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장
성격이 견고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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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그리스도의 일꾼에게 없어서는 안 될 또 하나의 성격은 견고함이다. 혹은 이것을 감정상의 견고함이라고도 말한다.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견실(堅實)하고 견고하다. 그러나 또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서 흐리멍덩하고 견실하지 않으며 주님 보시기에 안정되지 못하고 환경에 따라 이리저리 요동한다. 많은 사람들의 성격이 신뢰할 만하지 못하며 그들 자신조차도 자신의 성격을 의지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들의 성격은 의지할 만한 것이 못되어서 어떤 것에 부딪히기만 해도 즉시 요동한다. 그들은 성격에 있어서 충분히 견실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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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하다. 하나님은 그분을 섬기는 사람들이 견고한 성격과 견실한 성품을 가져서 의지할 만하고 요동치 않기를 원하신다.
성경에서 우리는 쉽게 요동하는 한 사람을 찾아볼 수 있는데, 그 사람은 바로 모두가 다 아는 베드로이다. 마태복음 16장 13절부터 16절까지의 말씀을 읽어 보자. “예수께서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 이르러 제자들에게 물어 가라사대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가로되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 가라사대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요한일서 5장 1절은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마다 하나님께로서 난 자니”라고 말하고, 5장 13절에서는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쓴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베드로가 여기에서,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말했다는 것은 그가 적어도 하나님의 생명을 만져서 이것을 알았다는 것을 뜻한다. 마태복음 16장 17절은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고 말한다. 형제자매여, 당신이 기억해야 할 것은, 사람들이 주님과 함께 있었고 주님을 좇았으며 주님 곁에 앉아 있었지만 여전히 주님이 누구신지를 알지 못했으며, 하나님께서 계시하실 때라야 비로소 그가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우리가 특별히 주의해야 할 것은 18절 말씀이다.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Petros, 돌)라 내가 이 반석(Petra)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우리가 반드시 보아야 할 것은, 교회는 요동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교회의 기초는 요동하지 않으며 교회 자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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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동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주님을 섬기는 모든 사람들은 요동하지 말아야 한다. 주님은, “내가 이 반석 위에 교회를 세우리니”라고 말씀하셨다. 교회는 반석 위에 세워진다. 우리는 이 반석을 주의해야 한다. 주님은 이 말씀을 하실 때 마태복음 7장에서 말씀하신 산상수훈의 지혜로운 자와 어리석은 자의 집 짓는 비유를 대조적으로 생각하신 것 같다. 지혜로운 자는 자기 집을 반석 위에 세웠으므로 비가 오고 창수가 나도 그 집이 흔들리지 않았지만, 어리석은 자는 모래 위에 집을 세워서 집이 흔들리게 된 것이다. 여기에서 주님은 그분의 교회를 반석 위에 세우셨으며 그분의 교회는 흔들리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신다. 비가 오고 창수가 나도 교회는 흔들리지 않는다. 물이 차서 넘칠지라도 교회는 흔들리지 않는다. 바람이 아무리 거세게 불어도 교회를 넘어뜨릴 수 없다. 이런 것들은 모두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하나님의 교회가 어떤 어려움에 처해도 넘어지지 않는 것은 교회가 반석이신 예수 그리스도 위에 건축되어서 견고하고 요동치 않기 때문이다. 이것이 교회의 근본적인 성질이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하나님의 집인 하나님의 교회는 진리의 기둥과 터라고 말하고 있다(딤전 3:15). 교회는 기둥과 같아서 움직일 수 없다. 흔들리는 의자는 견고하지 않다. 집이 동쪽으로 기울었다 서쪽으로 기울었다 한다면, 그것은 큰 문제다. 교회의 기본적인 성질은 견고하고 흔들리지 않는 반석 위에 건축된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는 모두 이 반석 위에 있는 돌(Petra)이다. 베드로는, “너희도 산 돌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벧전 2:5)라고 말했다. 모든 형제자매는 다 산 돌로서 반석 위에 건축되어야 한다. 이 건축의 기초가 무엇이면 그 위에 건축된 것도 무엇이어야 한다. 아래의 기초가 무엇이면 위의 건축 재료도 무엇이어야 한다. 교회 안에는 벽돌이 없고 오직 돌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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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벨탑은 사람이 돌을 모방하여 만든 벽돌로 지은 것이다. 교회 안에는 사람이 만든 견고함인 벽돌이 없다. 교회는 반석이신 그리스도 위에 건축된 것이다. 우리 개개인은 모두 주님 앞에 산 돌같이 하나씩 쌓아져 신령한 집으로 건축된다. 우리는 교회의 기본적 성질, 즉 주님의 교회는 결코 흔들릴 수 없다는 것을 보아야 한다. 이러한 이유로 주님은 계속해서 우리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계신다.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마 16:18). 흔들릴 수 없는 이것이 바로 교회이다. 교회의 기초는 돌이어서 흔들리지 않으며, 교회 자신 또한 돌이어서 결코 흔들리지 않는다. 그렇다면 교회 안의 사역자가 흔들릴 수 있겠는가? 우리가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문제는 바로 이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교회의 문제를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사역자에 관한 문제를 말하려고 한다. 사역자는 산 돌이기 때문에 흔들릴 수 없다. 주님이 베드로에게, “너는 베드로라”고 말씀하신 것은 ‘너는 돌이다’라는 말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베드로는 여기에서 교회 안의 사역자를 대표한다. 사역자 곧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은 모두 돌이 되어야만 기능을 발휘할 수 있다. 비록 건물을 형성하고 있는 이 돌이 기초를 이루고 있는 반석처럼 넓고 크지는 않지만 본질에 있어서는 기초를 이루는 반석과 똑같아서 결코 요동할 수 없다.
주님은 계속해서,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마 16:19)고 말씀하신다. 주님은 교회에게 허락하신 것을 베드로 개인에게도 허락하셨다. 이 허락은 마태복음 18장에 이르러 교회에게 주신 것이다. 여기서 주님이 베드로에게 천국 열쇠를 맡기신 것은, 우리 주님이 베드로를 그리스도의 사역자로 보셨기 때문이라는 것을 우리는 분명히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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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은 천국 열쇠를 그에게 주어서 문을 열게 하셨다. 우리는 오순절 때에 베드로가 천국 문을 열었으며, 고넬료의 집에서도 베드로가 천국 문을 열었다고 믿는다. 그가 유대인의 문을 열었으며 이방인의 문도 열었다. 시몬이 베드로(돌)로 되기 전에는 결코 천국 열쇠를 사용할 수 없었다. 오늘날 이스라엘이라고 불리는 사람이 모두 역량이 있는 것은 아닌 것처럼, 베드로라고 명명된 사람이 모두 베드로는 아니다. 이름은 이스라엘이라 불릴 수 있지만, 그 사람은 여전히 연약한 자일 수 있다. 여기에서 주님이 베드로라 하는 사람의 손에 열쇠를 맡기셨지만, 그가 진정한 베드로 곧 참 돌이 되었을 때에 비로소 자기에게 맡겨진 열쇠를 사용할 수 있었다. 그때 그가 푼 것을 하늘에서도 풀고 그가 맨 것을 하늘에서도 매게 되었다.
그러므로 사역자의 성질은 그의 성격과 성질에 있어서의 견고함에 근거해야 한다. 이것은 사역자에게 있어서의 기본적인 요구이다. 그가 요동할 때에 그는 하나님 앞에서 사역을 감당할 수 없으며 교회 또한 그를 따를 수가 없다. 형제자매들이 가지고 있는 기본적인 문제는, 성격에 있어서 견고하지 못하고 우왕좌왕 흔들리며 계속적으로 변화하여 동쪽으로 쓰러졌다가 서쪽으로 쓰러지는 변덕을 부리는 데에 있다. 하나님 앞에서 견실하지 못하고 견고하지 못한 이런 형제자매들은 교회를 섬길 수 없다. 왜냐하면 그들은 굳건히 서지 못하고 끊임없이 요동하여 음부의 권세가 그들을 패배시키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님께 감사한다! 그분은 베드로를 본으로 삼으셨다. 베드로를 변화시키셨던 것처럼, 그분은 우리의 인격도 변화시키실 수 있다. 그분은 한 사람을 찾기를 갈망하신다. 그분은 교회와 근본적인 성격이 일치하여 교회 건축의 성질과 똑같은 그러한 사람을 찾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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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망하신다. 사역자의 직분을 감당하는 사람은 반드시 견고한 돌이어야 한다. 주님을 찬양하자! 그분께서 베드로를 택하여 본으로 삼으셔서 베드로를 변화시키셨듯이, 우리를 변화시켜 견고함에 이르게 하실 것이다. 여기에 베드로라 이름하는 한 사람이 있다. 그러나 그는 베드로답지 않았다. 이름은 분명히 ‘돌’이었지만 오히려 물과 같아서 신뢰할 수가 없었다. 그는 이랬다저랬다 변덕스러웠으며, 어떤 때는 강해 보였지만 어떤 때는 너무나 연약해 보였다. 베드로, 그는 바로 이런 사람이었다. 주님은 이런 베드로를 통해서, 하나님의 다루심을 받지 않고, 성질(性質)에 있어 흔들리고 아직 돌이 안 된 사람은 여전히 열쇠를 사용할 수 없으며 또한 하나님 앞에서 특별한 쓰임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 주신다. 변덕스러운 성품이 변화되지 않는 한, 하나님은 우리를 쓰실 수 없다. 사람의 성격이 변할 수 없는 어떤 것이 아니라 변할 수 있음을 인해 주님께 감사한다. 베드로같이 변덕스럽고 우유부단했던 사람도 견고한 사람으로 변화되었다. 주의 빛이 당신을 비추어 당신의 혀를 태우신다면, 비록 당신이 말 많은 성격의 소유자라도 당신은 말이 없는 사람으로 변할 것이다. 게으른 사람이 주님께 책망받으면 그의 게으름은 사라진다. 주님이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심으로 무화과나무가 말라버렸다. 왜냐하면 주님의 꾸짖음과 저주가 있는 곳에 죽음이 있기 때문이다. 만일 당신이 주님을 만나지 않았다면, 당신의 경박한 성품은 살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만일 당신이 주님을 만났다면, 당신의 경박한 성품은 시들어 버리게 된다. 당신이 하나님의 빛을 받기만 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는 말할 것도 없고 한 형제에게 책망을 받을 때에도 당신의 그러한 성품은 시들어 버린다. 주님이 당신을 한번 꾸짖으시면 당신은 위축된다. 여기서 우리가 말하는 것은 성격상의 변화이다. 혹자는 이것을 성격상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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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조(改造)라고 할지도 모른다. 남의 말을 잘 들어주지 못하는 성격, 냉담한 성격, 게으른 성격, 혹은 연약한 성격을 가진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그가 하나님을 한 번 만나기만 하면 그에게도 빛 비춤이 있으므로 그의 이러한 성품들은 즉시 시들어 죽게 된다. 한 형제가 그에게 지적하여 말해 주기만 해도 이러한 말을 들어주지 못하고 연약한 성격의 소유자였던 그가 견고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이 베드로를 택하신 것은 은혜로운 것이었다. 그렇지 않다면 연약하고 쉽게 요동하는 모든 사람은 소망이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주님은 한 사람을 택하여 그에게 베드로라는 이름을 주셨고, 그를 베드로가 되게 하셨으며, 그런 다음 열쇠를 그의 손에 맡기셨고, 사람들을 교회로 인도하게 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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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은 베드로가 주님이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알았다고 말하고 있다. 주님께서는,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다. 베드로에게 조금도 공로가 없다고 말할 수 있다. 주님은 베드로에게, “아버지께서 너로 알게 하신 후에야 비로소 너는 내가 그리스도요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보게 된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 베드로는 여기서 아버지의 계시, 즉 하나님의 계시를 얻은 것이다. 이 계시는 혈육을 통해 안 것이 아니다. 계속해서 다음 구절을 보기로 하자. “이때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가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삼 일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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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비로소 가르치시니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간하여 가로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마 16:21-23). 우리는 이 구절들의 앞 단락에서 베드로가 계시를 받은 것이, 뒤 단락에서는 그가 사탄에게 이용당하는 것을 보여 준다는 점에 주의해야 한다. 혹자는 앞 단락에서 베드로는 아버지 하나님을 만났고 뒤 단락에서는 사탄을 만났다고 말한다. 여기서 베드로는 한순간에는 주님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고백하고, 또 한순간에는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라고 말할 수 있었다. 영적 체험에서 볼 때, 이 두 가지 말은 너무도 동떨어진 양극(兩極)과 같다. 만일 우리가 올바르게 이해하지 못한다면, 사복음서의 기록 속에서 베드로가 얻은 계시가 매우 높다는 것만을 볼 것이다. 베드로는 아버지의 계시를 받아서,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인식할 수 있었다. 이어서 주님은 지체할 새도 없이 즉시 베드로에게 말씀하시기를, 교회를 이러한 인식 곧 반석 위에 건축하시겠다고 하셨다. 베드로가 받은 이 계시는 위대한 것이었으며, 주님을 따르며 주님과 함께하던 보통 사람들은 보지 못한 것이었다. 베드로가 받고 본 것은 지극히 높은 계시였다. 그러나 성경의 이 한 장 안에서 베드로는 어느새 극히 낮은 데로 떨어지고 말았다. 베드로는 육신을 의지하여 말했을 뿐만 아니라 사탄을 의지하여 말했던 것이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아버지를 의지하여 말했던 그가 눈 깜짝할 사이에 바뀌어서 사탄에 의해 말했다. 이것은 참으로 너무나 극단적인 전환이다. 교회가 만일 이러한 사역자 위에 건축된다면, 음부의 권세가 반드시 교회를 패배시킬 것이다. 이렇게 요동하고 불안정한 사람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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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를 건축할 수 없다. 교회는 오직 돌과 같이 견고한 사람에 의해서만 건축될 수 있다. 교회의 사역자는 모두 돌과 같이 견고한 사람이어야 한다. 결코 한순간 하나님에 의해 말했다가 즉시 사탄에 의해 말하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된다. 이것은 아주 엄중한 문제이다.
베드로는 가장 높은 계시를 받고서 곧 가장 낮은 단계로 떨어져 버린 것이다. 그는 십자가에 오르시려는 주님을 저지하였고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았는데, 이것은 그가 사탄에게 이용당했기 때문이다. 사탄의 말이 나타날 때 음부의 문은 이미 열린 것이다. 만일 사탄이 승리한다면, 음부의 권세가 이기고 교회는 패배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이 베드로를 변화시켜 견고한 돌이 되게 하지 않으셨다면, 교회는 희망이 없었을 것이다. 오늘날 우리에게는 돌과 같이 견고한 사역자가 필요하며, 믿음직스럽고 요동치 않는 사역자가 필요하다. 이러한 사역자는 이렇게 생각했다 저렇게 생각했다 하지 않으며, 또 변덕스럽게 말하지 않는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 앞에 그렇게 견실하고 견고하다면 우리는 이것이 바로 교회요, 이 속에 축복이 있고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당신이 만일 연약하고 이리저리 요동한다면, 사탄은 즉시 말을 하게 될 것이고 음부의 문은 열릴 것이다. 베드로의 이 사건은 아주 극단적인 대조이며 너무도 동떨어진 양극의 일이다. 이것은 우리에게 베드로가 본래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알게 해 준다.
주님은 저녁 식사를 하신 후 제자들에게, “오늘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기록된 바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의 떼가 흩어지리라 하였느니라”고 말씀하셨다. 이에 베드로는 “다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언제든지 버리지 않겠나이다”(마 26:31, 33)라고 했다. 베드로의 성격에 비추어 볼 때, 그가 말한 것은 옳았으며 그는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그는 결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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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말을 한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우리가 헌신하고 부흥될 때 우리가 주님 앞에서 한 많은 말은 우리 자신이 알지 못하는 말임을 기억해야 한다. 특히 베드로처럼 정감 있는 사람은, “다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언제든지 버리지 않겠나이다”라고 말하려고 한다. 사실, 그에게는 이러한 감정이 있었지만, 그 자신이 결코 이러한 사람이 아니었다. 감정이 풍부한 사람은 감정과 그 사람 자신을 분리하기를 배워야 한다. 조만간 그는 그의 감정이 그 자신을 대표할 수 없다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어떤 사람은 그 자신의 사상만을 좇아서 생활하며 줄곧 그의 머리만을 의지하여 산다. 그가 기도할 때에 당신이 그에게 “당신은 당신의 머리로만 기도할 뿐 마음은 여기에 없습니다.”라고 말하면, 그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이것이 내 마음이 아니라면 무엇입니까?”이런 사람은 마음도 없이 오직 머리만 좇아서 살기 때문에 그의 머리가 곧 그의 마음이라고 생각한다. 어느 날 그가 빛 비춤을 받는다면 그것은 그의 머리이지 마음이 아니라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마음속에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 몹시도 뜨겁다고 느껴서, “나는 참으로 주님을 사랑합니다.”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만일 한 형제가 그에게 “당신은 비록 자신이 주님을 뜨겁게 사랑한다고 느끼지만 사실 그렇게 대단한 정도는 아닙니다.”라고 지적하여 말한다면, 그는 “아닙니다. 나는 주님을 사랑합니다. 누구보다도 더 주님을 사랑합니다.”라고 말할 것이다. 어느 날 그의 감정이 처리받게 될 때에, 그는 그의 마음과 그의 감정이 별개의 것이라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감정 자체가 곧 그 사람은 아니다. 마치 사람 자체와 그의 생각이 큰 차이가 있는 것처럼, 그와 그의 감정 사이에도 큰 차이가 있다. 베드로는 자신의 감정을 따라 말하였고, 이 말이 바로 자신이라고 여겼다. 베드로는 다른 사람이 다 주님을 버릴지라도 자신만은 영원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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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나지 않겠다고 말했다. 베드로는 그가 말한 ‘나’가 자신이 아니라 그의 감정이라는 것을 몰랐다. 베드로는 그의 겉 사람이 내면에 얼마나 깊이 감추어져 있는지, 또 그의 겉 사람이 얼마나 깊이 뿌리박고 살고 있는지를 몰랐다. 심지어 그는 자신이 말한 것이 얼마나 분명치 않은지조차도 몰랐다. 계속해서 주님은 베드로에게,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밤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마 26:34)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베드로는 여전히 자신을 인식하지 못하고 주님께,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마 26:35)라고 말했다. 사실상 이것은 양극단이다. 그는 주님께 영원히 주님을 버리지 않겠다고 말하고서 그분을 세 번이나 부인했다. 한 면에서 그는 주님과 함께 죽더라도 같이 가겠다고 말했었는데, 다른 한 면에서는 주를 위해 죽는 것은 고사하고 사람들에게 그가 주님과 함께 하던 자라는 말을 들었을 때 두려워하였다.
이러한 두 극단은 베드로가 얼마나 요동하는 자였는지를 보여 준다. 베드로의 이름은 비록 돌이었지만, 베드로의 성격은 오히려 물과 같아서 이리저리 흐르는 것이었다. 그는 완전히 환경에 의해 지배당하였다. 그가 부딪히는 환경에 따라 그는 그러한 사람으로 변하였다. 그는 겟세마네 동산에 있었을 때 다른 제자들과 똑같이 졸고 있었다. 그가 큰 소리로 말할 때에 그는 다른 사람이 다 떠나도 자신만은 영원히 떠나지 않겠다고 말할 수 있었지만, 그가 겟세마네 동산에 왔을 때에는 다른 이들과 함께 잠이 들었다.
베드로의 성격은 말을 하는 데 있어서는 아주 확신 있고 견고했으며 그 자신의 감정도 참으로 그러했다. 그러나 실제로 행할 때에는 모든 것이 달랐다. 그는 감정 속에서 산 것이었지 참으로 그 자신 속에서 산 것이 아니었다. 사람이 감정 속에서 너무 오래도록 그렇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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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가면 그 자신이 어떻게 되는지 알지 못하게 된다. 그는 그의 감정이 곧 그 자신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베드로다. 그는 자신을 의지해 영원히 주님을 떠나지 않겠다고 말했다. 그는 자신이 결코 영원히 떠나지 않을 것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그가 사람을 만나지도 않고 단지 겟세마네 동산에 이르렀을 뿐인데, 그는 잠이 들고 만 것이다. 비록 그의 영은 원했지만 육신은 오히려 연약했던 것이다. 베드로는 주위 환경의 변화에 따라 급변하는 사람이었다. 다시 상황이 달라져 많은 군중들이 예수를 잡으러 몰려오자 베드로의 감정은 흥분했다. 그는 손을 들어 칼을 뽑아 대제사장의 종의 귀를 쳤다(마 26:51). 베드로는 감히 이렇게 하기까지 주님을 사랑하였고, 주님을 위하여 개인의 위험을 돌보지 않는 단계에까지 이르렀다. 얼마 후, 베드로는 또 밑으로 전락했다. 이것이 베드로다.
베드로가 주님을 부인한 일에 있어서 마가복음 14장은, “베드로가 예수를 멀찍이 좇아 대제사장의 집 뜰 안까지 들어가서 하속들과 함께 앉아 불을 쬐더라”고 말한다(54절). 그 후에 대제사장의 한 계집종이 베드로에게 “너도 나사렛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67절)라고 말하자, 베드로는 이 일을 부인하며 “나는 네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도 못하고 깨닫지도 못하겠노라”(68절)고 했다. 그가 주님을 좇은 지 삼 년 반이나 되었는데 어떻게 그가 주님이 누구인지를 모른단 말인가? 그날 대제사장의 종의 귀를 용감히 자르던 베드로가 이렇게까지 될 수 있단 말인가? 칼을 뽑던 베드로의 용기는 순식간에 사라져 버린 것이다.
그때 주님은 거기서 심판을 받고 계셨고 모든 사람은 주님을 조롱하고 있었다. 이러한 환경 가운데서 베드로의 용기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버렸다. 이제는 자신을 너무도 사랑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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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머지 기꺼이 죽으려 하지 않고 무슨 수를 쓰더라도 살아야겠다고 발버둥쳤다. 또 다른 한 비자가 그를 보고 곁에 서 있는 자들에게(마가는 특별히 이것을 베드로에게 말하지 않았음을 기록함) 다시 이르되, “이 사람은 그 당이라”고 했다. 조금 전에 한 계집종이 베드로가 나사렛 사람 예수와 함께 있었다고 말했을 때 그는 그 사실을 부인했다. 이제 바깥뜰로 나오자 다른 한 비자가 그를 보고 곁에 섰던 사람들에게 그도 그 당이라고 말했다. 베드로는 여전히 이 말을 부인했다(69-70절). 마태복음 26장 72절은, “베드로가 맹세하고 또 부인하여 가로되 내가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고 말한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옆에 섰던 사람이 또 베드로에게 “너는 갈릴리 사람이니 참으로 그 당이라”고 말하자, 그는 저주하며 맹세하되 “나는 너희의 말하는 이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막 14:70-71)고 말했다. 베드로는 처음에는 다만 주님을 부인했고, 그 다음에는 맹세하여 주님을 부인했으며, 결국 맹세에 저주까지 하며 주님을 부인하였다. 처음에 비자가 베드로에게 말했을 때, 그는 다만 부인하고 거기에 서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하여 앞뜰로 갔다. 거기서 그는 다른 한 비자가 곁에 서 있는 사람들에게 그가 갈릴리 사람 나사렛 예수와 함께 있었다 하는 말을 듣고서 맹세하고 또 부인하여 말하기를, “나는 그 사람을 모른다”라고 하였다. 곁에 섰던 사람들이 모두 그가 틀림없이 나사렛 예수와 한 당 사람이라고 말했을 때, 그는 다만 맹세한 것이 아니라 저주하며 맹세하여 부인했던 것이다.
여기에 사용된 ‘맹세하다’라는 말은 원문에서 서로 다른 단어이다. 두 번째와 세 번째로 주님을 부인했을 때 그는 각기 다른 단어를 사용했다. 그는 각종 맹세의 방법을 동원했다. 그는 두 번째로 부인했을 때 하나님의 이름과 하늘과 땅을 가리키면서 부인했으며, 세 번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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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인했을 때는 성을 내고 저주하며 맹세하였다. 베드로는 하나님을 끌어들여서 그가 주님을 모른다는 것을 증명하려 했을 뿐만 아니라, “만일 내가 이 사람을 안다면 나는 저주를 받을 것이다!”라고 저주하며 말하였다. 여기서 그의 말은 매우 거칠고 심한 것이었다. 우리는 베드로가 이 지경에 이를 정도로 타락했다고 말할 수 있다. 여기에 있는 사람은 돌같이 견고한 사람 베드로가 아니다. 그는 한순간 이런 모양이었다가 또 한순간은 저런 모양이었다. 어떤 때는 하늘에 닿을 듯이 치솟다가 또다시 사정없이 떨어져서 사탄에게 이용당했다. 모든 사람이 다 떠날지라도 그만은 떠나지 않겠다고 뜨거운 열정을 보이던 그가 잠시 후에는 잠에 곯아떨어졌다. 용기 있게 칼을 뽑아 말고의 귀를 베던 그가 어느새 비자의 한마디 말에 무서워 어쩔줄 모르고 주님을 부인했다. 그는 맹세하여 주님을 부인했으며, 더 나아가서 저주하며 맹세하여 주님을 부인했다. 이러한 베드로는 성격에 있어서 큰 결점이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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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이렇게 요동할 수 있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일반적인 상황에 비추어 볼 때, 사람이 요동하는 것은 세 가지 기본적인 원인 때문이다. 첫째로는, 사람이 감정에 속해 있기 때문이다. 둘째는, 사람이 손실을 두려워하고 십자가나 고통을 무서워하며 자신의 쾌락만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셋째로는, 사람을 두려워하고 사람이 싫어하는 것을 두려워하며 다른 사람의 기쁨을 구하고 환경의 즐거움을 구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사람이 견고하지 못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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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적인 원인이다.
베드로가 바로 이와 같은 사람이다. 그는 온통 감정으로 젖어 있었다. 사람이 만일 하나님 앞에서 감정에 의존하여 생활한다면, 어떤 때는 하늘에 속한 것을 만지지만 잠시 후에는 사탄에게 이용당하는 사람으로 전락해 버린다. 왜냐하면 사람이 가지고 있는 감정이란 것은 본래 신뢰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 사람이 오랜 시간 계속해서 자신의 감정을 유지하는 것을 보지 못한다. 사람이 만일 감정에 따라 생활한다면, 그는 자신의 감정의 자극에 따라 변하는 사람이 되고 시시각각 마음이 차가워졌다 뜨거워졌다 하게 된다. 이러한 사람은 하나님의 긍휼을 입어 계시를 받을 수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자기 마음속의 감정에 의존하여,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라고 말할 수도 있다.
베드로는 주님보다도 더 분명히 알고 있는 것처럼 주님을 가로막았다. 그래서 베드로는 주님을 붙잡고 그분께 권고했던 것이다. 감정에 치우친 사람들은 쉽게 주님의 참모가 되려 하고 주님께 쉽게 고안을 내며 무슨 일이든지 어떻게 해야 할지를 아는 것 같다. 감정에 의존하는 사람은 순간적인 충동에 따라서 행동하므로 갑자기 변하여 주님을 붙잡고는, “주여 그리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라고 주님께 권고할 수 있다. 그는 감정을 따르는 것이 아주 빠르기 때문에 말하는 것도 아주 빠르고 행동하는 것도 아주 빠르다. 그러나 실상 이것은 무엇인가? 이것은 사탄이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땅히 배워야 하며 기본적인 다룸을 받아야만 한다. 쉽게 충동을 받는 우리 자신이 결코 베드로와 거리가 멀다고 생각지 말라. 우리는 우리와 베드로가 그리 차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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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지 않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성격에 있어서의 이러한 연약함은 사역에 있어서의 가장 큰 문제다. 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오순절은 올 수 없다. 우리는 자신의 감정에 따라 충동적으로 행동하거나 자극에 의해 생활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반드시 자신의 감정을 거절해야 한다. 당신의 감정은 당신을 좌우로, 위아래로 치우치게 할 수 있다. 이러한 것은 주님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부패한 우리 자신에게서 나온 것이다. 만일 이러한 것이 우리의 생활 가운데서 큰 지위를 차지하고 있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일에서 그다지 크게 쓰일 수 없다.
가장 연약한 사람은 자신의 느낌에 따라 행동하는 사람이다. 자신의 느낌을 좇는 것은 결코 견고함의 표시가 될 수 없다. 자신의 느낌을 좇는다는 것은 오히려 연약한 사람임을 증명하는 것이다. 견고한 사람은 자신을 다스릴 줄 아는 사람이다. 그는 눈이 열려서 자신의 느낌을 믿지 않는다. 자신의 느낌을 믿지 않고 자신의 느낌을 거절하는 사람만이 비로소 느낌에 의존하지 않고 생활하는 것을 배울 수 있다. 그렇지 않은 사람은 자신의 느낌이 곧 자기 자신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베드로는 매우 직선적인 성격의 소유자여서 자신이 말한 것을 진실이라고 여겼다. 그래서 그는 본 것을 충동적으로 즉시 말해 버리고 느낀 것을 그 즉시 말해 버렸다. 사람의 눈으로 볼 때, 그는 정직하고 성실하며 잔재주나 술수를 쓰는 사람이 아니다. 그러나 이렇게 느낌에 의존하여 사는 사람은 영적인 길에서는 쓸모가 없으므로 처리받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는 우리가 주님을 무척 사랑한다고 느끼지만 실상은 주님을 그렇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으며, 기꺼이 주님을 위하여 살고 싶어하지만 실상은 주님을 위해 살지 않을 수 있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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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을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당신 자신은 당신의 느낌보다 훨씬 더 깊어서 당신 자신은 아직도 느낌의 뒤편에 있기 때문이다. 당신은 주님을 위해 기꺼이 죽기까지라도 하고 싶어하지만, 당신은 당신 자신을 아직 모르고 있으며 주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는 ‘자신’이 누구인지 아직 모르고 있다. 또한 당신은 주님을 위해 기꺼이 죽고자 하는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며, 주님을 위해 살고자 하는 ‘자신’이 누구인지 모른다. 느낌보다 더 깊은 내면의 감정 외의 것이 진정한 ‘나’이다. 베드로는 그의 겉 사람을 자기 자신이라고 생각했지만, 거기서 기꺼이 주님을 위해 죽겠다고 말한 것이 그의 겉 사람의 감정일 줄이야! 잠시 후에야 그의 실제의 상태가 드러났다. 그러므로 당신은 혼적인 부분인 감정에 있어서 주님의 다루심을 받지 않은 사람은 언제나 그의 감정에만 의존하여 살아가며 항상 요동하는 가운데 있게 된다는 것을 보아야 한다. 비록 그 자신은 참으로 진실하다고 여길지라도 사실은 그의 감정이 그를 지배한 것이다. 거짓말이 증오스러운 것임을 알면서도 자신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 것은 정말 가련한 일이다. 마찬가지로, 자신의 느낌이 신뢰할 만하지 않다는 것은 미워할 만한 일이지만 자신의 감정이 신뢰할 만하지 않다는 것을 모르는 것은 정말 가련한 일이다. 무릇 자신을 자기가 생각하는 바와 같은 유(類)의 사람이라고 느끼는 사람은 모두 어리석다. 아마도 그는 베드로처럼 넘어지고 깨어지며 패배하게 될 때에야 비로소 그의 감정이 그 자신과 똑같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베드로의 감정은 유월절 저녁 만찬 때의 감정과 같지 않았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나올 때의 그의 감정은 대제사장의 뜰에 있을 때의 감정과 또 달랐다.
자기 자신과 자신의 감정이 다르다는 것을 분별할 수 있는 사람은 복 있는 사람이다. 오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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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매한 사람만이 감정을 곧 자기 자신이라고 생각한다. 하나님 앞에서 가르침받은 사람은 감정이 곧 자기 자신이 아니며 자기 자신과는 별개라는 것을 안다. 형제자매여! 당신은 이것을 보았는가? 당신은 감정의 충동에 따라 변해서는 안 된다. 당신이 만일 충동적으로 말한다면, 베드로가 하늘에 속한 사람이며 영원히 주님을 떠나지 않을 사람이며 주님을 위하여 칼을 뽑아 말고의 오른쪽 귀를 베어 버렸다는 데에 수긍할 것이다. 그러나 영적인 방면에서 볼 때, 베드로의 감정이 결코 베드로 자신인 것은 아니다. 베드로의 감정은 용감했지만, 베드로 자신은 겁이 많았다. 베드로의 감정은 주님을 사랑했지만, 베드로 자신은 주님을 사랑하기보다는 자신의 생명을 더 사랑했다. 베드로의 감정은 자신을 한쪽에 제쳐놓았지만, 베드로 자신은 자기를 보호하려 하였다. 만일 교회의 사역자가 이러한 사람이고, 만일 교회가 이러한 사람을 좇아간다면, 교회는 그와 함께 요동할 것이며 음부의 권세가 교회를 반드시 패배시킬 것이다. 하나님은 이러한 사람을 쓰실 수 없다.
그럴 뿐만 아니라 베드로는 손실도 두려워하였다. 사람이 견고하지 않은 큰 이유는 바로 손실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은 십자가를 지지 않았거나 시련을 만나지 않았거나 고난을 당하지 않았을 때에는 용감하다. 그러나 마땅히 목숨을 버려야 할 때가 되거나 혹은 모든 것을 포기해야 할 때가 닥치면, 그는 곧 물러난다. 평소에는 개개인이 모두 다 주님을 사랑하고 십자가를 지는 것 같으나, 중요한 상황에 직면하면 오히려 지탱해 나갈 수 없게 된다. 왜 이렇게 될 수 있는가?
그 원인은 바로 손실을 두려워하고 자신을 사랑하는 데에 있다. 베드로의 어려움은 바로 여기에 있었다. 대제사장의 집 뜰에서의 일은, 베드로가 가이사랴 빌립보 경내에서의 주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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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에서 한 일을 표명하는 것에 불과하다. 베드로가 손실을 두려워하고 자신을 사랑하는 것은 대제사장 뜰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시작된 것이 아니다. 베드로는 주님이 십자가에서 죽임당하실 것을 예언하셨을 때에 재빨리 다음과 같이 말했다.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베드로는 자신이 바로 자기가 생각하는 그런 사람이라고 믿었다. 그래서 그는 주님께 이렇게 권했던 것이다. 그는 손실을 두려워하고 죽음을 두려워했기 때문에 주님께서 그리하시지 않기를 바랐다. 심지어 그는 주님을 붙잡고 책망할 정도로 이기적이었다. 그러므로 형제자매여! 견고한 사람이란 하나님 앞에서 죽기까지 충성하는 사람이다. 사탄도 손댈 방법이 없는 사람은 바로 자기 생명을 아끼지 않는 사람이며, 가장 연약한 사람은 자기의 생명을 아끼는 사람이다. 자기의 생명을 아끼는 사람은 생명과 관계된 일에 부딪힐 때 즉시 넘어지게 된다. 베드로가 바로 이러한 사람이었다. 그는 주님을 설득하여 말했다.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바꾸어 말하면, “주여! 당신은 결코 십자가에 올라가실 수 없습니다.”라고 말한 것이다. 후에 그는 여러 가지 방법을 써서 자신이 십자가에 이르지 않도록 하였다. 심지어 그는 저주하며 맹세하는 방법까지 동원하였다. 그러므로 고난 받을 마음가짐은 확실히 큰 문제이다.
후에 베드로는 고난 받을 마음가짐에 대해 아주 깊이 말하였다. 그는 그 자신이 옳지 않았음을 깨닫고 이 공과를 배웠다. 그는 고난 받을 마음가짐을 병기로 삼았는데, 이것은 그가 종전에는 갖지 못했던 것이었다. 두려움이 없는 사람은 강하다. 두려움이 없는 경지에 이르도록 배우기 위해서는 능히 주님께, “주여, 저는 정말 기쁜 마음으로 당신의 십자가를 집니다. 아주 기쁜 마음으로 어떠한 손실도 감수하며 자신의 이익을 구치 않고 자신의 기쁨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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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하지 않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런 경지에 이를 정도로 굳게 선 사람에 대해 사탄은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된다. 만일 당신이 손실을 두려워하지 않고 고통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당신은 욥이나 귀용 여사와 같이 주님께, “하나님이 나를 죽게 하실지라도 나는 하나님을 믿습니다. 만일 하나님이 나를 치신다면 나는 오히려 무릎을 꿇고서 나를 때린 그 채찍에 입맞추렵니다.”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절대적인 경지에 이른 굳센 사람이 될 것이다. 십자가도 그를 요동케 할 수 없으며, 그 어떤 것도 그를 요동케 할 수 없다.
왜냐하면 세상에서 십자가보다 더 큰 요구는 없기 때문이다. 만일 당신이 최대의 요구에 응할 수 있다면, 모든 작은 요구들은 당신이 다 응할 수 있다. 당신이 십자가의 요구에 응할 수 없고 따라갈 수 없다면 당신은 단지 어떤 것에 부딪히기만 해도 즉시 쓰러질 것이다. 당신이 충분히 견실하지 않으면, 당신은 항상 쉽게 요동하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십자가의 사실을 믿어야 하며 항상 십자가의 체험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하나님이 주시는 시련이나 어려움이나 고통 등은 우리가 항상 하나님 앞에서 달게 받고 복종해야 하는 것이다. 이렇게 될 때, 당신은 세상의 어떤 시험이나 어떤 어려움도 작은 일로 느끼게 된다. 당신이 어렵게 느끼는 까닭은 당신이 십자가를 모르기 때문이다. 큰 일을 겪어 보지 않으면 작은 일이 왔을 때도 쓰러지게 된다. 만일 당신이 큰 일에 부딪혀 보았다면, 작은 일들이 닥쳐올 때에 결코 요동하지 않을 수 있다. 베드로는 손실을 두려워하고 자신을 사랑했기 때문에 요동했다.
베드로가 요동하게 된 또 하나의 원인은 그가 환경에 따라 행하려 하고 환경의 기쁨을 구하며 사람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아! 인정(人情)의 문제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얼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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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심각한지. 다른 사람이 자신을 좋아하지 않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도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심각하다. 우리가 사람의 기쁨을 구하려 하고 다른 사람이 우리에 대해 불만을 갖는 것에 대해 두려워하면 그 즉시 우리의 길은 정직하지 않게 된다. 사람의 어떠함에 따라 그 사람의 말하는 것도 달라지게 된다. 우리는 너무도 많은 귀로 다른 사람의 말을 듣는다. 베드로는 실제로 그 여종을 두려워했으며 뭇사람을 두려워했다. 그는 분명히 연약함에 사로잡혔다. 형제자매여, 당신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가, 아니면 하나님의 기쁨을 구하는가? 당신이 자신을 드려 하나님을 섬길 때에 이 문제는 반드시 해결되어야 한다. 만일 당신이 하나님의 기쁨을 구하려 한다면, 당신은 괴롭힘을 당하고 어려움을 당하게 된다. 그러나 만일 예전처럼 여전히 사람의 기쁨을 구한다면, 십자가의 고난의 역사는 당신에게 없게 된다. 형제자매여! 사람을 두려워하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면 당신은 결코 하나님 앞에서 바른 길을 갈 수 없다. 만일 사람이 다른 사람을 두려워한다면, 다른 사람이 그에게 영향을 미치는 대로 그의 길을 가게 된다. 그래서 그는 결코 하나님 앞에서 견고할 수 없고 굳셀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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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제자매여! 하나님의 교회의 본질은 돌이며 사역자의 본질 또한 돌이다. 교회의 기초가 돌이며, 교회의 건축 또한 돌이고, 교회의 봉사 또한 돌이며, 모든 것이 돌이어서 결코 요동하지 않고 회전하는 그림자가 있을 수 없다. 경박하고 자주 변하며 요동하는 성격으로는 교회 안에서 하나님을 위한 어떠한 가치 있는 일도 할 수 없다. 견고한 것만이 믿을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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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이 견고하지 않다면, 돌 하나 위에 다른 돌을 쌓을 때 그 건축은 문제가 생길 수 있다. 이것은 마치 담장 속의 견실치 못한 돌 하나로 인해서 담 전체에 문제가 생길 수 있는 것과 같다. 하나님의 교회에 있어서 당신은 마지막 돌이 아니다. 당신이라는 돌 위에 얼마나 더 많은 돌을 쌓아야 할지 아직 모른다. 교회는 천 개 만 개의 돌들을 어지럽게 흩어 놓은 것이 아니라 도리어 돌을 하나하나 쌓아서 많은 돌로 건축해 가는 신령한 집이다. 돌 위에 다른 돌을 쌓는 것이 아니라면 그곳에는 교회가 없는 것이다. 성전이 무너진다는 뜻은 하나의 돌이 다른 돌 위에 놓여 있지 않다는 것을 말한다. 성전이 건축된다는 뜻은 돌 하나가 다른 돌 위에 차곡차곡 쌓인다는 것을 말한다.
오늘 하나님은 여전히 교회에 많은 사람들을 건축하시며 많은 영적인 일들을 하나하나 건축해 나가고 계신다. 만일 돌 하나가 요동한다면 많은 어려움을 일으키게 되며 많은 사람에게 해를 주게 된다. 또한 그것은 교회를 전진할 수 없게 한다. 그러므로 우리의 성격은 반드시 돌과 같은 성격이어야 하며 주님을 의존하는 성격이어야 한다. 만일 당신의 성격이 요동하여 신뢰할 수 없다면, 당신 위에 쌓은 모든 건축물이 요동할 것이며 조만간 무너질 것이다. 고린도전서 15장 58절은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고 말한다. 요동하지 않고 계속 사역을 해 나갈 때 비로소 길이 있게 된다. 만약 연약한 성격이어서 높아졌다 낮아지고 이리저리 요동한다면 하나님의 일을 그르치게 된다.
많은 형제자매들이 왜 주님의 일을 할 수 없는가? 그것은 그들이 요동하기 때문이다. 일단 요동하면 건축된 만큼 무너지며, 이 붕괴는 시간만 낭비하게 한다. 건축하는 것과 헐어 버리는 것이 아마도 같을지는 모르지만, 시간은 결코 되찾을 수 없다. 만일 사람이 견고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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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동하지 않는다면, 건축되어 가는 것도 견고하게 되며 시간도 낭비하지 않게 된다. 만일 기울어지거나 붕괴되는 일이 발생한다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수 있지만, 오 년이나 십 년 혹은 이십 년의 시간은 잃어버리게 되는 것이다. 이 손실은 구제할 길이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 우리가 요동하지 않는 견고한 사람이 될 수 있도록 구해야 한다. 베드로처럼 그렇게 높이까지 올라갔다가 천천히 내려와야 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적어도 요동치 않는 견고한 사람이 되어야 건축되고 또한 무너지지 않을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주님의 일을 할 수 없다.
만일 우리가 견고하여 요동치 않는 사람이라면, 우리에게 책임이 맡겨졌을 때 우리는 그 책임을 짊어지고 나아가 일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주님께서 당신에게 깨어 있으라고 하셨을 때, 당신은 잠들 것이다. 사람이 만일 견고하지 않아서 한때는 아주 높이 또 어떤 때는 바닥으로 떨어져 이리저리 요동한다면, 주님께서 깨어 있으라고 하실 때에 그는 깨어 있을 수가 없다. 왜냐하면 그는 자고 싶어하기 때문이다. 그는 피곤하여 잠을 자야 할 때에 그냥 잠이 들어 버릴 뿐 깨어 있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다. 그가 하루에 여덟 시간의 잠을 자야 한다면, 그는 여덟 시간을 자지 않으면 안 된다. 그는 결코 깨어 있는 것을 엄중하게 보지 않는다. 당신은 잠이 들었지만 손실이 얼마나 큰지를 알지 못한다. 주님이 당신에게 깨어 있으라고 하실 때 당신이 잠을 잔다면, 얼마 후 주님이 당신에게 사역하라고 하실 때에 당신은 어떻게 하겠는가? 당신은 책임감이 없다.
사람이 만일 하나님 앞에서 견고하지 않다면, 이 사람은 신뢰할 수가 없다. 믿을 만하지 못한 사람은 책임감이 조금도 없다. 기분 좋을 때 그는 한바탕 일을 하지만 기분이 나쁘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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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낄 때에는 그 자리에 누워 잠잘 것이다. 그는 책임감이 없다. 그러므로 성격에 있어서의 견고함은 기본적으로 갖추어야 할 조건이다. 오직 견고한 사람만이 주의 일을 할 수 있다. 편안해도 일을 해야 하고 편안하다고 느끼지 않을 때에도 일을 해야 한다. 하늘이 맑아도 일을 해야 하고 비가 와도 일을 해야 한다. 매우 기뻐도 일을 해야 하고 고민스러워도 일을 해야 한다. 이러한 사람이 견고한 사람이다. 성격이 견고하지 않은 사람은 어떤 것에도 영향을 받는다. 심지어 날씨의 영향까지 받는다. 우리의 일이 계속 환경의 영향을 받는 것은 옳지 않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영이 강건해야만 일을 할 수 있다.
형제자매여, 당신은 믿을 만한 사람인가? 당신은 견고한 사람인가? 당신은 요동치 않는 사람인가? 어느 날 하나님께서 당신이 배워야 할 공과를 배우게 하신 후에라야 당신은 당신 손에 천국 열쇠가 있음을 보게 된다. 이 열쇠는 유대인에게 천국 문을 열어 주었으며 이방인에게도 천국 문을 열어 주었다. 그리하여 교회가 세워지기 시작했다. 하나님께서는 교회를 세우시는 데에 있어서 먼저 사역자들을 찾으신다. 우리는 이 원칙을 기억해야만 한다. 하나님은 각지에서 먼저 사역자들을 찾으신 후에야 교회를 세우신다. 많은 지방의 문이 열리는 데 있어서는 먼저 하나님께서 쓰실 수 있는 사람이 있어야 한다. 만일 하나님의 종인 사역자들이 믿음직스럽지 않고 견고하지 않으면 이 문은 열릴 수 없다.
하나님께 감사한다. 베드로는 한번 부서짐으로 자신의 약점을 알았다. 그는 한 번 심하게 넘어짐으로, 아주 심하게 실패함으로 통곡하며 자신의 할 수 없음을 깨달았다. 많은 형제자매들 또한 심히 연약하고 견실하지 못하며 요동한다. 이럴 때에 우리는, “주여, 우리는 할 수 없습니다.”라고 주님께 말해야 한다. 사람들은 빛 비춤을 구하지만 사실 많은 때에 아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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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한 실패가 곧 빛 비춤이다. 강한 책망이나 메시지 같은 것이 곧 빛 비춤이다.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 앞에 마땅히 엎드러져야 하며 아주 엄한 경책 아래 무릎을 꿇어야 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사람은 아주 엄한 실패 앞에서도 마땅히 회개하고 돌이켜야 한다. 이 실패가 바로 빛이다. 하나님께서 당신이 이런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 주시는 것이다.
베드로가 통회하며 회개하고, 하나님께서 그를 긍휼히 여기셨을 때에 그는 진정한 베드로가 되었다. 그는 연약하여 요동하는 사람에서 견고하고 아주 견실한 사람으로 변화되어 오순절에 문을 열 수 있게 되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내리시어 우리의 성격에 변화를 주시기를 앙망한다. 우리의 성격은 변화되어야 한다. 주님은 우리의 성격을 능히 변화시키실 수 있다. 게으른 사람은 근면한 사람으로 변할 수 있고, 말 많은 사람은 말이 없는 사람으로 변할 수 있으며, 남의 말을 들을 수 없는 사람은 말을 들을 줄 아는 사람으로 변화될 수 있고, 고난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고난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으로 변할 수 있으며, 몸이 말을 듣지 않는 사람은 ‘자신의 몸을 쳐서 복종케 하는’ 사람으로 변할 수 있다. 이처럼 연약하고 요동하는 사람도 능히 굳세고 견고하고 요동하지 않는 사람으로 변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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