 다른 신을 섬겨서는 안 된다. 바울은 고린도후서 11장 2절에서 하나님의 질투를 언급하면서, 우리가 그리스도에 대해 정결한 처녀여야 한다고 지적한다. 주님은 반드시 우리의 유일무이하신 애인이 되셔야 한다. 이것은 십계명뿐 아니라 전 성경을 통해서 가르치시는 것이다.
성경 전체가, 우리가 우상을 숭배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가르친다. 이것은 십계명에만 제한되는 것이 아니다. 나아가, 성경 전체가 주님의 이름을 합당하게 사용하는 것을 가르치며 망령되이 불러서는 안 된다는 것을 가르친다. 반복하지만 이 십계명은 율법에만 제한되는 것이 아니다.
원칙적으로는 안식일을 지키는 것과 관련된 네 번째 계명까지도 율법에 제한되는 것이 아니다. 신구약에서 하나님의 백성은 그들이 그분께 속하는 표시로 기념일을 가졌다. 옛 창조에 있어서, 그 날은 안식일, 즉 주(週)의 일곱째 날이었다. 그러나 새 창조에 있어서, 그것은 여덟째 날, 즉 주(週)의 첫째 날인 그리스도의 부활의 날이다. 부활 안에 있는 새 창조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자들인 우리의 기념일은 여덟째 날이지 더 이상 일곱째 날이 아니다. 새 창조 안에 있는 우리에게 그 날은 변했지만, 원칙은 변하지 않았다. 천년왕국 동안 회복된 인류가 계속 일곱째 날을 준수할 것이다(사 66:23).
이러한 사실에 근거하여, 안식교도들은 믿는 이들이 이 시대에도 계속 안식일을 준수해야 한다고 논쟁한다. 그러나 다가오는 천년왕국에서 안식일은 하나님의 거듭난 백성에 의해서가 아니라, 회복되고 보존된, 아직 거듭나지 못한 인류에 의해 지켜질 것이다. 비록 그들이 창조 때의 사람의 상태로 회복되더라도, 그들은 부활 안에 있는 신성한 생명을 가질 수 없을 것이다. 그들이 일곱째 날의 백성이 되는 반면에, 우리는 여덟째 날의 백성이 된다. 그러나 성경은 어떤 경우에나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주님께 분별되는 표시로 특별한 날이 있음을 가르친다.
율법을 버리지는 않더라도 율법을 남용하거나 오용하지 않도록 우리는 조심해야 한다. 부분적인 율법과 전체로서의 성경이 다 합당하게 사용되어야 한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의 접촉 없이 율법을 지키려고 노력한다면, 우리는 율법을 오용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주님과의 접촉 없이 성경에 접근한다면, 우리는 성경을 오용할 것이다. 유대교도들은 하나님과의 접촉 없이 율법을 이루려는 노력을 함으로써 오류를 범했다. 그리하여 그들은 그분을 사랑하고 그분과 하나 됨으로써 그분의 율법을 지키는 배필이 되지 못했다. 원칙적으로, 오늘날에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동일한 실수를 범하고 있다. 그들은 성경을 읽고 연구하지만 주님 자신과의 접촉 없이 그렇게 한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성경의 지식을 가르칠 때, 그들로 하여금 말씀 가운데서 그분을 접촉하라고 격려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남용하고 오용하는 오늘날의 유대교도들이 된다.
주의 회복 가운데 있는 우리는 기도로 말씀 읽는 것을 귀히 여긴다. 우리는 산 방식으로 그분을 접촉함 없이 성경을 읽기를 원치 않는다. 우리는 기도나 주님을 접촉하는 것을 떠나 성경을 읽는 것을 주의해야 한다. 만일 우리가 말씀 가운데서 주님을 접촉한다면, 우리의 체험 가운데서 실지적으로 그분과 하나 될 것이다. 그럴 때 우리는 그분의 배필이 될 것이다. 우리의 사랑하는 주님을 사랑함으로, 그분과 하나 됨으로, 심지어는 우리가 그분의 사랑이 됨으로, 그분의 말씀이 우리에게 생명 공급이 될 것이다. 율법은 그분의 말씀의 압축이다. 우리가 직접적으로 친근하게 그분을 접촉할 때마다, 우리는 그분과 하나 되고, 그분의 말씀은 우리에게 생명으로 공급된다. 이런 생명으로 우리는 성장하고, 그분의 표현이 되고, 그분의 어떠하심과 일치되는 삶을 산다. 그러한 삶은 하나님의 율법과 그분의 말씀과 일치된다. 이것이 하나님의 율법과 하나님의 말씀을 사용하는 합당한 길이다.(출애굽기 라이프 스타디 221-22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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