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4 새 예루살렘(3)
진리100선
생명강가 2012-06-04 , 조회 (465) , 추천 (0) , 스크랩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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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흐름, 한 나무, 한 길
열두째 항목은 오직 생명의 한 흐름, 생명의 한 나무, 생명의 한 길이 있다는 것이다.
만약 당신의 길이 나의 길과 다르다면, 무언가 잘못된 것이다! 당신이 잘못되었든지 내가 잘못되었든지,
아마 우리 둘 다 잘못되었는지도 모른다. 만약 아무도 잘못되지 않았다면,
그때 우리는 같은 길 안에 있어야만 한다. 왜냐하면 오직 한 길만이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도시들은 너무 많은 길들과 너무 많은 도로들이 있다. 따라서 길을 잃어버리기가 쉽다.
그러나 새 예루살렘에서는 그런 문제가 없다. 그 성은 오직 한 길과 한 도로만이 있기 때문이다.
새 예루살렘의 그림은 또한 그 길이 나선형으로 놓여 있음을 계시한다.
그 성 자체는 정상에 하나님의 보좌가 있는 산과 같이 가파르다.
그 길은 그 성의 기초석으로부터 사람들이 들어갈 수 있는 모든 열두 문을 지나간다.
그 길은 보좌에 이를 때까지 성 주위를 나선형으로 감아 올라간다.
생명의 강이 그 보좌로부터 그 성의 모든 열두 문에 이를 때까지 길 가운데로 흘러내린다.
당신이 어떤 문을 통해 들어가든지 당신이 한 길 안에서 나아가면 결국 보좌에 다다를 것이다.
그 길은 위로 올라가지만 생명 강은 아래로 내려온다.
하나님의 생명은 우리를 위로 이끄시기 위해 우리에게 흐른다.
우리 안에 흐름이 있을 때마다 항상 그 흐름은 우리를 길로 이끌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그 길을 따라갈 때 그 길은 우리를 하나님의 보좌로 이끌 것이다.
생명의 흐름에 대한 누림은 생명의 길을 가져다주고, 생명의 길은 우리를 하나님께로 이끈다.
만약 우리가 오직 생명의 길만 따른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 안으로 인도될 것이다.
오늘날 교회 생활에서는 오직 생명의 한 흐름, 하나의 생명나무, 그리고 생명의 한 길이 있다.
생명의 길은 항상 위로 향한다. 이 길을 따르면 따를수록 우리는 더욱더 보좌를 향하여 위로 나아갈 것이다.


정금 길
열셋째 항목은 이 한 길이 모두 금으로 되어 있다는 것이다(계 21:21).
이것은 생명의 길이 하나님의 본성 안에 있음을 상징한다.
영적인 길은 항상 하나님의 본성과 함께 하는 생명의 길이어야만 한다.
당신이 어떤 방법으로 무언가를 해야만 한다고 느낄 때마다 그 방법은 하나님의 본성을 포함해야만 한다.
만약 하나님의 본성에 반대되는 방법으로 당신이 무언가를 한다면 그것은 옳은 방법이 아니다.
옳은 길은 정금 길의 방법, 즉 하나님의 본성의 방법이다.
당신이 생명의 흐름 안에 있을 때 당신은 길을 갖게 되고, 이 길은 항상 하나님의 본성을 갖는다.
새 예루살렘에 나타난 이들 중요한 항목은 교회 생활의 모든 방면들을 인식하는 데 나를 크게 도왔다.
왜냐하면 이 성이 하나님의 건축의 궁극적인 최종 완성이기 때문이다.


성의 문들
성에는 동서남북 모든 방향을 망라하는 네 방향에 각각 세 문들이 있다.
숫자 4는 항상 창조나 피조물을 나타낸다. 계시록 4장은 네 생물을 계시하는데 이것은 모든 생물을 대표한다.
숫자 3은 신격의 세 위격을 상징한다. 이것은 신격의 세 위격이
땅의 모든 네 방향으로부터 온 모든 사람들을 위한 입구라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어디에 있든지 신격의 세 위격은 우리에게 도달할 수 있으시다.
누가복음 15장은 세 비유를 기록하고 있는데 잃어버린 양을 찾는 목자, 잃어버린 동전을 찾는 여인,
그리고 방탕한 아들을 기다리는 아버지의 비유가 그것이다.
주 예수님은 우리를 찾아 구속하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시려고 목자로 오셨다.
그리스도께서 일하신 후에 성령께서 우리를 되찾아오기 위해 우리 마음 안에서
찾으며 비추시는 여인으로 오셨다.
성령의 찾으시는 일로 말미암아 우리는 회개하고 기쁘게 받으시는 아버지께로 돌아온다.
그때 우리는 문으로 들어왔다. 신격의 세 위격이 바로 우리를 건축 안으로 이끄셨다.
그분들은 땅의 네 모퉁이에서 온 누구에게나 입구이시다.
이것은 삼일 하나님의 누림, 즉 하나님의 사랑, 그리스도의 은혜, 성령의 교통 안으로 들어가기 위한
고린도후서 13장 13절에 있는 말씀과 일치한다.


거듭남의 진주
열다섯째 항목은 열두 문의 각각에 한 진주씩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진주는 거듭나는 일을 상징한다.
우리가 신격의 세 위격을 통하여 하나님의 건축의 영역 안으로 들어갈 때, 우리는 거듭나게 된다.
진주는 죽음을 나타내는 물속에 거하는 살아 있는 유기체인 진주조개 안에서 형성된다.
진주조개가 모래알에 의해 상처받을 때 조개는 모래알이 아름다운 진주로 변화될 때까지
상처 받은 영역에 남아 있는 이 모래알 위에 생명의 액체를 분비한다.
이것은 그 의미가 풍성하다. 그리스도는 죽음의 물 가운데 오신 살아 있는 ‘조개’이시다.
그분은 모래알들과 같은 우리에 의해서 상처 받았고, 모래알인 우리는 상처 입힌 곳에 남아 있었다.
따라서 그분의 생명이 우리 안으로 분비되었고, 우리는 거듭났다. 거듭남은 변화시키는 일의 시작이다.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매일 매일 깊이, 변화의 과정 안에 있다.
그러나 다른 어떤 이들은 거듭남에서 과정이 멈추었다. 어떤 이들에게는
변화되는 일이 지금 일어나고 있지만 오늘 저녁이나 최소한 내일 안에는 실패할지도 모른다.
우리는 그렇게 괴상하고 악하다. 우리 각자 안에는 거역하는 본성이 있다.
때때로 우리는 주님께 그 모든 것을 포기하기 원하고 또 변화되든 안 되든
주의하지 않는다고 말하기조차 했을 것이다. 그러나 5분 후에 우리는 주님께 우리를 용서해 주시길 구한다.
우리는 달아날 수 없다! 우리는 되돌아와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어떤 평강도 가질 수 없을 것이다.
오! 이 변화시키는 일 가운데 포함된 많은 항목이 있다. 거듭남의 진주 문은 단지 시작이요,
성 안으로 들어가는 입구일 뿐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건축의 영역 안에 있을 때
우리는 계속해서 주님의 변화시키는 일 안에 있어야 한다.


신성한 본성의 체험
열여섯째 항목은 일단 진주 문을 통해 들어가면 즉시 성 안에서 정금 길 위에
발걸음을 내딛게 된다는 것이다(계 21:21). 이 정금 길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인가?
체험에 따르면 우리가 주님의 변화시키는 일의 첫째 단계인 거듭남에 주의를 기울일 때,
우리는 하나님의 거룩한 본성을 접하고 있고 정금 길 위에 있음을 느낀다.
우리는 체험 가운데서 거듭나는 일에 관해 알아야 하고,
매일 매일 우리 안에서 십자가의 일인 조개의 상처 냄을 체험해야 한다.
그때 우리는 조개로부터의 분비, 즉 그 영 안에 있는 부활의 생명을 얻게 될 것이다.
우리는 우리 안에 계신 성령의 신성한 생명의 분비를 항상 필요로 한다.
우리가 십자가를 체험하면 할수록, 우리는 부활, 곧 생명의 분비를 더 인식하게 될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주 예수님의 상처 가운데 거하는 십자가의 공과를 매일 체험해야만 하는 이유이다.
부활 생명의 분비로 말미암아 우리는 계속 정금 길, 곧 거룩한 본성 안에 있는 것을 체험할 것이다.
이는 우리를 하나님의 임재 안으로 이끌 것이다. 이 길 가운데서 우리는
생명의 흐름을 체험할 것이고, 이 흐름 안에서 우리는 생명의 공급, 영적인 음식을 누릴 것이다.
이 모든 항목들은 서로 관련되어 있고, 우리에 의해 체험되어야만 한다.


생명의 내적 흐름
열일곱째 항목은 어떤 방향에서 왔든지 간에 우리는 성에 이를 것이고,
어떤 문을 사용하든 우리는 오직 한 길 위에 있을 것이라는 점이다(계 22:2).
새 예루살렘은 성의 기초가 정사각형인 산과 같은 모양임을 기억하라.
이 ‘산’은 모두 같은 크기인 삼차원으로 되어 있다. 그것의 넓이와 길이와 높이는 각각 일만 이천 스다디온이다.
성의 한 길이 꼭대기에서 바닥까지 나선형으로 감아 내려온다. 그것은 정상에 있는
하나님의 보좌에서 시작하며 나선형 길의 마지막은 바닥에 있는 열두 문들을 지난다.
그래서 어떤 방향에서 왔고, 어느 문으로 들어왔든 당신은 다른 모든 이들과 함께 같은 길 위에 있을 것이다.
우리는 나누어지지 않는다. 우리는 모두 한 길, 한 흐름 안에 있다. 얼마나 의미심장한지!
단지 같은 길이 아니고 한 길이다. 한 성에 아주 비슷한 두 길이 있을지 모르나 이 길은 한 길이다.
이것은 거기에 오직 한 흐름만 있음을 의미한다.
만약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오직 내적인 흐름만 주의한다면 얼마나 놀랍겠는가?
내가 일본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을 방문하러 온 한 중국인 그리스도인이라고 가정해 보자.
중국 사람은 일본 사람과 아주 다르다. 그러나 우리가 모든 외적인 것들을 잊어버리고
단지 내적인 느낌과 내적인 흐름만을 주의할 때 그 결과는 참으로 놀라운 것이다.
거기에는 같은 맛과 같은 감정과 같은 느낌이 있다. 모든 것이 같다.
이 원칙은 물론 유럽과 미국에서 온 그리스도인에게도 적용된다.
문제는 비록 내적 흐름이 하나이고 우리가 그러한 한 흐름 안에 있다 할지라도,
우리는 너무 많은 외적인 것들을 주의한다는 것이다.
한 무리의 그리스도인들이 함께 있어 놀라운 교통을 갖는다고 생각해 보라.
그들은 모두 생명의 한 흐름 안에 있다. 그러나 그때 어떤 그리스도인이 대화 가운데서 다른 사람에게
“당신은 어느 교회에 속해 있습니까?”라고 묻는다. 상대편 사람은 아마 자기가 감리교인이라고
대답할지 모르며 질문을 던진 첫째 사람은 아마 좀 경직된 채 자기를 침례교인이라고 말할지 모른다.
우리 중 대부분은 이러한 체험을 갖고 있다. 우리가 그리스도에 대하여 함께 교통할 때,
거기에는 놀라운 흐름이 있지만, 교파에 관하여 말할 때는 모든 사람의 얼굴이 길어진다.
결국 새 예루살렘에서 우리는 모두 같은 흐름, 한 길 안에 있을 것이며, 모두 같은 음식에 참여할 것이다.
나는 그것이 너무 늦지 않게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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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강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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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새 예루살렘에서 우리는 모두 같은 흐름, 한 길 안에 있을 것이며,
모두 같은 음식에 참여할 것이다.
나는 그것이 너무 늦지 않게 되기를 바란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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