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의 누림
레 14:17 그러고 나서 손바닥에 남은 기름은 제사장이 정결하게 되려고 하는 사람의 오른쪽 귓불과 오른손 엄지와 오른발 엄지 곧 속건제물의 피를 바른 곳 위에 발라야 한다.
마 16:24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십시오.
레위기 14장 6절부터 10절까지와 14절부터 18절까지에서 나병 환자는 먼저 피에 의해 정결하게 된다. 피가 근거이다. 그러고 나서 피의 근거 위에 기름, 곧 관유가 발라진다. 피와 관유는 나병 환자의 오른쪽 귓불과 오른손 엄지와 오른발 엄지에 발라졌다. 여기서 귀는 듣는 것을 상징하고, 손은 일하는 것, 발은 행하는 것을 상징한다. 듣는 것은 우리의 큰 문제이다. 우리는 많은 부정적인 말을 듣기 때문에 문제를 겪는다. 이것은 죄악이 가득한 것이므로 우리의 귀, 즉 우리의 듣는 것에 피가 필요하다. 어떤 면에서 보면, 많은 것들에 대해 ‘귀머거리’가 되는 것이 차라리 낫다. 우리의 일과 행함 역시 피의 정결하게 함이 필요하다.
우리는 듣는 것, 일하는 것, 행하는 것에 있어서 잘못되었으므로 나병 환자이다. 나병 환자인 우리는 먼저 그리스도의 구속하는 피로 정결하게 되어야 한다. 그런 다음 이 피에 근거하여 바르는 기름이 필요하다. 피와 바르는 기름이 모두 있어야 정결하게 함이 완성된다. 결국, 우리는 그리스도의 정결하게 하는 피에 근거한 그 영의 신성한 교통에 의해 정결하게 된다.
오늘의 읽을 말씀
신성한 교통은 삼일 하나님을 세 부분으로 된 사람인 우리 안으로 분배하는 것으로서, 우리와 하나님을 하나로 만들어 준다. 사실상 이 하나(oneness)가 교통이다. 교통은 헬라어로 ‘코이노니아(koinonia)'라고 하며 공동 참여를 의미한다. 이 공동 참여를 통해 하나가 산출된다. 남편이 아내에게 참여하고 아내가 남편에게 참여할 때 이들은 하나이다. 사실상 교통은 바로 하나(oneness)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교통을 나누시고 우리가 하나님과 교통을 나누고 있을 때에, 이러한 교통이 하나님과 우리를 하나로 만든다. 온 우주 안에는 큰 하나가 있는데, 이 큰 하나가 신성한 교통이다. 세 부분으로 된 사람인 우리는 삼일 하나님과 하나이다. 요한복음 17장에서 주님은 “우리가 하나인 것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도록 하려는 것입니다.”라고 기도하셨다. 주님은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 하나이시듯이 우리 모두를 하나로 만들기를 갈망하신다. 교회의 하나는 신성한 삼일성의 신성한 하나의 일부이다. 결국 교회와 신성한 삼일성은 교통 안에서 하나이다.
우리 안에는 다른 형제를 향해 어떤 장애물이 있기 때문에, 우리와 그 형제의 교통은 그다지 철저하지 못하다. 우리 안에 신성한 교통의 장애물들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어떤 성도들을 만나기를 피할 수도 있다. 우리의 체험 안에 십자가가 없기 때문에, 우리의 교통은 철저하지 못하고 우리 안에는 장애물들이 남아 있는 것이다.
십자가는 우리가 그리스도를 체험하도록 해 준다.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으므로 이제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신다. 이것이 십자가이다. 그리스도는 인내로서 내 안에 사신다. 그분은 사람들이 윤리라고 말하는 모든 인간 미덕으로서 내 안에 사신다. 우리는 그리스도가 필요하다. 그러나 십자가를 체험하지 않고는 그리스도를 체험할 수가 없다. 찬송가 464장은 “죽음 없이는 생명이 없네”라고 말한다. 이것은 “십자가 없이는 그리스도 없네”를 의미하며, 그뿐만 아니라 “그리스도 없이는 성령이 없네, 성령이 없이는 교통이 없네”를 의미한다. 바로 이것 때문에 십자가가 필요하다. 마태복음 16장 24절에서 주님은 ‘자기 십자가’라는 표현을 사용하셨는데, 이것은 우리 각 사람을 십자가로 끝내도록, 우리 각 사람을 위한 십자가의 특별한 몫이 있다는 것을 가리킨다.
십자가는 주로 우리 자신을 처리하기 위한 것이다. 주님은 우리가 그분을 따르고자 한다면 자기를 부인하고 자신의 십자가를 지라고 말씀하셨다. 사실상 십자가를 지는 것은 자아를 부인하고, 자아를 죽음에 넘기며, 항상 자아에게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적용하는 것이다. 만약 우리의 자아가 강하고 모든 일이나 모든 사람에 의해 상처를 받는다면 우리는 진정한 교통을 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가 수평적인 교통을 갖기 위해서는 우리 자신을 부인해야 한다. 자신을 부인하는 것은 자신에 대해 무감각한 것을 의미한다. 이럴 때 우리는 결코 마음이 상하지 않을 수 있다. 우리는 신성한 교통에 대한 체험을 깊어지게 하기 위해 십자가를 체험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