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 14:5 … 그가 백합화같이 피겠고 …
아 2:1-2 나는 사론의 수선화요 골짜기의 백합화로다 여자들 중에 내 사랑은 가시나무 가운데 백합화 같도다
마 6:28 또 여러분은 왜 옷에 대하여 염려하십니까?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지 잘 생각해 보십시오. 수고도 하지 않고 물레질도 하지 않습니다.
![]() |
![]() | ||
[각주] | |||
아침의 누림 호세아서 14장 5절 하반절에 따르면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신뢰하는 순수한 생활을 상징하는) 백합화와 같이 필 것이다. (호세아-말라기 라이프 스타디, 8장, 70쪽) 아가 2장 1절에서 연인은 자신이 다만 보잘 것 없는 사람으로서, 한 면에서는 평범한 세상(사론―평원을 의미함)에서 아름답지만 멸시받는 생활(수선화)을 하며, 또 한 면에서는 낮은 위치(골짜기)에서 순수하고 신뢰하는 생활(백합화―마 6:28)을 한다는 것을 겸손히 깨닫는다. (영어 회복역, 아 2:1 각주 1) 여기서 그리스도는 세상을 사랑하는 간음하는 여자들(딸들―약 4:4) 가운데 있는 그분의 연인이자, 더럽고 믿지 않는 사람들(가시들) 가운데 순수하고 신뢰하는 생활(백합화―마 6:28)을 하는 사람인 그녀를 귀하게 여기신다. (영어 회복역, 아 2:2 각주 1)
오늘의 읽을 말씀 신성한 생명의 풍성을 표현하는 믿음의 생활은 복잡하고 뒤얽힌 상황들에서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의 죽음을 체험한 것의 결과이다(비교 고후 4:7-18). 열왕기상 7장 16절부터 20절까지에서 영적인 의미에 따르면, 기둥 꼭대기의 공 같은 두 개의 머리는 일종의 증거(‘두 개’의 기둥머리)로서 다음의 것을 가리키고 있다. 자신을 하나님의 심판(놋) 아래 두고 자신을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여기는 사람들은 복잡하고 뒤얽힌 상황(바둑판 무늬와 사슬 무늬) 가운데서 부활의 과정(기둥머리의 받침이 높이가 ‘삼 규빗’임)을 통하여 완전한(기둥머리 두 개의 높이의 합이 ‘십 규빗’임) 책임(기둥머리 한 개의 높이가 ‘오 규빗’임)을 짊어질 수 있고 신성한 생명의 풍성(석류)을 표현할 수 있는데, 이것은 그들이 자신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서(백합화) 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건축물의 간판과 같은 기둥인 믿는 이는 반드시 믿음으로 사는 증거를 지니면서, 책임을 짊어져야 하고, 바둑판 무늬의 끝냄과 사슬 무늬의 제한 아래서 부활의 과정을 통해 생명의 풍성을 표현해야 한다. (영어 회복역, 왕상 7:16 각주 1) 이러한 복잡한 상황 속에서 책임을 지기 위해서 우리는 하나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아야 한다. 열왕기상 7장 19절은 “주랑 기둥 꼭대기에 있는 머리는 (지름이 사 규빗으로) 백합화 모양으로 만들었으며”(영어 회복역 참조)라고 말한다. 백합화는 하나님을 믿음으로 사는 생활을 상징한다. 먼저 우리는 우리가 타락하고 무능력하고 자격 없다는 것과 또 우리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인식하며 우리 자신을 유죄 판결해야 한다. 그러고 나서 우리는 우리의 어떠함에 의해서나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에 의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음으로 살아야 한다. 우리는 반드시 우리의 어떠함에 의해서가 아니라,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어떠함에 의해 존재하는 백합화이어야 한다(마 6:28, 30). 오늘 이 땅에서의 우리의 생활은 하나님께 달려 있다. 얽히고 복잡한 교회생활 안에서 우리가 과연 어떻게 책임을 질 수 있는가? 우리 자신으로는 할 수 없지만 하나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산다면 할 수 있다.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신다. 이것이 백합화이다. 책임을 지시는 분은 내가 아니라 그분이시다. 나는 내 자신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분에 의해서 살며, 내 자신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분에 의해서 사역한다. … 아가 2장 1절과 2절에서 추구하는 이는 “나는 골짜기의 백합화로다”라고 말한다. 그때 주님은 “여자들 중에 내 사랑은 가시나무 가운데 백합화 같도다”라고 답하신다. 도대체 이 세상의 어떤 건축가가 꼭대기에 백합화 모양이 있는 그러한 기둥 머리를 떠받치는 놋 기둥을 설계하겠는가? 인간적으로 말해서 이것은 의미가 없지만, 영적으로 말해서 이것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한편으로, 우리는 유죄 판결받고 심판받은 놋이다. 다른 한편으로, 우리는 살아 있는 백합화들이다. 놋은 “내가 아니다”를 의미하고 백합화는 “오직 그리스도”를 의미한다. 백합화 같은 사람들은 “지금 내가 사는 생명은 믿음 안에서, 곧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 안에서 사는 생명입니다.”라고 말할 수 있다. 이 모든 것에 의해 우리는 우리가 바둑판 무늬와 사슬 무늬로 가득한 복잡하고 뒤얽힌 상황 속에서 불가능한 책임을 지고 있는 백합화들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장로들은 “주님, 이 복잡한 상황들을 제하소서.”라고 말하지 말아야 한다. 오히려 그들은 더욱 복잡한 상황들을 기대해야 한다. 내가 확신하건대, 여러분이 복잡한 상황들이 없어지도록 기도하면 할수록 더 많은 복잡한 상황들이 생길 것이다. 바둑판 무늬로 뒤얽힌 모든 것은 그 안에서 백합화들이 자라는 기초이자 모판이다. (창세기 라이프 스타디, 83장, 1136-1137쪽)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