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매를 맺기 위해 적극적이며 조율되어 봉사함
복음 부담
주님의 보석 2011-10-24 , 조회 (338) , 추천 (0) , 스크랩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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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매를 맺기 위해 적극적이며 조율되어 봉사함
 
우리가 교회 봉사에 대해 많이 말할지라도 실지로 사람들을 관심하지 않을 수 있는 위험이 있다. 우리는 이러한 상태를 가축이 없는 농장에 비유할 수 있다. 살아있는 동물이 없다면 그러한 농장은 다만 구경거리에 불과하다. 우리는 모두 이 한 가지 문제, 곧 불신자들을 돌보고, 어리고 연약한 믿는 이들을 돌보는 이 일에 대해 부담을 갖도록 기도해야 한다. 우리는 이러한 일을 할 수 있는 은사가 없다고 말하지 말아야 한다. 모든 사람은 열매를 맺는 은사를 가자고 있다. 우리는 사람들을 가르치는 은사를 가지고 있지 않을지 모르지만, 여전히 사람들을 돌보려는 부담을 가져야만 한다. 교회 안의 모든 지체는 반드시 다른 사람들을 돌보아야 한다. 한 면에서 우리는 불신자들을 돌보아야 하고, 또 다른 면에서 어린 믿는 이들을 돌보아야 한다. 우리는 항상 사람들을 주님께로 인도해야 한다. 우리에게는 공식적인 사역자나 목사가 없다. 그러나 우리는 신약의 제사장 직분을 실행한다(벧전 2:5). 이러한 제사장 직분에서는 모든 사람이 누군가를 주님께 반드시 드려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영을 사용하고 기도하면서 사람들을 돌보고 새로운 사람들을 교회로 인도하려는 부담을 가져야 한다.
 
합당한 조율 안에서 사람들을 돌보는 봉사를 함
 
이전에 우리는 농구 팀을 예로 들어 봉사에 있어서 우리의 조율을 설명했다. 팀의 선수는 다른 선수들과 조율되어 경기를 해야 한다. 그가 원하는 대로 경기를 할 자유가 없다. 그러나 이것은 그에게 자유가 없다거나 공이 올 때까지 지시를 기다려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교회 안에는 교회 봉사를 감독하는 장로들이 있고, 장로 직분 아래서 집사들은 복음 집회나 성도들의 방문을 안배하는 것과 같은 다양한 책임을 맡는다. 그러나 이것은 봉사의 다양한 각 방면에서 인도하는 이들이 반드시 장로들에게서 지시가 오기를 기다려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보다 그들은 함께 기도하고, 필요를 고려하며, 주님의 생각을 구하는 자유를 갖고 있다. 장로들이 어떤 일에 대해 교통할 필요가 있다고 느낀다면 봉사자들은 장로들이 제안한 것을 받아들여야 하지만, 봉사의 책임을 맡은 이들은 수동적으로 장로들의 지시를 기다리기만 해서는 안 된다. 장로들은 봉사의 각 부분에서 부담을 갖고 있지 않다. 그들은 다만 봉사를 감독한다. 실지적인 봉사는 많은 형제자매의 수중에 있다.
동일한 원칙으로, 각 봉사에 참여하는 형제자매들은 그 봉사를 인도하는 지체들에게서 항상 지시를 받기를 기다리지 말아야 한다. 장로들과 마찬가지로 봉사를 인도하는 지체들도 주로 감독을 하면서 상황을 고려하고 방치되는 점은 없는지를 살펴본다. 우리는 교회의 복음 집회를 예로 들 수 있다. 이 방면에서 인도하는 지체들은 주님을 믿는 모든 사람이 돌봄을 받고 있는지 깨어서 살펴보아야 하지만, 누군가가 새롭게 구원받은 사람을 돌볼 부담을 갖고 있다면, 그는 인도하는 이들에게서 안배를 받기를 기다리지 말고 단순히 그 사람을 돌보아야 한다. 안배를 기다리는 것은 너무나 조직적이다. 우리는 반드시 조직의 길에서 구출되어 유기체, 곧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전진해야 한다.
복음 전파에서 인도하는 이들이 새롭게 구원받은 어떤 사람들이 돌봄을 받고 있지 않다는 것을 발견한다면, 인도하는 이들은 누가 그들을 돌보아야 하는지에 대해 고려하는 책임을 져야 한다. 그들은 이 부담을 어떤 형제나 자매에게 줄 수 있으나, 그 형제나 자매는 여전히 그 부담을 취할 것인지 아닌지를 선택할 자유가 있다. 이러한 식으로 새로운 모든 사람은 돌봄을 받을 것이고, 누구도 방치되지 않을 것이다. 이것은 전적으로 조직의 길과는 다른 것이다.
누구도 안배를 기다릴 필요가 없다. 우리가 어떤 사람을 주님께로 인도할 부담을 갖고 있다면 우리는 이것을 공식적인 방식으로 다른 사람들과 논의할 필요가 없다. 우리는 단순히 사람들을 돌봄으로써 실지적으로 봉사해야 한다. 공식적인 토론은 필요 없다. 우리는 밖으로 나가서 토론에 의해서가 아니라 실행에 의해 배워야 한다. 그러나 인도하는 이들은 항상 감독해야 한다. 때때로 인도하는 이들은 새로운 사람의 상태를 그 사람을 돌보는 이와 함께 점검해야 하고, 새로운 사람을 돌보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도록 격려해야 한다. 이것이 봉사에 있어서 합당한 조율이다.
사람들을 방문하여 복음을 전하는 그룹의 인도자들은 그 그룹에서 얼마나 많은 새 신자가 돌봄을 받고 있는지를 기록하여 그 기록을 집사실에 전해 주어야 한다. 이것은 여러 면에서 유용할 것이다. 장로들이 사람들을 방문하여 복음을 전하는 모든 그룹의 상태를 알기를 원할 때 모든 인도자를 만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들은 다만 집사실에 있는 기록을 보기만 하면 된다. 이럴 때, 예를 들어, 그들은 얼마나 많은 새 신자가 침례를 받을 준비가 되었는지를 결정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식으로 집사실은 다양한 봉사들을 조율하기 위한 중심이 된다. 한 면에서 우리는 조직체가 아니라 합당한 제사장 직분을 실행하는 유기체이지만, 또 다른 면에서 우리는 올바르고 합당하게 조율되어야 한다. 이것이 온 교회가 살아 있고 조율된 방식으로 봉사하며, 합당한 질서 안에서 머리 아래 있는 몸으로서 기능을 발휘하는 길이다.(위트니스 리 전집 1967 2권, 383-38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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