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N. 제3집 제6(52)권 주님의 사역자의 성격 제9장 금전에 대한 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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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zra Zion , 2013-04-05 , 조회 (85) , 추천 (0) , 반대 (0), 스크랩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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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장
금전에 대한 태도

 

 

 

 


주님의 일을 하는 사람과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은 금전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가? 이것은 상당히 중요한 문제이다. 금전에 대한 관문을 통과하지 못하면 결코 주님의 일을 할 수 없다. 금전의 문제가 생긴 사람은 어떤 일도 할 수 없게 된다. 일꾼이 많은 금전을 만진다는 것은 근본적으로 문제이다.
그리스도인이 금전에 대하여, 재물이 하나님과 대치 관계에 있다는 것을 기본적으로 보아야 한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재물의 유혹을 마땅히 거절해야 한다. 우리는 재물의 세력 하에 떨어져서는 절대로 안 된다. 재물의 세력에서 벗어나지 못한 일꾼은 형제자매들에게 재물의 세력에서 벗어나라고 결코 권할 수 없다. 이런 일은 절대 있을 수 없다. 만일 우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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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물의 지배를 받고 재물에 묶인 바 되었다면, 형제자매들을 재물의 지배와 묶임에서 벗어나게 하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일을 하는 사람은 게으름을 증오해야 하며 재물의 세력을 미워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의 일에서 유용할 수 없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금전을 두고 일어나는 문제가 큰 문제인 만큼, 우리는 여기서 이 문제를 잠시 언급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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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금전이 사역자의 길과 가르침과 어떠한 관계가 있는지를 살펴보기로 하자. 우리가 알 듯이 구약에도 발람이 있고, 신약에서도 여러 차례 발람의 길과 발람의 가르침을 다루고 있다. 베드로서와 유다서와 계시록에서도 발람에 관한 일이 언급되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얼마나 발람의 일을 주의하고 계신지를 우리에게 보여 준다. 발람은 이익을 위하여 달려간 선지자였다. 바꿔 말하면, 그가 선지자 직분을 팔았다는 것이다. 발람은 결코 자기 위치를 모르지 않았으며 하나님의 뜻을 모르는 바도 아니었다. 모압 왕 발락이 하나님의 백성들을 저주하려고 할 때, 발람은 자신이 하나님의 백성을 저주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축복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발락이 무엇이든지 요구하는 것을 발람에게 준다고 약속했기 때문에 발람은 거듭 하나님 앞에 나아가 자기가 갈 수 있는지의 여부를 물었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갈 수 있다고 말씀하셨다. 많은 사람들은 이것을 하나님을 기다리는 것으로 착각한다. 만일 발락이 그에게 이러한 약속을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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않았다면, 그는 아예 다시 돌아가서 묻지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이것이 하나님께서 하시고자 하는 일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알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그분의 백성을 저주하지 않고 그들을 축복하시며 돌아보신다. 그러나 발람은 발락의 약속 때문에 거듭 하나님께 나아가 물었다. 후에 하나님께서 그에게 ‘가라’고 말씀하신 것은,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다만 발람에게 가도록 허락하셨을 뿐이다. 하나님은 마치 이렇게 말씀하신 듯하다. “발람아, 발락의 보상이 너로 하여금 이렇게 많이 기도하게 하였으니 어서 가라.” 발람이 선지자인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그는 재물 때문에 잘못된 길에 들어섰다.
사람이 금전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 금전의 능력이 제거되지 않았다면, 그가 있는 곳에는 분명 돈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그는 자연히 공급의 문제를 보게 되어서 공급이 있는 곳에는 가고 공급이 없는 곳에는 가지 않게 된다. 그러므로 그는 공급이 있는가에 따라 인도를 받게 된다. 그는 공급이 있는 곳에는 가고자 하지만 궁핍한 곳은 쉽게 가려고 하지 않는다. 어디를 간다 해도 덜 궁핍한 곳으로 갈 것이다. 그는 재정적인 공급이 어떤가에 따라 발걸음을 옮기면서도 하나님께서 그를 인도하신다고 생각한다. 기도하는 것과 주님의 인도를 받는 것이 재정적인 공급에 따르기 때문에 그는 재정적인 공급을 주의하게 된다. 그곳에 이익과 금전이 발람으로 하여금 부단히 하나님께 나아가서 하나님을 귀찮게 하였고, 재차 하나님께 나아가 그가 발락을 따라 함께 가야 할지 말아야 할지를 묻게 하였다. 십여 년 전에 어떤 연로한 형제가 탄식하며 다음과 같이 말한 적이 있다. “돈을 위하는 하나님의 종들이 얼마나 많은지! 많은 궁핍한 지방을 돌보러 갈 사람이 없고 오히려 큰 지방이나 부유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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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으로 많은 사람들이 항상 가니, 인도함에 있어서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닌가?”이러한 말은 상당히 엄중하다.
금전에 문제가 있는 일꾼이 발람의 길을 좇는 것은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들의 길은 공급이 있는가 없는가에 따라 달라지고, 공급이 많고 적음이 그들의 길에 방향이 되었다. 그는 가난한 지방에는 가려고 하지 않는다. 혹 간다 해도 거기서 조금 머무르고는 아주 빨리 떠나 버린다. 만일 어느 지방에 재정적 공급이 많으면 그는 그곳에 자주 가려 하고 또 그곳에 눌러 앉으려고 한다. 이러한 사람은 돈에 따라 인도를 받기 때문에 하나님은 할 수 없이 그에게 가라고 말씀하신다. 금전에 의존하는 주님의 일꾼은 아무 쓸모가 없다. 바울처럼 금전에 있어서 자랑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결코 유용하게 될 수 없다. 만일 일꾼이 금전에 의존하고 금전의 영향을 받는다면, 그는 하나님의 일꾼이 될 수 없다. 그는 반드시 발람의 길을 걷게 될 것이다. 어떤 사람이 쉽게 돈에 의해 이끌린다면, 그의 길 또한 돈에 의해 영향을 받게 된다. 이것을 발람의 길이라고 한다. 발람의 길은 다른 것이 아니라 바로 돈의 영향을 받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개개인이 돈에서 벗어나고 먹을 것을 구하는 비천한 자가 되지 않도록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 주시기를 바란다. 우리가 일하는 곳이 우리의 먹을 것을 구하는 곳이 되지 않도록 하나님께 구한다. 왜냐하면 그렇게 된다면 우리는 돈의 제압을 당하는 자가 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종이 돈의 인도를 받고 재물의 지배를 받는다면, 이것은 얼마나 가련하고 부끄러운 일인가!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발 앞에 엎드려 하나님께서 우리의 길을 인도하시기를 구하면서 돈의 지배를 받는다면, 이것은 얼마나 수치스러운 일인가! 만일 사람이 철저하게 금전에서 벗어나지 않았다면, 그가 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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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인도를 받는다고 말한다 해도 많은 때에 그는 오히려 돈의 묶임을 받는다. 이러한 일은 너무나 수치스럽다. 금전의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너무나 외적인 것이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살아 계시는 하나님이시라면 어느 곳이든지 다 갈 수 있다. 만일 그분이 살아 계시는 하나님이 아니시라면, 우리는 빨리 물러나서 하지 않는 편이 낫다. 만일 우리가 살아 계신 하나님을 전하면서 우리의 길은 도리어 돈의 인도를 받는다면, 그것은 너무도 수치스럽고 부끄러운 일이 아니겠는가!
신약에서 베드로도 발람의 길을 말한 바 있다. 그는 발람의 길이 어떠한 것인지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음심이 가득한 눈을 가지고 범죄하기를 쉬지 아니하고 굳세지 못한 영혼들을 유혹하며 탐욕에 연단된 마음을 가진 자들이니 저주의 자식이라”(벧후 2:14). 여기서는 습관을 다루고 있다. 탐욕은 마음의 문제이지만 그것은 당신의 습관으로 변할 수 있다. 사람이 탐욕에 사로잡혀 한두 번 탐욕을 품다 보면 그 탐욕은 습관이 된다. “저희가 바른 길을 떠나 미혹하여 브올의 아들 발람의 길을 좇는도다 그는 불의의 삯을 사랑하는”(벧후 2:15) 선지자다. 탐욕이 습관이 되어 버린 사람은 어떻게 되는가? 바른 길을 떠나 미혹하여 브올의 아들 발람의 길을 좇게 된다. 형제자매여, 하나님께는 분명히 그분 자신이 정하신 길이 있는데, 우리는 어떻게 해야 이 길을 갈 수 있는가? 어떤 사람들은 바른 길을 버리고 발람의 길을 따르고 있다. 무엇이 발람의 길인가? 발람은 불의의 삯을 사랑한 선지자였다. 발람의 길은 사람이 자신의 선지자 직분을 삯을 받고 판 길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복음은 매매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선지자의 직분 또한 매매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복음을 팔 수 없고 선지자의 직분 또한 팔 수 없다. 그러나 여기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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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람은 그의 선지자 직분을 팔았으며 그릇된 길을 걸어갔다. 그의 성품은 탐욕으로 연단되어서 유혹이 올 때 즉시 바른 길을 떠나게 되었다. 발람이 발락의 말을 받아들인 것은 그의 마음에 탐심이 처음 생겨서 그런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의 마음이 이미 탐욕에 습관되었기 때문이다. 형제자매여, 당신은 이 중점을 보았는가? 발람은 이미 탐욕으로 마음이 연단되어 있었기 때문에, 발락이 그에게 돈을 주었을 때 즉시 바른 길을 벗어났다. 그러므로 돈의 영향력을 뿌리째 깨끗이 뽑아 버리지 않는다면, 돈의 유혹이 오자마자 당신은 즉시 돈을 좇게 되어 아무 쓸모도 없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가 바른 길을 가고자 한다면, 돈을 거절하는 일에 철저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외면적으로는 인도를 받을 수 있고 기도할 수 있고 하나님의 뜻을 구할 수 있지만 길을 잘못 들어서게 된다. 발람도 기도하였고 하나님의 뜻을 구했으며 하나님을 기다렸지만 잘못된 길을 걸어갔다. 당신이 명심해야 할 것은, 만일 당신의 마음속에 돈이 어떤 지위를 차지하고 있고 탐욕이 당신의 마음속에 습관으로 자리잡았다면, 당신이 여러 번 하나님 앞에 나가서 기도하며 “주여, 당신은 제가 그곳에 가는 것을 허락하십니까?”라고 묻는다 해도 돈이 당신을 지배하고 있으므로 당신이 바른 길을 걸어갈 수 없다는 것이다.
유다서에서도 발람의 일을 언급하고 있다. 11절은, “삯을 위하여 발람의 어그러진 길로 몰려갔으며”라고 말한다. 여기에서 쓰여진 말들은 상당히 엄중하다. 어떤 사람들이 삯을 위하여 몰려갔다. 여기에서 몰려간다는 것은 슬슬 걸어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아주 빨리 몹시 급하게 발람의 잘못된 길로 달려간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하나님의 자녀는 철저히 삯의 유혹에서 탈피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어그러진 길을 갈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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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후서 2장에서는 발람의 일 외에 또 다른 상황을 말해 주고 있다. “저희가 탐심을 인하여 지은 말을 가지고 너희로 이를 삼으니 저희 심판은 옛적부터 지체하지 아니하며 저희 멸망은 자지 아니하느니라”(3절). 베드로후서 2장은 거짓 선지자들의 일을 다루고 있는데, 그러면 이러한 거짓 선지자들은 도대체 어떻게 하고 있는가? 그들은 탐심으로 인하여 지은 말을 가지고 당신들에게서 이득을 취한다. 형제자매여, 거짓 선지자와 거짓 스승들은 탐심으로 인하여 이득을 취하기 원하므로 거짓된 말을 지어낸다는 것을 명심하라. 그들은 탐심이 있고 삯을 얻기 바라기 때문에 말을 지어낸다. 그러므로 만일 어떤 사람의 길이 금전의 지배를 받고 있다면, 그의 교훈 또한 금전의 지배를 받고 있다는 것을 당신은 보게 된다. 이것은 분명하다. 그가 가난한 사람들에게 교훈을 말할 때와 부유한 사람들에게 교훈을 말할 때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그는 청중이 가난한 사람들일 때에는 주님의 요구가 이러한 것이라고 말하지만 부유한 사람들에게 주님의 요구를 말해 줄 때에는 이와는 또 다르게 말한다. 이러한 사람의 말은 그 내면의 이득을 위한 탐심의 영향을 받게 된다. 바꾸어 말하면, 그가 말하고 있는 교리는 금전을 좇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하나님의 말씀은 상당히 직선적이고도 엄중하다. 우리는 사람들이 그런 거짓 선지자나 거짓 교사들을 본받을까 두렵다. 만일 어떤 사람의 길이 돈 때문에 흔들리고 돈 때문에 바뀐다면, 당신은 그들이 거짓 선지자요 거짓 스승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을 섬기는 선지자나 스승이나 교사는 절대로 금전의 영향을 받아서는 안 된다. 만일 돈이 우리를 매수하고 우리에게 영향력을 미칠 수 있으며 바른 길에서 우리를 벗어나게 한다면, 우리는 마땅히 잿더미 위에 엎드려, “주여, 나는 거짓 선지자요, 거짓 스승이요, 거짓 종입니다. 나는 진실로 당신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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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기지 않았습니다.”라고 자백해야 한다. 이것은 아주 심각한 문제다. 사람은 반드시 금전의 세력에서 완전히 구출받아야 한다. 주의 길을 가거나 말씀을 전하는 데 있어서 보수를 바라는 사람은 하나님의 일을 밖에 두어야 한다.
베드로와 유다가 이렇게 언급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디모데서를 쓴 바울도 이 일을 특별히 주의하였다. 그는 디모데전서 6장 3절부터 5절까지에서, “누구든지 다른 교훈을 하며 바른말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경건에 관한 교훈에 착념치 아니하면 … ”이라고 말했다. 다른 교훈과 각종 괴이한 교훈을 전하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경건에 관한 교훈에 착념치 아니하는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저는 교만하여 아무것도 알지 못하고 변론과 언쟁을 좋아하는 자니 이로써 투기와 분쟁과 훼방과 악한 생각이 나며 마음이 부패하여지고 진리를 잃어버려 경건을 이익의 재료로 생각하는 자들의 다툼이 일어나느니라”. 참으로 기묘한 것은, 교회의 역사를 돌이켜볼 때, 이단을 전하는 사람들 중에는 바울처럼 복음을 위해 자기 자신과 자기 소유를 아낌없이 버린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는 것이다. 이단을 전하는 사람은 그 이단으로부터 이득을 취한다. 그들은 그들이 기대하는 만큼 이득을 얻어 낼 수 있다. 우리는 복음 전하는 사람 중에 단 한 사람도 다른 사람에게서 이득을 취하려 하지 않기를 바란다. 세상에서 경건을 이익의 재료로 삼는 것보다 더 하나님께 득죄하는 일은 없다. 그리스도의 일을 하여 이익을 얻는 것은 가장 천한 일이며, 세상에 이보다 더 천한 일은 없다. 경건을 이익의 재료로 삼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천한 일이다. 주의 일을 하는 사람은 이것에 있어서 깨끗이 씻겨져야만이 일을 할 수 있다. 형제자매여, 당신이 주님을 위해 일을 하고자 한다면 금전 문제에 있어서 분별되어야 하며, 굶어 죽을지언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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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득을 얻기를 바라서는 안 된다. 모든 일꾼은 이 일에 있어서 반드시 강해야 한다. 만일 어떤 사람이 금전적인 일에 있어서 당신의 길을 바르지 못하게 한다면, 당신은 그에게 어떤 여지도 남겨 주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철저하게 주님을 따라야 한다. 형제자매여, 우리는 우리의 옷을 팔 수 있고 우리의 물건을 팔 수 있지만 결코 우리의 가르침과 경건을 팔아서는 안 된다. 우리의 마음이 금전에 대해 죽지 않고 우리의 태도가 분별되지 않았다면, 우리는 여전히 주님의 일을 만지지 않는 편이 더 낫다. “그러나 지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이 큰 이익이 되느니라”(딤전6:6절). 진정한 이익은 바로 여기에 있다. 경건으로 우리가 지족한다면 경건은 어떤 것도 요구하지 않고 바라지 않으며 도리어 우리의 모든 만족이 된다. 경건은 이익이 되되 아주 큰 이익이 된다. 경건을 수단으로 삼아 돈을 얻는 것은 가장 수치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경건에 지족을 더하는 것은 훨씬 더 큰 이익이다. 7절부터 10절까지의 말씀은 특별히 사역자가 간직해야 될 말씀이다. “우리가 세상에 아무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정욕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침륜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형제자매여, 우리는 결코 경건을 이익의 재료로 삼지 말자. 우리는 금전에 대하여 완전히 독립적인 태도를 취해야 한다. 만일 이 점에 어려움이 있다면, 다른 직업을 갖는 것이 훨씬 낫다. 우리는 결코 금전의 인도를 받아서 말하고 금전의 인도를 받아서 일하는 지경에 떨어질 수 없다. 그렇지 못하다면 차라리 다른 직업을 가지고서 하나님을 잘 섬기는 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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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낫다. 어느 누구도 금전 문제를 소홀할 수 없으며, 이로 인해 주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 수 없다. 주의 일을 하는 사람은 금전 문제에 있어서 반드시 깨끗해야 한다.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금전에 있어서 우리는 마음속에서 철저히 구원받아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비추어 볼 때, 금전에 있어서 깨끗지 못한 것은 정죄함이 크기 때문이다.
유다서 16절은 “이 사람들은 원망하는 자며 불만을 토하는 자며 그 정욕대로 행하는 자라 그 입으로 자랑하는 말을 내며 이를 위하여 아첨하느니라”고 말한다. 많은 사람들의 입에는 자랑하는 말이 가득하다. 그들은 여러 차례 기도하여 하나님께 응답받은 것을 말하고, 그들이 사람을 놀라게 할 만한 하나님의 많은 기적과 기사를 여러 차례 행했다고 말한다. 그가 이러한 말들을 하는 것은 실제로 이득을 위하여 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이득을 취하기 위하여 아첨하며 사람들의 귀에 듣기 좋은 말만을 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익을 도모하는 마음을 처리해야 한다. 이것이 주님의 일꾼이 갖추어야 할 기본 성격이다. 금전에 있어서 연약한 사람은 어떤 것에 있어서도 항상 연약하다. 우리는 금전 문제에 대해 강경해야 하며 어떠한 영향도 받아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의 일을 하는 우리는 금전에 있어서 깨끗하게 처리받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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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두 번째로, 주님께서 그분의 제자들을 어떻게 가르치셨는지 살펴보기로 하자. 누가복음 9장에는 주님이 열두 제자를 파송하시는 것이 기록되어 있고, 그 다음 10장에는 주님이 70인을 파송하시는 것이 기록되어 있다. 사복음서 중 오직 누가복음만이 주님께서 70인을 파송시키신 것을 기록하고 있다. 열두 제자가 파송될 때에 주님은 그들에게, “여행을 위하여 아무것도 가지지 말라 지팡이나 주머니나 양식이나 돈이나 두 벌 옷을 가지지 말며”(눅 9:3)라고 말씀하셨다. 여기서 주님은 그들에게 많은 것을 가지지 말라고 말씀하신다. 70인이 파송될 때에 주님이 그들에게, “전대나 주머니나 신을 가지지 말며”(10:4)라고 이르셨다. 열두 제자를 파송할 때와 같이 9장과 10장에서 동일하게 다룬 것이 금전의 문제다. 바꾸어 말하면, 주의 일을 하러 나가는 사람은 돈의 문제가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훗날 주님이 제자들에게, “내가 너희를 전대와 주머니와 신도 없이 보내었을 때에 부족한 것이 있더냐”라고 물으셨을 때, 그들은 “없었나이다”(눅 22:35)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주님은, “이제는 전대 있는 자는 가질 것이요 주머니도 그리하고 검 없는 자는 겉옷을 팔아 살지어다”(36절)라고 말씀하셨다.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시대가 이미 달라졌고 주님이 이미 거절당하셨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사람이 주님을 영접할 때에는 이러한 것들이 필요치 않았다. 지금의 문제는, 주님의 일을 하는 사람이나 주님께서 파송하는 사람이 전대를 주의할 것이 아니라 그의 온 존재를 우리가 전하는 말씀에 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나사렛 예수가 하나님께서 세우신 주이심을 증거하기 위해 일하러 가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의 관심을 이러한 메시지에 두어야지 전대에 두지 말아야 한다. 바꾸어 말하면, 일을 하러 나갈 수 있는 사람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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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전 문제에 대해서도 능히 초연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주님을 위하여 각지를 두루 다니며 천국 복음을 전한다면, 우리는 결코 낙타와 같지는 않다. 우리는 바늘구멍을 통과할 수 없는 낙타같이 천국에 들어갈 수 없으면서 밖에 서서 천국에 들어가기를 힘쓰라고 사람들에게 말할 수 없다. 이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가지지 않는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이것은 복음의 원칙을 말하는 것으로 전대와 두 벌의 옷의 원칙과는 일치하지 않는 것이다. 사역자가 복음을 전하러 나갈 때에는 이러한 것들을 살필 겨를이 없다. 사람이 문을 나설 때에는 전대가 있어야 돈을 잘 넣을 수 있고 지팡이가 있어야 길을 잘 걸을 수 있으며 두 벌 옷을 가져야 갈아입기에 좋다. 이런 것들은 모두 필요한 것이다. 누가복음 22장에서 주님은 그들에게 가질 수 있다고 말씀하신다. 그러나 9장에서 열두 제자를 파송할 때와 10장에서 70인을 파송할 때에 주님은 왜 가지지 말라고 하셨는가? 그분이 아무것도 가지지 말라고 말씀하신 것은, 복음 전하는 자들은 근본적으로 이러한 일들을 마음에 두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이다. 만일 오늘 우리가 파송된다면, 두 벌의 옷이 있어도 가고 한 벌밖에 없어도 가며, 지팡이가 있어도 가고 없어도 가며, 돈이 있어도 가고 없어도 가며, 전대가 있어도 가고 없어도 가야 한다. 이러한 것들은 우리가 복음 전하러 나가는 데에 아무런 장애가 될 수 없다. 이렇게 될 때, 우리는 복음을 전할 수 있다. 이것이 주님께서 열두 제자와 70인을 파송하셨을 때 그들이 받은 훈련이다. 형제자매들은 이 일에 대해 분명해야 한다. 사람이 복음을 전하고자 한다면, 이런 일들은 근본적으로 문제가 되지 않아야 한다. 이런 일들이 당신에게 문제가 된다면 사역하러 나가지 않는 것이 좋다. 우리가 복음을 전하려 한다면, 이러한 의복이나 전대나 지팡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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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가 되지 않는다. 만일 지팡이가 당신에게 문제가 된다면, 당신은 복음을 전할 수 없다. 또 만일 몇 벌의 의복이 당신에게 문제가 된다면, 당신은 복음을 전할 수 없다.
복음 전파는 당신이 절대적으로 복음에 주의할 것을 요구한다. 복음의 요구는 당신에게 있어서 이러한 물질적인 것들은 문제가 되지 않으며 복음만이 당신 마음에 문제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사역하러 나갈 때에 사람들의 영접을 받든 받지 못하든 그의 사역을 행하며 하나님 앞에 영광스럽게 서게 될 때에 비로소 주님의 증인이 될 수 있다. 주님은 제자들을 파송하실 때 “여행을 위하여 아무것도 가지지 말라”고 명하셨다. 그분은 제자들이 목적지에 이르러서도 똑같이 명백한 명령을 하셨다.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먼저 말하되 이 집이 평안할지어다 하라”(눅 10:5). 이 얼마나 멋진가! 이들은 모든 사람들에게 평안을 주는 자들이다. 주의 일을 하는 사람은 마땅히 하나님 앞에서 그 자신의 위치를 존중해야만 한다. 우리는 빈궁한 사람이 될 수는 있지만 그러나 결코 체통(體統)을 잃어버린 사람이 될 수는 없다. 어떤 일꾼도 그릇 행하여 체통을 잃어서는 안 된다. 우리가 사람들에게 환영을 받지 못하면 어떻게 하는가?
주님은, “누구든지 너희를 영접지 아니하거든 그 성에서 떠날 때에 너희 발에서 먼지를 떨어버려 저희에게 증거를 삼으라”(눅 9:5)고 말씀하셨다. 당신은 주님의 종들에게서 체통을 보았는가? 그들은 사람들에게 거절당하여도 처참하게 느끼지 않았으며 원망의 말도 하지 않았다. 도리어 그들은 발의 먼지를 떨어버리고 그 성 안의 먼지조차도 떨어버렸다. 그들에게는 부정적이거나 약한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다. 하나님의 종이 비록 빈궁할 수는 있지만 결코 하나님의 종의 체통을 잃어버릴 수는 없다. 이 일을 잘 처리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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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역을 할 수 없다. 일꾼은 반드시 금전 문제를 하나님 앞에서 잘 처리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리스도의 일을 할 수 없다. 왜냐하면 금전의 문제는 매우 엄중하기 때문이다.
이제 주님이 오천 명과 사천 명을 먹이시는 일에서 제자들을 어떻게 훈련시키셨는지 살펴보기로 하자. 한번은 주님께서 제자들을 데리고 아주 많은 사람들에게 친히 말씀을 전하셨는데, 마태의 기록에 의하면 부녀나 아이를 제하고도 청중의 수가 오천 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해질 무렵에 제자들이 나아와 제안하여 말하기를, “이곳은 빈들이요 때도 이미 저물었으니 무리를 보내어 마을에 들어가 먹을 것을 사 먹게 하소서”라고 했다. 그러자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갈 것 없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마 14:15-16)고 말씀하셨다. 제자들은 주님께서 무리를 보내시어 그들로 먹을 것을 사 먹게 하시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러나 주님은 오히려,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고 말씀하셨다. 제자 중 하나가 듣고서 도저히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해 낼 수가 없어서 주님께, “각 사람으로 조금씩 받게 할지라도 이백 데나리온의 떡이 부족하리이다”(요 6:7)라고 말했다. 그들이 거기서 이백 데나리온을 계산하고 있을 때에 주님께서 물으시기를, “너희에게 떡 몇 개가 있느냐 가서 보라”(막 6:38)고 하셨다. 그들이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주님께 가져다 놓은 후에 주님은 기적을 행하여 그 많은 사람들을 배불리 먹이셨다. 형제자매여, 무릇 이백 데나리온을 계산하는 사람은 일할 수 없다는 것을 명심하라. 당신에게 돈이 아무리 많다 해도 당신은 주의 일을 할 수 없다. 주님이 이곳에서 그들에게 보여 주고 계신 것은 주님의 일을 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주는 것을 아까워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만일 당신이 돈에 만진 바 된다면, 당신은 즉시 수지가 맞는지 맞지 않는지를 보려고 할 것이다. 주의 일꾼은 금전의 세력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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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받아야 하며, 금전이 세력을 얻게 해서는 안 된다. 3년이 넘는 기간, 주님께서는 열두 제자들과 함께 계셨고 그들에게 그분 자신을 주셨다. 이것이 그분께서 제자들을 훈련시키신 방법이었다. 주님은 돈을 꼭 써야 할 때는 반드시 돈을 써야 한다고 그들에게 보여 주셨다. 하나님의 일에 있어서 수지가 맞는지 안 맞는지를 따져서는 절대 안 된다. 상업적인 시각으로 하나님의 일을 바라보는 것은 완전히 잘못된 것이다. 항상 돈을 계산하는 사람은 재물의 종이지 결코 하나님의 종이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금전으로부터 벗어나기를 배워야 한다.
그러나 이 공과를 배우는 데에는 시간이 필요하다. 제자들도 이 공과를 단번에 배운 것이 아니다. 마태복음 15장에 와서 또 사천 명이 왔는데, 이때에도 여자와 아이들이 포함되지 않았다. 이번에는 사람들이 이미 그곳에 삼 일 동안 머물러 있었다. 이러한 환경에서 제자들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주님이 제자들에게, “내가 무리를 불쌍히 여기노라 저희가 나와 함께 있은 지 이미 사흘이매 먹을 것이 없도다 길에서 기진할까 하여 굶겨 보내지 못하겠노라”(마 15:32)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제자들은 아직도 이 공과를 배우지 못했기 때문에, “우리가 어디서 이런 무리가 배부를 만큼의 떡을 얻으리이까?”라고 말했다. 사람의 문제는 어디서 떡을 얻어야 하는가였다. 그러나 또다시 주님은 그들에게 떡이 얼마나 있느냐고 단순하게 물으셨다. 그들은, “일곱 개와 작은 생선 두어 마리가 있나이다”라고 대답했다. 그들이 이 일곱 개의 떡덩이와 두어 마리의 생선을 내놓았을 때, 주님은 기적을 행하셔서 사천 명을 배불리 먹이셨다. 주님께서 두 번 이렇게 하신 것은 열두 제자들에게 이 두 번의 훈련이 필요했다는 것을 말해 준다. 만일 주님께서 오천 명을 먹이시지 않고 사천 명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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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이시지 않았다면, 아마도 오순절 때에 제자들은 한 사람도 돌볼 수 없었을 것이다. 만약 사람이 복음서 중의 오천 명 혹은 사천 명을 알지 못한다면, 사도행전 중의 삼천 명과 오천 명을 알 수가 없다. 무릇 사자와 곰을 보고 달아나는 사람은 골리앗을 보았을 때에 반드시 달아나게 된다. 양을 돌볼 줄 모른다면 이스라엘 백성을 결코 돌볼 수 없다. 오천 명과 사천 명에게 먹을 것을 공급하는 공과를 배운 사람들에게 오순절날 가난한 사람을 돌보는 것은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러므로 형제자매여, 당신도 하나님 앞에서 이와 같은 훈련을 받아야 하며, 당신의 마음이 하나님 앞에서 넓혀져야 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개인적인 일에 관계되는 곳에서는 근검절약할 수 있으나 기적을 행하는 데에서는 인색해서는 안 된다. 많은 사람이 돈에 대해 지나치게 계산하고 따질 때 당신은, “이것은 하나님의 종이 할 일이 아닌 것 같다. 이것은 하나님께로부터 훈련을 받은 사람이 할 일이 아니다”라고 느끼게 된다. 하나님께로부터 훈련을 받은 사람은 금전이 그 마음속에서 그리 큰 문제가 되지 않으며, 그의 손에서 그렇게 따지고 계산하지 않는다. 형제자매여, 당신이 따지고 계산하면 할수록 당신은 더욱더 옳지 않게 된다. 계산하면 할수록 당신은 더욱더 가난해진다. 이것은 금전에 대한 하나님의 원칙이 아니다. 우리는 열두 제자가 받은 단련을 받아야 하며 70인이 받은 훈련을 받아야 한다. 그러나 이 열두 제자 가운데에도 돈을 훔친 도적이 있었다. 그는 이 공과를 배우지 못해서 돈이 그에게 가장 중요한 문제가 되어 버렸다. 결국 그는 마리아가 지극히 비싼 향유를 가져다 옥합을 깨뜨려 주님께 붓는 것을 보고는 그것을 단지 허비하는 것으로 여기며,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요 12:5)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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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했다. 돈을 계산하는 사람은 한 옥합의 귀한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사람을 구제하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주님은,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이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여 저를 기념하리라”(마 26:13)고 말씀하셨다. 옥합을 깨뜨려 삼백 데나리온의 가치가 있는 향유를 단번에 주님의 몸에 부은 것은 바로 복음의 결과였다. 바꿔 말해서, 사람이 복음에 대해 분명하다면 주님을 위하여 대가를 바라지 않고 허비인지 허비가 아닌지를 근본적으로 말하지 않는 것이 주님 편에서 볼 때는 옳은 것이다. 너무 많이 소비한다 하여도 주님 몸에 ‘허비’하는 것은 옳은 것이며 마땅히 해야 할 것이다. 복음을 분명하게 모르는 사람은 거기에서 계산하고 있겠지만, 복음에 대해 분명한 사람은 이러한 ‘허비’가 전적으로 옳다는 것을 안다. 주님은 모든 사람의 이 ‘허비’를 얻으셔야만 한다. 삼백 데나리온을 허비라고 말한 자는 누구인가? 그는 유다다. 여기에 공과를 배우지 못한 한 사람이 있는데, 그가 한 말은 상당히 일리가 있고 사람 편에서 볼 때 한 번에 삼백 데나리온을 소비해 버린다는 것은 수지에 맞지 않는 것이다. 그의 눈에는 한 사람을 은 30전으로도 넉넉히 살 수 있었다(그가 주님을 판 대가는 은 30전이었다). 그는 이러한 허비를 보고는 상심(傷心)했다. 그는 여기서 이익을 얻으려 하였으며, 또한 돈을 계산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복음을 얻은 사람은 주님을 위하여 어떤 것도 주님께 드릴 수 있었다. 주를 위하여 모든 것을 다 쏟아 놓은 이것이 주님의 복음을 좇아가는 것이다. 복음이 전파된 곳에서 주님과 값을 흥정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주님은,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함께 있지 아니하리라”(마 26:11)고 말씀하셨다. 주님의 뜻은 이러하다. “너희들이 가난한 사람을 돌보아야 하는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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옳은 일이다. 그러나 내게 행하는 것은 결코 허비가 아니다. 아무리 많이 하여도 아무리 지나치게 하여도 내게 하는 것은 결코 허비가 아니다.” 어떤 형제는, “주님을 믿자마자 중용의 위치에 서 있는 사람은 조금도 영적인 장래가 없다.”라고 말했다. 형제자매여, 우리가 십 년 혹은 이십 년이 지난 후에 중용의 위치에 서도 늦지 않는다. 처음 주님을 믿을 때에 얼마든지 마음놓고 ‘허비’하라. 처음 주님을 믿을 때에 모든 것을 다 주님께 드리고 귀한 참 나드 향유 전체를 주님께 붓고 필사적으로 드린다면 길이 있을 것이다. 사도들이 받은 것은 바로 이러한 교육이었다.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고난이 닥쳐도 이렇게 행하기를 배워야 하며, 주님 몸에 많은 것을 허비하거나 혹은 다른 사람에게 많은 것을 쏟아 부어야 할지라도 이렇게 행하기를 배워야 한다. 금전에 대한 문제가 하나님의 종에게는 이렇게 중요하다. 그러나 돈이 있든 없든 주의 일을 하러 나가야 한다. 돈에 대하여 일일이 따지고 셈하는 사람은 문제가 있는 것이다.
사도행전 3장에서 베드로는 앉은뱅이에게,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6절)라고 말했다. 우리는 여기서 베드로와 요한이 ‘은과 금은 내게 없다’고 말할 정도까지 주님께 인도함 받은 것을 본다. 비록 사도행전 2장에서는 그렇게 돈이 많았었지만, 3장에서는 ‘은과 금이 내게 없다’라고 말하고 있다. 베드로는 그 앉은뱅이에게 어떻게 말했는가? 그는,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고 말했다. 그렇게 많던 돈이 그들의 손을 거쳤지만 그들은 오히려 ‘은과 금은 내게 없다’고 말할 정도까지 인도되었다. 그러므로 형제자매여, 당신이 일을 하지 않는다면 모르겠지만, 일을 하려 한다면 금전에 관하여 철저해야 한다. 금전에 대해 약한 사람은 다른 일에서도 약하다. 사람이 일에 흔들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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않고 강할 수 있는 근본적인 원인은, 돈에 대하여 그가 하나님 앞에서 신뢰할 만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오직 그러한 사람에게 그분의 일을 위탁하실 수 있다.

3

이제 금전에 대한 바울의 태도가 어떤지를 보기로 하자. 이에 대한 바울의 말은 매우 분명하다. 사도행전 20장에서 바울은 에베소 사람들에게, “내가 아무의 은이나 금이나 의복을 탐하지 아니하였고”(33절)라고 말했다. 이것은 그의 동기의 문제를 다루는데, 그에게는 탐심이 없었다. 하나님 앞에서 일할 때에, 그는 어떤 사람의 물건도 가지려고 하지 않았다는 것에 대해 확신이 있었다. 어떤 사람의 은이나 금이나 의복도 그의 마음에서 근본적으로 탐하지 않았다는 것이 한 방면이다. 계속해서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너희 아는 바에 이 손으로 나와 내 동행들의 쓸 것을 공급했다”(행 20:34). 이것은 하나님을 섬기는 모든 사람들이 응당 가져야 할 태도이다. 우리는 항상 하나님 앞에서, “나는 어떤 사람의 은이나 금이나 의복을 탐하지 않습니다. 당신의 물건은 당신 것이니 나는 결코 그것을 탐내지 않습니다.”라고 고백할 수 있어야 한다. 또한, “당신의 것은 당신에게 남겨 두고 나는 일을 함으로써 기꺼이 나와 내 동행들의 쓸 것을 공급합니다.”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은 주님의 일을 하는 사람이 복음의 권위를 쓸 수 없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도리어 이것은 모든 일꾼은 반드시 하나님 앞에서 복음에 대하여 이렇게 해야 한다는 것을 보아야 함을 말하고 있다. 우리의 책임이 이렇게 중하므로, 우리는 우리 손으로 기꺼이 우리 자신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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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행들의 쓸 것을 공급할 수 있을 정도까지 나아가야 된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언제나 바울과 같은 마음을 가져야 한다. 두 손으로 힘을 다하여 그와 그의 동행들의 쓸 것을 공급한 바울은 우리의 본(本)이다. 물론 바울도 다른 사람의 선물을 받았다. 그러나 그것은 또 다른 것으로서 다른 사람의 책임이다. 잠시 후 이 문제를 살펴보자.
바울이 고린도인들에게 말한 것은 매우 좋다. 바울은 고린도인들에게 편지할 때에 다음과 같은 질문을 제기했다. “내가 너희를 높이려고 나를 낮추어 하나님의 복음을 값없이 너희에게 전함으로 죄를 지었느냐”(고후 11:7). 이들과 또 에베소인에 대하여 바울은 자기의 변호를 다음과 같이 하고 있다. “또 내가 너희에게 있어 용도가 부족하되 아무에게도 누를 끼치지 아니함은 마게도냐에서 온 형제들이 나의 부족한 것을 보충하였음이라 내가 모든 일에 너희에게 폐를 끼치지 않기 위하여 스스로 조심하였거니와 또 조심하리라 그리스도의 진리가 내 속에 있으니 아가야 지방에서 나의 이 자랑이 막히지 아니하리라 어떠한 연고뇨 내가 너희를 사랑하지 아니함이냐 하나님이 아시느니라 내가 하는 것을 또 하리니 기회를 찾는 자들의 그 기회를 끊어 저희로 하여금 그 자랑하는 일에 대하여 우리와 같이 되게 하려함이로다”(고후 11:9-12). 바울은 일체 도움이 필요 없다는 독립적인 태도는 취하지 않았다. 단지 아가야 지방 일대가 간증과 관계되고 어떤 사람들이 훼방하고 기회를 틈타서 의도적으로 그들이 특별하다고 자랑하기 때문에, 바울은 그들에게 말할 기회를 주지 않았다. 그는, “내가 하나님의 복음을 값없이 너희에게 전해 주고 조금이라도 너희에게 누를 끼치지 아니하리라. 용도가 부족하였을 때에도 내가 모든 일에 너희에게 폐를 끼치지 않기 위하여 스스로 조심하였거니와 또 조심하리라. 이것은 내가 너희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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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냐하면 나는 지금 내가 하는 것을 후에도 또 하려 하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이것은 기회를 찾는 자들의 그 기회를 끊어 버려서 그들이 자랑하는 말을 하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금전에 대한 일꾼의 태도이다. 우리가 어디에 있든 우리는 조금도 다른 사람에게 기대하는 태도를 갖지 말아야 하며, 이로 인해 사람들에게 말할 기회를 주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의 자녀가 하나님의 일을 하는 데에는 체통이 있어야 한다. 우리는 돈을 사랑하는 사람을 향하여 더욱 값없이 복음을 그들에게 전해 주어야 한다. 돈을 붙잡고 있는 사람일수록 우리는 그들에게서 선물을 적게 받아야 한다. 당신은 하나님의 종된 당신의 위치를 보아야 한다. 만일 당신이 아가야 전역의 사람들처럼 악의로 기회를 찾아 훼방의 말을 하려는 사람들을 만난다면 당신은 마땅히 바울과 같이 말해야 한다. “나는 결코 여러분에게 폐를 끼치지 않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예루살렘의 가난한 사람들에게 연보를 한다면, 나는 전해 줄 수 있습니다. 디모데가 오면 여러분은 그를 멸시치 말고 그를 평안히 보내어 내게 오게 하십시오. 나 바울은 주님의 일꾼으로서의 체통을 지킬 것입니다.” 만일 어떤 지방에서 연보로 인하여 사람들에게 말할 여지를 주었다면, 당신은 하나님을 섬기는 체통을 완전히 잃게 된다. 당신은 하나님을 섬기는 종으로서 체통을 지켜야 한다.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 금전 때문에 느슨해져서는 안 된다. 당신은 반드시 엄격하게 일꾼의 체통을 지켜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을 위하여 어떤 일도 할 수 없다.
바울은 여기에서 자신이 어떻게 이러한 체통을 지켰는가를 말했을 뿐 아니라, 그가 친히 그의 손으로 일을 하여 그의 동행의 필요를 공급했다는 것을 말해 준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주는’원칙이다. 바울은, “이 손으로 나와 내 동행들의 쓸 것을 공급했다”고 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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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모든 일꾼이 줄 줄 모르면 안 된다. 만일 당신이 수입이 아주 많은데 오직 자기 자신만을 위하여 이 많은 수입을 남겨 둔다면, 당신은 아직 일꾼의 일이 무엇인지를 모르는 것이다. 만일 함께 사역하는 중에 항상 받기만을 바라고 바치는 것에 인색하다면, 이것은 우리에게 문제가 있다는 것을 증명한다. 공급만 받을 줄 알고 공급할 줄을 모르는 일꾼은 더 이상 영적인 진보를 가질 수 없다. 형제자매여, 영적인 일에 있어서의 당신의 진보 여부는 금전에 대한 당신의 태도에 달려 있다. 일꾼의 가장 나쁜 태도는 받기만 하려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레위인과 같아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그들의 십분의 일을 우리에게 가져올 것을 기대하지만, 이것은 상당히 어려운 일이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레위인에게도 그들의 십분의 일을 엄연히 내야 할 책임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레위인은 각 성(城)에 산업이 없었으며 열두 지파 속에서 기거하였고 제단을 의지하여 생활하였다. 아마도 레위인들은, “우리는 제단을 의지하여 생활하고 있는데 우리에게 무슨 공급할 것이 있습니까?”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모든 레위인이 십분의 일을 하나님 백성에게서 받으며 또한 마땅히 그 중의 십분의 일을 하나님께 바쳐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의 종이라 불리우는 사람은 모두 이 사실을 알아야 한다. 당신은 “나는 포기한 것이 너무 많고 수입이 너무 적은데 하나님께 드려야 하는가?”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당신이 줄곧 자신의 필요만을 바라본다면, 당신에게 문제가 생기게 되고 함께 동행하는 사람들을 공급해 줄 수가 없다. 우리가 공급하고자 한다면, 마땅히 모든 형제자매에게까지 이르러야 한다. 만일 당신이 그 액수가 얼마이든지 간에 하나님 앞에서 그 돈을 보류해 놓고 다만 하나님께서 다른 형제자매에게 역사하시기만을 바란다면, 당신은 하나님이 결코 돈을 당신 손에 맡기지 않으신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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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게 될 것이다.
고린도후서에서 바울은,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6:10)라고 말한다. 여기에 이 사람은 자기의 하나님을 참으로 알았다! 그는 가난한 자 같으나 기묘하게도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했다. 형제자매여, 이것이 바로 우리의 길이다. 형제자매여, 각지의 형제자매들이 주님의 일을 하는 당신에 대해 말하고 당신에 대한 태도가 좋지 못하다면, 당신은 마땅히 일꾼의 체통을 지켜야 한다. 당신은 그들의 어떤 선물도 거절하고, 그들에게 이렇게 말해야 한다. “나는 여러분의 돈을 사용할 수 없습니다. 나는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으로서 여러분 가운데 어떤 말이 있으므로 나는 여러분의 돈을 쓸 수 없습니다. 나는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으로서 하나님의 영광을 지켜야 하므로 여러분의 돈을 받을 수 없습니다.” 당신이 빈궁한 데 처해 있을 지라도 주기를 배워야 한다. 더 많은 수입을 원한다면 더 많은 지출을 해야 한다. 주면 줄수록 당신은 더욱 받을 수 있다. 이것이 영적인 원칙이다. 우리가 부족할 때조차도 힘을 다하여 주어야 한다. 왜냐하면 돈이 다른 사람에게 나갈 때 주님의 공급이 오게 되기 때문이다. 형제자매들은 많은 것을 베풀 때에 많은 것이 들어온다는 체험을 충분히 하였을 것이다. 결코 당신 손에 얼마나 남았는가를 보지 말라. 주님은,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눅 6:38)라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하나님의 율법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율법을 깨뜨릴 수 없다. 우리 그리스도인이 재물을 관리하는 방법은 세상 사람들의 그것과 완전히 다르다. 그들은 재물을 쌓을수록 많아지지만 우리는 줄수록 많아진다. 이렇게 하여 우리가 빈궁할지라도 오히려 다른 사람을 부유케 한다.
고린도후서 12장에서 바울은 “보라 이제 세 번째 너희에게 가기를 예비하였으나 너희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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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를 끼치지 아니하리라”(14절)고 말한다. 이것이 바울의 태도이다. 얼마나 엄격한 태도인가! 이전에 그에 대해 말하는 사람이 있고 어떤 문제가 있었기 때문에, 이제 세 번째 그들에게 갈 때에도 역시 그들에게 폐를 끼치지 않겠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는 계속해서, “나의 구하는 것은 너희 재물이 아니요 오직 너희니라”(원문에는 재물이라는 단어가 없음)고 말하고 있다. 그가 이렇게 하는 것이 도량이 좁고 심지가 좁은 것인가? 그렇지 않다. 그는 또, “어린아이가 부모를 위하여 재물을 저축하는 것이 아니요 이에 부모가 어린아이를 위하여 하느니라”고 말한다.
형제자매여, 당신은 하나님 앞에서 바울의 태도가 얼마나 좋은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바울은 고린도인들의 자신에 대한 훼방의 말을 많이 들었으므로 그들의 연보를 받지 않았다. 바울은 이런 지경에까지 이르렀지만 금전에 대해 그들을 가르치는 일을 회피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고린도후서에서 금전에 대한 일을 가장 많이 제기했다. 만약 바울이 고린도인들에게 금전 문제를 제기하지 않았다면, 그는 자기 사역에 대한 고린도인들의 비난으로 인해 많은 상처를 받았을 것이다. 그러나 금전이 바울에게는 그렇게 능력을 가지지 못했기 때문에 바울은 상처를 받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재정 문제에 있어서 고린도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었다. 그들이 예루살렘에 마땅히 연보를 보내야 했을 때 바울은 그들에게 보내도록 하였다. 바울은 금전 문제를 초월했기 때문에 그들이 자신을 대하는 태도에 대해 만진 바 되지 않았다. 비록 바울 개인이 체통을 지키기 위해 그들의 연보를 받지 않았지만, 그는 오히려 마게도냐인들에게 고린도인들이 이미 준비하였음을 자랑하였다. 그는 한 면에서 생각하기를, 마게도냐 사람이 고린도인들 가운데 와서 그들이 연보의 준비가 잘되지 않은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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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게 될 때 고린도인들이 부끄러움을 당할까 두려워 그들에게 미리 준비할 것을 권면하였다(고후 9:2, 4-5). 여기에는 바울 개인의 감정이 없다. 아! 하나님의 종은 실제로 재물의 세력에서 구출받아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고린도인들이 절대로 바울의 이러한 말을 듣지 않았을 것이며, 바울 또한 에베소인들과 빌립보인들에게는 이 말을 할 수 있지만 고린도인들에게는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고린도인들에게 여전히 이러한 말을 하였으며 조금도 이 문제를 느슨하게 풀어 놓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고린도인들에게 금전에 대해 말했다. 그의 뜻은 이러하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돈을 사용하실 수 있으신 분이며, 내가 당신들의 돈을 쓰려고 하는 것이 아니다. 나 바울은 어떤 것도 얻고자 하지 않는다. 이 일에 있어 나는 결코 여러분에게 폐를 끼치지 않는다. 오직 나는 여러분이 언제나 하나님의 길을 걸어가기만을 바랄 뿐이다.”
형제자매여, 교회 안에서 많은 형제자매와 왕래할 때 당신은 바울처럼 ‘당신 자신’과 ‘당신의 소유물’을 구별할 수 있는가? 당신은 그렇게 많은 형제자매들을 만날 때에 ‘그들’과 ‘그들의 소유물’ 중에 어느 것을 갖기를 원했는가? 만일 그들이 당신에게 문제가 있어 그들의 소유물을 내놓지 않을 경우에도 당신은 한결같이 그들을 보살피고 그들을 방문하며 그들이 진보하기를 바랄 수 있는가? 바울은 고린도인들을 그냥 방치해 둘 충분한 이유가 있었지만 그들을 그냥 버려 두지 않고 세 번째로 방문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바울은 여전히 그들의 소유물을 거절하고 오직 그들 자신만을 원했던 것이다. 우리가 생각하기에 이것은 하나님의 종에게 주어진 가장 큰 시험이다. 우리는 우리 형제 바울이 행한 일을 배워야만 한다.
우리가 앞서 인용한 그다음 계속되는 구절에서도 바울은 같은 말을 하고 있다. “내가 너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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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을 위하여 크게 기뻐함으로 재물을 허비하고 또 내 자신까지 허비하리니 너희를 더욱 사랑할수록 나는 덜 사랑을 받겠느냐 하여간 어떤 이의 말이 내가 너희에게 짐을 지우지는 아니하였을지라도 공교한 자가 되어 궤계로 너희를 취하였다 하니 내가 너희에게 보낸 자 중에 누구로 너희의 이를 취하더냐 내가 디도를 권하고 함께 한 형제를 보내었으니 디도가 너희의 이를 취하더냐 우리가 동일한 성령으로 행하지 아니하더냐 동일한 보조로 하지 아니하더냐”(고후 12:15-18). 형제자매여, 여기 바울의 태도를 보라! 그는 고린도인들을 위해서 얼마나 기꺼이 자기 자신과 자기 소유를 바쳤던가! 복음을 전하는 것은 단지 사람이 나가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며 언제나 자신의 재물과 자신의 모든 소유를 다 쏟아야 가능한 것이다. 복음을 전하면서 재물을 얻으려는 것은, 이유를 막론하고 다 옳지 않은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금전을 기꺼이 내놓을 수 있을 정도로 자신을 예비해야 한다.
만일 당신이 자신의 소유를 내놓을 수 없다면, 당신의 일은 언제나 신뢰할 만하지 못하다. 우리 자신의 금전을 내놓는 것은 아주 합당한 일이며 가치 있는 일이다. 바울은, “내가 재물을 허비하고 내 자신까지 허비하리라. 내가 너희 영혼을 위하여 재물을 허비하고 또 내 자신까지 허비하며 내가 너희 가운데 갈 때에 너희 한 사람에게도 폐를 끼치지 아니하며 디도 또한 너희 중 한 형제라도 폐를 끼치지 아니하리라. 그 형제는 결코 너희 중 어느 한 사람에게도 짐을 지우지 아니하리라. 나는 언제나 어느 누구의 이익도 취하지 아니하였다. 복음이 옳고 분명함으로 나는 내 재물을 허비하면서라도 전하려 한다.”고 말하였다. 우리는 우리 형제 바울과 같이 다른 사람에게 조금이라도 누를 끼쳐서는 안 되며 자기 자신을 허비할 수 있어야 한다. 이렇게 하는 것이 참으로 옳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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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대로 다음의 경우를 보자. 바울은 마게도냐인이 보낸 연보, 곧 빌립보인이 보낸 연보를 받아들였다. 정상적인 상황에서 복음 전파자가 다른 그리스도인이 주는 물질을 받는 것은 합당한 것이다. 바울이 어떤 곳에서는 연보를 받았지만 어떤 곳에서는 받지 않았다. 그가 영적으로 자신에 대해 아무 문제가 없는 마게도냐 사람들의 선물을 받았지만, 아가야나 고린도 지방같이 그를 비평하고 훼방하는 말을 할 기회를 찾는 곳에서는 선물을 거절하고 받지 않았다. 이것이 바로 바울의 길이다.
오늘날 우리도 이와 같이 받아들일 것과 마땅히 거절해야 할 것을 구별해야 한다. 마게도냐와 같은 그런 곳에서는 선물을 받는 것이 옳지만 아가야나 고린도같이 사람의 의견이 있는 곳에서는 받지 말아야 한다. 형제자매여, 당신은 하나님 앞에서 이 문제를 견지해 나가야 하며 어떤 것이나 다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만일 뒤에서 비평하거나 비평할 기회를 찾는 사람들이 있다면 당신은 결코 그곳의 선물을 받을 수 없다. 그러나 그 외의 곳에서는 받아도 된다.
우리는 다시 빌립보서로 돌아가서 바울이 그곳의 성도들이 보낸 헌금을 받아들였을 때 어떻게 하였는지 보기로 하자. 다음 구절은 그가 빌립보인에게 쓴 구절이다. “빌립보 사람들아 너희도 알거니와 복음의 시초에 내가 마게도냐를 떠날 때에 주고받은 내 일에 참여한 교회가 너희 외에 아무도 없었느니라 데살로니가에 있을 때에도 너희가 한 번 두 번 나의 쓸 것을 보내었도다 내가 선물을 구함이 아니요 오직 너희에게 유익하도록 과실이 번성하기를 구함이라”(빌 4:1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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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바로 바울의 태도다. 복음의 시초에 빌립보인이 그에게 헌금을 보낸 유일한 사람들인 것 같다. 그들은 또한 바울이 고린도와 데살로니가에 있었을 때에도 그를 기억하여 헌금을 보내었다. 그러나 그가 빌립보 사람들에게 한 말을 보자. “나는 결코 어떤 선물도 구함이 아니요 오직 너희에게 유익하도록 과실이 번성하기를 구함이라.” 바울은 그가 빌립보인들의 돈을 사용할 때 하나님께서 그들을 유익하게 하실 것을 알았다. 하나님은 그것이 빌립보인들이 드린 돈임을 기억하실 것이다. 마게도냐 사람은 한 번 헌금하고 후에 재차 헌금하였다. 그러나 우리는 사람들이 우리에게 보내는 헌금에 주의를 기울여서는 안 된다. 사람들이 헌금을 보내 준다 해도 우리가 모두 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만일 우리가 헌금을 받게 된다면, 바울이 빌립보 사람들에게 말했던 것처럼 우리도 그들에게 유익하도록 과실이 번성하기를 바라야 한다. 지금까지 말한 것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하나님의 종이 만일 금전에 대한 일에서 구원받지 못한다면, 그것은 잘못된 것이다. 당신은 반드시 금전 문제에서 구원받아야 한다.
바울은 이 구절에 이어서, “내게는 모든 것이 있고 또 풍부한지라”(18절)고 말한다. 이것은 보통 우리가 표현하는 말과 얼마나 대조적인가! 흔히 우리의 일에 대해 보고할 때 우리는 무언가 부족하다는 것을 나타내어 그들로 돈을 좀더 보내야 한다는 것을 알게 한다. 그러나 우리 형제 바울은 유일하게 그에게 연보를 보낸 교회에게, “내게는 모든 것이 있고 또 풍부한지라”고 말했다. 바울의 말에는 이렇게 중복하는 것이 드물다. 형제자매여, 당신은 우리 바울 형제의 이러한 태도를 주의해야 한다. 그는 유일하게 그에게 연보를 보낸 빌립보 교회에게, “내게는 모든 것이 있고 풍부하다. 나는 여러분에게 충분히 받았다. 오직 나는 여러분의 연보가 하나님이 받으실 만한 향기로운 제물이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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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란다.”라고 말하였다. 아, 바울은 얼마나 아름답고 순전한 영을 가졌는가! 그는 재물에 대해 조금도 감각이 없는 사람이다. 재물은 그에게 어떠한 느낌도 갖게 하지 않았다.
계속해서 19절을 읽어보자. 이것은 가장 보배로운 구절이다.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 바울은 빌립보의 성도들이 자기에게 보낸 모든 물질적인 도움에 감격하여 감사를 표했지만 그의 체통을 잃지는 않았다. 그들은 연보를 제물로 하나님께 드린 것이지 바울 자신에게 준 것이 아니다. 그것은 바울 자신과는 관계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한 면으로 바울은 그들이 하나님께 바친 연보의 관여자(關與者)였기 때문에 그들에게 아낌없는 축복을 하였다(“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 바울은 얼마나 부자였던가! 그는 다른 사람에게 얼마나 많은 부를 나눠 주었던가! 이 말씀은 우리로 하여금 능히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게 한다.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께 세세 무궁토록 영광을 돌릴지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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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번째로, 우리는 교회가 해야 할 것이 무엇이며, 연보가 바울의 손을 거치고 다른 사람에게 전달되었을 때 그가 어떤 태도를 취했는지를 보자. 고린도후서 8장 1절에서 4절은 “형제들아 하나님께서 마게도냐 교회들에게 주신 은혜를 우리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저희 넘치는 기쁨과 극한 가난이 저희로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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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였느니라 내가 증거하노니 저희가 힘대로 할 뿐 아니라 힘에 지나도록 자원하여 이 은혜와 성도 섬기는 일에 참여함에 대하여 우리에게 간절히 구하니”라고 말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자녀가 반드시 지녀야 할 태도이다.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이나 하나님을 위해 사역을 하는 사람은 어느 곳에 가서 재물을 만질 때 반드시 이러한 태도를 가져야 한다. 마게도냐 형제들은 예루살렘의 형제에게 기근이 닥쳤다는 소식을 듣고서 연보를 하였다. 바울이 먼저 예루살렘의 기근 소식을 듣고 그들에게 이 어려움을 알려 주었던 것이다. 그들이 이 소식을 들었을 때 사실상 그들도 경제적인 난관에 봉착해 있었지만, 그들은 이 궁핍한 가운데서도 오히려 힘을 다하여 예루살렘 형제들을 돌아보았다. 그들은 어떻게 하였는가? 바울은 그들이 힘에 넘치도록 자원하여 이 은혜와 성도 섬기는 일에 참여함에 대하여 우리에게 간절히 구하였다고 말하고 있다. 이것은 마게도냐에서 연보를 한 형제들 모두의 태도였다. 성도의 어려움을 돌보기 위하여 이 은혜와 성도 섬기는 일에 있어 우리도 힘에 지나도록 자원해야 한다. 우리는 우리가 궁핍한지 그렇지 아니한지를 고려치 않으며 우리에게 어려움이 있는지 없는지를 상관치 않고 이 일, 즉 성도의 어려움을 돌보는 일에 있어서 분에 넘치게 자원해야 한다. 이 일에 있어 마게도냐 형제들은 바울에게 그들이 예루살렘의 형제들을 돌보는 일에 참여케 해 줄 것을 재삼 요청하였다. 바꾸어 말하면, 바울이 처음에는 그들에게 연보할 것을 허락지 않았는데 이것은 합당한 태도다. 주님을 위하여 사역하는 사람은 비록 자기 자신을 위해 쓰려는 것이 아닐지라도 금전을 보자마자 가져와서는 안 된다. 예루살렘의 형제들이 비록 어려움에 처해 있었지만 연보를 보내기만 해서 되는 것은 아니었다. 특히 마게도냐와 같이 자신들도 환경이 아주 궁핍한 가운데 처해 있을 때에 그들은 연보를 하지 않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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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들이 두 번 세 번 바울에게 와서 그들도 참여케 해 줄 것을 요청했을 때 바울은 그들에게 허락하였다. 이렇게 함으로 양쪽이 다 아름답게 행하였다. 이것이 바로 참된 그리스도인의 모습이다. 한 면으로 연보를 가져온 사람들은 그들이 궁핍하고 환경이 좋지 않을지라도 더욱더 그의 힘을 다하여 연보하려는 모습을 나타내고 있으며, 또 한 면으로 주의 일을 하는 형제는 그들이 당한 어려움을 알고 있기에 연보하지 않아도 될 것을 말하고 있다. 하나님의 종과 또 하나님의 종이 섬기는 성도와의 관계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후에 사역하는 형제는 그들에게, 만일 너희가 진정으로 그들을 도와 헌금하기를 원한다면, 금지할 도리가 없다고 말하고 있다. 이것이 바로 일꾼의 참다운 태도다. 바울은 교회의 일을 처리하는 사람이었으므로 예루살렘의 어려움을 보고 형제들의 필요를 돌보아야 했지만, 그러나 바울의 태도는 오늘날 많은 사역자의 태도와는 다르다. 바울은 마게도냐 교회들이 거듭 그에게 요청했기 때문에 성도 섬기는 이 일에 참여하는 것을 그들에게 허락하였다.
이어서 바울은, “너희를 위하여 같은 간절함을 디도의 마음에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 더욱 간절함으로 자원하여 너희에게 나아갔고 또 저와 함께 한 형제를 보내었으니 이 사람은 복음으로서 모든 교회에서 칭찬을 받는 자요 이뿐 아니라 저는 동일한 주의 영광과 우리의 원을 나타내기 위하여 여러 교회의 택함을 입어 우리의 맡은 은혜의 일로 우리와 동행하는 자라 이것을 조심함은 우리가 맡은 이 거액의 연보로 인하여 아무도 우리를 훼방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 이는 우리가 주 앞에서만 아니라 사람 앞에서도 선한 일에 조심하려 함이라 또 저희와 함께 우리의 한 형제를 보내었노니 …” (고후 8:16-22)라고 말한다. 우리는 여기에서 바울이 한 일을 본다. 그가 사람들 대신에 예루살렘으로 연보를 보낼 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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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절차에 있어서 매우 분명히 하였다. 어떤 일꾼도 금전을 다루는 데 있어서 철저하지 않으면 안 된다. 바울은 어떻게 말했는가? “이것을 조심함은 우리가 맡은 이 거액의 연보로 인하여 아무도 우리를 훼방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 바울은 세 형제를 청하여 돈을 관리하게 하였으며, 바울 자신은 금전에 관여치 않았다. 그 세 형제는 어떻게 했는가? “우리가 주 앞에서만 아니라 사람 앞에서도 선한 일에 조심하려 함이라.” 금전을 관리할 때에는 한 사람에게 일임되지 않고 두세 사람에게 맡겨져야 어려움이 없게 된다.
금전 문제가 이렇게 엄중하였기 때문에 바울은 디모데전서와 디도서에서 특별히 우리에게 주의하여 말하고 있다. 그는 감독의 직분을 맡는 사람은 마땅히 재물을 탐내지 말아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딤전 3:3, 딛 1:7). 그리고 디모데전서 3장 8절에서 집사 직분에 대해 말하면서 똑같은 조건을 말했다. 재물을 탐내지 않는 사람만이 집사의 직분을 맡을 수 있다. 만일 어떤 형제가 금전에 대한 문제를 이기지 못하면, 그는 절대로 집사가 될 수 없으며 장로도 될 수 없다. 재물을 탐내지 않는 것이 집사나 장로 직분을 맡을 수 있는 기본 조건이다. 금전 문제는 반드시 해결되어야 하며 느슨하게 다루어져서는 안 된다. 바울이 이렇게 말했을 뿐 아니라 베드로도 이와 같이 말했다. 베드로가 장로 된 사람에게 말한 것을 보자. “너희 중에 있는 하나님의 양무리를 치되 부득이함으로 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좇아 자원함으로 하며 더러운 이(利)를 위하여 하지 말고 오직 즐거운 뜻으로 하며”(벧전 5:2). 탐심이 있는 사람은 결코 하나님의 양무리를 칠 수 없다.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가 재정적인 문제를 완전히 해결할 수 있기를 바란다. 탐심이 처리되지 않으면 조만간 문제가 발생하게 된다. 기본적인 금전 문제가 처리되지 않으면,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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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에서 아무 쓸모가 없게 된다. 금전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다른 어떤 것도 해결될 수 없으며 조만간 반드시 결함이 생겨 어려움에 부닥치고 만다. 금전에 대한 당신의 태도는 독립적이어야 한다. 당신에 대해 비난하는 말을 하는 지방에서 당신은 그들의 돈을 거절하기를 배워야 한다. 이 밖에도 항상 다른 사람의 무거운 짐을 짊어지기를 배워야 하며, 자신의 물질적인 필요뿐만 아니라 우리 동료와 형제자매들의 필요를 채워 주기를 배워야 한다. 우리가 만일 금전 문제에 대해 해결할 수 있다면, 한 가지 큰 일을 해낸 것이다. 금전에 대해 이러한 기본적인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사람은 결코 일을 잘 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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