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5 희년
진리100선
생명강가 2012-01-13 , 조회 (369) , 추천 (0) , 스크랩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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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복음을 전하는 것은 바로 구속의 나팔을 부는 것이요,

세상 사람들을 향해 “지금은 하나님께서 당신을 기쁘게 받으신 희년이다.”

라고 선포하는 것이다. 비록 사람은 타락하여 하나님을 멀리 떠났지만,

하나님은 오히려 당신을 기다리시고, 당신이 돌아오기를 원하신다.

마치 고린도 후서 6장 2절에서,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라고 하는 것과 같다.


누가복음 15장은 아주 좋은 예이다.

그 아버지는 우연히 문에 나가서 보고 있었던 것이 아니고

날마다 집 문을 열어 놓고 문 입구에 서서 아들이 돌아오기를 소원하였다.

따라서 아들이 돌아오자마자 아버지는 멀리서도 그를 볼 수 있었고, 뿐만 아니라,

즉시 앞으로 달려 나가 그를 안고 입을 맞추었다. 이것이 바로 기쁘게 받으심이다.

탕자가 돌아온 그날이 바로 그의 희년, 곧 하나님이 사람을 받으시는 은혜의 해이다.

하나님은, 타락했다가 회개한 모든 탕자를 기쁘게 받으신다.


누가복음 15장의 비유는 우리 모두에게 익숙하다.

나는 어려서부터 탕자가 돌아온 이 이야기를 알고 있었다.

중국 사람의 말에 “탕자가 돌아온 것은 금고와도 바꾸지 못한다.”는 한마디가 있다.

많은 복음 전하는 자들이 이 비유를 말한다.


그러나 내가 여러분에게 진실로 진실로 말하지만,

사실상 누가복음에서 중요한 것은 탕자가 돌아온 것이 아니라

아버지가 아들을 기쁘게 받는 것과 아버지가 아들을 기쁘게 받는 희년이다.

부모 된 우리는 자녀들이 집을 나가는 것을 가장 두려워하는데,

그것은 가장 고통스러운 일이다. 당신은 혹시 독자(獨子)가 나갔다면 고통스럽겠지만,

만약 열 명이나 여덟 명의 자녀가 있는데 한 명이 나가버렸다면

별로 상관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할지 모른다. 그러나 사실상 부모 된 우리는

설령 열 두 명의 자녀가 있더라도, 하나하나가 모두 귀하고 사랑스러울 것이다.

아들이 집에서 늘 아버지를 성가시게 느껴 해변가의 나무 아래서 바람을 쐬려고 나갔다 하자.

아들이 바람 쐬러 나가 버릴 때 늙은 아버지는 마음속으로 견디기 힘들 것이다.


누가복음 15장의 주제는 돌아온 탕자가 아니라, 아버지가 아들이 돌아오기를 바라고,

아들을 기쁘게 받고, 아들을 안고 입을 맞춘 것이다.

이 이야기는 주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으로 다음과 같다. 한 아버지에게 두 아들이 있는데,

작은 아들은 어리석어서 아버지에게 기업의 분깃을 자기에게 돌려달라고 말했다.

아버지는 그에게 주었다. 그는 기업을 가지고 밖에 나가 허랑방탕하게

다 써 버리는 지경에 이르렀고, 어쩔 수 없이 한 사람을 의지하게 되었는데,

그 사람은 바로 사탄을 예표한다. 사탄은 바로 왕보다 더 대단하여 그를 돼지 치도록 보냈다.

바로는 기껏해야 당신으로 국고성을 짓게 했지만, 사탄은 사람을 돼지 치도록 보내버렸다.


성을 짓는 것은 돼지를 치는 것보다 훨씬 낫다. 다만 벽돌을 좀 굽고 땀을 흘리면 된다.

그러나 돼지를 치는 것은 돼지와 함께 뒹굴고, 돼지가 먹는 쥐엄 열매를 먹어야 하나

배를 채울 수 없다. 결국 탕자는 깨닫고 돌이켜 아버지 집으로 돌아왔다.


영적인 의미로 말하자면, 이 이야기는 바로 타락한 사람이

아버지 하나님의 집의 기업을 완전히 잃어버린 것을 묘사하고 있다.

그는 자신의 기업을 떠났고, 또한 몸을 팔아 노예가 되었다.

오늘날 모든 타락한 사람은 대통령이든 임금이든, 빈궁한 자이든 구걸하는 자이든,

어떤 행업(行業)을 하는 자이든, 사실상 모두 돼지 치는 자들이다.

무엇이 돼지를 치는 것인가? 바로 행하는 바가 깨끗하지 못한 것이다.


어떤 사람은 정치가 어둡다 하지만, 사실 어떤 업(業)이 어둡지 않은가?

어떤 사람은 정치가 첫째로 어둡고, 상업이 둘째로 어둡다고 말한다.

그러면 교육은 어둡지 않단 말인가? 박사 학위를 얻고 의사가 되면 어둡지 않단 말인가?

모든 것이 다 어둡다. 모든 사람이 돼지를 치고 있다.

돼지를 친다는 것의 가장 두드러진 의미는 더럽다는 것인데,

곧 더러운 일을 하는 것을 말한다.


오늘 사회 가운데 어떤 것 하나 뇌물을 주지 않는 것이 있는가?

또 어떤 것 하나 뇌물을 받지 않는 것이 있는가? 당신이 만약 뇌물을 주지 않는다면

길이 트이지 않는다. 누군가가 번 돈 중에 절대적으로 깨끗한 것이 있는가?

주 예수님은 돈에 이름을 하나 붙이셨는데, 곧 ‘불의의 마몬(mammon)’이다(눅 16:9, 원문 참조).

왜냐하면 돈이란 물건은 그 본질이 불의하기 때문이다. 당신은 의로울지도 모르지만,

돈을 벌려고 하기만 하면 당신은 바로 돼지를 치게 되고 더러운 일을 하게 된다.


그러면 당신은 아마, 그렇다면 이후로는 책을 읽을 필요도 없고,

일할 필요도 없다고 말할지 모른다. 내 말은 그런 의미가 아니다. 사람은 세상에서

실업자가 되거나 빈둥거리지 않기 위해 어찌하든 일을 해야 한다.

일하지 않고 어떻게 밥을 먹을 수 있겠는가? 내 요점은 다음과 같다.

즉, 이 이야기는 일단 타락한 사람이 하나님을 떠나면 돼지를 치러 감을 묘사한다는 것이다.

그가 어떤 일을 하든지, 그가 하나님을 떠나기만 하면 곧 돼지를 치는 것이다.


여러분은 한 번 깊이 생각해 보라. 당신이 일을 할 때 깨끗한가?

사회에서 일을 하는 것은 모두 돼지우리에서 뒹구는 것으로, 다만 어떤 사람은

좀 좋은 쥐엄 열매를 먹고 어떤 사람은 좀 못한 쥐엄 열매를 먹는 것뿐이다.

그러나 모두 돼지를 치고 있고 모두 쥐엄 열매를 먹고 있는 것이다.


이 탕자는 생각해 보면서 자문한다. 내가 왜 이런 일을 하는가?

내 아버지는 얼마나 부요하신데,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이것이 바로 죄인의 회개이다.

그러나 죄인이 회개한 후, 그의 관념은 집으로 돌아가 일을 하는 것이다.

그래서 곧이어,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눅 15:18-19)라고 말했다.


그는 일어나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 이렇게 말하려고 준비했다.

그러나 아버지는 이러한 말을 듣는 것을 기뻐하지 않고,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그의 말을 중단시키고 즉시 하인에게 명하여 말하기를,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22-23절)라고 했다.


그 살찐 송아지는 그리스도를 예표하고, 그리스도는 바로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살찐 송아지가 되시며, 회개하고 돌아온

우리 탕자들에게 누림을 주신다. 우리로 말하면, 이것이 바로 희년이다.


따라서 누가복음 15장은 누가복음 4장에 있는 희년의 예(例)이다.

탕자는 기업을 팔아버렸고, 자신의 몸도 팔아버렸다. 어느 날 그가

기업으로 돌아왔고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왔으므로, 그것이 바로 희년이요, 자유이다.

즉, 모든 것이 생각대로 응하고 만사가 뜻대로 되는 것이다.

집에는 누림이 있고 먹고 마시는 것이 있을 뿐, 수고하는 것이 없다.


그러므로 레위기 25장에서는, 희년의 때에 파종하지 말고 거두지 말고

다만 먹고 마시라고 말한다. 파종하는 것도 없고 거두는 것도 없다.

다만 먹고 누리는 것이 있을 뿐이다. 땅의 소출을 먹고자 한다면,

하나님이 당신에게 주시는 것을 먹으면 되고, 수고할 필요가 없다.

이것이 바로 누가복음 15장에서 아버지가 아들이 품꾼이 되겠다고 하는

말을 듣지 않은 이유이다. 아버지는 그에게 살찐 송아지를 주면서 먹고 마시고 누리게 했다.

여기에 자격이 있는가의 문제가 없고, 모든 것에 자격이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내가 너를 기쁘게 받는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희년은 바로 하나님이 사람을 기쁘게 받으시는 연대(年代)요,

하나님이 사람을 기쁘게 받으시는 때이다. 이것이 바로 누가복음 15장에서

아버지가 돌아온 탕자를 기쁘게 받으신 것이 가리키는바 참된 희년이다.


사랑하는 형제자매들이여, 성경에서 희년은 복음의 시대요, 바로 오늘이다.

당신이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이켜 주 예수님을 영접하면 당신은 속에서

참으로 하나님을 얻게 되며, 이것이 바로 당신의 희년의 시작이다.

이 날부터 당신의 전 생애가 희년이며, 영원토록 희년이다.

당신은 계속해서 하나님이 당신의 기업이 되심을 누릴 수 있다. 주께 감사와 찬양을 드린다.

나는 당신의 희년이 갈수록 풍성하고 영원까지 지속될 것이라 믿는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희년의 기업이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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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강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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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이야기는 바로 타락한 사람이
아버지 하나님의 집의 기업을 완전히 잃어버린 것을 묘사하고 있다.
그는 자신의 기업을 떠났고, 또한 몸을 팔아 노예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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