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집 제48권 초신자를 온전케 하는 공과 제10장 기도
기도 Prayer
Ezra Zion , 2013-04-11 , 조회 (108) , 추천 (0) , 반대 (0), 스크랩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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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치만 니 전집 제3집 제48권

초신자를 온전케 하는 공과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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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명

 

1948년 니 형제님의 사역이 회복된 후 그는 여러 차례 형제들과 믿는 이들의 영적인 교육의 중요성을 교통했다. 그는 교회 안의 형제 자매들 모두가 기본적인 가르침을 받고 견고한 기초가 세워지므로 동일한 간증이 산출되기를 원했다. 이 책은 바로 니 형제님이 고령에서 한무리의 사역자들을 훈련시키던 그 해에 초신자들을 온전케 하기 위하여 전한 메시지로써 모두 50편이며 또한 70개의 제목이 있다. 그 내용은 상당히 풍성하며 포괄적이고 기본적이지만 중요하다. 그의 의도는 모든 지방 교회가 다 일년 동안 매주 한 번 이 메시지로 초신자들을 온전케 하고 매년 계속 사용하기를 원했다.
이 오십 편의 메시지는 모두 상, 중, 하 세 권의 책으로 나누었으며, 상권 첫 부분에 한편의 온전케 하는 집회의 메시지를 실었다. 이것은 1950년 7월에 니 형제님이 동역자 집회의 담화기록에서 초신자들을 온전케 하는 중요성과 훈련 때의 요점, 그리고 실행상의 세부적인 항목을 말씀하신 것이다.

1972년 8월
편집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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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신자를
온전케 함에 관한
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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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신자를 온전케 함에 관한 집회


Ⅰ. 초신자를 온전케 함의 중요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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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을 갓 믿은 모든 형제들은 가장 먼저 자신에 대하여 큰 의문을 품어야 한다. 예를 들어 어떤 형제는 올해 사십 세가 되어 구원을 받았다. 과거 그는 사십 년 동안 세상에서 세월을 보냈고, 죄악 가운데서 세월을 보냈으며, 세상의 풍속을 따라 세월을 보냈고, 사단의 권세 아래서 세월을 보냈다. 그의 과거 사십 년은 날마다 그 자신의 성질을 따라 행하고 자신의 관점과 자신의 느낌, 그 자신의 주관에 따라 행했었다. 오늘 그가 구원받았다면 마땅히 자신을 믿지 않아야만 한다. 그는 가장먼저 자신에 대하여 큰 의문을 품어야 한다.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에는 표준이 있다. 그리스도인의 생활, 그리스도인의 관점. 그리스도인의 의견에는 다 표준이 있다. 이 표준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어떤 종류의 사람이 되어야 완전한 사람이 되는지를 알지 못한다. 이 표준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쉽게 자신을 자랑하고 쉽게 자신에 대하여 만족하며 쉽게 자신을 믿는다. 이 표준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그가 틀렸다고 보는 것이 반드시 틀린 것이 아니며 그가 옳다고 여기는 것도 반드시 옳은 것은 아니다. 주님 앞에서 배움이 있고 이 표준을 아는 사람만이 절대로 그렇게 할 수 없고 그렇게 말할 수 없다는 것을 알며 비로소 무엇을 가리켜 잘못된 것이라고 하며 무엇을 가리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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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못되지 않았다고 하는지를 찾을 수 있다. 초신자를 온전케 하는 것은 바로 초신자로 하여금 그리스도인의 표준을 알도록 인도하는 것이요 그들로 이 표준에 따른 사람이 되게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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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신자들에 대한 첫번째 단계는 충분하고도 철저하게 허물어뜨리는 것이다. 주님은 왜, “너희가 어린아이와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고 말씀하셨는가? 그것은 바로 그가 과거에 잘못 살고 헛되이 산 나날들을 인정하지 않고 모든 것을 새롭게 시작하라는 의미이다. 요한복음 3장의 ‘거듭남’은 우리에게 생명의 필요를 보여 준다. 마태복음 18장에서 “어린아이와 같이 된다”는 것은 우리에게 과거의 날들이 소멸되어야 참을 보여 준다. 과거의 모든 것들은 다 깨끗이 허물어져야 한다. 초신자를 온전케 하는 것은 그들의 과거를 하나하나 허무는 것이다. 만일 어떤 초신자가 사십 세에 구원을 받았다면 그를 온전케 한다는 것은 그의 과거 사십 년 동안의 모든 것을 허물어뜨리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죄에 대하여 후회하지만 자신에 대하여는 후회하지 않는다. 우리가 죽고 부활하는 것은 삶을 죽음에 더하는 것이 아니다. 초신자를 온전케 한다는 것은 제거할 것과 더해야할 것을 하나하나 지적해 내는 것이다. 만일 모든 일들을 성경을 따라 결정하지 않고 여전히 과거의 체험, 과거의 습관. 과거의 관점을 따라 말하고 행한다면 이것은 지극히 큰 잘못이다. 사람이 일단 주님을 믿은 후 적은 관념조차도 과거의 것을 따를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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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으로 하여금 새로운 생명을 얻게 하는 것 곧 거듭남은 사람의 과거를 허물어뜨리고 어린아이가 되도록 “돌이키케 하는” 것이다. 초신자를 온전케 하는 것은 소극적인 방면에서 그의 과거의 모든 것을 허물어뜨리는 것이고 적극적인 방면에서는 그에게 새로운 시작을 갖게 하는 것이다.
만일 초신자가 그의 과거의 모든 것을 허물어뜨리지 않으면 그리스도인으로써 어려움을 당하게 된다. 이는 과거 그가 가지고 있던 것을 다 갖고 있고 주님이 그에게 주신 것들은 다만 그에게 더하여진 것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는 주님의 생명을 그의 과거의 모든 것들과 협력하게 한다. 그는 자신에 대하여 여전히 스스로 의롭다고 여기며 입만 열면 자신이 얼마나 성실한 사람이었는지. 자신이 얼마나 인내하고 고난을 견딜 수 있는 사람이었는지를 말한다. 교만으로 가득하지만 동시에 지극히 겸손한 것 같다. 없어질 영광을 탐하고 땅 위의 재물을 쌓으면서도 여전히 자신이 명리(名利)에 흥미가 없는 사람이라고 여긴다. 많은 자매들은 성질을 내는 데 있어서 아주 특별하여 다른 사람과 함께 있는 것이 쉽지 않다. 많은 부모들이 아이들에 관한 관념이 아주 특별하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이 된 지 십 년 이십 년이 되어도 그 낡은 모습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초신자들은 일단 시작하면 반드시 자신에 대하여, 이전에 갖고 있던 모든 것에 대하여 크고 엄중한 의문을 품어야 한다. 오늘 이후로 낡은 관념들과 낡은 방법들. 낡은 의견들 그리고 낡은 모든 것들을 다 제거해야 한다. 어린아이와 같은 모습으로 되돌아와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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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례는 바로 과거의 모든 것을 무덤 안으로 가져가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올해 오십 세이다. 그가 구원받고 침례를 받으러 왔는데 침례는 주님이 그의 생명을 요구하는 것일 뿐 아니라 그의 오십 년 된 생명을 요구하며 그의 매년의 생명을 요구하는 것이다. 이전에 죄는 사람의 모든 조직 안에 미쳤으며 사람은 갖가지 질병이 있었다. 그러므로 이러한 갖가지 질병을 다 물 속에 두어야 한다. 사람이 무덤을 떠날 때는 무덤에서 입었던 의복으로부터도 떠나야 한다. 침례는 이처럼 엄격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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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람이 구원받고 난 뒤에는 가치관의 문제에 대하여 기본적인 변화가 있어야 한다. 과거의 모든 가치에 대한 편가는 모두 무가치한 것이며 정확한 것이 아니다. 초신자를 온전케 하는 것은 그에게 과거의 가치관이 틀린 것이며 과거의 가치에 대한 평가가 정확하지 않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그에게 새로 본 것이 있게 하고 새로운 평가가 있게 해야 한다. 이전에 귀하게 여겼던 것을 오늘은 분토처럼 여겨야 하고 이전에 유익하게 여기던 것을 오늘은 해로 여겨야 한다. 성질과 언어가 지금 이후부터는 과거와 같지 않아야 한다. 의복과 음식 또한 오늘 이후에는 과거와 같을 수 없다. 혼인과 성욕의 관념에 대하여 역시 과거와 달라야 한다. 어떻게 부모가 되며 어떻게 친구와 왕래하는지에 대하여 새로운 방법과 새로운 관점이 있어야 한다. 오락과 직업에 대한 태도와 선택 역시 과거와 달라야 한다. 모든 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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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워야 하며 새로운 시작이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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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갓 믿은 사람이 한 주제 한 주제를 통해서 온전케 되고, 허물어져야 할 것이 허물어지고 더해져야 할 것이 더해졌다면 그는 표준에 가까워질 것이고 표준적인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바랄 수 있다.

Ⅱ. 훈련 시에 주의해야 할 몇 가지 요점

초신자를 온전케 하는 것을 강화시키기 위하여 먼저 한 무리 형제 자매들을 훈련시키고 그런 후에 그들을 나누어 초신자를 온전케 하는 일을 책임지게 해야 한다. 온전케 함을 받지 못한 초신자가 한 명도 없기를 바란다. 그러나 훈련을 받고 초신자를 온전케 하는 책임을 진 형제 자매들은 아래 몇 가지를 주의해야 한다
(1) 계속 말하는 것에 중점을 두지 말고 묻는 것을 격려해야 한다. 고린도전서 14장 37절은 ‘묻는 것’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이로 볼 때 초대 교회는 묻는 것에 있어서 상당히 자유로웠음을 알 수 있다. 질문할 수 없는 집회는 틀림없이 너무 형식적일 것이다. 인도하는 사람은 듣는 사람들을 일깨워서 그들이 질문을 할 수 있게 하고 그들이 잘 이해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 물어 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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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답변을 할 때는 체면을 살리기 위하여 진리를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아는 것은 안다고 말하고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말하라.
(3) 인도하는 사람은 자신이 자신을 대표하고 있는지, 아니면 진리를 대표하고 있는지를 물어야 한다. 모든 사람이 진리를 대표해야 하며 자기의 느낌과 자기의 성질을 대표해 서는 안 된다. 반드시 진리를 유지해야 하며 자기의 느낌을 유지해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이든지 자기의 의견을 가져올 수 없다. 예를 들어 머리 덮는 것에 대해서 인도하는 사람이 이해가 부족할지라도 머리를 덮어도 좋고 덮지 않아도 좋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의 진리는 절대적이며 우리는 진리와 같은 말을 해야 한다. 만일 정함이 없는 나팔을 분다면 모두가 정함이 없는 싸움을 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개인의 의견이 있을 매 오직 건설적인 발표만을 할 수 있을 뿐 결코 무너뜨리는 식의 발표는 할 수 없다.
(4) 모든 인도하는 사람은 처음부터 자신의 신분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통로임을 분명히 알아야 하며 사범이 되지 말고 선생이 되지 않아야 한다. 높은 위치에 있는 사람이 낮은 사람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다. 낮은 위치에 있는 사람이 낮은 사람에게 전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도 선생의 지위에 설 수 없으며 개개인이 다 말을 전달하는 위치에 서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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Ⅲ. 실행 방면

초신자를 온전케 하는 것이 기본적인 온전케 함이기 때문에 각지 교회마다 다 이러한 집회―초신자를 온전케 하는 집회―가 있기를 바란다. 나는 이제 실행 방면에 관한 것을 약간 말하겠다.

1. 누가 초신자인가

죄인이 주님을 믿고 침례를 받았다면 그가 바로 초신자이다. 침례받은 그 주일부터 그는 마땅히 초신자를 온전케 하는 집회에 참가해야 한다. 일년을 참석했다면 그가 알아야 할 것과 배워야 할 것을 대부분 배웠을 것이다. 이것은 그가 기본적인 온전케 함을 받은 그리스도인이 되었음을 말하며 이후에 더 깊은 온전케 함을 받기를 바랄 수 있다. 여러분이 알아야 할 것은 죄인이 주님을 믿은 후에 나이나 학문이나 지위가 얼마나 높은지 세상 경력이 얼마나 깊은지에 상관이 없이 그는 반드시 온전케 됨이 필요한 초신자이다. 만일 그가 과거에 허물어지지 않았다면 그는 좋은 그리스도인이 되기가 어렵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주님을 믿고 침례를 받으면 우리는 그를 다만 초신자로 간주할 뿐이며 그로 하여금 초신자를 온전케 하는 집회에 참가하도록 요청해야 한다. 이미 주님을 믿은 지 오래 되었지만 이러한 기본적인 온전케 함을 받지 못한 형제 자매들이 초신자를 온전케 하고자 하는 집회에 참가하려 한다면 역시 참가할 수 있다. 왜냐하면 초신자를 온전케 하는 목적은 옛 것을 허물어뜨리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것을 건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주님을 믿은 연수가 얼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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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되었는가에 있지 않고 주님을 믿은 후에 과거의 것이 얼마나 허물어졌는가에 달려 있다. 나는 전에 어떤 형제가 일생 동안 한 번도 잘못을 자백한 적이 없이 뜻밖에 책임 형제가 되는 것을 보았다. 영적인 체험에 따라 말한다면 이러한 형제는 주님을 믿은 기간이 오래되었어도 여전히 초신자의 과정부터 시작해야 한다.

2. 초신자를 온전케 하는 집회의 기간

각지 교회에서 초신자를 온전케 하는 집회를 안배할 때는 수요일이나 목요일이 가장 좋다. 사람이 많든 적든 전체이거나 작은 반이거나 다 수요일 혹은 목요일에 계속 순환하여 전해야 한다. 이렇게 할 때 갓 믿은 형제 자매들이 교회가 있는 지방에 오기만 하면 과정을 빠뜨리지 않고 계속 이어갈 수 있다.

3. 훈련 집회

(1) 분기 집중 훈련 : 이러한 훈련은 총 책임을 맡은 형제(동역자 중의 하나)가 책임을 져야 하며, 그가 있는 그 구역이 함께 모이거나 혹은 그 일대에서 말씀을 공급할 수 있는 형제들이 단기간의 훈련을 더할 수 있다. 매 번의 단기간의 집회는 적어도 열 가지 제목 혹은 스무 가지 제목을 말해야 한다. 대략 3, 4기 정도면 모든 제목들을 다 전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훈련을 받은 형제들은 그들의 지방으로 돌아간 후에 초신자를 온전케 하는 집회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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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할 수 있다.
(2) 매주 현지 훈련 : 상해와 같은 곳은 초신자들이 상당히 많다. 만일 그들을 몇 십 개의 반으로 나눈다면 인도하는 사람만도 백여 명이 넘을 것이다. 총 책임을 맡은 형제는 매주 이들 인도하는 사람들에게 한 차례의 훈련을 실시할 수 있다. 한면으로 과거 일주일 동안 가르친 것들 가운데서 부족한 점과 어려움들을 함께 교통하고 다른 한면으로는 다음주에 말할 제목들을 연구할 수 있다. 시간은 매주 금요일이 가장 좋으며 늦어도 매주 월요일에는 실행해야 한다. 왜냐하면 일주일 혹은 적어도 삼 일의 예비가 있어야만 인도할 때 막연하게 말하지 않는다.
(3) 교재와 필기 : 훈련할 때 배우는 사람들에게 교재가 없다면 반드시 하나하나 필기를 해야 한다. 만일 교재가 있다면 하나하나 자세히 읽어야 한다. 분명치 않은 부분은 물어 볼 수 있으며 모든 사람이 함께 연구할 수 있다. 이 주제의 중심 사상이 무엇인가? 몇 개의 단락이 있는가? 매 단락의 중요한 의미는 무엇인가? 이 단락에 어떤 중요한 단어가 있는가? 이 단락 안에는 어떠한 중요한 말이 있는가? 이 단락을 통해서 허물어야 할 것이 무엇이며 건축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보아야 한다. 한 단락 한 단락을 읽고서 한면으로는 전하고 한면으로는 물어야 하며, 한면으로 듣고 또 한면으로 물어야 한다. 두번째 주 목요일은 그들로 하여금 반을 나누어 초신자 집회를 인도하게 하라.
(4) 도달해야 할 목표 : 매번 한 가지 주제를 말할 때 초신자들에게 더 많은 진리를 알게 하려고 하지 말고 어떻게 그들 안에 새길 것인가를 주의하라. 어떤 부분에서는 어떻게 새겨 주고 어떤 것을 제거해야하며 어떤 것을 더해야 할지를 다 주의해야 한다. 이러한 제목들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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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구를 삼아 사람들을 온전케 할 때 한 무리의 새로운 모습의 사람들이 산출되는 것이다. 그러나 목적을 도달하기 위해서는 인도하는 사람이 반드시 하나님 앞에서 먼저 깊은 다루심이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말할 때 자연스럽지 않고 공허한 말을 전할 것이며 역량이 없게 된다. 이것이 초신자들을 온전케 하는 집회를 인도하는 사람들이 반드시 주의해야 하는 것이다.

4. 초신자를 온전케 하기 위한 분반집회

만일 어떤 교회에 초신자들이 아주 적거나 말씀이 출구가 될 사람들이 많지 않다면 반을 나눌 필요가 없다. 다만 매주간에 한 번 어떤 사람이 한 주제 한 주제 순서대로 그들에게 전해 주고 또한 동시에 그들에게 질문하면 된다. 만일 한 교회에 초신자들이 상당히 많다면 몇 개의 작은 반으로 나누어서 따로 초신자를 온전케 해야 한다. 반을 나누는 것은 장소의 멀고 가까움을 따라 나누거나 혹은 수준의 깊고 얕음에 따라 나누어야 하지만 반드시 적합하고 실제적인 상황을 따라야 한다. 만일 인도하는 사람이 충분하다면 적게는 초신자를 오륙 명 정도 많으면 열 명 남짓으로 분반할 수 있다. 분반집회를 안배할 때도 몇 가지 주의할 것이 있다.
(1) 대상을 주의해야 함 : 예를 들어 어떤 반의 교육 수준이 비교적 높다면 이 반은 비교적 강한 인도를 안배해 주어야 한다. 어떤 반은 글자를 읽을 수 있는 사람이 많지 않다. 그러한 반의 사람을 인도할 때는 간단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사람들을 가르쳐야 한다. 대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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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당할 때 자연히 인도하는 사람은 곤란을 느끼지 않게 되며 듣는 사람들 역시 온전케 된다.
(2) 교재를 사용하지 못하는 경우 : 어떤 곳에 인도하는 사람에게만 교재가 있다면 듣는 사람은 노트를 준비하여 중요한 내용과 때 주제의 큰 단락을 기록해야 한다. 어떤 반은 초신자들이 글자를 알지 못하거나 혹은 글자를 아는 사람이 많지 않아 교본을 나누어주지 않는다. 이 때 인도하는 사람은 적어도 한 구절 중요한 성경을 거듭하여 그들에게 들려주고 또한 그들로 하여금 함께 귀에 익도록 읽고서 그런 후에 대의를 그들에게 말해 준다. 그들이 이해했는지를 물어 보아야 하며 또한 그들로 하여금 질문하게 해야 한다.
(3) 교재를 사용하는 사람 : 어떤 곳에서는 교재가 있어서 집회를 할 때 각 사람에게 한 권씩 나누어준다. 인도하는 사람이 초신자를 인도할 때 한 단락 한 단락을 그들과 함께 읽거나 돌아가며 읽는다. 인도하는 사람은 한면으로 말하고 한면으로 질문해야 한다. 듣는 사람 역시 한면으로 들으면서 한면으로 질문해야 한다. 어떤 때는 듣는 사람들에게 약간의 뜻을 발표하도록 요청할 수도 있다. 다만 발표하는 말은 간단 명료해야 하며 길게 할 수 없다. 이렇게 할 때 비교적 생기가 있게 된다. 할 수 있는 대로 설교하는 식이나 설교를 듣는 식을 피해야 한다. 필기를 할 수 있는 사람은 노트를 준비하여 중요한 부분을 수시로 기록할 수 있다면 역시 가장 좋다.
(4) 시간 : 매번 집회를 할 때마다 시간은 한 시간 반 정도로 제한하고 너무 길게 하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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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말씀을 전하는 것과 질문하고 답하는 데 있어서 마땅히 주의해야 할 것들

(1) 말씀을 전하는 것 : 목소리는 반 전체가 다 알아들을 수 있어야하며 주제를 벗어나지 말아야 한다. 비유나 이야기를 막론하고 반드시 주제에 부합되어야 한다. 가장 좋은 근거는 교재 안에 포함된 것이며 요점을 제시하고 분명하게 그들에게 말해 주어야 한다. 자기가 좋아하는 말을 하지 말아야 하며 말을 할 때 주제에서 벗어나서는 안 된다. 설교하듯 말하지 말고. 말하기도 하고 묻기도 해야 한다.
(2) 질문 : 질문을 하는 것은 주제에 적합해야 하며 교재 안의 내용에 제한을 받아야 한다. 의외의 질문을 하여 질문할수록 주제에서 벗어나게 해서는 안 된다. 예를 들어. 침례라는 주제를 다루면서 믿고 침례를 받는 사람이 구원을 받는다는 단락을 말할 때 오직 이곳의 구원이 어떤 구원을 가르치는 것인지만을 질문해야 한다. 이곳의 구원에서 더 나아가 무엇을 가리켜 혼의 구원이며 혼의 구원으로부터 무엇이 왕국이며 또 왕국에서 더 나아가 왕국에 들어가는 것과 천당에 가는 것에는 어떤 차이가 있느냐는 식으로 나아가지 않아야 한다. 원은 돌면 돌수록 커지며 질문은 하면 할수록 멀어져서 오히려 본 주제에 소홀해져서 아무런 유익이 없어진다.
(3) 답변 : 답변은 분명해야 한다. 엉뚱한 질문으로 주제로부터 너무 멀어졌을 때 먼저 본 주제를 분명히 한 다음에 답하고 나머지는 다른 때에 말해야 한다. 예를 들어 침례라는 주제를 다를 때 어떤 사람은 구원이 은혜에 있는 것인지, 혹은 혼의 구원 등에 대하여 질문할 때 다만 구원에는 여러 방면이 있으며 오늘은 이곳의 구원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만을 주의해야 한다고 답변해 주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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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실행의 여부를 주의해야 함

말씀이 중복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 사람은 올해 들어도 내년에 잊어버릴 수 있고 그 다음해에도 여전히 실행하지 않을 수 있다. 우리는 단지 그들에게 들려줄 뿐 아니라 그들이 실행하고 있는지를 추궁해야 한다. 말을 하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실행 여부를 물어 보아야 한다. 예를 들어 ‘일찍 일어남’에 대하여 말했다면 그들이 일찍 일어나는지를 보아야 하고. ‘성경 읽기’에 대하여 말했다면 그들이 성경을 읽는지를 보아야 하며, ‘기도’에 대하여 말했다면 그들이 기도를 하고 있는지를 보아야 한다. 그들이 성실하게 실행하고 성실하게 처리할 때까지 계속하여 그들을 밀어내고 추궁해야만 한다.

7. 보충 수업

매 과정에 얼마의 시간을 들이며 얼마나 연장할 것인지에 대하여는 인도하는 사람이 결정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반드시 각 반의 차이가 크게 나지 않아야 한다. 만일 빠뜨린 것이 있어서 따라가지 못한다면 달리 보충 수업을 생각해야 한다. 보충 수업을 시작할 때 성실하게 보충해 주어야 한다. 자신이 빠뜨린 것이 얼마나 되든지 다 잘 보충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사람들에게 줄 것이 없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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Ⅳ. 반드시 신선한 영을 만져야 함

이러한 말씀들은 해마다 계속하여 전해야 한다. 그러므로 전하는 사람은 반드시 신선한 영을 만져야 한다. 말씀은 십 년 전의 말씀일 수 있지만 영은 십 년 전의 영일 수 없다. 만일 인도하는 사람이 어떻게 영을 사용하는지를 배우고 그의 영이 신선하다면 그는 십 년, 이십 년 전의 말씀도 전할 수 있다. 만일 사람들에게 당신의 말을 만지게 하고자 한다면 당신은 먼저 당신의 영을 만져야 한다. 당신은 반드시 새롭게 신선한 영을 만져야 한다. 만일 당신의 영이 낡았다면 다만 그 말씀을 전할 수 있지만 사람들에게 약간의 교리상의 도움만을 줄 수 있을 뿐 그 교리는 즉시 ‘공식 기도문’과 같은 것으로 변해 버린다. 만일 당신이 영을 사용하여 이러한 말들을 만진다면 문제가 없다.

Ⅴ. 주님의 축복이 필요함

그리스도인의 운명은 주님의 축복에 달려 있다. 주님의 축복이 있으면 안배가 좋지 않아도 잘못되지 않고 갈 곳으로 간다. 그러나 주님의 축복이 없으면 모든 안배가 좋아도 잘못가게 된다. 마치 어떤 사람이 그다지 좋지 않아도 주님은 여전히 축복하시지만 어떤 사람은 한 번만 잘못하면 주님이 즉시 축복하지 않으시는 것과 같다. 그리스도인은 옳은 길을 가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인은 바로 주님이 축복하실 수 있는 길을 가는 것이다.

1950년 7월 12일 동역자 집회 대화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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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신자를
온전케 하는 공과
(상)







제10장
기도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요 16:24).
“너희가 욕심을 내어도 얻지 못하고 살인하며 시기하여도 능히 취하지 못하나니 너희가 다투고 싸우는도다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함이요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함이니라”(약 4:2-3).
“내가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눅 11:9-10).
“내가 내 마음에 죄악을 품으면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리라”(시 66:18).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막 11:24).
“항상 기도하고 낙망치 말아야 될 것을 저희에게 비유로 하여 가라사대 어떤 도시에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고 사람을 무시하는 한 재판관이 있는데 그 도시에 한 과부가 있어 자주 그에게 가서 내 원수에 대한 나의 원한을 풀어 주소서 하되 그가 얼마 동안 듣지 아니하다가 후에 속으로 생각하되 내가 하나님을 두려워 아니하고 사람을 무시하나 이 과부가 나를 번거롭게 하니 내가 그 원한을 풀어 주리라 그렇지 않으면 늘 와서 나를 괴롭게 하리라

하였느니라 주께서 또 가라사대 불의한 재판관의 말한 것을 들으라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저희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눅 18:1-8).




Ⅰ. 기도는 그리스도인의 기본 권리임

이 땅에 사는 그리스도인의 한 가지 기본 권리는 바로 기도에 대한 응답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여러분이 일단 거듭나면 하나님은 여러분에게, 간구하고 응답받는 기본 권리를 주신다. 요한복음 16장은 우리가 주님의 이름으로 구할 때 하나님께서 응답하시고 우리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신다는 것을 우리에게 알려 준다. 만일 우리가 항상 기도한다면 우리는 이 땅에서 기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다.
여러분이 항상 기도했는데도 하나님께서 듣지 않으셨거나, 여러분이 그리스도인이 된 지 수년이 지났는데도 여러분의 기도에 대해 하나님의 응답이 한 번도 없었거나,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기도를 한 번도 들어주지 않으셨다면 이것은 여러분에게 큰 문제가 있음을 증명한다. 만일 여러분이 그리스도인이 된 지 삼사 년이 되었는데도 불구하고 한 번도 기도의 응답을 받은 적이 없다면 이것은 여러분이 형편없는 그리스도인임을 증명한다. 약간이 아니라 철저히 형편없는 사람인 것이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자녀인데도 불구하고 기도의 응답을 받지 못했다면 이것은 여러분에게 있어서는 안 될 상태이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게 하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한다. 모든 그리스도인에게는 자주 하나님에게서 기도의 응답을 얻는 체험이 있어야 한다. 이것은 기본적인 체험이다. 만일 한동안 여러분이 기도할 때 하나님의 응답을 얻지 못했다면 하나님 앞에서 여러분에게는 문제가 있다. 기도의 응답을 얻는 일에서는 자신을 속일 방도가 없다. 체험이 있으면 있고 없으면 없는 것이고, 이루어지면 이루어진 것이고 이루어지지 않으면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다.
우리는 주님을 믿는 모든 사람에게 기도하기를 배웠는지, 하나님께서 기도를 들어주셨는지를 물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기도를 들어주지 않으셨다면 여러분에게 문제가 있다. 왜냐하면 기도는 허공에 대고 말하는 것이 아니며 기도의 목적은 응답을 받는 데 있기 때문이다. 응답이 없는 기도는 헛된 기도이다. 그리스도인은 기도에 응답받기를 배워야 한다. 여러분이 이미 주님을 믿었으므로 여러분의 기도가 하나님께 들으신바 되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듣지 않으시는 기도는 소용이 없다. 여러분은 응답받을 때까지 기도해야 한다. 기도는 다만 영적인 수양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더욱 하나님의 응답을 얻기 위한 것이다.
기도는 상당히 배우기 쉽지 않은 일이다. 아마 어떤 사람은 그리스도인이 된 지 삼사십 년이 되었어도 이 공과를 철저히 배우지 못했을 것이다. 기도는 참으로 간단한 것이 아니다. 그러나 다른 면에서 사람이 주님을 믿은 즉시 기도할 수 있을 정도로 기도는 쉽다. 기도의 문제는 가장 심오하고도 가장 단순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 심오함의 깊이가 사람이 일생토록 배워도 다 배우지 못할 만큼 깊다고 느끼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많다. 그러나 그 단순함은 주님을 믿는 즉시 기도할 수 있고 하나님의 응답을 받을 수 있을 정도로 단순하다. 만일 새 신자들이 기도에서 좋은 시작을 갖는다면 자주 기도의 응답을 얻게 될 것이다.

만일 시작을 잘못하면 삼사 년이 지나도 기도의 응답을 조금도 받지 못할 수 있다. 만일 이 기초가 견고하지 않으면 나중에 되돌아와서 더 큰 힘을 들여야 한다. 그러므로 사람은 주님을 믿은 즉시 하나님에게서 기도의 응답을 받는 것을 배워야 한다. 주님을 믿는 모든 사람은 이것을 주의하기 바란다.


Ⅱ. 기도에 응답을 얻는 조건들

우리가 성경 안에서 기도에 응답을 얻는 많은 조건들을 찾아낼 수 있지만 그것들 중 기본적인 조건은 오직 다섯 가지뿐이다. 우리는 만일 여러분이 이 몇 가지 조건대로 행한다면 기도에 대한 응답을 얻을 것이라고 믿는다. 또한 우리는 이 몇 가지 조건들이 수년 간 기도해 온 사람에게도 적용될 수 있다고 믿는다. 이것들은 기본적인 조건이므로 우리가 주의하지 않을 수 없다.


A.. 요구해야 함

모든 기도에는 마땅히 하나님 앞에서 참된 간구가 있어야 한다. 구원받은 후 매일 기도하는 한 형제가 있었다. 어느 날 한 자매가 와서 그에게 “당신의 기도를 하나님께서 들으셨습니까?”라고 물었다. 그는 ‘기도하기만 하면 되지, 무슨 듣고 안 듣는 문제가 있는가?’ 하며 그런 말을 이상하게 느꼈다. 어쨌든 그때부터 그는 기도를 하나님께서 들으시도록 요구하기 시작했다. 그러고 나서 그는 하나님께서 그의 기도를 얼마나 들어주셨는지를 생각하다가 후에 자신의 기도가 공허하고 아프지도 않으며 가렵지도 않아서 하나님께서 들으실 필요도 없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것은 마치 내일 해가 뜨도록 기도해도 해가 뜨고, 기도하지 않아도 해가 뜨는 것과 같았다. 그가 그리스도인이 된 지 일 년이 되었는데도 그의 기도는 한 가지도 하나님의 응답을 받지 못했다. 그가 무릎을 꿇고 계속 많은 말을 했지만 무엇을 구하는지 말하지 않았기 때문에 실지로는 구하지 않은 것과 다름없었다.
주님은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라고 말씀하셨다. 만일 여러분이 벽을 두드린다면 주님은 여러분에게 벽을 열어 주지 않으실 것이다. 만일 여러분이 진실로 문을 두드린다면 주님은 참으로 여러분에게 문을 열어 주신다. 여러분이 들어가야 한다고 말한다면 주님은 들어가게 하신다. 주님은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라고 말씀하셨다. 여기에 한 가지 물건이 있고 저기에 또 다른 물건이 있는데 여러분은 무엇을 원하는가? 여러분은 한 가지만을 찾아야 한다. 여러분은 이것도 좋고 저것도 좋다고 말할 수 없다. 하나님은 여러분이 대체 무엇을 원하고 무엇을 구하는지를 아셔야 그것을 주실 수 있다. 그러므로 구한다는 것은 오로지 한 가지를 구한다는 뜻이다. 여러분이 요구한다는 것은 바로 찾는다는 것이요 문을 두드린다는 뜻이다. 예컨대 여러분이 여러분의 아버지에게 무엇을 구한다 하자. 여러분은 반드시 무엇 무엇이 필요하다고 말해야 한다. 여러분이 약을 사러 약국에 갈 때에도 무슨 약을 달라고 말해야 하고 반찬을 사러 시장에 갈 때에도 무슨 반찬을 달라고 말해야 한다. 이상하게도 어떤 사람은 하나님 앞에 나가서 무엇을 원하는지 말하지 않는다. 여기서 주님은 여러분이 무언가 구하는 것이 있어야 하고 또한 전일하게 구해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문제는 구하지 않는 데 있다. 방해물은 우리 쪽에 있다. 응답을 원하지 않는 포괄적인 기도를 하지 말고 여러분의 부족한 것과 원하는 것을 말해야 한다.
새로 믿은 사람들은 기도하기를 배우되 전일한 목표를 가지고서 기도의 공과를 배워야 한다.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함이요.” 많은 사람은 기도의 행위가 있지만 구하는 것이 없다. 여러분이 하나님 앞에서 한두 시간을 들이고 심지어 일주일을 소비했는데도 아무것도 구하지 않았다면 이것은 아무 소용이 없다. 여러분은 하나님 앞에 무언가 구하기를 배워야 한다. 여러분이 문을 두드리려고 한다면 실지로 어떤 문을 두드려야 한다. 여러분이 들어갈 문을 정확하게 보았다면 그 문을 두드리라. 여러분이 어떤 것을 찾을 때 아무것이나 다 좋다고 말하지 말고 전일하게 어떤 것을 구해야 한다. 여러분은, 집회 중에 일어나 이삼십 분 간 기도를 했지만 ‘무엇을 얻고자 하는가?’라는 질문에 모른다고 대답하는 어떤 형제와 같지 말아야 한다. 많은 사람은 길게 기도하기를 배우지만 구하는 것이 없다. 이것은 참으로 이상한 일이다.
여러분은 반드시 전일하게 기도하기를 배워야 한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기도를 들으셨는지 듣지 않으셨는지를 알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기도를 들으시든지 들으시지 않든지 상관없게 된다. 그럴 때 여러분이 어려움을 당하여 기도할지라도 통하지 않을 것이다. 참된 필요가 있을 때 대충하는 기도는 통하지 않는다. 만일 기도가 대충하는 것이고 전일한 기도는 어려운 것이라 생각한다면 여러분은 이 어려움을 절대 해결할 수 없게 된다. 전일한 기도가 있어야 전일한 기도의 어려움을 처리할 수 있다.



 

B. 잘못 구하지 않음

하나님 앞에서 우리에게는, 마땅히 구해야 하지만 또한 잘못 구해서는 안 되는 두 번째 조건이 있다. “(너희가)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 잘못 구함이니라”(약 4:3). 우리는 어떤 필요 때문에 하나님께 구할 수 있을 뿐, 아무 이유 없이 범위를 벗어나서 제멋대로 구할 수 없다. 우리에게 필요하지 않은 것들을 자신의 정욕과 육체에 따라 제멋대로 잘못 구해서는 안 된다. 그렇게 구하는 것은 헛된 기도가 된다. 물론 때때로 하나님께서 “우리의 온갖 구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에 더 넘치도록”(엡 3:20) 우리에게 주시지만 이것은 별개의 일이다.
잘못 구함은 곧 자신의 분량과 필요와 자신의 참된 결핍을 벗어나서 구하는 것이다. 여러분에게 필요한 것이 있을 때 하나님께 구할 수 있다. 여러분에게 필요한 만큼 주시도록 하나님께 구하라. 여러분의 필요를 넘어서 구하는 것은 바로 잘못 구하는 것이다. 여러분에게 큰 필요가 있다면 하나님께 그 필요에 따라 주시도록 구할 수 있다. 만일 필요 이상으로 구한다면 이것은 잘못 구하는 것이다. 제멋대로 이것저것을 구할 것이 아니라 여러분의 분량과 필요와 여러분의 결핍에 따라 구해야 한다. 제멋대로 구하는 것은 잘못 구하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응답을 얻지 못한다. 하나님 앞에서 잘못 구하는 것은 네 살 된 아이가 아빠에게 “제게 하늘에 있는 달을 가져다주세요.”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하나님은 사람이 잘못 구하는 기도를 듣기 싫어하신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실제의 필요를 넘어서 입을 잘못 크게 벌려 구하지 말고 합당한 범위 안에서 기도하기를 배워야 한다.




C. 죄를 처리해야 함

어떤 사람은 하나님께 요구했고 잘못 구하지도 않았지만 하나님은 아직 그의 기도를 듣지 않으셨다. 이것은 기본적인 방해, 그와 하나님 사이에 죄의 방해가 있기 때문이다. “내가 내 마음에 죄악을 품으면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리라”(시 66:18). 주님은 마음(‘마음’이라는 단어를 주의하라)에 자기가 알고 있는 뚜렷한 죄를 품고 미련을 두어 남겨 둔 사람의 기도를 듣지 않으신다. 그에게 이런 방해가 있기 때문에 주님은 그의 기도를 들으실 수 없다. “마음에 죄악을 품는다.”라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이것은 여러분이 마음속에서 어떤 죄에 대해 미련을 두고 스스로 알면서도 계속 보류해 둔다는 말이다. 이것은 행위와 겉모양에 악함이 있을 뿐 아니라 마음에 그것을 품는 것이다. 이것은 로마서 7장의 그 사람과 다르다. 그에게 실패가 있었지만 그의 행위는 그가 미워하는 바였다. 그러나 여기서 말한 사람은 마음에 그 죄를 품고 남겨 두며 그것에 미련을 두고 버리지 못하는 사람이다. 그는 죄의 행위를 버리지 못할 뿐 아니라 죄를 마음속에서 버리지 못한다. 주님은 이런 사람의 기도를 듣지 않으신다. 여러분에게 한 가지 죄만 있어도 그것은 여러분의 기도에서 하나님께서 들으시는 것을 방해하기에 충분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더 이상 버리기 아까워하는 죄를 마음에 남겨 두지 말고, 모든 죄를 죄로 인정하여 그것들을 피 아래 두어야 한다. 주님은 우리의 약함을 체휼하실 수는 있지만 우리 마음에 죄악을 품는 것을 내버려 두실 수는 없다. 여러분이 겉으로 모든 죄에서 벗어났다 하더라도 마음에 죄악을 품고 그것에 미련을 두고서 버리지 못한다면 여러분은 기도해도 소용이 없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그리스도인이 될 때부터 하나님께, 여러분이 실족하지 않고 행위에서 거룩해지도록 지켜 달라고 은혜를 구해야 한다. 동시에 마음속에서 모든 죄를 미워하고 마음에 어떤 죄악도 품지 말고 남겨 두지도 말아야 한다. 만일 죄가 여러분 안에 있다면 여러분은 기도해도 소용이 없을 것이고, 주님은 여러분의 기도를 듣지도 않으실 것이다. “자기의 죄를 숨기는 자는 형통치 못하나 죄를 자복하고 버리는 자는 불쌍히 여김을 받으리라.”(잠 28:13) 여러분의 죄를 자복하고 주님께 이렇게 말하라. “내 마음에 품고 버리지 못하는 한 가지 죄가 있사오니 이제 나를 용서하여 주소서. 내가 이 죄에서 벗어나고자 하오니 이 죄에서 나를 해방하사 이 죄가 내게 있지 않게 하옵소서. 나는 이 죄를 버리고 거절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자복할 때 여러분은 용서를 받게 되고, 주님은 여러분을 통과시키실 것이다. 이렇게 할 때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기도를 들으신다. 이 일을 결코 함부로 풀어놓지 말아야 한다. 구하지 않으면 얻지 못하고 잘못 구하여도 얻지 못한다. 하나님께 구하기도 했고 잘못 구하지도 않았다 하더라도 마음에 사랑하고 중히 여기는 죄를 남겨 둘 때 여러분은 주님께서 여러분의 기도를 들으시도록 하지 못한다.

D. 믿어야 함

또 한 가지 조건은 적극적인 면에서 믿는 것이다. 이것도 부족해서는 안 된다. 이것이 결핍될 때 기도는 소용없게 된다. 마가복음 11장의 이야기는 기도할 때 믿어야 함을 상당히 분명히 말한다. 주 예수님은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라고 말씀하셨다. 여러분이 여러분의 구한 것을 ‘받은 줄’로 믿으면 그대로 된다. 우리는 사람이 주님을 믿은 첫 주 안에 믿음이 무엇인지를 알기 바란다. 여기서 주님은 받은 줄로 믿으면 그대로 되리라고 말씀하셨다. “그대로 되리라”라고 믿는 것이 아니라 ‘받은 줄로’ 믿는 것이다. 여기서 주 예수님은 두 번의 받음, 곧 ‘이미 받았음’(개역 성경: ‘받은 줄’)과 ‘받을 것이요’(개역 성경: ‘그대로 되리라’)를 언급하셨다(중국어 성경 참조). 주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믿음’은 ‘받은 줄’에 기초를 둔다. 믿음이란 무엇인가? 곧 ‘받은 줄로’ 믿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종종 ‘믿음’이라는 단어를 ‘받은 줄’에서 잡아내려 ‘그대로 되리라’ 위에 걸어 놓는 과오를 범한다. 그들은 주님께 기도할 때 ‘받을 것이라고 믿는다’를 큰 믿음으로 생각한다. 그들은 이 산을 바다에 던지라고 기도할 때 산이 바다에 던져질 것이라고 믿으면 스스로 이 믿음을 크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것은 믿음을 ‘받은 줄’에서 잡아내려 ‘그대로 되리라’ 위에 걸어 놓는 것이다. 성경의 이 말씀은, 우리의 믿음이 ‘그대로 되리라’고 믿는 것이 아니라 ‘받은 줄’로 믿는 것임을 말한다. 이 두 가지는 전혀 다른 것이다. 이것은 새 신자들이 필수적으로 배워야 할 뿐 아니라 주님을 믿은 지 오래된 사람도 배워야 한다.
그러므로 믿음이란 무엇인가? 믿음은 곧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기도를 들어주실 것이라는 느낌이 아닌,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기도를 이미 들으셨다는 느낌을 갖는 것이다. 여러분이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서 나의 기도를 들으심을 감사드립니다. 이 일은 문제가 없음을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라고 한순간 기도하는 것이 바로 믿음이다. 이것이 바로 ‘받은 줄’로 믿는 것이다. 혹 여러분은 무릎을 꿇고 기도하다가 일어나서 “하나님께서 반드시 나의 기도를 들으실 것을 믿습니다.”라고 말할 것이다. ‘반드시’가 있을 때 그것은 안 통한다. 여러분이 몇 번 더 ‘믿는다’ 하더라도 효력이 없다. 예를 들어, 여러분이 한 병자를 위하여 기도하는데 그가 “나는 치료되었음을 하나님께 감사드린다.”라고 말했다 하자. 열이 여전히 높고 조금도 변화가 없다 할지라도 그의 속에서 분명하므로 아무 문제가 없을 것이다. 만일 그가 “오, 나는 주님께서 나의 병을 치료하실 것을 믿습니다.”라고 말한다면 그다음에는 많은 ‘믿음’이 있어야 한다. 주 예수님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그대로 되리라”라고 말씀하셨다. 그분은 그대로 되리라고 믿으면 받는다고 말씀하지 않으셨다. 순서가 뒤바뀌어서는 안 된다. 형제자매는 이 비결을 보았는가? 참된 믿음은 ‘이미 이루어진 것’이요 하나님께서 기도를 들으셨음에 대한 감사이다.
믿음이 무엇인지에 대하여 조금 더 살펴보기로 하자. 마가복음에 나타난 질병의 치유와 같은 구체적인 사례들을 통해 무엇을 가리켜 믿음이라고 하는지를 설명할 수 있다. 마가복음 안에는 특별히 기도에 대하여 유용한 세 마디가 있는데, 첫 번째는 주님의 능력의 문제이고, 두 번째는 주님의 뜻의 문제이며, 세 번째는 주님의 행함의 문제이다.


(1) 주님의 능력의 문제―하나님은 하실 수 있음
먼저 마가복음 9장을 보기로 하자.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22절). 우리는 ‘할 수 있거든’이라는 말을 강조할 수 있다. 중국어 성경에는 23절의 ‘믿음’이란 단어에 드러냄표가 찍혀 있는데, 그 의미는 이 단어가 원문에는 없다는 뜻이다. 우리는 다시 23절의 ‘할 수 있거든’에 인용 부호를 더하고 또한 감탄 부호를 더해야 한다. 이제 21절부터 23절까지를 읽어보자. “예수께서 그 아비에게 물으시되 언제부터 이렇게 되었느냐 하시니 가로되 어릴 때부터니이다 귀신이 저를 죽이려고 불과 물에 자주 던졌나이다 그러나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 주옵소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그 아이의 아비는 주 예수님께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우리를 도와 주옵소서”라고 말했다. 그러자 주님은 즉시 그에게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라고 말씀하셨다. 주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할 수 있거든’은 바로 그 아이의 아비가 말한 ‘하실 수 있거든’이다. 주 예수님은 그 아이의 아비가 한 말을 반복하셨다. 그 아이의 아비는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우리를 도와 주옵소서”라고 말했고, 주 예수님은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라고 말씀하셨다. 여기서는 ‘할 수 있거든’의 문제가 아니라 믿음이 있는가, 없는가의 문제이다.
첫 번째 해결해야 할 문제는, 바로 사람이 어려움을 당할 때 의심으로 가득하여 하나님의 능력을 믿지 않는 것이다. 마치 어려움의 능력이 하나님의 능력보다 더 큰 것 같다. 그러나 그 아이의 아비가 하나님의 능력을 의심할 때 주 예수님은 그를 책망하셨다. 성경 안에서 주 예수님께서 이렇게 사람의 말을 끊으시는 예는 상당히 찾아보기 어려운 것이다. 주님께서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라고 하신 말씀은 분노하여 하신 말씀 같다. 그 아이의 아비가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우리를 도와 주옵소서”라고 말할 때 주 예수님은 그를 책망하셨는데, 이것은 “어찌 ‘무엇을 할 수 있거든’이라고 말하는가? ‘할 수 있거든’이라고!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이것은’할 수 있거든’의 문제가 아니라 네가 믿는가, 믿지 않는가의 문제이다. 어떻게 내게 할 수 있는지 없는지를 묻는가!” 라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은 기도할 때 머리를 들고 주님을 앙망하며, “주여! 당신은 하실 수 있습니다.”라고 말하기를 배워야 한다.
마가복음 2장에는 주님께서 중풍에 걸린 한 사람을 치료하신 일이 기록되어 있다. 주님은 그 중풍병자에게 “소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5절)라고 말씀하셨다. 몇몇 서기관들은 마음에 의논하기를, “이 사람이 어찌 이렇게 말하는가 참람하도다 오직 하나님 한 분 외에는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느냐”(7절)라고 했다. 그들은 마음속으로, “오직 하나님만 죄를 사하실 수 있지 어찌 이 같은 사람이 할 수 있는가?”라고 생각했다. 그들이 생각하기에 죄 사함은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나 주님은 그들에게 “어찌하여 이것을 마음에 의논하느냐 중풍병자에게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는 말과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걸어가라 하는 말이 어느 것이 쉽겠느냐”(8-9절)라고 말씀하셨다. 주님은 그들에게, 이 일에 있어서 사람의 문제는 할 수 있는지 없는지 이지만 그분에게는 할 수 있고 없고의 문제가 없으며 어느 것이 더 쉬운가의 문제만 있음을 보여 주고자 하셨다. 사람이 보기에는 죄를 사하는 것과 중풍병자에게 일어나 걸으라고 하는 것이 다 불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주님은 그들에게, 그분께서 죄를 사하실 수도 있고 또한 중풍병자를 일으켜 걷게 하실 수도 있음을 보여주고자 하셨다. 죄 사함이나 중풍병자를 일으켜 걷게 하는 것은 다 주님께는 쉬운 일이다. 여기에서 주님께서 행하신 것은 우리에게 ‘하나님은 하실 수 있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기도에 있어서 반드시 알아야 할 한 가지는 바로 ‘하나님은 하실 수 있으심’이며 주님께는 ‘어려운’ 일이 결코 없다는 것이다.


(2) 주님의 뜻의 문제―하나님은 원하심
주님께서 능하시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분께서 치료하시기를 원하신다는 것은 어떻게 아는가? 나는 그분의 뜻을 알지 못하는데, 주님께서 나를 치료하시기를 원하지 않으시면 어떻게 하는가? 여기서 또 다른 하나의 사례를 보기로 하자. 마가복음 1장 41절은 “예수께서 민망히 여기사 손을 내밀어 저에게 대시며 가라사대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신대”라고 말한다. 여기서는 하나님께서 하실 수 있고 없고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원하시는지 원하시지 않는지의 문제가 있다. 그분의 능력이 아무리 클지라도 그분께서 원하시지 않는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만일 그분께서 우리의 병을 치료하기를 원하시지 않는다면 그분의 능력이 아무리 클지라도 그것은 우리와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첫 번째 문제의 해결은 하나님은 하실 수 있다는 것이며, 두 번째 문제의 해결은 바로 하나님께서 원하신다는 것이다. 주 예수님은 문둥병 든 사람에게 “내가 원하노니”라고 말씀하셨다. 구약은 문둥병이 매우 불결한 병임을 말해 준다(레 13-14장). 누구든지 문둥병 든 사람과 접촉하면 그 더러움에 오염된다. 그러나 주님의 사랑은 너무나 크시다. 그러므로 그분께서 “내가 원하노니”라고 말씀하시고 주님의 손을 내밀어 그를 만지시자, 그가 깨끗해졌다. 문둥병 든 사람이 주님께 간구했을 때, 주님께서 기꺼이 그를 깨끗하게 하셨을진대 주님께서 우리의 병을 치료하기를 원하시지 않겠는가? 또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려 하시지 않겠는가?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은 하실 수 있으시며’, ‘하나님은 원하신다’라고 말할 수 있다.

 


(3) 주님의 행하심의 문제―하나님은 이미 하셨음
우리가 ‘하나님은 하실 수 있으시며’, ‘하나님은 원하신다’라는 것을 알지만, 이것만으로는 여전히 부족하다. 우리는 한 가지를 더 알아야 하는데, 이것은 ‘하나님은 하셨다’라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앞에서 언급했던 마가복음 11장 24절로 되돌아가야 한다.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여기서는 ‘하나님께서 하셨다’라는 것을 다루고 있다.
무엇을 믿음이라고 하는가? 믿음은 하나님께서 능하시며 또한 하나님께서 원하심을 믿을 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미 하셨고 이미 성취하셨음을 믿는 것이다. 만일 여러분이 받은 줄로 믿는다면 틀림없이 받을 것이다. 만일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말씀을 주셔서 하나님께서 하실 수 있고 또한 하나님께서 원하신다는 것을 믿고 확신을 가졌다면, 여러분은 하나님께 감사하며 ‘하나님은 이미 하셨다’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 점에 있어서 분명하지 않기 때문에 기도의 응답을 얻지 못한다. 그들은 줄곧 얻기를 바라고 있다. 그러나 바라는 것은 장래의 일이고, 믿음은 과거의 일이다. 모든 참된 믿음은 다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당신은 이미 나의 병을 치료하셨습니다.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나는 이미 얻었습니다.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나는 깨끗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나는 치유되었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믿음이 온전하게 될 때, ‘하나님은 하실 수 있으시며’, ‘하나님은 원하신다’라고 말할 뿐 아니라 또한 ‘하나님은 하셨다’라고 말할 수 있다.
하나님은 이미 기도를 들으셨다! 하나님은 이미 성취하셨다. 누구든지 얻은 것으로 믿는 사람은 반드시 얻을 것이다. 많은 때 우리의 믿음은 다 ‘얻을 것이다’라는 믿음이다. 따라서 결코 얻지 못한다. 우리는 반드시 ‘얻었다’라는 믿음을 가져야 한다. 믿음은 다 ‘이루어졌다’


라는 것을 말하는 것이지 ‘이루어질 것이다’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복음을 들었다고 하자. 여러분이 그에게 “당신은 주 예수님을 믿었습니까?”라고 물을 때에는 그가 “믿었습니다.”라고 대답했지만, “당신은 구원을 받았습니까?”라고 물을 때에는 “나는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라고 대답한다면 여러분은 이것이 틀렸음을 안다. 다시 그에게 “당신은 구원을 받았습니까?”라고 물었는데 그가 “나는 틀림없이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라고 대답한다면, 여러분은 이것도 틀렸다는 것을 안다. 다시 그에게 “당신은 틀림없이 구원을 받을 것을 확신합니까?”라고 되묻자 그가 “나는 구원받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라고 대답한다면, 아무리 생각해도 그 풍기는 냄새가 옳지 않다. 그가 “나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 “나는 틀림없이 구원받을 것이다”, “나는 반드시 구원받을 것이라고 생각한다”라고 말하는 것은 아무래도 그 풍기는 냄새가 옳지 않다. 만일 그가 “나는 구원받았다!”라고 말한다면, 그 풍기는 냄새가 옳은 것이다. 사람은 믿으면 구원받는다. 마찬가지로 모든 믿음은 다 ‘이미’ 이루어진 것을 믿는 것이며 다 구원받는 믿음과 같은 것이다. 일단 믿었다면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나는 이미 얻었습니다.”라고 말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은 할 수 있으시다’, ‘하나님은 원하신다’, ‘하나님은 하셨다’라는 이 세 마디를 견고하게 붙잡아야 한다.
믿음은 결코 심리 작용이 아니다. 믿음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얻은 것이요 하나님께서 하실 수 있음과 하나님께서 원하심과 하나님께서 하셨음을 확신 있게 믿는 것이다. 만일 하나님의 말씀을 얻지 못했다면 결코 영적인 모험으로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아야 한다. 심리 작용은 믿음이 아니다. 질병을 예로 들어, 만일 누구든지 참된 믿음으로 하나님의 치유를 받았다면 의사에게 가서 검진을 받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막 1:44). 확실히 하나님의 치료를 받은 사람이 의사에게 가서 검진을 받는다면 틀림없이 심리 작용이 아니라 실제로 이미 치료되었음이 증명될 것이다.






또한 갓 구원받은 형제자매들은 배우기 시작할 때 기도에 두 단계가 있음을 보아야 한다. 첫 번째 단계는 약속이 없는 상태에서 약속을 얻기까지 기도하며, 하나님의 말씀이 없는 상태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얻기까지 기도하는 것이다. 모든 기도는 처음 시작할 때 대부분이 하나님께 구하는 기도이다. 계속하여 구하고 또 구하여 설령 삼 년, 오 년을 기도하더라도 여전히 구하게 된다. 어떤 기도는 일 년만 지나도 하나님께서 들으시지만, 어떤 기도는 기도한 지 수년이 지났는데도 하나님은 여전히 듣지 않으신다. 이 단계는 간구하는 기간이다. 두 번째 단계는 약속을 얻고 약속이 실현되기까지 기도하는 것이며, 말씀을 얻고서 말씀이 성취되기까지 기도하는 것이다. 이 단계는 찬미의 기간이다. 이 단계 안에서는 마땅히 간구하는 것이 아니라 찬미해야 한다. 첫 번째 단계 안에서는 간구요, 두 번째 단계에서는 찬미이다. 첫 번째 단계 안에서는 말씀이 없었다가 말씀을 얻기까지 기도하는 것이고, 두 번째 단계 안에서는 말씀을 얻고서 주님을 찬미하며 기도의 응답이 있기까지 찬미하는 것이다. 이것이 기도의 비결이다.


어떤 사람들은 기도가 단지 자기에게 어떤 것이 없을 때 무릎 꿇고 하는 것이고 그 결과 하나님께서 주시기 때문에 갖게 되는 것이라고 이해한다. 내가 주님께 시계를 구한 뒤 며칠이 지나서 주님께서 내게 시계를 주셨다고 가정해 보자. 이것은 곧 빈손이었다가 무언가를 소유하는 것으로서 앞에서 말한 그 두 가지를 말한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그 사이에 또 한 가지, 곧 우리의 믿음이 있음을 알지 못한다. 여기에 두 가지 경우가 있다. 하나는 내가 시계를 구했는데 어느 날 하나님께서 내 기도를 들어주셔서 그분께 감사하는 것이다. 또 하나는 현재 두 손이 비어 있어도 며칠 후에 시계를 갖게 된다는 확신이 있는 것이다. 우리는 시계가 있고 없는 두 가지가 아니라 세 가지가 있다는 것을 보아야 한다. 시계가 있는 것과 없는 것 사이에는 또 한 가지, 곧 하나님께서 내게 말씀과 약속을 주시는 것과 내가 그것을 믿고 기뻐하는 것이 있다. 간구한 지 삼 일째 되는 날에야 시계가 내 손에 들어올지라도 영 안에서는 삼 일 전에 이미 얻은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마땅히 영 안에서 이런 얻음을 소유해야 한다. 그러므로 영 안에서 얻었다는 이런 느낌이 없다면 그것은 믿음이 없는 것이다.

 새로 믿은 사람들은 믿음이 무엇인지를 알고 또 어떻게 기도하는지를 배우기 바란다. 어쩌면 여러분이 삼사 일, 일 개월, 일 년 간 계속 기도하였는데도 아직 두 손이 비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일이 성취되었다는 확신이 약간이라도 있을 때에는 손에 물건을 소유할 때까지 하나님을 계속 찬미해야 한다. 간단히 말해서, 첫 단락은 물건이 없는 데에서 믿음이 있을 때까지 기도하는 것이고 둘째 단락은 믿음이 있는 데에서 물건을 소유할 때까지 찬미하는 것이다.

왜 두 단락으로 나누어야 하는가? 왜냐하면 사람이 물건 없는 데에서 믿음이 있을 때까지 기도한 후 또 여전히 기도할 때, 오히려 믿음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믿음이 생긴 후에는 찬미해야 한다. 그러나 믿음이 생긴 후에도 간구한다면 믿음 있는 데에서 믿음 없는 데로 떨어지고 구하는 바를 얻지 못한다. ‘그대로 되리라’는 손으로 얻는 것이고 ‘얻은 줄로 믿는 것’은 영 안에서 얻는 것이다. 믿음은 있으나 아직 구하는 바를 얻지 못했을 때에는 간구가 아니라 찬미로 그분을 재촉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다고 하셨는데 우리가 또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 여러분 속에 ‘얻은 줄로 믿는다’라는 확신이 있는데 또 무엇을 구하는가?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믿음이 생길 때까지 구한 후에는 더 이상 구할 수 없다는 체험을 갖는다. 여러분은 오직 “주여, 당신을 찬미합니다.”라고 말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여러분은 믿음을 지키면서 “주여, 당신이 나의 기도를 들으심을 찬양합니다.", "주여, 지난날에 이미 내 기도를 응답하신 것을 찬미합니다.”라고 말하라. 이럴 때 여러분은 그것을 얻게 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어떤 사람들은 지식이 부족해서 하나님께서 이미 약속하셨는데도 간구하고 여전히 간구함으로써 오히려 믿음을 잃게 된다. 이것은 매우 큰 손실이다. 마가복음 11장 24절 말씀은 얼마나 귀한지! 신약 전체에서 이곳보다 더 정확하게 무엇이 믿음인지를 나타낸 곳이 없다.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만일 여러분이 이것을 보았다면 참된 기도가 무엇인지를 알게 될 것이고 기도는 여러분의 실재가 될 것이다.

E. 계속 구해야 함

기도에 있어서 또한 계속적이고 끊이지 않기를 주의해야 한다. 누가복음 18장 1절은 “항상 기도하고 낙망치 말라”라고 말한다. 어떤 것은 주님께서 번거롭게 느끼셔서 들어주지 않으시면 안 될 정도로 계속 구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또 다른 종류의 믿음이다. 주님은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볼 수 있겠느냐”라고 말씀하셨다. 여기서 말한 믿음은 앞에서 말한 것과 다르나 상충되지는 않는다. 마가복음은 믿음을 소유할 때까지 구해야 함을 말하고 여기서는 끊임없이 구할 것을 말한다. 나는 내가 하나님께 끊임없이 기도할 때 언젠가 하나님께서 들어주신다고 믿는다. 나는 들어주시는가의 여부를 상관하지 않고 다만 하나님께서 들어주실 때까지 기도하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의 기도는 믿을 만하지 못하다. 그들은 하루, 이틀, 석 달을 기도하고 나서 그들이 기도한 것을 잊어버린다. 어떤 사람은 한 번 기도하고 그만두는데 이것은 그의 간청이 아니기 때문이다. 여러분의 기도 중에 두 번째, 세 번째, 다섯 번째, 열 번째로 하는 기도가 얼마나 되는지 계산해 보라. 여러분은 자신도 잊어버린 기도를 하나님께서 들어주시기를 바라고 있는가? 어찌 여러분이 무심한 기도를 하나님께서 유심히 들어주시기를 바랄 수 있는가? 어찌 여러분도 잊어버린 기도를 하나님께서 기억하고 들어주시기를 바랄 수 있겠는가? 사실상 여러분은 근본적으로 그것을 구한 것이 아니다. 여러분이 참으로 원하는 것은 계속 구하게 되고 원하지 않는 것은 계속 구하지 않기 마련이다. 어쩌면 여러분은 핍박받는 어떤 환경 안에서나 무언가 필요한 상태 안에서 어떤 감동을 받아야만 끊임없이 기도하게 될 것이다. 그런 기도는 십 년이 지나도 잊어버리지 않을 것이고, 또한 “주여! 당신이 일하시지 않으면 계속 구하겠습니다.”라고 말하게 될 것이다.
여러분이 어떤 것을 구할 때 하나님을 번거롭게 할 수 있다. 만일 여러분이 참으로 그것을 원한다면 하나님께서 응답하실 때까지 구하라. 여러분이 하나님께서 듣지 않으시면 안 될 정도로 구할 때 하나님은 들어주실 것이다.




 

Ⅲ. 기도의 실행 방법

그리스도인은 장부를 적듯이 기도 항목을 적기 위해 매년 기도 노트를 한 권씩 준비할 수 있으면 좋다. 각 면을 네 칸으로 나누고 첫 칸은 기도를 시작한 날짜를, 둘째 칸에는 기도 항목을, 셋째 칸에는 응답받은 날짜를, 넷째 칸에는 하나님께서 어떻게 기도에 응답하셨는지를 기록하라 이렇게 할 때 일 년 동안 여러분이 하나님께 얼마나 구했고, 하나님께서 얼마나 여러분의 기도를 들어주셨으며, 무엇이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는지를 알게 된다. 새로 믿은 그리스도인은 반드시 기도 노트를 구비해야 한다. 주님을 믿은 지 몇 년 된 형제자매들도 기도 노트를 갖추는 것이 좋다.
기도 노트를 기록하는 가장 큰 목적은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기도를 들어주셨는지를 알기 위해서이다. 하나님의 응답이 없을 때에는 필히 여러분에게 문제가 있을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열심히 주님을 섬기는 것은 매우 좋은 것이지만 기도의 응답이 없다면 열심도 소용없다. 왜냐하면 하나님 편으로 가는 길이 막히면 사람 편으로 가는 길도 막히고, 하나님 앞에서 능력이 없으면 사람 앞에서도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능력 있는 사람이 되기를 구할 때 비로소 사람 앞에서 유용하게 된다. 백사십사 명의 이름을 기록하고 그들의 구원을 위해 기도한 한 형제가 있었다. 어떤 사람의 이름은 오전에 기록했는데 그 사람이 오후에 구원을 받았다. 결국 십팔 개월이 지난 후 두 사람을 제외하고는 다 구원을 받았다. 이것은 아주 좋은 본이다. 하나님께서, 기도 노트를 사용하는 그리스도인들을 많이 얻으시기 바란다. 여러분도 이 방법을 실행하기 바란다. 여러분은 여러분이 기도한 건수와 하나님께서 기도를 들어주신 건수를 하나하나 기입해야 한다. 기도 노트에 기록된 항목 중에 하나님의 응답을 받지 않은 것은 계속 기도해야 한다. 오직 하나님의 뜻이 아님을 보여 준 항목에 한해서만 기도를 멈출 수 있다. 그 외에는 응답받을 때까지 풀어놓지 말고 계속 기도해야 한다. 여러분은 처음부터 엄한 훈련을 거쳐야 한다. 하나님 앞에서 여러분이 얻을 때까지 기도할 수 있도록 진지하게 기도하라.
기도 노트를 사용할 때, 여러분은 매일 기도해야 할 일과 돌아가면서 매주에 한 번씩 기도해야 할 일도 있음을 주의하라. 이것은 여러분이 기도하는 양에 따라 결정해야 한다. 만일 여러분이 구할 것이 적다면 여러분은 노트에 적은 일들을 위해 매일 기도할 수 있다. 만일 기도 항목이 많다면 월요일은 몇 번에서 몇 번까지, 화요일은 몇 번에서 몇 번까지 기도하도록 안배할 수 있다. 우리가 다른 일을 하기 위해 시간을 안배하듯이 기도를 위해서도 전일한 시간을 가져야 한다. 전일한 기도가 없으면 기도 노트를 사용하지 않게 된다. 만일 여러분의 기도가 다 전일한 것이라면 여러분은 기도 노트를 준비하여 그것을 성경 찬송가와 함께 두고 매일 응용할 것이다. 날짜가 오래될 때 여러분은 어떤 기도가 이미 응답되었고 어떤 기도가 아직 응답받지 않았는지를 계산할 수 있다. 항상 기도 노트에 따라 전일한 기도를 할 수 있는 것은 하나의 축복이다.
마태복음 6장에서 주님이 가르치신 기도와 디모데전서 2장에서 말한 기도 및 하나님께서 교회에게 빛과 생명과 은혜와 은사를 주시도록 구하는 기도는 큰 항목이므로 일반 기도 항목에 나열하지 말고 매일 그것들을 위해 하나님 앞에 간구하라.
기도에는 기도하는 쪽과 기도를 듣는 쪽이 있다. 많은 경우 기도를 듣는 쪽에 변화가 있도록 하기 위해서는 기도하는 쪽이 먼저 변해야 한다. 하나님 쪽의 상태가 변하지 않았다면 반드시 우리 쪽에서 그분께 다음과 같이 말해야 한다. “주여! 제게서 무엇이 변해야 합니까? 제게 아직 처리되지 않은 어떤 죄가 있습니까? 제가 버려야 할 어떤 애호가 있습니까? 제가 참으로 믿음을 배우고 있습니까? 아니면 제가 배워야 할 다른 어떤 것이 있습니까?” 만일 우리 쪽에 변해야 할 것이 있다면 먼저 그것이 변해야 한다. 우리는 결코 자신이 변하지 않으면서 기도를 듣는 쪽만 변하기를 바랄 수 없다. 사람은 주님을 믿는 즉시 기도의 공과를 진지하게 배워야 한다. 기도의 공과를 철저히 배워야만 하나님을 더 깊이 알 수 있고 풍성한 장래를 갖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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