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N. 제3집 제6(52)권 주님의 사역자의 성격 제6장 말에 제한을 받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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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zra Zion , 2013-04-05 , 조회 (83) , 추천 (0) , 반대 (0), 스크랩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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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장
말에 제한을 받아야 한다

 

 

 

 


1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크게 쓰임받고 하나님의 유능한 그릇이 될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결과적으로 충분히 쓰임받지 못하며, 설령 쓰임받는다 해도 그리 유능한 그릇이 되지 못하고 있다. 그중에 가장 큰 원인은 바로 그들이 말에 제한을 받지 않기 때문이다. 말을 조심하지 않으면 능력을 새어 나가게 하는 구멍을 만들게 된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혹자는 우리의 말이 하나님의 능력을 흘러 내보내거나 또한 새어 나가게 하는 구멍과 같다고 했다. 당신의 말은 하나님의 능력을 흘러 내보내는 출구가 될 수도 있고 하나님의 능력을 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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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가게 하는 구멍이 될 수도 있다. 애석하게도,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능력을 새어 나가게 하고 있다.
야고보서 3장은 “샘이 한 구멍으로 어찌 단물과 쓴 물을 내겠느뇨?”(11절)라고 말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일꾼의 입은 마땅히 단물을 내야 하고 생수를 내야 하며 마땅히 하나님을 위하여 그분의 말씀을 전해야 한다. 물통을 예로 들어보자. 밥 지을 물과 하수도 물을 한 통에 길을 수는 없다. 만일 하수도 물을 긷는 데 쓰이는 통으로 밥 지을 물을 긷는다면, 그것은 사람의 건강을 해치게 되고 심지어는 사람의 목숨까지도 위태롭게 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입이 하나님 앞에서 그분의 말씀을 전하기 위한 것이라면 결코 다른 일에는 쓰여질 수 없다. 그 입으로 하나님을 위하지 않는 말을 많이 했다면, 당신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수 없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쓰임받을 수 없고 또 쓰임받더라도 아주 제한적으로 쓰임받을 수밖에 없는 이유는 그들의 샘이 두 가지 물, 즉 단물과 쓴 물을 다 내기 때문이다. 그들의 입이 하나님의 말씀을 이야기하지만 아주 많은 부분이 하나님을 위한 말이 아니다.
형제자매여! 만일 우리의 입이 주님께 드려져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기 위한 것이라면, 우리의 책임은 너무도 크다. 하나님께서 그분의 말씀을 우리 입술에 두셨으므로 주님을 섬기는 데 있어서 입술을 잘 지켜야 할 엄중한 책임이 있다. 민수기 16장은 고라와 그의 동조자들이 어떻게 함께 일어나 모세와 아론을 거역했으며, 또 250인이 어떻게 각자 불이 타는 향로를 하나님께 드렸는가를 말해 주고 있다. 그들은 범죄하였으므로 멸망하였다. 그러나 그러한 향로들이 여전히 거룩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불 가운데서 향로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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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워서 그 향로를 쳐서 제단을 싸는 편철(片鐵)을 만들라고 하셨다(16-17, 33, 36-39절). 그러므로 하나님께 드려져서 한번이라도 하나님께 쓰여진 물건은 영원히 거룩하여 다른 용도로 쓰여서는 안 된다. 어떤 형제자매들은 그들이 잠시 동안은 하나님의 말씀을 할 수 있고 또 한동안은 사탄의 말을 할 수도 있다는 잘못된 생각을 가지고 있다(거짓말은 사탄에 속한 것이다). 형제자매여! 우리는 이렇게 할 수 없다. 만일 한 형제의 입이 한 번이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말한 적이 있다면, 이 입은 영원히 주님께 속해야 한다. 많은 사람의 능력이 그의 말에서 새어 나간다. 어떤 형제는 본래 하나님 앞에서 아주 유용하게 될 수 있는데, 그의 많은 말이 하나님을 위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가 말할 때에 그의 내면의 능력이 새어 나가게 된다. 샘은 오직 한 가지 물만을 낼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만일 당신의 입이 한 번이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말한 적이 있다면, 당신은 “내게는 하나님을 위하지 않는 다른 말을 할 권리가 없다.”라고 말할 줄 알아야 한다. 우리 입은 거룩하게 분별되어야 한다. 어떤 사물을 하나님께 드렸으면, 그것은 영원히 하나님의 것이어서 결코 하나님에게서 도로 찾아올 수 없다. 만일 도로 찾아온다면 그것은 발람의 당나귀이지 하나님의 선지자가 아니다. 그러므로 당신은 주님의 말씀과 당신의 말의 관계를 보아야만 한다. 당신의 입이 분별된 입이자 하나님께 속한 입이기 때문에 당신의 입으로는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을 해야 한다.
애석하게도 하나님 앞에서 본래 쓰임받을 수 있는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입이 하나님의 능력을 새어 나가게 하는 큰 구멍이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께 쓰임받을 수 없다. 두 종류의 말을 하는 입은 능력을 새어 버리게 한다. 많은 사람의 결점은 말이 많은 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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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도서 5장 3절은, “말이 많으면 우매자의 소리가 나타나느니라”고 말한다. 많은 사람의 능력이 새어 나가는 원인은 말이 많은 데에 있다. 이것도 말하고 싶고, 저것도 말하고 싶고, 매사에 말하고 싶은 것 투성이다. 자신이 말을 많이 하길 좋아할 뿐 아니라 또한 남의 말을 이리저리로 옮기길 좋아한다. 형제자매여, 우리가 마음을 지켜야 하는 것처럼 우리의 입을 지키는 데 주의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다른 사람을 섬기는 이들은 특별히 그러해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의 입을 사용해 그분의 말씀을 전하신다. 우리의 입은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 분별된 거룩한 그릇이기 때문에 우리가 우리의 마음을 지키는 것처럼 함부로 말하지 않도록 우리의 입을 지켜야 한다.

2

하나님의 종은 말에 있어서 몇 가지 주의할 점이 있다. 첫째로, 우리는 항상 우리가 어떤 종류의 말을 듣고 있는지를 하나님 앞에서 살펴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항상 즐겨 듣는 그런 종류의 말은 우리 자신이 과연 어떤 인격을 가진 사람인지를 나타내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사정을 당신에게 이야기할 수 없는 것은, 그들이 당신을 신뢰할 수 없고 또 당신에게 이야기한다 해도 당신이 별 도움을 주지 못하리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런가 하면 어떤 사람들은 서슴지 않고 직접 당신에게 와서 그들이 당한 최근의 이야기를 모두 쏟아 놓는다. 그 이유는 그들 생각에, 당신이 그들과 같은 부류의 사람이고 당신에게 무엇을 말하면 통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이 당신에게 어떤 종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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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을 하는가에서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가 증명된다.
둘째로, 우리는 어떤 이야기를 가장 안심하고 쉽사리 믿어 주는가를 관찰해 보자. 왜냐하면 그의 기질 역시 그가 쉽게 믿어 버리는 말의 내용을 보면 잘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그가 어떤 종류의 사람이면 그는 그러한 유의 말은 덮어놓고 쉽게 믿는다. 잘못 듣고서 쉽게 믿는 것은 눈이 밝지 않기 때문이며 하나님의 빛이 없기 때문이다. 빛이 부족하면 틀리게 된다. 그러므로 많은 경우, 어떤 종류의 말을 듣는가 하는 것은 우리의 상황에 병이 있는지를 드러내 주며, 어떤 종류의 말을 믿는가 하는 것도 우리의 상황에 병이 있는지를 나타낸다. 많은 사람들은 아직 말을 듣기도 전에 마음속에 먼저 믿어 버려서 말을 하면 아주 기뻐한다. 비록 이 말이 도저히 믿지 못할 정도로 기이한 것이라 해도 그는 분명히 그렇다고 맞장구치며 말한다. 그러므로 어떤 종류의 말을 믿을 수 있는가 하는 것이 그가 어떤 사람인가를 드러낸다.
셋째로, 우리는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서 바로 그의 면전에서 그 이야기를 믿을 만하다고 인정했을 경우 그 이야기를 다른 사람에게 전해 주려는 성향이 있다. 어떤 이야기를 듣고서 믿은 다음에 이 말을 전해 주러 가는 것은 그가 어떤 인격을 가진 사람인지를 말해 주며 또한 그 사람 안에 빛이 없음을 나타낸다. 그는 다른 사람도 자기와 똑같이 또 다른 사람에게 전해 주기를 바라는데, 이것은 그 사람의 어떠함을 잘 드러내 준다. 이야기를 전달하는 과정을 살펴보면, 그는 다른 사람이 그에게 한 말을 듣고서 그 말이 믿을 만하면 그 말에 자신의 뜻을 첨가시켜서 제삼자에게 전해 준다. 많은 사람이 이렇게 말을 많이 하기 좋아하고 말을 전하기를 좋아하기 때문에 능력이 모두 새어 나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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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을 잘할 수가 없다.
넷째로, 정확하지 않은 말을 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자주 부정확하게 말을 해서, 어떤 때는 이렇게 말하고 또 어떤 때는 저렇게 말한다. 한 입으로 서로 다른 말을 하는 사람은 집사가 될 수 없다(딤전 3:8). 이런 사람은 동(東)에서 누가 오면 동쪽 말을 하고, 서(西)에서 누가 오면 서쪽 말을 하며, 앞에서는 이런 말을 하고, 뒤에서는 또 다른 말을 한다. 이러한 사람은 하나님의 일에 아무 쓸모가 없다. 만일 우리가 자기의 혀조차도 다스릴 수 없다면, 어떻게 자기 몸을 속박하여 주님을 섬길 수 있겠는가? 사람이 자기 자신을 속박하고 자기 몸을 쳐야만이 주님을 잘 섬길 수 있다. 항상 우리를 곤경에 빠뜨리는 가장 몹쓸 몸의 지체는 바로 혀이다. 말이 사실과 부합하지 않을 때 사람은 한 입으로 두 말을 하여 여기서는 이 말을 하고 저기서는 저 말을 하게 되는데, 이것은 그의 성격이 얼마나 연약한지를 잘 나타내 주는 것이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 앞에 설 도리가 없으며 하나님 앞에 능력도 없다. 그는 아주 흐리멍덩하고 우왕좌왕하기 때문에, 한때는 이 말을 하고 좀 지나면 또 다른 말을 하게 된다. 이것은 성격이 아주 연약한 것이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일을 하는데 있어서 매우 중대하고 반드시 처리해야 할 일이다.
다섯째로, 고의로 한 입으로 두 말을 하는 경우가 있다. 이러한 사람이 일구이언하는 것은, 모르고서 일구이언하는 것보다 훨씬 심각한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고의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이 모르고서 한 입으로 두 말을 하여 어떤 때는 이렇게 말하고 또 어떤 때는 저렇게 말하는 경우가 생기는데, 이때에 그는 ‘맞다’ 혹은 ‘틀리다’라고 말하는 것이 별 차이가 없다고 느낀다. 그는 옳고 그름에 있어 분명치 않으며 갈피를 못 잡는다. 당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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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에게 “이것이 검습니까?”라고 물으면, 그는 “검습니다.”라고 대답한다. 당신이 그에게 “이것이 하얗습니까?”라고 물으면, 그는 “하얗습니다.”라고 대답한다. 그에게 있어서는 모든 것이 분명치 않고 흑백도 구분되지 않는다. 이러한 사람은 흐리멍덩하며 엉뚱하다. 이러한 종류의 일구이언은 엉뚱한 일구이언이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의도적으로 한 입으로 두 종류의 말을 하여, 한때는 이런 말을, 다른 때는 다른 말을 한다. 이것은 성격이 연약한 것만이 아니라 도덕적으로 부패한 것이다. 마태복음 21장 23절부터 27절까지에서 주님이 성전에 들어가 가르치실 때에 대제사장들과 백성의 장로들이 주께 나와서 누구의 권세로 이 일을 하느냐고 물었다. 이때에 주님은, “요한의 침례가 어디로서 왔느냐 하늘로서냐 사람에게로서냐”라고 물으셨다. 그러자 그들은 서로 의논하며, “만일 하늘로서라 하면 어찌하여 저를 믿지 아니하였느냐 할 것이요 만일 사람에게로서라 하면 모든 사람이 요한을 선지자로 여기니 백성이 무섭다 하여 예수께 대답하여 가로되 우리가 알지 못하노라”고 말했다. 이러한 대답은 사람을 고의적으로 속이는 것이다. 마태복음 5장 37절에서 주님은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 좇아 나느니라”고 말씀하셨다. 옳은 것에 대해서는 ‘옳다’고 말하고, 옳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아니다’라고 말하는 것은 솔직하고 성실한 것이다. 우리가 만일 ‘내가 이렇게 말하면 다른 사람이 어떻게 말할까? 내가 저렇게 말한다면 다른 사람이 어떻게 말할까?’를 곰곰이 생각한 끝에 입을 연다면, 이것은 그리스도의 일꾼의 마음가짐과 태도가 아니다. 만일 이처럼 궤계를 가지고 말한다면, 그 사람의 말은 속이는 도구가 된다. 많은 사람들이 주님을 함정에 빠지게 하려고 질문 공세를 퍼부었을 때 그분은 침묵을 지키시며 대꾸하지 않으셨다. 우리는 이러한 주님을 본받아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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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다. 말을 할 때 우리는 ‘옳으면 옳고 아니면 아니다’라고 말해야 한다. 이것에서 지나는 것은 다 악에서 좇아 나온 것이다. 이 점에서 총명한 사람은 아무런 길이 없다. 바울은 고린도에 있는 믿는 이들에게 다음과 같이 권면하고 있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이 세상에서 지혜 있는 줄로 생각하거든 미련한 자가 되어라 그리하여야 지혜로운 자가 되리라”(고전 3:18). 그리고 바울은, “ … 너희가 선한 데 지혜롭고 악한 데 미련하기를 원하노라”(롬 16:19)고 말했다. 영적 세계에서 세상 지혜는 하나님 앞에 쓰일 수 없으며, 당신이 어떻게 한다 할지라도 쓸모가 없다. 우리의 지혜는 주님의 손에 있다. 우리는 한 입으로 두 말을 할 수 없다. 이것이 많은 사람들의 어려움이다. 말에 신뢰가 없는 사람은 하나님께 쓰임받을 수 없다. 이러한 사람이 사역을 하러 나가면 조만간에 문제를 일으키게 된다. 사람이 만일 한때는 이렇게 말하고 조금 후에는 저렇게 말하고, 어떤 때는 옳다고 말하고 어떤 때는 아니라고 말하고, 이때는 맞다고 말하고 저 때는 틀렸다고 말하고, 처음에는 이렇게 해도 된다고 말하고 또 조금 지나면 그렇게 하면 안 된다고 말한다면, 이러한 사람은 하나님의 일에 유용하지 않다. 말을 계속 바꾸고 말이 믿을 만하지 못한 사람은 하나님의 일에서 아무런 쓸모가 없다.
여섯째로, 말을 듣는 데에 있어서 처리받아야 한다. 어떤 사람에게 은사가 있고 많은 장점이 있다 할지라도, 만일 그의 말이 부정확하다면 이것은 족히 그의 능력을 새어 나가게 하는 커다란 구멍이 될 수 있다. 하나님을 위하여 일하는 많은 사람이, 말을 전하는 정보통이 되었다는 것은 얼마나 애석한 일인지. 형제자매여! 다른 사람과 접촉하고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 주며 자신이 직접 말할 기회도 많은 주님의 일꾼인 우리들이, 만일 말에 있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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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제와 제한을 받지 않는다면 아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동시에 우리는 시비(是非)를 부추기게 될 것이다. 말의 제한을 받지 않는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하는 동시에 그분의 일을 헐어 버릴 것이다. 그러므로 말을 들을 때에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통제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많은 경우에 형제자매들은 그들 개인의 일을 우리에게 말하려 한다. 그때에 우리는 마땅히 힘을 다하여 그들이 말하는 것을 들어야 하며, 말을 잘 알아들을 줄 아는 사람이 되어서 그 속에서 그들의 어려움을 찾아내고 도와 주어야 한다. 많은 때에 어떤 사람이 당신에게 말을 하는데, 그것이 만일 주님의 일의 필요를 위한 것이거나 개인의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한 것이라면 그것을 계속 들어줄 수 있다. 그러나 당신이 그의 말을 들을 때에 당신 속에서 밝고 분명하게 느껴진다면, 말을 듣는 것을 멈추고 그에게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됐습니다. 여기서 멈추어도 되겠습니다.” 만일 당신이 옛날 이야기를 듣거나 소설을 읽듯이 호기심으로 상대방의 말을 듣는다면 그것은 잘못된 것이다. 우리는 상대방의 어려움을 아는 것으로 족해야 한다. 우리가 속에서 그가 한 말을 알고 어느 정도 확신이 생겼다면, “형제님, 됐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다. 우리는 결코 지나치게 듣고자 하는 마음을 가져서는 안 된다. 우리는 마땅히 알아두어야 할 그 이상의 것을 지나치게 알아내려는 호기심을 갖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사람이 지나치게 어떤 일에 대해 알아보고자 듣는 것은 욕심이다. 이러한 욕심을 가진 사람은 지나치게 들으려고 한다. 그러나 우리가 사정을 아는 것이나 듣는 것은 한계가 있으므로 그 한계까지만 알면 되지 결코 그 이상의 것을 알고자 해서는 안 된다. 우리가 형제자매의 말을 듣는 것은 그들을 위해 기도하기 위한 것이고 일을 잘 분별하여 그들의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한 것이므로 이러한 정도까지만 들으면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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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곱째는, 다른 사람의 비밀을 계속 보장해 주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그의 영에 속한 어려움을 당신에게 말한다면, 이것은 그가 당신에게 그 일을 위임한 것이다. 그러므로 당신은 마음대로 비밀을 누설해서는 안 된다. 일의 유익을 위해 필요한 것 외에 당신은 결코 임의로 말을 전해서는 안 된다. 만일 당신이 말에 있어서 제한을 받지 않는다면, 당신은 주님의 일을 할 수가 없다. 하나님의 종은 많은 일에 있어서 위임을 받은 자이다. 그러므로 그는 반드시 그의 위임이 거룩하고 신실한 것임을 보아야 한다. 당신에게 위탁한 말들은 당신 것이 아니다. 이것은 당신의 직무가 하나님을 섬기는 것에 관련된 일이기 때문에 결코 맡겨진 말을 함부로 다른 사람에게 전해서는 안 된다. 영적인 일에 있어서 우리는 형제자매의 영에 속한 어려움들을 마음대로 다른 사람에게 전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물론 책임이나 하나님의 일 혹은 사람을 다루는 데 있어서는 예외적일 수 있다. 말이 많은 것은 큰 손실이다. 많은 말을 하고 또 그것을 남에게 전하는 사람은 결코 하나님의 일에 위임을 받을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함부로 말하거나 입을 열지 않도록 하나님 앞에서 경계(警戒)를 받으며, 우리의 말이 제한을 받도록 그분께 간구해야 한다. 사람이 자신을 통제하는가의 여부는 그가 말에 제한을 받았는가 받지 않았는가를 보면 분명히 알 수 있다. 통제를 받으려면 그 사람의 말이 반드시 제한을 받아야 한다. 우리는 이것을 특별히 주의해야 한다.
여덟째로, 우리는 거짓말을 주의해야 한다. 우리가 앞에서 말한 일구이언 하는 것은 거짓말과 아주 가까운 친척이다. 말로써 사람들을 잘못 믿게 하는 것은 모두 거짓말이다. 고의적으로 사람들이 잘못된 상상(想像)을 갖게 하는 것도 거짓말이다. 때로 거짓말 속에 거짓이 조금도 들어 있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교묘한 말투로 사람들에게 사실과 다른 것을 믿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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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는 것도 거짓말의 일종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말이 성실한가는 말에만 있지 않고 동기에도 있다는 것이다. 만일 한 형제가 당신에게 질문을 했는데 당신이 그에게 답변을 해 줄 수 없다면, 당신은 차라리 “나는 답변을 할 수 없습니다.”라고 말해야지 결코 그를 속여서는 안 된다. 거짓말은 속일 마음으로 하는 모든 말로서 사람들이 잘못 이해하도록 하는 말이다. 우리는 사람들이 진실을 믿기 원한다. 우리는 진실을 말해야지 사람들이 거짓된 일을 믿게 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의 자녀는 언제나 사실이 ‘예’일 경우에는 ‘예’라고 말하기를 배워야 하고, ‘아니오’일 경우에는 ‘아니오’라고 말하기를 배워야 한다. 이보다 지나친 것은 악에서 나온 것이다. 주님은 유대인에게 매우 강하게 말씀하신 적이 있다.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저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니라”(요 8:44). 거짓말은 마귀에게서 나온 것이며, 마귀는 거짓말의 창조자로서 지금까지 줄곧 거짓말쟁이이다. 마귀는 거짓의 아비다. 그러므로 만일 거짓말이 하나님의 자녀 중에 특히 주님의 일꾼의 입에 있다면, 그것은 참으로 큰 문제다. 거짓말을 하는 것은 형편없는 것이다. 이것은 기본적인 일이며 매우 심각한 문제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거짓말을 주의해야 한다. 우리 중 누구도 감히 말에 실수가 없다고 말할 수는 없다. 우리가 말에 조심하려고 하면 할수록 말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주의하지 않으면 더욱 문제가 커진다. 당신이 말에 주의해도 여전히 정확히 하기는 쉽지 않은데, 만일 당신이 주의하지 않고 말을 함부로 느슨하게 풀어 놓는다면 문제는 더 심각하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반드시 자신을 통제하여 자기 말을 주의하고 조금도 함부로 말해서는 안 된다. 만일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을 섬길 수 없다. 하나님은 한 면으로 그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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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을 위하여 말하면서 다른 한 면으로는 사탄을 위하여 말하는 사람을 쓰실 수 없다. 하나님은 절대적으로 이러한 사람을 쓰실 수 없다.
아홉째로, 우리가 좀더 특별히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다투지 않고 들레지 않는 것’이다. 성경이 주님에 대해 예언한 것이 있다. “그가 다투지도 아니하며 들레지도 아니하리니 아무도 길에서 그 소리를 듣지 못하리라”(마 12:19). 그리고 바울은 디모데에게 “마땅히 주의 종은 다투지 아니하고”(딤후 2:24)라고 말했다. 이것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종은 다투거나 떠들어댈 수 없다는 것을 말해 준다. 시끄럽게 떠드는 것은 항상 거칠음의 표현이다. 주의 종은 언제나 ‘다투지도 않고 들레지도 않으며’ 다른 사람과 쟁론하지 않을 정도로 자신을 다스려야 한다. 소리가 크다는 것은 능력이 적다는 것을 표시하며 자기를 관리하는 능력이 적다는 것을 표시한다. 옆방에 있는 사람들이 들을 정도로 소리가 크다면, 이는 주의 종이 마땅히 갖추어야 할 인격이 아니다. 아무도 길에서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없었다는 것이 주님께서 우리에게 보여 주신 본(本)이다. 이 제한은 단지 거짓말을 하지 말라는 정도가 아니다. 많은 말들이 분명히 옳은 말을 하고 사실을 말하지만, 우리는 이 사실을 확인하기 위하여 다투거나 들레지 말아야 한다. “마땅히 주의 종은 다투지 아니하고.” 우리는 어떤 일에 대해 소리내지 않고 잠잠히 있을 수 있어야 한다. 만일 한 형제나 자매가 뜻밖에도 시끌벅적하게 요란한 주장을 낸다면, 이는 그의 내면이 아무 통제가 없고 느슨하게 풀어져 있음을 말해 준다. 그는 너무도 오랫동안 통제받지 않고 느슨하게 풀어져 있어서 이렇게 큰 소리로 싸울 수 있는 것이다. 아무도 길에서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없었던 것처럼 우리는 자신을 통제하고 자신의 목소리를 다스릴 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제멋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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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하지 않고 소리지르지 않으며, 제멋대로 시끄럽게 떠들지 않고 다투지 않도록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입을 통제하기를 배워야 한다. 물론, 이것은 우리가 인위적으로 진지한 체하거나 새 사람이 된 것처럼 가장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우리는 자연스럽게 말해야 하며, 우연히 사람을 만나도 여전히 자연스럽게 잘 말해야 한다. 그러나 음성에 있어서 만일 제한을 받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일에 있어서 많은 어려움이 있을 수 있다. 그리스도의 일을 하고자 하는 형제자매는 모두 주님 앞에서 부드럽고 조용한 위엄을 지키면서 행해야 하며, 경솔한 말씨를 사용해서는 안 된다. 우리 주님은 아주 작고 부드럽게 말씀하신 분이어서 다투지도 아니하시고 시끄럽게 소리내지도 아니하셨으므로, 아무도 길에서 그분의 음성을 들을 수가 없었다. 이처럼 하나님의 종은 마땅히 하나님 앞에서 사람들에게 부드럽고 온유한 자로 보여져야 한다.
열째로, 동기와 사실을 주의해야 한다. 말과 그 속에 담긴 의도는 별개의 일이다. 하나님의 자녀는 말의 정확성을 주의해야 할 뿐만 아니라 사실의 정확성도 주의해야 한다. 우리는 지나치게 말을 정확히 하기보다는 오히려 사실을 정확히 말하는 데에 주의를 기울이는 편이 낫다. 많은 사람들은 늘 말을 맞게 했는지 어떤지를 주의하면서도 사실이 맞는지 그렇지 않은지는 주의하지 않는다. 사실, 우리가 말을 아주 조심스럽게 하고 아주 정확하게 한다해도 그것이 신뢰할만 하다고 말할 수 없다. 우리는 주님 앞에서 사실의 정확성에 주의해야 한다. 만일 사실이 정확하지 않으면, 말을 아무리 정확하게 한다 해도 하나님 앞에 아무 소용이 없다. 어떤 형제자매는 말하는 데 매우 주의를 기울이지만, 우리는 그들을 믿을 수가 없다. 비록 우리가 그들의 말 속에서 잘못된 부분을 찾아내지 못한다 해도, 우리는 그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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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의 정확성만을 추구할 뿐 사실의 정확성은 주의하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 가령, 당신이 마음속으로 한 형제를 무척 싫어한다고 하자. 이것은 하나의 사실이다. 그런 그를 길에서 우연히 만났을 때 당신은 그에게 인사를 하고 손을 흔든다. 그가 당신 집에 왔을 때, 당신은 그에게 점심 식사를 권한다. 그가 병이 났을 때 당신은 그에게 문병 간다. 그가 궁핍할 때에, 당신은 그에게 쓸 돈과 입을 옷 등을 보낸다. 어떤 형제가 당신에게, “당신은 그 사람에 대해 어떻습니까?”라고 물으면, 당신은 마음속으로는 그를 미워해도 이렇게 대답한다. “내가 어찌 그에게 인사하지 않겠습니까? 그가 병이 났을 때 내가 어찌 그를 보러 가지 않겠습니까? 그가 빈궁할 때 내가 어찌 그를 돌보지 않겠습니까?” 물론, 당신에게는 교리도 없고 율법적으로도 틀림이 없으며 당신이 한 말도 틀리지 않다. 그러나 이것은 여전히 거짓말이다. 왜냐하면 사실이 결코 이와 같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는 어떤 형제자매가 형식이나 절차를 매우 중시한다는 것을 안다. 형식에 있어서 당신은 그들에게 조금도 잘못된 점을 찾아낼 수 없다. 그러나 그들의 마음은 이와 전혀 다르다. 이것은 옳지 않은 것이다. 말이 전혀 틀리지 않지만 사실이 그렇지 않다면, 이것은 잘못된 것이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과 대화할 때, 당신이 절차의 정확성만을 주의하고 또 자신이 솔직한 말을 했다고 생각한다면, 당신은 하나님 앞에서 당신의 동기를 살펴보아야 한다. 이것은 말의 배후에 도사리고 있는 기본적인 문제이다. 말에만 정확하면 되고, 그를 잘 대해 주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이것을 근거로 하여 “나는 그를 미워하지 않는다.”라고 말할 수 없다. 우리는 말의 근거보다 사실을 보아야 한다. 우리가 참된 말을 하려면 실재적인 사실에 입각해야 한다. 실재적인 사실이 성립되지 않는다면 아무리 말을 능통하게 한다 할지라도 그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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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말이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많은 사람들이 이런 상태 속에서 생활한다. 말을 할 때에 우리는 말만을 주의할 것이 아니라 더 깊게는 동기와 사실을 주의해야 한다.
열한 번째로, 우리는 한담(閑談)을 하지 말아야 한다. 주님은, “ …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라 …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리니 네 말로 의롭다 함을 받고 네 말로 정죄함을 받으리라”(마 12:34-37)고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이 한곳에 모였을 때 한담을 적게 하는 편이 낫다. 물론, 이것은 안부나 날씨 혹은 화초(花草)에 대해 이야기하지 말라는 뜻이 아니다. 문안 인사와 같은 말은 처신하는 데 관계가 있으므로 말해도 된다. 그러나 당신과 무관한 이집 저집의 장점과 단점과 같은 한담을 말할 필요가 없다. 우리가 하는 한담에 대해 주 예수님은 “심판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리니”라고 말씀하신다. 사람이 하는 한담은 한 번 말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다시 한 번 말해야 한다. 즉 오늘 말한 것을 심판날에 다시 한 번 말해야 한다. 모든 한담은 심판날에 다시 한 번 반복해야 하며, 이에 대하여 반드시 심판을 받는다. 당신이 많은 한담을 하는데, 당신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그 말로 당신을 의롭다 하고 또한 당신의 그 말로 당신을 정죄한다는 것을 보아야 한다.
우리는 농담이나 경박한 말이나 우스갯소리 등을 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이것은 형제나 자매가 누구에게 재치 있는 말을 한다거나 어린 자녀나 어린 손자들에게 재미나는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과는 별개의 일이다. 바울이 에베소서에서 말한 ‘누추함과 어리석은 말이나 희롱의 말’(엡 5:4)은 모두 우리가 응당 거절하고 해서는 안 될 경박한 말들이다.
또한 우리는 비웃는 말도 해서는 안 된다. 주님이 십자가에 계셨을 때 사람들은 주님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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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 … 엘리야가 와서 저를 내려 주나 보자”(막 15:36). 이것이 바로 비웃는 말이다. 베드로후서 3장 4절을 보면, 주님이 다시 오실 것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비웃으며 “주의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뇨 조상들이 잔 후로부터 만물이 처음 창조할 때와 같이 그냥 있다”라고 말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어떤 종류의 비웃는 말도 결코 해서는 안 된다.
또한 사람들 배후에서 수군거리는 말이나 판단하는 말들을 해서도 안 된다. 욕설은 엄중한 죄이므로 하나님의 자녀가 절대로 할 수 없는 말이다. 이제까지 말한 말들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조심하며 해서는 안 될 말들이다.

3

주님의 일꾼들은 조금도 흐리멍덩한 말을 하지 말고 정확한 말을 해야 한다. 왜냐하면 오직 이런 상황 안에서만 하나님을 위해 말씀 전하는 사람이 될 수 있고 많은 어려움을 피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많은 경우 주님의 일꾼들이 말에 제한을 받지 않기 때문에 형제자매들은 그들의 판단이나 한담을 들을 때에는 재미있다고 느끼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때에 그를 조금도 존경하지 않을 것이다. 오늘 당신이 형제자매들과 한담한 것이 결코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지 말라. 당신은 분명 떠들며 이야기 했을 뿐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때에 그들은 당신이 전파한 것을 좀 전의 한담과 같은 것으로 여긴다. 그 결과 그들은 당신이 한 말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사람들은 어떤 형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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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마디하면 듣지만, 당신이 한마디하면 들으려고 하지 않는다. 사람들이 왜 그의 말은 듣고 당신의 말은 듣지 않는지 한번 생각해 보라. 말이라고 해서 다 같은 것은 아니다. 물론, 하나님의 말씀은 같은 것이다. 그러나 평소에 그가 했던 다른 말들은 그와 어울리지 않는다. 우리는 이 일에 주의를 기울여 보자. 일상생활에서 다른 말을 하는 사람이 똑같은 하나님의 말씀을 한다 할지라도 그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에서 나오는 능력은 차이가 있는 법이다. 왜냐하면 당신이 다른 일에서 조심하지 않은 채로 항상 함부로 말해 왔기 때문에, 당신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때에 듣는 사람에게 미치는 영향은 아무 제한 없이 느슨하게 풀어 놓고 말을 하던 때의 효과밖에 되지 않는 것이다. 형제자매여, 하나의 샘은 결코 단물과 쓴 물, 즉 두 가지의 물을 낼 수 없다는 것을 기억하라. 쓴 물은 언제나 쓴 것이며, 쓴 맛이 엷어질 수 있을지라도 그것은 여전히 쓴 것이다. 오염된 물을 맑은 물과 함께 섞어도 오염된 물이 깨끗한 물로 변하지 않으며 도리어 깨끗한 물이 더러워진다. 많은 형제들의 능력이 새어 버리는 것은 그들이 평소에 잘못 말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때에 사람들이 그들의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는 것이다. 강단 위에서의 말은 강단 아래에서 한 말에 계속 이어진다는 것을 우리는 명심해야 한다. 당신이 강단 아래에서 경솔하게 함부로 말하면, 강단 위에서의 말이 전부 희석되어서 당신에 의해 단물이 쓴 물로 되어 버린다. 우리가 강단에 오르기 전에 무엇을 말할 것인지 매일 매일 사전(事前)에 준비하는 것은 불필요할지 모르겠지만, 반드시 필요한 것이 있는데 그것은 곧 매일 매일 강단 아래에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를 주의하는 것이다. 우리는 일상생활 가운데서 항상 말을 조심해야 한다. 만일 우리가 매일 매일 제한을 받지 않고 제멋대로 말하며, 정확하지 않은 말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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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비(是非)를 논하며, 우습고 경박한 이야기를 일삼고, 심지어 거짓말까지 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서 능력이 발휘되기를 바랄 수 없다. 반드시 자신의 입을 제어해야만이 주님의 말씀을 전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정확하게 말을 하는 것과 성경을 읽는 것은 매우 큰 관계가 있다. 왜냐하면 성경은 가장 정확한 책이기 때문이다. 전세계에서 오직 한 가지 말이 가장 정확한데,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다. 만일 우리에게 정확하게 말하는 습관이 없다면, 우리는 성경을 읽을 수 없고 성경을 전할 수는 더더욱 없다. 많은 형제들은 그들이 하는 말의 상황에 비추어서 성경을 읽을 수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복음을 전하기 위해 합당한 성격이 구비되어야 하듯이 성경을 읽는 것에 있어서도 합당한 성격이 구비되어야 한다. 그래야 성경을 읽을 수 있다. 말의 정확성을 모르고 덜렁대는 사람은 근본적으로 성경을 읽을 수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은 정확하기 때문이다. 정확하지 않고 건성건성 말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이 모두 새어버려서 근본적으로 잘못 깨닫게 된다.
‘정확하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설명하기 위해 한 가지 예를 들겠다. 마태복음 22장에는 사두개인들이 부활을 믿지 않는 것을 말하고 있다. 어느 날 그들은 주님께 나와 어려운 질문을 했다. “우리 중에 칠 형제가 있었는데 맏이 장가들었다가 죽어 후사가 없으므로 그의 아내를 그 동생에게 끼쳐 두고 그 둘째와 셋째로 일곱째까지 그렇게 하다가 최후에 그 여자도 죽었나이다 그런즉 저희가 다 그를 취하였으니 부활 때에 일곱 중에 뉘 아내가 되리이까”(마 22:25-28). 그들의 뜻은 이러하다. 즉 부활은 믿을 수 없으며 부활이 없는 것이 가장 좋다. 만일 부활이 있다면 매우 번거로워서 부활이 없는 것만 못하다. 그래서 그들은 이치를 따지면서 해결할 방법이 없는 이러한 일을 가지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주님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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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에게,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 고로 오해하였도다 부활 때에는 장가도 아니가고 시집도 아니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 죽은 자의 부활을 의논할진대 하나님이 너희에게 말씀하신 바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 것을 읽어 보지 못하였느냐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니라”(마 22:29-32)고 말씀하셨다. 사두개인은 모두 성경을 읽었지만 주님은 그들이 성경을 알지 못한다고 말씀하셨다. 왜 그런가? 그들은 경솔하게 함부로 말하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렇게 정확히 말씀하실 줄 몰랐을 것이다. 주님은 다른 성경 구절들이 아닌 출애굽기 3장 15절의 말씀을 인용하여 부활을 증명하셨다.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다.” 이 성경 구절은 어떻게 부활을 말하고 있는가? 주님은,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니라”고 말씀하셨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이미 죽은 사람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자신을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셨는데, 그렇다면 그분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라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시다. 이것을 어떻게 설명하는가? 하나님께서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시기 때문에 비록 지금 아브라함은 죽은 자이지만 그는 반드시 죽지 않은 사람으로 변해야 하며, 이삭과 야곱도 비록 지금 죽은 자이지만 그들도 반드시 죽지 않은 사람으로 변해야 한다. 죽은 사람이 어떻게 죽지 않은 사람으로 변할 수 있겠는가?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부활이 있어야 한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반드시 부활해야 한다. 왜냐하면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은 결코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도리어 산 자의 하나님이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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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문이다. 주님은 이러한 말로 사두개인의 질문에 답하셨다. 우리 주님의 말씀은 너무도 정확하였고 사두개인들에게 그들이 얼마나 부정확하게 말하며, 얼마나 성경을 모르고 있는지를 보여 주셨다.
만일 우리가 말에 정확하지 않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정확하게 볼 수 없다. 정확하지 않은 성격은, 당신을 정확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될 수 없게 하며 정확할 수도 없게 하며 하나님의 말씀이 다 새어 버리게 한다. 성경은 가장 정확하게 말하는 책이다. 성경의 일점일획이 너무나도 정확하다. 주님은, “ … 율법의 일점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마 5:18)고 말씀하셨다. 하나님께서 쓰신 성경의 일점일획은 모두 중요한 것이고 누구도 임의로 고칠 수 없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이 이렇듯 정확하니 그분의 종도 또한 정확히 말해야 한다. 형제자매여,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지금까지 애매모호하지 않고 소홀하지 않으며 언제나 확실하다. 일점일획이 모두 확실하며 일점일획이 요동치 않는다. 성경을 더 많이 읽고 하나님의 말씀을 더 이해하게 될 때, 당신은 하나님의 말씀에 한 자(字)도 더하거나 빼서는 안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우리는, 함부로 말하는 사람이 하나님의 종이 될 수 없다는 것을 계속 주의해야 한다. 함부로 말하는 사람은 형제자매에게 능력을 잃을 것이며 그 사람 자신도 하나님의 말씀에 있어서 근본적으로 사람들의 필요를 채울 수 없다. 어떤 형제는 강단에서 말씀을 전할 때 정말 사람들에게 어려움이 된다. 그가 전한 말씀에서 우리는 그가 제멋대로 경솔하게 말하는 사람인 것을 알 수 있다. 경솔한 사람은 분명 경솔한 말을 한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 앞에 놓여 있어도 그는 하고싶은 대로 경솔한 말을 할 것이다. 강단 아래에서 제멋대로 말한다면 어떻게 그가 강단 위에서 조심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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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있겠는가? 경솔하고 부주의한 사람이 성경을 읽을 수 있는 것을 이제껏 한 사람도 보지 못했고 경솔하고 부주의한 사람이 하나님을 위하여 말하는 것을 이제껏 한 사람도 보지 못했다. 우리는 실제로 하나님이 우리를 긍휼히 여기셔서 우리가 말을 정확하게 할 수 있게 하시기를 구해야 한다. 형제자매들이여, 우리는 함부로 말하는 풀어진 사람이 되지 않고, 말에나 다른 면에서 새는 구멍이 있어 간증까지 새어 버리는 사람이 되지 않도록 가르침을 받은 혀를 그분께 구해야 한다. 당신이 제멋대로 경솔하게 말하는 사람이라면, 당신은 결코 성경을 읽을 수 없고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을 수도 없다. 성경을 읽을 때 우리는 성경에서 사실을 찾아내야 한다. 그런데 경솔한 사람은 성경에서 어떤 사실도 찾아내지 못한다. 우리는 조심스럽게 말하는 것을 배워야 한다. 그럴 때야 비로소 하나님의 말씀 한 자 한 자를 정확히 볼 수 있다.

4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들은 모두 다 나름대로 각각 특성을 가지고 있으며, 하나님 앞에서 그 사람의 특별한 분깃이 있다. 하나님은 각 사람의 특별한 부분을 사용하신다. 이뿐 아니라 다른 모든 일에서 균형 잡혀야만 새는 구멍이 없게 된다. 만일 한 형제가 그의 특별한 부분 외에 다른 방면에서 문제가 생긴다면, 그의 사역에는 새는 구멍이 있게 된다. 앞의 몇 장에서 우리는, 다른 사람의 말을 들을 줄 알아야 하며, 사람에 대해 흥미를 가져야 하며, 고난 받을 마음가짐이 있어야 하며, 자기 몸을 쳐서 복종케 해야 하며, 부지런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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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으르지 말아야 한다는 것들을 다루었다. 이것들은 우리가 가장 일반적으로 갖추어야 할 조건들이다. 하나님의 종에게는 이러한 성격들이 결핍되어서는 안 된다. 지금 우리가 말하고 있는 것은 말을 함에 있어 제한해야 한다는 것인데, 이것 또한 가장 일반적인 조건 중의 하나이다. 제멋대로 경솔하게 말하는 사람은 결코 하나님의 말씀을 정확히 말할 수 없다. 하나님 앞에서 본래 소망이 있고 앞 길이 유망했던 많은 형제들이 경솔하게 말하는 것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의 능력이 새어 버리고 말았다.
하나님 앞에서 당신이 가지고 있는 영적인 가치와 분량 그리고 영적인 용도를 여러 가지 방법으로 지켜나가야 한다. 하나님께서 당신을 택하신 때의 그 특별한 부분을 소모시키지 말라. 결코 그 특별한 부분을 여기에서 조금 저기에서 조금씩 소모시켜서는 안 된다. 각 방면에서 당신이 소모시키고 있는 그 새는 구멍을 다 막아 버려야만 비로소 당신의 사역(ministry)이 지켜질 수 있다. 사역이 보존되는 것은 주님의 일을 하는 사람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문제이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다소의 능력을 주셔서 많은 일들을 하게 하시는데 우리가 여기서 좀 새게 하고 저기서 좀 새게 할 때 결국에는 모든 것이 새어 버리게 된다. 우리는 한마디라도 느슨하게 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다룸을 받아야 하며 이러한 일들에 있어서 책망받고 심판받아야 한다. 형제자매여, 당신은 단지 적극적인 것들을 얻는 것만으로는 부족하고 여전히 그러한 것들을 보존하며 새어 나가지 않도록 유의해야 한다. 만일 당신이 말을 하는 데 있어서 다룸을 받지 않았다면, 당신이 가지고 있는 적극적인 것들이 모두 새어 버리게 된다.
장차 심판대 앞에 설 때, 우리는 우리의 말이 준 피해가 그 어떤 것보다 더 심각하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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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을 발견할 것이다. 왜냐하면 말이 준 피해는 우리 자신에게만 미치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까지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한번 한 말은 거기서 끝나지 않고 꼬리에 꼬리를 물고, 가는 곳마다 해를 끼친다. 해서는 안 될 말을 한 형제가 그 말을 다시 주워 담으려고 할지라도 한번 입 밖으로 낸 말은 다시 주워 담을 수 없다. 물론 당신이 뉘우치며 당신의 어리석음을 회개하고 그분께 용서를 구하고 티끌 가운데 엎드려 주님께 “주여! 내가 말을 잘못했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다. 비록 당신이 주님의 보배로운 피로 정결케 씻겨질 수 있지만, 그 보혈은 결코 당신이 내뱉은 말을 세상에서 없앨 수 없다. 이미 입밖으로 낸 말은 이 땅 위에 계속해서 남아 있게 되는 법이다. 당신이 주님께 잘못을 인정할 수 있고 형제에게도 잘못을 인정할 수 있다. 또한 주님과 형제가 당신을 용서할 수는 있다. 그러나 당신이 한 그 말은 이 땅 위에 여전히 남아 있고 결코 주워 담을 방법이 없다. 아마 어떤 사람은 고난 받을 마음가짐이 없어서 어려움을 겪을 것이다. 또 어떤 사람은 남의 말을 들을 줄 몰라서 어려움을 겪기도 하며, 또 어떤 이는 게으르기 때문에 곤란을 당하기도 한다. 그러나 말이 많아서 생기는 어려움은 게을러서 생기는 어려움보다 훨씬 심각하며, 말을 들을 줄 몰라서 생기는 어려움이나 고난 받을 마음가짐이 없어서 겪는 어려움보다도 훨씬 더 심각하다. 왜냐하면 당신이 많은 말로 퍼뜨린 사망은 결코 멈추지 않고 계속 당신 뒤를 따라다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형제자매여, 이 일은 매우 엄숙한 것이다. 우리는 결코 제멋대로 말을 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이제까지 우리 입에서 나온 많은 말들이 좋은 열매를 맺지 못하고 남에게 해를 끼친 것에 대해 주님께 회개해야 한다. 우리 입에서 낸 한담은 이 땅에서 지금까지 쉬지 않고 계속 퍼지고 있다. 당신이 말하고 있을 때는 무익한 한담이지만 시간이 흐름에 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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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아주 바쁘게 움직이며 역사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 과거의 모든 것은 정결하게 씻어 주시고, 현재의 것은 숯불같이 다 태워서 처리해 주시도록 그분께 긍휼을 구해야 한다(시 120:2-4). 만일 더 이상 함부로 말하지 않도록 당신의 혀가 태워지고 주님의 다룸을 받는다면, 당신은 되돌릴 수 없는 많은 어려움들을 줄이게 될 것이다. 많은 어려움은 일단 발생하면 돌이킬 수 없다. 롯이 회개하고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올 수는 있었지만 모압과 암몬은 오늘날까지 계속 존재한다. 아브라함이 회개한 후 이삭을 낳을 수 있었지만 이삭에게는 이미 원수가 생겼다. 아브라함이 하갈을 추방하였지만, 여전히 어려움이 남아 있었다. 한번 내뱉은 말은 그치지 않고, 말이 낳은 어려움 또한 멈추지를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혀가 가르침받는 혀가 되도록 불태워지고, 무익한 말을 하지 않고 제멋대로 경솔하게 말하지 않으며, 거짓을 말하지 않도록 주님께 기도하지 않을 수 없다. 주님의 제약(制約)으로 우리의 혀가 함부로 경솔하게 말하지 않을 때 비로소 주님은 우리를 말씀의 출구로 삼으신다. 그렇지 않으면 한 샘에서 두 종류의 물, 곧 단물과 쓴 물을 내게 되는데, 이것은 옳지 않은 것이다. 당신은 단물과 쓴 물을 모두 낼 수 없다. 하나님을 섬기고자 하고 하나님의 일에 자신에게 한몫이 있다고 말하는 사람은 결코 입에서 하나님의 말과 마귀의 말을 동시에 낼 수 없다. ‘자유롭게 말하는’ 우리 입의 역사(歷史)가 끝나도록 주님의 은혜를 구하며, 주님께 이렇게 말할 수 있기 바란다. “주여, 우리의 마음과 뜻을 받아 주듯이 우리의 모든 말도 은혜로 받아 주소서.” 주님께서 우리를 긍휼히 여겨주시길!
주님은 “또 저희를 위하여 내가 나를 거룩하게 하오니 이는 저희도 진리로 거룩함을 얻게 하려 함이니이다”(요 17:19)라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으로서 당신이 하나님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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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기기를 배우고자 한다면, 당신이 어떤 위치에 있든 상관없이 반드시 거룩히 분별되기를 배워야 한다. 우리가 그들을 섬기기 때문에 말에 있어서 거룩히 분별되어야 한다. 말의 유혹은 얼마나 큰지! 서너 명 혹은 십여 명이 함께 모여 이야기할 때에 우리는 너무나 쉽게 그 속에 어울려서 말을 하는데, 이러한 유혹은 너무나 크다. 우리는 거룩히 분별되는 것을 배워서 그 속에 섞여서는 안 된다.
우리는 경솔하게 말하지 않도록 자신을 분별시켜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의 말과 혀가 가르침 받아야 하고, 우리의 혀는 숯불로 태워져야 한다. 당신은 자신을 말의 유혹 가운데 놓지 말아야 한다. 합당치 않은 말을 하는 형제자매들을 만났을 때, 당신이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은 그 형제자매들에게서 당신 자신을 분별시키는 것이다. 당신이 그들과 섞이면 즉시 말의 유혹 속에 빠지게 된다. 당신은 이런 일과 사람들에게서 당신 자신을 즉시 분별해야 한다. 이런 일들이 발생할 때마다 당신은 시험에 빠지지 말고 언제나 자신을 분별해야 한다. 점차적으로 우리 위에 은혜가 세워지도록 하나님께서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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