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6장
봉사에 관한 교통(7)
―교회 안의 일은 어떻게 결정하는가
시간 : 1950년 3월 1일
장소 : 홍콩 구룡 좌돈도
교회 중의 영적인 원칙
교회 중에는 두 가지의 영적인 원칙이 있다. 첫 번째는 권위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권위의 반대편은 순복이다. 교회에 권위가 없으면 쉽게 육체로 충만해진다. 그러나 만일 권위만 있게 되면 교회는 율법으로 가득해져 법정과 같게 된다. 그러므로 두 번째는 사랑이 있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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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다. 사랑만이 사람을 건축할 수 있다.
봉사의 안배
심방의 일을 질서 있게 진행하기 위하여, 우리는 심방을 몇 개의 세부항목으로 나누어서 여러 형제자매들로 하여금 책임지게 할 수 있다. (1) 외지에서 온 사람의 접대 (2) 사고 심방 (3) 서신 (4) 유모 (5) 애찬[헬라어로 아가페(agape). 원문은 단지 사랑이며 음식을 먹는 것이라고 할 수도 있음].
집사실의 봉사는 교회의 모든 사무의 출구가 되어야 한다. 교회의 사무가 많기 때문에 집사실은 한 사람이 책임지게 하지 않고 열네 명의 집사 형제들로 하여금 교대로 책임을 지게 해야 할 것이다.
교회 안의 일은 어떻게 결정하는가
민주도 아니고 독재도 아님
세상에는 각종 기관들이 일을 처리하는데 질서 있고 편리하게 하기 위하여 다 일을 처리하는 원칙을 세운다. 교회도 영적인 일들을 질서있고 편리하게 처리하는 데에도 ‘일을 처리하는 방법’이 있다. 이전에 형제자매들이 자신을 내맡기지 않았을 때 교회는 전체적인 봉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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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 수 없었으므로 많은 사람들이 교회의 일은 어차피 누군가 하기 때문에 돌아보지 않아도 된다고 여겼었다. 만일 오늘날 교회가 이러하지 않고 형제자매들이 다 자신을 내맡기고 교회에 전체적인 봉사가 있다면, 모든 형제자매들이 다 교회의 일에 대하여 분깃이 있을 것이다. 교회에는 많은 사람들이 봉사하기 때문에 반드시 안배가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쉽게 규모가 없어진다. 어떤 일을 결정하는 데 있어서 세상의 방법은 거수나 투표와 같은 것으로 결정을 하며 소수가 다수를 복종하는 방법을 따른다. 혹은 어떤 곳에서는 독재를 실행하는데 오직 한 사람 혹은 소수의 사람들이 일을 결정한다. 오늘날 세상의 각각의 단체들이 사무를 처리하는 것은 그 나름대로의 방법이 있다. 그러나 교회의 봉사의 방법은 세상의 방식을 따르지 않고 하나님이 그분의 성경을 통해 계시한 방법을 사용한다. 우리는 반드시 성경 중에서 교회가 일을 결정하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 만일 교회가 성경에 부합되는 결정 방법을 사용하지 않는다면 아마 세상의 방법을 가지고 들어올 것이다.
계시록 2, 3장에 언급된 일곱 교회에서 최후의 하나는 바로 라오디게아 교회이며 빌라델비아 교회의 뒤에 이어진다. 주님이 이 마지막 교회에게 하신 말씀은 매우 엄중하다 ‘라오디게아’라는 이 말의 원문은 라오디케이아(Laodikeia)인데 바로 두 개의 단어 골 라오스(Laos)와 디케이아(dikeia)가 합쳐져서 이루어진 것이다. 라오스(Laos)의 의미는 ‘민중’이며 디케이아(dikeia)의 의미는 사전에 따르면 세 개의 뜻이 있는데 (1) 풍속, 습관 (2) 권리 (3) 요구, 판결 그리고 복수이다. 그러므로 라오디게아의 의미는 바로 민속, 민권, 그리고 국민의 결정이며 ‘백성들의 의견’이라고 말하는 것이 가장 좋다. 계시록 2, 3장 안에서 라오스(Laos)라는 이 단어는 세 번 사용되었는데, 나머지 두 번은 ‘니골라’라는 단어 안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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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함되어 있다. 니골라의 원문은 니콜라오스(nikolaos)인데 니코스(nikos)의 의미는 ‘정복’이며 라오스(laos)는 ‘백성’의 의미가 있다. 그러므로 ‘니골라’의 의미는 바로 ‘백성의 정복자’의 의미이다. 계시록 2, 3장에서 주님은 특별히 라오디게아(Laodikeia)이든 니골라(Nikolaos)이든 다 그분이 기뻐하지 않으시고 미워하시는 것임을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교회를 봉사하는 방법은 정복하고 압제하는 방식은 옳지 않을 뿐 아니라 다수의 원칙이라 할지라도 옳지 않다. 다수의 의견에 따라 그리스도는 정죄받았고 십자가에 못 박혔다(마 27:21-23). 교회의 일이 한 사람 혹은 소수의 사람들에 의해 결정되는 것도 옳지 않다. 천주교는 교황 한 사람이 바티칸에서 모든 것을 결정하는데, 이러한 제도는 바로 니골라당의 행위이다.
사도행전 15장의 본
그렇다면 교회의 봉사는 마땅히 어떻게 해야 하는가? 교회에서 일을 결정하는 방식에 관하여 주님은 우리가 결정하도록 남겨 두지 않으셨다. 그러나 주님은 성경 가운데 한 장의 본을 주셨는데, 그것이 바로 사도행전 15장의 회의이다. 사도행전 안에 있는 회의는 바로 영에 속한 것이며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다. 독재도 아니며 민주도 아니다. 사도행전 15장에서 교회는 영적인 방법으로 일을 상의하고 결정한다. 만일 이 회의가 기록되지 않았다면 우리는 일을 처리하거나 봉사할 때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을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먼저 사도행전 15장에 있는 이 회의의 배경을 보아야 한다. 예루살렘 교회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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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들 가운데 가장 큰형이라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이곳에서 사역을 했었고 또한 열두 사도가 이곳에서 오랫동안 사역했기 때문이다. 심지어 복음도 예루살렘의 그리스도인들이 사방으로 흩어지면서 나온 것이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예루살렘에서 나왔다. 후에 바울과 바나바가 첫 번째 전도 여행에서 돌아와 안디옥에 있을 때 그들은 큰 어려움을 만났는데, 그것은 예루살렘 교회의 사람들이 안디옥에 내려와 가르치기를 믿는 이들이 반드시 모세의 규례에 따라 할례를 받아야 하며 할례를 받지 않으면 구원받을 수 없다고 말했기 때문이다. 바울과 바나바는 그들과 크게 논쟁하였다. 바울과 바나바는 매우 분명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고서 의롭다 하심을 받지 못하고 여전히 죄인이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은 것이다”라고 말했다(갈 2:17-21). 그러므로 교회는 결코 유대교의 갖가지의 배경 할례와 안식일을 지키고 음식을 먹는 규례와 같은 것 등을 구원과 함께 혼합할 수 없다. 그렇지 않으면 장래에는 아마 학위가 없거나 채식 등이 없으면 구원을 받지 못한다는 가르침이 나올 것이다. 만일 중국에 공자의 가르침을 끌어다가 가져온다면 어떤 사람은 효도와 인애 등이 없으면 구원을 받을 수 없다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복음은 그렇지 않다. 복음은 누구든지 주님을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고 말한다. 율법을 지켜야 구원받을 수 있다는 가르침이 예루살렘에서 전래되었기 때문에 바울과 바나바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 교통했는데 그들뿐 아니라 안디옥 교회의 다른 형제들도 함께 올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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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모든 형제들이 다 말할 수 있음
바울과 바나바가 예루살렘에 이르렀을 때 즉시 베드로에게 묻지 않고, ‘사도와 장로들에게’(행 15:2) 갔으며 ‘교회와 사도와 장로들의 영접’(4절)을 받았다. 그런 후에 사도와 장로들은 형제들에게 회의를 열기를 요청했다 문제가 생겼을 때 전체 교회가 함께 모여 교통하고 개개인들이 다. 말할 자격이 있다. 책임 형제들은 반드시 형제자매들의 말을 들어야 한다. 일은 연장한 형제들이 결정하지만 연장한 형제들은 형제자매들의 말을 들어야 하는데, 이는 형제자매들의 말 속에 성령의 음성이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연장한 형제들은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다루심을 받았기 때문에 형제자매들의 말을 들은 이후에 하나님 앞에서 일을 결정할 수 있다. 이 회의 중에 전에 바리새인이었던 한 무리 믿는 이들이 먼저 일어나, “이방인에게 할례 주고 모세의 율법을 지키라 명하는 것이 마땅하다”(5절)고 말했다. 그러자 이로 인하여 많은 변론이 일어났는데, 이것은 많은 형제들이 다 말을 하고 다 자신의 견해를 발표했음을 나타낸다.
2. 베드로가 말함
‘많은 변론이 …’(7상) 있었으며 각종 이유를 다 말했을 때 베드로가 일어나 고넬료의 집에서 일어난 일을 서술했다. 베드로는 바울이 먼저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이방인들로 내 앞에서 복음의 말씀을 들어 믿게 하시려고 오래 전부터 너희 가운데서 나를 택하시고”(7하)라고 말했다. 그 뒤에 베드로는 마치 이렇게 말하는 듯하다. “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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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들은 종교적 배경이 있어서 할례를 받고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 아주 쉬운 일이지만 이방인들로 말하자면 지기 어려운 멍에이다(10절). 우리는 이렇게 감당하기 어려운 짐을 이방인에게 더하지 말아야 한다.” 고넬료의 집에서는 바로 그들이 먼저 성령을 받았기 때문에 그런 후에 베드로가 그에게 침례를 준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이 먼저 역사하시고 성령을 증거로 주신 것이다. 베드로는 그가 비로소 입을 열어 제자들에게 내린 것과 같은 성령이 그들에게 강림했다고 간증했다(11:15). 그러나 오순절 때와는 상반되는데 오순절 때에는 베드로가 복음을 전하고 나서 제자들이 침례를 받았고 비로소 ‘성령을 받았다’(2:38). 만일 고넬료의 집에서 마치 오순절 때와 마찬가지로 먼저 침례를 받고 성령을 받았다면 그것은 이상한 것이 아니다. 그러나 고넬료의 집은 베드로가 입을 열자 성령이 부어졌다. 그러므로 이것은 성령이 기꺼이 이렇게 하셨다는 것을 증명한다. 바리새파 유대 믿는 이들은 죽은 교리를 말했고 베드로는 성령의 역사를 말했다.
3. 바울과 바나바가 말함
베드로가 말을 마치자 회의에 참가했던 사람들은 다 조용해졌다. 이때 바울과 바나바가 이어서, “하나님이 자기들로 말미암아 이방인 중에서 행하신 표적과 기사”(15:12)를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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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마지막으로 야고보가 결정을 내림
마지막으로 야고보가 일어나 말을 했다. “말을 마치매 야고보가 대답하여 가로되 형제들아 내 말을 들으라”(13절). 19절에서 야고보는 이 회의의 최후 결정을 내렸다. 이 회의에서 첫 번째 말한 사람들은 하나의 기초로서 유대의 형제들이고, 다음으로 말한 것은 베드로였으며, 세 번째는 바울과 바나바였고. 네 번째로는 야고보가 마지막 결정을 내렸다.
사도행전 15장의 적용
오늘 우리는 이러한 본을 응용할 수 있다. 다수 사람들의 의견을 따라 결정하지 않고 교회의 회의를 시작할 때 형제자매들은 할 수 있는 한 말을 하거나 변론할 수 있으며 마지막으로 장로가 결정할 수 있다. 마지막 결정이 있기 전에 모든 형제들은 다 말할 수 있으며 베드로가 말할 수 있을 뿐 아니라 바울과 바나바도 말할 수 있었다. 그런 후에 야고보가 말할 때 마지막의 결정을 내렸다.
영적인 인도자의 산출
오늘날 우리의 문제는 누가 야고보인가 하는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오늘 누가 인도자의 지위에서 결정을 내릴 자격이 있는가이다. 우리는 먼저 야고보가 어떻게 인도자가 되었는지 본다면 영적인 인도자가 어떻게 산출되는지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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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에서 모두 여섯 명의 야고보가 나온다. 사도행전 15장에 있는 이 회의의 야고보는 바로 주 예수님의 육신의 형제이며 그는 신약에서 여러 번 말을 하는데 신약 성경에서 그의 이름은 열 번 언급된다. 교회가 막 시작되었을 때 인도자는 베드로였으며 그는 복음 전파에 있어서 인도자였다. 후에 사마리아로 내려갈 때는 베드로가 요한과 함께 갔으며(8:14), 고넬료의 집에 간 것도 베드로였다. 그러나 그때 이후로 베드로는 점점 교회 중에서 그의 인도자의 지위를 잃어버리는 것 같다. 사도행전 12장에 와서 교회가 큰 핍박을 받을 때 열두 사도 중의 야고보가 피살되고 베드로는 감옥에 갇혔다. 이때 야고보가 짊어졌고 베드로는 그의 인도하는 위치를 잃어버렸다. 여기서 우리는 영적 인도자는 경력의 문제가 아니며 세상에 속한 선거로 한번 총통으로 선출되면 육 년 동안 하는 그러한 것과 같지 않고 누구든지 주님 앞에서 배움과 진보가 있으면 바로 그가 인도자의 위치에 서는 것을 볼 수 있다.
고린도전서 15장 5절부터 7절은 바울이 여러 사람을 언급하지만 오직 야고보와 베드로의 이름만 언급하고 나머지는 단지 ‘오백여 형제’, ‘열두 사도’, ‘사도들’이라고만 말하며 요한의 이름조차도 언급되지 않는다. 이것으로 볼 때 야고보는 틀림없이 그 특징이 있었을 것이기 때문에 바울이 그를 언급했을 것이다. 이곳에서 뿐 아니라 갈라디아서 1장 18절부터 19절에서도 바울은 두 사도의 이름만을 언급하는데 베드로와 주의 형제 야고보이다. 2장 9절에 이르러 바울은 다시 야고보, 베드로와 요한이 예루살렘 교회의 세 개의 기둥이라고 말하면서 야고보를 베드로 앞에 두었다. 2장 12절에서 바울은 ‘야고보에게서 온’ 어떤 이들이 안디옥으로 왔다고 말하며, ‘예루살렘에서 온’ 혹은 ‘베드로에게서 온’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사도행전 12장 17절에서 베드로는 자신의 입으로 일어난 일을 야고보에게 알려야 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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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했다. 그때 예루살렘에는 적어도 몇 십 명의 동역자들이 있었고 몇 만의 형제자매들이 있었지만 베드로는 특별히 야고보에게 알리는 것을 강조했다.
이상의 성경의 몇 구절을 통하여 우리는 예루살렘 교회가 막 일어났을 때 베드로는 첫 번째 인도자였으며 베드로가 감옥에 갇힌 이후부터 야고보가 일어났으며 심지어 베드로보다 앞에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도행전 15장에서 야고보가 가장 마지막에 일어나 말을 하는 이유를 알 수 있다. 이 회의에서 가장 마지막에 결정을 내린 사람은 야고보였는데, 이것은 그때 그가 영적인 인도자였기 때문이다.
영적인 인도자의 결정은 성령의 결정임
19절에서 야고보는 결정을 내리면서, ‘그러므로 내 의견에는 …’이라고 말한다. 뒤에 28절에서는 ‘성령과 우리는 …’이라고 말한다. 이 의견은 사실상 야고보의 결정이지만 결과는 전체 교회와 성령의 결정이 되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영적인 인도자의 결정이 바로 성령의 결정임을 알 수 있다.
오직 성령께만 권위가 있음
그러므로 전체 교회가 교통할 때 형제자매들은 할 수 있는 한 의견을 제기할 수 있다. 그러나 기억해야 할 것은 당신이 의견을 제기했다고 해서 곧 당신의 의견대로 해야 한다는 말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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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다. 형제자매들이 말을 할 때 장로들은 반드시 들어야 한다. 장로들은 형제자매들의 말을 듣고서 그 가운데 성령의 음성이 있는지 없는지를 보는 것을 배워야 한다. 마치 누가복음에서 말한 것처럼 엘리사벳이 주의 모친 마리아의 음성을 듣자마자 아이가 그의 복중에서 기쁨으로 뛰었다고 하는 것과 같다(1 :41). 누가 입을 열고 말을 하든지를 막론하고 장로들은 반드시 성령이 형제자매들을 통해 말하는 말씀을 듣는 것을 배워야 한다. 많은 때 형제자매들이 말함에 있어서 말은 옳지만 영은 옳지 않다. 그러므로 장로들은 듣는 것을 배워야 하고 또한 분변하기를 배워야 한다.
본래 변론은 반드시 목소리가 커야 하고 말이 많아야 하지만, 교회 안에서의 변론은 마지막에 이르러서는 소리가 없어야 한다. 최후에 일을 결정하는 사람은 바로 책임 형제이다. 그들은 영을 사용하여 교회 가운데 있는 성령의 권위를 만져야 하며 마지막 결정을 내려야 한다. 교회에서 일을 처리하는 것은 장로들의 의견에 근거하는 것이 아니라 형제자매들이 말한 것과 신언자들의 영에 근거해야 한다. 야고보가 사도행전 15장에서 결정을 내린 것은 그의 개인적인 의견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먼저 형제들의 말과 베드로의 말, 바울과 바나바의 말을 듣고서 선지자 모세의 말에 근거하여 마지막으로 결정을 내린 것이다(14-18절).
그러므로 교회에서 일을 처리하는 방법은 독재나 위원회가 아니며 민주 제도 아니다. 교회가 결정을 내리는 것은 투표에 넘기거나 소수 사람들이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책임 형제가 결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책임 형제는 반드시 영적인 일에 있어서 영적인 인도의 선후가 있음을 보아야 한다. 교회 중에는 민주도 없고 독재도 없으며 집사들 가운데서도 이와 같다. 영적으로 많이 배운 사람은 자연히 앞에 서게 되며 배움이 적은 사람은 당연히 뒤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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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러나게 된다. 어떤 형제는 비교적 배움이 많아서 인도자의 지위에 서는데, 이것은 그들 자신에게 권위가 있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성령으로부터 권위를 얻는 것을 배워야 한다. 마치 버스를 탈 때 밀듯이 그렇게 밀어서 권위가 되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권위가 되는 것이다. 요한은 언제나 베드로의 뒤에 있었고, 야고보는 본래 베드로의 뒤에 있었지만 나중에는 베드로를 추월했다. 복음서에서 야고보는 주님을 믿지 않았지만, 그는 나중에 영적으로 높이 올라갔으며 마치 바울이 이방인 믿는 이들 중에서 높았던 것과 같이 예루살렘의 유대 믿는 이들 가운데서 비교적 높았다.
그러므로 교회가 회의를 열어 교통하고 일을 결정하는 것은 전체 투표와 같은 그런 것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사실 많은 때 대부분의 형제자매들의 느낌은 정확하지 않다. 여러분 열일곱 명의 집사 중에 틀림없이 인도자가 있을 것이며, 다섯 명의 장로 중에도 역시 한 명이 책임을 지고 성령의 권위를 만져서 마지막 결정을 내려야 한다. 만일 보통의 형제 혹은 자매가 말한 것이 많은 사람들과는 다르지만 책임 형제가 하나님의 뜻이라고 느꼈다면 교회는 반드시 그 형제 혹은 자매의 의견을 따라 결정해야 한다. 사도행전 15장에서는 이른 바 상의(相議)라는 것이 없으며 사람의 의견이 없고 영적이지 않은 사람에게 남겨 줄 여지가 없다. 그러므로 형제자매들은 겸손하게 주님 앞에 사는 것을 배워야 한다. 장로들은 반드시 영 안에서 밝아야 한다. 이 점에 있어서 앞선 형제들의 책임은 매우 크다. 만일 당신이 교만하고 스스로 권위라고 여기며 영적으로 잘 배우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일은 당신의 손에서 손상을 받게 될 것이다. 이 일에 있어서 여러분 책임 형제들은 배움이 있어야 한다. 책임 형제들은 한 면으로 하나님 앞에서 다루심을 받고 많은 배움이 있어야 하며 다른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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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으로 실행에 있어서 사도행전 15장의 본을 따라 형제자매들의 말을 듣고, 성령의 권위를 만지며 하나님 앞에서 일을 결정하는 것을 배워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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