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시지 48 - 가난한 성도들을 공급하는 것에 관한 사도의 교통 (Ⅲ)
성경 : 고린도후서 8:15, 9:1-15
고린도후서 9장에서 바울은 가난한 성도들을 위한 사역에 관해 추가의 말씀을 제시한다. 우리에게 이 장은 필요 없는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우리는 8장에서 바울이 말한 것으로 족하다고 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당신은 왜 바울이 9장에서 추가의 말을 제시했다고 생각하는가? 만일 당신이 이들 두 장을 반복하여 읽어본다면 당신은 가난한 성도들을 위한 사역에 관한 8장의 처음 절반은 적합하나 8장의 나머지 부분과 9장 전체는 사실상 불필요하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우리는 왜 바울이 이 문제에 대해 그처럼 많은 부분을 할애하는지 물어 볼 필요가 있다. 우리가 보겠지만 그가 그렇게 하는 이유는 어떤 심오한 사상과 관계된다.
거둠과 뿌림
8 장과 9장에 있는 바울의 사상은 심오하다. 바울의 깊은 사상을 이해할 수 있는 열쇠는 두 가지 관점에서 발견된다. 첫째 8장 15절에서 바울은 『기록한 것같이 많이 거둔 자도 남지 아니하였고 적게 거둔자도 모자라지 아니하였느니라』고 결론짓는다. 이것은 매일의 공급인 만나를 거두는 것에 관해 출애굽기 16장 18절에서 인용한 것이다. 왜 사도 바울은 성도들을 위해 물질적인 것들을 공급하는 사역과 만나 거두는 것을 연결시키는가? 우리가 이 문제를 깊이 생각해 본다면 가난한 성도들에게 물질적인 것들을 사역하는 것은 바로 그들의 매일의 생활을 위한 것임을 알게 될 것이다. 만나는 이스라엘 백성의 매일의 필요를 위해 거두어졌으며, 물질적인 것들은 가난한 성도들의 매일의 필요를 채워주기 위해 사역되었다. 바울이 인용한 출애굽기 16장 18절의 말씀은 그의 깊은 사상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요인이다.
8 장과 9장에 있는 바울의 깊은 사상과 관련된 두 번째 문제는 9장 6절에 있는 뿌림에 관한 그의 말과 관계된다. 『이것이 곧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 함이로다』. 여기에서 바울은 가난한 성도들에게 물질적인 것들을 사역하는 것과 씨 뿌리는 것을 연결했다. 씨를 뿌리는 것은 만나를 거두는 것과 마찬가지로 매일의 생활을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거둠과 뿌림은 둘 다 우리의 생활을 위한 것이다.
하나님의 백성의 두 가지 생활 방법
성경에는 하나님의 백성의 두 가지 생활 방법이 있다. 첫 번째 방법은 하나님이 규정한 자연적인 법칙을 따라 사는 것이다. 이것은 씨를 뿌려 수확을 거두는 것이다. 창세기 3장에서 하나님은 사람이 살아가기 위해 무엇인가를 얻으려면 경작해야 한다고 명하셨다. 씨 뿌림은 사람의 생활을 위한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이 정하신 자연의 법칙을 따른 방법이다. 씨 뿌림이나 경작이 없이는 어떤 민족이나 종족도 생존할 수 없다. 경작하는 것은 씨를 뿌려 수확을 거두는 것이다.
두 번째 방법은 하나님의 손으로부터 오는 기적적인 방법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 있을 때 그들은 자연의 법칙을 따라 살았다. 그러나 그들이 애굽에서 나와 광야를 방황할 때 그들은 다른 방법, 즉 하나님의 기적적인 방법으로 살았다. 그 백성은 씨를 뿌리는 대신 만나를 거두었다. 우리는 그들이 씨를 뿌림이 없이 거두었다고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들이 만나를 거둔 것은 곧 수확이었기 때문이다. 황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씨 뿌림이 없이 계속 수확했다. 하늘에서 내리는 만나는 씨 뿌림을 대신했다. 사람들이 씨를 뿌릴 수는 있지만 만나를 내리는 것은 오직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다.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께서 보낸 만나를 거두었다.
출애굽기 16장에 의하면 이스라엘 백성은 안식일을 제외하고는 매일 아침 만나를 거두었다. 제 6일째에 그들은 안식일을 위한 충분한 양을 얻기 위해 두 배를 거두었다. 출애굽기 16장 17절과 18절은 『이스라엘 자손이 그같이 하였더니 그 거둔 것이 많기도 하고 적기도 하나 오멜로 되어 본즉 많이 거둔 자도 남음이 없고 적게 거둔 자도 부족함이 없이 각기 식량대로 거두었더라』고 말한다.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 사이에 공급을 균등히 하심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아무 것도 경작하거나 씨 뿌리거나 수확하지 않았다. 그 대신에 그들은 만나를 거두었다. 어떤 이들은 욕심이 많아 그들이 필요한 것보다 더 많은 분량의 만나를 거두어 들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저녁 때가 되면 남아 있는 것들은 더 이상 쓸모가 없었다. 출애굽기 16장 19절과 20절은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기를 아무든지 아침까지 그것을 남겨두지 말라 하였으나 그들이 모세의 말을 청종치 아니하고 더러는 아침까지 두었더니 벌레가 생기고 냄새가 난지라 모세가 그들에게 노하니라』고 말한다. 만나를 과다하게 거둔 자들의 경우에 있어서 그들은 아마 다음 주간을 위해 그것을 저장해 두기를 원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초과량을 내어다 버리도록 만들었다.
반면에 약한 자들이나 만나를 많이 거둘 수 없는 자들은 부족함이 없었다. 거룩한 방법은 적게 거둔 자도 부족함이 없고 많이 거둔 자도 남음이 없는 것이다. 이것이 그의 백성들 사이의 공급을 균등케 하는 하나님의 하늘에 속한 방법이다. 하나님은 그의 기적적인 능력을 사용하여 백성들 사이의 만나의 공급을 균등케 하신다. 하나님은 그의 주권과 기적적인 손길로 그분의 백성들 가운데서 매일의 공급을 고르게 하신다.
고린도후서에서 바울은 만나를 거두는 것을 믿는이들이 가난한 성도들에게 물질적인 공급을 하는 것과 연결시킨다. 출애굽기 16장에서 그것은 거두는 문제이나 고린도후서 8장에서 그것은 주는 문제이다. 만나를 거두는 데 있어서 이스라엘 백성이 많이 거두었든 적게 거두었든 그 결과는 똑같았다. 이것은 그들이 거둘 때 욕심 부리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가리킨다. 만나를 거두는 것은 그들의 의무였다. 그들은 욕심 부리지 않고 의무를 이행했다.
어떤 이스라엘 백성이 이렇게 말했다 하자. 『하나님은 긍휼이 많고 주권적이며 기적적이시다. 그분은 모든 것을 조절하신다. 내가 많이 거두어도 남지 않고 적게 거두어도 모자라지 않을 것이 분명하니 아무 것도 거두러 나갈 필요가 없다.』 만일 하나님의 백성 가운데 한 사람이 이렇게 했다면 그는 그날 아무 것도 얻지 못했을 것이다. 하나님은 그를 대신하여 그 사람의 의무를 이행치 않으셨을 것이다. 하나님은 그를 위해 일하거나 먹이지 않으셨을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은 그들의 의무를 이행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하나님의 정하심에 따라 책임을 완수하는 한 그들은 거둔 만나가 많든 적든 충분한 공급을 얻었다.
고린도후서 8장에서 바울은 가난한 성도들에게 주는 것과 만나를 거두는 것을 연결한다. 우리의 이해로는 주는 것은 거두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바울의 말에 의하면 우리가 주는 것은 곧 거두는 것이다. 바울의 말은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는 탐욕적이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만일 우리가 거액의 돈을 번다 하더라도 우리는 우리 자신을 위해 보존될 수 있으리라고 생각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우리가 주든 안 주든 결국 결과는 같아지게 된다는 것을 보아야 한다.
어떤 형제가 일 년에 사만 달러를 번다고 가정해 보자. 실제로 그의 생활을 위해 필요한 것은 그보다 휠씬 적은 액수이다. 그가 욕심이 많다면 그는 많은 금액을 자신을 위해 보존하려 할 것이다. 그는 십 퍼센트, 즉 사천 달러는 십일조로 드리고 나머지 삼만 육천 달러는 간직하려고 생각할 것이다. 이처럼 십 분의 일을 드리는 것은 좋은 실행이다. 그러나 이 형제는 더 좋은 방법에 따라 행할 수 있다. 이 형제는 그의 생활을 위해 필요한 이만 달러 정도를 남겨 놓고 나머지는 다 주어야 한다. 의심할 바 없이 인간적으로 말해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두 번째 방법, 즉 할 수 있는 대로 모두를 주는 방법보다는 첫 번째 방법, 즉 십일조를 드리는 방식을 따를 것이다. 만일 이 형제가 십일조를 바치고 나머지 삼만육천 달러를 자신을 위해 간직한다면 결국 그는 하나님의 주권하에 그분에게는 이 여분의 돈을 사라지게 하는 많은 방법이 있다는 것을 배우게 될 것이다. 질병이나 사고나 재난을 당할지도 모른다. 만일 그 돈이 당대에 없어지지 않으면 다음 세대나 아니면 삼대째에 가서는 틀림없이 그 돈이 사라질 것이다. 하나님의 능하신 주권적인 손길은 그의 백성들 사이에 하늘에 속한 부(富)의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 적극적이실 것이다.
약 70년 전에 나는 그리스도인들 가운데서 그 상황을 목도했다. 내가 간증할 수 있는 것은 삼대를 이어 부자로 있는 그리스도인 가정을 하나도 보지 못했다는 것이다. 어떤 그리스도인의 가정은 첫세대에서 매우 부자가 되어 다음 세대를 위해 거대한 재산을 저축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대나 삼대에 가서 이 돈은 기묘하게도 사라져 버린다. 날개가 자라 날아가 버리는 것처럼 보인다. 나는 삼대째의 부자가 가지고 있는 모든 재산을 다른 사람들이 취해 간 경우를 알고 있다. 비록 그 사람들이 이 세대에서 거액의 재산을 상속받았지만 그것은 그들에게서 떠나가 버렸다. 그러므로 결국 그것은 많이 거둔 자도 남지 않았다는 진리를 입증한다. 나는 적게 거둔 자도 부족함이 없고 많이 거둔 자도 남지 않는다는 것을 보았다. 나는 진실로 그분의 백성들 가운데서 부의 균형을 이루는 기적적이고 주권적인 하나님의 손을 목격했다.
당신은 돈 문제에 대해 자신이 매우 지혜롭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당신은 어떻게 돈을 벌고, 어떻게 저축하며, 자녀들이나 손자를 위해 어떻게 간수하는지를 알지도 모른다. 그러나 돈을 취급함에 있어서 당신이 아무리 현명해도 하나님은 더 지혜로우시다. 하늘에 속한 조종사이신 그분은 당신의 돈을 어떻게 날아가게 할 수 있는지를 아신다. 그분은 구약에서 만나로 이 일을 행하셨고 오늘날에는 돈으로 행하신다. 당신에게 직면한 질문은 이것이다. 즉 당신은 자원하여 물질적인 공급에 균형을 이루기 원하는가 아니면 하나님으로 하여금 기적적이고 주권적인 방법으로 균형을 이루시게 할 것인가? 내가 확신하는 것은 당신은 조만간에 재정적인 문제에서 균형을 이루게 될 것이다. 이에 관해 우리는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하나님은 마음속 깊은 데서 그분의 백성이 날마다의 공급에서 균형을 이루기를 갈망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분께 이렇게 말해야 한다. 『주여, 나로 만나를 거두게 하신 것을 감사합니다. 주여, 그러나 이것을 나 자신을 위해 저축하는 대신 다른 사람들과 나누기 원합니다.』 당신은 당신이 다른 이들과 함께 자원하여 나누기를 원하든 원하지 않든 결국 결과는 같아진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결국 적게 거둔 자도 부족하지 않고 많이 거둔 자도 남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가지고 있는 것으로 다른 사람들과 나누지 않는 것은 어리석은 것이다.
축복으로 뿌림
씨 뿌림에 대해서는 어떠한가? 9장에 의하면 우리가 주는 것은 8장에 있는 것처럼 거두는 것과 같을 뿐 아니라 또한 씨 뿌리는 것과 같다. 우리가 주는 것은 거두는 것이요 또한 뿌리는 것이다. 만나를 거두는 것은 기적적인 것이다.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이 거두었던 만나는 기적적인 방법으로 균형을 이루었으며 이로써 아무도 부족하지 않고, 아무도 남지 않았다는 것을 강조한 바 있다. 이제 9장으로부터 우리는 우리가 주는 것이 또한 심는 것과 연결된다는 것을 보아야 한다.
9 장 6절에 의하면 인색하게 심는 자는 인색하게 거두고 축복으로 심는 자는 또한 축복으로 거둘 것이다. 6절에서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유익을 위해 뿌리는 사상을 본다. 그러나 농부는 어떠한가? 그가 밭에 씨를 뿌릴 때 다른 사람들을 위해 뿌린다고 생각하는가? 틀림없이 대부분의 농부들은 자신을 위해 뿌린다는 생각을 갖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뿌림은 축복으로 뿌리는 것이 아니다. 축복으로 뿌리는 것은 다른 이들에게 주는 것이다. 이것은 다른 이들에게 축복으로 뿌리는 것이다. 우리의 돈을 줄 때, 이것은 뿌리는 것이며 이런 뿌림은 우리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다른 이들을 위한 것이다. 만일 다른 이들에게 축복으로 뿌린다면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축복을 거두게 될 것이다.
주는 것을 배움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 모두는 주는 것을 배워야 한다. 주는 것은 거두는 것이다. 우리가 얼마나 많이 거둘 수 있는가는 우리가 얼마나 주는가에 달려 있다. 누가복음 6장 38절에서 주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도 헤아림을 도로 받을 것이니라』고 하셨다. 이 구절은 만일 우리가 받고 거두기 원한다면 먼저 주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지적한다. 우리가 주는 것은 거두는 것이요 받는 것이다. 우리는 날마다 만나를 거두는 것이 필요하다. 우리가 거두는 것이 곧 우리가 주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 모두는 거두기 위해 줄 필요가 있다. 우리는 적게 주기 때문에 적게 거둔다. 우리 모두가 우리의 줌이 곧 우리의 거둠이라는 것에 깊은 인상을 받기 바란다.
주고 거두는 문제에는 거룩한 기적들이 관련되어 있다. 우리는 우리가 더 주면 더 받게 되리라는 미신적인 방법을 믿지 말아야 한다. 만일 그것이 우리가 이 문제를 이해하는 방법이라면 주고자 하는 우리의 동기는 우리 자신을 위한 부의 축적이 될 것이다. 여기의 요점은 하나님의 균등케 하시는 손길과 관계된다. 그분은 공급을 분배하심으로써 우리를 가난하지도 부하지도 않게 하실 것이다. 그분은 확실히 거룩하고 하늘에 속한 균등케 하심을 실행하고 계신다. 그분은 그의 백성들 사이에서 어떻게 부를 균등케 할 수 있는지를 아신다.
50 여년 이상 나는 주님을 믿음으로 생활해 왔다. 때때로 나는 매우 가난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간증할 수 있는 것은 극히 가난했을 때조차도 내게는 아무 부족함이 없었다는 것이다. 나는 적게 거두었지만 부족함이 없었다. 또 다른 때에는 넘치는 공급으로 많은 돈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내게 남은 것이 없었다는 것을 간증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나는 체험으로부터 많이 거두었을 때에도 남지 않았고 적게 거두었을 때에도 부족하지 않았다는 것을 간증할 수 있다. 누가 이런 방식으로 공급을 균등케 하는가? 이것은 하늘에 속한 균형으로 하나님께서 하신 것이다.
만일 우리가 우리의 필요 이상으로 거두려 한다면 결국 우리는 여분의 금액이 날아가 버리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만일 당신이 과다하게 너무 많은 금액을 간직하고 있다면 당신의 돈은 날개가 돋아 당신에게서 날아가 버린 것처럼 될 것이다. 이런 일이 발생하는 이유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서 그분의 자녀들의 사회적인 부를 균등케 하시기 때문이다.
우리는 주는 것이 거둠과 뿌림의 문제라는 것을 보았다. 뿌림은 수확을 가져온다. 우리가 먼저 심고 나중에 거두는 것은 자연의 법칙이다. 우리는 뿌릴 때에 관대하게 뿌려야지 인색하게 뿌려서는 안 된다. 만일 우리가 인색하게 뿌린다면 우리는 인색하게 수확할 것이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관대하게 뿌린다면 또한 관대하게 거둘 것이다. 뿌리는 데 있어서 우리가 관대하고 너그러운 자들이라면 우리는 거둘 때에 하나님이 관대하고 너그러운 분이시라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왜 바울은 9장을 추가했는가? 그는 주는 것에 대한 진보된 예를 제공하기 위해 이 장을 더했다. 우리는 고린도후서 9장에서 바울이 주는 것을 예시하기 위해 뿌리는 것을 사용했음을 지적한 바 있다. 그러므로 8장과 9장으로부터 우리는 주는 것이 거두는 것이요 또한 뿌리는 것임을 본다. 바울의 깊은 속에 있는 이 두 가지 관념이 이 두 장에 있는 그의 글을 지배하고 있다.
주는 것과 거두는 것
바울은 피상적인 저자가 아니었다. 반대로 그는 깊고 그의 사상은 심오하다. 구약을 읽을 때, 그는 출애굽기 16장이 하나님의 백성들이 그들에게 필요한 매일의 공급을 위해 무엇을 거두는 것에 대해 말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바울의 관념에 따르면 오늘날 우리는 광야에 있다. 날마다 우리는 일을 하지만 실제로는 만나를 거두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거둠은 주는 것으로 바뀌어야 한다. 만일 우리가 주지 않는다면 우리는 계속해서 거둘 수 없게 될 것이다. 우리는 일을 하여 돈을 벌지만 이렇게 번 돈은 주는 것이 되어야 한다. 그때에야 우리가 주는 것은 무엇이든, 광야에서 만나를 거두는 이스라엘 백성에 의해 예시된 것처럼 우리의 거둠이 될 것이다. 이제 우리는 바울이 우리가 주는 것을 이와 같이 만나를 거두는 것과 연결시켰음을 볼 수 있다. 이런 사상은 깊고 심오한 것이다.
주는 것과 뿌리는 것
9 장에서 바울은 계속해서 우리가 주는 것을 씨 뿌리는 것과 연결한다. 그의 깊은 사상이 8장에서 완전히 표현되지 못했기 때문에 바울은 계속해서 주는 것과 관계된 또 하나의 장을 썼다. 이 장은 주는 것의 다른 방면, 즉 뿌리는 방면을 계시한다. 여기에 있는 바울의 사상은 우리가 뿌려야 거둔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우리는 뿌릴 때 단지 우리 자신을 위해서만 뿌리지 말고 다른 사람들을 위해 축복으로 뿌려야 한다.
많은 성경 번역본들은 6절을 문자적으로 번역하지 않는다. 「축복으로」라고 말하는 대신 어떤 번역본은 「많이」, 혹은 「풍부하게」라고 말한다. 이런 번역본에 의하면 우리가 만일 많이 혹은 풍부하게 뿌린다면 많이 혹은 풍부하게 거둘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이 말씀에 대한 천연적인 이해이다. 여기에서 바울이 말하는 바는 문자 그대로 「축복으로」 뿌리는 것이다. 우리의 주는 것은 반드시 다른 사람들에게 축복이어야 한다.
성경의 다른 곳은 9장 6절에 있는 축복이라는 말씀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구약에서 우리는 주는 것이 곧 축복이라는 것을 볼 수 있다. 야곱이 그의 형 에서를 만났을 때 야곱은 그에게 무엇인가를 주었다. 그 선물은 축복이었다. 이에 대해 창세기 33장 11절은 『하나님이 내게 은혜를 베푸셨고 나의 소유도 족하오니 청컨대 내가 형님께 드리는 축복을 받으소서』라고 말한다. 주는 것이 축복이라는 것을 가리키는 다른 구절들은 열왕기하 5장 15절, 사사기 1장 15절, 에스겔 34장 26절 등이다. 다른 사람들에게 우리가 주는 것은 곧 그들에게 축복이다.
우리가 다른 이들에게 축복으로 뿌릴 때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축복으로 거둘 것이다. 더욱이 수확물은 항상 뿌린 씨의 양을 훨씬 능가하게 될 것이다. 그것은 아마 삼십 배 혹은 백배로 늘어날 것이다. 이것은 기적적으로 일어나지 않고 자연의 법칙을 따라 발생한다. 하나님은 그분의 자녀들 가운데 생활의 공급을 기적으로 조절하신다. 이렇기 때문에 그리스도인 가정은 몇대에 걸쳐 그 부를 지속할 수 없다. 그러나 뿌리는 것은 자연의 법칙에 따른 것이지 기적에 따른 것이 아니다. 이에 대해서는 하나님께서 어떤 기적을 행하실 필요가 없다. 우리 모두는 뿌리고 주어야 한다. 우리가 줄수록 더 거둘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것을 우리 자신을 위해 부를 축적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미신적인 방법으로 하지 말아야 한다.
거둠과 뿌림의 두 가지 예는 이 장들에 있는 바울의 깊은 사상과 관계된다. 9장에 있는 깊은 사상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뿌리는 관념을 가지고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주지 않는다면 우리는 경작하지도 뿌리지도 않는 것이다. 더욱이 우리는 인색하게 뿌리지 말아야 한다. 만일 우리가 인색하게 뿌린다면 나중에 우리는 자연의 법칙대로 인색하게 거둘 것이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에게 축복으로 뿌릴 필요가 있다. 만일 우리가 다른 이들에게 축복으로 뿌린다면 또한 나중에 우리는 자연의 법칙을 따라 하나님으로부터 우리에게 오는 축복으로 거둘 것이다. 이 축복은 우리가 뿌린 것의 몇배가 될 것이다. 나는 그리스도인의 일생을 통해 하나님께 드린 믿는이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넘치도록 축복을 받지 못한 사람이 없다는 것을 간증할 수 있다. 주님은 그분이 규정하신 자연의 법칙을 항상 존중하실 것이다.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의 요소들이 됨
우리는 주님의 기적적인 손길과 또한 돌보시는 그분의 자연의 법칙을 인식해야 한다. 두 방면에 따라 우리는 주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아마 현재에는 당신이 하나님의 균등케 하는 손길을 못 볼지도 모른다. 그러나 오랜 기간이 지난 후, 아마 수년 후에 당신은 이것을 보게 될 것이다. 그때에야 당신은 그분의 백성들 가운데서 하나님이 얼마나 매일의 공급을 균등케 하시는지를 간증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또한 주는 것이 뿌리는 문제임을 깨달아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수확을 하려 한다면 우리는 다른 이들에게 축복으로 뿌려야 한다. 그때에야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축복으로 수확할 것이다.
우리는 더 뿌리고 더 거두어야 한다. 목표는 우리를 부요케 하는 것이 아니다. 그 결과는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가 넘치는 것이다. 나는 빠른 시일 내에 많은 성도들이 하나님께 감사의 요소가 되기 바란다. 이것은 당신의 주는 것이 하나님을 향한 넘치는 감사가 되리라는 것을 의미한다. 만일 회복 안에 있는 성도들이 자천하여 주고자 한다면 회복에는 결코 물질적인 부족이 없으리라고 확신한다. 부족함 대신에 성도들을 통해 하나님께 드려지는 감사 제물로 넘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두 거둠과 뿌림에 의해 수행되어지는 주기를 실행하자.
주는 것과 관계된 여러 가지 문제들
9 장 5절에서 바울은 『이러므로 내가 이 형제들로 먼저 너희에게 가서 너희의 전에 약속한 축복을 미리 준비케 하도록 권면하는 것이 필요한 줄 생각하였노니 이렇게 준비하여야 참 축복이요 탐심이 아니니라』고 말한다. 이 축복은 풍부함이며, 다른 사람들에게 축복으로 기꺼이 주는 관대한 예물이다. 자원하여 관대하게 주는 것은 그 예물로 하여금 받는 사람들에게 축복이 되게 한다. 움켜쥔 탐심에서 억지로 마지못해 주는 예물은 주는 이에게 탐욕의 물질이 되게 한다.
7 절에서 바울은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애석함으로나 궁핍함으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고 말한다. 이 말씀은 잠언 22장 9절에서 인용한 것으로 70인역(Septuagint)에서는 이 구절을 『하나님은 즐겁고 관대한 사람을 사랑하시느니라』고 말한다. 즐거운으로 번역된 헬라어는 「명랑한」, 「기뻐하는」등을 의미한다.
8 절과 9절에서 바울은 계속해서 『하나님이 능히 너희에게 모든 은혜를 넘치게 하시나니 이는 너희로 모든 일에 항상 모든 것이 넉넉하여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려 하심이라 기록한 바 저가 흩어 가난한 자들에게 주었으니 그의 의가 영원토록 있느니라 함과 같으니라』고 말한다. 8절에 있는 「모든 은혜」라는 말은 각종 은혜를 언급한다. 9절에서 「흩어」라는 말은 흩어 뿌린다는 뜻이다. 이 구절에서 「가난한」이라는 말은 근근히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머슴살이 하는 자를 가리킨다. 「가난한」이라는 말은 평범한 말이 아니다.
9 절에서 바울은 영원히 거하는 의를 말한다. 관대하게 주는 것은 한편으로 받는 이들에게 축복이며, 다른 한편으로 하나님과 사람 보기에 의이다.
13 절에서 바울은 가난한 성도들에게 물질적인 것을 공급하는 이 사역을 승인하는 것에 대해 말한다. 이것은 유대에 있는 가난한 성도들이 그들을 향한 이방의 믿는이들의 사역을 승인함을 가리킨다. 헬라어 도키메(dokime)는 시험, 시련, 실험을 의미한다. 즉 승인함, 확증함이다. 성도들에 대한 사역은 성도들에 의해 시험받고, 시련받고, 확증됨으로써 그 사역의 관대한 특성을 입증하게 될 것이다.
13 절에 있는 교통(개역 성경에는 연보로 되어 있음)은 또한 전달을 의미한다. 〔로마서 12장 13절에 있는 「전달」(개역성경은 공급)과 빌립보서 4장 15절에 있는 「참예」를 보라.〕 이것은 공급하는 사역으로써 이방의 믿는이들과 유대의 믿는이들 사이에 있는 교통을 말한다.
14 절과 15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결론 짓는다. 『또 저희가 너희를 위하여 간구하며 하나님이 너희에게 주신 지극한 은혜를 인하여 너희를 사모하느니라. 말할 수 없는 그의 은사를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이 말할 수 없는 은사는 믿는이들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은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