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장
그 밖의 몇 가지 일
여기서 우리는 그 밖의 몇 가지 일을 살펴보아야 한다. 첫째로는 진리에 대하여 절대성을 유지하는 문제다. 둘째로는 몸의 건강을 돌보는 문제이다. 셋째로는 생활 습관에 관한 문제며, 넷째로는 독신과 결혼 등에 관한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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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의 일을 하는 사람은 모두 항상 진리의 절대성을 유지해야 한다. 이것은 사람이 자신에서 구원받는 것을 요구한다. 그래야만이 진리에 절대적일 수 있다. 그러나 많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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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제자매들은 진리에 대하여 절대적이지 못하며, 사람이나 일의 영향을 받고 또한 감정의 영향을 받는다. 진리에 절대적이지 못한 사람은 일에 있어서 하나님의 진리를 희생시키면서 사람을 위하고 자신을 위할 수 있고, 하나님의 진리를 희생시키면서 자기 자신의 갈망을 위할 수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섬기는 데 있어서의 기본적인 요구는, 진리는 절대적인 것으로서 결코 희생시킬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 자신은 희생할 수 있으나 진리는 결코 희생시킬 수 없으며, 우리의 감정은 희생시킬 수 있지만 진리는 희생시킬 수 없다. 친구들 사이 혹은 잘 아는 사람들 가운데서 문제가 발생하는 주의 일꾼들이 많다. 또한 많은 책임 형제들이 그들의 가정에서 곤란을 겪는다. 그들은 가정이나 친구 혹은 친속들로 인하여 진리에 영향을 끼친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사람들을 쓰실 수 없다. 진리는 절대적인 것이기 때문에, 나의 형제이든 나의 친척이든 나와 친밀한 관계가 있는 사람이든 그 누구를 막론하고 결코 진리에 영향을 끼칠 수 없다. 한 가지 예를 들어 보자. 어느 사역자의 아들이 침례받을 의사를 표했다고 하자. 만일 이 사역자가 이 일을 진리에 관계된 일로 보고 참으로 진리를 고수(固守)하는 사람이라면, 그는 그의 아들이 침례받는 일을 책임 형제의 손에 맡겨 자신의 아들이 침례받기에 합당한가의 여부를 결정하도록 그에게 일임할 것이다. 그러나 어려움은, 그 사역하는 형제가 그의 아들이 그렇게 나쁘지 않으며 항상 침례받을 수 있는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는 데 있다. 이것은 그가 진리에 대해 절대적이지 않음을 입증한다. 그는 부자(父子)관계를 이 진리 안으로 가져옴으로 진리에 절대적이지 못하였던 것이다. 그가 진리에 대하여 절대적이라면, 교회 안의 많은 일은 개인적인 관계를 따를 것이 아니라 진리를 따라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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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하나의 예를 들어 보자. 가령, 어느 지방에서 교리상의 분쟁이 일어났는데 한 무리의 성도들은 그들과 친숙하게 왕래하던 몇몇의 형제를 좇아 나갔고, 다른 한 무리의 성도들은 그들과 친분이 두터운 형제들의 편에 서서 그들을 좇아 나갔다고 하자. 그렇다면 이것은 그들 어느 쪽도 진리에 전적으로 절대적이지 못한 것이며, 그들이 나간 것은 진리에 근거한 것이기보다는 그들의 사적인 감정에 근거한 것이다. 이것은 그들이 입을 다물고 진리를 제시하지 않았다는 말이 아니라 그들이 진리에 대하여 절대적이지 않았다는 뜻이다. 그들 중 많은 사람이 진리를 돌아보기는 했지만 진리에 대하여 절대적이지는 못했다. 진리에 대하여 절대적이면 영적인 일에 있어서 사적인 감정의 영향을 조금도 받지 않는다. 자신의 친형제나 친자매 역시 진리에 영향을 미칠 수 없다. 영적인 일에서 인간관계를 개입시키는 사람은 진리에 절대적일 수 없다. 인간관계가 영적인 일에 개입되면 그로 인해 하나님의 말씀이나 명령이 감소된다. 이것이 바로 진리에 대하여 절대적이지 않은 것이다.
하나님의 종들은 하나님께서 성경에 규정하시고 명령하신 많은 것들을 널리 전파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들이 우리의 부족함과 우리의 무능함을 낱낱이 드러내는 것을 싫어한다. 그러나 만일 하나님의 종 자신이 할 수 없고 지킬 수 없다고 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지 않는다면, 그는 하나님의 종이 될 수 없다. 왜 그런가? 진리는 절대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의 표준을 우리의 표준과 조화(調和)시키기 위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낮출 수는 없다. 사람은 결코 사람이 할 수 없다는 이유로 하나님의 말씀을 변개시킬 수 없다. 이것이 진리의 절대성이다. 당신은 당신 자신과 개인적인 감정을 초월하고, 당신의 인간관계를 초월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야 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종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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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소이다. 하나님의 표준을 아내나 남편이나 자녀들에게 적용시킬 때 당신은 결코 완화시켜 적용하려 하고 다른 형제자매들에게만 그 표준을 지키라고 해서는 안 된다.
진리는 절대적인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분의 진리의 절대성을 유지할 것을 요구하신다. 하나님의 말씀은 이렇게 절대적인 것이므로 그가 누구이든지 상관하지 않고 진리의 절대성을 지켜서 적용해야 한다. 그가 나와 특별한 관계가 있다고 해서 진리의 표준을 낮추어서 적용해서는 안 된다. 만일 당신이 어떤 특별한 관계를 고려하여 그에게 진리를 적용시킨다면, 당신은 하나님의 진리를 낮추게 된다. 이것은 당신이 말한 것이 모두 진리가 아니라는 말이 아니라 당신이 진리에 대해 절대적이지 못하다는 말이다. 우리는 진리의 절대성을 유지하기를 배워야 한다. 우리는 어떤 사람이 우리의 친척이라고 해서 진리의 절대성에 영향을 줄 수 없다. 우리는 사람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진리를 따르는 것이고, 진리의 절대성을 유지하는 것이다.
오늘날 교회에서 많은 어려운 문제가 발생하는 것은 그리스도인들이 진리를 희생시키기 때문이다. 어느 지방 교회에는 이러한 분열이 있었다. 어떤 한 형제가, “나는 본래 당신들과 나뉠 뜻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어제 저녁의 일을 당신들이 내게 알리지 않았으므로 오늘 나는 당신들과 함께 있을 수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진리는 절대적인 것이다. 만일 나누어져야 할 것이라면 어제 저녁에 연락이 왔더라도 나누어질 것이고, 만일 나누어질 것이 아니라면 어제 저녁에 연락이 오지 않았어도 나누어지지 않는다. 만일 그가 진리에 대해 절대적이라면, 그는 어제 저녁에 연락이 왔는가의 여부를 상관하지 않을 것이다. 만일 나누어지는 여부를 통보가 왔는가에 근거를 둔다면, 이것은 사람을 진리 위에 두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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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지방의 한 형제는 따로 떡을 떼고 주님의 상을 세웠는데, 그 이유는 그가 집회 가운데 어떤 형제에게 질문을 하였는데 그가 답변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만일 당신이 떠나는 것이 옳다면, 당신은 좀더 일찍 나가서 따로 떡을 떼야 한다. 만약 떠나는 것이 옳지 않다면, 한 형제가 당신의 질문에 답변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떠날 수는 없다. 이것이 진리에 대하여 절대적인 것이다. 만일 따로 떡을 떼는 것이 진리라면, 당신을 머물게 하고 나 또한 따로 떡을 떼야 한다. 만일 따로 떡을 떼는 것이 진리가 아니라면, 당신이 나에게 잘못을 범했을지라도 나는 따로 떡을 떼서는 안 된다. 형제자매여, 당신은 보았는가? 이러한 자아의 뿌리가 뽑혀야만 비로소 하나님을 위해 봉사할 수 있다. 당신이 교만하고 이기적이어서 마땅히 다른 사람에게서 어떠한 대우를 받아야만 하나님의 말씀을 지킬 수 있다고 여긴다면, 당신 자신이 하나님의 진리보다도 더욱 크고 중요하다는 말이 된다.
이렇다면 당신은 하나님을 섬길 수 없다. 하나님을 섬기는 길에 있어서 우리는 절대적으로 우리 자신을 버려야 한다. 우리 자신이 기쁘거나 기쁘지 않거나, 우리 자신이 상처를 받거나 받지 않거나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사람들이 우리를 대하는 태도가 어떠할지라도 우리는 진리에 대하여 절대적이어야 하며, 심히 큰 고통을 느낄지라도 진리에 견고히 서야 한다. 사람들이 우리를 극히 나쁘게 대하고 경시하여도, 우리를 한 푼어치의 값어치도 없는 사람으로 볼지라도 우리는 여전히 진리에 견고해야 한다. 당신은 하나님의 진리가 당신의 감정을 좇아가게 해서는 안 된다. 사람은 실제로 너무도 담대해져서 항상 하나님의 진리가 자신을 좇아가게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진리의 영광을 보아야 하며, 이 안에 자신의 감정을 끌어들여서는 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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된다. 나 자신을 하나님의 진리와 비교할 때, ‘나’라는 존재는 진리보다 작은 것이 아니라 아예 ‘나’라는 존재는 없는 것이다. 당신이 자신을 진리 속에 조금만 개입시켜도 즉시 문제가 생기게 된다.
다시 하나의 예를 들어 보자. 한 형제가 밖에서 많은 말을 듣고 교회 안으로 들어온 뒤 매우 좋다고 표명했지만, 그는 하나님 앞에서 결코 어떤 진리도 만져 보지 못했으며 교회 가운데 몇몇 형제를 접촉했을 뿐이었다. 그는 행실에 있어서도 상당히 산만하였다. 교회 안의 한 형제가 그의 영적 상태를 알고서 그를 도와주고 싶은 마음에 그에게, “형제여, 당신의 요즈음의 행실은 너무나 풀어졌습니다.”라고 말했다. 그 형제는 많은 예를 들면서 진실로 사랑 안에서 참된 말을 하였다.
그러나 그는 이 말을 듣고서 밖으로 나가 많은 사람들이 이 모임을 반대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라며 그 또한 반대해야 한다고 비방했다. 그는 진리에 대하여 절대적이지 않았다. 만일 그가 진리에 대하여 절대적이라면, 어떤 사람이 그를 책망한다 하여도 그는 여전히 그러한 훈계를 받아들이며 교회 생활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진리에 대하여 절대적이지 못하였기 때문에 책망을 받자마자 태도가 바뀌었던 것이다.
진리에 대해 절대적이란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감정을 돌아보지 않는 것이며, 인간관계를 고려하지 않는 것이며, 자기 자신을 위하지 않는 것이다. 진리는 절대적인 것이다. 그 안에는 개인의 감정이나 인간적인 관계나 개인의 체험이나 당한 환경이 존재하지 않는다. 진리는 절대적이어서 옳으면 옳고 틀리면 틀린 것이다. 예전에 많은 사람을 이끌어 본 경험이 있는 한 형제가 교회의 간증의 길을 걸어가게 되었다. 이 길이 옳은 것은 이 형제가 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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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문에 옳은 것이 아니다. 만일 이 길이 옳지 않은 길이라면 이 형제가 간다고 해도 길이 올바르게 되지는 않는다. 길의 옳고 틀림은 이 형제와는 전혀 관계가 없다. 이 형제가 훗날 실족할지라도 그가 택한 이 길은 옳은 것이다. 왜 그런가? 진리는 절대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의 눈은 오직 이 형제만을 바라볼 뿐이어서 이 형제가 옳다고 생각되면 그가 가는 길 또한 옳은 것이며, 이 형제가 옳지 않다면 그가 택한 길 또한 잘못된 것으로 여긴다. 이렇다면 그들은 진리를 보는 것인가, 아니면 사람을 보는 것인가? 이것은 사람이 결코 무책임할 수 없으며 반드시 하나님의 간증이 사실이라는 것을 지켜야 함을 말하고 있다. 한 면에서 볼 때, 이 길이 옳은지 그른지의 판단 근거는 진리에 있는 것이지 결코 사람에게 있는 것이 아니다. 몇몇의 다른 그리스도인이 범죄한다고 해서 우리도 그리스도인이 아니라고 할 수 있는가? 다른 하나님의 자녀가 실족한다고 해서 우리도 그리스도인이 아니라고 할 수 있는가? 많은 하나님의 자녀가 좋지 않다고 해서 우리가 주님을 믿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는가? 분명하게 말하건대, 그렇지 않다. 형제자매여, 진리는 절대적인 것이다. 많은 그리스도인이 실족할지라도 주님을 믿어야 하는 것이라면 우리는 여전히 믿어야 한다. 많은 하나님의 자녀가 범죄할지라도 우리는 여전히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야 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자녀가 죄를 지어도 되며 그리스도인이 실족하여도 된다는 말이 아니라, 진리가 절대적인 것임을 말하는 것이다. 주님을 믿어야 한다면, 다른 사람이 모두 믿지 않을지라도 우리는 여전히 믿어야 한다. 다른 그리스도인이 모두 실족할지라도 우리는 여전히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한다. 문제는 다른 사람이 어떠한가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라 이것이 진리인가 아닌가에 달려 있다. 교회 안에 분쟁과 사역상의 어려움과 사역의 많은 다툼들에 있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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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인간적인 관계나 개인적인 감정 혹은 개인적인 문제가 다 제거된다면, 이러한 것들은 멈추어질 것이다.
그러므로 진리에 대하여 절대적인 것은 작은 문제가 아니며 대충 넘어갈 문제가 아니다. 당신이 이 문제를 느슨하게 풀어 놓는다면, 무슨 일이나 다 느슨하게 할 것이다. 진리를 고수하기 위해서는 자신을 완전히 내려놓아야 한다. 당신이 하나님 앞에서 이러한 마음과 습관이 없다면 조만간 당신은 문제에 봉착하게 될 것이다. 어떤 형제는, “나를 교회로 인도하신 주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나는 여기에서 많은 도움을 얻었습니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러한 말이 결코 그가 진리에 대하여 절대적이며 문제가 없다는 뜻이 아니다. 그는 그 지방에 대해 애착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일단 그의 마음에 맞지 않는 일이 닥치면, 아마 그는 이곳이 옳지 않다고 느낄지도 모른다. 진리는 절대적이어서 옳으면 옳고 틀리면 틀린 것이다. 나에게 잘 대해 주면 옳고 나에게 잘 대해 주지 않으면 틀리다고 해서는 안 된다. 만약 그가 다른 사람이 그를 어떻게 대우해 주는가에 따라서 이곳 교회가 옳은지 그른지를 단정한다면, 그는 아마도 전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이 아니겠는가! 그에게는 진리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자신만이 가장 중요하다. 그는 진리에 대하여 절대적이지 않다. 많은 때에 어려움은 여기에서 발생한다. 하나님은 우리가 어떤 일에 있어서나 자신을 한쪽에 제쳐 놓고 자신을 상관하지 않을 정도로 자신을 처리하기를 바라신다. 우리 개인의 감정과 선호, 우리가 상처를 받고 받지 않는 것 등은 문제되지 않는다. 우리 앞에 놓인 길은 결코 개인의 감정에 의해 영향을 받을 수 없다. 하나님께서 이것이 옳다고 말씀하시면 옳은 것이며 틀린 것이라고 말씀하시면 틀린 것이다. 만일 하나님께서 이 길이 옳다고 말씀하시면 다른 모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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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걸어가지 않는다 해도 나는 걸어가야 한다. 이 길이 아주 많은 사람들로 붐비기 때문에 가는 것이 아니요, 어떤 형제가 이 길을 걸어가기 때문에 걸어가는 것도 아니다. 만일 이 길이 옳은 길이라면, 어떤 형제가 가지 않는다 해도 나는 여전히 걸어가야 한다. 진리는 절대적인 것이어서 어떤 사람도 우리에게 영향을 미칠 수가 없다. 만일 당신이 사람의 영향을 받는다면, 당신은 사람을 진리보다 더 크게 보는 것이다.
심판은 우리 개인에 근거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에 근거한 것이다. 심판의 근거가 우리 개인으로 바뀐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길과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시키게 된다. 심판의 근거는 하나님의 말씀이며, 진리이다. 사람이 당신에게 잘 대해 준다고 해서 이렇게 하고 잘못 대해 준다고 해서 저렇게 해서는 안 된다. 어떤 일에 대하여 우리는 이것이 하나님의 진리인지 아닌지를 보아야 하며, 우리 개인의 감정이 어떤지를 보아서는 안 된다. 개인적인 일이나 감정이 사역 안에 개입되어서는 안 된다. 만일 진리가 우리에게 교제를 끊어야 한다고 말한다면, 우리에게 좋은 친구일지라도 교제를 끊어야 한다. 비록 함께 음식을 먹고 생활하는 사이라 할지라도 진리가 절대적이어서 교제를 끊어야 한다고 하면, 여기에 사람의 사사로운 정이 개입되어서는 안 된다. 만일 진리가 우리에게 교제를 끊어서는 안 된다고 말하면, 우리는 비록 매일 다투고 마찰하는 사이일지라도 교제를 단절해서는 안 된다. 만일 우리의 인간적인 관계로만 교제한다면, 우리는 근본적으로 진리가 무엇인지를 모르는 것이며, 우리 앞에 놓인 사역의 길을 잘 갈 수 없다.
형제자매여, 이것은 기본적인 문제이다. 당신 앞에 놓인 사역의 길은 당신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다루심을 받은 것과 큰 관계가 있다. 만일 당신이 자신을 아주 크고 아주 중요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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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로 여긴다면, 진리는 당신 때문에 손실을 입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진리를 유지하고자 한다면, 당신은 자신을 비우고 내려놓아야 한다. 모든 사람은 저마다의 기질을 가지고 있으며 저마다의 느낌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결코 자신의 기질이나 감정에 의지하여 하나님의 진리에 영향을 미칠 수 없다. 어떤 사역자도 하나님의 진리를 희생시킬 수 없고, 자신의 감정의 편안함을 위하여 진리를 왜곡시킬 수 없다. 만일 당신이 하나님의 진리를 그렇게 낮게 본다면, 당신은 하나님 앞에서 영적인 길을 갈 수 없다. 세상 법정에서도 법관의 재판은 법률에 대하여 절대적이다. 죄가 있으면 있는 것이고 없으면 없는 것이다. 누가 내 형제이기 때문에, 혹은 내 친구이기 때문에 범한 죄를 없이할 수 없다. 만일 사적인 감정을 법정 판결에 적용시킨다면, 그것은 참으로 큰 문제다. 법률은 절대적이어서 개인의 감정이 결코 그 안에 개입될 수 없다. 판사의 원수가 재판을 받고 있다 하더라도, 법으로 무죄이면 판사는 무죄 선고를 해야지 결코 사적인 감정으로 유죄 판결을 내릴 수는 없다. 판사는 법률을 지켜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을 섬긴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진리를 견지해야 한다. 개인의 감정은 결코 진리 안에 개입될 수 없다. 우리는 이 일을 명심해야 하며 모든 사람의 감정은 진리 속에서 배제되어야 한다. 우리는 모두 처리받아야 하며 주님께 이렇게 말해야 한다. “주여,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당신의 진리만이 절대적인 것입니다.” 이렇게 된다면, 사역에 있어서의 어떤 분쟁이나 어려움도 없게 된다. 함께 사역하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진리의 절대성을 유지할 때, 사역자들 사이에 서로 말하기가 쉬워지고 함께 일을 하기도 쉬워지는 장점이 있다. 만일 어떤 일을 이렇게 처리해야 한다면 그대로 실행하면 되고, 인도하는 형제의 심중이 어떨 것인지 고려할 필요가 없다. 만일 우리 모두가 진리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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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성을 본다면, 오직 주의할 한 가지 일은 이것이 하나님의 뜻인가 아닌가 또 하나님께서 이렇게 규정하셨는가이다. 만일 하나님께서 규정하신 것이고 하나님의 뜻이라면 꺼릴 필요가 없다. 만일 우리가 진리의 절대성을 보지 못한다면, 우리의 길은 그리 좋지 못할 것이다. 어떤 일이 발생했을 때 만일 우리가 거기서, ‘왕 형제는 어떻게 생각할까, 주 형제는 어떻게 생각할까, 또 유 형제는 어떻게 생각할까? 그들 세 사람은 서로 다른 기질을 가지고 있는데 어떻게 조화를 이루어야 하는가?’를 곰곰이 생각한다면, 그것은 크게 잘못된 것이며 진리는 우리 때문에 큰 손실을 입게 된다. 만일 그렇게 한다면, 다른 사람의 비난을 두려워하여 감히 할 말을 하지 못하고 많은 일을 규정할 수도 없게 된다. 이렇게 한다면, 우리 가운데 문제가 발생하게 된다. 만일 한 단체 안에 하나님의 진리만이 있고 사람의 수단이 없다면, 그 단체는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단체이다. 만일 한 단체가 수단과 수완을 쓰지 않고 사람의 방법으로 타협하여 조화를 이루려고 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바라보며 어떤 일을 행한다면, 그 단체는 실로 축복을 받은 단체이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진리의 절대성을 지키며 사역의 길을 걸어갈 때에는 마땅히 동역자들 사이에 해야 할 말을 할 수 있고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할 수 있게 된다. 그렇지 않으면 거리낌이 있게 되고 수단을 쓰게 되며 배반이 있게 된다. 그러면 그것은 교회가 아니다.
이것은 아주 큰 문제이고 상당히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에 우리는 이러한 일들을 하나님 앞에서 잘 처리해야 한다. 개인적인 느낌이나 감정이 결코 사역 안으로 들어와서는 안 된다. 당신 개인의 감정은 다른 사람이 진리를 받아들이는 데에 영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에 절대로 사역 안으로 가져와서는 안 된다. 오늘 당신이 손님을 초대하였는데 당신의 감정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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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하여 그가 진리를 받아들이는 데에 영향을 주었다면 그것은 잘못된 것이다. 진리는 절대적인 것이다. 당신이 진리를 돕고자 한다면, 이 마음은 아주 훌륭한 것이다. 그러나 진리는 사람의 손으로 붙들 필요가 없는 것임을 우리는 안다. 왜냐하면 진리는 그 자체가 지위와 권위와 능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진리가 거절당할 것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더 나아가서 하나님의 진리를 존중하기를 배워야 하며, 진리의 길에서 하나님의 진리를 조금이라도 낮추지 않고 이 길을 걸어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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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의 일을 하는 사람이 주의해야 할 또 다른 한 가지는 자신의 몸을 돌보는 일이다. 우리가 아는 바와 같이 바울은 매우 큰 은사를 받은 형제였으며 항상 기도로 다른 사람의 병을 치료하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가 치료할 수 없는 병을 가진 세 사람을 말하고 있는데 첫 번째 사람은 드로비모이고, 또 한 사람은 디모데이며, 세 번째 사람은 그 자신이다. 드로비모가 병이 났을 때 바울은 기도나 은사로 그를 치료하지 않았다. 바울은 도리어, “드로비모는 병듦으로 밀레도에 두었노니”(딤후 4:20)라고 말하였다. 그는 디모데에게, “이제부터는 물만 마시지 말고 네 비위와 자주 나는 병을 인하여 포도주를 조금씩 쓰라”(딤전 5:23)고 말하였다. 바울은 은사와 기도로 하나님께 간구하여 그를 치료한 것이 아니다. 바울은 다른 사람의 병은 모두 고쳤는데 왜 디모데는 치료할 수 없었는가? 디모데는 바울의 사역을 이어받았으며 사역에서 크게 쓰임받았다. 그러나 바울은 디모데의 병을 치료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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않았다. 이 일은 하나님의 손에 달린 것이었지 바울의 손에 있지 않았다. 바울은 어떻게 말하고 있는가? “이제부터는 물만 마시지 말고 … 포도주를 조금씩 쓰라”(딤전 5:23). 바꾸어 말하면, 디모데는 스스로 자기 자신을 돌보아야 했다. 그는 자기에게 도움이 되는 것을 먹어야 했고, 유익이 없는 것은 먹지 말아야 했으며, 위에 심한 고통을 주는 것은 먹지 말고 위의 고통을 줄일 수 있는 것을 먹어야 했다. 이것은 바울이 디모데에게 한 말이다. 바울은 자신에 대해서도 스스로 말하고 있다. 그는 육체에 가시가 있어 일찍이 이 일로 세 번 주님께 간구한 적이 있다. 그러나 주님은 그를 치료하지 않으시고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고후 12:9)라고 말씀하셨다. 드로비모의 병과 디모데의 병은 그대로 있었으며 바울 자신도 자기 몸에 가시가 여전히 있었지만 그는 자기의 병을 치료하지 않았다. 바울의 몸에 물론 암초 같은 가시가 있었지만 그 배는 여전히 항해해 나아갔다. 암초가 비록 제거되지 않고 병이 여전히 그 안에 있었지만, 하나님은 물을 불어나게 하셔서 배가 암초 위를 항해하여 지나가게 하셨으며 암초는 더 이상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이것이 바로 바울 자신이다.
형제자매여!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훈련을 받아 유용하게 쓰이려면 10년이나 20년은 필요하다. 참되게 이 길을 잘 가고 하나님 앞에 매우 노련한 자가 되고자 한다면 당신에게 10년이나 20년이 필요하다. 그러나 자기의 건강을 돌볼 줄 모르는 사람은 때가 되기도 전에 세상을 떠날지 모른다. 이것은 정말로 애석한 일이다. 어떤 사람이 진정으로 주님의 사역의 길을 걸어가고자 한다면, 아마도 하나님 앞에서 20년이나 30년이란 세월이 지나야 이 길을 진실로 만질 수 있고, 그에게 가장 유용한 때가 될 것이다.
교회 안에는 아이들과 청년들만 있어서는 안 되며 아비들도 있어야 한다. 이러한 까닭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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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섬기기를 배우는 사람들은 언제나 이러한 점을 생각해야 한다. 형제나 자매는 상당한 시일 동안 노력해야 하나님께 유용한 그릇이 될 수 있는데, 만일 나이가 들기도 전에 죽어 버린다면, 그것은 얼마나 애석한 일인가! 많은 사람들이 사역의 노정에서 반쯤 가다 망가지고 쓰러지게 되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이것은 예레미야가 도공(陶工)의 손에서 부서진다고 말한 것처럼 참으로 애석한 일이다. 도자기를 만들 때 도공이 만든 도자기라서 다 흠이 없이 아름다운 것은 아니다. 그래서 도공이 만들어 낸 질그릇 중에 어떤 것은 불을 통과하기도 전에 깨뜨려지는데 이것은 하나의 손실이다. 시련이 닥쳤을 때 좌절하고 시험이 임할 때 쓰러진다면 교회는 많은 사람들을 잃게 된다. 우리가 만일 긍휼을 입는다면 무너지지 않고 중도에 쓰러지지 않을 것이다. 주님은 우리가 십자가를 거치게 하심으로 우리를 더 유용한 그릇으로 만들고자 하실 것이다. 주님이 우리에게 첫 번째 연단을 거치게 하실 때 많은 시간들이 요구된다. 어떤 시련은 일 년을 통과해야 하고 또 어떤 시련은 몇 년이 지나야 비로소 공과를 배울 수 있다.
하나님의 자녀가 일생 동안 거칠 수 있는 시련은 그렇게 많지 않다. 우리 가운데에는 시련을 통과하는 사람이 별로 많지 않다. 많은 사람들이 시련을 받자마자 부서져 버린다. 이렇게 되면 그에게 닥친 시련들은 그에게 효과를 줄 수가 없게 되니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그것은 정말 큰 손실이다. 1년이 지나고 또 1년이 지나고 5년이나 10년을 보내면서 이러한 시련들을 통과하여 하나님의 사역의 길로 계속 인도되는 하나님의 자녀는 얼마나 되는가? 많지 않다. 이 문제를 간단하다고 생각지 말라. 노정에서 반쯤 달리다가 쓰러지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60만 명 중 오직 두 사람만이 살아서 가나안에 들어갔다. 또한 두 사람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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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어서 가나안으로 들어갔다. 너무나 소수의 사람만이 쓰러지지 않고 사역의 길로 인도될 수 있다. 시련이 닥치면 대부분 죽어 버리니 얼마나 가련한가! 시련이 닥치면 대부분이 세상을 떠나 버리다니! 만일 주님께서 우리에게 조금 일찍 세상을 떠나라고 하신다면, 우리에게는 할 말이 없다. 만일 우리가 자신의 건강을 잃어버린다면, 이것은 하나님의 사역에 큰 손실이 있다.
교회가 풍성해지려면 우리 중에 70세나 80세 혹은 90세의 형제가 있어야 한다. 만일 주님께서 한두 사람을 예외적으로 좀더 일찍 그분 곁으로 오도록 정하셨다면, 우리는 할 말이 없다. 그러나 우리가 사역에 있어서 유용하게 되려면 좀더 노력을 기울여 자기 몸을 돌보아야 하며, 결코 이 일을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사역에 있어서 큰 문제점은, 주님께 훈련을 거의 다 받은 후에 오히려 건강 때문에 세상을 떠나게 된다는 것이다. 훈련을 거의 다 통과한 사람이 쓰러진다는 것은 정말 슬픈 일이다. 만일 주님의 사역자가 이렇다면 사역을 할 길이 없다. 사역에 이르기도 전에 몸의 건강이 이미 나빠졌다면, 사역에 있어 유용하게 쓰이기 시작할 때에 오히려 세상을 떠나야 한다면, 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그러므로 몸에 대해 소홀히 해도 괜찮다고 생각지 말라. 우리에게는 고난 받을 마음가짐이 있어야 하며, 우리 몸을 쳐서 자신에게 복종케 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러나 할 수만 있다면 우리는 또한 자신의 건강을 돌보아야 한다. 몸을 느슨하게 풀어 놓는 것은 쉬운 일이지만 몸을 돌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우리는 몸에 유익한 많은 음식을 먹기를 배워야 하며, 자신의 건강을 돌볼 방법을 생각하기를 배워야 한다. 많은 경우 주님께서 명령하시고 사역에 있어 필요할 때에 목숨 걸고 달려 나가야 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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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알고 있는 방법으로 자신의 몸을 돌보기를 배워야 한다. 한 사람을 잃는 것은 주님 편에서 10년이나 20년의 시간을 잃어버리는 것이라는 것을 우리는 명심해야 한다. 일생 중에 10년이나 20년이 여러 번 있는 것이 아니다. 많은 사람이 주님을 섬기기 시작할 때에는 비록 은사적인 면에서는 유용함이 좀 있을지 모르지만 실제적으로 사역적인 면에서 유용하기란 실로 어렵다. 사역 방면에서 유용해지는 것은 10년이나 20년이 지난 후의 일이다. 아마도 10년 후에야 진정으로 가치 있게 되고 유용하게 될 것이다. 사실, 유용한 그릇으로 쓰이는 것은 10년이나 20년 후의 일이다. 이것은 또한 딴 길로 가지 않고 길을 똑바로 가는 사람에게 해당되는 말이다. 길을 똑바로 가지 않는다면, 10년이나 20년이 지나도 할 수가 없다. 20년 동안 한 사람을 키운다는 것은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20년 동안 그를 깎고 다듬으셔야 비로소 그가 유용하게 쓰일 수 있다. 단지 1년이나 2년이 아니라 아주 오랜 시간을 통과해야 한다. 20년의 고통을 이기며, 20년의 십자가를 지고, 20년의 처리받음과 매맞음을 통과하며 하나님의 손 안에서 다듬어져야 비로소 진실로 유용한 그릇이 될 수 있다. 이것은 정말로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만일 건강에 대해 조심하지 않으면 진실로 유용하게 쓰여야 할 때 정작 쓸 수 없게 된다. 이것은 너무 애석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어떤 사람이 나이 드신 한 형제님에게 다음과 같이 질문했다. “당신은 일생 중에 가장 유용하게 쓰임받은 때가 언제였다고 회상하십니까?” 그 형제님은 잠시 생각하고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70세에서 80세 때이지.” 정말로 영적인 유용성은 나이가 들면 들수록 더 많아지게 된다. 당신이 하나님을 섬기는 길에 있어서 오래 되면 오래 될수록 더 유용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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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역의 길에서 어떤 사람은 끝나고, 어떤 사람은 쓰러지고, 어떤 사람은 부서졌으며, 어떤 사람은 유익성이 극히 제한적이다. 소수의 열매 있는 사람들은 20년이나 30년이 지난 후에 유용하게 쓰이게 되었지만 그때에 또 세상을 떠나버린다. 유용하게 쓰임받게 될 때에 죽는 것은 얼마나 애석한 일인지!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배움의 기간이 길면 길수록 더 유용하다. 만일 이렇게 유용하게 된 사람이 세상을 떠난다면, 그것은 얼마나 애석한 일인가! 그러므로 몸의 건강에 대해 우리는 마땅히 예방할 것을 예방하고 주의할 것을 주의해야 한다. 우리는 고난 받을 마음가짐이 꼭 필요하다는 것을 인정하며 그렇게 무장되어야 한다. 그래서 많은 때에 가장 큰 어려움이 닥쳐도 우리는 그 가운데에서 전진하며 사역을 수행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가능한 환경에 있을 때에 우리는 또한 자신의 몸을 돌보기를 배워야 하며, 이 일에 결코 느슨하거나 소홀히 할 수 없다.
그러므로 사역자는 음식을 먹을 때에 맛이 좋은가의 여부를 주의할 것이 아니라 영양이 충분한지 어떤지를 주의해야 한다. 영양가에 따라 섭취량을 조절해야 한다. 휴식할 때는 반드시 쉬기를 배워야 한다. 만일 긴장할 때가 아주 많다면 어떻게 쉬어야 할지 몰라서 침대에 그냥 누워 있게 되는데 이것은 좋지 않다. 침대에 누워 있으면서 여전히 긴장하고 있다면 이러한 수면이 도움이 되겠는가? 전혀 도움이 안 된다. 때때로 우리는 거기서 쉬며 앉아 있어야 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심하게 긴장하면 쉴 수가 없기 때문에 앉아 있어도 휴식이 되지 않는다. 주의 일을 하는 사람은 긴장해야 할 때에는 긴장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때에 따라 불타오르는 것보다 더 심하게 긴장해야 한다. 그러나 몇 분 정도는 여유를 가지고 자기 자신의 긴장을 풀 줄도 알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일생이 긴장의 연속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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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어서 지탱해 나갈 수 없게 된다. 우리는 쉬는 것도 배워야 한다.
형제자매여, 좀 한가할 때에 당신은 긴장을 풀어 놓기도 해야 한다. 당신이 잠잘 때에는 손발을 편하게 해야 한다. 우리가 조여 맬 필요가 있을 때에는 가장 강한 사람보다도 더 조여 매어 우리 몸이 말을 듣게 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 일생이 온통 긴장의 연속일 수는 없다. 많은 때에 근육이나 신경을 풀어 놓아 휴식을 취하게 해야 한다. 많은 때에 기회를 찾아 휴식을 취해야만 균형 잡힌 생활을 할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지나치게 많은 일을 하게 되어 극단에 치우치게 된다. 우리는 극단적으로 일을 하는 사람들이 아니다. 형제자매여, 당신은 육신의 몸에 있어서 하나님을 앙망하고, 천연적인 면에 있어서 휴식하기를 배워야 한다. 이것은 기본적인 공과이다. 우리는 어떻게 휴식할지를 배워야 한다. 당신이 긴장을 풀 수 있다면 쉽게 휴식을 취하고 잠을 자게 될 것이다. 어떤 사람의 경험에 비추어 볼 때, 호흡의 횟수를 세는 것은 잠자는 데에 도움을 줄 수 있다. 잠잘 때의 호흡은 아주 깊다. 우리가 잠자는 것을 관리하기는 쉽지 않지만 호흡은 다스릴 수 있다. 우리는 호흡을 셀 수 있다. 이것은 빠른 호흡이 아니라 긴 호흡으로서 잠잘 때와 같이 그런 깊은 호흡을 먼저 해야 한다. 잠자는 것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호흡을 생각하는 것이며 호흡을 세는 것이다. 먼저, 잠잘 때와 같은 그런 긴 호흡을 하고 나면 잠이 든다. 많은 사람들은 이 방법으로 잠이 든다. 본래 잠잘 때의 호흡은 느리며 깊다. 당신이 먼저 느리고 깊게 호흡한 후에는 쉽게 잠이 든다. 호흡을 센다는 말은 숨을 이백 번이나 삼백 번 반드시 세고 나서야 잠을 잘 수 있다는 말이 아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사람이 잠을 잘 수 있도록 만드셨다는 것을 믿는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율을 또한 믿는다. 하나님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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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머리를 잠잘 수 있는 머리로 만드셨으므로 우리는 반드시 자야 한다. 당신이 거기에 누워서 당신의 온몸을 편안하게 풀어 놓고서 휴식을 취할 수 있는지를 시험해 보라. 만일 당신이 쉴 수 없다면, 당신은 긴장할 수밖에 없다. 밤낮으로 항상 긴장해 있다면 당신은 많은 일을 할 수가 없다. 비록 우리에게 병이 있다 해도 우리가 조금만 자기의 몸을 돌보기를 배운다면, 많은 번거로움을 제할 수 있다.
무엇을 먹는 것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과식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그러나 편식을 하지 말고 각종 음식을 먹을 수 있기를 배워야 한다. 어떤 형제나 자매는 이것도 못 먹고 저것도 못 먹고 하여 먹지 못하는 것이 너무나 많다. 이러한 습관은 유익이 전혀 없다. 우리는 음식을 가리지 않고 먹기를 배워야 한다. 많은 것들이 우리에게 영양을 공급하는데 당신이 단지 몇 종류의 것만을 먹는다면, 그것은 아주 곤란하다. 그 당시에는 영양분의 결핍을 느낄 수 없을지 모르지만 30세나 40세가 되면 많은 영양의 결핍이 드러나게 되며, 이것은 신체의 건강에도 영향을 미쳐서 수명을 단축시킬 수도 있다. 우리의 수명은 먹는 것의 영향을 받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음식을 가리지 말고 골고루 먹기를 배워야 한다. 음식을 가리지 않고 먹는 것은 사역하러 나갔을 때 아주 큰 도움이 된다. 당신이 음식을 가려먹게 되면 사역하러 나갈 때 음식을 가지고 가면 먹을 수 있지만 가지고 가지 않으면 먹을 수가 없게 된다. 어떤 것은 너무 차서 못 먹고 또 어떤 것은 너무 뜨거워서 먹을 수가 없다면, 이것은 참으로 곤란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병이 있다는 것은 또 다른 문제다. 보통 상황에서 많은 종류의 음식 먹기를 배워야 한다. 주님께서는 “너희 앞에 차려 놓는 것을 먹고”(눅 10:8)라고 말씀하셨다. 이것이 아주 좋은 원칙이다. 한번은 배 위에서 한 믿는 이가 다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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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는 이에게 물었다. “왜, 주님은 떡과 물고기를 가지고 이적을 행하셨습니까?” 그러자 그 믿는 이는, “그것은 바다 속의 풍성함과 육지 위의 풍성함을 더한 것입니다.”라고 답변했다. 이 답변은 아주 좋다. 하나님의 자녀는 바다 속의 풍성과 땅 위의 풍성을 다 먹을 수 있기를 배워야 한다. 우리가 먹는 것은 범위도 없어야 하며 종류도 다양해야 좋다. 형제자매여, 당신은 이 일이 중요치 않다고 생각지 말라. 만일 당신이 이 일에 있어서 몸을 제한하지 않고 처리하지 않는다면, 당신의 몸은 손실을 입게 된다. 당신은 자신의 몸이 말을 듣도록 복종시켜야 한다. 비록 처음에는 어려움이 있고 어떤 것을 먹기 싫어하겠지만 당신은 그것을 처리해야 하며 반드시 먹기를 배워야 한다. 한편으로 당신은 고난 받을 마음가짐을 가져야 하지만, 또 다른 면에 있어서 자기의 몸을 돌보기를 배워야 한다. 우리는 고난을 받을 수 있으며 그 고난을 받을 때에 우리의 온 존재는 필사적으로 그것을 헤쳐 나갈 수 있어야 한다. 어떤 형제는 이러한 고통 저러한 고통을 받을 수 없어 두려워한다. 이러한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별로 쓸모가 없다. 그러나 한 면에서 우리는 자기 몸을 돌보지 않는 형제에게 어떤 동정도 표할 수 없다. 형제자매여, 위생적이 되는 것이 쉽지 않다. 그러므로 위생을 말하는 것이 간단한 일이라고 여기지 말라. 자신의 몸을 돌보기 위해서는 스스로 자기 자신을 관리하기를 배워야 한다. 자기 자신을 제한할 수 있어야만 위생적일 수 있다. 우리는 유익한 것을 먹기를 배워야 한다. 어떤 것을 먹는 것은 당신의 입맛에 지배를 받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당신 몸의 필요의 지배를 받아야 한다. 자기 몸을 돌보기를 배우려면, 우리는 먹는 것을 잘 이용해야 한다. 우리는 결코 우리의 몸이 쉽게 편식주의에 빠지게 해서는 안 된다. 주님이 당신을 훈련시키시는 데에 여러 해를 소비하셨으므로 이 몸을 제멋대로 다루어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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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코 안 된다. 질병을 예방하는 많은 위생적인 일들에 대해서도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주님께서 신체에 유익한 것들을 우리 주위 환경에 잘 안배해 놓으셨기 때문에 우리는 힘을 다해서 위생적일 필요가 있다. 제멋대로 모험을 하는 것은 좋지 않다. 디모데는 당시에 유익함이 있었기 때문에 포도주를 조금씩 마셨다. 해로운 것은 마셔서는 안 되었으며 유익한 것은 마셔야만 했다. 이것은 원칙의 문제이다. 한 면으로 우리는 자신을 사랑하지 않고 죽기까지 충성하기를 배워야 한다. 그러나 또 한 면으로 주님께서 명령하지 않은 때에는 언제나 자신의 몸을 지켜야 한다. 당신이 어느 지방에 갔을 때에 힘을 다하여 자신의 위생 관리를 돌볼 수는 있지만 그러나 결코 그곳의 형제자매들에게 무거운 부담을 주어서는 안 된다. 위생 조건이 갖추어지지 않은 환경에서도 당신은 하나님을 신뢰하기를 배워야 한다. 그러나 환경 중에 좋은 안배가 있을 때에는 가능한 한 위생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당신의 몸이 말할 수 없는 손실을 입지 않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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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사역자가 주의해야 할 또 한 가지 방면은 생활 습관에 있어서 자기 견해를 고집하지 않기를 배워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종은 스스로 주관적인 표준을 규정할 수 없으며 자기 자신의 견해를 견지해 나가서도 안 되며 자신의 습관대로 일을 처리해서도 안 된다. 만일 우리가 주님을 잘 섬기고자 한다면, 성경의 교훈에 부합해야 하며 사람을 실족시키지 않는 원칙 아래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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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은 고린도전서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내가 모든 사람에게 자유하였으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유대인들에게는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나 율법 아래 있는 자 같이 된 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없는 자에게는 내가 하나님께는 율법 없는 자가 아니요 도리어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 있는 자나 율법 없는 자와 같이 된 것은 율법 없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라 약한 자들에게는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여러 사람에게 내가 여러 모양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몇 사람들을 구원코자 함이니”(고전 9:19-22). 바울은 복음을 위하여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양이 될 수 있었다. 이것은 주님을 섬기는 사람이 마땅히 가져야 할 성품이다.
바울은 또한 빌립보서 4장에서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12절)고 말했다. 사람은 편향적이기 쉽고 극단에 빠지기가 쉽다. 어떤 사람들은 그리스도인이 반드시 풍부해야 하고 배불러야만 된다고 생각한다. 이와는 정반대로 또 어떤 사람들은 그리스도인은 반드시 비천해야 하고 배고프며 궁핍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바울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나는 풍부에 처하여도 일을 할 수 있으며, 비천에 처하여도 할 수 있는 비결을 배웠다. 풍부이든 결핍이든 어떤 환경에서도 나는 일을 할 수 있다. 배부르거나 굶주릴 때에도 나는 일을 할 수 있다.” 바울은 이러한 모든 일에 있어서 비결을 배웠다. 그는 이어서,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13절)고 말한다. 바울은 생활 습관의 외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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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에 있어서 모든 것을 다 수용할 수 있었다.
애석하게도, 많은 형제자매들이 고집이 세며 일상생활에서 그들의 습관이 너무도 견고하여 깨뜨릴 수 없으며 조금도 고칠 수가 없다. 어떤 사람은 매일 매일 물을 데워서 세수하지 않으면 안 되고, 어떤 사람은 매일 매일 면도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나 만일 그들의 생활 방식을 따를 수 없는 환경에 부딪히면 그들은 참을 수 없다. 이러한 것들은 비록 아주 작은 일들이지만 오히려 주님의 일을 하는 데 있어서는 방해가 된다. 이러한 상태에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종이 될 수 없다. 주님의 일을 하는 사람은 결코 한쪽으로 치우쳐서는 안 된다. 더운 물이 있어도 세수를 할 수 있으며 또한 더운 물이 없어도 세수를 할 수 있어야 한다. 매일 매일 면도를 해도 괜찮고 며칠씩 면도를 하지 않아도 견딜 수 있어야 한다. 매일 매일 셔츠를 갈아 입어도 괜찮고 며칠 동안 갈아입을 수 없다 하더라도 견딜 수 있어야 한다. 부드러운 침대에서도 잘 수 있어야 하고 딱딱한 마룻바닥에서도 잘 수 있어야 한다. 각종 생활 환경 속에서 자연스럽게 그 환경에 적응할 수 있을 때라야 비로소 주의 일을 할 수 있다.
생활 습관뿐만 아니라 개성이나 연령이 주의 일을 하는 사람의 제한이 되어서는 안 된다. 예를 들어, 어떤 지방의 사람은 상당히 열정적이다. 또 어떤 지방의 사람들은 상당히 냉정하다. 하나님의 종은 이 두 종류의 서로 다른 사람들 속에서도 마땅히 똑같이 사역을 할 수 있어야 한다. 만일 그 자신의 성격이 냉정하여 그가 냉정한 사람 속에서는 사역을 잘할 수 있는데 열렬한 사람들을 만났을 때에 사역을 할 수 없다면, 그것은 옳지 않다. 어떠한 사람은 열렬한 사람에 대해서는 사역을 잘할 수 있는데 냉정한 사람에게는 사역을 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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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사람은 정중한 사람에게는 사역을 잘하는 데 경솔한 사람을 만나면 사역을 할 수가 없다. 그들은 이러한 것들에 의해 하나님의 사역을 제한받는다. 또 만일 어떤 형제가 나이 많은 형제들 사이에서는 말을 아주 잘할 수 있는데 어린아이나 청년들 속에서는 말을 할 수 없다면, 이러한 편향적인 성격 역시 하나님의 사역을 제한시킨다. 우리 주님은 연로한 사람들을 받아들이셨으며 또한 어린아이에게도 축복하셨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주님과 똑같이 나이 든 사람을 받아들일 수 있고 아이들에게도 축복할 수 있기를 요구하신다. 귀용 여사가 말한 것처럼, 사람이 완전히 하나님과 연합되었을 때라야 비로소 연장자의 모사(謀士)가 될 수 있으며 또한 어린아이의 친구가 될 수 있다. 이것이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이다.
형제자매여, 이것은 우리 자아가 처리받아야 할 문제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떠한 환경에 처하게 하시더라도, 그곳에 적응할 수 있을 때까지 우리의 자아는 깎여야 한다. 이렇게 될 때 우리는 자연히 고집 세지 않고 편협적이지 않게 된다. 바울은 하나님 앞에서 다룸을 받은 사람이었기 때문에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양의 사람이 될 수 있었다. 우리의 생활 습관이나 개성에 있어서 자기주장을 내세우지 않고 극단에 빠지지 않도록 하나님 앞에서 잘 배우고 다룸받음으로써 주님의 사역이 방해받지 않게 되기를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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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의 일을 하는 사람은 독신과 결혼 등에 대하여 정확한 인식이 있어야 되며 또한 이에 대한 적당한 해답이 있어야 한다. 이러한 문제는 많은 사람들이 말하기를 꺼려한다. 그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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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이 문제가 주님의 일꾼에게 상당히 중요하다는 것을 느낀다. 그러므로 성경의 교훈에 비추어서 이 문제를 살펴보기로 하자. 바울은 독신에 대한 문제를 고린도전서 7장에서 자세히 말하고 있다. “처녀에 대하여는 내가 주께 받은 계명이 없으되 주의 자비하심을 받아서 충성된 자가 되어 의견을 고하노니 내 생각에는 이것이 좋으니 곧 임박한 환난을 인하여 사람이 그냥 지내는 것이 좋으니라 네가 아내에게 매였느냐 놓이기를 구하지 말며 아내에게서 놓였느냐 아내를 구하지 말라 그러나 장가가도 죄 짓는 것이 아니요 처녀가 시집가도 죄 짓는 것이 아니로되 이런 이들은 육신에 고난이 있으리니 나는 너희를 아끼노라 형제들아 내가 이 말을 하노니 때가 단축하여진 고로 이후부터 아내 있는 자들은 없는 자같이 하며 우는 자들은 울지 않는 자같이 하며 기쁜 자들은 기쁘지 않은 자같이 하며 매매하는 자들은 없는 자 같이 하며 세상 물건을 쓰는 자들은 다 쓰지 못하는 자같이 하라 이 세상의 형적은 지나감이니라 너희가 염려 없기를 원하노라 장가가지 않은 자는 주의 일을 염려하여 어찌하여야 주를 기쁘시게 할까 하되 장가간 자는 세상 일을 염려하여 어찌하여야 아내를 기쁘게 할꼬 하여 마음이 나누이며 시집가지 않은 자와 처녀는 주의 일을 염려하여 몸과 영을 다 거룩하게 하려 하되 시집간 자는 세상 일을 염려하여 어찌하여야 남편을 기쁘게 할꼬 하느니라 내가 이것을 말함은 너희의 유익을 위함이요 너희에게 올무를 놓으려 함이 아니니 오직 너희로 하여금 이치에 합하게 하여 분요함이 없이 주를 섬기게 하려 함이라”(고전 7:25-35). 여기에서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독신의 좋은 점이 주님을 섬기는 데 있어서 특별히 부지런할 수 있고 사역에 있어서 마음이 나뉘지 않고 전일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가정이 있는 사람이 따라올 수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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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 말씀은 모든 사람이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36절부터 주의하여 읽어 보자. “누가 자기의 처녀 딸에 대한 일이 이치에 합당치 못한 줄로 생각할 때에 혼기도 지나고 그같이 할 필요가 있거든 마음대로 하라 이것은 죄 짓는 것이 아니니 혼인하게 하라 그러나 그 마음을 굳게 하고 또 부득이한 일도 없고 자기 뜻대로 할 권리가 있어서 그 처녀 딸을 머물러 두기로 마음에 작정하여도 잘하는 것이니라 그러므로 처녀 딸을 시집보내는 자도 잘하거니와 시집보내지 아니하는 자가 더 잘하는 것이니라 아내가 그 남편의 살 동안에 매여 있다가 남편이 죽으면 자유하여 자기 뜻대로 시집갈 것이나 주 안에서만 할 것이니라 그러나 내 뜻에는 그냥 지내는 것이 더욱 복이 있으리로다 나도 또한 하나님의 영을 받은 줄로 생각하노라”(고전 7:36-40). 여기에서 말씀은 아주 분명하다. 만일 어떤 사람이 독신을 지키는 것이 이치에 맞지 않다고 여기고 혼기도 지나고 결혼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되면 그는 자기 뜻에 따라 결혼할 수 있다. 독신을 지키는 것과 결혼하는 것은 자기 자신이 규정해야 하는 것이지 다른 사람이 결정할 수 없는 것이다. 독신을 지키려고 한다면 자기의 마음속에 규정하는 것 외에도 ‘부득이한 일도 없고 자기 뜻대로 할 권리가 있어야’ 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문제는 자기의 마음이 어떻게 결정하는가에 달려 있다.
우리는 마태복음 19장 10절부터 12절까지의 말씀을 살펴보자. “제자들이 가로되 만일 사람이 아내에게 이같이 할진대 장가들지 않는 것이 좋삽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사람마다 이 말을 받지 못하고 오직 타고난 자라야 할지니라 어미의 태로부터 된 고자도 있고 사람이 만든 고자도 있고 천국을 위하여 스스로 된 고자도 있도다 이 말을 받을 만한 자는 받을지어다”. 11절의 마지막 한 구절과 12절의 마지막 한 구절을 연결하여 읽어 보자. “오직 타고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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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라야 할지니라 … 이 말을 받을 만한 자는 받을지어다”. 여기에서 우리는 타고날 때부터 은사로 받은 자만이 독신을 지킬 수 있다는 것을 분명히 볼 수 있다.
그러므로 만일 마음이 나뉘는 것을 면하고 충분한 시간을 들여 부지런히 주님을 섬길 수 있으려면 독신을 지키는 것이 가장 좋다. 주님의 제자들 중에 요한이 독신이었고 이후에 바울 또한 독신이었다. 그러나 결혼할 필요가 있을 때에는 결혼하는 것도 옳다. 결혼하는 것은 죄를 범하는 것이 아니다. 결혼과 독신의 차이는 죄의 문제가 아니라 시간과 부지런함과 마음의 나뉨의 문제이다.
결혼은 성결한 것이다. 사람의 몸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것이며 사람의 신체의 모든 요구 또한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것이기 때문에 결혼은 성결한 것이다. 그러나 사람에게 결혼 이외의 다른 요구가 있는 것은 하나님 보시기에 죄이다. 그러면, 왜 결혼해야 하는가? 그것은 바로 결혼 이외의 관계를 면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결혼은 죄가 아니며 오히려 죄를 방지할 수 있다. 결혼은 타락이 아니라 도리어 타락을 방지할 수 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7장에서 결혼에 대해 아주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 “너희의 쓴 말에 대하여는 남자가 여자를 가까이 아니함이 좋으나 음행의 연고로 남자마다 자기 아내를 두고 여자마다 자기 남편을 두라 남편은 그 아내에게 대한 의무를 다하고 아내도 그 남편에게 그렇게 할지라 아내가 자기 몸을 주장하지 못하고 오직 그 남편이 하며 남편도 이와 같이 자기 몸을 주장하지 못하고 오직 그 아내가 하나니 서로 분방하지 말라 다만 기도할 틈을 얻기 위하여 합의상 얼마 동안은 하되 다시 합하라 이는 너희의 절제 못함을 인하여 사탄으로 너희를 시험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내가 이 말을 함은 권도요 명령은 아니라 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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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사람이 나와 같기를 원하노라 그러나 각각 하나님께 받은 자기의 은사가 있으니 하나는 이러하고 하나는 저러하니라 내가 혼인하지 아니한 자들과 및 과부들에게 이르노니 나와 같이 그냥 지내는 것이 좋으니라 만일 절제할 수 없거든 혼인하라 정욕이 불같이 타는 것보다 혼인하는 것이 나으니라”(고전 7:1-9). 여기에서 결혼의 하나의 목적은 음란을 방지하는 것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동시에 어떤 사람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특별한 은사를 주셨다면 결혼하지 않아도 된다. 그러나 이러한 은사를 받지 못한 사람은 결혼하는 것이 좋으며 이로써 음란을 면할 수 있다.
우리는 독신의 문제를 그렇게 길게 끌 필요는 없다. 우리가 알다시피 바울은 독신이었다. 그러나 디모데에게 그는 말세 때에 미혹케 하는 영의 교훈이 나와서 사람들로 결혼을 금지케 할 것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마귀의 가르침이다(딤전 4:1-3). 그러므로 우리는 독신을 지키는 것이 옳은 것임을 믿지만 또 한 면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평형을 지켜야 하며 결혼이 성결치 못한 것이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 결혼은 성결한 것이며 하나님께서 창조 안에서 하신 안배이다. 우리는 결혼을 금지하는 것이 마귀의 가르침임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주님의 일을 하는 사람이 만일 이미 결혼했다면, 가정의 일을 잘 안배하여 마음을 적게 나뉘게 하면 할수록 좋다. 그렇게 할 때 주님의 일을 잘할 수 있게 된다. 또 한 가지 주의해야 할 점은 일과 가정의 한계를 분명히 해야 한다는 것이다. 만일 당신의 가족 중에 누가 동역자라면 그것은 별개의 일이다. 그러나 만일 당신의 가족 중에 누가 동역자가 아니라면 결코 그들이 주님의 일을 만지게 해서는 안 된다. 주님의 일은 집안에 전해져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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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의 일꾼이 하는 일은 결코 가족에 좌우되어서는 안 된다. 어떤 형제는 어떤 지방에 사역하러 가게 된 것은 그의 아내가 승낙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것은 정말 이상한 것이다. 아내가 승낙했기 때문에 주의 일을 하러 가다니! 사실, 집안 식구 중 어느 누구도 그를 대신해 대답을 할 수 없으며 어떤 동역자도 그 사람을 대신해 대답할 수 없다. 가정의 관계는 주님의 일과 반드시 분명하게 분리되어야 한다. 주님의 일을 하는 사람은 형제자매의 영적인 문제를 자기 가족에게 함부로 말해서는 안 된다. 집안 식구가 어떤 일을 알아야 한다면 다른 형제자매들도 똑같이 알아야만 한다. 주님의 일에서의 많은 문제들이 주님의 일꾼이 집안에서 자기 마음대로 말한 것 때문에 빚어진다.
우리가 좀더 첨가해서 주의해야 할 것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형제가 자매에 대해 혹은 자매가 형제에 대해 왕래할 때 정상적인 관계를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 만일 어떤 형제가 전적으로 자매들 가운데 일하기를 좋아하는 성격을 가졌다면, 이러한 형제에게는 사역을 하게 하지 말아야 한다. 만일 젊은 자매가 전적으로 형제들 사이에서 사역을 하기를 좋아한다면, 이러한 자매 역시 사역을 하게 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이 원칙을 엄격히 지켜야만 한다. 일반적인 경우에 형제들은 항상 형제들에게 사역을 하고, 자매들은 항상 자매들에게 사역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으로 계실 때 우리에게 좋은 본을 남기신 것을 본다. 요한복음 3장과 4장의 한계는 매우 분명하게 구분되었다. 3장에서 주님은 밤에 니고데모를 맞이하셨고, 4장에서는 주님께서 낮에 사마리아 여인을 만나셨다. 3장에서는 방 안에서 니고데모를 맞이하셨고, 4장에서는 공동 우물 곁에서 사마리아 여인을 만나셨다. 만약에 3장의 상황과 4장의 상황이 뒤바뀐다면, 그것은 완전히 부적합하게 될 것이다. 주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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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고데모에게 말한 상황과 사마리아 여인에게 말한 상황은 현저하게 다르다. 이것은 우리에게 아주 좋은 본을 보여 준다.
이것은 우리가 형제와 자매 사이에는 왕래가 있어서는 안 되고 교통이 있어서도 안 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어떤 형제나 자매가 이성의 사람들 가운데 가기를 너무나 좋아하는 고질적인 습성이 있다면 그러한 사람은 금지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물론 믿는 이는 그리스도 안에서 남녀의 구별이 없다. 하나님의 자녀 중 형제자매 사이에는 담장이 있을 수 없고 오히려 많은 좋은 교통이 있어야만 한다. 그러나 만일 어떤 형제가 전적으로 자매들과 말하기를 좋아하는 습성을 가졌거나 어떤 자매가 형제들과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하는 습성을 가졌다면 그들의 습관은 신속히 처리될 필요가 있다. 형제자매가 왕래할 때에 자연스러울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자연스러움 속에는 지나치지 않도록 제한됨이 필요하다. 정상적인 교통의 한계를 넘어선 사람은 엄격하게 처리받아야 한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셔서 우리가 이러한 일들에 있어서 아름다운 간증을 나타낼 수 있게 하시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