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예루살렘에서 성은 진주문과 열두 층의 보석으로 건축된 벽옥의 성곽이 있는 금으로 된 산이다.
금은 신성한 본성 안에 있는 하나님을
표현하며, 진주는 죽음과 부활 안에 있는 그리스도를 표현하며,
보석은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으로 인한 그분의 변화시키는 역사 안에
계시는 그 영을 표현한다.
새 예루살렘에서 우리는 신성한 모든 풍성의 근원인 아버지와 신성한 모든 풍성의 체현인 아들과
신성한 모든 풍성의
실제화이신 그 영의 삼일의 표현을 본다.
우리는 신성한 모든 풍성의 근원이신
아버지의 내적 내용을 보아야 한다.
신성한 모든 풍성의 근원이신 아버지 하나님의 표현은 금으로 예표된 그분의 본성에 근거한다(계 21:18하).
새 예루살렘 전체의 기본은 금인데 이는 성 자체가 금으로 된 산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신성한 본성이 바로 성의 기본이며 기초이며 터이다.
아버지의 삼일의 표현은 그분의 본성에 근거할 뿐 아니라 그분의 영광에 근거한다(계 21:11).
하나님 자신이 성의 빛이시기 때문에 새
예루살렘에는 자연적이거나 사람이 만든 빛이 필요없다.
빛은 하나님의 표현의 본성이다. 하나님 자신은 그분의 내적 본성에서 금으로 상징되며,
하나님이 빛이심은 그분의 표현에서의 본성을 말한다. 이 빛이 비췰 때 이 비췸은 그분의 영광이 된다.
새 예루살렘에 관하여 먼저 뚜렷한 두
가지는 금과 비취는 영광이다.
신성한 모든 풍성의 근원이신 아버지의 삼일의 표현은 그분의 비취는 영광 안에 있는 금의 본성에 근거한다.
이 이상은 오늘날 우리의 실제적인 생활 안에 적용되어야 한다.
요한 계시록은 우리에게 성 자체가 금이며(계 21:18) 성의 길은
투명한 유리 같은(계 21:21) 정금임을 말한다.
이것은 우리의 체험 안에 있는 금으로 된 산이 우리의 방법과 길이 됨을 뜻한다.
순수하고
투명한 신성한 금이 일상생활에서 우리의 길이 되어야 한다.
오늘날의 교회 생활 안에서의 길은 하나님의 순수하고 투명한 신성한 본성이다.
교회
생활 안에서 당신은 순수해야 하고 투명해야 하며 솔직하고 곧아야 하며 열려 있어야 한다. 당신은 신성해야 한다.
정치하는 것은 하나님의 길이
아니다. 하나님의 금의 본성이 우리의 길이다.
만일 당신이 당신의 길인 하나님의 신성한 본성 안에서 걷고 행동하고 당신 존재를 이 본성 안에
놓는다면
하나님의 빛이 당신 안으로부터 비출 것이며, 이 비춤이 그분의 영광이다.
다른 사람이 당신의 집에 올 때 영광이 있음을 깨달을 것이다.
당신의 일상생활과 가정 생활과 직장 생활과
교회 생활 안에서 다른 사람들이 신성한 금, 즉 신성한 비추는 영광을 볼 수 있어야 한다.
만일
당신이 영리하고 인간적이며 정치적으로 행동한다면 사람들은 당신의 행동에서 어떤 신성한 본성을 느낄 수 없을 것이다.
당신의 행동 안에 비추는
영광이 없을 것이며 오히려 당신의 행동 전체가 불투명할 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거의 모두가 ‘정치적’으로 행동한다. 그들의 정중함은 사실상
대부분이 정치이다.
그러나 누가 하나님의 본성 안에서 행동하고 걸으며 생활하는가?
심지어 오늘날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도 신성한 본성 안에서 살지
않는다. 오늘날 세상에는 금의 길이 없다.
지난 오십오 년 동안 사람들은 나에게 너무 솔직하게 말하지 말라고 충고했다.
그러나 나는 솔직하지
않으려고 노력할 때마다 내 자신이 뱀의 본성 안에서 행동하고 있음을 느꼈다.
많은 사람들이 서로의 앞에서는 정중하게 행동하지만 서로의 뒤에서
말하는 ‘뒤에서 무는 사람’들이다.
이런 종류의 행동은 새 예루살렘의 금의 길이 아니다.
오늘날 우리는 주님의 긍휼로 주의 회복 안에서 약간의
금의 길을 볼 수 있으며 또한 신성한 영광의 비춤이 조금 있다.
성경은 천연적인 방법으로 윤리적인 것들을 가르치지 않는다. 성경은 우리가 걸어야 할 걸음을 보여 주는 계시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본성
안에서 걸어야 하며 그럴 때 자연히 신성한 영광이 우리 안에서 비출 것이다.
그때 사람들은 금이시며 빛이신 아버지 하나님의 표현을 볼 수 있을
것이다.
내가 말하고 있는 것은 신성한 모든 풍성의 근원이신 아버지를 체험한 나의 매일의 체험에 따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