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의 누림
출 3:6 하나님께서 또 말씀하셨다. “나는 너의 조상의 하나님,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다.” 그러자 모세는 하나님을 뵙기가 두려워 얼굴을 가렸다.
마 22:31-32 죽은 사람들의 부활에 관하여,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하신 말씀을 읽어 본 적이 없습니까?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다.’라고 하셨으니, 하나님은 죽은 사람들의 하나님이 아니시라 산 사람들의 하나님이십니다.“
출애굽기 3장에서 하나님의 이름이 계시된 것은 사실상 하나님 그분 자신이 계시되신 것이다. 모세는 이러한 계시로 말미암아 그분의 위임을 수행하도록 자신을 부르시고 보내실 분을 알게 되었다. 이 구절에 있는 신성한 칭호는 하나님께서 언약을 맺으시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보여줄 뿐 아니라 그분께서 부활의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함축한다. 더욱이 하나님께서 세 사람의 하나님이시라는 것은 그분께서 삼일 하나님-아버지, 아들, 성령-이시라는 것을 함축한다.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이지만 우리는 또한 하나님을 부활의 하나님으로 믿는다. 다시 말해 그분을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으로 믿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바울을 감옥에서 풀어주지 않으셨을지라도 바울은 자신이 순교한 후에 하나님께서 자신을 부활시키러 오실 것을 알았다. 순교하기 전에 바울은 그분을 존재하는 분으로 누렸다. 그러나 그 후에 바울은 그분을 부활의 하나님으로 누렸을 것이다. 순교는 단지 그에게 하나님을 부활의 하나님으로 체험할 기회를 주었다.
오늘의 읽을 말씀
우리는 하나님을 단지 그분의 기적적인 행위에 따라 알려고 해서는 안 된다. …요한복음 2장에서 주 예수님은 기적을 추구하는 이들에게 자신을 의탁하지 않으셨다. 우리는 하나님을 존재하시는 분과 부활의 하나님으로 알 필요가 있다. 우리는 그분을 스스로 존재하시는 분과 항상 존재하시는 분과 부활시키시는 분으로 알아야 한다. 하나님은 부름받은 이들인 우리가 그분의 회복 안에서 그분의 위임을 수행하고자 한다면, 기적을 기대하는 이들이 되지 말고 하나님을 존재하시는 분과 부활의 하나님으로 알아야 한다. 그분은 ‘나는 …이다’이시며,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시다. 불타는 가시나무 떨기에 대한 이상을 보는 것에 더하여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이러한 계시를 볼 필요가 있다. 단지 하나님께서 하시는 어떤 일에 따라 하나님을 알지 말고 하나님의 존재에 따라 하나님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무언가를 하시거나 안 하시는 것은 의미가 없다. 환경은 급격히 변할지라도 하나님은 여전하시다. 모든 것은 파도처럼 흔들릴지라도 하나님은 존재하시며 영원하시다. 그분은 변함이 없으시다. 더 나아가서, 모든 죽음의 상황은 하나님께 우리의 체험 안에서 부활의 하나님이 되실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준다.
창세기의 아브라함의 부분에서 우리는 사람을 부르시고, 사람을 의롭다 하시며, 사람을 믿음으로 살고 하나님과의 교통 안에서 살도록 장비시키시는 아버지 하나님을 본다. 창세기 12장 1절은 아버지의 부름을 우리에게 보여 주고, 15장 6절은 그분의 의롭다 하심을 계시한다. 17장은 하나님께서 믿음으로 살도록 아브라함을 어떻게 장비시키셨는지를 보여 준다. 그런 다음 18장은 하나님께서 어떻게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하나님과 교통하는 삶을 살게 하셨는지를 계시한다. 창세기 18장은 하나님과 그분의 사람 친구인 아브라함 사이의 교통에 관한 장이다.
이삭의 부분은 삼일 하나님의 둘째 분이신 아들 하나님을 대표하며, 아들 하나님은 그분의 모든 풍성을 유업으로 주시고, 그분의 풍성을 누리며 살게 하시고, 평안가운데 살게 하심으로 사람에게 복을 주신다.
요셉과 함께하는 야곱의 삶의 부분에서 우리는 그분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모든 것이 협력함으로써 선이 이루어지게 하시는 영 하나님을 본다. 이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는 모든 것이 협력함으로써 선이 이루어진다는 것을 압니다.”라고 말하는 로마서 8장 28절에 근거한 것이다. 이 구절의 문맥에 따르면, 여기서 선은 물질적인 사람이나 사물이나 일과 관계된 것이 아니다. 이것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더 많이 얻고 그리스도께서 우리 존재 안으로 더 많이 넣어지셔서 우리가 신진대사적으로 변화되고 결국에는 그분의 형상, 곧 하나님의 맏아들의 형상과 같은 형상을 이루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완전한 아들이 자격에 이르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