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의 행정과 말씀의 사역(요약-01)-펀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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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좋아 , 2012-03-30 , 조회 (215) , 추천 (0) , 반대 (0), 스크랩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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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의 행정과 말씀의 사역 

1.교회의 건축 
2.교회의 행정과 말씀의 사역에 있어서의 어려움 
3.봉사를 할때 허무는 일을 하지 않음. 
4.요한복음14장에 있는 건축의 의미에 관하여 
5.요한복음 17장에 있는 하나 
6.사랑으로 건축하는것과 사람에 대해 인식함. 
7. 교회를 건축하려면 절대적인 헌신이 필요함. 
8. 교회를 건축하려면 일에 대해 아는것이 필요함. 
9. 건축의 의미는 하나님께서 사람위에 그분의 권위를 세우시는 것임. 
10.말씀의 자료를 선택함 
11.말씀의 사역의 중요성과 위임. 
12. 말씀은 사람에게 공급하는데 중점이 있고,행정은 사람을 건축하는데에 중점이 있음. 
13.교회 건축의 터 
14. 교회의 터를 회복함. 

이 책은 주님의 종 위트니스리라는 리 형제님이 1957년 9월 타이베이에서 봉사집회를 인도하면서 전한 메세지들을 모든것이다. 
제1장 
교회의 건축 
     하나님의 마음의 갈망은 교회의 건축을 회복하는것임. 
-건축을 온전하게 함으로써 번역! 
      성도들이 건축되어 영적인 성전이 됨 
건축하다(build up)을 온전케하다(edify)번역한다면 교육하다라는 의미는 있지만 건축하다라는 의미는 갖지못한다.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건축은 개인이 온전하게 되는것뿐아니라 모든사람들이 함께 건축되는것을 포함.개인적인 측면에서는 온전하게 되는것이 필요하지만,단체적인 측면에서 보면 반듯시 건축이 있어야한다. 
     그리스도의 몸을 건축함 
건축하다와 집은 헬라어에서 동일한 어원에서 나온말인데,건축하다는것은 모든 성도를 하나의 집으로 건축하다는것이다.영적인 표현을 빌린다면 한몸으로 건축되는것이다.우리의 물질적인 몸은 집으로 비유되는데 고후5:1우리의 몸이 장막으로 불리는 일시적인 집으로도 말한다.장래 우리가 얻게 될 변형된 몸은 하나님으로 부터 온집이고 하늘들위에 있는 영원한집이다. 
교회는 한방면에서 하나님의 집이고(에2:22)다른 한 방면에서는 그리스도의 몸이다.주 예수님은 유대인들에게 "여러분이 이 성전을 허십시오 
그러면 내가 삼일만에 다시 세울 것입니다."(요2:19)만일 교회가 단지 몸일뿐이라면 어떤 사람들은 건축이 필요하지 않을것이라고 여길것이지만,이 몸은 집이기 때문에 건축되는 것이 필요하다.성경은 우리가 영적인 집으로 건축된는것을 말할뿐 아니라(베전2:5) 그 분 안에서 건축되어 영안에 있는 하나님의 거처가 되고 있으며 (엡2:22)더 나아가 그리스도의 몸으로 건축된다고 말한다.(엡4:12)우리가 몸이 집이라는것을 이해 못한다면 "몸이 건축될때 필요가 있느냐?라는 말에 현혹될수 있을것 
     신약에서의 건축 
엡4:11-12,어떤 사람은 사도로 어떤 사람은 신언자로,어떤 사람들은 복음전하는자로,어떤 사람들은 목자,교사로 주셨습니다.이것은 성도들을 온전하게 하여 그 사역의 일을 하려는것.그리스도의 몸을 건축하려는것 
베전2:5,"살아있는 돌들로 영적인 집으로 건축"건축할때 반듯시 금과 은과 보석으로 건축.어떤사람이 세상을 떠날때 그는 몸을 벗는것이며 땅위에 있는 그의 집을 떠나는것이다.이시대에서 하나님의 일은 바로 그분 자신을 위해 하나의 거처를 건축하는것이다. 
     교회의 건축은 바로 새예루살렘의 건축임 
새예루살렘이 바로 하나님의 거처라는 의미.교회와 새예루살렘,이 둘은 하나이다.이시대의 하나님의 일의 중심 결과와 최종적인 목적은 바로 그분 자신을 위해 한처소를 건축하는것이다.초기에는 집이지만 성숙된후에는 성이되는데,그 성은 바로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과 함께하시는것이며 그분은 사람과 함께 거하실 것이다.(계21:3) 
     하나님의 중심적인 일은 바로 건축임 
바울은 건축에 대한 분명한 이상을 갖고 있었기에 "나는 지혜로운 최고의 건축자로서 기초를 놓았고,다른 사람은 그 위에 건축합니다.그러나 각 사람은 자기가 어떻게 건축하고 있는지 살펴보십시오"(고3:10) 
건축의 방법과 건축의 재료,건축의 결과! 
     교회건축의 열쇠-교회를 돌보는것과 말씀의 사역 
교회의 건축은 교회의 행정과 말씀의 사역에 달려있다.고전14:1,"영적인 은사들을 간절히 사모하되,특별히 신언을 하도록 하십시오" 
교회건축에 가장 큰 은사가 신언인데,이는 말씀의 사역의 문제이다.말씀공급뿐아니라 교회의 행정도 필요하다는것을 보여주고 있다.교회행정의 책임은 특별히 장로들에게 있다.교회가 행정을 필요로 하는 이유는 황폐함과 무질서때문이다.교회의 행정에 관한 구체적으로 서술하고 있는곳이 디모데후서,디도서,그것은 그 당시 교회가 황폐해졌기때문이다.우리가 성경의 원칙을 안다면 성령의 뜻을 이해 할것이다.딤후2:2,그대는 많은 주인들 앞에서 나에게 들은것을 다른사람들을 가르칠 자격이 있는 신실한 사람들에게 맡기십시오."말씀의 사역과 교회의 행정!이 둘 모두는 교회의 건축을 위해 있다.은사의 방면은 신언자들이 말씀 전하는것으로 대표되고,직분의 방면은 장로들이 건축하고 행정을 수행하는것으로 대표된다. 
     행정과 말씀의 원칙을 배움 
     사람은 기본조건임 
나의 어떠함을 알고,처리되어야하며,다만 외적으로 바쁘게 움직이는것만으로는 부족하며,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내적인 건축이라는 사실을 보아야한다. 
     사람이 처리 받은 후에야 하나님의 건축이 이루어짐 
오늘날 하나님께서 관심사항은 건축이며,건축은 전적으로 우리기업 사람의 상태가 어떠한지에 달려있다.우리 모두가 주님앞에 조용히 나아가 주님의 빛 비추심과 말씀하심을 얻게 되기를 바란다. 

제2장 
교회의 행정과 말씀의 사역에 있어서의 어려움 
     1.가장 큰 어려움-부담의 결핍이다. 
부담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고 부담에 주의하지 않는 것이다. 
장로들은 교회의 행정을 수행한다고 말하겠지만 부담이 없이 행정을 수행할것이고,형제들은 말씀을 수행하지만 부담없이 말씀을 전할수있다. 
문제는 그일을 효과적으로 했느냐에 있으며,사람들의 중심을 만졌느냐에 있다. 
예를들어 집회에서 말씀을 전한다고하자.그럴때 당신은 그들에게 무엇을 말해줄것인지,그들이 듣고 난후에 어떤 결과가 산출될것인지 고려해야한다. 
이것은 말씀을 잘 전하느냐가 아니고,감동을 받았느냐가 아니고,조리있게 이야기 했는가가 아니고,문제는 사람들이 듣고 난뒤 어떤 결과를 산출했는냐이다.만일 그들이 구원을 받지 않았다면 감동시키는것이 아닌 구원을 받도록하는것이고,구원받았지만,주님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주님이 사랑스러워지는 부담을 만들어야 하며,주님을 사랑하지만 자신을 내어드리지 않는다면 그들을 주님께 내어드리며 주님의 처리를 받아드리도록 부담을 짊어져야 한다.말씀의 사역에 부담이 없다면 그것 또한 하나님께 죄를 범하는것이며 하나님의 눈에 그것이 바로 죄이다. 
     말씀의 사역에 있어서 부담을 받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함. 
구약에서 선지자가 하나님을 대신하여 말할때 중국어는 이를 "묻시를 얻다"라고 번역.이 단어는 부담이 생겼다라는 의미이다. 
바울의 서신에서 우리는 그가 부담을 받은 사람이라는것을 분명히 볼수 있다.그는 하나님 앞에서 부담을 받아  이 교회에 대한 책임과 위임을 가지고 있었다.(고전5:1-13)그는 교리를 말하지 않고,부담을 가지고 교통했기때문에 사람들의 느낌을 만질수있었다. 
3백4백 명의 사람들을 대할때 그들에게 무엇을 주어야 하는지를 알아야 하는 책임이 있다.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무엇을 말해야하는지를  모두 받아야 하는 부담이있다. 

효과적인 말씀을 전하려면 먼저 사람들의 상태로 인한 간절함을 가져 
주님 앞에서 무릎꿇고 긴 기간동안 영혼들을 위해 눈물을 흘리며 애통해했다.그러므로 그 말씀은 모두 살아 있었고 효능이 있었다. 

     부담있는 봉사 
부담이 너무 결여되어 있다.부담이라는 것은 반드시 정해놓은 목표에 도달하겠다는 것이고 반드시 어떤 상태에 이르게 하겠다는 것이다. 
무엇을 가리켜서 부담이 없다는것인가?일을 하기는 하지만 잘 하든 못하던 상관하지 않으며 성과가 있든 없든 대의에 않는것이다.이러한 상태가 부담이다. 
     책임때문에 하는 봉사와 부담때문에 하는 봉사를 분별함. 
진정으로 부담을 가지고 일하는방식은 목표를 가지고 일하는것이다. 
올해 4천만원 수익목표라면 내년말에는 8천만원을 수익목표로해야한다.올해20%의 고객확보를 목표로 하고 내년에는 80%의 고객 확보를 목표로 해야 한다.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부담을 가져야 한다. 
     부담있는 봉사를 할때 "자아"가 처리받게됨 
어떤 학생이 공부를 할때 
오늘날 교회의 상황은 단지 책임감때문에 일하는 것 같다.이것은 마치 대기업에 고용된 사람들이 아무 부담도 갖지 않고 일하는 것과 흡사하다.이것은 매우 위험한 상태이다.이 때문에 우리는 주의 인재를 잃어버릴 것이다. 
     2.두번째 어려움-동역의 느낌이 없음 
각 개인들의 능력은 뛰어나지만 영안에서는 동역의 느낌이 없다는것이다.이것은 마치 다른사람이 없어도 혼자서도 완성할수있는것이다.배우고자하는영이 부족하고 도움을 필요로 하는 영이 부족하다.동역이란 나에게 당신이 없어서는 안되고 당신이 필요하다고 느끼며,당신도 내가 필요하다고 느끼는것이다. 
1)가장 심한 교만 
어떤사람은 독립적이고 다른사람의 도움이 필요하지 않은것 같다.이것은 매우 위험하고 가장 교만한것이다.정상적인 상황이라면,네명의 형제들이 동역자의 집에 거하면서 서로 굳게 의지하며 살아야한다.다른 세련미가 없이는 살아간다 없을것이라는 느낌을 주어야한다. 어떤 사람은 동역을 거추장스러운것으로 여기며 동역하는 사람이 없으면 더 잘할수 있다고 느낀다.두려운 것은 이러한 상황은 결코 드러나지않고 감추어져 있다는것이다.우피는 마땅히 우리가 가진능력을 겸손하게 다른사람에게 공급해야하고 우리가 가진 모든 총명 또한 합당한 방식 안에서 동역가운데 두어야한다. 
2)몸과 생명 안에있는 교통과 동역을 필요로함 
무엇을 가르켜 몸을 본것이라고 말하는가?몸을 본 가장 높은 느낌은 더 이상 단독적이 될수 없는것이고,절박하게 몸을 필요로 하며 형제 자매들을 필요로 하느것이다.현재 우리의 동역은 사무적이고 기계적으로 일하는 것 같다.단체나 기관에서 사무를 보거나,기계가 움직이는것만으로는 같아서 내적인 생명의 교통의 냄새는 너무나 결여되어있다. 
3)동역이 부족하게 되면 쉽게 서로 탓하기 됨 
만약 동역이 부족하다면 다른사람이 한것을 비방할것이다.설령 겉으로는 말하지 않겠지만 속으로는 비방할것이다.봉사에 있어서 우리는 모든사람이 우리와 똑같이 되기를 바라서는 안된다.그러나 우리의 영안에서 서로 짊어지고 서로 의지하는 동역의 봉사가 부족하기 때문에 항상 다른 사람의 발꿈치를 밟는 상황이  생기게 된다.자신이 일을 시작하지않으면 그것으로 끝이지만 일단 시작하면 다른사람이 한일을 뒤집어버린다.당신이 어떤일을 참견하지 않을때는 가만 있지만 일단 참견하지 시작하면 반듯시 다른 사람이 잘못했다고 말한다.그 원인은 우리가 아무에게나 복종하지 않기때문이다.우리가 이러한 존재가 되고 우리의 사역과 일들이 이런 모습이라면 실로 어리석은 방식으로 일하는 사람이 될것이다. 
4)다른사람에게 자신과 똑같이 되기를 요구하지말며,다른사람이 한것을 존중해야함 
우리는 다른사람이 행한것을 존중하는 공과를 계속해서 배워야한다.우리가 열심을 말할때 다른사람의 고요함을 존중해야하고 내적으로 고요함 가운데서 주님과 연결되어야 한다는것을 말할때 겉으로 바쁘게 돌아다니는 사람을 책망해서는 안된다.만일 모든 사람이 당신과 같다면 오직 당신만 있고 교회는 없을것이다.교회는 다양하고 여러분들이 있으며 여러각도가 있다.손은 선의 모양이 있고,발은발의,귀는 귀의,눈은 눈의 몸에 있는 지체들은 각양각색이다.그러므로 다른 사람의 발꿈치를 밟지않는것을 배워야한다.다른 사란이 한것을 존중하고 그 위에 당신이 한것을 더할때 그 길이 바로 축복을 얻는 길이다.사람들에게 적극적으로는 공급해야하며,소극적인방면에서 다른 사람의 잘못을 말해서는 안된다. 
5)어떤방법을 고치지않음 
주님이 우리를 은혜로 대하셔서 우리가 이것이 생명의 문제이며 그 안에 파괴와 겸손등의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는것을 볼수있기를 원한다.동일한 목적에 도달하기 위해 일하면서 다른사람에게 자신의 방법을 사용하도록 강요하지 않는 사람은 가장 가장겸손한 사람이다.우라는 모두 주님을 사랑하며,주님을 위해 살기를 원하며 교회가 온전하게 되길 원하는데 이런한 목적은 모두 옳은것이다.그러나 방법에 있어서 반드시 우리의 방법을 따라야하는것은 아니다.당신이 영적인것을 가지고 있다면 그의 방법을 따라도 문제가 없으며 그가 영적인것을 가지고 있다면  당신의 방법을 따라도 문제가 없다.둘다 가능하며,어떤 방법에 속박 받아서는 안된다. 
6)몸의 느낌이 강해질때  봉사가운데서 건축을 가져옴 
형제들은 공과를 배워야하고 자아가 파쇄되어야하며,다른사람에게 양보해야하며 또한 다른사람들이 한것들을 존중해야한다.이렇게 삶에 몸의 느낌은 비로소 우리안에서 지속적으로 강건하게되며,우리안에서 건축이 산출될수있을것이다. 
장로들이 요한복음을 추구하자고 했지만,지역책임자가 그 책이 너무 길다고말하고 장로들은 그것을 받아들일수 없는 상황이라면 그 동역의 느낌은 너무나 형편없는것이다. 일단 동역의 느낌이 약화되면  더 이상 몸의 건축이 강화되기를 바랄수없다.몸의 동역 안에서 각 사람이 기능을 발휘하고 다른 사람이 행한것을 존중해야한다.다른사람이 한것을 밟지 않을 뿐만아니라 오히려 자신이 한것을 다른사람이 한것과 조화시켜 그리스도의 몸에 공급이 되게 하며 ,몸이 아무런 손상을 받지 않게 해야한다.이렇게 할때,몸의 동역의 느낌은 갈수록 달콤하며 몸의 건축도 더 견실하게 될것이다. 

제3장 
봉사를 할 때 허무는 일을 하지 않음. 
1.봉사는 마땅히 건축을 산출해야 함. 
 정상적인 상황에서는 일이 더 많아질수록 더 많이 건축된어야할것이나,주의해야 할 한가지는 우리가 일할수 있지만,건축과 관계없을 수 있다.우리가 그분의 빛가운데 있다면 우리가 죄인을 구원할수있고,성도들을 온전하게 할수있지만,교회를 건축하는것이 아닐수있다는 것을 분명히 볼 수 있다. 
오늘 기독교 안에 있는 수많은 일들이 하나님의 건축의 일을 허물어 뜨린다.교회안에서 하나님의 건축하시는 일을 가장 심각하게 파괴하는것은 이방인으로 부터 오는 박해나 반대 혹은 어려움이 아니라 기독교안에서 열심을 가지고 하는 많은 일들이다.그러한 일들은 악의나 나쁜 마음,혹은 잘못에서 나온것이 아니며,기 목적은 기본적으로 좋은 것이며 모두가 죄인을 구원하고 성도들을 온전하게 하기위한 것이다.그러나 그러한 일들은 교회를 건축사들이 도움이 되지 않는다. 

2.사탄의 계략은 봉사가운데서 허무는 일을 하는것임. 
하나님의 일을 하지만 하나님의 건축을 허무는것은 무슨 뜻인가? 
장로들은 온 교회가 다 요한복음을 추구하기로 결정하였지만 이 지역 책임자는 요한복음은 스물한장이나 되는 너무 긴 책이기때문에 사람들이 보기만해도 겁을 먹고 감히 성경을 추구하지않을 것이라고 생각하여 데살로니가전서를 추구하는것으로 바꾸었다.이것은 좋은 뜻에서 시작 하였지만 그 안에 많은 것을 포함하고 있는데,이는 그 형제 자신이 파쇄된적이 없으며,자신의 의견을 한쪽으로 내려놓는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는것을 말해준다.만일 이십여명의 지역 책임자들이 "장로들이 이렇게 일을 결정한 것은 옳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그들이 결정한것이 다 옳은것은 아닙니다."라고 말했다 하자.생각해보라.교회가 어떻게 전진하겠으며,그곳에 교회가 어떻게 건축될 수 있겠는가?"태풍이 불기 시작하면 더 이상 수습할 길이 없다."라는 중국의 속담과 같다.건축은 한 돌을 다른 돌 위에 쌓아가는것이므로 건축의 반대말은 무너뜨리는것이다.사탄은 당신의 일을 이용하여 파괴하는 일을 하고 있다. 

3.무너뜨리는 일은 성도들을 교회에서 멀어지게 하고 교회가운데 권위를 손상시킴. 
우리는 이 반년동안 우리의 일이 갈수록 결실을 맺었는지,아니면 갈수록 해체되는 방향으로 나아가는지 자문해볼 필요가있다.함께 봉사하는 우리들이 갈수록 마음이 한 곳으로 모였는가 아니면 갈수록 흩어졌는가?성도들의 마음이 구심점을 중심으로 모아지는것은 건축이고 흩어진다면 그 방향은 파괴를 향하는것이다.우리는 여기에서 교황처럼 장로들의 권위를 세우고자 하는것은 아니다.행정적인 권위가 있다면 누구의 수중에 있는가?그것이 항상 집회에 참석하는 천여명의 형제 자매들에게 있다면,라오디게아교회로 변질된것이다.반대로 그것이 교황노릇을 하는 한 사람의 수중에 있다면 천주교로 변질된것이다.지방교회의 행정은 장로들의 수중에 있다.장로들은 하나님 앞에 엎드려 하나님을 경외하고 ,두려워 떨며,교회의 행정을 수행하고,또 강화시키기를 배워야한다.그들은 틀릴것을 두려워하고,약화되는것을 두려워하고,우유부단한것을 두려워해야한다. 
사탄의 가장 심각한 계략은 바로 우리 가운데 기어들어와 성도들이 구심점을 잃게 하고 흩어지게 하는 일을 하는것이다.구심점을 잃게 하는 사탄의 계략은 의견을 가지고 소란을 피우거나,말다툼하게 하는것이 아니라,오히려 대부분은 사람의 호의나,선한 마음으로 허물어 뜨리는 일을 하게 하는것이다.이것이 대적의 계략이다. 

4.성경안에 있는 성령의 권위 
하나님은 그 분의 말씀을 통해 반드시 성령의 권위를 존중해야함을 우리에게 보여주신다.예를들어 예루살렘교회,선도하다 몇만,큰  교회!,그러나,바울과 바나바가 예루살렘에 이르렀을때 사행15장에 따르면 어떤 일을 결정할때,큰 집회를 열어 투표로 표결에  붙이는 방식으로 처리하지 않았다.한무리의 사도들과 장로들이 하나님 앞에서 앉아서,어떤이는 경험을 말하고,어떤이는 그들의 본 빛을 말하고,그러고 나서 야고보는 일어나 약간의 교통을 하는것을 본다.이것이 성경안에 있는 성령의 권위이다. 

5.죽음의 씨앗과 성도들을 구심점에서 멀어지게 하는  
 씨앗을 뿌리지 않음.  
만일 어떤 사람이 올바라지 않은 동기를 가지고,요한복음을 추구하고자 결정한 장로들에 대해 의문을 품게하고 이러한 느낌을 다른 지역 집회책임자나,소그룹책임자에게 교통한다면,이것은 죽음의 요소를 퍼트리는것이다.비록 그가 틀린것이 전혀 없는것 같고,장로들을 비방하거나 반대한적도 없지만,사람들과 이야기 할때 단지 "지방교회는 독재인가?"라는 느낌만 생기게 해도,그가 말을 하면 할수록 상황은 더욱 심하고,죽음의 씨앗과 죽음의 성분이 그곳에 뿌려지고,구심점을 잃게 하는 씨도 그곳에 뿌려진다. 

6.건축은 서로 부축하고 서로 공급하는것임. 
우리의 가장 큰 어려움은 우리 개개인이 총명하고 능력이 뛰어나 서로를 필요로 하지 않고 각자 자기의 일만 하며,또 일을 시작하면 다른 사람의 발등을 밟는다면 것이다.그러나 건축은 이와 같지 않다.참되게 건축된 사람은 한가지 상태와 한가지 느낌을 가지고 있는데,그것은 결코 단독적으로 행동할수 없고,형제 자매들이 없이는 아무것도 할수없음으로 그는 반드시 다른 사람을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그가 말씀을 전할때 그는 형제 자매들이 그를 위해 기도해주는 것을 필요로 하며,형제자매들이 영으로서 그를 부축하고 그를 공급하는것을 필요로한다.그 형제는 형제 자매가 없으면 아무것도 할수없는것같다.오늘 우리가운데서 이러한 영은 거의 찾아볼수없는것같다.말씀의 사역을 하는사람은 다른 사람의 기도를 필요로 하지 않고,사람들은 주축하는영이 없이 단지 말씀 전하는 사람이 어떻게 말하는 지를 보면서 비교만 하고 있다.이것은 우리가 가져서는 안될 영이다. 
건축을 무너뜨리고,성도들이 구심점을 잃게 만드는 씨앗이 이미 우리가운데 뿌려진것에 대해 형제들은 분명히 알고 있어야한다. 
당신이 행한것이 옳고 나와 저사람이 행한것이 옳으며 각자가 행한 모든것이 다 옳지만 모든것은 와해되고 버린다.이것이 사탄의 가장 교묘한 계략이다. 

7.참된 건축은 바로 '복종하는 것임' 
건축은 순종에 중점이 있지 않고 복종에 중점이 있다.만일 아내가 남편에게 복종하지 않고,남편이 아내에게 복종하지 않는다면 이 가정에는 건축이 없다.중대한 책임이 장로들에게 있음으로 자신이 연약하고,부정하기도 느낄지라도 그런 느낌을 개념이 말아야하며,두려워 하고 떨어야한다.만일 장로들이 이러한 태도를 견지하고,이러한 영을 가지고 있다면 이러한 영에서부터의 결정에 대해 우리는 반드시 복종하여야한다. 

8.건축의 공과를 배워 사람을 건축안으로이끌어 옴 
우리가 공과를 배운 사람이고,주님께 파쇄된적이 있으면,하나님의 건축이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이라면 우리가 인도하는 이들은 틀림없이 주님 앞에서 살아 있는 돌들로서 영적인 집으로 건축될것이다.(벧전2:5)우리 자신이 건축된 적이 없는 사람이라면 다른 사람을 건축하는것이다 일을 할 수 없고,복음을 전파하여 구원받은 사람이 많을수록 교회안에 의견이 많아지고,우리가 온전하게 한 사람이 많을수록 교회안에 관점들이 많아진다면 건축을 위한 돌들은 날마다 증가된다 모르나,집을 잘 건축할수없다.교회 가운데 건축이 있으려면 우리는 시간을 들여 이 돌들을 깨끗하게 해야한다.허무는것은 사탄의 가장 교활한 계략이다. 

9.봉사할때 말을 조심함으로, 
성도들을 구심점에서 멀어지게 하고  
건축을 무너뜨리는것이  들어오지 않도록 예방함. 
사례1)나는 형제들에게 함께 모이도록 서신을 보내지만,나의 아내에게 알려 주지 않는다.그러나 결과적으로 나의 아내는 다른 곳에 있는 자매로부터 이 소식을 알게된다.만일 당신이 편지를 받은 사람이라면 지정된 날짜에 오면되지 굳이 다른 사람에게 알려주랴 필기 있는가?이것은 무의미하며,쉽게 사탄에게 기회를 준다.내 안에 있는 한 가지 무거운 부담은 이렇게 집회를 소집하는것에 대하여 내 아내에게 알려줄수없다는것이다.이것은 매우 작은 일이지만,이로 인하여 허물어 뜨림과 성도들을 구심점을 잃게 만드는 상황이 초래된다. 
사례2)서양에서 온 손님을 접대하기 위하여 서양요리를 할수있는 요리사를 찾아 돈도 지불 그러나 도망간다 사건!이것을 서양에서 온 손님이 알고 자기집에 있는 요리사를 보내주겠다고 연락이 옴.그 소식이 어떻게 서양손님의 귀에까지 들어갔는가!설령 이러한 일들이 천건이 일어 났더라도 바깥으로 전해져 나가서는 안 된는 것이다.이렇게 말들이 퍼져 나가는것은 모두 허물어 뜨리는것이다.만일 우리가 주님의 교회를 건축하려면,이 일들에 있어서 주님께서 우리를 처리하시도록 해야한다. 
한방면에서 일하고 한방면에서 허물었다.일하는것은 있지만 건축은 없다.불복종하는것은 건축하지 않는것이고 건축을 받아들이지 않는것이며,허물어 뜨리는 것이다.(그 불복종의 영은 이미 우리가운데서 움직이기 시작했다.) 

결론. 
여러분들이 하는 일은 반드시 그 일을 통해 건축의 결과를 산출해야하며,이를 위하여 우리 몸에 있는 부정적인 수많은 요소들이 제거되고 처리되어야한다.나는 여러분에게 다만 한가지를 요청하는데,주님께 올바르고 자신의 헌신에 올바르기 바란다.반드시 여러분들의 일은 허무는 일이 아니라 건축하는 일이 되도록 해야하고 구심력을 갖게 해야지 중심에서 벗어나게 하는것이 되지 않도록 해야한다.이렇게 하기 위해서 우리는 주님 앞에서 공과를 깊이 배워야한다. 

제4장 
요한복음14장에 있는 건축의 의미에 관하여 

성경의 이부분은 우주 안에서 하나님께서 건축하시는 건축물에 대해 말하고 있다.그러므로 우리는 14장의 성경말씀을 예언으로 간주해서는 안된다. 
이장을 예언으로 해석하는 논조는 전적으로 형제회의 가르침에서 나온 것이다.형제회는 3절에서 주님께서 "내가 가서 여러분을 위하여 한곳을 예비하면,다시와서 여러분을 나에게로 영접하여,내가 있는곳에 여러분도 있게 하겠습니다."라고 말씀하신것에 근거하여 이장을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예언이라고 여겼다.그러나 이장은 형제회가 말하는 사상보다 더욱 깊고,더욱 높고,더욱 많은 내용을 포함한다.형제회는 3절의 말씀이 주 예수님께서 이 세상을 떠나 하늘로 가시면서 우리도 하늘로 인도하셔서 그분과 함께 있게 하시는것에 대하여 하신 말씀이라고 생각했다.이 사상은 결코 이 구절의 진정한 의미가 아니다. 

1.중심사상(하나님 안으로 믿고 또한 주님안으로 믿음.) 
1절은 "여러분은 마음에 근심하지 마십시오.하나님을 믿고 또 나를 믿으십시오."라고 말한다."여러분은...하나님 안으로 믿고 또 나를 믿으십시오."가 이장의 주제이다.헬라어 원문에는 '안으로'라는 글자가 ㅇ ㅣㅆ으므로,정확한 번역은"여러분은 ...하나님 안으로 믿고,또 대안으로 믿으십시오."이다. 이 안으로 라는 정치사는 헬라어에서 로마서6:3절의 "그리스도 예수님 안으로 침례를 받은"의 '안으로'와 동일하다.'안으로'라는 헬라어는 '에이스(eis)'인덱스,이 말은 사각형 상자가 있는데,한쪽면에 틈을 만들어 사각형상자 안으로 손을 밀어 넣는다는것을 의미. 
성경을 읽을때 가장 중요한것은 주제를 붙잡는것이며,요한복음14장의 주제는 '하나님 안으로 완전히 들어가는것이다.' 

2.주님께서 가신 것이 바로 오심임. 
2절에서 주님은 "나의 아버지 집에는 거할 곳이 많습니다.그렇지 않다면 내가 이미 여러분에게 말해 주었을것입니다.내가 가서 여러분을 위하여 한곳을 예비하겠습니다."라고 말씀하신다.1절은 "여러분은 하나님 안으로 믿으십시오."라고 말하고 있는데,이것은 하나님 안으로 들어가는 문제이다.2절에 "나의 아버지 집에"라고 말하는데,이것은 기묘한 전환점이다.주님의 가심이 바로 오심이라는 것을 의미한다.주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의미는 주님께서 그들을 위하여 한곳을 예비하러 가신으로 하신 말씀이 바로 그분이 그들에게 오시겠다는 것임을 말하는것이다. 

3.하나님은 사람을 통해 땅으로 오셨고, 
   사람은 주님을 통해 하나님과 연결됨 
주님은 3절 후반부에 "내가 있는곳에 여러분도 있도록 하겠습니다," 
주님이 말씀하신 '곳'은 무엇을 가르키는가?이곳은 장소를 가리키는것이 아니고 '주님안'과 '하나님안'을 가리킨다.주님은 지금 죽고,부활하셨으며,그 분이가신다는것은 하늘위로 가신것이 아니라 아버지 안으로 가신것이다.주님은 부활 하자 마자 아버지안으로 가셨다.주님께서 아버지안으로 가셨을뿐아니라 제자들도 아버지안으로 가게 하셨다.이것이 바로 "내가 있는곳에 여러분도 있도록하겠다"라고 하신 말씀의 의미이다. 
이어서 4절에서 주님은 "내가 어디로 가는지 여러분은 그 길을 압니다."라고 말씀하셨다. 
내가 믿기로 제자들이 그분이 어디로 가는지 몰랐을뿐 아니라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도 모르고 있다.5절에서 도마는 "주님이 어디로 가시는지 모르는데,.."도마의 질문을 볼때,어떤 장소로 여기는듯하다.주님은 즉시,내가 길이요.실재이요,생명이니,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로 가지 못한다.(6절) 
이 구절의 의미는 사람은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버지께로 올 수 없고,하나님을 접촉할 수 없다는 것이다.그러므로 주님께서 "내가 어디로 가는지"라고 말씀하실때 '어디'는 아버지를 가리킨다. 

4.사람이 하나님안에 있는것이 곧 하늘에 있는 것임. 
사람의 사상은 늘 하나님과 다르다. 
사람의 사상은 늘 하늘로 올라가거나,지옥으로 떨어지는 것과 같은 장소관념에 머물러있지만, 하나님의 사상은 장소의 문제에 있지않고 인격의 문제에 있다.우리의 사상은 하늘이나,땅이냐의 문제이지만,하나님의 사상은 하나님이냐,사람이냐의 문제이다.성경은 주예수님이 땅에 오신것에 중점을 두지 않고,주 예수님이 사람안에 오신것에 중점을 두고있다.주 예수님이 육체가 되어서 사람 안으로 오신것이 바로 땅으로 오신것이다.마찬가지로 사람이 하늘위로 가는것이 아니라 하나님 안으로 가는것이 바로 하늘위로 가는것이다.주 예수님께서 사람안으로 오지 않으셨다면 땅으로 오실수없고,주 예수님께서 땅으로 오시려면 반드시 사람안으로 오셔야한다.바꿔말한다면 예수님께서 오직 사람안으로 오셔야만 땅으로 오신것이고,마찬가지로 사람이 하나님안으로 간 것이 바로 하늘에 있는것이다.에베소서2:6,"예수님안에서...함께 앉히셨습니다."라고 말한다.우리가 어떻게 그분과 함께 앉을수있는가?그것은 우리가 그분 안에 있기때문에 가능하다.우리는 스스로 하늘위로 올라갈수없지만 그리스도 때에 있으면 바로 하늘에 있는것이다.이러한 사상위에서 우리는 철저한 관념의 전환을 가져야한다. 

5.하나님의 집은 하나님 자신임 
"내가 지금 아버지께로 가는데,이는 마치 내가 육체가 되어 사람안으로 왔던것처럼 이제 죽음과 부활을 통해 아버지 안으로 가는것입니다." 
주님안으로 믿는것과 하나님안으로 믿는 문제를 다루고 있다. 
주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은 사람을 하나님 안으로 데려갔고,하나님과 연결되기 하였다.사람이 하나님안으로 들어가는것이 바로 하늘의 영역 안으로 들어가는것이고,또한 하나님이 계신 그 영역안으로 들어가는것이다.요한복음14장을 시작할때 하나님을 언급하고,하나님의 집도 언급하느데,하나님 자신과 하나님의집은 영원히 나눌수없다. 
주 예수님께서 육체되신것은 아버지로부터 나오셔서 사람안으로 들어 가신것이다.그러나 그분이 사람으로부터 나오셔서 아버지안으로 다시 돌아가려는 죽음과 부활을 거쳐야한다.주님의 오심은 땅으로 오심의 문제가 아니라 사람안으로 오시는 문제이며,주님의 가심은 하늘로 가시는 문제가 아니라 아버지안으로 가시는 문제이다. 
"여러분이 나를 알았더라면,내 아버지도 알았을 것입니다.이제는 여러분이 내 아버지를 알고 있으며,그분을 이미 보았습니다.(요14:7) 
빌립은 주님께 "주님,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주소서."이에 예수님은"내가 여러분과 함께 있었는데,...나를 본사람은 아버지를 본 것인데,.."성령께서 여기에 깊은 의미!즉,장소의 관념에서 인격의 관념으로 완전히 전환 시켰다.그러므로 "하나님을 믿고,나를 믿으십시오."가 이 장의 주제이다. 
6.주님깨서 한 곳을 예비하러 가셨다는 것은그리스도의 원칙이  
확대되는것임. 
고전16:19,"여러분의 몸이 여러분 안에 계신 성령의 성전인것을 알지 못합니까?"성령의 성전,성령의 궁. 
에베소서2:21-22,우리가 "자람으로써,주님안에서 성전이 되고 있습니다....영안에 있는 하나님의 거처가 되고 있습니다." 
디전3:15,교회를 살아계신 하나님의 집이라고 말한다.집,성전,궁은 모두 하나님의 거처를가리켜 말한것으로 집이 성전이고,성전이 궁이고,궁이 바로 거쳐이다.우주 가운데 한가지 비밀이 있는데,이는 하나님의 거처가 장소의 문제에 중점을 둔것이 아니라 바로 인격의 문제에 중점을 두었다는것이다.오늘 하나님의 거처는 교회이고 구원받은 한무리의 사람들이며,그리스도의 원칙이 확대된다 한 무리이다.만약 우리가 이사상을 붙잡는다면 우주가운데서 하나님께서 무슨 일을 하시고자 하는지를 이해할수있을 것이다. 
오늘 하나님은 교회 안에 거하고 계시고,교회는 하나님의 집이다.그러므로 교회는 사람의 성분을 갖고 있을뿐 아니라 하나님의 성분을 가지고 있고,또한 하늘의 성분도 갖고 있다.오늘날 하나님께서 교회가운데 계실뿐 아니라 하늘도 교회가운데있다.그러므로 교회는 하나님과 사람의 연합이고,하늘과 땅이 연합된 실체이다. 
요한복음14:11-12,"내가 아버지안에 있고,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십니다.....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할뿐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일도 할것인데, 이것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기 때문이다."주님은 지금 아버지 안으로 가신다는것이고 또한 그분을 믿는 사람들을 아버지안으로 이끈다는것이다.여기에 확실히 인격의 문제가 있고,장소의 문제가 있다.오늘 우리가 본 빛은 두 방면 모두 갖고 있다.놀라운것은 하나님께서 사람과 함께 연합되신것이며 이를 통해 하늘의 성분이 땅에서 표현될수있는데,그것이 바로 새 예루살렘이다.새 예루살렘이 나타날때 새 예루살렘은 하나님과 사람이 연합된것일뿐 아니라 하늘도 그 안에 연합되어 있다.하늘의 광경과 성분이 있으며,땅에서 하나님을 표현할 것이다.우리는 여전히 이해 할 수 없다.장래 새하늘과 새땅에 이르렀을때,즉 때가 성숙하고 완전해졌을때 하나님은 완전히 사람과 연합될것이고 사람은 완전히 하나님안으로 들어갈것이다.이것이 바로 주 예수님이 요한복음 14장에서 한곳을 예비하러 간다는 말씀의 의미이다. 

7.건축은 하나님의 유일한 목표임.  
하나님은 온 우주가운데서 오직 하나의 건축위 일을 갖고 계신다. 
이 건축은 하나님과 사람이 함께 연합되는것인데,그 안에 하늘이 연합되었으며,하늘 또한 땅과 연결되었다. 
이건축의 일은 죄인들을 구원하여 그 분의 건축재료로 삼으시고,그런다음 이 죄인들을 온전케 하시고 그분 자신을 그들안으로 넣으신다.동시에 그 분은 하늘의 성분을 가지고 오셔서 하늘을 이 큰 연합안으로 넣으시는데,이 연합이 바로 그 분의 건축이며 이 연합을 통해 그 분이 사람을 거처로 삼으시고,사람이 그분을 거처로 삼게 되는 것이다. 
오늘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은 바로 우주가운데서 그 분 자신을 위해 거처를 건축하시는 것이다. 
분명히 보아야 할 것은 그분께서 죄인을 구원하시고,성도들을 온전케하는 것이 그분의 목적이 아니라는것이다.그분은 땅에서 하나의 건축을 얻으시기 위한 것이다.이 건축은 개인을 거처로 삼지않고 단체적인 사람을 거처로 삼는다.이 거처는 너무나 비밀스럽다.만일 우리가 이것을 붙잡는다면 더 많은 빛을 볼것이고,무엇이 새예루살렘인지!교회가 무엇인지 알게될것이다.요한복음에서 사도행전을 거쳐 서신서에 ,계속하여 하나님의 건축을 위한 돌에 대한 이야기를 볼수있다.사도행전4:11,그리스도가 모퉁이의 머리돌이라고 하며,에베소서2:22,우리가 살아있는 돌들로서  그분안에서 함께 건축되어져 하나님의 거처가 되어간다.고전3:9,믿는이들이 하나님의 건축물,히브리서11:10,그가 하나님께서 설계하시고 건축하신,기초가 있는 성을 간절히 기다리다. 
하나님의 일의 목표는 전적으로 이 건축을 중심으로 하며 그 분은 계속해서 이 건축을 향해 나아가신다. 

제5장 
요한복음 17장에 있는 하나 

1.하나가 되는 과정 
요한복음 17장은 주 예수님의 기도이다.14-16장은 메세지이고,메세지 끝에 기도가 있다.14장에서 주님은 보혜사가 오실것이라고 하고,15장에서 포도나무를 말씀하셨고,16장에서 이 연결의 유일한 요소가 성령안에 있음을 보여준다. 
17:1,"아들을 영광스럽게 하서서 아들이 아버지를 영광스럽게 하도록 하여 주소서."주님은 한알의 밀알로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그분의 인성의 껍질이 깨뜨려져 그 분안에 있던 신성한 생명이 해방되어 많은 사람들에게 분배되며,또한 그 사람들안에서 표현될것임을 말씀하셨다.17:11,"나는 아버지께로 갑니다."가신은 오심을 가리킨다.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나의 말을 지킬것입니다.그러면 나의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실것이고, 우리가 그에게 가서 그와 함께 서로 거처를 정할것입니다.하나님이 사람의 거처가 되고,사람이 하나님의 거처가 되는것을 통해 하나가 있게 된다. 
이 하나는 사실상 건축의 결과이다. 

2.건축의 과정을 거쳐야만 하나가 있음 
예를들면,물질적인집은 모든 재료들이 하나 된 결과이다.어떻게 이 하나가 있을 수 있는가? 그 이유는 건축의 과정을 거쳤기 때문이다. 
모든 재료가 건축의 과정을 거치면 하나가 된다.영적인 건축도 이와 같아서 원칙은 동일하다. 
에베소서4장은 하나님께서 이은사들을 교회에 주셨다고 말씀하시면서 사도이든 신언자이든 복음전하는 자이든,목자든,교사든,모두 그리스도의 몸을 건축하기 위한 것으로 우리가 믿음과 하나님의 아들에 대한 온전한 지식에서의 하나에 이르게 하려는 것이라고 말씀하신다.이 하나는 바로 건축의 결과이다. 
우리는 우리가 어느정도까지 건축되었는지에 따라 그 만큼의 하나가 있다는 사실을 반드시 보아야한다.예를들어 타이베이에 수천명의 형제 자매들이 의견이 없고 다툼도 없다고하자.그러나 우리는 이것이 하나이다 라고 말할수없다.참된 하나는 건축에서 나온다.우리는 참외가 봉사하고 있다고하여 하나 되었다고 말할수없다 .우리는 분쟁이 없다고 완전히 하나된것은 아니다.분쟁이 없다는것이 하나의 일이고,하나가 되는 것은 별개의 일이다.하나가 있으려면,반드시 당신과 내가 하나님에 의해 건축되어져야한다.이런 까닳으로 우리는 교회를 벗어날수없으며,건축된 형제 자매들을 떠날수 없다. 

3.하나님의 축복은 오직 하나에 있음 
우리는 교회에 대한 하나님의 축복이 하나에 있음을 보아야한다.이 하나를 가지려면 반드시 한가지 선결조건이 있는데,그것은 건축을 거쳐야 한다는 것이다. 
예를들어 자동차는 가속 페달을 밟기만 하면 빨리 달리는데,이는 그것이 건축되어 있기때문이다.만일 차의 부품을 모두 분해하여 도금 처리를 하면 부품들은 이전보다 좋아 보이겠지만 차는 움직일수가 없는데,이는 차가 분해되었기 때문이다.건축이 없는것이면 아무런 쓸모도 없다.건축이 없기때문에 전진할 동력이없다. 
마태복음18장에서 주님은"다시 내가 진실로 여러분에게 말합니다.여러분 가운데 두 사람이 땅에서 무엇을구하던지 마음을 같이 하면,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들을 위하여 다 이루어 주실것이다.왜냐하면 두사람이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가운데 있기 때문이다.(19-20)라고 말씀하셨다.하나님은 건축을 원하신다.건축이 있는곳에 하나가 있고,하나가. 있는곳에 참된것이 있다.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것이다. 

4.어려움과 문제는 주로 개인주의에서 나옴. 
고통스러운 한가지는 형제들이 전한 메세지를 듣고와서 "형제님 아무개 형제가 전한 메세지는 누군가를 공격하는 메세지가 아닌가요?"메세지를 전하는것은 온전하게 함이지,이러한 인상을 주는것이 아니다.다른 사람을 공격하는 말을 할 필요가 없다.기억해야될것은 우리가 다른 사람을 도우면서 다른 의도를 가지고 있다면 우리는 건축의 일을 하는것이 아니라는 것이다.건축의 말을 하기 위하여 우리 자신이 파쇄되어야 한다.우리는 반드시 건축되어야 한다.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의 일을 할수없다.청년을 돌보는 형제들에게 가장 만족스럽지 않게 느껴지는 것은 그들 가운데 '서로 짊어지는 것'이 없다는것이다.그들은 개인적으로 총명하고 능력이 뛰어나지만,다른 사람들을 자신을 실족하게 만드는 돌이라고 여기며 자기 스스로 하는것이 가장 좋은 효과를 어둠으로 생각한다.우리 모두는 반드시 건축되는것을 배워야한다.우리가 참외가 이 빛을 보았다면 우리는 하나님 앞에 업드려 "저는 다른 사람을 의지하지 않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저의 영적인 상태가 얼마나 좋은지 상관없이 저는 반드시 건축되어야 합니다."라고 말할것입니다. 

5.건축은 교회의 모든 어려움을 해결하고 하나님의 축복을 가져옴 
우리가 고립적인 사람들이라면,우리가 단독적인 사람들이라면,건축을 기대하지마라.장로의 자격은 얼마나 파쇄되었고,하나님께 굴복되었있는지에 달려있다.사탄이 정초부터 연말까지 날마다 우리가 하기를 바라는것이 있다.그것은 영적인것 같지만 허물어뜨리는것이다.열심이 가득하지만 복종하지 않는일.여러분이 주님을 섬기려면 반드시 건축의 길을 가야한다.온전하게 하는것만 있고,건축하는것이 없다면,실질적으로는 배역의 길을 가는 것이다.건축은 가장 중요한 일인데,그것은 당신을 다른 사람과 하나되기 하고 다른 사람과 동역할수있게 한다.다른사람과 동역하려면 당신은 파쇄될 필요가있다.하나님의 축복은 성도들이 한마음 한뜻이 되는 곳에 있으며,서로가 영안에서 조화되고 일치되며 참된동역과 참된 하나를 이루는곳에 있다. 

6.교만은 파괴를 초래하고 겸손은 축복을 가져옴 
어떤 사람이 "왜 내가 아닌 그 형제가 장로가 되어야 합니까?내가 묻겠는데 이것이 무엇인가?바로 교만이다.교만에서 부터 의심이 산출된다. 
불평하는 그 사람들은 형제님들이 그 형제는 중요하게 생각하고 나는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구나. 
가장 큰 긍휼을 입고 축복을 입는 사람은 바로 겸손한 사람이다. 
교만이라는 씨를 갖고 있지 않은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이것이 바로 주님께서 우리 안에서 그분의 건축의 일을 진행하는데,가장 큰 어려움이다.순복해야하며,순복하려면 겸손해야한다. 

7.봉사에 있어서 배워야할 것. 
 자신에대해 겸손하고 다른 사람에 대해 단순함. 

우리는 이길을 가면서 겸손하고,단순해야한다. 
겸손은 바로 자신을 한쪽에 제쳐놓고 하나님의 안배를 받아들이는 것이다.단순함을 모든것이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것임을 인정하고 다른 의도나 기대를 갖지않는다.주님을 섬기는 이 길은 지위가 없을뿐아니라 더욱이 지위를 구해서는 안된다.오히려 다른 사람이 모질게 대할 것을 준비를 해야 한다.이 길을 가면서 사람들의 영광을 얻기를 기대하는 모든 사람은 길을 잘못 들어선 것이다.오늘날의 상황은 우리를 슬프다 하는데,그것은 모든 성도가 구심점을 잃고 흩어지게 때문이다.우리는 반드시 한가지를 배워야한다.그 공과는 모든 것이 하나님 앞에 있는 일이고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책임지시며,우리가 이길을 가도록 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라는것을 알아야한다. 
종합해서 말하자면 우리는 이길을 가면서 겸손하고 단순해야 한다. 
겸손은 바로 자신을 한쪽에 제처 놓고 하나님의 안배를 받아들이는 것이다.단순함을 바로 모든것이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것임을 인정하고 또한 다른 의도나 기대를 갖지 않는것이다.사탄이 일하는 방식은 너무도 교활하여,우리가 서로 다투는 말씀을 전하지 않고 또한 의견들을 다녀오는 말씀을 전하지 않아도 모든 이들을 단독적이고 한마음 한뜻이 되지 못하게 만든다.만일 우리가 참으로 하나님앞에서 공과를 배운 사람이라면 우리가 장로로서 봉사해도 교회가 건축되게 할 것이고,청소하는 봉사를 하더라도 동일하게 교회가 건축되게 할 것이다.전시간으로 봉사하는 형제들은 결코 전도하는것을 직업으로 삼는 사람들이 아니라 장래를 희생하고 주님을 섬기는 사람들이다. 

8.참된 형제사랑. 참된 건축 

마지막으로 우리들에게 건축이 결여된 또 다른 한 이유는,우리들 가운데 서로 사랑하는 마음이 매우 결여 되어 있다는것이다.요한복음 14:17,"여러분도 서로 사랑하십시오."이것은 주님의 신성한 생명 안에서,그리고 주님의 사랑안으로(17:26)서로 사랑하는것으로,이러한 사랑이 우리를 건축할수있다. 

제6장  
사랑으로 건축하느니라 것과 사람에 대해 인식함. 

요한복음13:34-35,"서로 사랑하십시오.내가 여러분을 사랑한것 같이 여러분도 서로 사랑하십시오."17장21-23,"아버지께서 내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같이 ,그들도 우리안에 있도록 하여 주십시오....그들이 온전하게 되어 하나가 되도록 하려는것이요,"이상의 몇구절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으로 건축된 사람들 가운데 사랑스러운 조화가 있다는것을 본다.이 사랑스러운 조화에는 한 특징이 있다.이들이 그리스도를 따르는 이들이라는 것을 느끼게 된다. 

1.서로 사랑함 
바울은 동역자들을 사랑하고,성도를 사랑하며,교회를 사랑하는 사람이었다.만일 어떤 동역자에게 어려움이 생겼거나 특별한 일이 발생하였을때 바울은 속에서 그것을 느낄수있었으며,교회안에 어려움이 일을때에도 바울은 그것을 느낄수있었다. 

2.사람을 관심하는 것을 배움 
우리를 향한 주님의 사랑은 감정에서 나온 사랑이 아니고,우리가 사랑을 받을 자격이 있어서도 아니고,실로 우리는 사랑을 받을 부분이 없고 주님께 대해서도 말한것이 아무것도 없다. 
우리가 그를 사랑하는 이유는 우리가 주님의 처리를 받았기때문이고,우리가 그를 사랑하는 이유는 주님으로 건축된 사람이기때문이며,우리가 그를 사랑하는 이유는 그가 우리의 동역자이고 우리의 형제이기때문이다.교회 가운데 서로 사랑하라고 해서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어떤 지방대는 서로 사랑스러운 말을 한적이 었으나,자연스럽게 형제자매들이 사랑한다.이것은 행정을 책임진 형제들이 주님앞에서 건축된 이들이고,말씀을 전하는 이들이 또한 주님앞에서 건축된이들이기 때문이다.그들의 특징은 사람들을 관심하고 사랑하고 돌보는 것이다. 
주님으로 건축된 사람은 반드시 다른 사람을 관심하는것을 배운 사람이다.좋은 메세지를 전달하는것만으로는 소용이 없다.단지 듣기 좋은 메세지를 전하는것은 소용이 없다.이것은 좋은 전도자는 될수있을지모르나,주님을 섬기는 자는 될수없다.그 메세지는 사람을 건축할수없다.지식은 사람을 교만하게 하지만,오직 사랑만이 사람을 건축할수있다. 
당신과 내가 반드시 주님께 처리를 받고 주님으로 건축된 사람이거나 한다는 말이다.우리가 다른 사람의 짐을 짊어지기를 배울수록 주님께서 우리의 짐을 져 주신다는것을 보게 되며,우리가 다른 사람의 짐을 짊어지기를 배울수록 주님께서 우리에게 능력을 더하였다 주시는것을 보게 될것이다. 
어떤형제가 다른형제의 양말이 뒤꿈치에 구멍이 나 있는데도 불구하고 자신의 양말만 세개 사는것.여러분은 반드시 형제를 사랑하며,자매를 사랑하며 그들을 사랑하며 관심을 가져야 하지만,그것은 감정에서 나온 것이 아니고,그들에게 필요가 있기 때문이어야 한다.각 사람은 다른 사람의 짐을 짊어지난날을 배워야한다.이럴때 우리는 교회의 행정과 말씀의 사역을 통해 놀라운 건축을 이끌어 올수있을것이다. 

3.사람에 대해 아는 것을 배워야 함. 
우리가 교회를 건축할 때 교회의 행정을 수행하는 일에서든 혹은 말씀을 공급하는 일에서든 사람을 아는 것을 배울 필요가 있다. 
먼저 사람을 알아야 하고 형제 자매들의 상황이 어떤지를 알아야 하며,하나님 앞에서 그들의 동기와 육체와 영을 알아야 한다.석재와 기와와 목재에 대한 지식없이 집을 건축하느니라 기술자는 한사람도없다. 
사람들의 마음과 동기와 생각을 만질 때 즉시 문제가 어디에 있는지 알수있다.당신이 그의 겸손과 그의 말을 분별할수 있다는 것은 그의 영이 어떠한 것인지를 분별할수 있다는것이다.어쩌면 그의 영은 세상일은 것에서 더럽혀져 있지 않을지 모라지만,자아와 천연적인 불공평하고 가득할 수 있다.그의 영은 자아로부터 벗어난 적이 없고 깨끗해진 적이 없다.그의 겸손이 그의 존재에서 나온 것이고 그가 말을 잘하는 것도 그의 존재에서 나온 것이며,모든 것이 그의 존재,곧 그 사람 자신에게서 나온 것이다. 
4.사람의 동기를 만짐 
동기가 순수하지 못한 사람은 누구든지 봉사와 관련된 모든 봉사와 관련 교통에 참여하지 못하게 해야하며,봉사에 관련하여 그에게 어떠한 책임도 맡기지 말아야한다. 
만일 당신 자신의 동기가 하나님 앞에서 처리된적이 없다면 당신은 다른 사람의 동기를 알기를 기대할수없다.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동기를 처리하여 순수하게 되었다면 당신이 동기를 순수하게 처리 받은 것과 관련된 어떠한 메세지를 전할지라도 부작용이 발생하지 않을 것이며,어떤 혼잡된 것 없이 단순하게 하나님을 향하게 될 것이다.이 공과를 배운 사람이라면 누가 당신 앞에 오기만 하면 당신은 쉽게 그의 동기를 만질 수 있다.다시 말해 사람의 상황을 쉽게 알 수 있다. 

5.사람의 육체를 만짐. 
사람을 건축하는것은 간단한 것이 아니다.그러므로 사도 바울은"...나는 지혜로운 최고의 건축자로서...다른 사람은 그 위에 건축합니다.그러나 각 사람은 자기가 어떻게 건축하고 있는지 살펴보십시오.고전3:10. 
우리는 반드시 교회 행정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는 사람을 알고,사람의 동기를 알며,사람의 육체를 아는 것에 있다는것을 인식해야한다. 

6.사람의 영적인 정도를 만짐. 
이것은 무엇인가? 어떤 사람의 영적인 상황이 풍성한지,강한지,큰지,깨끗한지,혹은 그 반대의 상황인지를 아는것이다. 
어떤 형제는 마음이 순수하고 육체도 처리 받았지만,영이 매우 약하고,강해지지 않아서 줄 곧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제7장 
교회를 건축하려면 절대적인 헌신이 필요함. 

1.헌신이 철저하지 않으면 봉사할때 어려움이 됨. 
우리의 모든 어려움과 고난과 고통은 헌신에 문제가 생겼기때문에 발생하는 것이다.만일 당신이 편하게 지내고 싶다면 당신이 헌신 하느것에서 몇가지를 취소하면 된다.만일 당신이 고난 없는 그리스도인이 되거나 한다면 그 길은 매우 간단하다.단지 당신이 헌신 하지 않으면 고난은 없게 된다.당신은 헌신 하지 않고도 열렬한 그리스도인이 될수있고,헌신 하지 않고도 말씀을 전하는 사람일 수 있으며,한심하다 않아도 복음을 전할수있다. 
당신은 심지어 한심하다 않고도 장로일수 있으며,헌신 하지 않고도 선교의 일을 하는 사람일 수 있다.고난 없는 생활을 보장 받을 수 있으며,재앙과 화는 모든 사람에게 임하는 것이지만 당신이 자신의 헌신을 취소하기만 한다면 이런 고난들로부터 벗어 날 수 있다. 
사도 바울의 고난은 그의 헌신으로 부터 시작되었다.그러나,바울은 "이제 나는 여러분을 위하여 받는 고난을 기뻐하며,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위하여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내 육체에 채웁니다."(골로새서1:24) 
바울이라는 사람은 기꺼이 고난 받고자 하는 마음을 가진 사람이며,그러한 그의 마음이 그의 헌신이었다. 
2.헌신한 데서 뒤로 물러선다면 교회 건축의 일을 할 수 없음 
자신의 헌신이 증가 되었는가?감소되었는가? 

3.자신의 가정을 돌볼때 하나님의 집을 돌볼 수 없음. 
중국고사에 우 임금이 치수(治水)의 일을 하면서 여러번 집앞을 지나면서도 집안으로 들어가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있다. 

4.주님을 섬기면서 마몬을 섬길수없음. 
우리는 헌신 할수록 일은 더 풀리지 않고 어려움이 더 많아 지리라고는 결코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여러분 자신이 어떤 상태에 있는지를 생각해보십시오.청년들이 너무 세상을 사랑하고 실재가 없다고만 말하지 말고,오히려 자신들이 어떤 상태에 있는지를  돌아보아야 합니다!세상을 사랑하는 사람들에 대해 말하자면 그들은 당연히 부끄러움을 느껴야한다. 
만일 어떤 사람이 존경 받는 사람이 되거나 한다면 그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헌신 하지 않으면 된다.절대적인 헌신! 
우리는 세상을 붙잡으면서 주님을 섬기는 사람이 될수없다. 
5.고난을 감소시키기 위해 사람의 도움을 구하는 것은 봉사하는 사람에게 수침임. 
자신의 고난을 가볍게 하려고 사람들에게 도움을 청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어쩌면 일년내내 아무도 당신에게 안부를 물어 보거나 당신을 돌봐주는 사람들이 없을지 모른다.그렇다 하더라도 여전히 믿음을 의지하여 전진할수있다.이것은 얼마나 영광스러운가!이것은 헌신의 문제이고,댓가의 문제이다.이것을 가르켜"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위하여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내 육체에 채웁니다." 라고 말하는 것이다. 
6.모든 헌신의 길은 '비정상적인' 길임 
이 길에서 모든 사람들은 반드시 그리스도의 손에 망가질 것을 준비해야 하는데,모든 일들은 상식적으로는 예측할 수 없는 것들이다.우리가 주님을 섬기는 길이 헌신의 길이고,헌신안에서는 어떤것도 정상적일수 없고,모든것이 비 정상적인 것임을 볼수있기를 바란다. 

제8장 
교회를 건축하려면 일에 대해 아는 것이 필요. 

1.일의 중요성을 앎 
교회의 건축을 위해서는 먼저 사람에 대해 알아야 하고 동시에 일에 대해 알아야 한다. 
한예를 들어보자.어떤형제가 가난한 형제를 도와주어야 이백만원을 드리길 원한다고하자.이것은 좋은일이지만, 간단한 일이 아니다.때마침 필요하니,감사하기 생각해서는 안된다.교회의 건축에 도움이 될거라고 간단하게 생각해서는 안된다.오히려 이것이 교회를 허무러뜨릴 수도 있다는 사실에 주의해야한다.이것은 마치 어떤 사람이 수술을 한다고 병이 치료된다는 보장이 없고,오히려 생명이 죽을수도 있다.또 음식을 먹었다고 몸에 유익이 된다고 보장할수 없는것과 같다.그것은 불결한 음식이라 식중독에 걸릴수있다.그러므로 교회를 건축하려면 우리는 일에 대해 잘 배워야한다. 
2.가난한 성도들의 필요를 어떻게 돌보는가 
선교사 형제 두명이 교화를 방문한 적이 있다.그중 한명은 의사였다. 교회 건축이라는 안목에서 본다면 그들과 우리는 서로 도움이 되지않았을 뿐 아니라 오히려 손실을 입혔다. 주된 원인은 사람에 대해서 충분히 알지 못하고 일에 대해서도 충분히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그 의사형제가 사는 도시에서 한 자매를 만났다.그녀는 우리에게 제 아이가 결핵을 앓았는데 의사 형제님이 두번이나 수술을 해주셨어요.처음에는 수술비의 절반만 받았고 두번째는 무료로 수술을 해주었다는 것이다. 한면에서 그 형제는 좋은 사람이고 가난하고 고통받는 사람을 돌볼줄 아는 혈제였다.하지만 다른한면으로 형제의 이러한 방법은 사람들이 그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갖게할 뿐 더많은 그리스도를 갖도록 하는 것은 아니었다.이렇게 도움을 받고나면 자신이 매우 낮은 사람이라고 느낄지 모른다.스스로 낮은 사람이라는 느낌을 갖게 된다.만일 그 형제가 물질적인 방면에서 돕고자하는 부담이 있었다면 주님 앞에서 해야하고 치료비는 반드시 받아야 한다. 
만약 어려움을 겪는 형제자매들을 돕고자 한다면 그들에게 자신이 우리보다 낮은 위치에 있다는 느낌과 우리에게 감사하는 느낌을 갖게 한다면 이것은 교회를 허무는 것이지 건축하는 것이 아니다.우리는 교회안에 있는 성도들이 우리에게 감사하고 교회에게 감사하고 장로들에게 감시하기 해서는 안된다.우리는 반드시 그들을 그리스도께로 이끌어야 한다. 그럴때  교회가 건축된다. 
우리가 가난한 형제를 돌볼때 우리는 반드시 우리의 돌봄이 그들을 건축하게 하는것인지 허물어뜨리는 것인지를 고려해야 한다.이것은 우리가 일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지 달려있다. 
3.사람의 은혜가 아닌 오직 하나님의 은혜만 의지해야함. 
우리는 사람들이 사람의 은혜가 아닌 오직 하나님의 은혜만을 의지해야한다.서양의 선교사들이 한 일의 결과를 볼때 그들은 교회를 건축한것이 아니라 오히려 손상시키고 허물었다.그들이 배워야 할 공과는 무엇으로 사람을 돕든지 주님 앞에서 해야하며,사람들이 그들에게서 은혜를 입었다고 느끼게 해서는 안된다.사람들이 사람에게서 은혜를 입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은혜를 입었다는 느낌을 갖도록 해야한다. 
4.사람을 높이지 말고 함부로 자신을 비하하지도 말아야 함. 
설마 주님께서 유대인의 주님이시고,이방인의 주님은 아이사랑 말인가?설마 주님께서 서양사람들의 주님이시고,중국인들의 주님은 아이사랑 말인가?설마 주님의 빛이 서양에만 임하신다는 말인가?우리는 대충 대충 일하는 사람이 되지 말고,세심하고도 주의 깊게 되어야 한다. 
4.어떻게 일에 대해 아는가? 
일을 아는것이 대해 주의해야할 점? 
하나,모든 일은 사람과 함께 온다.언제나 사람이 옳다면 일도 옳다.그러므로 이 일이 누구와 왔는지 추적해보아야 한다. 
둘,그 일의 동기가 무엇인지를 알아야한다. 
세번째,본질이 옳을지라도 방법이 옳은지 여부를 더 조사해야한다. 
네번째,그 결과의 영향이 어떠할지를 조사해야한다. 
우리는 반드시 합당하게 그를 교정하고 안도하며,가르침을 주어야 한다.이것이 바로 교회를 건축하는것이다. 
5.민족적인 우월감과 세상의 풍속을 유의함. 

제9장 
건축의 의미는 하나님께서 사람위에 그분의 권위를 세우기는 것임. 

오늘날 하나님께서 건축하고자 하시는 것은 거처인데,교회는 하나님의 거처이자 하나님의 집이다.장래 하나님께서 건축하신 목표는 바로 한성인 새 예루살렘이다.에베소서2:22절에 따라 말하자면 하나님께서 건축하시는 것은 거처이고,히브리서 11:10절에 따르면 하나님께서 건축하시는것은 기초가 있는 한 성이다. 
1.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함 
구약의 예표에는 하나님의 거처인 성전이 있으며,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있다.교회에는 성전의 이야기와 성의 이야기가 있다.교회를 건축하는것은 바로 하나님의 성전과 하나님의 성을 건축하는것이다. 
2.성전의 건축은 하나님과 사람의 연합의 건축임. 
교회의 건축은 그리스도의 몸의 건축은 바로 성경안에 있는 총체적인 표현이다.고린도전서6:19,"여러분의 몸이 여러분 안에 계신 성령의 성전인것을 알지 못합니까?"라고 말한다.우리는 하나님의 성전이며 하나님의 영은 우리안에 거하시는데,이것이 하나님과 사람의 연합이다.우리가 메세지를 전하여 말씀을 공급하는 목적은 하나님과 사람의 연합이라는 결과를 산출하기 위한 것이다. 
3.하나님의 성의 건축 
성전과 성은 차이가 있다.성전은 거처와  거주의 문제이지만,성은 통치의 문제이다.그러므로 성전은 임재의 문제이고,성은 주권과 권위의 문제로 새 예루살렘이 출현할때 이 둘은 하나로 합해질것이다. 
4.성을 건축하는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안에 그 분의 권위를 건축하는것임. 
먼저 하나님과 사람의 연합이 있은 후에야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그분의 권위를 건축하실수있다.비록 성전이 중심이지만 그것을 보호해주는것은 성이다.어떤 사람이 건축되었는데,단지 성전의 요소만 있고 성의 요소가 없다면 이 사람에게는 보호가 없다.그러므로 에스라는 성전을 회복하였지만,느헤미야는 성을 더 회복해야 했다.하나님의 임재는 전쟁의 문제가 아니지만,하나님의 권위는 전쟁의 문제이다.사탄이 사람에게서 휘손시키고자 하는것은 하나님의 임대가 아니고 권위이다.임재는 하나님의 최종안은 목적이 아니고,권위가 하나님의 최종적인 목적이다.성경의 가장 끝에 나타나는 것은 한 성인데,하나님의 보좌가 그 성의 중심이다.이말은 하나님의 최종적인 목적은 바로 하나님께서 통치하실수있고 그분의 보죄를 세우실 수 있는 하나의 결과물을 산출하는것이다. 
하나님의 연합과 하나님의 임재가 있으면 당신은 다른 사람과 연결되어 하나님의 성전이 된다.우리는 이 임대와 연합 안에서 하나님의 성전으로 연결된다.그러나 이것은 아직 성이 될수 없다.당신과 내가 지속적으로 건축되어 어느정도까지 이르렀을때 당신이 하나님의 권위아래 있고,나도 하나님의 권위아래 있으며,당신에게 하나님의 주권이 있고,나에게도 하나님의 주권이 있을때 우리는 연결되어 한 성이 될 수 있다. 
하나님과의 연합만 있다면 하나님께 하나의 거처만 드릴 수 있을 뿐이다.반드시 하나님께서 주권을 가지실때라야 비로소 하나님은 통치하실수있다. 
그러므로 건축의 의미는 바로 하나님께서 사람안에서 그분의 임재를 건축하시는 것이고 하나님께서 사람위에 그분의 통치를 건축하는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안에서 사람과의 연합을 건축하시는것이고,사람의 존재에 하나님의 통치를 건축하는것이다.만일 이땅에 성전이 없고 성이 없다면 하나님은 하늘에만 계실수있고,하늘에서만 다스릴수있다. 
하나님께서 당신안에 하나님의 권위가 있고,하나님께서 당신안에서 다스린다면 당신은 하나님의 권위를 가진 사람들과 연결되어 한 성이 된다. 
무엇을 가리켜 하나님의 권위 아래 있다고 하는것인가? 
권위는 도대체 무엇인가?우리는 교회가 권위와 질서가 있느곳임을 보아야하며,온 우주가 또한 권위의 문제라는 것을 보아야한다. 
예를들어 천사장 미가엘은 모세의 시체에 관하여 마귀와 다투며 논쟁할때 감히 그를 거슬러 모욕하는 심판을 하지 않고 다만"주님께서 그대를 꾸짓으실것입니다."라고만 말했다.(유다서9절)이것은 권위의 문제이다. 
마태복음 8장에서 박부장은 주님에게 "나도 권위아래 있는 사람이고,내 아래도 병사들이 있어 이 사람에게 '가거라'라고 하면 가고,오너라 하면 오고,나의 노예에게 '이것을 하여라'하면 합니다.이 또한 권위의 문제입니다. 
5.성전과 성 이들 중 하나라도  부족하다면 안됨. 
무엇이 하나님과 사람의 연합인지,무엇이 하나님의 권위아래 있는것 인지를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인식시켜주어야한다.이 둘중 하나라도 부족하면 건축은 없다.성전이 없으면 거쳐가 없고,성이 없으면 보호가 없다.만일 당신이 단지 하나님의 임재에 대해서만 이해하고 하나님의 권위는 모른다면 성이 없는 것이다.이렇게 될 때 얼마안가서 성전조차 없어지게 될것이고,임재도 잃어버리게 될 것인데,그원인은  보호가 없기 때문이다.건축에는 반드시 전쟁이 따른다.에베소서2장은 건축을 말하고,6장에 영적전쟁을 언급한다.에스라의 성전의 회복/느헤미아의 성의 회복 
성전을 회복할 때 대적이 아무런 파괴의 일을 하지 않았지만,성이 회복되려하자 즉시,대적이 와서 파괴하기도 했다.왜냐하면 그것이 하나님의 주권과 연관되기때문이다.교회를 건축하는것은 바로 각 지방에서 하나님의 권위를 건축하는것이다.하나님의 권위를 가지고 있는교회를 찾기는 어렵다.사람들의 의견으로 가득한 라오디게아의 모습이다.집사와 장로가 다투고,장로와 목사가 다툰다.우리는 다른 사람을 비판 하려는것이 아니라,사람들에게 한가지 사실을 보여 주려는것인데,하나님의 권위를 잃어버리고 사람의 의견만 중시한다면 그 결과는 끊임없는 다툼이다 

6.하나님께서 사람 안으로 건축되시게 함 
주님으로 건축되었다는것은 무슨 의미인가?  
무슨 일을 하든지 하나님께서 일하시도록 하고 직접 그분 자신을 사람과 연합하도록 허락해 드리는 것이다.사람의 존재에 건축의 일을 할수있다. 
ㄱ.조금씩 하나님과 연합되게 연합되게 함. 
ㄴ.그의 실생활에서 조금씩 하나님의 임재를 갖게 함. 
       (하나님의 성전이 되게하는것이다.) 
ㄷ.그런 후 다시 한가지의 일을 하여 그가 하나님의 권위를 알도록 함. 
그 사람은 하나님의 임재뿐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도 있는 건축된 사람이 될 것이다.그는 우주 가운데 건축된 한 사람이 된다.그는 무엇을 가리켜 하나님의 임재라고 하는지,무엇을 가리켜 하나님과의 연합체가 하는지,또한,하나님의 주권이 무엇이며,하나님의 권위와 질서가 무엇인지를 알게 된다.그는 실로 건축된 한 사람이 된다. 

7.대적의 계략을 앎 
구약에 다윗성은 다윗을 보호하기 위한 것인데,느헤미야가 돌아와서 성을 복원하기 시작하자 즉시,대적이 왔다.(느4:7-8)이 성을 건축하느니라 사람들은 한 손으로는 일을 하고,한 손으로는 병기를 잡았다.(느4:17) 
건축하는 사람은 한면으로는 건축하고,다른 한면으로는 전쟁을 해야 한다. 
대적의 공략? 
ㄱ.측면에서 오는 계략. 대적은 우리가 사랑하는 형제나 자매를 통하여 매우 좋은 제안을 할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영적인 전쟁은 먼저 칼을 가지고 대적과 싸우는것이 아닌 대적의 계략을 간파하는것이다.이것이 느헤미야가 한 일이다.그의 대적이 "오라 우리가 ...서로 만나자" 라고 했을때 느헤미야는"네가 말한 바 이런 일은 없는 일이오.네 마음에서 지어낸 것이다.(느6:1-9)느헤미야는 대적의 계략을 간파했다.그러므로 우리가 건축의 일을 하려면 세가지에 대해 아는 것이 필요하다. 
1)사람을 알아야하고 2)일을 알아야 하고 3)대적의 계략을 알아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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