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의 유일한 터 위에 서고, 그리스도의 몸의 제한 아래 머물며, 한마음 한뜻 안에서 몸을 의식하는데 앞장 섬 개요, 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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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일락 2012-07-07 , 조회 (787) , 추천 (0) , 스크랩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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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시지 7

교회의 유일한 터 위에 서고, 그리스도의 몸의 제한 아래 머물며, 한마음 한뜻 안에서 몸을 의식하는데 앞장 섬

 

성경: 고전 1:2, 1:11, 12:3, 고후 10:13, 4:16, 고전 12:12-27

 

. 우리는 교회의 유일한 터, 곧 하나라는 진정한 터 위에 서 있는데 앞장서야 한다.

A. 고린도전서 12절은 고린도에 있는 교회에 대해 말한다. 이것은 교회의 존재와 표현과 실행을 위한 고린도라는 지방을 보여 준다. 그러한 지방은 지방 교회들의 지방적인 터가 되며, 바로 이 터 위에 지방 교회들은 각각 건축된다. 따라서 고린도에 있는 교회는 고린도라는 도시의 터 위에 건축되었다.

B. 초대 교회 생활의 실행은 한 도시에 한 교회를 갖는 실행, 곧 한 도시에 오직 하나의 교회만 있는 실행이었다. 어느 도시에도 하나를 초과하는 교회가 없었다.

1. 이것이 길이나 구역이 아닌, 도시를 단위로 하는 지방 교회이다.

2. 한 지방 교회의 관할 지역은 그 교회가 위치한 도시 전체를 포함해야 한다. 즉 그 도시의 경계보다 더 크거나 더 작아서는 안 된다.

3. 그 경계 내에 있는 모든 믿는 이들이 그 도시 안에서 하나의 유일한 지방 교회를 구성해야 한다.

4.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장소인 하나라는 진정한 터 위에서 우리가 모이는 데에는 네 가지 특징이 있다.

a. 첫째, 하나님의 백성은 항상 하나이어야 한다. 하나님의 백성 가운데는 분열이 있어서는 안 된다.

b. 둘째, 하나님의 백성이 그 안으로 모여야만 하는 유일한 이름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고, 그 이름의 실재는 그 영이다. 다른 어떤 이름으로 불리는 것은 교파가 되고 분열이 되는 것이다. 이것은 영적인 음행이다.

c. 셋째, 신약에서 하나님의 처소, 하나님의 거처는 특별히 우리의 영, 즉 우리의 연합된 영, 곧 신성한 영에 의해 거듭나고 신성한 영이 내주하시는 우리 사람의 영 안에 위치한다. 하나님을 경배하기 위한 우리의 집회에서 우리는 반드시 우리의 영을 사용해야 하고 모든 것을 영 안에서 해야 한다.

d. 넷째, 하나님을 경배할 때 우리는 반드시 육체와 자아와 타고난 생명을 거절하고, 그리스도, 오직 그리스도로만 하나님을 경배함으로써 제단으로 상징되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참되게 적용해야 한다.

. 하나라는 진정한 터 위에 서 있는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들로서 우리는 반드시 다른 지체들의 제한을 받는데 앞장 서야 하며, 우리의 분량을 넘어서지 말아야 한다.

A. 하나님은 그분께서 뜻하시는 대로 몸의 모든 지체들을 두셨다.

1. 머리께서 우리를 몸 안에 있는 각자의 특정한 위치에 두시며, 각자의 특정한 기능을 우리에게 지적해 주신다.

2. 우리 지체들 각 사람은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자신의 위치를 갖고 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지정하신 것이고 우리는 반드시 이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3. 그러한 지정하심은 하나님의 뜻에 따른 것이기 때문에, 각 지체가 다 필요하다.

4. 각 지체는 자신의 특성을 가지고 있고, 각자가 자신의 역량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특성이 각 지체의 위치나 적임 혹은 사역을 조성한다.

B. 몸의 성장과 발전을 위한 기본적인 요구는 우리가 자신의 분량을 인식하고 그것을 넘어서지 않는 것이다.

1. 우리는 반드시 우리의 분량에 기꺼이 제한을 받아야 한다.

2. 우리가 우리의 분량을 넘어서자마자, 머리의 권위를 넘어서고 기름 바름에서 벗어나게 된다.

3. 우리는 우리의 분량을 넘어설 때 몸의 질서를 해치게 된다.

4. 냉철한 생각 없이 우리 자신을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으로 높게 생각하는 것은 몸의 생활의 합당한 질서를 소멸시킨다.

C. 바울과 같이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나누어 주신 분량에 따라 움직이고 행해야 하며, 하나님께서 재어 주시고 측량해 주신 한계 안에 머물러야 한다.

1. 우리는 주님에 대한 우리의 일이나 체험이나 누림을 증언할 때, 반드시 분량 안에서, 즉 어떤 제한 안에서 증언해야 한다.

2. 우리는 일이 확산되기를 기대할지라도 반드시 하나님의 제한 아래 있기를 배워야 한다. 우리는 한계 없이 확산되기를 기대해서는 안 된다.

a. 우리가 그 영을 따라 일을 확산한다면, 항상 어떤 제한이 있을 것이다.

b. 내적으로 우리는 주님께서 어느 정도까지만 일을 확산하고자 하신다는 의식을 가질 것이다. 어떤 지점을 넘어서 일을 확산할 때 내적으로 우리는 평안을 갖지 못한다.

c. 외적으로 환경 안에서 주님은 어떤 일들을 일으키셔서 일의 확산을 제한하실 수 있다. 환경은 우리가 특정한 경계선을 넘어서는 것을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

3. 교회의 봉사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만큼만 측량해 주셨다는 것을 깨닫고 뻗어나가지 말아야 한다.

. 지방적으로나 전 세계적으로 주님의 회복 안에서의 그분의 움직임을 위해 우리는 한마음 한뜻으로 몸을 의식하는데 앞장서야 한다.-1:14, 2:46, 4:24, 15:25, 15:6.

A. 우리는 항상 몸을 고려하고, 몸을 관심하며, 몸을 존중하고, 몸을 위한 최상의 것을 해야 한다.

B. “니 형제님이 몸에 대해 가르칠 때, 그는 우리가 무엇을 하든 교회들이 그것에 대해 어떻게 느낄지를 고려해야 한다고 말했다.”

C. 몸 안에는 독립이나 개인주의가 있을 수 없는데, 이것은 우리가 지체들이고 지체들은 몸에서 떨어져서 살 수 없기 때문이다.

1. 자신이 몸의 지배라는 것을 보는 사람들은 몸을 귀히 여기고 다른 지체들을 존중하는데, 이 지체들 하나하나가 없어서는 안 될 이들이다.

a.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들이므로, 몸을 위한 느낌을 가지고 있어야 하며 머리의 느낌을 우리 자신의 느낌으로 취해야 한다.

b. 우리는 몸의 생활 안에서 같은 혼이 되고, 진심으로 그리스도 예수님의 일들, 곧 모든 성도들과 함께하는 교회에 관한 일들을 관심해야 한다.

2. 언제든지 몸에 대한 계시가 있는 곳에는 몸을 의식하는 것이 있고, 몸을 의식하는 것이 있는 곳에는 개인주의적인 생각과 행동이 배제된다.

a. 우리가 몸을 알기 원한다면, 우리의 죄악된 생명과 타고난 생명에서 구출되어야 할 뿐 아니라 우리의 개인주의적인 생명에서도 구출되어야 한다.

b. 아버지께서 세상과 대립되시고, 그 영께서 육체와 대립되시며, 주님께서 마귀와 대립되시듯이, 몸 또한 개인과 대립된다.

c. 우리는 머리에서 독립할 수 없듯이 몸에서도 독립할 수 없다.

d. 개인주의는 하나님 보시기에 가증한 것이다.

(1) 몸의 원수는 자아, 곧 독립적인 이다. 우리가 몸 안에 건축되려면 반드시 자아를 유죄 판결하고 부인하고 거절하며 버려야 한다.

(2) 우리는 하나님을 의지해야 할 뿐 아니라 몸, 곧 형제자매들을 의지해야 한다.

e. 내가 모르는 것을 모의 다른 지체가 알고, 내가 보지 못하는 것을 몸의 다른 지체가 보며, 내가 할 수 없는 것을 몸의 다른 지체가 할 것이다.

f. 우리가 우리의 동료 지체들의 도움을 거절한다면 그리스도의 도움을 거절하고 있는 것이다. 개인주의적인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조만간 말라 버릴 것이다.

 

71

아침의 누림

 

8:1 그날에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큰 박해가 일어났다.

1:11 “네가 보는 것을 두루마리에 써서 일곱 교회, 곧 에베소, 서머나, 버가모, 두아디라, 사데, 빌라델비아, 라오디게아에 있는 교회에게 보내어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고전 1:2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는 한 지방, 곧 예루살렘이라고 하는 도시의 행정 구역 내에 세워진 최초의 교회였다. 이것은 주님께서 마태복음 1817절에서 가리키신 바와 같이, 그 지방에 있는 교회였다. 이것은 주님께서 마태복음 1618절에서 계시하신 우주적인 교회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인 우주적인 교회의 한 부분일 뿐이다. 이 문제(한 지방에 교회를 세우는 것)에 관한 기록은 신약 전체에 걸쳐 일관적이다.

요한계시록을 일곱 교회에게 보낸 것은 일곱 도시에 보낸 것과 같다. 이것은 초대 교회생활의 실행이 한 도시에 한 교회를 갖는 실행, 곧 한 도시에 오직 하나의 교회만 있는 실행이었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 준다. 어느 도시에도 하나를 초과하는 교회가 없었다. 이것이 길이나 구역이 아닌, 도시를 단위로 하는 지방 교회이다. 한 지방 교회의 관할 지역은 그 교회가 위치한 도시 전체를 포함해야 한다. 즉 그 도시의 경계보다 더 크거나 더 작아서는 안 된다. 그 경계 내에 있는 모든 믿는 이들이 그 도시 안에서 하나의 유일한 지방 교회를 구성해야 한다.

 

오늘의 읽을 말씀

고린도전서 12절은 고린도에 있는 교회에 대해 말한다. 이것은 교회의 존재와 표현과 실행을 위한 고린도라는 지방을 보여 준다. 그러한 지방은 지방 교회들의 지방적인 터가 되며, 바로 이 터 위에 지방 교회들은 각각 건축된다. 교회의 존재와 표현과 실행을 위해서 교회는 참으로 한 장소가 필요하고, 신약에 따르면 그 장소는 지방이다. 고린도에 있는 교회는 고린도라는 도시의 터 위에 건축되었다. 아테네에 있는 교회는 아테네시라는 터 위에 건축된다. 뉴욕에 있는 교회는 뉴욕시라는 터 위에 건축된다. 그러므로 지방은 자연적으로 교회의 터가 된다.

워치만 니 형제님은 하나님께서 지방이라는 터 위에 교회를 건축하시는 것은 매우 지혜로운 방법이라고 지적했다.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수많은 사람들이 있다. 지구상 어느 곳이든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흩어지지 않고 함께 모여 한 교회가 되어야 한다. 만일 지방이라는 합당한 경계가 없다면 교회들을 세우는 경계가 없을 것이다. 오늘날 남부 캘리포니아에는 대만 복음교회라고 불리는 한 교회가 있다. 그 믿는 이들은 그들의 터로 대만을 사용했다. 나는 중국 옌타이라는 도시에서 구원받았다. 옌타이에 영국 성공회가 있었다. 사람들은 아주 쉽게 교회들을 세운다. 오늘날 식당을 세우는 것보다 교회를 세우는 것이 더 쉽다. 모든 교파들은 남침례교, 장로교, 루터교를 포함한 분열적인 많은 터들을 가지고 있다.

만일 우리가 성경에서 하나님에 의해 세워진 본에 따라 한 도시에 한 교회를 갖는다면 하나를 지킬 수 있다. 한 믿는 이가 어떤 도시에 가면 그 도시에 있는 교회 안에 반드시 있어야 한다. 만일 내가 도쿄에 간다면 나는 도쿄에 있는 교회에 속해야 한다. 만일 내가 런던에 간다면 나는 런던에 있는 교회에 가야 한다. 만일 내가 댈러스로 간다면 나는 댈러스에 있는 교회 집회에 참석해야 한다. 그렇다면 자연히 분열은 없을 것이다. 성경은 믿는 이들이 어떻게 모여야 하는지에 대한 본을 세웠다. 그리스도인들의 처음 모임은 예루살렘에 있었다. 사도행전 81절은 그 모임을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라고 불렀다. 예루살렘은 큰 도시이지만 그 도시에 단지 한 교회만 있었다. 비록 한 도시에 한 교회가 있지만 교회가 반드시 한 장소에서만 모여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가 있는 그 도시가 교회의 유일한 지방적인 터라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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