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의 행정과 말씀의 사역(요약-02)-펀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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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좋아 , 2012-03-30 , 조회 (184) , 추천 (0) , 반대 (0), 스크랩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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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장 
말씀의 자료를 선택함 

1.말씀의 사역은 사람들에게 생명을 공급하기 위한 것임. 
자료선택 중요하며,방법도 중요.말씀의 사역을 할때 한가지 기본 원칙이 있는데,그것은 말씀을 통해 사람들이 생명을 공급받아야한다. 

2.말씀의 사역의 기본자료는 개인적으로 배운공과와 주님께 받은 부담에 근거함. 
만일 말씀을 전하는 사람이 배운 공과가 없고,주님께 받은 부담도 없다면 말씀의 사역을 해서는 안된다.이러한 이유로 말씀을 전하는 사람은 끊임없이 공과를 배워야한다. 

3.교만하지 말고 동기를 주의해야 함. 
말씀의 사역을 위한 자료의 근원이 올바르다면 그 다음 주의해야할것은 교만하게 되지 않는 것이다.설령 우리의 자료가 더 좋다 하여도 그것은 다만 우리의 견문을 넓히고 우리의 말씀의 깊이를 깊게 하는것에 불과하다.그러므로 우리는 자료를 선택할때 우리가 배운 공과와 우리가 받은 부담을 기초가 되어 있는지 보아야 하고,다른 한면으로 우리의 동기를 주의해야 하는데 교만해서는 안된다는것이다. 

4.자료는 살아 있어야 하며,신기한것이 있어서는 안됨. 
절대적으로 신기한것을 피해야하며 신기한것을 말하려는 동기를 가져서는 안된다.성도들은 듣고 한번 웃고 나서는 잊어버린다. 

5.성경을 해석하는 것을 피해야 한다. 
엄격히 말한다면 성경을 해석하는것은 교사의 일이다.성경의 이곳 저곳의 말씀들을 인용하여 메세지를 전할 수 있지만 만일 당신이 말씀을 정하면서 성경을 해석하여 한다면 스스로 자신을 매우 번거로운 상황 안으로 밀어 넣게 된다.그러므로 가급적 성경을 해석한 자료들을 택하는것을 피해야한다.성경을 해석한 자료들은 사람들에게 지식을 주지만 생명의 공급은 그렇게 많지 않다. 
우리가 말씀을 전하면서 성경 말씀 한 부분을 해석하는 이유는 이 부분의 성경 말씀안에 있는 어떤 것을 전달해 주고,사람들이 성경에서 근거를 찾아냄으로 그것을 알도록 하는데 있다.그러므로 단지 그 필요를 채울 수 있다면 충분하며 더 이상 성경을 해석 할 필요는 없다. 

6.말씀의 사역이 일종의 교재와 교육 과정이 되는 것을 피해야 함. 
주일 학교는 하나의 과정이 되어 버렸다.설령 어떤 아이가 일년52주 동안 5번에 걸쳐 주일학교에 한번도 빠지지 않고 모든 주제를 들었다 하더라도 그의 속에 영적인 분량과 복음의 내용,생명의 체험이 어느 정도 더해졌을 거라고는 말할수 없다.'어린이 주일 집회'란느 말에서 학교기업 단어를 떼어 버려야 한다고 말한적이 있다.우리는 주일학교에 아니라 어린이 집회를 원한다.어린이들이 경건한 청소년들로 자라 주님 앞에서 살아가도록 하는데 중점을 두어야한다.사람됨에 관한 면,하나님을 경외하는 면,구원에 관한 면에서 우리는 단지 이것이 그들에게 도움이 된다는 인상을 주고 싶다.우리가 어린이들을 인도하면서 반드시 시간을 들여 그들의 느낌을 만져야된다.우리는 살아있는 자료를 찾을 필요가 있다.청년들 한사람,한사람에게 부담을 가져야 한다.각 사람들에게 조금씩 수고함으로 그 일을 수행했다.마치 갈비를 먹을 때 사람들에게 많은 뼈만 주는 것이 아니라 고기를 주어야 하는 것에 비할 수 있다.우리는 개요가 중요하다는 것을 인정한다.왜냐하면 사람의 느낌을 만질수 있는것들이 모두 가요에 있기 때문이다.그러나 우리는 사람들에게 많은 뼈를 주는 것이 아니라 '고기'를 주어야 하는데,뼈를 먹을 수 있다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기 때문이다.이것은 하나의 큰 문제이다. 
좋은 말씀의 사역은 메시지에 논리가 분명하고 내용이 풍부한 것이지만 사람들에게 도달 할 때 논리에 중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깊은 느낌을 만지는데 중점이 있다. 

7.교회는 말씀의 사역을 통해 건축의 일을 해야 할 절박한 필요가 있음 
지금 우리는 절박하게 건축이 필요한 중요한 시기에 와 있다. 
복음을 전하고 구청장은 사람을 온전하게 한 다음 다시 죄인을 구원하고,그들을 온전하게 하고,반복한다면,이것의 결과는 건축은 없었고,하나님의 거처가 없었다.그러나 만일 건축된 한 사람이 그 지역을 떠나 어디를 가든 그는 여전히 건축된 사람이다.그가 그 지역을 떠났지만 그는 결코 건축을 떠난 적이 없으며 그는 여전히 영적인 집의 일부분인 사람이며 이 건축은 시간과 공간의 제한을 받지 않는다.그가 어디를 가든 그는 건축된 한 사람이며 우주 가운데 그리스도의 몸 안에 건축된 사람이다.그는 우주가운데하나님의 유일한 건축 안으로 건축된 사람이다,그는 일반적인 구원받은 사람과 다르고 일반적인 영적인 사람과 다르며 건축된 사람이다.이런 사람은 어디를 가든지 하나님의 거처이자 이러한 사람은 어디를 가든지 기능을 발휘하는 지체이다. 
오늘 하나님은 이땅에서 이러한 한 무리의 사람들을 필요로 하시며,지금 절박하게 이 건축의 일을 필요로 하신다.이러한 건축을 위해 말씀이 첫번째이고 행정의 일이 두번째이다.우리의 빈약함,연약함,침체됨,냉담함,죽어있음,얇음의 원인은 모두 말씀이 부족하게 때문.그 다음이 행정이 부족하기때문.'번거롭게 하는 능력'! 

8.말씀의 사역과 봉사는 반드시 살아 있는 동역이 필요함. 
지난30년 동안 말씀의 사역을 돌아볼때,말씀을 공급하면서 협력이 가장 좋왔던 때는 1940~1943년 사이이다.그 당시 교회 집회에서 말씀의 사역은 살아있어서 집회에 온 모든 형제 자매를 살아나게 했다.많은 형제 자매들은 그날 전한 말씀이 어떻게 그들의 필요에 정확하게 부응했는지를 기이하게 여겼다.매번 집회마다 그들의 어려움이 해결되었다.말씀이 그들의 어려움을 만지고 그들의 깊은 부분을 만졌으며 문제를 해결하고,필요를 공급했다. 

결론: 
우리는 자신안에서 개인적인 사람이 되어선 안 되고 지속적으로 다른 사람을 의지하고 다른 사람과 서로 함께 하며다른 사람과 함께 동역하며 봉사해야한다.연장하는 이들의 마음을 만지고,청소년들의 마음을 만지고,어머니들의 마음을 만지고,자녀들의 마음을 만질수있는 한편의 메시지를 전해야한다. 

제11장 
말씀의 사역의 중요성과 위임 

1.성경을 추구하는 집회에 관하여 
2.집회를 책임지는 사람이 있어야 함 
각 지방교회는 성경읽기를 사모하는 마음을 형제 자매들의 마음안으로 넣어 형제 자매들이 성경읽기를 사랑하고 성경읽기를 좋아하여 하는데,이 일은 지방교회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이다.한면으로 모든 사람이 성경을 추구하도록하고 다른 한면으로 언제나 한 형제가 그 집회를 책임지며,적어도 이십분,삼십분 동안 관련된 부분을 이해하기 쉽게 교통세 준다. 
3.영적인 공급이 있어야 한다. 
그들에게는 한 가지 특징이 더 있는데,그것은 그 형제들의 기능이 교리나 성경해석에 중점을 두고 있지 않고 영적인 공급에 중점을 둔다는 것이다.후반부에 이삼십 분 동안에 공급이 있고,이 공급을 통해 모든 이들이 만족하고 배부를 것이다. 

4.추구하려는 분량이 너무 많지 않은 것이 좋음 
한주에 한장을 누리는 것은 느린것이 아니다.절대로 많은 것을 하려고 욕심내서는 안되는데,이것은 매우 큰 원칙이다.일년 52주 동안 52장을 추구하게 되니,얼마나 풍성할 것인가! 

5.사람들이 맛이 있다는 느낌을 갖게 해야 함 
성령안에 있는 생명공급과 풍성함과 달콤함,즉 젖과 꿀을 형제 자매들에게 지속적으로 공급. 
최근 어떤 지방교회는 주일 저녁에 (성경의 중심진리)를 추구하는 집회를 가지는데,참가하는 인수가 주일 오전집회보다 많다.이렇게 인수가 증가한 집회들은 하나같이 그 집회안에 사람들이 누리는것이 있고 충분한 공급이 있고,뭔가를 얻는것이 있기때문이다.이부분은 우리 모두가 공동으로 연구해볼 가치가 있다. 

6.말씀의 공급은 중점이 있어야 하고 또한 보편적이어야 함. 
말씀은 반드시 중점이 있어야 하고 그 중심에 집중해야하며 거듭하여 그 중심을 강타해야한다. 

7.상호적인 집회 가운데서 말씀의 공급이 있어야 함. 
기도집회,떡데는 집회,교통집회와 같은 모든 강호동은 집회에서 기회를 붙잡아 말씀을 공급하는것이다. 
우리가 사람들에게 말씀의 인도를 주는것이다. 
우리가 어떻게 집회를 인도할지를 아는 것,곧 어떻게 찬성을 선택하고,어떻게 형제 자매들의 마음을 움직여서 그들이 집회가운데서 마음을 움직여서 그들이 집회 가운데서 입을 열어 기도하도록 도와주며,기도할때 어떤 말은 하지 말아야 하며,어떤 말은 마땅히 해야 하는지를 알게 하는것이다. 

8.떡데는 집회에 관하여 
떡데는 집회에서는 어떤 가르치는 성격을 띤 교통을 해서는 안되는 것이,일단 가르치는 느낌을 가지고 교통을 하게 되면 즉시 떡데는 집회는 죽게 된다.우리의 말은 사람을 주님 앞으로 인도해야지 주님의 임재에서 끌어내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 

9.사람들이 주님의 달콤함과 아름다움을 감상하기 함. 
언제나 사람들이 주님의 달콤함과 주님의 아름다움을 느끼게 하는데서 벗어나지 않았는데,매번 말할때 마다 짧게 말했다.복음서에서 여러차례 주 예수님께서 죽으실 것에 관하여 기록한 부분을 언급.그 분의 머리에 기름을 바른길을 말하고(마태26:6-7)그 분의 발에 기름을 바른것을 말하고(누7:36-38),주님께서 태어나실때 사람들이 향유를 가져 왔음을 말하고(마2:11)그분이 돌아가셨을때 사람들이 향유를 가져와 그분을 장사 지난날을 말한다(마26:12)(막16:1)나는 형제 자매들에게 그분을 아는 사람은 그분이 머리에서 발끝에 모든 부분이 달콤하고 사랑스러운 분이셨음을 알려주어야 한다.이사야 53장 "그가 씨를 보게 되며 그의 날은 길것이요.또 그의 손으로 여호와께서 기뻐하시는 뜻을 성취하리로다.그가 자기 영혼의 수고한것을 보고 만족하게 여길 것이라""나는 의로운 중에 주의 얼굴을 뵈오리니 깰때에 주의 형상으로 만족하리이다. 
한편 떡과 전에 대하여 말했다.딸은 생명과 관련 있고,이 잔이 축복과 관련이 있음을 보여주었다.주님의 생명은  이떡으로 상징되며 우리에게 누림을 주고,하나님과 그 자신의 모든 것이 우리의 몫으로 이 잔 안에 있다.주님은 "아버지께서 주신 이 잔을 내가 마셔야 하지 않겠습니까?(요18:11)"나는 물 같이 쏟아졌으며 내 모든 뼈는 어그러졌으며 내 마음은 밀랍 같아서 내 속에서 녹았으며 ..내 허가 입천장에 붙었나이다.주께서 또 나를 죽음의 진토 속에 두셨나이다.(22:14-15) 

제12장 
말씀은 사람에게 공급하는 데에 중점이 있고  
행정은 사람을 건축하는데에 중점이 있음. 

1.말씀의 사역의 목적은  
말씀을 심오하게 전하는 데에 있지 않고  
형제 자매들의 실지적인 필요를 채우는 데에 있음. 
우리가 두려워 할 것은 오래된 주제가 아니라 낡고 구태의연한 방식의 말씀의 사역과 말투이다.메세지는 같을 수 있지만 반드시 다른 방법으로 말해야한다.그러므로 힘들여 높은 수준의 말씀을 찾으려고 하지 말아야 한다.우리에게 필요한것은 높은 진리를 준비하는 것이 아닐 수 도 있다.오히려 시간을 들여 주님 앞에서 부담을 받는 것이 필요하다.우리는 이 원칙을 붙잡아야 한다.그리고 필요가 있다면 살아 있는 말씀을 사용하여 전하면 된다.결코 메시지가 낮다고 두려워하지 마라.때로는 낮은 말씀이 오히려 사람의 깊은 곳을 공급한다. 
우리는 주님께"주님 제가 오늘 거듭남에 대하여 말하려고 합니다.저에게 신선하고 산 말씀을 주소서."라고 기도해야한다. 
2.말씀의 사역은 중심을 가지고 있어야 할 뿐아니라  
여러방면에서 성도들을 공급해야함. 
말씀으로 섬기는 사람은 모두가 다재다능하기를 배워야한다. 
성경의 가르침은 아래와 같아야한다. 
예를들면 로마서가 중심주제인 믿음으로 의롭게되는것에 대하여 말하고 있지만,서두에 문인의 말씀이 있고 마지막에는 축복의 말씀이 있으며,또한 몸을 산 제물로 들이고 사람을 받아드리는 것 등을 언급한다.이러한것들은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것되는 아무 상관도 없지만 믿음으로 의롭게 됨이라는 이 중심주제와 함께 언급된다. 
우리가 교회 안에서 그리스도의 몸을 건축하고 사람들을 인도하여 모든것을 포함한 그리스도를 알게하고 십자가를 알게 하며 육체를 처리하는것에 대하여 알게 하는 이것이 우리의 중심이지만,우리는 여전히 다방면의 공급이 필요하다.때로는 위로하는 메시지가 필요하고,고난잗는것에 관한 메시지도 필요하다.이러한 것들은 모두 현실적인 필요가 있음으로 반드시 돌봐야 한다. 
예를들면 기도집회를 하면서 집회의 끝무렵에 시련을 겪고있는 가정이나,직업을 잃은 성도들 그리고 병을 앓고 있는 형제 자매들을 위해 기도할 수 있다. 

3.말씀을 전하는 자세가 합당하고 격에 맞아야 함 
1)품위가 있기를 배우는것이다. 
2)말의 능력이다. 
3)교양이 있기를 배워야한다. 
이 세가지는 외교관이 기본적으로 갖춰야 하는것이다. 

4.교회의 행정은 건축하는 데 강조점이 있다.교회의 행정이 일을 처리하거나,사람을 돌보고 관리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이것이 틀렸다고 말할수없지만,참된 의미는 아니다.교회의 행정은아 실질적으로 사람을 건축하는데에 강조점이 있는데,이 사람은 단수의 사람이 아닌 다수의 사람이다.이러한 건축을 위하여 교회의 행정은 어떻게 수행하여 하는가? 
예를 들면 타이베이에 열 두명의 장로가 있는데,그들이 이십팔명의 지역 책임자를 안배한다고 하자.이 안배는 건축을 위한 행정의 성질을 갖는다.원래 여기에 백여명의 형제 자매가 있는데 그들이 주님을 사랑하고 영적인 것을 추구하며 서로 교통하기도한다.몇가지 봉사를 함께 하지만 구체적인 동역은 전혀없다.이 구체적인 동력을 위해 교회의 행정이 필요하다. 
열두명의 장로는 시간을 들여 어느 형제 혹 자매가 어느 지역을 책임지고 봉사하는 좋은지 유심히 관찰하여 책임자를 안배한다.이렇게 한다면 건축의 성질을 가질것이지만 여기에 머물러서는 안되고 더 전진하고 한다.예를들어 어떤형제가 한 지역의 책임자가 되어야 한다고 느끼지만 그 형제에게 제거 되어야 할 어려움이 있다는것을 보았다고 하자.그 어려움이 제거되지 않는다면 문제가 될것이다. 그러므로 장로들을 그를 위해 기도하고,교통해야한다.그가 가진 어려움을 언급하고 공급하며 인도를 해주려고 한다.그 형제는 다른 동역자와 동역하려면 수 있게 되며 이것이 바로 건축이다. 
돌하나를  돌 위에 건축하려면 돌의 바닥면은 반드시 평평해야한다.그 돌의 돌출부분이 제거 되지 않는다면 골은 견고하게 건축될수 없다.이렇게 하는 것이 바로 행정이다.장로집회를 할때 사무를 전하는것은 가문의 일,나머지 사분의삼은 형제 자매들의 상황에 대해 토론 한다면 가장 좋다. 
5.건축된 교회는 주님의 다시 오심을 재촉함 
하나님의. 모든 축복은 몸안에 있고 하나님의 거처안에 있다.우리가 한무리의 사람을 구원할 수 있고 한 무리의 사람들을 영적으로 온전하게 할 수 있겠지만 그러한 것들은 하나님의 마음의 갈망을 만족시킬 수 없다.이 시대에 하나님께서 얻기를 갈망하는 것은 건축된 몸이다.왜냐하면 그분이 영원토록 얻고자 하는것이 바로 이것이기때문이다.우리가 지금은 어떻게 건축해야하는지 분명히 알지 못할것인데 그것은 하나님의 일이기때문이다.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분명하게 말씀하신 것은 우리가 구원받은 후에 반드시 건축되어야 한다는 것이다.우리는 하나님께서 건축하시는 집이다.(에2:22'벧전2:5)하나님께서 각종 은사를 주신것은 그분의 아들의 몸을 건축하게 하시려는 것이다.(엡4:11-12)만약 우리가 은사를 사모한다면 교회를 건축하를 수 있는 은사를 사모해야한다.하나님은 하나의 거처와 한 몸을 갖기를 원하시므로 이천 년 동안 이 일 때문에 많은 난관들을 통과 하셨다.사람을 구원받게 하는것은 어렵지 않고 단순히 사람을 영적으로 온전하게 하는것도 어려운 것은 아니다.그러나 한 무리의 사람을 영적인 몸과 단체적인 거처로 건축하는것은 확실히 어렵다.우리를 슬프게 하는것은 교회건축의 상황이다. 
당신과 내가 여기서 관심하고 있는 일이 교회의 행정이든 말씀의 사역이든 심지어 성도들을 방문하는 일이든 우리는 한가지 원칙을 붙잡아야 한다.그것은 우리의 일의 결과가 사람을 건축하고 한사람 한사람을 그리스도의 몸으로 건축하여 이 땅위에 하나님의 단체적인 그릇을 건축하는 것이다. 

6.건축의 일은 합당한 터 위에서 수행되어야함. 
무언가를 건축하려면 반드시 터가 있어야한다.우리가 확고한 터가 없다면 아무런 일도 할 수 없다.우리는 또한 대적의 속임수를 당파를 필요가 있다.터가 없으면 개인적으로 영적일지라도 여전히 바빌론에 있는것이고,우리가 다니엘처럼 영적일지라도 수 있지만 성전을 건축할 수는 없다.만약 우리가 함께 건축되어 성전이 되고 성이 되고자 하려면 반드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와야한다.이것은 나의 의견을 따른 것이 아니라 사도들이 받은 빛 비춤을 따른 것이다.우리는 이전에 사도들이 어떤 터위에 교회를 건축했는지 그 당시와 동일한 터로 돌아가야한다.처음의 실행으로 돌아가는것이다.처음의 침례는 물속에 잠겨 그리스도와 함께 매장 되는 것이었다.만찬도 동일하다.큰 잔 작은 잔의 문제가 아니고 처음으로 돌아가야한다.사도들은 "떡이 하나이요,우리 많은 사람이 한 몸입니다.왜냐하면 우리모두가 한 떡에 참여하기 때문입니다."(고전10:17)우리는 처음으로 돌아가야 한다.교회가 건축되는 터의 처음은 바로 하나의 터,곧 지방적인 터이다.우리는 성경으로 돌아가야 한다.성경은 단지 예루살렘에 있는교회,암기력이 있는 교회,고린도에 있는교회,에베소에 있는 교회라고 말하는데,이것이 바로 교회의 터이다.우리는 이런 주장 저런 주장을 따를 수 없고,반드시 확고한 터를 가져야 일을 할 수 있으며,마음이 변할 여지나 의문을 가질 여지 없이 우리의 건축의 일인 하나님의 집을 건축할것이다.만약 터가 확고하지 않다면 건축에 대한 말을 꺼낼 수 가 없다.즉 단지 죄인을 구원하고 영적으로 온전하게 하는 일만 언급할 수 있을뿐 건축에 대해서는 할 말이 없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시대에 그리고 우주 안에서 건축의 일을 하시길 갈망하시며,하나의 터 위에서 건축하고 계신것을 보아야한다.우리는 여기에서 하나님의 이 인도를 따라야 한다. 

제13장 
교회 건축의 터 

우리는 한면으로 교회의 건축을 보아야하고,다른 한면으로 건축에 직면하는 어려움이 바로 교회의 터와 관련된 것임을 보아야 한다.최초에 교회가 세워졌을때는 터의 문제가 없었다.초기에 교파들로 나누어지는데 문제가 없었기때문이다.그러나 오늘날 타이베이를 예를 든다면 한도시에 침례교,장로교,루터교,등의 예배당이 있어서 타이베이는 많은 예배당들이 숲을 이룬 도시가 되었다. 

1.건축의 터는 그리스도의 신장의 분량의 많고 적음에 있지 않음. 
2.우리가 믿고 실행하는 교회의 터 
   1)우리는 교회가 우주적으로 유일하다는 것을 믿는다. 
   2)우리는 교회가 각 지방에서 출현할 때에도 하나여야 한다는 것을 믿는다. 
   3)우리는 지방의 터를 제외한 모든 터는 종파이므로 존재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믿는다. 
  
3.영적인 실재와 교회의 터는 분리된 두가지 일임 
"예를 들어 천주교안에 그리스도가 없습니까?지난2,3백년 동안 생명방면에서 우리에게 가장 큰 도움을 준 사람은 마담귀용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그녀는 그리스도의 분량이 있었을뿐 아니라 그리스도로 가득했는데 아마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것입니다.하지만 마담 귀용부인은 어디에 있었읍니까?그녀는 모두가 유죄 판결하는 천주교안에 있었습니다.우리는 영적인 것과 교회의 터가 분리된 두가지의 일이라는것을 분명하게 보아야합니다.마담귀용은 실로 영적인 실재를 갖고 있었지만 그녀에게는 교회의 터가 없었습니다. 
메이어(F.B.Meyer)박사,앤드류 머리도 조직적인 기독교안에 있었습니다.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사람의 영적인 실재를 근거로 하여 교회의 터에 관한 문제를 규정해서는 안됩니다.하나님은 그분의 백성들이 이스라엘 땅에 머물며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삼아 하나님을 경배하길 원하셨습니다.예루살렘은 그들이 하나님을 경배하는 터였습니다.그들이 바빌론에 포로가 되었다가 칠십년이 지난 후에 때가 찼을때,하나님께서 고레스왕을 통해 더 이상 바빌론에 남으로는 안된다고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라고 명하셨습니다.소수의 사람이 예루살렘으로 돌아갔습니다.그런데 만일 그들가운데 말씀을 전하는 한 사람이 일어나서,중요한것은 예루살렘에 돌아가거나,바빌론에 남아 있는것이 아니고 영적인 분량의 문제이니 바빌론에 있어도 영적이기만 하면 된다고 말했다고 합시다.그 당시 다니엘이 가장 영적인 사람이었을 것입니다.신약의 용어로 말하자면 그는 그리스도로 가득한 사람이었습니다.이렇게 영적인 사람인 다니엘은 바빌론에 남아있었습니다.예루살렘으로 돌아간 사람은 다니엘처럼 열정이지 못했고,그들중에는 의견과 연약함이 있었고,어떤이는 이방인을 아내로 취했고,영적인 상태는 다니엘과 비교할 바가 못되었습니다.묻고싶습니다.다니엘이 있던 바빌론이 옳은지 영적이지 못했던 사람들이 서있던 예루살렘이 옳은지?다니엘은 잘못된 터에 있었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안배에 의한것이지 결코 자의로 거기에 있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그는 비록 바빌론에 있었지만 그의 마음은 오히려 예루살렘에 있었습니다. 
지방의 터는 무슨 의미입니까?나는 예를 들어 설명했는데,먼저 원을 하나 그려서 그것을 예루살렘이라고 했다.그리고 예루살렘에서 구원받은 모든 사람은 그곳에서 함께 모였을때 그들을 예루살렘교회라고 부르며 이때 예루살렘이라는 그 지방이 바로 예루살렘 교회의 터가 되는 것이다.이 말은 교회가 예루살렘이라는 지방에 있다는 의미이다.이렇게 말하고 다시 하나의 원을 그려 고린도교회의 예를 들었다.원래 고린도에는 하나의 교회가 있었는데,그 안에서 어떤 사람들이 분파로 나누어져 바울을 따르는 사람들이 바울파를 만들고,그후에 바울파안ㅇ에 있던 어떤 사람이 사마리아에 가서 사마리아에 있는 바울파라고 선포했다.고린도에서 처음에 오직 한 교회만 있었는데,그것이 고린도 교회이고,고린도에는 그 지역이 바로 고린도교회의 터이다.그들이 분파로 나누어져 바울파,아볼로파,게바파,그리고 그리스도파 등이 생겼으며,그들은 모두 지방이라는 터를 잃어버렸다.바울파를 바울을 그들의 터로 삼았고,아볼로파는 아볼로를 그들의 터로 삼았다.그러므로 바울에 속한 사람이 사마리아에 가서 바울파교회를 세운다면 사마리아라는 지방을 터로 한것이 아니다.어느날 예루살렘의 형제들이 시마리아로 와서 형제들의 집회에 참석했는데,그들이 바울파임을 알게 된다.그들은 바울파가 되어서는 안된다고 한다.하지만 바울파는 자신들이 바울파이어야하기에 견해를 굽히지 않는다.예루살렘에서 온 형제는 사마리아에 다른 장소에서 모이기로한다.이렇게 해서 사마리아라는 두개의 파가 생겼다.누가 지방의 터위에 있는가? 바울파라고 하는이들은 확실히 아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어쩌면 올바른 터 위에 있는 사람들은 매우 육에 속한 사람들이고 바울의 터 위에 서 있는 형제들은 오히려 매우 영적이고 모두가 그리스도로 충만한 사람들일지도 모른다.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사마리아에 왔을때 그리스도를 표준으로 삼을때 바울파에 가야하는가? 
다음날 스팍스 형제는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작은 그리스도가 되게 하고 교회를 작은 교회로 만들었다.교회를 이 터위에 제한 시켰다." 
당시 나의 마음은 평정을 유지하며 그의 말을 통역했지만 내 속에서는 매우 불편했다.이것은 진리의 문제이다. 2더하기 2를 하면 4가 되는데,어떻게 2더하기2가5가 될수있단 말인가? 

4.영적인 것에 치우쳐서 교회의 터를 소홀히 해서는 안 됨 
영적인 것은 상대적이지만 반대로 터의 문제는 절대적이다. 
이것은 진리의 문제이다.만약 교회의 터가 없다면 사람들은 런던의 아너오크에 가서 도움을 얻을 모르지만 그곳을 떠난 뒤에는 갈곳이 없고 갈길이 없다.왜냐하면 그들에게 영적인 것이 있지만 터가 없기 때문이다.우리는 우리의 형제들을 그들처럼 방랑하는 별이 되거나,정착할 곳이 없는 사람들이 되게 해서는 안된다. 

5.지방의 터위에 굳게 서서 진리의 길 위에서 행함 
오늘 온 땅에서 구원받은 사람들이 동서남북 각지에서 와서 함께 모임으로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다 있을 것이다.당신과 내가 주님의 교회를 건축하고자 한다면 무엇을 가리켜 교회의 터라고 하는지를 반드시 이해하여 한다.그렇지 않다면 건축은 불가능하다. 
지난 삼십여년 동안 주님은 한면으로는 영적으로 온전하게 하는것을 붙잡아야 하고 다른 한며으로는 터의 문제를 붙잡아야 한다는 것을 보여 주셨다.단지 영적이기만 하고 터가 없다면 건축할 수 없고 형제들은 즉시,갈길을 잃어버리게 되며 정처없이 방랑하는 별이 된다.또한 모든 일에는 그 일의 원리와 정해진 법칙이 있다.만약 우리가 진리의 길을 가지 않는다면 다른 사람이 그 길을 갈것이다.어느 날 진리의 길을 간 사람이 우리를 책망한다면 우리는 할 말이 없을 것이다.우리는 그 책망을 견딜수 없을 것인데 그 이유는 우리가 진리위에서 행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늘날 이 땅에는 조직적인 기독교안에 어려움이 있을뿐 아니라 스팍스형제와 같이 영적이고도 마음이 깨끗한 형제들 가운데에도 동일하게 어려움이 있다.우리는 하나님께서 동양에서 우리를 일으키신것이 바로 교회의 터를 위한 것임을 분명하게 알고있다. 
1937년 니 형제님은 안디옥 노선의 원칙을 교통할때 지방교회를 강조하여말했다.첫 번째 집회는 형제님의 병 때문에 부득이 내가 그를 대신해 말씀을 전하게 되었다.두번째 집회는 형제님이 다시 한번 새롭게 말씀을 전했는데,그때 녹취한 기록이 나중에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교회생활)이란 이름으로 출판되었다.그것은 니 형제님이 받은 빛으로 이 말씀들은 이십년동안 우리가운데서 분명해졌다.우리는 동양에서 주님이 일으켜 무엇을 하기를 원하는지 분명하게 알아야한다. 

제14장 
교회의 터를 회복함 

1.주님께서 동양에서 시작하신 회복 
이 메세지에서 나는 이 시대에 주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바로 우리가 주님을 위하여 그분의 간증이 된는것임을 말할 것이다.
동양에서 일을 시작할때 주님은 우리에게 기독교의 상황이 합당하지 않다는 느낌을 주셨다.의문에서 출발하여 우리는 한면으로 기독교계의 상황을 주의했고,다른 한면으로 주님의 말씀을 찾고 추구했다.그 결과 기독교계의 상황이 성경과 부합되지 않는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그러므로 초기부터 성경에 부합되지 않는 실행들을 하나 하나 내려놓기를 시작했다.그러고 나서 우리는 최선을 다해 성경의 원래의 모습으로 되돌리고자 했다.이시기를 회복의 초기라 말할 수 있다.처음 몇년동안은 회복의 전진속도가 빨랐고,그때가 1922년 전후였고,정식으로 회복을 시작한때는 1924년부터라고 볼수있다.1934년이 되어서 초기단계의 회복이 어느 정도 형태를 갖추었다. 
2.교회의 터를 회복함 
회복이 시작되고 얼마되지 않아 1925년 우리는 교회가 여러 종파로 나누어져서는 안되고 유일하게 하나이며,반드시 하나를 유지해야 한다는것에 분명했다.1928년,늦어도1931년 우피는 종파에 대해 분명하게 정의를 내릴 수 있었다.우리는 교회가 특별한 명칭이나 특별한 교통이나 특별한 믿음을 갖고 있다면 이것이 바로 돌파라는 것을 알았다.그러나 그때까지도 교회의 터에 대해서 알지 못했다.1934년에 이르러서야 교회가 하나 하나의 지방에 출현 한다는것에 대한 빛을 보았다. 
3.니형제님이 교회의 터를 봄 
충칭에서 발간한 (교회의 정통)오픈에서 니형제님은 1933년에 유럽 각 지방을 돌아보고 유럽 각지의 많은 이름있는 형제회 단체를 방문했다고 말했다.많은 영적인 사람들과 접촉했는데 그때 처음 스팍스형제를 만나게 되었다.그 당시 "형제회가 이렇게 나누어져 있는데 무엇을 기준으로 교회의 경계를 전해야 하는가?"한가지 의문을 가졌다.그때부터 연구한 결과 그는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교회가 우주적으로 유일하게 하나이지만 땅위에서 나타날 때에는 한 지방,한 지방에서 출현하며,또한 하나의 지방 마다 오직 하나의 교회가 출현 한다는 것을 분명하게 보게 되었다.니형제님은 형제회의 나누어 지고 하는것을 보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고 빛비춤 받은 결과 교회는 어떠한 것으로도 나누어 질 수 없고 오직 지방만이 교회를 나눌 수 있는 기준이 된다는것을 보게된다.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분명하게 본 것이다. 
아래는 워치만니형제가 위트니스 리 형제에게 보낸 서신이다. 
"형제님 그렇게 분명하지 않다면 기다려 보십시요" 
"위트니스리 형제님 당신의 앞날에 관하여 나는 마땅히 전시간으로 주님을 섬겨야 한다는 느낌이 있습니다.당신의 느낌은 어떤지요?주님이 당신을 인도하시기를 바랍니다." 
놀라운 것은 니 형제가 그 편지를 쓸때 내가 바로 주님앞에 직장을 내려 놓는 것에 갈등하고 있던 때였다는것이다. 
그는 교회의 터에 대한 빛을 보았고,동시에 영적인 방면의 중심인 그리스도가 중심이자 전주이시라는것이다.그 시기에 1934년 1월 전국적인 특별집회를 열기로 결정했다.니 형제님 안에서 교회의 터가 분명했을뿐 우리는 단지 교회가 하나여야 하고 종파는 옳지 않다는 느낌만 있었다. 

4.교회의 터의 문제를 확정함 
1934년에 이르러 우리 가운데에서의 주님의 회복은 큰 이정표를 세우게 되었다.우리는 교회의 내용이 중심과 전부이신 그리스도인으로 보았고,교회의 외적인 표현은 지방이 교회의 터가 된다는 것을 보았다. 
5.믿는이들이 각지에서 열렬하게 종파를 떠남 
1934년 각지에서 종파를 떠나는 사람들이 줄을 이었다. 
6.우리가 유지해야 될 하나의 증거 
1937년 니 형제님은 더 전진하여 한 지방 한 지방에 교회를 세워 주님의 증거를 유지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 말씀을 모아 편집한것이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생활)이다. 
7.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특별한 위임 
"사람들은 영적으로 온전하게 하면 그것으로 충분하지 어디에서 집회하는지 왜 그렇게 중요한가?"반문했다. 
그 당시 사람들은 스스로 영적인 사람이 될 수 있다고 느꼈을 뿐 아니라 영적인 사람들이 영안에서 함께 단결하여 하나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많은 그 당시 영적인 사람들이 교회의 터를 붙잡을 필요가 없다고 하였다.다만 구원받고 영적이며,복음을 전하고,양육하고 온전하게 하며,이미 충분하며,그리스도인이라고 가장 높은 곳에 이른 것이라고 말한다.당시 그들은 우리가 극단으로 가고 있고 한쪽으로 치우쳤다고 생각했다.그러나 우리는 주님의 간증이 시대적이라는것을 보았다.앞선 영재들이  본국과 실행들이 있지만 주님은 우리가 그들 세대의 간증을 짊어지는것을 원하지 않으셨다.주님은 움지이시는 분으로 계속적으로 전진하신다.이것이 우리가 깨달은 것이다.그러므로 우리는 그들의 영적인 몫에 대해서는 존경하고 사랑하지만 하나님은 더욱더 전진하길 원하신다는것을 분명히 알고 있었다.그것은 개인의 구원이나,영적인 사람이 되는 문제에 그치지 않고 주님께서 한지방 한지방에서 그분의 몸의 간증,즉 교회의 간증을 산출하시고 이를 통해 그리스도께서 그분 자신을 표현 하기 위한 한 단체적인 그릇을 얻으시는것이다.우리는 우리가 여기에 취하지 않으면 안 될 하나의 간증이 있다는것을 느껴다.때로는 우리가 극단적으로 가고 있는것이 아닌가 의문을 품기도 했다.우리는 항상 시험을 받았다.그러나 우리가 증언할 수 있는것은 매번 우리가 시험을 통과하고 어떤 사건을 그치고 나면 우리 속에서 더 분명해졌다는것이다.주님은 한 지방 한지방에 그분의 단체적인 증거를 건축하고자 하신다.이점에 대해 우리는 매우 분명하다. 

8.우리가 직면한 어려움과 출로 
1935년 쑹상지에박사 복음능력,자목사 신학의 가르침에 있어 상당한 분량이 있는 사람.그들의 방해공작! 

9.터 이외에 섞임을 가질 수 없음 
10.터를 실행 하는것은 축복을 가져옴. 
스팍스형제가 런던에 돌아가서 쓴 글에,"나는 많은 날 낮시간에 오백여명의 선발된 그리스도의 일꾼들에게 말씀을 전했고,매일 저녁 약 이천여명의 믿는이들에게 말씀을 전했다.많은 교회를 방문했고,만나는 사람마다 열성과 빛을 발했으며,우리가 준 말씀을 그들은 삼켰다."라고 말했다. 
우리가 사람들에게 칭찬을 얻을 수 있는 것은 바로 교회의 터이다. 
11.지방의 터는 우리가 믿고 의지하는것임 
12.다른 사람을 받아들이지만 주님의 간증을 손상시켜서는 안됨 
우리가 여기에서 신실하게 자신의 공과를 배우고 주님의 일을 열심히 하며,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않기를 바란다.다만 우리가 최선을 다해 신실하게 한다면 그 결과 그것이 우리의 일이 아니라 주님의 일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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