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장
찬미
“이스라엘의 찬송 중에 거하시는 주여 주는 거룩하시니이다”(시 22:3).
“나의 생전에 여호와를 찬양하며 나의 평생에 내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시 146:2).
“이러므로 우리가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미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거하는 입술의 열매니라”(히 13:15).
“여호와 우리 하나님이여 우리를 구원하사 열방 중에서 모으시고 우리로 주의 성호를 감사하며 주의 영예를 찬양하게 하소서”(시 106:47).
“이에 저희가 그 말씀을 믿고 그 찬송을 불렀도다”(시 106:12).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시 50:23).
찬미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는 일들 중에서 가장 높은 일이다. 성도들의 영적인 생명에서 그 최고의 표현은 하나님에 대한 찬미라고 말할 수 있다. 하나님의 보좌는 우주 가운데서 하나님께서 계신 가장 높은 곳이고 또한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찬미를 ‘보좌’(시 22:3, 원문 참조)로 삼으신다. 하나님의 이름과 그분 자신은 찬미로 인하여 높여진다.
다윗은 하루에 세 번 하나님께 기도하라는 시를 썼고(시 55:17), 또 하루에 일곱 번 하나님을 찬미하라고 말했다(시 119:164). 다윗은 성령의 감동을 받아 찬미가 얼마나 중요한 일인가를 시인했다. 기도는 하루 세 번에 지나지 않지만 찬미는 일곱 번이나 했다. 그뿐 아니라 그는 레위인을 세워 하나님의 언약궤 앞에서 비파와 수금을 타며 하나님을 칭송하고 감사하며 찬미하게 하였다(대상 16:4-6). 솔로몬이 여호와의 전 건축의 모든 일을 마치고 제사장이 언약궤를 들어 지성소에 들여놓고 다시 나올 때에 또 한 무리의 레위인들은 단 옆에 서서 나팔을 불고 노래하며 모든 악기를 울려 일제히 하나님을 찬미하였다. 그때 여호와의 영광이 하나님의 전에 충만하였다(대하 5:12-14). 다윗과 솔로몬 두 사람은 다 하나님의 뜻을 만졌기에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찬미를 그분께 드렸다. 여호와는 이스라엘의 찬미를 보좌로 삼으시기 때문에 우리는 마땅히 평생 여호와를 찬미하고 우리 하나님을 칭송해야 할 것이다.
Ⅰ. 찬미의 제사
성경은 찬미를 매우 중요시하였고 또한 많이 언급하였다. 특히 시편은 찬미의 말씀으로 충만하다. 시편은 구약에 있는 찬미의 책이다. 많은 사람의 찬미는 시편에서 발췌되었다.
그러나 시편에는 찬미의 시만 있지 않고 고통의 시도 있음을 주의하라. 여기에서 우리는 찬미를 발한 사람들에게서, 그들이 이전에 하나님께 이끌리어 감정에 상처 받도록 곤고한 경지를 거쳤음을 볼 수 있다. 우리는 많은 성도들이 하나님에 의해 어두움에 이끌리고 사람들에게서 버림과 비방과 핍박을 받을지라도―“파도와 물결이 나를 엄몰하도소이다”(시 42:7)―하나님은 그들에게서 찬미를 얻으신 것을 본다. 찬미의 말은 순조로운 사람의 입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징계와 연단을 받은 사람에게서 나온 것이다. 시편에서는 가장 깊이 상처 받은 감정을 만질 수 있고 또한 가장 크고도 높은 찬미의 음성을 들을 수 있다. 하나님은 그분의 백성들이 많은 고난과 어려움과 비방을 받을 그때에 그들에게서 찬미를 만들어 내시고, 그들이 그런 처지에서 하나님 앞에서 그분을 찬미하는 사람이 되게 하신다.
그러므로 가장 기쁘다고 느끼는 사람의 찬미 소리가 가장 높은 것은 아니다. 가장 높은 찬미 소리는 많은 경우에 하나님 앞에서 어려움을 거친 사람에게서 나온다. 또한 이런 찬미가 가장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리고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높은 산에 서서 얼굴을 가나안으로 향하고 약속의 땅을 볼 때에만 찬미하라고 하지 않으셨다. 하나님은 더욱 우리가 ‘죽음의 골짜기’를 지날 때에도 시편을 쓰며 찬미할 수 있기를 바라신다. 이것이 참된 찬미이다.
이것은 하나님 앞에서의 찬미의 성질이 어떤지 우리에게 보여 준다. 찬미의 성질은 하나의 제사요 희생이다. 바꾸어 말해서 찬미는 곤고와 곤란 중에 나온 것이다. 히브리서 13장 15절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우리가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미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거하는 입술의 열매니라”. 제사란 무엇인가? 곧 희생이다. 제사는 죽음과 손실이 있다는 것이다. 제사를 드리는 사람은 반드시 잃은 것이 있어야만 제사를 드릴 수 있다. 제사를 드리고 희생을 드리는 그 자체가 일종의 손실이다. 본래 여러분의 것이었던 소나 양을 가져다가 제사로 드린다면 여러분은 한 마리 소나 양을 잃은 것이다. 제사를 드림은 무언가를 획득하는 것이 아니라 잃는 것이다. 성도가 찬미를 드릴 때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기 위하여 무언가를 잃게 된다. 바꾸어 말하면, 하나님은 여러분이 그분 앞에 나아가서 찬미하도록 여러분에게 상처를 주시고 여러분을 부서뜨리시며 깊이 깎아 내리신다. 이렇게 자신이 상처를 입음으로써 하나님께 찬미를 드리는 행위가 바로 제사이다. 하나님은 사람이 이렇게 찬미하는 것을 좋아하신다. 하나님은 이런 찬미를 그분의 보좌로 삼기를 좋아하신다. 하나님은 어떻게 찬미를 얻으시는가? 하나님은 그분의 자녀들이 그들 자신이 손실 당함으로써 그분을 찬미하기를 원하신다. 따라서 무언가를 얻을 때에만 찬미하는 것이 아니다. 무언가를 얻을 때 드리는 찬미는 찬미가 될 수 있을지언정 제사는 아니다. 제사의 원칙은 손실에 근거한다. 제사에는 손실의 성질이 없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은 우리가 손실을 당하고도 여전히 찬미할 수 있게 하신다. 이것이 참된 제사이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기도해야 할 뿐 아니라 또한 하나님 앞에서 찬미하는 사람이 되기를 배워야 한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인이 될 때부터 찬미의 중요성을 알아야 한다. 여러분은 끊임없이 항상 하나님을 찬미해야 한다. 다윗은 하나님의 은혜를 입고 하루에 일곱 번 하나님을 찬미하였다. 날마다 찬미하는 것은 아주 좋은 배움이자 공과요 아주 좋은 영적인 훈련이다. 여러분은 아침 일찍 일어날 때나 일을 할 때나 집회에서나 홀로 있을 때 하나님을 찬미하기를 배워야 한다. 적어도 하루에 일곱 번 하나님을 찬미해야 한다. 결코 다윗보다 적어서는 안 된다. 만일 여러분이 매일 하나님을 찬미하는 것을 배우지 않는다면 히브리서 13장에서 말한 찬미의 제사를 드리기란 어렵다.
여러분이 주님 앞에서 찬미를 배울 때에 어느 날엔가 여러분은 자신이 찬미할 수 없음을 보게 될 것이다. 아마 여러분은 오늘 일곱 번, 내일 일곱 번 하나님을 찬미하고 전날에도 하나님을 일곱 번 찬미하였으며 지난주에도 하나님을 찬미할 수 있었고 지난달에도 하나님을 찬미할 수 있었겠지만, 어느 날에는 하나님을 찬미하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날은 여러분이 고통을 느낀 날이거나 빛이 조금도 없는 날이거나 큰 재난을 만난 날이거나 여러분이 많은 원망과 비방을 받은 날이기 때문이다. 여러분은 자신을 위하여 눈물을 흘려도 부족한데 어찌 하나님을 찬미할 수 있겠느냐고 느낄 것이다. 그날에 여러분은 손실과 고통과 어려움으로 찬미하지 못할 것이다. 여러분은 자연적으로 찬미가 아닌 원망을 표현할 것이고 하나님 앞에서 감사가 아닌 불평을 표현할 것이다. 여러분은 찬미해야 한다는 느낌이 없을 뿐더러 찬미할 뜻도 없을 것이다. 여러분은 그런 상황과 심경에서 찬미하는 것은 완전히 합당하지 않으며 이치에 맞지 않다고 느낄 것이다. 그러나 여러분은 여호와의 보좌와 그분의 이름과 영광이 변하지 않음을 기억해야 한다. 그분은 찬미받기에 합당한 분이시기 때문에 여러분은 마땅히 그분을 찬미해야 하고, 그분은 칭송받기에 합당한 분이시기 때문에 마땅히 그분을 칭송해야 한다. 여러분이 어려움을 당할지라도 그분은 여전히 찬양받기에 합당하시다. 여러분에게 궁핍함이 있다 하더라도 여러분은 여전히 찬양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럴 때 여러분의 찬미는 찬미의 제사로 변한다. 여러분의 찬미는 여러분이 가장 살진 송아지를 끌고 가서 그것을 잡은 것과 같다. 또한 여러분의 사랑하는 이삭을 제단 위에 묶은 것과 같다. 여러분은 눈물을 흘려 가면서 찬미한다. 이것이 찬미의 제사이다. 제사란 무엇인가? 제사란 곧 상처받음이요 죽음이요 손실이요 희생이다. 여러분이 하나님 앞에서 상처를 입고 죽으며 하나님 앞에서 손실을 당하고 희생될 때, 여러분은 하나님의 보좌가 하늘 위에 좌정하고 하나님의 보좌가 영원히 요동하지 않음을 보고서 그분을 찬미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이것이 바로 찬미의 제사이다. 하나님은 그분의 자녀들이 모든 일과 모든 상황에서 그분을 찬미하기를 기뻐하신다.
Ⅱ. 찬미와 승리
찬미가 하나의 제사인 것을 본 후에 우리는 또한 찬미가 영적인 싸움에서 이기는 방법임을 보아야 한다. 우리는 종종 사람들에게서 사탄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들의 기도라고 들어 왔다. 언제든지 하나님의 자녀들이 무릎을 꿇고 기도할 때마다 사탄은 도망가기 때문에 사탄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기도하지 못하도록 그들을 공격한다. 이것은 아주 보편적인 공격이다. 이에 대해 한마디 더하겠다. 사탄이 가장 많이 공격하는 것은 우리의 기도가 아니라 우리의 찬미이다. 이것은 사탄이 기도를 공격하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다. 그리스도인이 기도할 때마다 사탄은 그들을 공격한다. 그러므로 사람이 대화하기는 쉬워도 기도하기는 어려운 것이다.
때때로 사탄이 여러분에게 어려움을 주어 여러분이 기도하기 어렵다고 느끼게 하는 것은 확실한 사실이다. 그러나 사탄은 기도를 공격할 뿐 아니라 더욱이 하나님의 자녀들의 찬미도 공격한다. 사탄의 바람은 최선을 다하여 찬미를 막아 버리는 것이다. 많은 경우에 기도는 전쟁이지만 찬미는 승리이다. 기도는 영적인 전쟁이고 찬미는 영적인 승리이다. 언제든지 우리가 찬미할 수 있을 그때가 바로 사탄이 도망갈 때이다. 그러므로 찬미는 사탄이 가장 두려워하는 일이다. 사탄은 최선을 다하여 우리가 찬미하지 못하게 할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가 자신의 처지와 느낌을 주목함으로써 찬미를 멈춘다면 이것은 어리석은 것이다.
하나님을 아는 하나님의 자녀일수록 빌립보의 감옥도 찬송하는 장소임을 볼 것이다(행 16:25). 바울과 실라가 그 속에서 하나님을 찬미했기 때문에 결국 감옥의 문이 열렸다.
사도행전에서는 두 차례나 감옥의 문이 열렸다. 한 번은 베드로의 경우이고 또 한 번은 바울의 경우이다. 베드로에게 일어난 일은 교회가 그를 위하여 간절히 기도함으로써 천사들이 문을 열어 주어 그를 이끌어 낸 것이다(행 12:3-12). 또 한 번은 바울과 실라가 찬송하며 하나님을 찬미할 때 감옥이 열리고 사슬이 풀어졌다. 바로 그날에 간수가 주님을 믿고 그의 온 집이 구원을 받았으며 기쁨으로 충만했다(행 16:19-34). 그 감옥에서 찬미의 제사를 드린 사람이 있었다. 몸의 상처가 아직 낫지 않았고 통증이 아직 가시지 않았으며 두 발에 사슬이 채워진 상태에서 로마의 감옥에 갇혀 있는데 기뻐할 만한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찬송할 만한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그러나 거기에 있는 두 사람의 영은 높이 치솟았고 모든 것을 초월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하늘 위에 변함없이 앉아 계신 것을 보았다. 그들과 그들이 처한 환경과 느낌이 변하고 그들의 몸이 고통을 당하고 있다 하더라도, 하나님은 여전히 보좌 위에 계시며 그들의 칭송받기에 합당하시다. 거기에서 우리의 형제, 바울과 실라는 기도하고 찬송하며 하나님을 찬미했다. 이러한 찬미는 그들의 고통과 손실 가운데 발해진 것이므로 제사인 것이다. 이런 찬미는 또한 승리이기도 하다.
여러분이 기도할 때에 여러분은 여전히 그 상황 안에 머물게 되지만, 여러분이 찬미할 때에 여러분은 그 상황 위로 올라가게 된다. 우리가 아직 기도하며 간구하고 있을 때, 우리는 그 일에서 나오지 못하고 여전히 그 일 안에 남아 있게 된다. 여러분은 하나님 앞에서 가련하게 간구할수록 여러분이 그 일에 묶임을 당하고 그 일이 여러분 위에 있음을 볼 것이다.
그러나 여러분이 감옥과 사슬과 몸의 상처와 그 고통과 수치를 초월하도록 하나님에 의해 인도된다면 여러분은 소리를 발하여 하나님의 이름을 칭송할 것이다. 바울과 실라가 찬송을 한 것은 하나님 앞에서 찬미의 말을 한 것이다. 그들에게는 감옥이 문제되지 않았으며 수치와 고통도 문제되지 않았다. 여전히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찬미할 수 있을 정도로 이끌렸다. 그들이 감옥에서 찬미할 때 문이 열리고 사슬이 풀리며 간수도 구원을 얻게 되었다.
많은 경우 기도는 통하지 않지만 찬미는 통한다. 이것은 하나의 기본적인 원칙이다. 여러분이 기도할 수 없을 때 왜 찬미하지 않는가? 주님은 우리가 승리하고 그 승리를 자랑할 수 있도록 다른 것을 우리 손에 두셨다. 여러분에게 기도할 힘이 없고 여러분의 영이 너무 심히 억눌려 있어서 상처를 입고 숨을 쉴 수 없다고 느낄 때에는 언제든지 그분을 찬미해 보라. 기도할 수 있을 때 기도하고 기도하지 못할 때에는 찬미하라. 우리는 언제나 짐이 무거울 때 기도하고 짐이 없어질 때 찬미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많은 경우 더 이상 기도할 수 없을 정도로 짐이 무거울지라도 여전히 찬미해야 함을 기억하라. 짐이 없어질 때에야 찬미할 것이 아니라 짐이 가장 무거울 때 찬미해야 한다. 만일 여러분이 특별한 일을 당하고 어려움이 많을 때, 여러분의 전 존재가 녹초가 되어 어떻게 해야 될지 모를 때 “왜 찬미하지 않는가?”라는 한마디를 기억하라. 이때가 아주 좋은 기회이다. 만일 여러분이 이때 찬미한다면 하나님의 영은 모든 문을 여실 것이고 여러분이 모든 사슬이 풀어지는 단계에 이끌리도록 운행하실 것이다.
우리는 모든 공격을 뛰어넘는 초월의 영을 가져야 한다. 모든 기도가 우리에게 보좌를 만지게 하지는 못한다. 그러나 찬미는 언제든지 우리에게 보좌를 만지게 한다. 기도는 항상 우리를 이기게 하지는 못하지만 찬미는 처음부터 끝까지 우리가 실패하지 않도록 한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마땅히 입을 벌려 찬미해야 한다. 일이 없고 느낌이 없고 상처가 없고 어려움이 없을 때에만 찬미할 것이 아니라, 특히 어려움과 상처가 있을 때 특별히 찬미해야 할 것이다. 그때 여러분은 고개를 들어 “주여! 당신을 찬미합니다!”라고 말하며 눈물을 흘리겠지만, 여전히 그분을 찬미할 수 있다. 마음은 상처로 인해 아프지만 영은 여전히 찬미할 수 있다. 여러분의 영은 여러분의 찬미와 같이 높이 오르게 되고 위로 올라갈 수 있다. 가장 어리석은 사람은 원망하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은 원망할수록 그 원망 속에 묻히고 불평할수록 그 속에 빠진다. 곤란 때문에 억눌릴수록 그는 숨이 막히게 된다. 많은 사람들은 비교적 진보하여 어려움을 만날 때 기도한다. 그들은 거기에서 나오려고 분투하며 발버둥 치고 애쓴다. 환경이 그들을 묻어 버리고 감정이 그들을 묻어 버리려고 하지만, 그들은 묻히기가 싫어서 기도로 나오려고 한다. 물론 많은 경우에 기도함으로써 거기에서 나오게 된다. 그러나 또 많은 경우에 기도는 그들을 나오게 할 수 없고, 그들이 찬미할 때 비로소 벗어나게 된다. 여러분은 찬미를 제사로 삼아 찬미의 제사를 드려야 한다. 여러분이 자신을 승리의 위치에 둔다면 여러분은 즉시 모든 것을 초월하게 되고, 어떤 것도 여러분을 묻을 수 없게 된다. 때때로 어떤 것이 여러분을 억누르고 있는 것 같다가도 여러분이 찬미할 때 곧 여러분은 거기서 나오게 된다.
역대하 20장 20절부터 22절까지를 보자. “이에 백성들이 일찍이 일어나서 드고아 들로 나가니라 나갈 때에 여호사밧이 서서 가로되 유다와 예루살렘 거민들아 내 말을 들을지어다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신뢰하라 그리하면 견고히 서리라 그 선지자를 신뢰하라 그리하면 형통하리라 하고 백성으로 더불어 의논하고 노래하는 자를 택하여 거룩한 예복을 입히고 군대 앞에서 행하며 여호와를 찬송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 감사하세 그 자비하심이 영원하도다 하게 하였더니 그 노래와 찬송이 시작될 때에 여호와께서 복병을 두어 유다를 치러 온 암몬 자손과 모압과 세일 산 사람을 치게 하시므로 저희가 패하였으니.” 여기에 한 싸움이 있다. 여호사밧이 유다 왕으로 있을 때는 쇠망할 즈음이라서 나라가 아주 약하며 모든 면에서 좋지 않았다. 그래서 모압 자손과 암몬 자손과 세일 산 사람들이 일어나 유다를 쳤다. 유다 사람들은 완전히 실망하여 패배하고 멸망할 것만 같았다. 여호사밧은 부흥된 왕이자 하나님을 경외한 사람이었다. 물론 마지막 때에 유다 왕들은 그리 온전하지 않았지만 여호사밧은 여전히 하나님을 추구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유다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신뢰하라고 말했다. 그는 어떻게 하였는가? 그는 노래하는 자를 세워서 여호와를 찬양하게 했다. 그리고 여호와를 칭송하는 사람들에게 거룩한 예복을 입히고서 군대 앞에 행하여 여호와를 찬송하기를 “여호와께 감사하세 그 자비하심이 영원하도다”라고 하게 하였다. 다음 구절의 ‘시작될 때에’를 주의하라. 이것은 매우 귀한 것이다. “그 노래와 찬송이 시작될 때에 여호와께서 복병을 두어 유다를 치러 온 암몬 자손과 모압과 세일 산 사람을 치게 하셨다.” 모든 사람이 노래하고 여호와를 찬미할 때 여호와께서는 일어나 암몬 자손과 모압 자손과 세일 산 사람들을 치셨다. 우리는 찬미만큼 주님의 손을 움직이게 하는 것이 없다고 말할 수 있다. 가장 빨리 주님의 손을 움직이게 하는 것은 기도가 아니라 찬미이다. 기도할 필요가 없는 것으로 오해하지 말라. 매일 우리는 기도해야 하고 좋은 기도를 가져야 한다. 그러나 많은 일에 있어서 찬미로 이겨야 한다.
여기서 우리는 영적인 승리가 씨름이 아닌 찬미로 얻는 것임을 볼 수 있다. 우리는 찬미로 사탄을 이기는 것을 배워야 한다. 기도만이 아니라 또한 찬미로 사탄을 이겨야 한다. 많은 사람들은 사탄의 흉악함과 자신의 연약함을 보고서 분투하며 기도하려고 한다. 그러나 우리는 영적 승리가 씨름으로가 아닌 찬미로 얻어진다는 한 가지 특별한 원칙을 발견한다. 하나님의 자녀는 종종 어려움이 너무 크기 때문에 무슨 방법을 써서 처리해야겠다는 시험에 든다. 그들은 방법을 주의하지만, 방법을 주의할수록 승리하기가 더 어렵다. 그들이 이렇게 하는 것은 그들의 대적인 사탄과 같은 위치에 서 있는 것이고, 전쟁터에서 사탄이 한 쪽에 서 있고 그들은 다른 쪽에 서 있는 것이기 때문에 승리하기란 쉽지 않다. 그러나 역대하 20장은 다르다. 그쪽에는 군대가 있고 이쪽에는 찬송이 있다. 이 사람들이 하나님을 신뢰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미친 사람일 것이다. 우리가 미친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을 신뢰하는 사람임을 하나님께 감사한다.
하나님의 자녀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심한 시험을 받고 또 자주 시험을 받는다. 시험이 심하고 싸움이 맹렬할 때 여호사밧과 같이 갈 길이 없는 것 같다. 그쪽은 강하고 이쪽은 약하므로 비교가 안 된다. 태풍에 휘말리듯 그들의 곤란은 감당하지 못할 정도로 크다. 그때 그들의 생각은 고난을 주목하기 쉽고, 그들의 눈은 특별히 그들 자신의 어려움을 보려고 할 것이다. 사람은 시험받을수록 자신이 어떠한 곤경에 처해 있는가를 생각한다. 이때가 가장 큰 시험이다. 자신을 보고 환경을 볼 때가 가장 큰 시험이다. 사람은 시험받을수록 자신과 환경을 바라본다. 그러나 하나님을 아는 사람은 시험을 받을수록 주님을 바라보고 찬미하기를 배운다. 그러므로 우리의 눈은 자신을 보지 않고 주님 보기를 배워야 한다. 고개를 들고 주님께 “주여! 당신은 모든 것을 초월하신 분임을 찬양합니다!”라고 말하라. 큰소리로 하는 찬양, 마음에서 우러나는 찬미, 상처 입음을 느끼는 데에서 흘러나오는 찬미가 곧 하나님께서 돌아보시고 기뻐하시는 찬미의 제사이다. 찬미의 제사가 하나님께 갈 때에 대적 사탄은 여러분의 찬미에 의해 패배 당한다. 하나님 앞에서 찬미의 제사는 효능이 있다. 만일 여러분이 속에서부터 가장 좋은 느낌을 갖고 하나님을 찬미할 수 있다면 여러분은 능히 서며 승리하게 된다. 여러분은 능히 찬미할 수 있다. 여러분은 승리의 길이 이같이 위대하다는 것을 보아야 한다!
새로 믿은 형제자매들은 몇 년이 지나야 찬미의 공과를 배울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말라. 찬미의 공과는 처음부터 배울 수 있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여러분이 어려움을 당할 때마다 찬미의 공과를 배우며, 여러분이 수단과 계략을 세우지 않도록 하나님의 긍휼을 구해야 한다. 많은 싸움은 찬미로 능히 이길 수 있다. 그러나 찬미가 부족하기 때문에 승리하지 못하는 것이다. 만일 여러분이 하나님을 신뢰한다면 곤란 중에 있을지라도 여러분은 능히 주님께 “모든 것보다 높고 강하신 당신의 이름을 찬미합니다. 당신의 인자함은 영원합니다.”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을 찬미하는 사람은 모든 것을 초월하고 능히 찬미로 항상 이길 수 있다. 이것은 원칙이요 사실이다.
Ⅲ. 믿음은 찬미를 산출함
시편 106편 12절의 말씀은 매우 귀하다. “이에 저희가 그 말씀을 믿고 그 찬송을 불렀도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 있을 때의 상태이다. 그들은 믿음으로 노래를 불렀고 믿음으로 찬미하였다. 찬미의 기본적인 내용은 믿음이다. 여러분은 빈말로 찬미할 수 없고 함부로 “주님께 감사하고 주님을 찬미합니다!”라고 말할 수 없다. 반드시 믿을 수 있어야만 찬미할 수 있다. 여러분에게 곤란과 근심이 있을 때 여러분은 기도할 것이다. 여러분이 마음속에서 믿을 수 있을 정도로 기도했을 때 여러분은 즉시 입을 열어 찬미할 수 있다. 이것은 살아 있는 길이지 멋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다. 사람은 일이 생길 때 항상 주님께 간구한다. 언제든지 속에 약간의 믿음이 있어서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의 위대함과 능력과 인자함과 영광을 믿으며 하나님께서 그분의 영광을 나타내실 것을 믿을 때에 찬미하기 시작해야 한다. 만일 사람 속에 믿음이 있는데도 찬미하지 않는다면 그 믿음은 언젠가 사라지게 된다. 이것은 우리의 체험에 근거해 말한 것이다. 우리는 여러분 속에 믿음이 있다면 반드시 찬미해야 한다고 감히 말할 수 있다. 만일 여러분이 찬미하지 않는다면 얼마 못 가서 믿음을 잃게 될 것이다. 좀 전에는 믿을 수 있었더라도 이제는 그 믿음을 찾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찬미를 배우되 찬미의 말을 말해 내고 입을 열어 찬미하기를 배워야 한다. 찬미할 생각만을 가지라는 것이 아니라 소리 내어 찬미의 말을 해내라는 것이다. 여러분은 굳게 서서 곤란과 사탄에 맞서서 하나님을 찬미하며 “주여! 당신을 찬양합니다.”라고 말해야 한다. 느낌이 없다면 느낌이 있을 때까지 말하고 느낌이 적으면 많을 때까지 말하며 적은 믿음에서 믿음이 충만할 때까지 말하라.
만일 하나님의 영광이 여러분의 눈에 충만하다면 여러분은 능히 믿을 수 있게 된다. 만일 하나님의 영광이 여러분의 영에 충만하다면 여러분은 능히 찬미할 수 있게 된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초월하시고 여러분의 찬미를 얻기에 합당하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여러분이 찬미할 때 사탄은 도망할 것이다. 때로 여러분은 기도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여러분 속에 믿음이 있고 주님께서 여러분의 기도를 들어주신다는 확신이 있을 정도로 기도했을 때 여러분은 다음과 같이 찬미해야 한다. “주여! 당신께 감사하고 찬양합니다! 이 일은 이미 지나갔습니다.” 일이 성취된 후에 찬미하지 말라. 여러분이 믿을 때에 찬미하라. 대적이 달아난 후에야 노래할 것이 아니라 노래함으로써 사탄을 쫓아내야 한다. 우리는 믿음으로 먼저 찬미하기를 배워야 한다. 여러분이 믿음으로 그분을 찬미할 때 대적이 완전히 패배당하는 것을 보게 된다. 믿어야만 찬미할 수 있다. 믿고 찬미한 다음에야 승리가 있다.
Ⅳ. 순종은 찬미를 산출함
우리의 문제는 대체적으로 두 가지로 나뉜다. 하나는 여호사밧과 같은 환경과 사건의 문제이다. 이것은 찬미로 말미암아 이겨야 한다. 또 한 가지는 내적인 문제로서 남이 우리를 해치는 말을 하거나 우리에게 잘못을 범하거나 우리를 욕되게 하거나 무례히 대우하거나 무례히 대적하거나 이유 없이 미워하거나 근거 없이 비방할 때 우리 속에서 이것을 견디지 못하고 통과할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은 개인적인 승리의 문제이다. 한 형제가 여러분에 대해 부당한 말을 하거나 한 자매가 무례하게 대했을 경우, 여러분이 이것을 이기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다! 아마 온몸으로 발버둥 치고 불평하며 원망할 것이다. 여러분은 용서하는 것이 얼마나 어렵고 승리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느낄 것이다. 여러분이 억울함과 비방과 핍박을 당하므로 속에서 통과되지 않을 때 여러분의 기도는 별 소용이 없다. 여러분은 대항하려 해도 대항하지 못하고 발버둥 쳐도 벗어나지 못한다. 거절해도 압력은 줄지 않는다. 여러분은 이것이 너무 어려운 일이고 이기기 쉽지 않다고 느낄 것이다. 여러분이 개인적으로 크게 어려움을 당하고 심한 억울함을 당할 그때는 여러분이 기도할 때가 아니라 찬미할 때임을 기억하라. 여러분은 머리 숙여 주님께 “주여! 당신께 감사합니다. 당신이 하신 것은 틀리지 않습니다. 당신 손에서 이것을 받습니다. 당신께 감사합니다. 당신 손에서 이것을 받습니다. 당신을 찬양합니다.”라고 말하라. 만일 여러분이 이렇게 한다면 모든 것이 해결된다. 승리는 육체 안에서 분투하는 것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 자신의 힘으로 계속 남을 용서하려고 시도하거나 노력하는 것이 아니다. 승리란 머리 숙여 주님을 찬미하면서 “주여! 당신의 길을 찬양합니다. 당신이 나를 위해 안배하신 것은 틀리지 않습니다. 당신이 행하신 것은 모두 옳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이다. 여러분이 이렇게 하나님을 향해 찬미할 때 여러분의 영은 문제를 초월하게 되고 속에서 상처 받은 감정을 뛰어넘게 된다. 상처 받았다고 느끼는 사람은 찬미가 부족한 사람이다. 만일 여러분이 찬미할 수 있다면 여러분의 상처 받은 감정은 찬미의 감정으로 변할 것이다. 여러분의 영은 높이 올라 하나님 앞에서 “당신께 감사하고 찬미합니다. 당신이 행하신 것은 틀리지 않습니다.”라고 말할 것이다. 여러분은 주님 앞에서 이런 길을 가야 한다. 모든 것을 등 뒤로 던져 버리라. 이것은 어떠한 영광인가? 이것이 참된 제사이다.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찬미에서 시작된다. 찬미는 모든 것을 초월함으로 주님을 만지는 것이다. 이 땅에서 주 예수님은 바로 이런 길을 가셨다. 여러분도 능히 이 길에 들어설 수 있다. 하늘을 바라보고 탄식하며 시험받을 것이 아니라 시험 그 위로 올라가라. 여러분이 찬양할 때 여러분은 시험 위에 있게 된다. 누가 여러분을 억누를수록 여러분은 주님 앞에 일어나서 “주여, 당신께 감사하고 찬미합니다!”라고 말하라. 그분이 하나님이심을 알고 그 일은 하나님께서 하신 것임을 인하여 그분에게서 그 일을 받기를 배우라. 찬미의 제사보다 사람을 달콤하게 하고 성숙하게 하는 것이 없다. 우리는 성령의 징계를 받을 뿐 아니라 성령의 징계를 찬미하는 것도 배워야 한다. 주님의 손을 받을 뿐 아니라 주님의 손을 칭송하기를 배워야 한다. 주님의 책망을 받을 뿐 아니라 다만 마음으로 즐거이 이 책망을 받기를 배우라. 이렇게 할 때에 우리를 위하여 분명하고 영광스런 문이 열리게 된다.
Ⅴ. 깨닫기 전에 먼저 찬미함
마지막으로 시편 50편을 읽어보기 바란다. 하나님은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라고 말씀하셨다. 여기에서 ‘감사’는 ‘찬미’로 되어 있다. 주님은 우리의 찬미를 기다리고 계신다. 찬미보다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 없다. 언젠가 모든 기도는 지나가고 모든 일과 모든 예언과 모든 수고가 다 지나가되 오직 찬미는 현재보다 더욱 증가할 것이다. 찬미는 영원히 지속될 것이요 영영 그치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하늘에 이르러 우리의 궁극적인 집에 도착할 때 우리의 찬미는 더욱 높아질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 하나님을 찬미하기를 배우라. 이것이 우리에게 가장 좋은 공과이다.
오늘 우리는 거울로 바라보기 때문에 모든 것이 희미하게 보일 것이다(고전 13:12). 많은 일에 있어서 우리는 조금밖에 보지 못하고 그 속의 의미를 깨닫지 못한다. 우리는 우리가 당한 조우나 거친 일들이 내적인 감정의 상처이든 외적인 환경의 어려움이든 우리는 고통스럽다고만 느낄 뿐, 그 속의 의미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찬미하지 않는다. 우리는 하늘 위에 많은 찬미가 있을 것이라고 믿는데, 그 이유는 하늘 위에 완전한 지식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지식이 완전할수록 찬미가 완전하다. 우리가 주님 앞에 가는 그날에는 모든 것이 분명해진다. 그날 우리는 모든 단계에서의 성령의 징계에 주님의 선하신 뜻이 있었다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만일 성령의 징계가 없었다면 우리는 어디에 떨어졌을지 모른다. 만일 성령께서 날 대신해 어떤 단계를 막아 주지 않으셨다면 우리는 어디에 떨어졌을지 모른다! 그날에 우리는 오늘 보이지 않는 수천 가지의 일들을 보게 될 것이다. 이것을 볼 때에 여러분은 머리를 숙여 “주여, 당신은 틀리지 않았습니다.”라고 말할 것이다. 모든 단계에서의 성령의 징계는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일하신 것이다. 만일 그때 우리가 병들지 않았다면 우리는 어떻게 되었을지 모르고 그때 실패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어떻게 되었을지 모른다. 우리가 당한 것은 곤란이었지만 그것으로 인하여 더 큰 곤란을 피했는지도 모른다. 그날에 우리는 주님께서 왜 이런 조우를 주셨는지 보게 될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걷는 모든 걸음은 다 그분의 인도하심이다. 그날에 우리는 머리 숙여 이렇게 말할 것이다. “주여, 당신께 찬미하지 않은 내가 어리석은 사람이었습니다. 당시에 당신 안에서 감사하지 않은 내가 어리석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날 우리가 보고 깨달은 후에, 우리가 원망했던 것을 생각할 때 얼마나 부끄러운가를 알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는 다음과 같이 말하기를 배워야 한다. “주여, 당신이 하신 일에 대해 내가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당신이 하신 일은 틀리지 않다는 것을 내가 압니다.” 믿고 찬미하기를 배우라. 그렇게 할 때 그날에 여러분은 이렇게 말할 수 있게 된다. “주여, 불필요한 불평과 원망에서 구원해 주신 당신의 은혜에 감사합니다. 주여! 당시 많은 원망의 말을 하지 않게 하신 은혜에 감사합니다.” 많은 일을 여러분이 알 수 있다면 여러분은 더욱 크게 찬미할 것이다. 우리가 찬미해야 하는 이유는 그분께서 선하시기 때문이다(시 25:8, 100:5). 여러분은 계속 “주님은 선하십니다.”라고 말해야 한다. 오늘날 우리는 주님께서 선하시며 우리가 이해하지는 못하지만 그분은 틀리지 않으신다는 것을 믿기를 배워야 한다. 우리가 믿을 수 있다면 찬미할 수 있게 된다. 우리의 찬미는 그분께 영광이 된다. 찬미는 곧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영광 받기에 합당하신 분이시다. 하나님께서 그분의 자녀들에게서 많은 찬미를 얻으시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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