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린도후서 메시지 46 - 가난한 성도들을 공급하는 것에 관한 사도의 교통 (Ⅰ)
W.L. LifeStudy
Ezra Zion , 2013-03-20 , 조회 (74) , 추천 (0) , 반대 (0), 스크랩 (0)
http://cafe.chch.kr/bridge/70622.html


메시지 46 - 가난한 성도들을 공급하는 것에 관한 사도의 교통 (Ⅰ)
 
성경 : 고린도후서 8:1-15

 바울은 사랑하는 아버지처럼 고린도전서와 후서를 썼다. 그의 첫 번째 서신에서 바울은 고린도인들을 징계했다. 부모들은 자녀들을 징계할 때 그들이 소원해질 위험을 무릅써야 한다는 것을 안다. 만일 부모가 무제한으로 자녀를 징계하면 자녀는 집을 떠나 도망갈지도 모른다. 고린도전서를 쓴 후에 바울은 그의 징계에 대해 고린도의 믿는이들이 어떻게 반응할 것인지를 관심했다. 바울은 그 문제에 관해 마음이 놓이지 않았으며 심지어 그 편지 쓴 것을 다소 후회하기조차 했다. 그는 고린도에 있는 온 교회가 그에게서 소원해지지는 않을까에 대해 염려했다. 그의 깊은 관심으로 인해 바울은 첫 번째 서신에 대한 고린도인들의 반응에 대한 소식을 가져올 디도를 고대하고 있었다. 2장에서 바울은 디도를 만나지 못했기 때문에 그의 영 안에 안식이 없었다. 그러나 우리는 7장에서 디도가 좋은 소식을 가지고 온 것을 본다.

 바울의 첫 번째 서신은 고린도인들을 근심하게 하였지만 이 근심은 구원에 이르는 회개를 산출했다. 그 구원은 완전한 화해였다. 바울이 이 기쁜 소식을 들었을 때 그는 기쁨으로 자신을 잃을 정도었다. 7장 13절에서 그는 『디도의 기쁨 위에 우리의 기쁨이 더욱 넘쳤다』고 말한다. 그가 그의 두 번째 서신을 썼을 때 바울은 이러한 위로와 기쁨의 분위기 안에 있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7장을 읽을 때 바울의 영 안에 있는 느낌, 즉 고린도에 있는 교회를 향한 깊은 관심의 느낌을 만질 수 있다.

 깊은 교통

 교회를 돌보려는 사람들이나 주님을 섬기려는 사람은 7장에 있는 바울의 영으로 깊이 인상받을 필요가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주님을 섬기는 합당한 자세를 본다. 우리는 또한 고대의 믿는이들과 사도들 사이의 교통은 오늘날 믿는이들 사이에 있는 것처럼 얕은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본다. 고대의 믿는이들은 사도들의 마음 안에 있었으며 사도들은 믿는이들의 마음 안에 있었다. 그들 가운데 있는 모든 교통은 다 깊은 것이었다. 그들은 이와 같은 깊은 교통 안에서 함께 살았으며 심지어 그들은 기꺼이 함께 죽기를 원했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있는 상황은 매우 다르다. 그리스도인들은 깊은 교통 없이 이 단체에서 저 단체로 여행을 한다. 그들에게 있어서 그리스도인 단체는 사람들이 와서 잠시 머물렀다가 다른 곳으로 떠나버리는 모텔과 같다. 주의 회복 안에 있는 우리의 교통은 이와 같아서는 안 된다. 지방 교회들은 이곳 저곳을 여행하는 사람들을 위한 모텔이 되어서는 안 된다. 우리 아버지 집의 가족으로서 우리의 교통은 깊어야 한다. 우리는 서로의 마음 안에 있어야 하며 아무것으로도 우리 서로를 나누어지게 해서는 안 된다. 심지어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징계를 받는다 할지라도 우리는 교회 가족을 사랑해야 하며 버리지 말아야 한다.

 특별한 사역

 고린도후서 8장과 9장은 궁핍한 성도들에 대한 사역에 관한 사도의 교통의 문제를 다룬다. 외견상 이것은 6장과 7장에서 바울이 다룬 것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 고린도후서 6장과 7장에서 우리는 바울의 화해의 사역을, 8장과 9장에서는 가난한 성도들에 대한 사역을 본다. 6장과 7장에 묘사된 화해가 없이는 8장과 9장에서 제시된 가난한 성도에 대한 사역을 가질 수 없다. 그러므로 이 장에 있는 사역은 앞장에 있는 화해의 일의 결과이다. 이것은 만일 우리가 가난한 성도들에 대해 합당한 사역을 수행하려 한다면 우리는 하나님과 화해하고 완전히 그분께 되돌려져야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하나님 안에 사는 자들이 되어야 하며 하나님과의 사이에 간격이 없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8장과 9장에 기록된 가난한 성도들에 대한 사역은 특별하다. 이 특별한 사역, 즉 다른 지역에 있는 가난한 성도들에 대한 사역을 가지려면 우리에게는 화해된 생활, 즉 하나님과 완전히 화해된 생활이 필요하다.

 그의 두 번째 서신에서 바울은 처음으로 고린도에 있는 믿는이들에게 새 언약의 사역자들인 사도들이 하나님의 백성을 그분 자신에게 완전히 돌이키고 화해시키는 사역을 받았다고 지적한다. 그 후 6장에서 바울은 이 사역을 수행하여 빗나간 고린도인들이 완전히 하나님께 되돌아오도록 화해시키는 세미한 사역을 수행한다. 그런 역사를 완성한 후에 그는 계속해서 그들과 함께 가난한 성도들을 공급하는 사역을 해야 한다는 것을 교통했다.

 이 장들의 순서는 중요하다. 만일 8장과 9장이 이 책의 서두에 있었다면 그 장들은 있어야 할 장소에서 벗어난 것이 된다. 그러나 계속되는 한 장 한 장이 마치 계단을 오르는 것과 같다. 나는 바울이 이 서신을 쓸 때 한 계단 한 계단을 오르는 것처럼 느꼈으리라 믿는다. 그는 빗나간 성도들을 다시 하나님께 화해시키는 특별한 역사를 끝낸 뒤에야 비로소 가난한 성도들을 돌보는 사역을 그들에게 제시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장들을 분리되거나 따로 떨어져 있는 것으로 여겨서는 안 된다. 외견상으로 8장과 9장은 6장이나 7장과는 다른 주제에 대한 것이다. 그러나 사실상 바울의 생각 안에서 이 모든 장들은 연결된다.

 바울의 화해케 하는 역사를 통해 고린도에 있는 성도들은 하나님께 되돌려졌고 회개했으며 더 구원을 받게 되었다. 후에 8장 1절에서 바울은 『더욱이 형제들아 하나님께서 마게도냐 교회들에게 주신 은혜를 우리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라고 말한다. 「더욱이」라는 말은 어떤 준비가 되어 있으며 무언가를 더 제시해야 하는 특별한 분위기와 상태가 저자에게 있었다는 것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바울은 계속해서 마게도냐 교회들 위에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를 말한다. 그의 의도는 고린도의 믿는이들이 가난한 성도들을 공급하는 데 참여하기를 원하는 것이었다.

 사중(四重)의 은혜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물질적인 공급의 필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모금 운동을 벌이는 것은 흔히 있는 일이다. 때때로 모금 편지가 기부를 종용하기 위해 그리스도인들에게 보내어진다. 만일 이들 모금 편지와 고린도후서 8장과 9장에서 바울이 쓴 것과를 비교해 본다면 이런 편지들은 가치 없는 것으로 드러날 것이다. 바울이 쓴 것과 비교해 볼 때 그런 것은 전혀 가치도 생명도 영도 없는 것이다. 대체로 그들은 돈을 내라고 다른 사람들에게 권고하는 것 외에는 아무 것도 하지 못한다. 어떤 의미에서 바울은 이 장에서 모금에 관계하고 있다. 그러나 물질의 필요를 다루는 그의 방식은 전적으로 영 안에서 생명이 충만한 것이며, 오늘날 그리스도인 단체들이 실행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바울은 단지 돈에 대해서만 말하지 않고 생명과 영이 충만한 방법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 말한다. 이 장들에 있는 바울의 글은 상당한 영적 무게가 있다.

8 장 1절부터 15절까지를 주의 깊게 읽어 본다면 여기서의 은혜가 네 방면과 연관됨을 보게 될 것이다. 즉 하나님과 주는 자들과 사도들과 그리스도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중의 은혜라고 말할 수 있다. 하나님의 은혜, 주는 자들의 은혜, 사도들의 은혜, 그리스도의 은혜이다. 사실상 바울은 단지 자금을 모으는 것만이 아니다. 더 나아가 그는 성도들이 가난한 성도들에 대한 사역에 참여하는 데 분발하기를 구하고 있다. 가난한 성도들을 공급하는 이같은 사역에 참여하기 위해서 우리에게는 사중의 은혜가 필요하다.

 하나님의 은혜

8 장 1절에서 바울은 마게도냐 교회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언급한다. 이 은혜는 우리의 생명과 생명공급이 되기 위해 과정을 거친 하나님을 부활 안에서 우리 안으로 가져오기 위해 생명 주는 영이 되신(고전 15:45) 부활한 그리스도이다. 은혜는 사실상 우리에게 생명과 모든 것이 되시는 삼일 하나님이시다. 이 은혜에 의해 마게도냐의 믿는이들은 일시적이고 정함이 없는 재물의 침해를 정복했으며 가난한 성도들에 대한 사역에 관대할 수 있게 되었다.

 오순절날 믿는이들은 그들의 모든 소유를 함께 모아 공동으로 소유했다. 사도행전 2장 44절과 45절은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재물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주고』라고 말한다. 그들은 공동생활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을 실행했다. 이 실행은 사도행전 4장에서 계속된다. 『믿는 무리가 한마음과 한 혼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제 물건을 조금이라도 제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 수세기에 걸쳐 많은 믿는이들이 사도행전 2장과 4장에 있는 공동생활을 높이 평가했으며 또한 모든 물건을 통용하려고 노력했다. 중국 북부에 있는 어떤 무리는 이같은 공동생활을 실행했다. 그 무리들과 연결된 사람은 누구든지 그의 물질적인 소유를 포기하고 모든 것을 통용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러나 사도행전에서의 공동생활은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심지어 6장에서 벌써 문제들이 일어나기 시작했고 얼마 안 되어 공동생활은 중지되었다. 바울의 서신에서 우리는 사도행전 2장과 4장에 묘사된 공동생활이 더 이상 실행되지 못했다는 것을 볼 수 있다. 바울의 서신에서 우리는 합당한 그리스도인의 생활이 공동생활, 즉 모든 물건을 통용하는 생활이 아니라는 것을 본다. 이것은 은혜에 의한 생활이다. 이 은혜는 네 방면, 즉 하나님과 그리스도와 사도들과 성도들로부터 온다.

 환난 가운데서의 확증

 마게도냐 교회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그의 말에 이어 2절에서 바울은 『많은 환난의 확증 가운데서 저희 넘치는 기쁨과 극한 가난이 저희로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게 하였느니라』고 한다. 마게도냐 교회들은 환난 가운데, 고통 가운데 있었다. 그런 환난은 그들이 하나님께 얼마나 많이 인정받을 수 있는지를 시험하는 것이었다. 이것이 바울이 의미하는 환난 가운데의 확증이다. 언제든지 우리가 환난이나 고통 가운데 있을 때 우리는 우리가 어디에 있으며 우리가 어떤 사람인가를 확증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우리를 시험하고 계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환난이나 고통 안에 있는 시험의 결과는 확증이다. 만일 우리가 그 시험을 견디어낼 수 있고 하나님으로부터 인정을 받는다면 그 결과는 환난의 확증이 될 것이다. 마게도냐인들은 이런 상황 가운데 있었다.

 넘치는 기쁨과 극한 가난과 풍성한 연보

2 절에서 바울은 「저희의 넘치는 기쁨」과 「극한 가난」을 연결한다. 이것은 매우 드문 연결처럼 보인다. 마게도냐인들은 어떻게 극한 가난 가운데서 넘치게 기뻐할 수 있었는가? 마게도냐인들은 가난과 기쁨을 다 갖고 있었다.

 마게도냐인들의 넘치는 기쁨과 극한 가난은 「저희로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게 했다」. 연보로 번역된 헬라어는 또한 단일함이나 단순함으로도 사용된다(참조 1:12, 롬 12:8). 여기에서 연보(liberality)는 주는 데 관대한 것이다. 비록 마게도냐인들은 매우 가난하였지만 그들은 관대했으며, 따라서 그들은 풍성한 연보를 했다.

 관대하기 위해서 우리는 단일하고 단순할 필요가 있다. 복잡한 사람은 관대할 수 없다. 단일하고 단순한 사람들은 관대함이 풍성할 수 있다. 성도들 가운데 있는 어떤 필요에 대해 들을 때 그들은 즉시 무언가를 주기로 작정할 것이다. 그러나 복잡한 사람들은 그 문제에 관해 심사숙고한 후 원래 의도했던 것보다 더 적게 주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이것은 단일하거나 단순하거나 관대하거나 너그러운 것이 아니다. 우리 모두는 주는 데 있어서 관대하고 인색하지 않아야 한다. 이를 위해 우리는 단일하고 단순할 필요가 있다.

 젊었을 때 나는 왜 주 예수께서 유다가 연보궤를 맡도록 허락했는지 의아해 했었다. 그분은 유다가 도둑인 것을 알았으나 여전히 그로 돈을 담당하게 했다. 나는 주님이 요한이나 베드로로 하여금 연보궤를 관리하도록 하셨어야 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돈을 사랑하지 않는, 관대하고 너그러운 주 예수님은 유다로 하여금 연보궤를 지키게 했다. 주님은 실로 단일하고 단순하고 관대하고 너그러웠다.

8 장 3절과 4절에서 바울은 계속하여 『내가 증거하노니 이는 저희가 힘대로 할 뿐만 아니라 힘에 지나도록 자원하여 이 은혜와 성도들에 대한 사역의 교통에 대하여 우리에게 간절히 구하니』라고 말한다. 비록 마게도냐인들은 가난하고 환난 가운데 있었지만 그들은 그들의 뜻에 따라, 즉 자원하여 관대하게 주었다. 그들은 이것을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그들 안에 거하는 생명 주는 영이신 부활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했다. 이 그리스도는 물질적인 소유를 붙잡는 것. 특히 재물을 정복하기 위해 믿는이들 안에서 역사하시며 그들을 움직이는 하나님의 은혜이다. 마게도냐인들은 극한 가난 가운데 있었지만 그들 안에서 움직이는 은혜는 그들로 하여금 재물과 물질적인 소유를 정복하여 하나님의 목적을 완성하는 데 그것을 사용하도록 역사했다.

 물질적인 소유의 침해를 정복하려면 은혜가 필요하다. 은혜로 인해 계속적으로 드리는 것은 우리의 모든 소유를 함께 두어 모든 것을 통용하는 것보다 한층 더 어렵다. 고린도전서 16장에서 바울은 매주일 첫날에 얼마 만큼 따로 떼어 놓을 것을 말한다. 이런 계속적인 드림은 은혜를 필요로 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의 타락한 인간의 본성과는 대조되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가 한번만이 아니라 계속적으로 주고자 한다면 우리는 안으로부터 우리를 움직이는 거룩한 은혜가 필요하다. 재물과 물질적인 소유를 정복하여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그것들을 사용하는 사역을 하려면 은혜가 요구된다.

 사도들의 은혜

4 절은 『이 은혜와 성도들에 대한 사역의 교통에 대하여 우리에게 간절히 구하니』라고 말한다. 은혜라는 말의 헬라어는 카리스(charis)로서 은혜, 선물, 호의 등을 의미한다. 여기에서는 호의를 의미한다(빈센트). 마게도냐의 믿는이들은 그들도 가난한 성도들에 대한 사역에 동참하고 교통할 수 있도록 호의를 베풀어 달라고 사도들에게 간청했다. 사도들이 이런 문제를 함께 부담하자고 성도들에게 구하는 대신 마게도냐 믿는이들은 이런 부담을 위해 사도들에게 구했다. 그들은 사도들이 이같은 부담에 함께 참여하도록 허락하는 것을 호의 또는, 은혜로 생각했다.

 마게도냐 사람들은 물질적인 것들의 공급을 유대 믿는이들에게 전해 주기 원했다. 그러나 그들 스스로는 이것을 할 수 없었다. 물질적이든 영적이든 그들에게는 사도들이 필요했다. 그래서 그들은 이 은혜 안에서 몫을 담당하고, 이 은혜를 그들에게 베풀어 그들도 이런 영적인 사역에 참여할 수 있게 해 주기를 사도들에게 구했다. 비록 이 사역이 물질적인 것들과 관계 있다 하더라도 바울은 이것을 영적인 사역으로 여겼다.

 사실상 바울은 모금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물질적인 것들을 사역하여 생명과 영과 건축이 충만한 영적인 것이 되게 하는 사람이었다. 생명이 충만한 방법으로 물질적인 것들을 사역하는 데 참여하기 위해서 마게도냐 사람들은 사도의 은혜와 사도의 호의를 구했다. 이것이 결여된 가난한 성도를 위한 마게도냐 사람들의 사역은 단지 물질적인 사역이었을 것이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몸의 건축을 위한 생명이 충만한 영적인 사역이 될 수 없었다.

 마게도냐 사람들은 가난한 성도들을 위한 사역에 참여하는 것을 은혜로 여겼다. 그런 참여는 또한 그리스도의 몸 안에 있는 교통이었다. 이러한 이유로 그들은 사도들에게 그것에 참여할 수 있는 은혜를 그들에게 베풀어 달라고 구했다.

 사도들의 사역 아래서 물질의 공급은 생명과 교육이 충만한 영적인 것이 되었다. 이것은 생명도 영도 그리스도의 몸의 건축도 없는 오늘날의 모금과는 전적으로 다른 것이다. 우리의 물질적인 선물이 생명과 건축에 속한 영적인 사역이 되기 위해서는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은혜와 사도들로부터 오는 은혜가 필요하다.

5 절은 『우리의 바라던 것뿐 아니라 저희가 먼저 자신을 주께 드리고 또 하나님의 뜻을 좇아 우리에게 주었도다』라고 말한다. 이 구절은 주님은 그들이 가지고 있는 그 무엇보다도 믿는이들 자신을 원하신다는 것을 가리킨다. 마게도냐 사람들은 주님께 드려졌을 뿐 아니라 그들의 사역을 완성하는 데 사도들과 하나 되기 위해 또한 사도들에게도 드려졌다. 이것은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믿는이들이 자신을 먼저 주께 드리고 또한 사도들에게 드린 것은 하나님의 뜻을 통한, 주권적인 거룩한 대행자를 통한 것이었다.

 드림의 은혜

6 절에서 바울은 계속하여 『이러므로 우리가 디도를 권하여 마침 전에 시작하였던 것처럼 또한 이 은혜도 너희 안에서 그대로 성취케 하라 하였노라』고 말한다. 여기의 은혜는 드림의 행위를 가리킨다. 「또한(also)」이라는 말은 이 은혜, 즉 드리는 은혜 외에도 다른 은혜들이 디도에 의해 마게도냐인들 가운데서 성취되었다는 것을 가리킨다.

7 절에서 바울은 『다만 너희는 모든 일, 즉 믿음과 말과 지식과 모든 간절함과 우리에게서 난 너희 안에 있는 사랑에 풍성한 것같이 또한 이 은혜도 풍성하게 하라』고 말한다. 여기에서 바울은 『우리에게서 난 너희 안에 있는 사랑』을 말한다. 이것은 믿는이들 안에 있던 사랑이 사도들로부터 그들 안으로 주입되었다는 것을 가리킨다.

7 절에 있는 은혜는 가난한 성도들에게 물질적인 것들을 줄 때 보여진 사랑의 행위이다. 믿는이들의 이 은혜는 그들을 분발시킨 하나님의 은혜의 결과이다. 성도들을 위한 사역에 관한 교통에서 사도는 동기를 부여하며 그들이 너그럽게 줄 수 있도록 힘을 주는 마게도냐 믿는이들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와 가난한 성도들을 위한 사역에 믿는이들이 참여할 수 있도록 허락한 사도들의 은혜와 가난한 자들을 위해 물질적인 것들을 사역하는 믿는이들의 은혜를 언급한다. 이것은 어떤 목적을 위해서든 주님께 드린 믿는이들의 물질적인 소유는 절대적으로 책략의 문제가 아닌, 은혜의 문제이어야 함을 가리킨다.

 그리스도의 은혜

8 절과 9절에서 바울은 계속하여 『내가 명령으로 하는 말이 아니요 오직 다른 이들의 간절함을 가지고 또한 너희의 사랑의 진실함을 증명코자 함이로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한다. 부요하신 주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된 것은 우리에게 주신 은혜이다. 같은 원칙으로 우리가 다른 사람을 위하여 우리의 물질적인 부요를 희생하려 하는 것도 다른 이들에게 베푸는 은혜이다.

 외견상으로 주 예수께서 가난하게 되심은 가난한 성도들을 위한 물질적인 공급의 사역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만일 주 예수께서 가난하게 되지 않았다면 사실상 우리는 우리의 은혜이신 그분을 소유할 수 없었을 것이다. 주 예수께서 인성 안으로 들어오지 않았다고 가정해 보자. 그러면 어떻게 그분이 우리의 생명이 될 수 있겠는가? 또한 어떻게 그분이 우리 안에서 역사하여 가난한 성도들을 위한 사역을 수행하기 위해 우리 안에서 일하고, 우리에게 동기를 부여하며, 힘을 주고 공급하는 은혜가 될 수 있었겠는가? 이것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서 역사할 수 있는 것은 그분이 가난하게 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 우리에게는 매우 중요하다. 우리를 위해 그분이 가난하게 되신 것은 하나의 본이 되어야 한다. 한편 그분은 우리 안에 생명이시며, 다른 한편으로 그분은 외적인 모형이요 실례이시다. 우리 안에 있는 주님의 생명은 부요하신 자로서 가난하게 되신 분의 생명이다. 우리의 생명과 본이 되시는 분으로서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은혜이시다. 우리는 주 예수로부터 은혜를 받는 것이 필요하다. 그럴 때 이 은혜는 주 예수께서 하셨던 것, 즉 다른 사람을 위해 가난하게 되는 것을 우리로 행할 수 있게 할 것이다. 우리가 극히 가난할지라도 우리는 여전히 가난한 성도들과 무언가를 나누어야 한다. 우리는 속에 다른 사람을 위해 가난하게 되는 생명을 가지고 있으며 밖에는 우리가 따르기 위한 본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이 은혜를 받자.

 생명의 공급

 만일 우리가 이런 은혜에 의하여 준다면 우리가 주는 것은 다른 이들에게 은혜가 될 것이다. 우리는 다른 사람을 돕기 위해 물질적인 것을 주지만 이 물질적인 것들은 영적인 은혜를 수반한다. 우리가 물질적인 것으로 가난한 성도들을 공급할 때 합당한 방법으로 영 안에서 생명으로 한다면 생명과 영이 이 공급과 함께 간다. 결국 가난한 자들은 단지 물질적인 것뿐 아니라 생명의 풍성까지도 공급받는다.

 이 메시지에서 우리는 가난한 성도들을 위한 사역을 하기 위해서 우리에게는 하나님으로부터, 사도들로부터,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를 받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지적했다. 이런 삼중의 은혜를 받을 때 우리는 은혜 안에서 물질적인 선물로 다른 사람들에게 공급할 수 있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주는 것은 무엇이든지 단지 성도들의 필요를 돌보기 위한 물질적인 사역이 되지 않고 다른 이들에게 또한 생명의 공급이 될 것이다. 이런 식으로 우리는 영적인 풍성을 가난한 성도들에게 전달한다. 오늘날 우리 가운데에는 이런 종류의 사역이 필요하다.

 우리의 물질적인 선물은 영적이고 생명이 충만하며 성도들을 교육할 수 있어야 하고 그리스도의 몸을 건축해야 한다. 이것은 우리가 어떤 물질적인 것들을 주님께 드릴 때 영 안에서 생명으로 교회의 건축을 위해 드리고 있다는 확신을 가져야 함을 요구한다. 이렇게 주는 것은 하나님께 완전히 화해된 결과요 결론이다. 오직 하나님과 완전히 화해한 자들만이 물질적인 것들을 공급할 수 있으며 그로써 영적인 교도와 그리스도의 몸의 건축을 위해 가난한 성도들에게 생명 공급을 가져다 줄 수 있다.






트랙백주소:  수신불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