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시지 6 D.T 910장
생명의 사역
성경: 요일 5:14-17, 고후 3:6, 4:1, 12, 렘 2:13
(요일 5:14-17) 그리고 우리가 그분 앞에서 갖는 담대함은 바로 우리가 무엇이든지 그분의 뜻에 따라 구한다면 그분께서 들으신다는 것입니다. (15) 우리가 무엇을 구하든지 그분께서 들으신다는 것을 안다면, 우리가 구하며 청한 것을 그분에게서 받은 것도 압니다. (16) 누구든지 자기 형제가 죽음에 이르지 않는 죄를 짓는 것을 보거든 그분께 구하십시오. 그러면 그가 그 형제, 곧 죽음에 이르지 않는 죄를 짓는 사람들에게 생명을 줄 것입니다. 죽음에 이르는 죄가 있는데, 나는 그것에 관하여 그분께 청해야 한다는 말은 하지 않습니다. (17) 모든 불의가 죄이지만, 죽음에 이르지 않는 죄도 있습니다.
(고후 3:6) 하나님께서 우리를 새 언약의 사역자들이 되기에 충분한 자격이 있게 하셨습니다. 사역자들은 문자에 속해 있지 않고 그 영께 속해 있습니다. 왜냐하면 문자는 사람을 죽이는 것이지만, 그 영은 생명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고후 4:1)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을 받아 이 사역을 받았으니, 우리는 낙심하지 않습니다.
(고후 4:12) 그러므로 죽음은 우리 안에서 활동하고, 생명은 여러분 안에서 활동합니다.
(렘 2:13)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그들이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그 물을 가두지 못할 터진 웅덩이들이니라
위치만 니의 사역에 관하여, 거기서 또 사역과 은사의 차이에 대해서 어떻게 말씀하셨는가를 볼 것이다.
이 주제에서 중요한 단어는 ‘사역’이다. 그리고 ‘생명’이다. 그 사역 혹은 사역에 관하여 개관을 해보도록 하겠다. 그 사역을 말할 때 이것은 우주적으로 유일한 사역을 말하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신약의 사역, 새 언약의 사역이다. 그러나 어떤 정관사가 없이 사역이라는 말을 쓰기도 하는데 그 사역 아래서 어떤 일, 봉사를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경륜 안에서 그 언약을 실행하고 수행하는데 필요한 것이다. 무엇보다도 사역이 필요한 것이다. 그 사역과 사역 둘 다 말하는 것이다.
첫째. 사역은 성경 안에서 볼 때 구약에서든 신약에서든
그 사역은 바로 하나님의 언약에 근거한다.
그 언약을 수행하는 것은 바로 사역이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사역이다. 그리고 그 언약을 섬기는 사역이다. 우리에게
옛 언약, 구약이 있다. 그리고 우리에게 새 언약, 신약이 있다. 사역이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분의 백성과 언약하신 것을 다 실행하고 수행해 내는 것이다. 그러므로 언약이 없다면 해야 할 일도 없는 것이다. 또 사역할 필요도 없다. 사역은 하나의 특별한 일을 말하고 하나님의 백성들인 우리가 그분께 드리는 봉사이다. 이것은 자동적으로 무엇은 의미하고 무엇을 암시하는가? 사역은 사람의 어떠한 선호나 갈망이나 목적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이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이 사역은 참된 사역이 아닌 것이다. 다만 사람의 일에 불과하다. 주님은 그분께서 주님의 상의 세우신 후에 새 언약을 제정하셨다. 그분께서 흘리신 피에 의해 세우셨다. 그 새 언약은 정말 하나님의 경륜 안에서 큰 항목이다. 이 언약은 그것을 수행해 내는 사역이 필요한 것이다. 처음에 이것을 수행한 제자들인 12사도들 이었다. 새 언약의 그 사역을 수행해 낸 것이다.
두 번째로 새 언약의 사역, 신약의 사역,
우리가 말하는 이 사역은 반드시 유일하다.
신약에서 두 사역이라는 것은 있을 수 없고 있지도 않았다. 새 언약 신약 안에는 오직 한 사역만 있다. 이 한 사역은 무엇으로 구성되는가? 모든 어떤 일들, 모든 사역들로 구성된다. 물론 그들 개인에게도 개인적인 사역이 있었지만 그 개인적인 사역은 이 단체적인 새 언약의 사역의 일부였다. 모든 사역자들은 모두 한 사역을 수행한다. 한 일을 수행한다. 주님을 찬양하는 것은 몸 안에 있는 모든 지체들은 이 사역에 분깃이 있다.
세 번째로 이 새 언약의 사역의 봉사는
하나님의 신약 경륜을 수행하는 것이다.
이것은 교회에 관한 것이고 그리스도의 몸의 건축을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진정한 참된 새 언약의 사역은 반드시 하나의 목표가 있어야 한다. 하나님의 신약경륜을 수행하는 것이고 이루어 내는 것이다. 그것은 교회에 관한 것이고 그리스도의 몸의 건축을 위한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수행해 내야 하는 일들이다. 그 일은 그들이 무엇을 하든지 그 일은 바로 그 사역의 일이어야 한다. 그들이 무엇을 하든지 그들은 주님의 몸의 건축을 위해서 해야 한다. 어떤 사역도 그 사역 자체를 위하지 않는다. 사역은 교회를 위한 것이고 몸을 위한 것이다. 에베소서 4장 12절 성도들은 그 사역의 일을 하도록 온전하게 된다. 그리고 거기에 쉼표가 있고 그리스도의 몸을 건축하는 것을 말하고 있다. 이것의 의미는 바로 몸을 건축하는 것이 바로 그 사역의 일이라는 뜻이다.
네 번째로 고린도 후서 3장이 근거해서
새 언약의 사역에는 두 가지가 있다.
?그 영의 사역
그 영의 사역이다. 그것에 반대는 바로 문자의 사역이다. 문자는 죽이는 것이다. 그러나 그 영은 생명을 주신다. 생명을 주는, 생명을 나누어 주는, 생명을 분배하는 그 영의 사역이다.
?의의 사역
이것은 무엇에 반대 되는가? 바로 유죄 판결의 사역과 반대되는 것이다. 유죄 판결의 사역은 옛 언약의 사역이다. 이 두 가지를 우리가 함께 두고 볼 때, 그 영의 사역과 의의 사역을 함께 둘 때 우리는 오늘날의 이 사역이 생명의 사역이어야 한다는 것을 볼 수 있다. 생명의 사역은 무엇과 반대 되는가? 죽음의 사역과 반대된다. 우리가 다 알 듯이 옛 언약의 사역은 문자의 사역이다. 어떤 정해진 율법, 기록된 율법에 근거하고 있다. 이것은 사람들에게 유죄 판결만을 가져온다. 그리고 그 결과는 죽음뿐이다. 반면에 새 언약의 사역은 생명을 주시는 그 영의 사역이고 항상 의를 산출해 낸다. 그 의는 로마서 5장에 근거해 볼 때 생명에 이르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새 언약의 사역의 초점은 다 영이요 의인 생명공급이 있는 사역이다. 이 사역은 실재로 살아내고, 생명을 살아내고 표현해 내는 것이다.
다섯 번째 이 제목의 개요에서 보듯이
생명의 사역은 바로 조성에 근거한 것이다.
여러분이 배우고 여러분이 취한 것에 근거한 것이 아니다. 여러분의 기술에 있는 것도 아니고, 여러분의 역량에 따른 것도 아니다. 이것은 전적으로 조성에 근거한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조성은 무슨 의미인가?
첫 번째로 하나님께서 우리의 존재 안으로 건축되는 것이다.
두 번째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으로 일해 넣어지셔야 한다는 의미이다. 갈라디아서에 바울이 내가 그리스도께서 여러분 안에 형상이 이루어질 때까지 내가 해산하는 수고를 한다고 말한다. 세 번째로 그 영께서 또한 우리 존재 안으로 조성되셔야 한다. 그분은 생명주시는 영이시다. 공기 같은 영이신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존재 안으로 조성되셔야 한다. 그러므로 삼일 하나님이 사람의 그릇 안으로 조성되는 것, 믿는 이들 안으로 그리스도인들 안으로 조성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무엇을 산출하는가? 진정한 사역을 산출한다. 이것은 생명의 사역이다. 은혜아래 있는 사역이다.
여섯 번째 항목은 사역의 산출이다.
사역은 바로 형성되고 또 보존되고 유지되는데 그리스도의 풍성들을 체험함으로부터 나오는 것이고 그것들에 의해 지켜지고 유지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곧 고난을 통한 것이다. 그리고 소모시키는 압력, 십자가의 죽이는 일을 통하여 산출되는 것이다. 사역은 산출된다. 형성되고 산출되는데 무엇에 의해서 인가? 바로 그리스도의 풍성들에 체험에 의한 것인데 이것은 고난들을 통한 것으로서 그리스도께서 통과하신 그 고난을 말하는 것이다. 바로 그분의 몸을 산출하시기 위한 것이었다. 그 고난에 우리가 함께 참여하는 것이다. 사역이 산출되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고린도 후서에서 볼 때 이 십자가의 죽이는 일이 이 고난이 어떻게 그리스도를 사도들의 존재 안으로 일해 넣으시는가를 보여준다. 그리고 어떻게 그러한 십자가의 죽이시는 일에 의해서 그들이 새 언약의 사역자들로 조성되는지를 보여준다.
고린도 전서를 볼 때 바울은 은사를 부정적인 방식으로 다루었다. 두 번째 서신에서는 은사자체가 언급되지도 않는다. 고린도 후서의 많은 장들을 보면 1장, 4장, 6장 11, 12장을 보면 이 장들에서 바울은 그의 고난들에 대해서 아주 상세하게 말하고 있다. 하나님에 의해 부름 받은 이 사람은 주님에 의해 소유된 이 사람은 그의 온 일생동안 주님을 사도로써, 하나의 전파자로써, 하나의 교사로서 섬겼는데 하나님의 경륜 안에서 섬겼는데 그는 바로 모든 이러한 역경들과 고난들을 통과해야 했다. 그가 압력에 눌려 그러한 상황가운데 부활의 하나님을 체험해야 했다. 바울은 자신의 힘에 지날 정도로 그는 압력을 받았다. 심지어는 살 소망까지 끊어지는 그런 절망적인 상황까지 갔었다. 그러한 상황들 가운데 거기 소망이 없었다. 그러나 그 당시의 그들은 자기 자신을 신뢰하지 않고 부활의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을 배웠던 것이다. 이러한 종류의 소멸시키는 어떤 십자가의 일을 통해서 이러한 환경들을 통해서, 주권적인 하나님께서 안배하신 이러한 환경들을 통해서 이러한 사역자들이 산출된 것이다. 물론 그들은 그 영이신 주님을 누렸다. 그러나 그런 압력 안에서 그들은 주님을 누렸고 하나님을 깊은 방식으로 누렸던 것이다. 그러한 종류의 누림이 그들의 행복을 위한 것만이 아니라 하나님을 그들 안으로 일해 넣으시기 위한 것이었다. 그리스도를 그들 안으로 일해 넣으시기 위한 것이었다. 그리스도를 그들 안으로 건축하시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조성된다는 것은 이 하나님께서 우리 안으로 일해 넣어지시는 것을 말한다.
I. 생명의 사역이 필요함-요일 5:14-17, 고후 3:6, 4:1, 12.
교회들을 건축하기 위해 어떤 한 지방교회를 건축하기 위해 주님의 회복 안에서 무엇이 필요한가? 바로 생명의 사역이 필요하다. 지방교회들을 건축하기 위해서 우리는 생명을 체험해야 되고 생명이 성장해야 한다. 오늘날 지방교회들의 부족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생명의 부족이다. 그리고 그 부족은 바로 어떤 사실에 기인하는가? 생명의 사역이 부족한데 기인한 것이다. 생명의 사역이 왜 부족한가? 주님의 회복 안에 생명의 사역자들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오늘 우리에게 거룩한 어떤 열망이 있기 원한다. “주 예수님! 주님의 회복을 위해서 내가 있는 교회를 위해서 또 성도들을 위해서 나를 생명의 참된 사역자로 조성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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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사역은 조성에 근거함― 엡 3:8, 3:17.
조성이 없으면 사역이 없다.
1. 우리는 그리스도의 존재와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것과 도달하신 것과 획득하신 모든 것이 반드시 우리 존재 안으로 조성됨
2. 생명 안에서, 생명으로 조성됨― 고후 4:12.
고린도 후서 4장 12절 “그러므로 죽음은 우리 안에서 활동하고 생명은 여러분 안에서 활동한다.” 은사는 아주 빠르고 은사는 즉각적으로 이루어진다. 그러나 은사가 교회를 건축하지 않는다. 실재로 은사는 교회를 몸을 나눈다.
3. 과정을 거치신 삼일 하나님으로 조성됨
고후 3:6, 고전 15:45하, 롬 8:2, 11.
4. 생명에 이르게 하는 하나님의 의(義)를 가져옴
롬 5:17, 21.
B. 부활의 하나님을 체험하고, 부활의 하나님을 다른 이들에게 공급함― 고후 1:8-10.
하나님은 이 많은 압력들을 어려움들을 그들이 통과하도록 하신다. 그들이 부활의 하나님을 알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부활의 하나님이신 그분께서 그분의 요소를 그들 안으로 일해 넣으시기 위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시는 이러한 고난들은 우리를 새 창조 안으로 이끌기 위한 것이다. 고난의 목적은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일해 넣어 지시기 위한 것이다.
C. 요한의 사역-생명의 보수하는 사역임 ― 마 4:21, 요 1:4, 10:10, 11:25, 20:31.
II. 생명을 몸의 다른 지체들에게 공급함 ― 요일 1:2, 5:14-17.
우리는 생명을 몸의 다른 지체들에게 분배할 수 있다.. 생명을 사역해야 한다. 생명을 공급해야 한다.
A. 넘치는 여분의 생명을 갖고 있을 때, 비축된 것으로부터 다른 이들에게 공급할 수 있음― 요일 5:16.
우리에게 생명이 없거나 생명이 부족하다면 우리는 생명을 공급할 수가 없다.
B. 요일 5:16절의 ‘구하는 사람’과 ‘생명을 주는 사람’
1. 자신이 기도하고 있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생명 주시는 영께서 생명을 주실 수 있도록 하는 수단이자 통로가 되어 생명을 공급함-고전 6:17, 요일 1:3, 7.
우리는 이 사역을 어떻게 수행하는가? 바로 하나의 통로, 생명의 통로가 됨으로써 수행한다. 우리가 기도하고 금식하여 생명을 위해 구해야 한다. 우리는 다 생명의 사역자들이 되어야 한다. 교회 안에 있는 문제는 다 죽음이다. 죽음이 유일한 문제이다. 그러므로 생명이 유일한 해결책이다.
2. 우리는 반드시 신성한 생명 안에 거하고, 신성한 생명 안에서 살고 행함-요 15:4-5, 7, 요일 1:1-7.
사역에 대한 아주 좋은 정의로서 사역은 어떤 행함의 문제가 아니라 바로 우리의 생활에서 나오는 것이다.
3. 영원한 생명이 몸의 다른 지체들에게 흘러갈 수 있도록 하는 통로서 이 생명을 공급함 ― 요일 5:16.
부담은 바로 그 생명의 사역이 무엇인가에 관한 것으로 그 생명의 사역은 성도들을 격려하고 성도들을 목양하여 항상 한가지로 안내한다. 무엇인가? 생수의 원천이신 하나님을 체험하고 누리게 하고 그분을 그들의 유일한 근원으로 삼도록 격려하는 것이다. 참된 목양은 바로 사람을 주님께로 인도하는 것이다. 터진 웅덩이로부터 돌이키게 하여 생수의 원천이신 그분을 마시게 하는 것이다. 그들이 직접적으로 하나님을 접촉할 때, 그분으로부터 무언가를 받아들일 때 그 사람은 도움을 받을 수 있다.
III. 생수의 원천이신 하나님을 체험하고 누리며 그분을 그들의 유일한 근원으로 삼도록 격려함-렘 2:13, 계 7:17.
A. 그분의 선민의 누림과 만족을 위해 생수의 원천이자 근원이 되시길 갈망함 ― 렘 2:13, 시 36:8-9.
1. 하나님을 우리 생활의 유일한 근원으로 취하기를 원하심 ― 롬 11:36.
모든 문제들이 바로 우리가 이 생수의 원천을 그 근원을 떠나는 대서 시작된다. 하나님의 눈에 볼 때 가장 주된 죄는 바로 이 생수의 원천을 떠나는 것이다.
a. 하나님은 그분 자신 이외의 그 무엇도 근원으로 삼기를 원하지 않으심 ― 고전 8:6, 렘 2:13.
b. 우리는 하나님에게서 나오는 것은 무엇이든지 받아들여야 함― 롬 11:36.
다른 사람들을 돕기 위해서 우리는 그 근원으로부터 우리가 먼저 공급을 받아야 한다.
2. 그분의 단체적인 표현을 몸 위해 한 무리의 사람들을 얻으시는 것임-창 1:26, 엡 1:10, 3:9
3. 하나님께서 생수의 원천이 되신 목표― 엡 1:5, 9, 22-23.
a. 한 배필, 곧 한 신부를 산출함 ― 요 3:29상, 4:14, 계 19:7-8.
b. 하나님께서 증가되시고 확장되심― 렘 2:13.
c. 분배하여 그분의 표현을 산출함 ― 골 2:19.
d. 생수의 원천이신 하나님을 마심
요 4:14, 3:29상, 고전 12:12-13.
e. 생수의 원천이신 하나님을 떠나서는 그 무엇도 우리의 목마름을 해결할 수 없고
우리를 만족시킬 수 없고
그분의 증가로 만들 수 없음― 계 22:1, 17.
4. 하나님의 갈망은 그분께서 선택하신 사람들에게 모든 것이 되시는 것임― 렘 17:7-8.
5. 생수의 원천이신 하나님을 받아들이는 유일한 길은 그분을 마시는 것임 ― 요 4:14, 7:37, 렘 2:13.
B. 분배하시기 위해 과정을 거치시고 완결되셨음―요 7:37-39, 롬 8:11.
1. 신성한 생명으로서 우리 안에 넣으시는 것에 의해서만 하나님의 경륜 성취될 수 있다 ― 롬 8:2, 6, 10-11.
2. 분배하심으로써 영원토록 그분 자신의 단체적인 한 표현을 얻으심 ― 계 21:9-10, 22:1.
C. 우리는 생수의 원천이신 하나님을 마셔야 함
렘 2:13, 고전 12:13, 요 4:14.
1. 하나님은 우리와 하나가 되시고 우리는 하나님과 하나가 됨 ― 시 36:8-9.
2. 생명과 본성에서 그분으로 조성되어 그분의 단체적인 표현 곧 그분의 배필이 됨― 요 3:15, 벧후 1:4, 엡 1:5, 9, 5:27.
사역은 바로 계시에 고난이 더해져서 산출된다. 계시가 없으면 사역이 있을 수 없다. 계시가 있다하더라도 그가 고난이 없다면 그에게 사역이 없다. 어떤 가르침은 있을 수 있고 어떤 은사는 있을 수 있지만 그것은 사역이 아니다. 가르침과 사역의 차이는 사역은 더 높고 깊은 것이다. 은사는 표면적이고 아주 얕은 것이다. 사역은 아주 장중하고 가치가 있는 것이다. 여러분이 하나님으로부터 계시를 받는다면 하나님은 여러분을 고난가운데 두실 것이다. 그래서 사역이 산출되게 하시는 것이다. 사도바울의 이러한 글들에서 볼 때 그는 고난들을 견뎠다. 그가 계시를 받았을 때 그는 그 계시를 가르침으로 전달하기 위해 나아가지 않았다. 그렇게 했다면 그것은 사역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것은 다만 가르침에 불과했겠죠. 다만 은사를 사용하는 것에 불과했다.
그러나 그가 계시를 받은 후에 하나님은 바울을 어떤 고난 안에 두셨다. 그러한 서신서 들을 볼 때 먼저 계시가 오고 그 다음에 고난이 온 것을 알 수가 있다. 이 두 가지로부터 사역이 산출된 것이다. 계시를 받는 것과 그 계시가 우리 안에 일해 넣어지는 것은 또 다른 것이다. 거기에 어떤 자기의 흙을 빚져서 거기에 어떤 그림을 그려 넣을 수 있겠지만 그 자기가 불을 통과할 때에 그 그림은 자기와 완전히 하나가 되는 것이다. 그 그림이 완전히 우리와 완전히 불에 구워져서 우리와 하나 되는 것이다. 그럴 때 그 그림은 자기와 전혀 분리 될 수가 없는 것이다. 그 그릇이 깨어지지 않고서는 그 그림을 없앨 수 없는 것이다. 이러한 고난을 통해 불을 통과하지 않으면 어떤 참된 사역도 산출될 수가 없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풍성을 얼마나 다른 사람들에게 사역할 수 있는가는 우리가 얼마나 많은 계시를 받았고 얼마나 많은 고난을 받았는가에 달려있다. 그런 계시에 고난이 더해질 때 우리에게 사역이 있는 것이다. 바울은 그러므로 우리가 이 사역을 받았으니 여기에서 바울은 그가 어떤 가르침을 받았다고 말하지 않고 사역을 받았다라고 말했다. 그래서 바울은 사역자가 되었다. 그는 다만 연사가 된 것이 아니다. 그는 사역자가 된 것이다. 우리가 소위 말하는 사역자들은 오늘날의 기독교 안에서 뭔가 잘못 사용되었다. 사역자는 참된 사역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고 이 사역은 두 가지로부터 나오는데 바로 계시와 고난이다.
우리가 은사와 사역의 차이를 발람의 당나귀를 통해 설명할 수 있다. 이것이 1940년도에 그분이 하신 말씀인데 어느 날 그 이방 신언자의 나귀가 사람의 말을 했다. 그것은 사역인가? 사역이 아니라 그것은 은사이다. 사역은 우리의 존재의 표현이다. 그러나 은사는 다만 하나의 활동에 불과하다. 여러분이 어떤 사람이 말하고 걷고 제스처를 취할 때 원숭이를 예를 들어 보죠. 원숭이가 훈련을 받아서 뭔가를 할 수 있다고 해도 그것은 사역이 아니다. 그것은 은사에 불과하다. 그것은 어떤 공연에 공연하는 것에 불과하다. 그가 말한 것 바울이 말한 것은 실재로 그의 존재였다. 그 인격이 바로 메시지였다. 오늘날 우리는 말이 유창한 사람이 있고, 많은 학위를 받은 사람도 있을 수 있고 우리가 어떤 연설을 설교를 하듯이 연단에서 말할 수 있지만 그것은 사역이 아니다. 사도바울은 달랐다. 워치만 니도 달랐다. 나는 니형제님과 많은 시간을 보냈는데 그분 안에서 나는 십자가를 보았다. 그분이 각 방면에서 받았던 고난들을 나는 보았다. 이형제님께서 여기서 간증하고 계신다. 그동안 니형제님이 기쁨이 가득 찼던 날이 하루도 없었음을 말했다. 그분은 슬픔의 사람이셨다. 제가 제 존재에서 간증할 수 있는 것은 그가 한 것은 사역이었고 그가 한 것은 그의 존재였다는 것이다. 교회를 건축하기 위해서 은사는 사역만큼 필요하지 않다. 니형제님은 다만 은사가 아니었고 사역이었다. 니형제님의 임재만 있어도 거기에 생명의 공급이 있었다. 니 형제님이 거기에 앉아 있기만 해도 집회가 달랐다. 앉아 있기만 해도 집회가 풍성했다. 말하든 말하지 않던 집회에 앉아 있기만 해도 집회가 달랐다. 하나님의 어떠함이 그 니형제님 안에 조성된 것이다. 일해 넣어진 것이다. 그래서 성도들이 문제들을 가져올 때 실재로 니형제님에게 그것을 말하지 않아도 그 문제들이 그분의 임재 안에서 해결되었다. 그들은 그들이 필요로 하는 빛을 받았던 것이다. 우리는 정말 그러한 사역이 교회 안에서 얼마나 필요한가? 내가 니형제님과 함께 있었던 시간동안 제가 깨달은 것은 니형제님이 항상 은사들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다는 것이다. 고린도 후서에서 바울이 쓴 글을 보면 처음에는 은사를 언급했지만 후서에서는 주된 단어가 바로 사역이다. 아주 긍정적인 방식으로 사용되고 있다. 고린도 전서에서 바울은 은사를 낮추었다. 그리고 후서에서 그는 사역을 높였다. 그래서 고린도 후서에서는 은사라는 단어를 거의 찾아보기가 어렵다. 이것이 바로 사역에 관한 것이다. 우리는 이 사역아래서 이것을 도움을 받아 알게 되었다. 그분의 통치는 바로 생명의 공급에서 오는 것이다. 여러분은 통제할 필요가 없다. 우리의 필요는 더 많은 생명을 공급하는 것이다. 생명의 공급이 없을 때 여러분이 무엇을 하더라도 그것은 통하지 않을 것이다. 결국 그것이 여러분에게 돌아와 여러분을 괴롭힐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통제의 근원이 무엇인가?
이형제님이 말했다. 어리석은 사람은 통제하려고 한다고 한다. 여러분이 통제하려고 한다면 여러분은 어리석은 사람이다. 그리고 여러분 작은 사람이다. 통제하려고 하는 사람은 작은 사람이다. 우리는 배워야한다. 교회를 합당하게 부지런하게 철저하게 감독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절대 성도들을 통제해서는 안 된다. 교회를 통제해서는 안 된다. 무엇이든 통제해서는 안 된다. ? 우리는 생명의 사역자들이 됩시다. 주님 우리에게 교회에게 필요한 사역을 우리 안에 일해 넣어 주시고 사역해 주십시오. 우리가 어디에 있고 어떤 위치에 있던지 간에 우리는 그러한 사람으로서 있어야 한다. 우리는 그런 사람이어야 한다. 다만 신성한 생명의 통로가 되어야 한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몸을 건축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