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장
게으르지 않고 근면해야 한다
주님의 일을 하는 사람의 개인 생활이 어떠한가에 따라 그가 사역을 할 수 있는지 없는지가 결정된다. 주를 섬기는 길에서 우리는 많은 젊은 형제들이 아주 유용하게 잘 자라는 것을 본다. 그리스도인의 생활 시작부터, 당신은 그들에게서 그들이 좋은 씨앗으로 심겨져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을 것임을 느낄 수 있다. 이와 반대로 우리는, 상당한 자부심을 갖고 자신을 좋다고 여기는 사람들이 주의 길에서 얼마 가지 않아 결국 쓰러지고 마는 것을 본다. 그런 사람들은 아무 쓸모가 없을 뿐만 아니라 또한 주님의 이름을 크게 욕되게 한다. 왜냐하면 그의 길은 더 이상 넓힐 수 없을 정도로 넓은 길이기 때문이다. 이외에 우리는, 어떤 사람들이 초기 그리스도인의 생활에서는 주목할 만한 특별한 점이 없다가 시간이 지날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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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앞에서의 그들의 가치가 더 뚜렷해지는 것을 본다. 당신은 이에 대해 의아하게 생각할 것이다. 솔직하게 말해서, 하나님께 쓰임받는 사람들은 모두 기본적으로 조성된 성품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기본적인 성품을 가진 사람은 유용한 사람이 될 수 있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은 봉사의 길에서 아무 쓸모가 없게 된다. 많은 면에서 훌륭한 일꾼이 될 자질이 있으나 기본적인 성품이 결여된 사람은, 사역을 하고자 하는 갈망이 있다할지라도 그의 사역은 성공하기가 어렵다. 우리는, 자기 몸을 다스릴 줄 모르는 일꾼이 주의 일을 잘하는 사례를 보지 못했다. 다른 일에서는 어떤지 모르지만,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있어서 그분의 종들 가운데 자기 몸을 쳐 복종케 할 수 없는 사람이 유용하게 되는 사례를 보지 못했다. 또 우리는 고난 받을 마음가짐이 없는 사람이 사역을 잘하는 경우도 보지 못했다. 또한 다른 사람의 말을 잘 들을 줄 모르는 사람이 하나님을 잘 섬기는 것도 본 적이 없다. 하나님을 섬기는 모든 사람에게는 언제나 이러한 기본적인 성품들이 있어야 한다. 바꾸어 말하면, 그들에게는 이러한 자격들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들이 이러한 성품들을 가지고 하나님을 잘 섬길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긍휼을 주셔야 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섬기는 일은 그리 간단하지 않다. 겉 사람의 허물어짐과 세워짐이 필요하다. 만일 당신이 바르지 않고 많은 일에서 제멋대로 하고 자신을 느슨하게 풀어 놓는다면, 당신이 나가서 사역을 한다 해도 아무 소용이 없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잘 섬기지 못하는 것은, 그들의 기술이나 지식이나 교리가 부족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의 성품과 성격에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일을 그르치는 것은 바로 여기에 그 원인이 있다. 그들은 이것 때문에 사역을 할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형제의 말을 듣기를 배워야 하며, 스스로 하나님 앞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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겸손해지기를 배워야 하고, 스스로 하나님 앞에서 구하기를 배워야 하며, 많은 면에서 하나님 앞에 철저하게 다룸을 받아야 한다. 우리는 결코 이러한 성품의 훈련을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된다. 만일 당신의 성격이나 성품이 성령의 깊은 다룸을 받지 않았다면, 당신이 한 일들은 그리 많은 열매를 맺지 못할 것이다. 이러한 기본적인 성격의 훈련은 하나라도 누락되어서는 안 된다. 당신에게 이러한 훈련이 있다면, 당신은 주님의 일을 할 수 있다. 그러나 당신에게 이러한 것이 없다면, 당신은 주님의 일을 할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시간을 들여 하나님 앞에서 이러한 것들을 하나씩 처리해야 한다.
이제 우리는 게으르지 말고 근면하는 것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1
“한 달란트 받은 자는 가서 땅을 파고 그 주인의 돈을 감추어 두었더니 오랜 후에 그 종들의 주인이 돌아와 저희와 회계할새 다섯 달란트 받았던 자는 다섯 달란트를 더 가지고 와서 가로되 주여 내게 다섯 달란트를 주셨는데 보소서 내가 또 다섯 달란트를 남겼나이다 그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하고 두 달란트 받았던 자도 와서 가로되 주여 내게 두 달란트를 주셨는데 보소서 내가 또 두 달란트를 남겼나이다 그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하고 한 달란트 받았던 자도 와서 가로되 주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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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을 내가 알았으므로 두려워하여 나가서 당신의 달란트를 땅에 감추어 두었었나이다 보소서 당신의 것을 받으셨나이다 그 주인이 대답하여 가로되 악하고 게으른 종아 나는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로 네가 알았느냐…”(마 25:18-30). 이 단락의 성경 구절은 부지런하고 게으르지 않는 것이 주의 일꾼의 기본적인 필요인 것을 보여 준다. 주님은 여기에서 상당히 분명하게 이 종의 근본적인 문제점을 지적하셨는데, 그것은 바로 악(惡)하고 게으른 것이다. 그의 ‘악함’은 감히 우리 주님께,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을 내가 안다”라고 말함으로 폭로되었다. 또 한 면에서 그 종은 게을렀다. 그가 달란트를 땅에 묻으러 갔을 때 마음에 생각한 것은 악한 것이었으며 그의 손이 한 일은 게으른 것이었다. 그가 마음속으로 주인(主人)을 어떤 사람이라고 생각한 것은 악한 것이며, 그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지 않고 달란트를 땅에 묻은 행위는 바로 게으름이다. 우리가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은, 이 게으른 성격이 많은 사람들에게 가장 큰 문제라는 것이다.
게으른 사람은 할 일을 찾지 않는다. 오히려 일거리가 생기면 슬쩍 피하며 일이 없어지기만을 기다린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러한 태도를 취하고 있다(그들은 큰 일을 작은 일로 여기고 작은 일은 아예 없었던 일로 여기는 태도를 취한다). 체험에 비추어 볼 때, 오직 한 종류의 사람만이 유용한데, 바로 부지런한 사람이다. 게으른 사람은 가장 악한 사람이다. 어떤 형제는 말하기를, 사탄까지도 이런 사람은 쓸모없어서 성낸다고 했다. 잠언 19장 24절은 “게으른 자는 그 손을 그릇에 넣고도 입으로 올리기를 괴로워하느니라”고 말한다. 게으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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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아무 일도 하려고 하지 않는다. 왜, 아무것도 하려고 하지 않는가? 피곤해질까 두려워서이다. 게으른 사람은 손을 그릇 안에 넣고서도 들어올리려 하지 않는다. 그는 안 먹을 수는 없으므로 누군가가 그 대신 그릇 속의 음식을 그의 입에 넣어 주기를 바란다. 세상에 아주 쓸모없는 한 부류의 사람은 바로 게으른 사람이다. 하나님께서는 게으른 사람을 쓰지 않으신다. 형제자매여! 하나님께서 쓰시는 종 가운데 게으른 사람을 보았는가? 하나님께 쓰임받을 수 있는 사람은 언제나 고생스럽게 수고하며 바쁘게 일한다. 그들은 그들의 시간이나 정력을 헛되이 낭비하지 않는다. 항상 쉬려고 하고 요양하려는 사람은 주님의 종답지 않다. 주의 종은 게으른 생활에 익숙하지 않다. 그들은 시간을 구속하여 생활한다.
베드로부터 바울에 이르기까지 신약 안의 사도들을 보자! 그들에게서 조금이라도 게으른 면을 찾아낼 수 있는가? 우리는 그들에게서 게으른 면을 조금도 찾을 수 없고 그들이 시간을 헛되이 낭비한 것을 발견할 수 없다. 그들은 부지런히 수고하고 힘을 다해 하나님을 섬길 기회를 찾는 사람들이었다. 바울은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딤후 4:2)고 말한다.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우리는 항상 복음을 전해야 한다. 때를 얻을 때에 힘써야 하고 때를 얻지 못할 때에도 부지런히 일해야 한다.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은 때를 얻어도 사역을 해야 하고 얻지 못해도 사역을 해야 한다. 이것은 부지런함을 요한다. 사도들은 매우 부지런했다. 바울이 평생 이룩했던 굉장한 사업을 생각해 보라. 당신은 80세까지 사역을 한다 해도 그가 한 것의 1/10 밖에 하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종이 근면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바울이 한 일만 보아도 우리는 그가 참으로 근면했으며 조금도 게으르지 않았다는 것을 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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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있다. 그는 각처로 다니며 복음을 전하지 않을 때에는 사람들과 변론하거나 말씀을 전하거나 서신을 썼다. 가장 영적인 것들을 다룬 그의 서신서들은 도리어 감옥에 있을 때에 쓰여진 것이다. 비록 그가 갇혀 있었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여전히 매이지 않았다. 그는 정말로 근면한 사람이었으며 주님처럼 조금도 게으르지 않았다.
‘게으르다’는 뜻은 본래 해야 할 많은 일들을 하지 않는 것이며, 있던 일도 없애 버리는 것이다. 우스운 얘기가 있다. 예전에 문을 지키는 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의 책임은 누가 초인종을 누르면 문을 열어 주는 것이다. 하루는 어떤 사람이 밖에서 초인종을 누르는데도 그는 나가서 문을 열어 주지 않았다. 그래서 다른 사람이 그에게 물었다. “왜, 당신은 나가서 문을 열어 주지 않았습니까?” 그러자 그는 이렇게 답변했다. “난 그가 초인종을 누르지 않길 바랐소.” 사람이 밖에서 문을 두드리고 있는데도 그는 오히려 그 사람이 문을 두드리지 않기를 바랐다는 것이다. 형제자매여! 당신은 이런 사람을 어떻게 보는가? 애석하게도, 많은 형제자매들이 하나님의 일에 있어서 이와 같이 일거리가 없기 바란다. 일거리가 바로 저기에 놓여 있는데도, 그들은 여전히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고 한다. 그들은 “만일 이런 일거리들이 없다면 하나님께 감사할텐데, 그런 일들은 쓸모가 없어!”라고 생각한다. 이것이 무엇인가? 바로 ‘게으름’이다.
‘게으름’이란 무엇인가? 게으름이란 시간을 끌 수 있는 한 오랫동안 질질 끌면서 한 가지 일을 아주 서서히 하는 것이다. 하루에 할 수 있는 일을 열흘로 끌고, 한 달에 할 수 있는 일을 3개월에 걸쳐 느릿느릿하게 끄는 것이 바로 게으름이다. 어떤 번역본은 게으름이라는 단어를 ‘배회(徘徊)’(마 20:3, 6)로 풀이한다. 배회란 걸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결정할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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없는 것을 말한다. 이 단어가 어떤 곳에서는 ‘곤란함’으로 번역되었다. 바울은 빌립보의 믿는 이들에게 보낸 서신에서 “너희에게 같은 말을 쓰는 것이 내게는 수고로움(곤란함-중국어 성경)이 없고”(빌 3:1)라고 했다. 어떤 형제자매는 자기에게 일이 맡겨지면 즉시 나태해져 버리고 매우 곤란해하며 탄식한다. 이 일이 그에게는 아주 어려움이 많은 일로 보여져서, 너무나 무거운 짐이 그에게 놓여졌다고 느낀다. 그러나 바울은 결코 이렇게 하지 않았다. 그는 옥에 갇혀 있었지만 편지를 썼다. 그렇게 어려운 환경에서 편지를 쓴다는 것은 정말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바울은 거기에서 편지를 썼으며, 형제들에게 ‘기뻐하라’, ‘주님으로 인하여 항상 기뻐하라’고 권면하였다. 환경으로 말한다면, 그것은 분명 괴롭고 수고스러운 일이었다. 그러나 바울은, “너희에게 같은 말을 쓰는 것이 내게는 수고로움이 없고”라고 말했다. 그는 게으르지 않았으며 어렵다고 느끼지 않고 오히려 쉽다고 여겼다. 그는 게으름을 피우는 것이 어떤 것인지도 몰랐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쓰시는 사람의 의욕과 게으르지 않고 어려워하지 않는 모습을 바울에게서 볼 수 있다.
많은 형제자매들은 일을 보고 두려워하고 어려워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있어서 크게 쓰임받지 못한다. 그들은 항상 일이 많아지는 것보다 적어지는 것을 더 좋아하며, 가능하다면 아무것도 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그들에게는 근면한 성격이 없다. 만일 우리가 게으른 사람이라면, 우리는 하나님의 충성된 종이 될 수 없을 뿐더러 사람의 충성된 종이 되는 것도 불가능하다. 많은 형제자매들이 하나님의 종이 될 수 없는 이유는 그들이 게으른 사람이기 때문이다. 소위 ‘하나님의 종’이라고 하는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은 마치 그들 위에 그들을 다스릴 사람이 없는 것 같고, 형제자매도 그들을 상관할 수 없으며,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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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도 그들을 상관할 수 없는 것같이 여긴다. 그런데 스스로 하나님의 종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그들의 주인을 바꾸어 세상 직장에 고용된다면 그들의 쓸모 없음이 즉시 드러난다. 왜냐하면 고용주는 그들이 대충대충 일을 처리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일을 번거로워 하지 않고 섬기는 것을 좋아하며, 하나님의 백성을 위해 시간과 힘과 물질을 쏟는 것을 기뻐하며, 손으로 일하고 수고하도록 우리의 생활과 성품을 부단히 훈련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의 종이 될 자격이 없다. 바울은 “너희 아는 바에 이 손으로 나와 내 동행들의 쓰는 것을 당하여”(행 20:34)라고 말했다. 이 손은 너무나도 좋다. 이 양손은 낮에도 일하고 밤에도 일하는 조금도 게으르지 않은 손이다. 이러한 사람이야말로 하나님의 종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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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면은 무엇인가? 근면은 곧 게으르지 않은 것이다. 근면은 일거리가 있는데도 없는 것으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 일거리가 없는데도 일을 찾아서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일에 있어서 만일 일거리를 찾으러 나가지 않는다면, 분명 하루나 이틀 쉴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일에 있어서 우리는 결코 일이 생겨야만 겨우 하는 사람들이 되어서는 안 된다. 만일 그렇다면 그것은 부지런한 것이 아니다. 근면한 사람은 한가할 수 없다. 그는 언제나 하나님 앞에서 생각하고 간구하고 앙망하고 고려하며 일을 찾아내서 한다. 이렇지 않으면 할 일이 없게 된다. 우리는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서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발견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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찾아내기를 힘써야 한다. 이를 위해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많이 간구하고 앙망해야 한다. 우리는 일을 발견하자마자 즉시 실행해야 한다. 그리고 다시 기다리고 앙망하며 일거리를 찾아내고는 또 즉시 가서 일을 해야 한다. 그런 다음 다시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해야 할 일을 발견한 후에 또 일하러 가야 한다. 이렇게 할 때에 비로소 하나님을 섬긴다고 말할 수 있다.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요 5:17)라고 말씀하셨다. 우리는 결코 이 구절을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쉬시니 나도 쉰다.”로 고쳐서는 안 된다. 게으름은 우리의 길이 아니다. 우리의 길은 바로,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 이렇게 물어야 한다. “주여, 당신은 내가 어떤 일을 하기를 원하십니까?” 주님은 사마리아 여인과 말씀을 나누신 후에 제자들에게 매우 특별한 말씀을 하셨다. “너희가 넉 달이 지나야 추수할 때가 이르겠다 하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눈을 들어 밭을 보라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도다”(요 4:35). 제자들의 계획에 따르면, 아직 넉 달을 기다려야 추수할 수 있다. 그러나 주님의 계획에 따르면, 지금이 바로 추수할 때인 것이다. 사람의 계산으로는 아직 넉 달을 기다려야 추수할 수 있다. 그러나 주님은, “눈을 들어 밭을 보라 희어져 추수할 때가 되었도다”라고 말씀하셨다. 오늘날 눈을 들어 보는 사람이 부족하다. 그래서 일이 더디고 넉 달이 지난 후에야 일을 하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집안에 숨어 있고, 하나님의 길을 가지 않으며, 하나님께서 무슨 일을 하고 계신지를 보고 있지 않다. 주님은 또한 제자들에게 그분이 하시는 모든 일은 아버지 하나님께서 위임하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주님은 요한복음 4장 35절에서 제자들에게 항상 눈을 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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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아야 할 것을 말씀하고 계신다. 당신이 눈을 들어 보지 않으면 일거리는 없다. 그러므로 주님의 일은 부지런하고 게으르지 않음에 달렸다. 이것은 주어진 만큼 일을 하라는 것이 아니라 눈을 들어 찾아내서 일을 하라는 뜻이다. 하나님께서 많은 일들 가운데서 역사하시기 때문에 당신은 눈을 들어 일거리를 찾아내야 한다. 당신은 눈을 들어서 추수할 곡식이 있는지 혹은 그것이 익었는지 살펴보아야 한다. 당신이 눈을 들어 본다면 할 일이 있을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일거리가 없는 것처럼 한가하니, 얼마나 이상한 일인가!
일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언제나 일거리를 찾아서 일을 한다. 일하기를 싫어하는 사람은 일이 생길까 봐 두려워한다. 근면한 사람은 언제나 일거리가 없으면 즉시 하나님 앞에 가서 기다리며 해야 할 일이 있는지를 찾아 본다. 그는 언제나 기회를 잡아 나가서 일을 한다. 한번은 한 형제가 “아무개 형제는 그러면 안 되지요. 다른 지방에서 많은 형제들이 찾아왔는데 어떻게 그들과 조금도 교제할 시간을 갖지 않습니까?.”라고 말했다. 다른 형제가 이 말을 한 형제에게 “당신은 왜 그에게 말하지 않았습니까?”라고 물었다. 그러자 그는 “이것도 말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까?”라고 했다. 이 말이 옳다.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은 마땅히 하나님 앞에서 기다리며 일을 찾아서 해야 한다. 물론 이것은 고의적으로 바쁘게 만들거나 혼란스럽게 만들라는 뜻이 아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은 하나님께 나아가 깊이 간구하고 응당 눈을 들어 보아야 하며, 항상 눈을 들어 보는 습관을 가져야 한다. 당신이 바쁠 때 하나님께서는 당신에게 다른 부담을 주지 않으신다. 그러나 조금 한가하면 주님께 이렇게 물어야 한다. “주님, 당신은 제가 무엇을 하기 원하십니까?” 눈을 들기만 해도 당신은 당신의 봉사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발견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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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한 연고(緣故)없이 계속 할 일이 없는 사람은 게으른 사람이다. 이렇게 게으른 사람의 손에 한 가지 일이 주어지면, 그는 다른 사람이 하루에 할 수 있는 일을 열흘이나 걸려서 한다. 심지어 그는 도무지 일할 생각을 하지 않는다. 형제자매여! 당신은 언제나 적극적으로 일을 찾아서 해야 한다. 만일 당신이 하나님 앞에서 간구하고 기도하여 할 일을 찾아내지 않는다면, 당신은 많은 일을 해낼 수 없는 게으른 사람이다. 5년, 10년이 지난다 해도 당신은 여전히 많은 일을 해낼 수 없다. 이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주님의 일을 하는 한 가지 기본적인 요구는 바로 하나님 앞에서 아주 맑은 눈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일이 생기기만 하면 그는 어떤 일을 해야 하는지의 여부를 즉시 안다. 이렇게 민감하지 않고서야 일을 해낼 수 있겠는가? 하나님에게서 온 우리 영의 느낌이 예민하지 않다면 우리는 일을 지연시키고 늦추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눈을 들어 보는 것’이 필요하다. 사람의 말을 따라 ‘넉 달이 지나야 추수할 때가 이르겠다.’고 생각하지 말라. 그보다는, “눈을 들어 밭을 보라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도다”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을 들어야 한다. 매일 지나면서도 밭이 희어진 것을 보지 못하고, 오히려 넉 달이 지나야 한다고 하니 참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날마다 그 곳을 지나면서도 거기에서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다니! 마땅히 해야 할 일을 보고서도 할 일을 모른다는 것은 참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형제자매여! 우리는, 이제까지 하나님께 쓰임받은 사람치고 게으른 사람을 한번도 보지 못했다. 하나님께 쓰임받을 수 있는 사람은 느슨한 사람이 아니라 일을 찾아서 힘을 다 쏟는 사람이다. 그는 그 날에 할 수 있는 일을 다음날까지 늘어놓지 않고 시간을 낭비하지 않는다. 무릇 시간을 느슨하게 풀어 놓는 사람은 하나님의 손에 크게 쓰임받을 수 없다. 많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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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마치 시계에 태엽을 감아 주는 것이 필요한 것처럼 다른 사람이 그들을 돌려 줄 것을 필요로 한다. 다른 사람이 그들을 밀면 그때서야 비로소 움직이고 밀지 않으면 가만히 있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의 일에서 합당치 않다. 만일 어떤 형제가 어느 곳에 가든 힘을 다 쏟고 부지런하다면 열매가 있을 것이다. 부지런히 일하는 사람들이 많은 곳에서는 하나님께서 크게 역사하신다. 그 반면에 게으른 사람들이 많아지면 하나님의 역사는 갈수록 시들해진다. 우리는 게으른 사람이 하나님께 쓰임받은 것을 결코 보지 못했다. 주님의 일을 잘 하지 못하는 이유는 많은 경우 사람들의 게으름 때문이다.
‘부지런함’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스푸데(σπουδη)’, ‘스푸닥소(σπουδαξω)’이다. 중국어 성경에서는 ‘부지런함’(롬 12:8, 11, 고후 7:11, 8:16, 히 6:11, 벧후 1:5, 10, 3:14)이란 단어가 어떤 곳에서는 ‘간절함’(고후 7:12, 8:7-8, 갈 2:10, 유 3)으로 번역되었고, 어떤 곳에서는 ‘어서 속히’(딤후 4:9, 21, 딛 3:12)로 번역되었으며, 어떤 곳에서는 ‘힘쓰다’(살전 2:17, 엡 4:3, 딤후 2:15, 히 4:11, 벧후 1:15)로 번역되었다. 또 어떤 곳에서는 ‘급히’(막 6:25, 눅 1:39)로 번역되기도 했다. 이러한 번역에서 우리는 ‘부지런함’안에 어떤 뜻이 포함되어 있는지 알 수 있다. 로마서 12장 11절은 ‘부지런함’과 ‘게으름’을 함께 두었다.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바꾸어 말해, 부지런하지 않은 것은 곧 게으름이다. 어쩌면 영적인 일에서 우리 한 사람이 열 사람 혹은 백 사람의 일을 감당해야 할 것이다.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이 계속 나태해진다면 주님의 일을 할 수 없다. 만일 우리가 게으른 사람이어서 열 사람이 한 사람의 일 밖에 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주님의 일의 필요를 채울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형제자매여, 우리는 반드시 부지런한 성격을 가져야만 한다. 일이 바쁜지 그렇지 않은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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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차적인 문제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성격이 부지런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전심전력하여 일거리를 찾아내서 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물론 이것은 일부러 일을 바쁘고 복잡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말이 아니다. 분주하고 번잡한 것은 쓸모가 없다. 우리가 부지런해야 한다는 것은, 바로 하나님 앞에서 일을 두려워하는 사람이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며, 열심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이어야 하고 영 안에서 불타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말이다.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 앞에서 일거리를 찾아서 하나님을 섬겨야 한다. 이것은 반드시 우리의 행동에서만 표현되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우리의 인격이나 성격에서 표현되어야 한다. 만일 우리의 성격이 게으르다면, 하루에 12시간을 일한다 해도 쓸모가 없다. 왜냐하면 며칠이 지나면 곧 중단하기 때문이다. 반드시 성격이 근면하고 게으르지 않은 사람만이 유용하다. 게으른 사람이 열두 시간 일을 한다 할지라도 그는 여전히 게으른 사람이다. 그는 하루 종일 기도하면서 큰 일은 작은 일로, 작은 일은 아예 없었던 일로 바뀌기만을 바란다. 그리고는 아무 일도 없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우리 주님은 이런 분이 아니셨다. 그분은 사람을 찾아서 이 세상에 오셨으며 일거리를 찾아서 일을 하셨다. 주님은,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고 말씀하셨다. 주님은 사람을 우연히 만나신 것이 아니라 사람을 찾으러 오셨다. 우리도 하나님 앞에서 이러한 성격을 가질 때만이 주의 길을 갈 수 있다.
베드로는 “이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부지런하여) …에 …를 …에 …을 공급하라”(벧후 1:5-7)고 말했다. 이것을 부지런함이라고 할 수 있다. 베드로는 여기에서 일곱 번이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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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에 무엇을 더하라고 말한다. 이것은 부지런한 사람이란 언제나 이것에 저것을 더하며, 끝없이 무언가가 더해지는 사람인 것을 우리에게 보여 준다. 우리는 마땅히 하나님 앞에서 이러한 성격을 양성해야 한다. 하나에 하나를 더하고, 거기에 또 하나를 더하고 계속적으로 더해 나가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이처럼 해나갈 때에야 비로소 어떤 일을 감당할 수 있게 된다. 만일 우리 성격이 빈둥거리며 게으름 피우기만을 좋아한다면 어디를 가도 길이 없다. 어떤 사람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일에 있어서 책임감이 전혀 없어서 조금도 자기 몸에 무거운 부담을 느끼지 못한다. 그에게는 일을 잘해 보겠다는 의식도 전혀 없고 그들의 일을 확장시키려는 생각도 없다. 그는 하나님께서 더 많은 사람을 얻으시도록 하려고 하지도 않으며, 주님의 복음이 땅 끝까지 확산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지도 않고 어떤 일이든지 대충 지나가게 한다. 이런 사람을 하나님이 어떻게 쓰실 수 있겠는가? 그는 오늘 한 사람의 영혼도 구원하지 못하면 응당 그런 것이려니 하면서 체념하고 내일은 잘해 보자고 막연한 기대를 건다. 그런데 다음날마저 한 영혼도 구원하지 못하면, 이것은 으레 그런 것이며 할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해 버린다. 이런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을 위해 일 할 수 있겠는가? 하나님이 얻고자 하시는 일꾼들은 바로 그칠 줄 모르는 사람이다. 있는 것에 무엇을 더하려 하고, 거기에 또 무엇을 더하고자 하는 사람만이 주님의 일을 할 수 있는 일꾼들이 될 수 있다. 베드로후서 1장 5절부터 8절까지의 말씀을 다시 한번 보기로 하자. “이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공급하라 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 흡족한즉 너희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에 게으르지 않고 열매 없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니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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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는 우리에게 더욱 힘써 근면할 것을 권하고 있다. 어떻게 근면할 수 있는가? 하나에 둘을 더하고, 둘에 셋을 더하며 계속적으로 이렇게 할 때 게으르지 않게 된다. 바꾸어 말하면, 게으름을 반드시 부지런함으로 대치해야 한다. 부지런함이란 무엇인가? 부지런함이란, 우리가 그리스도의 한 미덕(美德)을 얻는 순간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이미 얻은 그 미덕에 또 다른 미덕을, 그리고 그 위에 또 다른 제삼의 미덕을 더하는 것으로서, 언제나 자족하지 않는 것이다. 또 언제나 무언가를 더하는 행위를 멈추지 않는 것이며, 우리에게 이러한 미덕이 흡족히 있어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에 게으르지 않고 열매 없는 자가 되지 않는 것이다.
우리는 거듭거듭 ‘…에 …를 공급하라’로 게으름을 대치해야 한다. 우리는 베드로의 말을 주의해야 한다. 만일 우리더러 부지런함에 관한 말씀을 전하라고 하면 아마도 우리는, “여러분은 부지런해야 합니다. 이것에 저것을 더해야 합니다.”라는 말을 한 번 하고 끝낼 것이다. 그러나 베드로는 계속적으로 이것을 말했고, 5절에서 7절까지 줄곧 이것을 말했다. 베드로는 무엇에 무엇을 더하여 그러한 것이 충족될 때만이 게으르지 않고 열매 없는 자가 되지 않을 수 있음을 우리에게 보여 준다. 형제자매여! 우리는 기꺼이 일을 하는 사람이 되고 기회를 붙잡아 주님을 섬기며 게으른 사람이 되지 않도록 그분이 우리의 성격을 새롭게 조성해 주시기를 구해야 한다.
베드로는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계속해서, “내가 힘써 너희로 하여금 나의 떠난 후에라도 필요할 때는 이런 것을 생각나게 하려 하노라”(15절)고 말했다. 앞에서 우리가 이미 언급했듯이 여기에서 ‘힘써’라는 말은 원문에서 ‘근면’과 같은 단어다. 베드로는 그들에게 이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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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을 기억하라고 했다. 아마도 베드로는 게으른 사람이 너무도 많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이런 것을 기억하라고 했을 것이다. 형제자매여! 우리는 부지런히 하나님 섬기기를 배워야 하고 기회를 찾아 일하기를 배워야 한다. 우리의 본성과 성격은 마땅히 부지런해야 한다. 일을 하고자 하는 사람은 손과 발로만 할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도 일을 해야 한다. 만일 당신에게 근면함이 없다면, 당신은 주님의 일에 있어서 아무 쓸모가 없다. 진리에 있어서 분명할지라도 게으른 사람은 하나님 손에 조금도 쓸모가 없다. 그러므로 일을 두려워하거나, 일을 맡으려 하지 않거나, 일을 하려고 하지 않는 사람은 모두 다 하나님을 섬길 수 없고 그분의 일을 할 수도 없다.
디모데전·후서와 디도서는 모두 주님의 일에 관하여 말한 서신이다. 디모데후서 4장 9절은 “너는 어서 속히 내게로 오라”고 말하고 있는데, 여기서 ‘속히’라는 말은 헬라어에서 ‘근면’과 같은 단어다. 근면한 사람은 속히 오지만, 게으른 사람은 느릿느릿 온다. 바울은 또한 21절에서, “겨울 전에 너는 어서 오라”고 말하고 있다. 여기의 ‘어서’라는 말 또한 원문에서 ‘근면’과 같은 단어이다. 그리고 디도서 3장 12절에서 사용된 ‘급히’라는 단어도 ‘근면’과 같은 단어이다. 일을 논(論)하고 있는 이 서신서들에서 ‘근면’이 의미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바울은 다른 많은 곳에서도 근면할 것을 역설했다. 고린도후서 7장에서 그가 고린도인들의 회개에 대해 말할 때에 그는, “보라 하나님의 뜻대로 하게 한 이 근심이 너희로 얼마나 간절하게 하며 … 얼마나 열심(부지런함)있게 하며 … ”(고후 7:11)라고 했다.
형제자매여! 참으로 주님을 섬기기를 배우고자 하는 사람은 반드시 그의 책임이 얼마나 중대한 것인지를 인식해야 한다. 우리의 외적인 필요의 긴박성과 우리의 시간은 화살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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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아가 버리며, 우리의 일생의 시간도 제한되어 있다. 만일 우리가 이러한 인식을 가지고 있다면, 우리는 근면해질 것이며 결코 시간을 느슨하게 풀어 놓지 않을 것이다. 만일 우리가 시간이 너무나 빨리 흘러가고 너무도 짧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고, 우리의 외적인 필요의 긴박성을 느끼지 못하며, 우리의 책임이 얼마나 무거운지를 인식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일에 있어서 어떤 것도 해낼 수 없다. 이러한 무거운 짐이 우리의 어깨 위에 놓여졌을 때 식음(食飮)을 전폐하고 잠을 못 자더라도 이 임무를 해내야 할 때가 있다. 이렇게 할 때 당신의 일은 출로를 얻게 된다. 만일 당신이 휴식을 가장 중요한 문제로 여기고 휴식을 당신 생활의 가장 기본적인 요구라고 여긴다면, 당신은 주님의 일에 있어서 어떤 것도 해낼 수 없다. 형제자매여! 우리의 시간은 더 이상 짧아질 수 없을 만큼 짧고, 우리의 책임은 더 이상 중대해질 수 없을 만큼 중대하며, 우리 주위의 외적인 필요는 더 이상 긴박할 수 없을 만큼 긴박하다. 우리는 죽음을 앞둔 사람의 심정으로 주위에 죽어 가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한다. 숨이 곧 끊어질 것처럼 기회는 많지 않다. 우리는 여기에서 전심전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 만일 우리가 우물쭈물하면서 외적인 필요도 보지 못하고 우리의 책임의 긴박성이나 우리의 시간의 급박함을 보지 못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일에 있어서 어떤 것도 할 수가 없다.
오늘날 하나님의 종들은 모두 죽음을 눈앞에 둔 사람의 심정으로 사람들을 섬겨야 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누가 부지런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형제자매여, 오늘 우리는 분발하여 자신을 채찍질하며 부지런한 사람이 되길 배워야 한다. 바울이 말한 것처럼, 우리는 우리의 몸을 쳐 복종케 해야 한다. 다만 하나님을 섬기겠다는 마음만으로는 부족하다. 당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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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으르다면, 어떤 일이 주어진다 해도 당신은 그것을 처리하지 못할 것이다. 당신은 게으름을 작은 문제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베드로후서 1장 8절의 ‘게으름’을 중국어 성경에서는 ‘한가하여 게으르다’라고 번역하고 있는데, 우리는 게으를 수 없으며 또한 한가해서도 안 된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목숨을 걸만큼 매일 필사적이지 않고 어떤 것에서도 드리려고 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일을 할 수도 없고 아무 쓸모가 없다는 것을 보도록 자신을 치고 또 쳐야 한다. 우리는 결코 자신을 속일 수 없다. 어떤 사람은 주님께, “나는 기쁘게 주님을 위하여 목숨을 버립니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는 평소 게으른 사람이어서 어떤 일이나 생략하기 일쑤이다. 그가 이러한 습관과 성격과 기질을 주님의 일 안으로 가져온다면, 심지어 일조차도 생략될 것이다. 만일 바울이 마게도냐 사람이 그를 부르는 이상을 볼 때만 일을 하러 간다면, 사도행전에 기록된 바울의 일은 마게도냐에서의 한 번의 일로 국한되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마게도냐로의 부르심은 그 많은 일 중에 한 번이었고, 그 외의 일들은 모두 바울이 하나님 앞에서 부담을 가지고 한 것이기 때문이다. 만일 형제들이 찾아와야 비로소 당신이 일을 할 수 있다면, 당신은 평생 아무 쓸모없게 된다. 일은 우리 스스로 부담을 갖는 것이다. 우리는 시간의 긴박성과 외적인 필요가 너무나 많다는 것과 사탄의 공작이 무섭게 만연되고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멈출 수 없고 부지런히 일하는 것이다. 태만은 가장 유용한 사람을 가장 쓸모없는 사람으로 만들며, 풍성한 사람을 단지 삼분의 일, 오분의 일, 십분의 일밖에 남지 않은 빈약한 사람으로 만들어 버린다. 하나님을 아는 유용한 사람은 모두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않은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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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25장 18절에서 30절로 다시 돌아가 보자. 여기에서는 무엇을 말하는가? 장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때에 우리 앞에는 두 가지 죄가 놓여질 수 있다. 하나는 악한 것이요, 다른 하나는 게으른 것이다. 그 종은 왜 악했는가? 그 종은 주님을 굳은 사람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아마도 많은 사람들에게 그러한 악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 열 사람이 주님 앞에 섰을 때에 아홉 사람은 게으른 종임을 시인하게 될 것이다. 주님께서는,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쫓으라”고 말씀하셨다. 주님은 게으른 종을 무익한 종으로 보신다. 때로 우리는 어떤 형제에 대해, “무엇 때문에 하나님은 저 형제를 쓰시는가?”라고 물을 것이다. 그것은 그가 목숨을 걸고 필사적으로 일하며 많은 시간을 드려 밤낮으로 애쓰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것을 보아야만 한다. 길은 부지런함에 있으며, 이 길은 게으른 사람이 걸어갈 수 있는 길이 아니다. 모든 것을 견디고 목숨 걸고 나아가야만 한다.
형제자매여! 게으른 성격을 해결하지 않는 한 우리의 일은 성공할 수 없다. 게으른 사람은 일을 반으로, 나중에는 십분의 일로 줄여 버린다. 오늘날 하나님을 아는 사람이 많지 않은데다 일까지 느릿느릿하게 하고 꾸물거리며 부지런히 일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하나님의 일이 출로를 얻겠는가? 우리는 이 일을 중요하지 않게 봐서는 안 된다. 결코 사람이 부지런하지 않은 것을 작은 일로 여겨서는 안 된다. 우리는, 많은 사람들이 유용하게 되지 못하고 이 길을 가다가 쓰러지는 이유는 분명 그들이 게으른 사람이기 때문인 것을 보았다. 이러한 것들을 경계(警戒)로 삼아, 우리의 모든 나태한 습관과 성격을 뜯어 고쳐야 한다. 주님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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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이러한 나태함을 제해 주시기를 구한다. 우리는 일하지 않는 게으름뱅이가 되어서는 안 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의 일은 길이 없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부지런하고 게으르지 않도록 우리 몸을 엄격히 다루어야 한다. 우리의 일에서 게으름의 문제가 가장 보편적인 문제이다. 아마도 열 명 중에 아홉 명은 게으를 것이다.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은 마땅히 힘써 목적지까지 나아가야 한다. 그래서 성경은 말(馬)로 섬김을 상징한 것이 아니라 소(牛)로 섬김을 상징하고 있다. 왜냐하면 소(牛)가 하는 일은 오늘이나 내일이나 모레나 한결같으며, 항상 느슨하게 몸을 풀어 놓지 않고 꾸준하게 나아가기 때문이다. 기분이 좋거나 날씨가 화창한 날엔 일하고 기분이 나쁘거나 날씨가 흐린 날엔 일하지 않는 사람은 영원히 어떤 결과를 얻지 못한다. 만일 한 걸음 한 걸음씩, 매일 꾸준히 일하며 언제나 제멋대로 자신을 느슨하게 풀어 놓지 않는다면, 반드시 결과가 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경박함과 느슨함에서 구원하사, 정말로 우리가 소같이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있어서 추호도 자신을 느슨하게 풀어 놓지 않고 줄곧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않게 하시기를 원한다. 이렇게 할 때 우리의 일은 길이 있게 된다.
구약의 잠언은 게으름에 대해 가장 많고도 분명하게 언급한 책이다. 중국어 번역본을 보면 ‘게으름’이란 단어가 잠언에 열일곱 번이나 사용되었다(6:6, 9, 10:26, 12:24, 27, 13:4, 15:19, 19:15, 24, 20:4, 21:25, 22:13, 24:30, 26:13-16). 솔로몬은 게으름에 대해 상당히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
형제자매여! 게으른 습관은 오랜 시간에 걸쳐 길러진 것이기 때문에 하루아침에 고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엄격하게 게으름을 처리하지 않는다면, 이것은 평생토록 우리를 떠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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않을 것이다. 한 편의 메시지로 이 습관을 고칠 수 있다고 생각지 말라. 그것은 그리 간단하지 않다. 이것이 여러 해를 걸쳐 길러진 고질적인 습관이고, 일종의 성품이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엄격히 다루지 않으면 결코 그것을 고칠 수 없다. 그러므로 평소에 게을렀던 사람은 엄격하게 처리받아야 한다. 만일 엄격하게 처리받지 않으면 주님의 일을 할 수 없다. 하나님의 일에 있어서 그분은 게으른 사람을 쓰시지 않는다. 게으른 사람은 일을 잘할 수 없다. 왜냐하면 게으른 사람은 일을 보자마자 즉시 처리하지 않고 어떻게 하면 일을 줄일 수 있는지를 생각하며, 더 나아가서는 일이 없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게으른 습관을 가진 사람은 하나님의 일에 별 소망이 없다. 하나님의 종은 일이 많은 사람이며 귀찮은 일까지도 서슴지 않고 즐거운 마음으로 찾아 행하는 사람이다. 그들은 일을 맡으면 필사적으로 해내며, 어려움이 있으면 스스로 해결책을 찾아낸다. 그들은 어려움을 피하는 사람이 아니다. 모든 하나님의 종은 많은 일을 하며, 어려움을 피하지 않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형제자매여! 우리는 일을 두려워하고 번거로운 것을 싫어하며 일을 만났을 때 피해 다니는 나쁜 습관을 하나님 앞에서 잘 처리받아야 한다. 우리는 이 일을 엄격하게 다루어야 한다. 게으른 사람은 결코 하나님을 섬길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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