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시지 1. 여는 말씀
① 하나님의 중심사상이 우리의 중심사상이 되어야 한다! 창세기(Genesis)는 라틴어로 산출 또는 기원을 의미한다. 창세기가 하는 것은 거룩한 말씀 안에 있는 신성한 진리를 산출한다. 신성한 진리의 씨들은 이 책에 뿌려져 있다. 이러한 씨들은 이어지는 책들에서 자란다. 특별히 신약에서 자라고 발전해서 최종적으로는 계시록에서 그 열매를 수확하게 된다. 창세기 1장과 2장 그리고 계시록 21장과 22장 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중심사상을 볼 수 있다. 성경의 서론과 성경의 결론에서 하나님의 중심사상을 볼 수 있다. 창세기 1장과 2장에서는 죄가 들어오기 전의 그림이고, 계시록 21장과 22장에서는 죄가 제거된 것을 볼 수 있다. 하나님의 중심사상은 죄와 관련이 없다. 죄가 들어왔을 때 그리스도 안에 계신 하나님께서 죄를 제거하시고 우리를 그분의 중심사상 안으로 다시 돌리셨다. 우리의 중심사상은 하나님의 중심사상과 같아야 한다. 하나님의 중심사상이 우리의 중심사상이 되어야 한다. 창세기 1장과 2장, 계시록 21장과 22장의 이상은 성경에 있는 가장 위대하고 가장 높은 이상이다. 이 네 장에서 하나님의 경륜 전체를 볼 수 있도록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의 눈을 열어 주시기를 기도해야 한다.
②창세기 1-2장과 계시록 21-22장은 서로 병렬을 이루고 일치되고 있다. 창세기 1-2장을 볼 때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을 볼 수 있다. 그것은 형상을 가진 사람이 그분을 표현하고 그분의 통치권을 가지고 하나님을 대표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계시록 21-22장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완전히 표현하고 완전한 형태를 이루고 완전히 영광스럽게 된 건축된 성을 볼 수가 있다. 이 거룩한 성은 우리 모두를 다 포함하고 있다. 하나님을 완전히 대표하고 또 이 우주 가운데 하나님의 통치권을 갖는다.
창세기 2장에서 사람은 하나님을 담을 수 있는 그릇이다. 사람이 영을 가지고 있는 것이 기쁘지 않는가! 주님을 찬양한다. 우리 사람의 영은 신성한 생명을 받을 수 있는 수신기이고, 신성한 생명을 담을 수 있는 용기이다. 우리 사람의 영으로 하나님을 접촉할 수 있고 하나님을 받을 수 있고 하나님을 동화시킬 수 있고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의 생명과 우리의 모든 것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결국 계시록 21장과 22장에 갈 때 이 성은 위대한 하나님-사람의 성, 위대한 단체적인 그릇인데, 삼일 하나님과 연결과 연합과 합병된 것이다.
창세기 2장에서는 생명나무가 있다. 계시록 21-22장에서도 생명나무를 볼 수 있다. 생명나무는 우리의 생명과 생명공급을 말한다. 생명에는 세 가지 헬라어가 있다. 첫 번째는 바이오스(bios). 물질적인 생명이다. 거기에서 생물학이라는 단어가 나왔다. 두 번째는 프슈케(psuche). 혼을 연구하는 심리학이라는 단어가 거기에서 나왔다. 그러나 우리는 바이오 스나 프슈케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조에(zoe)이다. 조에는 신성하고 피조 되지 않은 삼일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이다. 그러므로 생명나무는 조에 나무이다. 그것이 우리의 생명과 생명공급이 되는 것이다.
에덴에서부터 동산을 적시는 강이 있다. 계시록 22장에서도 생명수의 강이 있다. 이 생명수의 강은 생명의 흐름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생명과 생명공급인 생명나무가 있고, 생명의 흐름인 생명수의 강이 있다. 우리가 마시기 위한 것이다. 우리로부터 생명이 흘러나오게 하기 위한 것이다. 창세기 2장에서 세 가지 귀한 재료가 있다. 금과 진주와 같은 물질로 된 베델리엄과 마노 보석이 있다. 계시록 21장에서 이 거룩한 성은 금과 진주와 보석으로 구성되어 있다. 금과 진주와 보석이다. 이 모든 것이 일맥상통하고 있다. 창세기 2장 끝에는 하와가 있다. 아담과 어울리는 배필이 있다. 계시록 21-22장에 갈 때 거기에 새 예루살렘은 어린양의 아내, 신부이다. 새 예루살렘은 신부-성(bridal-city)이다. 새 예루살렘은 한 인격이다. 새 예루살렘은 어린양의 신부, 어린양의 아내이다. 새 예루살렘은 그리스도와 어울리는 그리스도의 배필이다. 그러므로 창세기 1장과 2장, 계시록 21장과 22장 사이에 병행구조를 볼 수 있다.
③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을 이루기 위해 우리에게는 생명, 조에가 필요하다. 아버지 하나님은 생명의 근원이시다(요 5:26) 아버지 그분 자신 안에 생명이 있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아버지께서 그분 자신 안에 생명이 있으신 것같이, 아들에게 생명을 주시어 아들 안에도 생명이 있도록 하셨기 때문입니다.”(요 5:26) 아들은 이 생명의 체현이시다. “그분 안에 조에가 있었으니”(요 1:4). 그리고 그 영이 있다. 그 영은 생명을 주시는 분이시다. “마지막 아담은 생명 주시는 영이 되셨으니”(고전 15장 45절하). 조에를 주시는 영이시다. 그분은 지금 우리 영 안에 계시고 그분의 기능은 우리에게 조에를 주시는 것이다. 이 시간에 조에를 주고 계신다. “조에를 주시는 분은 그 영이니 육체는 무익하니라 내가 여러분에게 하는 말이 영이요 조에이다”(요 6:63). 우리는 그 영은 생명을 준다(고후 3:6). 그 영은 생명을 주시는 분이다. 우리가 건축이라고 말할 때 이 건축은 생명의 성장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건축물이 자라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엡 2:21). 주님 안에서 성전으로 자라가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④이제 이기는 이들에 대해 보겠다. 이기는 이들은 생명을 받아들이는 사람들, 이기는 이들은 이 생명을 누리는 자들, 이기는 이들은 이 생명을 분배하는 자들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생명을 받아들이는 이들이 되어야 하고 생명을 누리는 이들이 되어야 하고 생명을 분배하는 이들이 되어야 한다. “아내는 생명의 은혜를 상속받는 자라고 말하고 있다(벧전 3:7)”. 이것은 삼일 하나님이신 은혜를 생명과 생명공급으로 누리는 것이다. 여러분을 위한 나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의 청지기 직분을 말하고 있다(엡 3:2). 이것은 바로 생명을 다른 사람들에게 그들이 누릴 수 있도록 분배하는 것이다. 요일 5:16에서 죽음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를 범하는 형제를 보거든 그를 그분께 구하라고 말했다. 그럴 때 그에게 조에를 줄 것이다라고 말했다. 우리는 조에를 주시는 생명 주시는 영을 다른 사람들에게 줄 수 있다.
⑤이제 그리스도의 몸에 대해서 말하자. 그리스도의 몸은 생명의 충만이다. “조에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충만입니다” 라고 말한다(엡 1:22-23). 우리에게는 생명의 풍성이 있다. 먼저 생명의 풍성을 우리가 받아들일 때 그것이 생명의 충만이 되고 생명의 표현이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몸은 그리스도의 생명의 표현이다. ⑥이제 새 예루살렘을 보겠다. 새 예루살렘은 생명의 성, 조에의 성이다. 아버지는 생명의 빛이시고 아들은 생명나무이시고 그 영은 생명의 강이시다. 이것이 계 22장 1-5절까지에 나온다. 22장 1절부터 5절에 아버지는 생명의 빛이시다. ⑦이 사역은 바로 생명이 흘러넘치는 것이다. 이것은 요 7:37-39절에 나온다. 우리가 매일 주님께 나아와서 주님을 마시는 것이 어떻겠는가? 여러분은 그분에 대해 목마르고 있는가?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나에게로 와서 마시십시오. 나를 믿는 사람은 성경에서 말한대로 그의 가장 깊은 곳에서 생수의 강들이 흘러나올 것이다. 우리가 그분을 마실 때 자연스럽게 우리로부터 흘러나옴이 있다. 이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는 것이 생명의 사역이다. 그러므로 사역은 생명이 흘러넘치는 것이다.
Ⅰ. 하나님의 갈망과 목적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하나님을 표현하고 하나님의 권위를 가지고 하나님을 대표하는 단체적인 한 사람을 얻는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을 표현하고 대표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생명나무로 상징되신 하나님을 자신의 생명으로 소유해야 한다 ― 창 1:26, 2:8-9, 롬 8:28-29, 고후 3:16-18, 롬 5:10, 17, 21, 16:20.
우리가 하나님을 표현하려면 그분의 형상을 가지고 그분을 표현하고 권위를 가지고 그분을 대표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하나님을 우리의 생명으로 소유해야 한다. 이 생명은 생명나무로 상징되어 있다. 하나님은 그분의 형상과 모양대로 사람을 창조하셨다. 그들로 하여금 이 땅의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고 하셨다. 그리고 사람을 에덴동산에 두셨다. 에덴이라는 것은 즐거움이라는 뜻이다. 하나님은 사람이 즐겁고 행복하기를 원하신다. 하나님은 여러분이 이 훈련에서 슬퍼하기를 원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여러분이 기뻐하기를 원하시고 행복하기를 원하신다. 그렇지만 이것은 우리의 타고난 방식이 아니다. 우리가 생명나무이신 그분을 누릴 때 우리는 행복해 질 수 있다. 사람은 그분으로 만족케 할 수 있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 보기에 즐겁고 먹기 좋은 온갖 나무를 자라게 하셨고 동산 한 가운데는 생명나무가 있게 하셨다. 이 생명나무는 바로 먹기 좋은 것이다. 우리 찬송에서 하나님 먹기 좋다는 찬송이 있다. 하나님은 먹기 좋은 분이시다. 그리스도 안에 계신 하나님은 그 영으로 우리의 음식이 되신다. 우리는 그분을 먹어야 한다. 우리의 영을 매일 사용함으로써 그분을 먹고 그분으로 말미암아 살아야 한다.
형상-롬 8:28-29, 고후 3:16-18은 형상과 관련된 것이다. ①롬 8:28-29은 맏아들과 같은 형상을 이룬다. 고후 3:18에서 동일한 형상으로 변화되어 영광에서 영광에 이른다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롬 8:28-29과 고후 3:16-18절은 창세기 1:26에 있는 영광 안의 사람을 표현하는 형상이라는 말을 이루는 구절들이다. 그리고 롬 8:28-29 “또한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 곧 그분의 목적에 따라 부름받은 사람들에게는 모든 것이 협력함으로써 선이 이루어진다는 것을 압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아신 사람들을 그분의 아들과 같은 형상을 이루게 하시려고 또한 미리 정하셨습니다. 그것은 그분의 아들을 많은 형제들 가운데서 맏아들이 되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그분과 같은 형상을 이룰 수 있겠는가? 예를 들어서 장갑은 손의 형상대로 만들어졌다. 이것은 결국 손이 그 장갑 안으로 들어갈 때 그 장갑과 같은 형상을 이루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께 그분 자신을 우리 안에 분배하시고 우리 안에 일해 넣으셔서 우리가 맏아들과 같은 형상을 이루시게 하도록 허락해 드려야 한다. 우리가 그렇게 한다면 그분은 모든 것으로 이루어진 환경을 우리에게 안배해 주신다. 그 모든 것들이 우리 환경가운데서 협력함으로써 우리의 룸메이트 우리의 배우자 여러분의 자녀들 강아지 또 고양이 여러분이 어떤 것을 가지고 있다하더라도 자동차 주님께서는 모든 것들을 사용하셔서 모든 사람들 모든 상황들을 사용하셔서 협력하여 선이 이루어지게 하신다. 여러분을 여러분의 영 안에 잠기도록 일하고 계신다. 그래서 여러분이 하나님을 접촉하고 하나님을 받아들이고 하나님을 동화시켜서 하나님의 맏아들과 같은 형상을 이루게 하신다.
②고후 3:16-18에서는 우리가 그리스도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되어 영광에서 영광으로 이르는 것이다. 우리의 마음이 언제든지 라고 말하고 있다. 언제든지 그들의 마음을 주님께 돌이키기만 하면 너울이 벗어질 것이다. 우리가 이 훈련에서 매일 주님께 돌이키는 것을 훈련합시다. 그럴 때 너울이 벗어질 것이다. 우리는 수건을 벗은 얼굴로 주님의 영광을 바라보고 반사함으로써 그분과 동일한 형상으로 변화되는 것이다. 우리는 지금 변화의 과정 가운데 있다. 영광에서 한 단계의 영광에서 또 다른 단계의 영광에 이르는 것이다. 이것은 주 영에서 비롯된 것이다.
대표 주님께서는 우리가 그분의 권위를 가지고 그분을 대표하기를 원하시는데 롬 5:10, 17, 21, 16:20에서 그것을 볼 수가 있다. ①롬 5:10은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하나님의 아들의 죽음을 통해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우리는 ‘더욱’, 우리는 ‘더욱’을 가진 그리스도인들이다. 주님을 찬양한다. 그분의 아들의 죽음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다. 우리는 더 이상 하나님의 원수가 아니다. 이제 우리는 그분의 친구가 되었다. 그러나 더욱이 필요하다. 이미 화목하게 된 우리는 더욱 그분의 생명 안에서 구원받을 것이다. 우리는 생명 안에서 구원받아서 죄로부터 구원받고, 세상적임에서 구원받고, 우리의 타고난 생명에서 구원받고, 우리의 개인주의에서, 또 분열적인 것에서 구원받아야 하고, 우리의 자아 모양에서 구원받을 필요가 있다. 우리 자신을 표현하는 자아모양으로부터 구원받을 필요가 있다. 이것은 그분의 유기적인 구원의 과정을 통해서 구원받는 것이다. 그 유기적인 구원은 거듭남이고, 거룩하게 하심, 새롭게 하심, 변화, 같은 형상을 이룸, 영광스럽게 함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그분의 생명 안에서 구원받는 과정이다. 우리는 거듭남과 우리 혼의 변화와 우리의 몸이 영광스럽게 되는 과정을 통과할 필요가 있다.
②롬 5:17에서 이렇게 말한다. “한 사람의 범죄로 말미암아 죽음이 그 한 사람을 통하여 왕 노릇 하였다면, 은혜를 넘치게 받고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사람들은 더욱 한 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생명 안에서 왕으로서 다스릴 것입니다.” 우리는 다음 시대에 가서 다스릴 때까지 기다릴 필요가 없다. 우리는 더욱더 은혜를 넘치게 받아야 한다. 그 영이신 그리스도 안에 계신 하나님을 누릴 필요가 있다. 우리가 주님을 누릴 때 주님을 누리는 것이 우리로 하여금 생명 안에서 왕으로서 다스리게 하는 것이다. 사탄에 대해서 죄에 대해서 죽음에 대해서 다스리게 하는 것이다. ③롬 5:21은 우리가 은혜를 넘치게 받을 때 은혜도 의를 통하여 왕으로서 다스려 은혜도 다스린다고 말한다. 은혜를 누림으로 은혜가 우리 안에서 왕으로서 다스리게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누리는 것이 우리 안에서 다스릴 때 백화점에서 모든 물건들을 집었다가 다시 내려놓게 될 것이다. 주 예수님! 참으로 나를 폭로시키는 말인데 나는 더 많은 은혜가 필요하다. 은혜가 우리 안에서 왕으로서 다스리도록 해야 한다.
롬 16:20에서 화평의 하나님께서 속히 사탄을 여러분의 발아래 짓밟히게 하실 것입니다. 주님을 찬양한다. 화평의 하나님께서 그분은 사탄을 우리의 발아래 짓밟히게 하실 것이다.
Ⅲ. A. 에스겔 1:28 각주1) 보좌 위에 앉은 사람 둘레에 있는 밝은 무지개는 보좌 위의 주님을 둘러싼 광채와(splendor)와 영광을 의미한다. 노아 시대에 구름 속의 무지개는 사람과 모든 피조물들에게 다시는 홍수로 인류를 멸망시키지 않겠다는 그분의 언약을 지키심에 있어서 하나님의 신실하심의 상징이었다.
에스겔 1장 28절 각주2) 무지개의 세 가지 기본 색상―빨강, 노랑, 파랑―의 조합으로부터 산출된 것으로 여길 수 있다. 빨강색은 불의 색, 하나님의 거룩을 가리킨다. 노랑색은 합금의 색, 하나님의 영광을 상징한다. 파랑색은 청옥(사파이어) 보좌의 색, 하나님의 의를 상징한다. 하나님의 의, 거룩, 영광은 세 가지 신성한 속성들인데, 이것은 죄인들을 하나님께 가까이 오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오셔서 하나님의 의와 거룩과 영광의 요구를 만족시키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고 부활하셨다. 이제 그분은 우리의 의, 우리의 거룩함, 우리의 영광이시다(고전 1:30). 왜냐하면 믿는 이들인 우리는 지금 그리스도 안에 있고, 하나님 보시기에 우리는 의와 거룩과 영광이신 그리스도의 모양을 지니고 있다. 이것이 죄인들에게 있는 하나님의 심판으로부터 타락한 사람들인 우리를 구원하시고 우리를 아끼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의 증거인 무지개의 모양이다. 새 예루살렘에서 성의 기초는 무지개의 모양을 가지고 있다(계 21:19-20). 구원 받은 사람들의 집합체인 우리는 하나님의 의과 거룩과 영광의 광채를 반사하며, 우리의 하나님은 의롭고 신실하시다는 것을 영원히 간증하는 무지개가 될 것이다. 이 장에서 묘사된 것처럼, 그리스도인의 생활과 교회 생활은 그러한 무지개로 완결될 것이다. 그 시점에서 하나님의 영원한 계획은 성취될 것이다.
Ⅲ. A. 10. “육체에 둔 생각은 죽음이지만, 영에 둔 생각은 생명과 평안입니다.” ― 롬 8:6, 비교 고전 6:17.
우리는 에덴동산의 축소판들이다. 우리의 육체에는 선과 악의 지식의 나무가 있다. 우리의 영 안에는 생명나무가 있다. 우리의 생각을 육체에 둔다면 죽음이다. 그러나 우리의 생각을 영에 둔다면 생명과 평강이다. 우리의 생각을 육체에 둔다면 죽음의 느낌을 갖는다. 육체의 느낌은 불만족, 공허함, 약함, 낡음, 메마름, 어두움, 우울함, 불화, 불안, 고통, 속박, 슬픔 이런 것들이 다 죽음의 느낌들이다. 정말 끔찍한 것들이다. 그러나 우리가 생각을 영에 둔다면 우리 속에는 약함이 있고 불만이 있었고 낡음이 있었고 메마름이 있었고 우리 존재 가운데 고통이 있었다. 그것은 경고이다. 우리의 생각을 영으로 돌이키라는 경고이다. 우리의 생각을 영에 둘 때 우리는 생명의 느낌을 갖게 되는데, 그 느낌은 만족, 강함, 신선함, 물줌, 빛비춤, 기름바름 이런 것들이 있다. 놀랍지 않는가! 우리는 우리의 생각을 영에 두어야 한다. 우리의 생각을 영에 둘 때 우리는 만족의 느낌을 갖게 되고 내적인 강함의 느낌, 신선함의 느낌, 물줌, 빛비춤, 기름바름의 느낌이 있다. 또한 우리 안에 평안의 느낌이 있다. 평안의 느낌은 무엇인가? 편안함, 안락함, 조화로움, 기쁨, 자유의 느낌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결심을 해야만 한다. 내적인 생명과 평안의 느낌을 찾아야만 한다. 이것은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라 이것은 생명과 평안이냐 죽음이냐의 문제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생명과 평안을 관심해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