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에 관한 교통
Fellowship concerning Migration
서문
이 책은 위트니스 리 형제님이 1964년 9월 7일부터 9일까지 캘리포니아 주(州) 로스앤젤레스에서 전하신 메시지들로 구성된 것입니다.
제1장 이주를 통한 주님의 회복의 확산
다음의 일련의 메시지에서 우리는 주님의 회복의 확산을 위해 미국 내의 여러 지역으로 이주하기 위해 어떻게 준비해야 하는지에 관해 교통하려고 한다. 이 나라에서 무언가 새로운 일을 하기 위해서 우리가 깨달아야 하는 것은 우리 중에 기독교에서 주님의 회복 안으로 들어온 많은 이들이 자신의 기독교적인 배경에 의해 매구 큰 영향을 받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주님의 회복 안에 있더라도 여전히 기독교에서 받은 전통적인 관념들을 붙잡고 있을지도 모른다.
모든 성도들이 주님의 동역자가 되고 전 시간으로 주님을 섬김
기독교의 잘못된 관념 중 하나는 바로 성직자와 평신도에 대한 관념이다. 우리는 종종 특정한 사람들만이 주님의 종이 될 수 있고 우리 가운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주님의 종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우리에게 있는 기독교적인 배경을 통해 우리가 성직자와 평신도에 관한 타락한 관념, 즉 로마 천주교를 통해 전해진 악한 관념을 무의식저으로 받았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다. 이와 반대로 주님께서 성경을 통하여 계시하신 것은 하나님의 모든 자녀들은 예외 없이 주님의 종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 모두가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들이요 하나님의 집 안에 있는 제사장들이기 때문이다(엡 5:30, 롬 12:5, 벧전 2:5, 9). 원칙적으로 거듭난 이들은 모두, 역량이 아무리 작거나 나이가 어리다 해도, 주님의 동역자로서 주님을 섬겨야 한다.
'동역자'라는 말은 제한된 좁은 의미로 쓰이기도 하고 넓은 의미로 쓰이기도 한다. 한 면에서 신약은 사도들과 함께 여행하며 일했던 이들을
동역자라고 불렀다(롬 16:21, 고전 3:9, 빌 2:25, 몬 24). 그러나 또 다른 면에서 신약은 모든 형제들과 자매들이 하나님의 권익을
위하여 하나님의 일을 하는 동역자들임을 가리킨다. 우리는 모두 주님의 동역자들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모두 주님의 권익을 위하여 함께 일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동역자들과 지방 교회 안에 있는 성도들 사이에 엄격하게 선을 긋는 실행을 하지 않는 것이다. 신약의 기록을
점검할 때 우리가 깨닫게 되는 것은 주님의 일을 위해 여행하던 동역자들과 세상에서 직업을 가졌던 지방의 성도들 사이에 선을 긋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사도 바울을 섬겼던 부부인 아굴라와 브리스길라를 생각해 보자. 신약에 따르면 그들은 한 지방의 성도인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교회가 그들의 가정에 있었고 그들은 장막을 만드는 직업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고전 16:19, 행 18:3). 그러나 그들은 또한
동역자인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그들은 주님을 위해 여행했을 뿐 아니라 사도 바울이 그들을 동역자들이라고 불렀기 때문이다(행 18:18, 롬
16:3).
여기서의 중점은 누가 주님의 동역자인가의 문제에 있어서 우리가
율법적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오히려 우리는 하나님의 모든 자녀들이 하나님의 동역자들이라는 원칙에 시실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어디로
가든지 주님의 권익과 일을 위해 그 지방의 성도들과 함께 협력해야 한다. 그 지방의 성도들 또한 하나님의 동역자들이기 때문이다. 성도들 사이에는
계급도 없고 차별도 없으며 성직자나 평신도도 없다. 오히려 모든 성도가 동일한 신분을 가지고 있다. 주님께서 우리 각 사람에게 주신 기능과
사역과 위임은 다를 수 있지만 주님의 권익과 일과 증거에 관하여는 우리 모두가 같다. 우리가 사도이든지 혹은 몸의 가장 작은 지체이든지 우리는
모두 주님의 동역자들이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가 동일한 관심과 동일한 일과 동일한 증거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또한 주님을 전 시간으로 섬기는 이들이 세상에 속한 직업을 가진
이들이나 부분적으로만 시간을 드려서 섬기는 이들보다 더 거룩하다거나 더 헌신적이라고 생각하는 관념을 가지고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이
외적인 방식에 있어서 항상 전 시간으로 주님을 섬겼던 것은 아니다. 그는 때때로 장막을 만드는 일을 하기도 했다(행 18:3, 20:34, 살전
2:9). 그러나 장막을 만드는 동안에도 그는 내적으로는 전 시간으로 주님을 섬기고 있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디모데전서 5장은 지방 교회들
안에 있는 장로들 중 몇몇은 직업을 갖지 않은 채 주님을 섬겼다는 것을 가리킨다. 디모데전서 5장 17절과 18절은 "잘 인도하는 장로들은 두
배로 존대를 받아야 합니다. 특별히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이들은 더욱 그러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성경에서 '곡식을 밟아 떨어내는 소에게
주둥망을 씌우지 마라.'라고 먈한다. 이 구절들이 가리키는 것은 교회가 장로들에게 생계를 위해 공급해야 하며,특별히 전 시간으로 교회를 돌보기
때문에 세상에서 직업을 갖고 생계를 유지할 시간이 없는 장로들에게 공급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사도들만이 주님을 전 시간으로 섬긴다는
관념을 가져서는 안 된다. 지방의 성도들도 그들의 직업을 내려놓고 전 시간으로 주님을 섬길 수 있다. 더욱이 우리는 외적인 방식에 있어서 주님을
전 시간으로 섬기는 이들이 그렇지 않은 이들보다 더 거룩하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사도 바울도 때로는 세상에 속한 직업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과거에 우리가 비중 있게 주님의 일에 큰 도움을 주었던 많은
형제자매들도 주님의 인도를 받아서 그들의 온 일생 동안 직업을 가졌다. 그들 중에는 의사도 있었고 간호사도 있었다. 한 자매는 상하이에서 가장
큰 병원 중 한 곳에서 간호사로 일했고 봉급도 높았다. 그러나 그 자매는 자신의 생계를 위해 필요한 것만 남기고 나머지는 모두 주님과 주님의
일을 위해 드렸다. 그 자매는 자신을 위해서는 한 푼도 저축하지 않았다. 그 자매는 세상에 속한 직업을 가진 간호사였지만 참으로 주님의 진정한
동역자였다. 또한 주님의 참된 동역자였던 몇몇 형제들은 지방 교회에 필요가 있을 때마다 집사처럼 섬겼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님을 섬기는 길은
율법적이거나 조직적인 문제가 아니다. 그보다 우리는 주님의 일 안에서 주님의 권익을 위해 영 안에서 살고 움직여야 한다.
많은 장로들이 직업을 갖지 않고 주님 안에서 믿음으로 살고 있으며
주님께서 그들을 돌보신다. 어떤 형제들은 사업을 일으키고 다른 사람들을 고용하여 사업을 운영하게 한다. 그리고 고용인들로 사업을 계속 운영하게
하고, 그 형제들은 자신이 있는 지방에서 장로로서 전 시간으로 주님을 섬긴다. 그들은 교회 안에서 교회를 위하여 그들의 모든 시간을 사용하며
또한 물질적으로도 많은 것을 교회를 위해 드린다. 한번은 위치만 니 형제님이 몇몇 형제자먀들의 도움으로 의약품을 생산하는 공장을 설립하셨다.
당시에 중국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확산되고 있었고 동역자들에 대한 필요가 증가하고 있었다. 그때 많은 동역자들은 재정적으로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래서 니 형제님으 자신의 동역자들을 돌보기 위해 그 사업을 시작해야 한다고 느끼셨다. 비록 형제님이 세상에 속한 직장에서 일을 하셨지만 니
형제님은 여전히 주님을 전 시간으로 섬기셨다.
주님을 섬길 때 우리가 반드시 깨달아야 하는 것은 바로 조직이나 전통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보다 모든 사람이 살아 있는 방식으로 주님을 섬겨야 한다. 우리는 율법적으로 몇몇 특정한 형제들만이 전 시간으로
섬기는 동역자들이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 우리가 깨달아야 하는 것은 모든 믿는 이들이 몸의 지체이며, 따라서 몸 안에서 주님을 섬기는 동역자라는
것이다. 교회의 건축에 우리가 얼마나 공헌할 수 있는가는 생명의 성장, 생명의 성장에서 산출되는 기능 발휘, 주님에게서 받은 위임, 그리고
우리의 환경에 달려 있다. 때때로 우리의 환경은 우리가 섬기는 것을 크게 제한한다. 그럴 때 우리는 반드시 환경에 의해 제한을 받아, 그만큼
적게 섬겨야 한다. 그러나 때때로 주님은 우리에게 더 많이 섬길 수 있는 환경을 주신다. 그럴 때 우리는 더 섬겨야 한다. 우리가 많이 섬기든
적게 섬기든 우리의 마음은 반드시 전 시간으로 주님을 섬기는 것이어야 한다.
교회들 안에 재정적인 통제가 없음
어디를 가든지 우리는 우리 사이의 관계가 형식적이거나 조직적이지 않고
반드시 영적이어야 한다는 것을 분명히 깨달아야 한다. 우리는 사람들이나 교회들이나 재정에 대해서 통제해서는 안 된다. 교회 안에 비록 재정에
관한 조직은 없지만, 사랑 안에서의 충분한 대화와 교통이 있다. 예를 들면, 주님 안에서 한 동역자가 굶고 있는 것을 볼 때 내가 그를 도와야
할 법적인 의무는 없다. 그렇지만 나는 그를 사랑하기 때문에 분명히 그를 도울 것이다. 그러나 내가 궁핍할 때 나를 돌보는 형제가 한 명도 없다
해도 나는 불평할 수 없다. 왜냐하면 누구도 나에게 어떤 것을 약속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각 지방 교회는 교회가 받는 헌금을 최선의 방식이라고 느끼는 대로
분배할 자유가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한 지방 교회 안에 있는 각 성도들도 필요가 있는 교회에게 혹은 주님을 섬기는 가난한 성도들에게 재물을
드릴 자유가 있다. 심지어 주님을 전 시간으로 섬기는 이들도 가난한 교회들이나 가난한 성도들에게 재물을 드릴 자유가 있다. 많은 때 동역자들이
물질적으로 교회들을 돌보았다. 이렇게 교회 안에서나 교회들 사이에는 통제가 없다.
성도들이 자신의 금전을 드리는 것을 볼 때 나는 격려를 받는다. 어떤
지방 교회들에게는 주일 집회 후 헌금함을 개봉할 때 성도들의 이름이 적힌 봉투가 가득하다. 어떤 봉투에는 곧 결혼할 형제의 이름이 적혀 있고,
다른 봉투에는 학비가 필요한 형제의 이름이 적혀 있으며, 또 다른 봉투에는 수술을 받기 위해 병원에 가게 될 형제의 이름이 적혀 있다. 어떤
봉투는 복음 전파를 위해 지정된 것이고, 어떤 봉투는 다른 도시의 집회소 건축을 위한 것이며, 어떤 봉투는 문서의 일을 위한 것이다. 이렇게
드리는 것은 성령께서 성도들 안에서 일하시도록 한다. 왜냐하면 성도들이 그들의 금전을 드릴 때마다 그들은 반드시 기도하며 그들의 금전을 누구에게
드려야 할지에 대해 주님의 인도를 구할 것이기 때문이다. 교회 안에서 모든 것은 율법적인 방식이 아니라 살아 있는 방식으로 행해져야
한다.
금전을 드리는 이들은 무기명으로 드린다. 그럴 때 받는 이들도 헌금이
누구에게서 왔는지 알 수 없게 된다. 주님께서 그분의 회복의 일을 축복하신 것은 바로 이 이유 때문이다. 이 일은 사람이 손으로 조직한 것이
아니다. 그 보다 이 일은 신성하고 영적인 것이다. 우리가 금전을 드리거나 혹은 받을 때에는 반드시 주님을 추구해야 한다. 우리에게 금전이
부족할 때 우리가 갈 수 있는 유일한 곳은 바로 우리가 하나님의 다룸을 받도록 하는 곳인 지성소이다. 형제들에게 도움을 호소하기보다 우리는
주님께 가서 그분께 말씀드리며 그분을 대하고 그분의 다룸을 받아야 한다.
이주에 관한 원칙들
우리가 다른 곳으로 이주하기를 준비할 때 우리는 반드시 몇 가지 원칙들을 알아야 한다.
첫째,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할지에 관해서 분명해야 한다. 둘째, 우리는 혼자서 이주해서는 안 된다. 원칙적으로 우리는 적어도 한 명 이상의 성도들과 함께 이주해야 한다. 우리가 알고 있듯이 지방 교회 안에서 우리는 교회의 인도를 따라야 하며 다른 성도들과 분리되어 독립적으로 섬겨서는 안 된다. 이와 같이 우리는 이주할 때 적어도 두 명씩 가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누구와 함께 이주할 것인가에 대하여 주님의 생각을 구해야 한다.
셋째, 우리는 언제 이주할 것 인가에 대해 분명해야 한다. 우리는 반드시 이러한 세 가지, 즉 장소와 동반자와 시기에 대해 기도하고 고려해야 한다. 주님께서 우리를 함께 모으신 이유는 우리에게 목적을 가지고 계시기 때문이다. 우리는 함께 모일 때 이 나라 안에서의 주님의 움직임에 대한 조망을 갖기 위해 서로 교통해야 한다. 이것은 우리가 주님의 인도를 알 수 있도록 도울 것이다.
우리는 개인적으로 또한 단체적으로 더욱더 기도해야 한다.
우리가 새로운 곳으로 이주할 때, 우리 가운데서 주님의 회복의 길에 대하여 분명한 이들이 솔선하여 합당한 방식으로 교회생활을 시작해야 한다. 그 지장에 있는 믿는 이들은 회복의 길에 친숙하지 않을 것이므로, 우리가 만일 그들이 교회생활을 시작하기를 기다린다면 교회생활이 세워지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다. 또한 그들이 합당하지 않은 것을 시작한다면 나중에 그 상황을 조정하기는 더욱 어려울 것이다. 그렇게 때문에 우리는 그 지방에 있는 믿는 이들이 무언가를 시작할 때까지 기다리지 말고 앞장서서 무언가를 시작해야 한다. 그럴 때 그 지방의 믿는 이들이 매혹될 것이고 새로운 길로 인도될 것이다. 결국 우리가 바라는 것은 그 지방의 많은 믿는 이들이 훈련받아 인근 도시들과 다른 도시들로 회복을 확산하는 것이다.
이러하 이주는 우리에게 주님의 인도를 받을 것을 요구한다. 우리는 어떤 것도 조직해서는 안 된다. 사람들을 함께 모으고 어떤 것을 조직하는 것은 쉽다. 그러나 그것은 주님의 길이 아니다. 우리는 주님의 생각을 구하고 주님의 인도를 받아야 한다. 몇몇 형제들이 어떤 도시로 이주할 부담을 받았다고 하자. 그들은 이주한 후에 자연스럽게 한 가정에서 함께 모이게 될 것이고, 거기서부터 나가서 복음을 전파하고 다른 믿는 이들을 접촉할 것이다. 미국에서 주님은 이미 많은 사람들을 예비하셨다.
그러므로 우리가 다만 나가서 합당한 교회생활을 세우기만 한다면 많은 사람들이 올 것이다. 우리는 다만 도랑을 파야 한다. 그러면 물이 올 것이다(왕하 3:16-17).회복의 횃불을 다른 이들에게 전함
우리는 회복의 횃불을 다른 이들에게 전하기를 배워야 한다. 1938년에 극동에 있는 우리들을 그 지역의 일에 너무나 점유되어 있었기 때문에 주님께서 우리를 미국으로 보내시리라는 생각은 거의 하지 못했다. 그러나 바로 그 해에 나는 어떤 자매로부터 미국행 왕복 비행기 표를 구입하는 데 사용될 수 있는 수표를 받았다. 나는 그 자매에게 나의 부담은 중국이지 미국이 아니라고 편지를 썼다. 그 자매는 내가 수표를 가지고 있으면 조만간 주님께서 나를 미국으로 보내실 것이라고 답신했다. 수년 후에 결국 나는 이 나라로 왔다. 내가 이곳으로 올 때 가진 부담을 다마 횃불을 들고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었다. 나는 다만 회복의 횃불을 여러분에게 전해 주어 여러분 모두가 주님을 위해 일어나고 이 나라에서 주님의 회복의 책임과 인도 직분을 취하는 것이다. 나는 기꺼이 공장에 있는 공장장처럼 다만 조력자가 되기 원한다.
과거의 역사에서 우리가 배운 것은 어떤 지방에서 그 지방의 성도가 일으켜져서 그 지방에서의 일을 위한 책임을 지지 않는다면 일의 전진이 지연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선교사들이 중구에 보내어져 주님을 위하여 일한 것에 대해 주님께 감사를 드린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이 합당한 방식으로 불길을 전하지 않았기 때문에 주님의 움직임을 방해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중국에서 각 지방마다 성도들이 일으켜졌다면 중국에서의 일은 선교사들을 통해 이루어진 것보다 더 빨리 전진했을 것이다. 내가 미국에 왔을 때 나는 이 공과를 배웠다. 그리고 나는 전체적인 일을 그 지역에 있는 성도들의 손에 맡겼다. 지난 2년 동안 이곳에서 세워진 일은 모두 이 지역의 형제들의 손에 맡겨졌다.
나는 미국에서의 주님의 증거를 위한 깊은 부담을 가지고 있다. 비록 내가 극동에서의 일에 대한 책임을 가지고 있기는 하지만 나는 주님께서 내가 이곳에 있기를 원하신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다. 나의 마음과 나의 마지막 피 한 방울까지도 절대적으로 이곳에서의 주님의 증거를 위해 있다. 나는 주님에게서 배운 것들을 주님의 긍휼로 여러분에게 전해주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지 할 것이다. 그러나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다만 도움을 주는 것일 뿐이다. 책임은 여러분의 어깨 위에 있다. 내가 바라는 것은 여러분 중에 많은 이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힘을 얻고 일어나 하나님의 목적을 위하여 여러분의 책임을 감당하는 것이다.
주님의 회복의 확산을 위한 원칙은 동역자들이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가서 도움을 주는 것이지만, 그 지방에서의 일을 위한 책임은 반드시 그 지방의 성도들이 짊어져야 한다. 극동에서의 일을 위한 책임은 반드시 그 지방의 성도들이 짊어져야 한다. 극동에서 일의 책임과 일의 결과는 전적으로 그 지방의 형제들과 지방 교회들의 수중에 있다. 일의 결과가 내 손에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이것이 회복을 확산하는 가장 빠르고 가장 효과적인 길이다.
제2장 주님의 회복의 길 안에서 교회생활을 세움
미국에서의 주님의 회복의 확산을 위해 우리가 취해야 하는 길은 바로 전략적인 도시들로 이주하는 것과 그 도시들에서 지방교회를 세우는 것이다. 우리는 그 도시에 있는 지역의 성도들이 지방 교회를 세우기를 기다려서는 안 된다. 어떤 도시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집회를 세운다면 그 집회는 순수하거나 새롭지 않을 수 있다. 어쩌면 여전히 기독교의 낡은 전통에 따른 집회일 수도 있다. 더욱이 이렇게 집회가 세워지고 나면 나중에 그것을 조정하기는 더욱 어려울 것이다.
......
제3장 몸의 건축을 위해 훈련받음
제4장 하나님의 경륜을 보는 것이 필요함
제5장 하나님의 경륜의 관점을 가지고 합당한 방식으로 회복된 진리를 받아들임
이주에 대한 추가적인 예비
......
미국에서 주님의 움직임을 수행하기 위해서 우리는 단순히 나가서 바로 수고하기를 시작할 수는 없다. 우리는 충분히 기도해야 한다. 우리는 미국을 위하여, 이 나라에서의 주님의 증거를 위하여, 주님의 움직임을 위하여, 주님의 회복이 이 나라에서 온 땅으로 확산되기 위하여 기도해야 한다. 이것은 또한 주님께 우리보다 앞서 가셔서 길을 예비하실 수 있는 시간을 드릴 것이다.
우리에게는 사역에서 전한 메시지들을 편집하고 교정할 시간이 필요하다. 그럴 때 그 메시지들이 책으로 출판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1962년에 전한 '만유를 포함하신 그리스도'에 관한 메시지와 '하나님의 경륜'에 대한 메시지와 '요한복음 연구'에 대한 메시지들이 출간될 수 있기를 바란다. 이 메시지들은 속생명과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에 중심을 두고 있다. 이것은 커다란 도움이 될 것이다. 우리는 또한 격월간지인 <생명의 흐름>이 계속 출간되기를 바란다.
이곳에 머무는 동안, 가능하다면 우리는 직업을 가져야 하며, 적어도 시간제로 근무하는 직업을 가져야 한다. 우리는 성도들에게 짐이 되기를 원하지 않는다. 주님께서 우리를 돌보실 것이지만, 주님은 성도들과 교회들을 통해서 많은 것을 하실 것이다. 그렇지만 가능하다면 우리는 그들에게 지우는 짐을 가볍게 해야 한다. 사도 바울도 때때로 직업을 가졌다(행 18:3, 20:34, 살전 2:9). 그러므로 우리는 청년들이 직업을 가져서 자신을 돌보기를 격려하며, 주님께서 그들에게 더 많이 공급하신다면 다른 이들도 돌보기를 격려한다. 우리는 이렇게 전진해야 하며 부지런하여 다른 이들에게 부담을 주지 말아야 한다. 몇 년이 지난 후에 주님께서 우리에게 위임을 주실 수도 있으며 그럴 때 우리는 주님에 의해 보냄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그때는 우리가 직업을 가질 시간이 없을 것이다. 우리의 모든 시간을 주님의 일을 위하여 사용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융통성을 갖고 필요에 따라 기능을 발휘해야 한다. 우리가 주님의 일을 위해 여행을 하거나 돈을 벌기 위해 직장에서 수고하거나 우리는 모두 동일하다. 누구도 성직자가 아니며 누구도 평신도가 아니다. 이것이 오늘날의 기독교를 향한 우리의 증거이다.
주님은 속생명과 교회생활을 회복하실 뿐 아니라 집회하는 합당한 길도 회복하고 계신다. 우리는 우리의 집회에 전통적인 것이 하나도 없기를 바란다. 우리의 집회는 획일적일 필요가 없다. 로스앤젤레스에서는 이런 방식으로 집회를 하고, 샌프란시스코에서는 또 다른 방식으로 집회를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우리가 모이는 방식은 전통적이거나 형식적이지 않고 살아 있어야 한다. 지금까지도 우리는 기독교의 배경에 여전히 묶여 있다. 우리는 자신이 얼마나 많은 전통을 물려받았는지 깨닫지 못하고 있다. 우리는 이러한 전통에서 완전히 구출받지 못했다. 우리의 집회들에 합당한 질서가 있기는 하지만, 그 집회들이 그 영 안에 있지는 않다. 주님은 우리의 집회 방식을 완전히 변혁시키실 것이다. 그러고 나서 주님은 우리가 사는 방식도 바꾸실 것이다. 우리는 어떤 이들이 사도행전 2장과 4장에서처럼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며 살게 될 것이라고 믿는다. 교회 전체는 아니지만 적어도 교회 안에서 몇몇 사람은 그러한 증거를 나타낼 것이다.
1936년에 대여섯 명의 동역자들이 내 가족과 함께 사도행전 2장과 4장에 계시된 방식대로 살았다. 주님은 참으로 그러한 생활을 축복하셨고 그것이 다른 이들에게 증거가 되었다. 우리는 다른 이들에게 이러한 종류의 생활을 강요해서는 안 되며 온 교회를 이러한 생활 안으로 인도하려고 시도해서도 안 된다. 우리 중 소수의 사람들만 이러한 방식으로 살도록 인도를 받고 그외의 모든 사람들은 다른 방식으로 산다고 해서, 잘못된 것은 하나도 없다. 여러분이 이런 식으로 살지 않는다고 해서 여러분이 영적이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나는 몇몇 성도들이 이러한 정도까지 회복되기를 바란다. 우리는 기독교와 세상을 향해 우리가 우리 자신을 위하지 않고 전적으로 주 예수님을 위하며 하나님의 왕국을 위해 산다는 것을 증언할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영적인 생활과 교회생활에 대하여 교리가 아닌 참된 증거를 사람들에게 보여줄 것이다. 이러한 증거가 복음 전파의 증거가 될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우리처럼 살지 않는 사람들을 비난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사실상 우리에게는 비난하고자 하는 의도가 전혀 없다. 그러나 우리는 주님의 증인들이기 때문에 자동적으로 반대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세상이 타락한 길을 취하고 있을 뿐 아니라 기독교조차도 타락한 길을 취하고 있다. 그러므로 주님께는 그분의 길을 증언하기 위해 몇몇 사람이 필요하다. 요한계시록 2장 13절에서 주님은 '모든 것에 반대함'을 뜻하는 이름인 '안디바'를 언급하신다. 안디바는 하나님의 뜻에서 벗어난 모든 것에 반대하는 증거를 지녔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지녀야 하는 증거이다.
이 문제는 율법적인 것이 아니다. 이것은 주님의 주권 아래 있는 것이다. 주님께서 우리를 이러한 길로 인도하신다면 주님께서 모든 것을 이루어 내실 것이다. 이러한 길을 취하는 것을 우리의 아내나 자녀들이 동의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들을 강요할 수 없다. 이러한 길을 취하는 것이 우리를 위한 주님의 뜻이 아님을 암시하는 것일 수도 있다. 율법적인 것은 하나도 없다. 모든 것은 다 융통성이 있다. 주된 원칙은 바로 우리가 주님께 진지하다는 것을 세상에 증언하는 것이다. 우리는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왕국을 위하여 해야 한다.
공장을 운영하는 한 형제가 있었는데 그는 하나님의 왕국을 위하여 자신의 돈을 사용했다. 그는 자신을 위해서보다 하나님의 왕국을 위해 더 많은 돈을 사용했다. 그의 가정생활과 개인생활은 매우 검소했다. 그 형제가 주님의 일과 동역자들과 교회를 위해 사용한 돈은 자신의 가족을 위해 사용한 돈보다 몇 배나 더 많았다. 우리는 모두 주님의 증거를 위해 절대적이어야 한다. 이것이 진정한 교회생활이다.
우리는 기독교의 모금하는 방식을 취하기를 원하지 않는다. 우리느 그렇게 하는 이들을 유죄 판결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어떤 사람들에게는 그렇게 하도록 허락하셨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이런 식으로 돈을 모금할 자유가 없다. 차라리 우리는 우리 손에 아무것도 없고 가난하게 되기 원한다. 만일 우리의 생계를 꾸리기 위한 돈이 없다면 우리는 직업을 가질 것이다. 내몽고로 이주한 몇몇 형제들은 인력거를 끄는 직업을 갖고 있었다. 인력거를 끄는 사람들은 대부분 거칠지만 우리의 사랑스런 형제들은 사람들에게 최고의 증거를 보여 주었다. "여러분들은 왜 다릅니까?"하고 사람들이 물어볼 때 그 형제들은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당신이 저에게 무언가 다른 것이 있다고 느끼신다면 그것은 제 안에 예수님께서 계시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리스도인입이며 저는 주님을 섬기기 위해서 이 일을 하고 있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이것이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었고 그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이것으로 인하여 50개의 지방 교회들이 그곳에 세워졌다. 이러하 종류의 생활에는 능력이 있었다. 내몽고로 이주한 70명의 성도들 중에서 전도인은 한 사람도 없었다. 어떤 이는 구두 수선공이었다. 그들은 이주했을 때 길 모퉁이에 작은 게시물을 세워 놓고 지나가는 사람들의 구두를 수선했다. 손님들은 그들이 다르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저는 여기에 사업을 위해 있지 않습니다. 저는 주 예수님을 전파하기 위하여 여기에 있습니다. 저의 사업은 단지 생계를 위한 것이며, 저는 예수님을 위해 살고 있습니다."라는 것이 그들의 증거였다.
그 성도들이 이주하기 전에 교회는 모든 것을 주님께 드렸고, 그렇게 드린 돈으로 교회는 이주하는 성도들의 이주 비용을 지불했고 그들에게 3개월 동안의 생계를 위한 충분한 돈을 주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성도들은 모두 이주한 후 3개월 이내에 직업을 갖도록 기도했다. 주님께서 그들을 공급하셨다. 몇 년 후에 몽고를 다녀온 한 형제에게 소식을 들었을 때, 나는 주님께서 많은 풍성으로 그들을 보상하셨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교회는 마땅히 이러한 방식으로 온 땅으로 이주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