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 메시지 22 - 왕국 헌법의 공포 (10) Ⅵ. 왕국 백성의 재물 처리에 관하여
W.L. LifeStudy
Ezra Zion , 2013-03-20 , 조회 (74) , 추천 (0) , 반대 (0), 스크랩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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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시지 22 - 왕국 헌법의 공포 (10)
 

 이 메시지에서 우리는 6장 19절부터 34절, 즉 왕의 공포의 다섯 번째 부분인 왕국 백성의 재물 처리에 관한 부분에 왔다.


 Ⅵ. 왕국 백성의 재물 처리에 관하여

A.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고 하늘에 쌓아 둠

19 절부터 20절에서 왕은 왕국 백성들이 그들의 보물을 땅에 쌓아두지 말고 하늘에 쌓아 둘 것을 공포하신다.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는 것은 물질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는 것이고(19:21), 궁핍한 성도들과(행 2:45, 4:34-35, 11:29, 롬 15:26) 주님의 종들에게 주는 것이다(빌 4:16-17).


1. 보물 있는 곳에 마음도 있음

21 절은 『네 보물이 있는 그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고 말한다. 왕국 백성은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어 그들의 마음도 하늘에 있게 해야 한다. 그들이 하늘로 가기 전에 그들의 보물과 그들의 마음이 먼저 그곳에 가야 한다.


2. 눈이 단순하면 온 몸이 밝을 것임

22 절은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단순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라고 말한다. 우리의 두 눈은 한 번에 한 가지 사물에만 초점을 맞출 수 있다. 만일 우리 눈이 한 번에 두 가지 사물을 보려고 노력한다면 우리의 시력은 흐려질 것이다. 만일 우리가 한 가지 사물에 우리 눈의 초점을 맞춘다면 우리의 시력은 단순하게 될 것이며 우리의 온 몸은 밝을 것이다. 만일 우리가 보물을 하늘에도 쌓아 두고 땅에도 쌓아 둔다면 우리의 시력은 흐려질 것이다. 만일 우리가 단순한 시력을 갖기 원한다면 우리는 보물을 한 곳에 쌓아 두어야 한다.

3. 눈이 악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임

23 절은 『눈이 악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니 그러므로 네 속에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두움이 얼마나 심하겠느뇨』라고 말한다. 한번에 두 가지 사물을 보는 것은 우리 눈을 악하게 만드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의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다. 만일 우리 마음이 땅에 재물을 쌓아 두는 것에 기울어진다면 우리 속에 있는 빛은 어두워질 것이며 그 어두움이 심할 것이다.


B. 두 주인을 섬길 수 없음

24 절은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받들고 저를 경시 할 것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고 말한다. 재물은 아람어로 매몬(mammon)인데, 그것은 부, 재산을 의미한다. 여기에서 재물은 하나님과 반대되는 것으로서, 부나 재산이 하나님의 적이며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여금 그분을 섬기지 못하게 하는 것임을 가리킨다.


C. 우리의 생활에 대하여 염려하지 않음

1.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함

25 절은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고 말한다. 이 구절에서 주님은 우리에게 우리의 목숨에 대하여 염려하지 말라고 말씀하신다. 여기에서 목숨이라고 번역된 단어는 헬라어로 혼(魂)이다. 그 안에는 음식과 의복에 대한 갈망과 욕망이 있다(사 29:8). 우리의 목숨은 음식보다 중하며 우리 몸은 의복보다 중하다. 우리의 목숨과 몸은 우리의 염려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 존재하게 되어 있다. 하나님이 목숨과 몸을 가진 우리를 창조하셨기 때문에 그분은 틀림없이 목숨과 몸에 필요한 것을 돌보실 것이다. 왕국 백성은 이에 대해 염려할 필요가 없다.

2. 먹는 것과 마시는 것과 입는 것에 대하여 염려하지 않음

31 절은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고 말한다. 이제 우리는 19절부터 34절에 있는 중점에 왔다. 언뜻 보기에 헌법의 이 부분에서 주님은 왕국 백성들의 물질적인 부의 처리에 대하여 말씀하시고 있는 것 같다. 사실상 그분은 염려에 대한 문제를 다루고 있다. 주님은 지혜로우시다. 우리의 성질과 정욕과 천연적인 어떠함과 자아와 육을 다루신 후에 그분은 계속하여 우리의 염려를 다룬다. 이 구절들에서 「염려」라는 단어가 여섯 번 사용되었다(25, 27, 28, 31, 34절). 그것은 또한 주께서 우리의 마음을 다루시는 것처럼 보이는데, 이는 우리의 보물이 있는 곳에 우리의 마음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은 단지 부에 관계될 뿐만 아니라 많은 다른 것들과도 관계된다.

 천국의 헌법은 아버지의 생명과 본성으로 구성된다. 이 장들이 실제로 「생명」과 「본성」이라는 단어들을 사용하지 않지만 문맥으로부터 우리는 아버지의 신성한 생명과 본성을 떠나서는 이 장들이 공허한 것임을 볼 수 있다. 아버지의 생명과 본성이 없이 천국의 요구들을 이룰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모든 헌법은 특별한 종류의 생명에 근거한다. 가령 당신이 개를 위한 헌법을 제정한다고 하자. 의심할 바 없이 그러한 헌법은 개의 생명에 근거할 것이다. 이 헌법이 개로 하여금 공중에 날아다니면서 매일 아침 새벽 파수를 하게 하는 것은 의심할 바 없이 합리적이지 못한 것이다. 왜냐하면 개는 날 수 없고 그와 같은 요구를 이룰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일 그 헌법이 개로 하여금 짖음으로 새벽 파수를 하게 한다면 문제가 없을 것이다. 같은 방법으로 주 예수에 의하여 산상에서 주어진 헌법은 하나님의 아들들을 위한 것이며 아버지의 생명과 본성에 근거한 것이다. 5장에 있는 두 구절이 이 사실을 가리킨다. 9절은 『화평케 하는 자들은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라고 말하며, 48절은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고 말한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말씀의 이 부분을 이해하지 못하는데, 이는 그들이 그것이 신성한 생명과 본성에 근거한 것임을 모르기 때문이다. 심지어 많은 불신자들조차도 자기들의 저서에 이 구절들을 인용하면서 이 장들이 모든 사람들에게 말해진 말씀이라고 생각한다. 아니다, 마치 개의 생명이 날 수 없는 것처럼 인간들은 천국의 헌법의 요구들을 이룰 수 없다. 이 헌법은 신성한 생명과 본성에 근거한 것이다.

 신성한 생명과 신성한 본성에는 염려가 없다. 염려는 마치 짖는 것이 새의 생명에 속한 것이 아니라 개의 생명에 속한 것처럼 신성한 생명에 속한 것이 아니다. 우리 인간의 생명은 염려의 생명인데 비해 하나님의 생명은 누림과 안식과 위로와 만족의 생명이다. 하나님께 염려란 이상한 언어이다. 그분에게는 염려와 같은 것이 없다. 당신은 하나님께서 염려하신 적이 있다고 생각하는가? 그분이 염려로 괴로워하신 적이 있는가? 하나님은 많은 갈망을 갖고 계시지만 염려는 결코 없으시다. 반면에 우리 사람의 생명은 실질적으로 염려로 구성되어 있으며 염려로 짜여져 있다. 인간으로부터 염려를 없애 버린다면 그 결과는 죽음일 것이다. 죽은 사람은 염려가 없다. 박물관의 밀랍 형상이나 성당 앞의 입상은 염려가 없지만 당신이 산 사람인 한 염려를 피할 수 없다.

 만일 우리가 신약에서 주님이 말씀하신 방법을 생각해 본다면 우리는 그것이 사도들이 말한 것과는 전혀 다르다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사도들, 특히 바울은 많은 영적인 책들을 썼다. 바울이 많은 신성하고 영적이고 하늘에 속한 것들을 썼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쓴 방법은 인간적이다. 그것은 베드로나 요한의 글들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신약의 저자들이 얼마나 영적이고 신령한 것들에 대하여 말했다 할지라도 그들의 방법은 여전히 인간적이다. 그러나 신약에서 주님의 말씀하시는 방법은 독특하다. 그것은 묘사하기가 극히 불가능하다. 만일 당신이 마태복음 5, 6, 7, 13, 24, 25장과 요한복음 14장부터 17장을 읽어 본다면 당신은 주님의 말씀하신 방법이 비범함을 보게 될 것이다. 그것은 인간적이거나 일반적이지 않고 의미가 깊지만 간결하고 단순하고 적절하다. 이것은 신성한 방식으로 하는 신성한 말함이다. 나는 젊었을 때 만일 사복음서가 거짓이라면 그것을 쓴 사람이 그리스도가 될 자격이 있다고 말한 프랑스 철학자의 글을 읽었다. 나도 이 말에 동의한다.

 마태복음 6장에서 주님은 겉으로 볼 때 부의 문제를 다루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실제로 그분은 인간 생활의 기본 문제인 염려의 문제를 다루고 계신다. 우리가 본 대로 6장 1절부터 18절에서 그분은 겉으로 보기에 왕국 백성의 의로운 행동을 다루고 있는 것 같지만 사실상 자아와 육을 다루고 계신다. 나는 책을 읽음으로 이것을 안 것이 아니라 교회 생활 안에서 나의 체험을 통하여 알았다. 나의 체험을 통하여 나는 의로운 행동들을 전시하는 것이 분명히 자아와 육에 속한 것임을 알았다. 만일 우리가 십자가에 머문다면 우리는 결코 그러한 전시를 하지 않을 것이다. 같은 원칙으로 6장 19절부터 34절은 우리의 재산이나 부를 다루고 있는 것 같지만 사실상 여기에서 주님의 의도는 우리의 일상생활의 문제의 근원인 염려를 다루는 것이다. 온 세상은 염려에 휘말려 있다. 염려는 세상을 움직이는 톱니바퀴이다. 그것은 온 인류 문화를 위한 자극제이다. 만일 우리 생활에 대한 염려가 없었더라면 아무도 무언가를 하려 하지 않았을 것이다. 오히려 모든 사람은 게을러졌을 것이다. 따라서 우리의 염려를 다루심으로 주님은 인간 생활의 톱니바퀴를 다루신다.

 젊은이들은 이 말을 들을 때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할렐루야! 주 예수께서 인간 생활의 톱니바퀴를 다루셨기 때문에 우리는 열심히 일하거나 공부할 필요가 없다. 만일 우리가 배고프다면 우리는 그저 남은 것을 먹을 수 있다.』 이러한 관념은 틀린 것이다. 6장 26절에서 주 예수님은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천부께서 기르시나니』라고 말씀하신다. 만일 주 예수님이 여기 계시다면 나는 그분께 이렇게 물을 것이다. 『주여, 당신은 우리를 새들에 비유하셨습니다. 새들은 심지도 않고 추수하지도 않고 아무것도 하지 않고 공중에서 날아다닐 뿐입니다. 주여, 이것은 우리가 아무것도 하지 말아야 함을 의미하지 않습니까? 새들은 사람들이 수고한 것을 먹습니다. 주 예수여, 당신은 우리가 다른 이들에게서 유익을 취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시는 겁니까? 우리는 일하는 것에 대하여는 잊어버리고 그저 하늘에 있는 새들처럼 되어 생명을 즐기고 다른 이들이 수고한 것을 먹어야 합니까?』 나는 또한 주님께 이렇게 물을 것이다. 『주여, 당신은 우리를 또한 백합화에 비유하셨습니다. 백합화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서도 솔로몬보다 더한 영광으로 옷 입고 있습니다(28-30절). 당신은 우리가 아무것도 하지 말고 단지 공기와 햇빛과 흙과 물을 누려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겁니까?』 이것이 주 예수님의 이 말씀들을 인용하는 많은 젊은이들이 붙잡고 있는 관념이다. 그들은 『이제 우리는 공중의 새와 골짜기의 백합화가 되자.』라고 말한다. 여기에 있는 주님의 말씀을 이해하는 데에는 어려움이 있다. 내가 다시 말하지만 주님이 여기 계시다면 나는 이렇게 물을 것이다. 『당신은 우리가 공중에 높이 나는 새와 같이 되어 다른 이들이 수고한 이익을 취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시는 겁니까? 그들은 심고 곡식을 자라게 하고 우리는 단지 그것들을 즐기러 온다면 이것은 합법적인 것입니까? 이것이 공정합니까? 모든 새들은 도둑들과 같습니다. 나는 단지 조그만 땅밖에 없는데 새들이 와서 내가 내 땅에서 자라게 한 이익을 취합니다. 당신은 우리가 똑같은 일을 행하란 말입니까?』 내가 이 질문을 하는 까닭은 젊은이들의 심리를 알기 때문이다. 여러 해를 학교에서 보낸 후에 그들은 공부하는 것에 싫증났을지도 모른다. 그들이 중학교에서 고등학교로, 고등학교에서 대학교로, 대학교에서 대학원으로 갈 때 학업은 점점 더 어려워진다. 매우 어렵게 공부하는 대신에 많은 젊은이들은 공중을 나는 새들이 되고 싶어한다. 만일 젊은이들이 솔직하다면 그들이 그러한 관념을 갖고 있음을 인정할 것이다.

 이제 우리는 19절부터 34절에 있는 주님의 의도에 대하여 생각해보자. 주님은 젊은이들이 학업을 끝마치기를 의도하셨겠는가, 아니면 중단하고 공중의 새들과 같이 되기를 의도하셨겠는가? 염려하는 것은 그릇된 것인데, 이는 염려가 신성한 생명에 속하지 않은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생명에는 염려가 없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가 우리의 의무를 이행하지 말아야 함을 의미하시는 것이 아니다. 주님이 이스라엘 자손들을 좋은 땅 안으로 인도하셨을 때 그들은 모두 그 땅에서 일해야 했다. 그것은 그들의 의무였다. 그 좋은 땅이 풍성한 수확을 내느냐 안 내느냐는 여러 가지 것들-기후, 햇빛, 적당량의 비, 알맞은 온도-에 달려 있었다. 이것들 중 어떤 것도 이스라엘 자손들의 조절에 달려 있지 않았다. 그들의 책임은 단지 그 땅에서 수고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을 위하여 수고했을 뿐만 아니라 또한 새들을 위하여 수고했다. 만일 그들이 농사일을 하지 않았다면 새들은 살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그들이 의무를 이행하는 것은 올바르고 필요한 것이었지만 염려하는 것은 그릇된 것이었다. 이와 같이 우리는 오늘 우리의 의무를 다해야 하나 우리의 생활에 대한 염려 없이 행해야 한다. 당신이 다른 이들에게 주기를 매우 꺼려하는 것은 당신의 염려 때문이다. 염려 때문에 당신은 물질적인 것들을 사랑한다. 만일 당신에게 염려가 없다면 당신은 물질적인 것들을 주의하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당신은 다른 이들에게 그것들을 줄 것이다. 우리에게 어려움을 일으키는 것은 염려이다.

 하나님의 경륜 안에서 우리는 모두 수고해야 한다. 우리는 이스라엘 자손들과 같지 않은데, 이는 우리가 문자 그대로의 좋은 땅에서 일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 대신 오늘날 젊은이들은 공부해야 하며 좋은 교육을 받아야 한다. 공부하는 것은 땅을 경작하는 것과 동일하며 대학을 졸업하는 것은 수확하는 것과 동일하다. 젊은이들이여, 공부하는 것은 여러분의 의무이며 여러분은 그것을 해야만 한다. 고대에 이스라엘 자손들은 땅을 파고 씨를 뿌리고 물을 주고 거두는 수고를 해야 했다. 이것이 그들의 의무였다. 그러나 그들이 수확을 하느냐 못하느냐는 하나님께 달려 있었다. 그들의 책임은 어떤 염려도 없이 수고하는 것이었다. 만일 그들이 염려했다면 이것은 하나님께 범죄하는 것이었으리라. 그들은 염려할 필요가 없었다. 그들은 단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하라시는 것만 하면 되었다. 예를 들어, 신명기에 따르면 하나님은 그들에게 하나님 자신을 위하여 십분의 일을, 레위인들을 위하여 다른 십분의 일을, 그리고 또 다른 목적으로 십분의 일을 떼어 놓으라고 요구하셨다. 그들에게는 자신들의 누림을 위하여 모든 산물을 간수하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다. 그들은 어떤 염려도 가져서는 안되었다. 만일 그들에게 염려가 없다면 그들은 관대할 수 있고 기꺼이 다른 이들에게 주었을 것이며 자신들의 물질적인 것들을 하나님의 손에 두었을 것이다.

 우리는 6장 19절부터 34절을 이와 같은 빛 안에서 읽을 필요가 있다. 하나님의 주권 아래서 이스라엘 자손들은 땅 위에서 수고해야 했다. 하나님의 주권 아래서 젊은이들은 오늘날 공부해야 하며 학업을 끝마쳐야 한다. 만일 우리가 합당한 교회 생활을 한다면 우리의 모든 젊은이들은 대학을 마쳐야 한다. 대학 졸업에 실패하는 것은 씨를 뿌려 놓고 추수하지 않는 것과 같다. 오늘날 먹고 살기 위한 요구는 수백 년 전과는 매우 다르다. 오늘날 젊은이들은 부지런히 공부해서 고등학교와 대학교를 졸업함으로 땅을 파야 하며 씨를 뿌리고 곡식에 물을 주어야 한다. 그러나 그들은 염려 때문에 이것을 해서는 안된다. 우리는 염려와 의무를 분간해야 한다. 당신의 의무는 당신의 농사일, 즉 고등학교와 대학교를 졸업하는 농사일을 마치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살기가 어려울 것이다. 하나님을 위하여 이 땅에서 살려면 당신은 당신의 학업을 마쳐야 한다. 그러나 당신이 공부하고 당신의 학업을 완수하려 함에 있어서 당신은 세상 사람들과 달라야 한다. 세상 사람들은 자신들의 염려를 위하여 공부하지만 당신은 염려를 위하여 공부해서는 안되며 당신의 의무를 이루어야 한다. 만일 당신이 이 점을 보지 못했다면 말씀의 이 부분은 단지 당신에게 법적인 문제가 될 것이다.

 다윗의 조상인 보아스는 염려가 없이 자신의 의무를 다한 사람의 본이다. 보아스는 부유한 농부요 그는 매우 생산적이었다. 그러나 이 사람은 염려를 인하여 생산하지 않고 자신의 의무를 다하기 위하여 생산했다. 때가 왔을 때 주님은 그에게 얼마의 금액을 바치도록 했으며 그는 그렇게 했다. 분명히 보아스는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었다. 염려를 이김으로 말미암아 그는 하늘에 보물을 쌓아 두었다.

 수년 후에 많은 젊은이들이 대학을 졸업할 것이다. 나는 주님의 주권적인 축복 아래 많은 재산들이 생기리라고 믿는다. 그때에 당신은 당신의 염려 때문이 아니라 의무를 이행하기 위하여 학교에 간 것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당신이 벌어들인 재산들은 당신의 염려를 위하여 사용되어져서는 안되며, 당신의 의무를 위해 사용되어야 한다. 당신의 의무는 주는 것이요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는 것이다. 백만장자가 되기를 동경하지 말라. 수십만 달러를 저축하려고 애쓰지 말라. 오히려 주는 것과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기를 배우라. 당신의 보물을 땅에서 하늘로 전환시키라. 이렇게 함으로 당신은 땅에서의 백만장자가 아니라 하늘에서의 백만장자가 될 것이다. 당신의 의무는 학위를 획득하여 재산을 만드는 것이다. 그러나 백만장자가 되기를 추구하지 말라. 그 대신 당신의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생명과 본성에 따라 잘 주는 사람이 되라. 이것이 이 부분의 말씀의 의미이다.

 이 메시지에서 나의 부담은 이 기본 요점을 파내는 것이다. 우리 모두에게는 우리가 해야 할 의무가 있다. 우리가 우리의 의무를 이행함에 있어서 우리는 어떤 것도 우리의 염려를 인하여 행해서는 안되는데, 이는 우리가 염려를 모르는 신성한 생명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모든 방면에서 우리를 돌보시는 전능하고 만유를 포함한 하나님 아버지가 계시다. 오늘날의 세상은 염려로 충만하지만 왕국 백성들은 어떤 것에 대해서도 염려해서는 안된다. 우리는 염려함으로 우리의 키를 한 치도 더 자라게 할 수 없다(27절). 도덕에 관하여 우리는 우리로 가장 높은 도덕의 요구를 이룰 수 있게 하는 아버지의 생명과 본성을 안에 갖고 있다. 우리의 생활에 관하여는 우리를 돌보시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 자신을 갖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가 우리의 의무를 이행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우리는 우리의 의무를 다해야 하지만 염려를 해서는 안된다. 살기에 넉넉한 것을 가지고 있었고 여러 목적을 위하여 얼마의 부분을 주었던 이스라엘 자손들과 같이 우리 또한 수확을 해야 하며 여러 목적을 위하여 기꺼이 얼마의 금액을 주어야 한다. 결국 우리가 주는 모든 것은 하늘의 은행에 쌓이게 될 것이며 우리의 모든 부는 거기에 있게 될 것이다.

 이것은 또한 우리의 매일의 생명의 성장과 관계된다. 게으름과 염려는 모두 당신의 생명의 성장을 지연시킬 것이다. 게으르고 의무를 다하지 않는 어떤 사람도 결코 생명이 자라지 못할 것이다. 생명이 자란 모든 이들은 근면하고 부지런하다. 물론 이 근면과 부지런함은 보상을 가져 올 것이며 얼마의 물질적인 부가 당신에게 올 것이다. 이 모든 재산들은 당신의 염려를 위해서가 아니라 당신의 드림을 위해 사용되어져야 한다. 염려는 가버리게 해야 한다. 염려가 당신의 일상생활을 점령하지 못하게 하라. 당신 안에 계신 아버지의 생명은 염려를 모르기 때문에 당신은 아무것도 염려해서는 안된다. 당신이 가진 어떤 잉여분도 당신의 염려를 위해 사용되어져서는 안된다. 그것을 하늘의 은행에 저축하는 데 사용하라. 나는 만일 당신이 이렇게 한다면 당신의 생명이 자랄 것임을 확신한다. 생명 안에서 자라는 유일한 종류의 사람은 부지런하고 자신의 잉여분을 자신의 염려를 위해 사용하지 않는 사람이다. 당신은 부지런히 공부해야 하며 좋은 학위를 얻고 가장 높은 학위를 얻을 필요가 있다. 그러나 당신은 당신에게 들어온 부(富)를 당신의 염려를 위해 사용해서는 안된다. 우리는 수고하며 우리의 의무를 이행하지만 염려가 없다. 이것이 아버지의 생명 안에서 자라는 합당한 길이다.

3.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이 모든 필요를 아심

32 절에서 주님은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고 말씀하신다. 왕국 백성은 왕국의 새 율법을 지키는 힘으로 그들의 천부의 신성한 생명을 갖고 있다. 그들에게는 또한 그들의 물질적인 필요를 돌보는 그들의 천부가 있다. 그러므로 그들은 이것에 대해 염려할 필요가 없다. 그들의 천부는 그들의 힘과 공급의 근원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약해질 필요가 없고 궁핍할 필요가 없다.

4. 먼저 아버지의 나라와 그분의 의를 구함

33 절은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고 말한다. 아버지의 나라는 오늘날 천국의 실제이고 장래 올 시대에는 천국의 나타남이다. 아버지의 의는 5장 20절과 6장 1절에 언급된 대로 왕국의 새 율법을 지킴으로써 이루어지는 의이다. 왕국 백성은 먼저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나라와 의를 추구하기 때문에 그분의 왕국과 그분의 의가 그들에게 주어질 뿐만 아니라 그들에게 필요한 모든 것들이 더해질 것이다.

5. 내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마지막으로 34절은 『그러므로 내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날 괴로움은 그날에 족하니라』고 말한다. 왕국 백성은 결코 내일에 살아서는 안되며 항상 오늘에 살아야 한다. 여기에서 「괴로움」이라는 단어는 걱정과 고통을 의미한다. 이것은 왕국의 왕께서 왕국 백성이 왕국을 위해 땅에 있는 날들이 안이하고 안락한 날들이 아니라 괴로움과 고통의 날들이라는 것을 밝히셨음을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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