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읽을 말씀
스가랴서 5장 9절은 “내가 또 눈을 들어 본즉 두 여인이 나오는데”라고 말한다. 한 여인이 두 여인이 되는 것은 일단 상업에 규제가 없어질 경우, 그 효과가 두 배로 될 것임을 상징한다. …두 여인이 학의 날개 같은 날개를 가졌는데, 바람이 그들의 날개 아래 있었다. 그들은 땅과 하늘 사이에서 에바 그릇을 들고 있었다. 이 모든 것은 사악한 상업의 신속한 확산을 상징한다. 스가랴서 5장 10절과 11절은 “내가 내게 말하는 천사에게 묻되 그들이 에바 그릇을 어디로 옮겨 가나이까 하니 그가 내게 이르되 그들이 시날 땅으로 가서 그것을 위하여 집을 지으려 함이니라 준공되면 그것이 제 처소에 머물게 되리라 하더라”라고 말한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바빌론에 포로로 잡혀갔을 때, 거기서 배운 사업상의 사악함을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바빌론(시날 땅)으로 돌려보내실 것임을 상징한다. 이 악을 바빌론으로 다시 돌아가게 하라. 하나님의 선민에 속한 모든 사람의 생활은 정직하고 단순해야 한다.
사탄은 하나님께서 그분을 추구하는 사람들을 다루시는 것과 관련해서 악한 관념을 갖고 있었는데, 그것은 득실에 관련된 사탄의 상업적인 원칙에 근거한 것이다. 사탄은 사업가, 곧 상인이며 그의 사상은 그의 상업적인 원칙에 따른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분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다루시는 목적은 그들이 하나님을 가장 충만한 정도까지 얻고 하나님 이외의 다른 모든 것의 손실을 초월하며, 하나님께서 그들을 통해 표현되심으로 사람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목적을 성취하는 것이지만, 사탄은 이것을 깨닫지 못했다.
마태복음 20장 1절부터 16절까지의 비유는 19장 28절부터 30절까지에서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하신 말씀을 설명한 것으로서, 왕국 보상에 대해 말하는 것이다. 베드로는 왕국을 사기 우해 대가를 지불할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주님은 그에게 왕국은 값을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귀하여 돈으로 살 수 없다는 것을 가르쳐 주셨다. 왕국은 비할 수 없는 가치를 갖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을 살 수 없다.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버리라고 요구하셨던 것은 왕국을 얻기 위한 대가가 아니었다. 주님은 베드로에게 다만 그를 얽어매고 방해하는 모든 것을 버리라고 요구하신 것이다. 왕국은 ‘보답’이 아니라 ‘보상’이다. 베드로는 자신을 얽어매고 방해하는 모든 것을 버림으로 보답으로서가 아닌 보상으로서 왕국을 얻는다는 것을 깨달을 필요가 있었다. 이것은 주님께서 더 많이 지불하면 더 많이 받는다는 상업적인 원칙에 따라 행하시지 않음을 의미한다. 왕국의 나타남 안에 있는 영원한 생명을 충만하게 누리는 것은 값으로 계산할 수 없다.
우리는 상업적인 생각을 갖지 말아야 한다. 구원은 은혜에 근거한다. 주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모든 것을 이루셨으며 우리는 그것을 위해 일을 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왕국 보상은 우리의 일에 따라, 우리가 지불한 대가에 따라 주어진다. 만일 우리가 대가를 지불한다면 주님은 우리에게 보상을 주실 것이다. 우리는 스스로 일을 하여 그 보답으로 보상을 얻는 것이라고 생각할지 모른다. 만일 우리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우리는 베드로처럼 상업적인 생각을 가진 것이다. 우리는 보상조차도 은혜에 근거한다는 것을 보기 위해 재교육을 받을 필요가 있다. 보상을 받는 길은 대가를 지불하는 것이 아니라 은혜를 누리는 것이다. 구원을 받는 것은 은혜를 받는 것이고, 보상을 얻는 것은 우리가 받은 은혜를 누리는 것이다.
마태복음 20장 14절은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하신 분명한 대답이었으며, 베드로가 마땅히 받아야 한다고 생각한 것을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주셨음을 가리킨다. 그러나 주님은 일의 원칙이 아니라 은혜의 원칙에 따라 그분께서 원하시는 대로, 나중에 온 일꾼들에게 동일한 품삯을 주실 권한이 있으시다. 이로써 베드로의 천연적이고 상업적인 생각은 깨어지고, 그의 관념은 바로 잡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