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의 용도
[사랑의 교통]
청명한빛 2012-03-29 , 조회 (697) , 추천 (0) , 스크랩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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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일의 용도 

칠 일의 첫날의 용도에 관하여 성경은 특별히 세 가지를 중요시한다. 첫째는 바로 시편 118 24절에서 언급한바,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이 칠 일의 첫날에 마땅히 가져야 할 태도인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다. 우리 주님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셨다. 주님은 첫날에 이것을 제자들에게 나타내시고 그들과 함께 모이셨다. 오순절날 성령의 강림하심도 칠 일의 첫날이었다. 건축자의 버린 돌이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다는 것은 원래 주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고 부활하신 것을 가리킨다. 유대인의 버림은 곧 건축자의 버림이다 주 예수님의 부활은 곧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시는 것이다 이것은 여호와께서 정하신 날이므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은 자연스런 결과이다

둘째는 사도행전 20 7절에서 말한바, 『안식 후 첫날에 우리가 떡을 떼려 하여 모였더니』이다. 원문 문법에 의하면 여기의 「안식 후 첫날」은 어느 칠 일의 첫날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그 뜻은 칠 일의 첫날마다 떡을 떼려 모였다는 것이다 당시 모든 교회들은 칠 일의 첫날에 자연스럽게 주님을 기념하기 위하여 떡을 떼려고 모였다. 칠 일의 첫날보다 더 좋은 날이 어디 있을까? 칠 일의 첫날은 우리 주님이 죽고 부활하신 날이다. 칠 일의 첫날은 우리 주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날이다. 칠 일의 첫날은 우리가 주님을 만나는 날이다 칠 일의 첫날에 우리가 반드시 해야 할 일은 주님을 기념하는 것이다. 이 날은 주님이 택하신 날이다. 우리는 한 주의 첫날에 먼저 주님 앞에 나아가야 한다. 주일은 칠 일의 첫날이다(보통 말하는 월요일은 사실 칠 일의 둘째 날이다). 우리는 칠 일의 첫날에 주님을 만나야 한다

떡을 떼는 것에는 성경에 두 가지 의미가 있는데, 하나는 주님을 기념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우리가 하나님의 모든 자녀들과 교통을 갖는 것이다. 하나는 우리가 하나님과 교통이 있다는 것을 나타내고 또 하나는 우리가 주의 몸 곧 교회와 교통을 갖는다는 것을 나타낸다. 매주일은 우리가 주님과 교통하는 가장 좋은 날이요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들과 교통하는 가장 좋은 날이기도 하다. 이 땅에서 우리는 시간과 공간의 제한을 받기 때문에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과 교통을 갖고 그들과 악수할 수가 없다. 그러나 주일마다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은 다 한 떡을 대한다 어디에 있든지 하나님의 자녀들은 다 한 떡을 대하기 때문에 우리는 이 한 떡 안에서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과 교통을 갖는다. 여기서우리는 우리 주님을 만날 뿐 아니라 모든 형제 자매들도 만난다 그 집회에서 당신은 함께 떡을 떼는 형제 자매들과 교통을 가질 뿐 아니라 동시에 손으로 그 떡을 만지는 모든 사람들과도 교통을 갖는다. 이 날에 세상 천천만만의 그리스도인의 손은 다 그 한 떡을 만진다. 『떡이 하나요 많은 우리가 한 몸이니』(고전 10:17). 우리는 함께 떡을 떼며 떡 안에서 교통을 갖는다

새로 믿은 형제 자매들은 하나님의 모든 자녀들과 간격 없기를 배워야 한다. 믿을 때부터 사랑을 배우고 용서를 배워야 한다 만일 당신이 사랑과 용서를 배우지 않는다면 이 한 떡을 만질 수 없다. 당신이 미워하고 간격을 둘 수 있는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도 없다. 행위에 있어서나(고전 5:11) 진리에 있어서(요이 7-11) 문제가 있는 사람을 쫓아내야 하는 것을 제외하고 당신이 거절할 수 있는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도 없다. 모든 정상적인 하나님의 자녀와 교통을 가져야 한다. 우리는 거기서 주님을 기념하고 그분을 만지기 때문에 그분께 속한 사람들을 만지게 된다. 주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고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셨기 때문에 우리는 그분이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치 않을 수 없고 그분이 용서하신 사람을 용서하지 않을 수 없으며 그분이 사모하는 사람들을 사모하지 않을 수 없다. 주일은 주님이 정하신 날이고 우리 주님이 부활하신 날이기 때문에 칠 일의 첫날보다 더 좋은 날이 없다. 이 날에 우리가 함께 새 창조를 얻은 사람을 기억하는 건은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다

셋째로 고린도전서 16 1-2절을 보기로 한다. 『성도를 위하는 연보에 대하여는 내가 갈라디아 교회들에게 명한 것같이 너희도 그렇게 하라. 매주일 첫날에 너희 각 사람이 이를 얻은 대로 저축하여 두어서 내가 갈 때에 연보를 하지 앉게 하라』. 여기서 우리는 칠 일의 첫날에 해야 할 세번째 일을 볼 수 있다.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들에게 행하라고 한 것을 고린도 교회에게도 하도록 분부했다. 이것은 사도 시대에 칠 일의 첫날이 특별한 날이었음을 뚜렷이 볼 수 있다. 칠 일의 첫날에는 주님을 기념하기 위해 떡을 떼는 것이 있을 뿐 아니라 성도의 연보도 있다. 매주일 첫날에 각 사람은 자신이 이를 얻은 대로 저축하여 두었다가 주님께 드려야 한다. 이것은 매우 좋은 일이다. 한면으로는 떡을 떼고 다른 한면으로는 드린다. 한면으로 우리는 주님이 어떻게 우리를 위해 죽으셨는지를 기념하고 또 한면으로는 우리가 주님께 드리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 많이 받은 사람이 많이 드리기 마련이다. 이 많은 감사와 찬미와 함께 연보도 찬미의 제사로서 우리가 응당 드려야 할 제사이다( 13:16). 이렇게 하는 것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 주일에 재물을 드리는 것은 주님을 믿자마자 실행하기를 배워야 한다

우리는 아무렇게나 돈을 헌금함에 널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마땅히 집에서 미리 경건하게 계산하고 예비하여 봉투에 넣은 다음 헌금함에 넣어야 한다. 여기서 바울은 계획적으로 연보를 하고 미리 계산하여 연보해야 함을 보여 준다. 매주일 첫날은 자기의 이를 얻은 대로 저축하여 두었다가 주님께 다음과 같이 말해야 한다. 『주여, 당신이 내게 풍성히 주셨사오니 내가 얻은 것으로 당신께 드립니다.』 당신이 기쁘게 드릴 수 있는 어느 퍼센트를 정해야 한다. 많이 있으면 많이 드리고 적게 있으면 적게 드리라. 우리는 떡을 떼는 것이 엄숙한 일이고 연보도 엄숙한 일임을 알아야 한다.

주님은 한 주()에서 하루를 택하여 주일이라 부르셨다. 이렇게 하신 목적은 이 날에 우리가 주의 은혜를 잘 누리고 섬기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우리의 주일은 구약이 안식일과 다르다 안식일은 어떤 것을 할 수 없음을 중요시하기 때문에 주 예수님이 안식일에 병을 치료하고 귀신을 쫓아내셨을 때 유대인은 그분을 곤경에 빠뜨렸다. 그러나 우리치 주일은 근본적으로 안식일과 다른 것으로서 육신의 안식을 위한 것이나 일을 멈추기 위한 것이 아니다 우리에게는 무엇을 하고 안 하는 사상이 없어야 한다. 다른 날에 할 수 있는 것을 주일에도 할 수 있고 주일에 할 수 없는 것은 다른 날에도 할 수 없다. 성경은 우리에게, 주일에 달려갈 수 있는지, 물건을 살 수 있는지, 이것저것을 할 수 있는지 안식일과 같이 무엇을 지켜야 하는지를 말하지 않았다. 성경은 오히려 우리에게 수일에 즐거워하고 기뻐해야 한다고 말하며 전적으로 주님 앞에 나와서 은혜를 받고 주를 기념하고 섬기며 헌금하라고 알려 준다. 일생토록 우리는 주일을 구분하며 특별한 날로 삼아야 한다. 적어도 칠일의 첫날은 주를 위하여 모두 분별해야 한다. 이 날은 우리의 날이 아니라 「주일(主日)」이다. 이 시간은 우리의 시간이 아니라 주님의 시간이다. 이 날에 우리가 분주하든 휴식을 취하든 주님을 위해야 한다. 우리가 어떤 일을 하든 안 하든 주님을 위해야 한다. 이 날에는 안식일의 냄새가 전혀 없다. 이 날은 주님께 드리는 날이기 때문에 주일이라 한다

요한은 한마디 좋은 말을 했다. 『주의 날(주일)에 네가 성령에 감동하여』( 1:10). 많은 사람들이 『주일에 내가 감동하여』라고 말할 수 있기 바란다. 이 날이 성령이 교회를 감동시키는 날로 변하기 바란다. 이 날이 우리가 축복받는 날이기 바란다. 우리는 새로 믿은 형제 자매들이 처음부터 주일을 중요시하여 칠 일의 첫날을 주님께 드리며 주님께 『이 날은 당신의 날입니다.』라고 말할 수 있기 바란다 만일 젊었을 때부터 이렇게 행한다면 칠십 년이 지날 째에 적어도 십 년을 주님께 완전히 드릴 수 있게 된다. 이것은 교회에게 큰 축복이다 『주여! 이 날 나의 모든 시간을 당신을 위하여 사용하겠습니다. 즐겁고 기쁜 마음으로 떡을 떼며 당신을 기념합니다. 나의 모든 소유를 당신께 가져가 당신께 드립니다.』 만일 우리가 다 이렇게 할 수 있다면 하나님은 대대적으로 교회에게 복 주실 것이다.

 

부록―고대 교회에서의 주일에 대한 역사적 자료 

주일에 관하여 「사도의 가르침」(성경 외에 교회가 갖고 있는 첫 번째 책이다. 아마 주후 75년부터 70년 사이에 쓴 것이다. 최소한 계시록과 같은 시대일 것이다.)이라는 책에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매주일 여러분은 한 곳에 모여 떡을 떼며 감사하며 자기의 죄를 자백해야 한다. 이렇게 할 때 여러분이 드린 제사가 깨끗케 된다.』 여기에서 믿는이들이 주일에 모였다는 것을 볼 수 있다. 일세기 말엽에 믿는이들은 이렇게 행하였다.

 

사도 요한에게 이그나시우스(Ignatitus)라는 제자가 있었다. 그는 주후 30년에 태어나 주후107년에 순교하였다. 주후 100년 즈음에 그는 맥느시아 지방의 믿는이들에게 편지를 쓴 적이 있다. 이 편지 9장에서 그는 분명히 『고대의 가르침을 좇는 사람들(유대인들을 가리킴)은 이제 더 이상 안식일 곧 일곱째 날을 지킬 것이 아니라 주일을 지켜야 한다. 이는 우리의 생명이 그분과 함께 부활했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이것은 초대 교회가 안식일을 지키지 않고 주일을 지켰음을 보여 준다. 주후 120년 즈음에 바나바(성경의 바나바와 다름)가 쓴 서신 15장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우리는 즐거이 제 팔일 곧 주 예수님이 죽음에서 부활하신 날을 지킵니다.』 

또한 사람들이 변증가 저스틴(Justin)이라 부르는 유명한 한 교부가 있었다. 그는 주후 100년에 출생하여 주후 165년에 순교하였다 주후 138년에 그는 「변증서」라는 책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일요일 곧 칠일의 첫날에 도시나 시골에 사는 모든 사람들은 한 곳에 모여 사도들의 전기나 선지자들의 저서들을 읽었다. 시간이 나는 대로 읽었다. 읽는 사람이 다 읽은 후에는 인도하는 형제가 교훈의 말로 모든 이를 훈계하며 그 선한 일을 본받으라고 말했다. 후에 우리는 모두 일어나 기도했고 우리가 기도를 마친 후에는 주 인도자가 떡과 잔을 가지고 들어와 그 위에 기도와 감사를 하고 모든 회중은 동의하는 뜻으로 함께 「아멘」이라고 하였다. 그리고는 풍족한 자나 기꺼이 드리고자 하는 자나 감사의 뜻으로 적절한 액수를 드렸다. 거두어들인 것은 책임자에게 맡기어 고아나 과부나 병자나 필요한 사람이나 사슬에 매인 사람이나 우리 가운데 모인 사람들을 돌보게 하였다. 바꾸어 말해서 궁핍한 모든 사람들을 돌보게 한 것이다. 일요일은 평소에 우리가 모이는 날이다. 이는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날에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셨기 때문이다. 그분은 토요일 전날에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토요일 다음날인 일요일에 그의 사도와 제자들에게 나타나사 이 일을 가르치셨다. 오늘날우리가 이 일을 여러분에게 쓰니 고려하기 바란다.』 또 한 군데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죄악과 허물 가운데에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할례를 받았다. 그분은 칠 일의 첫날에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셨다. 그러므로 이 날은 모든 날 중에 가장 중요한 날과 첫째 날로 변했다.』 

주후 170년 사데 교회에 멜리토(Melito)라 이름하는 한 교부가 있었다 그가 쓴 서신에도 다음과 같은 한마디가 있다. 『오늘 우리는 주의 부활하신 날을 지냈습니다. 이 날우리는 많은 서신들을 읽었습니다.』 

주후 194년 알렉산드리아에 클레멘트(Clement)라 이름하는 한 유명한 교부가 있었다. 그는 『오늘날 제 칠일은 평상시의 일하는 날이 되었다.』고 말했으며, 또 이어서 『그러나 우리는 주일을 마땅히 지켜야 한다.』고 말했다

주후 200년 때에 터툴리안(Tertulian)은 말하기를, 『일요일에 우리는 즐겁다. 우리는 아무 방해와 염려없이 이 날 곧 주님이 부활하신 날을 지킨다.』 그 때부터 주일을 지키는 것은 태양을 숭배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었다. 그러므로 터툴리안은 그들에게 답변하기를, 『일요일에 우기는 즐겁고 태양을 숭배하지 않는다. 우리는 토요일에 게으르고 연회를 즐기는 사람들과 다르다.』고 했다

오리겐(Origen)은 교부 중에 유명한 사람으로서 알렉산드리아의 유명한 신학자이다. 그는 『주일을 지키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완전한 표시이다.』라고 말했다.

어떤 사람은 고대 믿는이들이 안식일을 지켰다가 4세기에 와서 콘스탄틴(Constantine)에 의해 칠 일의 첫날로 고쳐졌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 말은 사실과 일치되지 않는다. 콘스탄틴은 이 날을 고친 적이 없고 교회가 계속 주일을 지켰기 때문에 이 사실을 시인했을 따름이다. 주후 313년 이전에 그리스도인들은 핍박을 받았었다. 주후 313년이 피자 콘스탄틴은 난국을 타개하여 미란 지방에서 그리스도인을 핍박하지 말라는 조서를 내렸다. 주후 321년에 콘스탄틴은 또다시 두번째 조서를 내리고 이렇게 말했다. 『일요일에 도시에 거하는 관원들이나 백성들은 마땅히 쉬어야 하고 모든 일을 멈춰야 한다.』 이 조서의 시작에서 끝까지 콘스탄틴은 안식일이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고 다만 칠 일의 첫날이 교회의 날임을 인정했다.

  이상의 자료에서 우리는 사도 시대에나 교회의 교부 때에나 대대로 모두 주일을 지킨 것을 알 수 있다.

[워치만 니 전집 3집 제2권에서 발췌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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