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시지 49 - 가난한 성도들을 공급하는 것에 관한 사도의 교통 (Ⅳ)
성경 : 고린도후서 8:1-5, 15, 9:6-15
9 장 6절에서 바울은 『이것이 곧 인색하게 심은 자는 인색하게 거두고 축복으로 심은 자는 축복으로 거둔다 하는 말이로다』라고 말한다. 「-으로(with)」로 번역된 헬라어는 문자적으로 「-위에(upon)」를 의미한다. 여기에서 축복은 먼저 다른 이들에게 축복으로 넘치게 주고 그런 다음 하나님께로부터 축복으로 넘치게 거두는 것이다. 인색하게 심으면 인색하게 거두고, 축복으로 심으면 축복으로 거두는 것은 하나님이 정하신 자연의 법칙이다.
7 절에서 바울은 계속한다. 『각각 그 마음에 정한대로 할 것이요 애석함으로나 궁핍함으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 우리는 줄 때 애석해 하지 말아야 한다. 대신에 우리는 기뻐해야 한다. 만일 우리가 줄 때에 애석해 한다면 아무 것도 주지 않는 편이 낫다. 더욱이 우리는 줄 때 궁핍함으로 하지 말아야 한다. 여기에서 궁핍함으로라고 번역된 헬라어는 6장에서 사용된 것과 똑같은 것이다. 이는 무엇에 의해 압박당하거나 강요당하는 것을 의미한다. 궁핍함으로 주는 것은 주는 것이 우리에게 일종의 재난이라는 것을 가리킨다. 강요당하기 때문에 준다든지 주는 것이 재난이라고 느껴진다면 우리는 주지 말아야 한다. 많은 생각 가운데서 물질적인 소유를 주는 것은 재난으로 고통당하는 것과 같다. 주는 것이 결코 우리에게 이와 같아서는 안 된다. 이 구절에서 바울은 하나님은 즐겨내는 자를 사랑하신다고 말한다. 「즐겨」로 번역된 헬라어는 또한 「명랑한」, 「기뻐하는」 등으로 번역될 수 있다. 주는 데 있어서 우리는 즐겁고 명랑하고 기쁘게 주어야 한다.
8 절과 9절은 『하나님이 능히 너희에게 모든 은혜를 넘치게 하시나니 이는 너희로 모든 일에 모든 것이 항상 넉넉하여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려 하심이라 기록한바 저가 흩어 가난한 자들에게 주었으니 그의 의가 영원토록 있느니라 함과 같으니라』고 말한다. 여러 종류의 은혜가 있다. 디도는 각각 다른 종류의 은혜를 그들에게 이끌기 위해 고린도에 있었다. 오늘날 우리도 또한 각양 은혜를 가져야 한다. 그 중의 하나는 주는 은혜이다.
8 절과 9절에는 사랑스럽고 귀한 많은 사상들이 있다. 그 중의 하나는 관대하게 주는 것이 하나님과 사람 보기에 의라는 것이다. 이런 사상은 마태복음 6장에 기록된 산 위에서 주님이 하신 말씀으로 확증된다. 주님은 너그럽게 주는 것을 은혜로 여기실 뿐 아니라 또한 의로 여기신다.
10 절에서 바울은 계속해서 말한다. 『심는 자에게 씨와 먹을 양식을 넘치게 공급하시는 이가 너희 심을 것을 공급하사 번성하게 하시고 너희 의의 열매를 자라게 하시리니』. 여기에서 우리는 씨의 근원을 본다. 이는 심는 자에게 씨와 먹을 양식을 넘치게 공급하시는 하나님으로부터 온다. 우리는 빵을 만드는 데 사용되는 밀이 수확물에서 자동적으로 나온다고 생각지 말아야 한다.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온다. 우리는 뿌려야 하지만 우리의 뿌림을 의지하지 말아야 한다. 뿌리는 것은 우리의 의무이기 때문에 우리는 뿌려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뿌리는 것을 의지해서는 안 된다. 만일 우리가 우리의 뿌림을 의지한다면 하나님은 비를 내리지 않으시거나 폭풍을 보내어 수확물을 손상당하게 하실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이 양식을 예비하시는 분이라는 것을 보아야 한다. 그분은 우리에게 뿌리기 위한 씨와 음식을 위해 그 수확으로부터 떡을 주신다. 더욱이 우리의 씨를 번성하게 하시고 의의 열매를 자라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성도들과 함께하는 바울의 교통
나는 8장과 9장에서 바울이 사용한 두 가지 예시에 관해 추가의 말을 하고자 한다. 그 두 가지 예는 만나를 거두는 것과 씨를 뿌려 수확을 거두는 것이다. 바울은 피상적인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멀리 떨어져 있는 유대의 가난한 성도들을 돌보는 사역에 관해 교회들과 교통하는 것이 매우 중요한 문제임을 알았다. 그는 마게도냐와 아가야에 있는 성도들이 가난하다는 것을 알았다. 이것은 8장 1절과 2절에서 그가 한 말에 나타나 있다. 『더 나아가 형제들아 하나님께서 마게도냐 교회들에게 주신 은혜를 우리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많은 환난의 확증함 가운데서 저희 넘치는 기쁨과 극한 가난이 저희로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게 하였느니라』. 여기에서 바울은 극한 가난을 말한다. 이 표현은 마게도냐와 아가야까지도 경제적인 상황이 결코 좋지 않았다는 것을 가리킨다. 마게도냐와 아가야에 있는 성도들은 가난했다. 그들의 경제적인 상황이 이러했는데 어떻게 바울은 다른 사람들에게 물질적인 것으로 공급할 것을 격려하고 심지어는 권고할 수 있었는가? 이렇게 주는 것은 틀림없이 그들을 더 가난하게 했을 것이다. 더욱이 성도들의 장래에 대해서는 어떠한가? 바울은 몇몇 가난한 성도들이 이렇게 말할 수도 있으리라는 것을 알았다. 『내 장래는 어찌될 것인가? 내 수중에는 조금밖에 없는데 만약 내가 가진 것의 일부를 줘 버린다면 앞으로 내 생활은 어떻게 돌볼 것인가?』 바울은 이런 상황을 알고 있는 생각이 깊은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는 이 문제를 매우 사려 깊은 방법으로 다루었다. 바울은 가난한 성도들을 위해 물질적인 것을 공급하는 것에 관하여 믿는이들과 함께 교통할 때에 매우 사려 깊었다.
주는 것에 관해 성도들과 교통하는 것은 바울에게 위험한 것이었으며 그들에게 줄 것을 권고하는 것은 더 위험한 것이었다. 그러나 바울은 안에 확고한 믿음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그는 위험을 감수했다. 우리의 관념에는 부요한 사람들에게 가난한 사람을 위해 주라고 말하는 것이 휠씬 쉽다. 그러나 자신의 생계를 꾸리기에도 공급이 충분하지 못한 가난한 사람들에게 그들의 소유를 주라고 권고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이다. 우리가 지적한 것처럼 그들은 장래에 대해, 특히 그들이 가지고 있는 것을 준다면 어떻게 생계를 유지할 것인가에 대해 우려할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하나님의 경륜을 알고 하나님의 방법을 이해했기 때문에 위험을 무릅쓰고 아가야에 있는 가난한 성도들에게 유대에 있는 궁핍한 자들을 위해 주도록 격려하는 데 확신을 가졌다.
기적적인 방법으로 하나님이 돌보심
구약을 공부하면서 바울은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의 필요를 돌보신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나님은 기적적인 방법으로 그분의 백성을 먹이실 수 있다. 아무 것도 자랄 수 없는 불모지인 메마른 광야에 있었던 이스라엘 백성의 수는 이백만 이상이었다. 광야는 경작이나 방목에 적합한 장소가 아니었다. 그러나 사십 년 이상 되는 기간을 통해 하나님은 하늘에서 만나를 내리심으로 기적적인 방법으로 그분의 백성들을 먹이셨다. 나는 그 누구도 만나가 무엇이며 그것이 어디에서 온 것인지를 설명할 수 있으리라고 믿지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광야에서 사십 년 동안 만나로 그분의 백성을 먹이셨다는 것은 역사적인 사실이다. 이백만 명 이상 되는 사람들이 그처럼 긴 기간동안 광야에서 생존할 수 있었다는 것은 확실히 기적이었다.
만나가 내리는 것이나 만나를 거두는 것이나 모두 기적이었다. 바울은 고린도후서 8장 15절에서 이것을 언급할 때 출애굽기 16장 18절을 인용하여 『많이 거둔 자도 남지 아니하였고 적게 거둔 자도 모자라지 아니하였다』고 말한다. 출애굽기 16장 18절에 의하면 호멜은 만나를 측량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많이 거둔 자나 적게 거둔 자나 결국은 모두 한 호멜을 가졌다. 이것은 그의 백성들이 거두는 만나에 대한 하늘에 속한 하나님의 균등케 하심이다. 어떤 사람이 얼마나 많이 거두었든지 후에 만나를 측량해 보면 결국은 기적적으로 각 사람에게 한 호멜이 되었다(출 16:16).
제 육일에는 안식일의 공급을 예비하기 위해 이스라엘 백성에게 두 배의 만나를 거두는 것이 허락되었다. 그러나 다른 날에는 그들에게 필요한 하루 양보다 더 많이 거두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다. 다음 날을 위해 만나를 남겨 두려고 한 사람들은 거기에 벌레가 난 것을 보았다. 이것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자신들을 위해 무언가를 저축하는 것은 하나님의 원칙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 준다. 이렇게 저축하는 것은 탐욕에서 유발된 것이다.
의심할 바 없이 바울이 성경을 연구할 때 성경의 생각과 관념이 그의 안으로 주입되었으며 그를 감동시키고 그를 다스렸다. 결국 이 사상이 그를 움직여 고린도후서 8장과 9장을 쓰게 했다. 8장에서 그는 심지어 어려운 성도들에게조차도 유대에 있는 가난한 자들을 위해 주라고 격려했다. 그는 하나님의 경륜에 대한 깊은 인식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대담하게 성도들에게 이를 행하라고 말할 수 있었다. 이 장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하는 듯하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가난을 고려할 필요가 없다. 단지 궁핍한 자들을 돌보기 위해 주라. 여러분은 자신의 필요를 돌보지 말라. 여러분의 천부께서 여러분의 필요를 공급하신다. 그분은 만나를 공급하시며, 이런 방법으로 여러분을 돌보신다. 내가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여러분은 자신의 장래에 대해 염려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여러분의 장래는 아버지의 돌보심 아래 있기 때문에 나는 여러분이 궁핍한 자들을 위해 줄 것을 격려한다. 기적적인 방법으로 아버지는 만나를 보내실 것이다.』 광야에서 만나를 거두는 이스라엘 백성의 체험에서 우리는 우리의 수입이 사실상 일종의 만나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만나의 공급은 이스라엘 백성이 거두는 것에 달려 있지 않았다. 반대로 그것은 하나님이 내려주시는 것에 달려 있었다. 만일 하나님에서 만나를 내려보내지 않으셨다면 어떻게 이스라엘 백성이 조금이라도 만나를 거둘 수 있었겠는가? 그들이 만나를 거두는 것은 전적으로 만나를 내리시는 하나님께 달려 있었다. 그 원칙은 당신의 수입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당신은 당신의 수입이 당신의 일이나 직업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러나 직장은 누가 주었는가? 그 직장은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것이다. 그러나 만일 당신이 당신의 능력이나 교육을 통해 그 직장을 얻었다고 생각한다면 하나님은 당신의 회사에 어떤 일을 일으켜 당신의 직업을 잃어버리게 하실지도 모른다. 그때에야 당신은 당신의 수입이 당신의 능력에 달린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에 달린 것임을 깨달을 것이다. 이것을 이해하는 것은 우리 모두에게 매우 중요하다. 만일 우리가 우리의 수입이 우리의 교육이나 능력이나 기술에 달린 것으로 생각한다면 우리는 피상적이고 시야가 좁은 것이다.
뿌림과 거둠
9 장에서 뿌림과 거둠의 예를 사용함으로써 바울은 하나님께서도 역시 그분의 백성을 먹이기 위해 자연의 법칙을 사용하신다는 것을 보여 준다. 뿌림과 거둠은 자연 법칙의 문제이다. 주는 것은 실제로 뿌리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어디에서 뿌릴 것을 얻는가? 그 씨는 하나님께서 공급하신다. 씨의 출처는 하나님 자신이다. 9장 10절에 의하면 그분은 뿌리는 자에게 씨를 넘치게 공급하신다.
우리는 단지 우리가 씨를 뿌린 것만으로 풍성한 수확을 거두리라고 확신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우리는 이렇게 기도할 필요가 있다. 『주여, 나는 씨를 뿌렸습니다. 그러나 내가 좋은 수확을 거두고 못 거두는 것은 당신의 긍휼에 달려 있습니다.』 뿌려진 씨가 성장하는 것은 하나님께 달려 있다. 만일 그분이 날씨를 바꾸어 버린다면 우리가 뿌린 씨는 아무 것도 산출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결국 아무 음식도 얻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께 경배하며 이렇게 말해야 한다. 『주여, 나의 공급이 수확에서 나오는 것 같지만 사실상 음식은 당신이 주신 것입니다.』
유일한 근원이신 하나님
하나님의 자녀들인 우리는 그분의 돌보심 아래 있다. 하나님은 두 가지 방법으로 우리를 돌보시며 먹이신다. 즉 기적적인 방법과 자연의 법칙에 따른 방법이다. 우리는 주님께서 기적적인 방법으로 우리를 돌보시는 것으로 인해 감사드려야 한다. 당신은 하나님께서 기적적으로 당신을 돌보셨다는 것과 그분의 기적으로 당신이 산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는가? 당신이 좋은 직장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기적이다. 더욱이 적합한 거처를 가지고 있고 이제까지 보호받고 보전되었다는 것 또한 기적이다. 이 모든 것들은 하나님께서 기적적으로 만나를 내리시는 것으로부터 온다. 우리가 날마다 하는 것은 단지 만나를 거두기 위해 우리의 책임을 다하는 것이다. 당신은 날마다 일하러 가서 만나를 거둔다. 그러나 만나 자체는 하나님의 기적으로부터 온다. 비록 당신이 지금은 이것을 믿을 수 없다 하더라도 언젠가 당신은 이것을 믿게 될 것이다. 당신은 심지어 당신의 육체적인 생명도 하나님의 기적에 의존하고 있음을 보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먹이시는 첫 번째 방법은 기적에 의한 것이다. 우리 모두 이에 대해 깊은 인상을 받고 이를 인해 그분께 경배하기 바란다. 우리는 우리가 사는 것이 우리의 교육이나 능력이 아닌 하나님께서 만나를 내리시는 것에 의존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돌보시는 두 번째 방법은 심고 거두는 자연의 법칙에 의한 것이다. 그렇다. 우리는 뿌려야 한다. 그러나 우리에게 뿌릴 씨를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더욱이 하나님은 그 씨를 자라게 하사 우리로 수확을 얻게 하신다. 우리가 심을 수는 있지만 아무 것도 자라게 할 수는 없다. 하나님은 씨를 공급하시고 씨를 자라게 하시며 또한 우리에게 음식으로서 떡을 주신다.
기적적이든 자연의 법칙이든 공급에 관하여는 하나님이 근원이시다. 한편으로 그분은 만나를 내리시며 다른 한편으로 그분은 뿌릴 씨와 먹을 떡을 공급하신다. 만일 우리가 이에 대해 깊은 이해를 가졌다면 우리는 우리의 장래에 대해 걱정하지 않을 것이다. 주 예수님은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마 6:34)고 말씀하셨다. 우리 믿는이들에게는 공급의 근원인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에 장래에 관해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안 바울은 가난한 성도들에게 궁핍한 성도들을 위해 줄 것을 강하게 격려했다. 우리는 하나님의 필요와 그분의 목적을 돌보아야 한다. 그럴 때 그분은 우리의 장래를 돌보실 것이다. 우리의 장래는 우리의 염려 아래 있지 않다. 그것은 아버지의 돌보심 아래 있다. 그것은 우리의 거둠에 달려 있지 않다. 만나를 보내시는 하나님께 달려 있다. 더욱이 그것은 우리의 뿌림에 달려 있지 않고 그분의 공급에 달려 있다. 만일 하나님께서 씨를 공급하지 않으시면 우리가 무엇을 뿌리겠는가? 우리의 장래는 또한 우리의 거둠에 달려 있지 않다. 그것은 수확이 있을 때까지 씨를 자라게 하시는 하나님께 달려 있다. 이에 대한 깊은 이해와 하나님의 경륜에 대해 온전한 인식을 소유하고 있는 바울은 가난한 성도들에게, 다른 사람들의 필요를 채우기 위해 그들이 가지고 있는 것을 주라고 격려할 수 있는 확신과 평강이 있었다.
바울의 확신
이제 우리는 8장과 9장에 있는 바울의 사상을 이해할 수 있다. 8장에서 바울은 궁핍한 성도들에게 물질적인 것들을 공급하는 것에 관해 성도들과 교통할 수 있는 근거로 만나 거두는 것을 사용했다. 9장에서 바울은 이 교통을 위한 기초로 뿌림과 거둠의 문제를 사용했다. 그러므로 바울은 물질적인 것들을 사역하는 것에 관해 성도들과 교통하기 위한 이중(二重)의 근거를 가졌다. 이것은 만일 그들이 할 수 있는 대로 준다면 그들은 장래에 대해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성도들에게 말할 수 있는 확신과 자신을 그에게 주었다. 여기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하는 듯하다. 『성도들이여, 할 수 있는 대로 주라. 내일에 대해 걱정할 필요 없다. 당신의 장래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돌보심 아래 있다. 나는 이에 대해 확신이 있기 때문에 여러분에게 주라고 격려한다. 나는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고 요구하는 것에 있어서 어떤 모험을 하는 것이 아니다. 만일 당신이 내 말을 받고 그에 따라 행한다면 하나님께 드릴 감사가 번성하게 될 것이다. 만일 여러분이 또한 줌으로써 심기 원한다면 하나님은 당신의 수확을 증가시키실 것이다. 그분은 당신의 의의 열매를 증가시키실 것이다.』 왜 바울은 가난한 성도들에게 주라고 격려하는 데에 담대했는가?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알았기 때문에 담대했다. 더욱이 그는 하나님의 경륜과 그분의 거룩한 방법을 알았다. 그는 경제 사정이 곤란한 교회들에게 궁핍에 처한 다른 이들을 도와주도록 요구하는 것이 가벼운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그는 다른 이들을 도와줄 것을 사람들에게 개인적으로 구하지 않았다. 그는 유럽에 있는 교회들에게 유대에 있는 교회들을 도와주도록 격려했다. 이것은 성도들이 장래에 어려움을 겪을 수도 있기 때문에 바울이 위험을 무릅쓰고 말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바울은 하나님이 만나를 내리기 위해 오셔서 심을 씨를 공급하고 먹을 떡을 주시리라는 것을 확신했기 때문에 자신이 모험을 하는 것이 아님을 알았다. 이것이 고린도후서 8장과 9장에 있는 바울의 말을 합당한 방법으로 이해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