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의 노예 2013-10-31 , 조회 (378) , 추천 (0) , 스크랩 (0)
출처
원문
아벨, 에노스, 에녹
성경: 창 4:1-9, 14, 16-24, 26, 5:22-24
Ⅰ. 아벨은 자신의 생존이 아니라 하나님의 목적만을 관심한 이기는 순교자였다.
A. 가인은 땅을 경작하는 사람, 곧 땅을 섬기는 사람이었는데, 이것은 자신을 위해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서였다. 반면에 아벨은 양을 치는 사람, 곧 양에게 먹이를 주는 사람이었는데, 이것은 하나님께 드릴 제물을 얻기 위해서였다.
B. 노아의 홍수 이전에는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고기를 먹게 하지 않으셨고 오직 과일과 채소만을 먹게 하셨다. 그러므로 아벨은 자신의 생계를 위하여 양식을 얻으려고 양을 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만족을 위하여 하나님께 제물을 바치려고 양을 친 것이다.
C. 아벨은 하나님을 알았을 뿐 아니라, 자신의 관념이 아닌 하나님의 신성한 계시에 따라서 하나님을 경배하는 하나님의 일을 취했다. 아벨의 믿음은 그의 부모로부터 복음의 말씀을 들은 것에서 비롯되었다. 그러므로 아벨이 행한 것은 계시로부터 나온 것이었다.
D. 하나님께서 미리 정하신 구속에 따라, 아벨은 자신의 양 떼 가운데서 첫 새끼를 하나님께 드리면서 자신의 구속을 위해 희생 제물의 피를 흘렸고, 하나님의 만족을 위해 기름을 불살랐으며, 하나님께 의롭다 함을 받기 위해 가죽옷으로 자신을 덮었다.
1. 아벨이 행한 것은 나중에 주어진 모세의 율법의 요구들과 정확하게 부합하는데, 이것은 그가 하나님께 경배하였던 방식이 자기 자신의 관념에 따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신성한 계시에 따른 것이었음을 증명한다.
2. 아벨이 행한 것은 신약의 복음과 정확하게 부합하는데, 신약의 복음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살면서 하나님의 의가 되도록 피로 깨끗하게 됨을 받아들이고, 자신을 부인하며, 자신을 제쳐 두고, 그리스도를 우리의 덮개로 취하라고 말해 준다.
3. 아벨은 하나님의 첫 번째 제사장으로서, 하나님을 위해, 하나님에 의해 살면서 예표적으로 그리스도를 하나님께 드렸다.
E. 가인의 길은 주제넘게 사람 자신의 노력으로, 마귀의 부추김 아래 사람 자신이 발명한 것에 따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하나님을 경배하려고 선을 행하는 것이었다.
1. 가인은 희생 제물의 피를 바침으로 적용되는 예기된 구속을 통한 하나님의 구원의 길을 따르지 않았으며, 그 길을 버리고 자신이 수고하여 거둔 산물을 주제넘게 하나님께 제물로 바침으로써 사람의 타락 안에 계속 머물렀다.
2. 가인이 하나님께 경배한 방식은 자신의 인간적인 관념과 의견에 따라 종교를 만들어 낸 것이었는데, 그것은 사탄에게 부추김을 당한 것이었다.
3. 가인은 육체 안에 있었고 자신이 수고하여 거둔 산물을 신뢰했지만, 아벨은 자신이 드리는 제물을 신뢰했고 그리스도 예수님을 자랑했으며 육체를 전혀 신뢰하지 않았다.
F. 아벨은 모든 이기는 순교자들을 대표한다. 아벨은 하나님의 계시에 따라 제물과 함께 제물의 피를 드렸고 하나님께 기쁘게 받아들여졌기 때문에, 가인에게서 미움을 샀고 그의 종교적인 질투심을 불러일으켰으며 그에게 살해당했다.
G. 아벨은 구속받았을 뿐 아니라 하나님께로 되돌아가 하나님을 접촉하고 하나님과 교통했다. 아벨은 주님의 임재를 주의했지만, 가인은 주님의 임재에서 떠나 도망자와 방랑자가 되었다.
1. 우리가 하나님의 임재 안에 있지 않다면, 자신이 갈 곳이 없는 방랑자라는 깊은 느낌을 갖게 될 것이다.
2. 우리의 참된 거처는 하나님의 임재이다.
3. 하나님의 길을 따라서 하나님의 임재 안에 사는 모든 사람들은 어두운 안색을 가진 가인과는 반대로 밝은 안색을 갖는다.
H. 가인이 주님의 임재에서 떠난 결과는 하나님 없는 문화를 만들어 낸 것이었다.
1. 하나님은 사람에게 모든 것, 곧 사람의 생활 수단과 공급과 오락과 보호가 되기를 원하신다.
2. 사람은 하나님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하나님을 반대하는 인간 문화를 만들어 낼 수 밖에 없었다. 그러한 인간 문화의 주된 요소들은 생존을 위한 성(城)과 생계를 위한 가축 사육과 오락을 위한 음식과 방어를 위한 무기였다.
Ⅱ. 인류 역사상 에노스는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이라는 획기적인 인물이었다-창 4:26.
A. 에노스는 연약한 믿는 이로서 여호와의 이름을 부름으로 자신의 몫이신 여호와를 누렸다.
1. ‘에노스’라는 이름은 ‘연약하고 죽을 수 밖에 없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2. 에노스는 자신이 힘이 없고 연약하며 죽을 수 밖에 없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에 자신을 신뢰하지 않았다. 우리가 인생의 공허함과 사람의 연약함을 모두 깨닫는다면 우리 자신을 신뢰하지 않을 것이다.
B. 히브리어로 ‘부르다’는 ‘크게 부르다’, ‘외치다’, 즉 ‘들을 수 있게 외치다’를 의미한다. 사람들은 자신의 삶이 공허하다는 것과 자신이 연약하여 죽을 수 밖에 없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여호와 곧 영원하신 분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하였다.
C. 비록 그들은 공허하고 약한 사람들이었지만, 주님의 이름을 부름으로써 풍성하고 강하게 되었다. 이것은 그들이 부른 분의 풍성과 능력 안으로 그들 자신이 들어갔기 때문이다.
D. ‘여호와’는 친밀한 이름, 곧 사람과 친밀한 관계를 맺으신 하나님의 이름이다.
1. ‘여호와’라는 이름은 ‘나는 ‘나는…이다’이다’, 즉 스스로 존재하시고 영원히 존재하시는 분, 지금도 계시고 영원히 계시는 분을 의미한다.
a. 우리 하나님의 이름은 동사 ‘…이다(be)'이다. 그분은 영원하신 분이시며, 그분만이 ‘…이다’이시다.
b. 스스로 존재하고 영원히 존재하는 분이신 하나님은 모든 것이시다. 하나님은 어떤 것이든 우리에게 필요한 바로 그것이시다.
2. 에노스가 여호와의 이름을 부른 것은 그러한 연약한 사람이 자신에 의해서가 아니라, 위대한 ‘나는 …이다’이신 분, 곧 항상 존재하시고 영원하신 분에 의해 살았다는 것을 가리킨다.
E. 합당한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우리의 영을 사용해서 주님의 이름을 부름으로써 계속해서 그 영을 받아들이는 생활이다.
F. 우리가 주님의 이름을 부름으로써 그 영을 들이마실 때, 우리는 내쉬고 들이쉰다. 우리는 부정적인 것들을 내뿜고 주님의 긍정적인 것들을 들이마신다.
G. 그리스도를 사는 길은 그분을 들이마시는 것이며, 그분을 들이마시는 길은 끊임없이 그분을 부르는 것이다.
Ⅲ. 에녹은 믿음으로 하나님과 동행하여 죽음에서 벗어나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렸다는 증거를 얻었다-창 5:22-24, 히 11:5-6.
A.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은 하나님을 무시하지 않고, 주제넘지 않으며, 자신의 관념이나 갈망에 따라서 일하지 않고, 그 시대의 조류에 따라서 일하지 않으며, 하나님 없이는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이다.
B.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은 하나님을 우리의 중심과 모든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며, 하나님에 따라 하나님과 함께 살고 일하고 하나님의 계시와 인도에 따라서 살고 일하는 것이며, 모든 일을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이다.
C.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은 믿음으로 행하는 것이다. 믿음은 우리가 하나님께서 ‘…이다’이심을 믿는다는 뜻이다.
1.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하나님을 행복하게 해 드리는 것이 불가능하다.
2. 하나님께서 ‘…이다’이심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모든 것이시고 우리는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믿는다는 것이다.
3. 하나님께서 ‘…이다’이심을 믿는다는 것은 우리는 ‘아니다’라는 것을 함축한다. 하나님은 모든 것에서 반드시 홀로 유일한 분이셔야 하고, 우리는 모든 것에서 아무것도 아니어야 한다.
4. 하나님께서 ‘…이다’이심을 믿는 것은 우리의 자아를 부인하는 것이다. 온 우주에서 그분만이 ‘…이다’이시고, 우리 모두는 아무것도 아니다.
5. 나는 그 어떤 것도 되어서는 안 된다. 나는 존재하지 말아야 하며, 오직 그분만이 존재하셔야 한다. 곧 ‘더 이상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다.
D. 믿음은 하나님께서 그분을 부지런히 찾는 사람들에게 보상해 주시는 분이심을 믿는 것을 의미한다.
1. 에녹의 보상은 가장 높은 단계의 생명, 곧 죽음에서 벗어나는 것이었다.
2. 주님은 보상해 주시는 분이시고, 우리는 그분을 찾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E. 믿음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1. 에녹은 육십오 세 때 아들을 낳았고 그 이름을 ‘므두셀라’라고 지었다. 이 이름에는 ‘그가 죽을 때에 그것이 온다’는 예언적인 의미가 담겨 있다.
a. 에녹은 그의 아들의 이름을 ‘므두셀라’라고 지음으로써, 므두셀라가 죽었던 해, 곧 노아가 육백 세가 되었던 해에 홍수의 심판이 올 것임을 예언했다.
1) 므두셀라는 백팔십칠 세 때 라멕을 낳았다. 라멕은 백팔십이 세 때 노아를 낳았고, 노아가 육백 세 때 대홍수가 임했다.
2) 우리가 이 세 가지 숫자를 전부 더하면 구백육십구 해가 되고, 이것은 므두셀라가 죽었을 때의 연수이다.
b. 에녹은 육십오 세 때에 예언을 했는데, 그 당시에 에녹은 틀림없이 하나님의 계시를 받았고, 신성한 뜻으로 고취되었으며, 경건하지 않은 인류 세대 전체에게 심판이 임하리라는 것을 알았을 것이다.
2. 그 후에 에녹은 밤낮으로 그 예언이 성취되기를 기대하고 있었고, 이러한 기대감에 자극을 받아 에녹은 그 시대의 조류를 따르지 않고 하나님과 동행함으로 경건하고 거룩한 생활을 할 수 있었다.
a. 우리의 휴거는 우리가 하나님과 동행함으로써 신성한 생명 안에서 성숙하는 것에 달려 있다.
b. 에녹은 삼백 년 동안 밤낮으로 하나님과 지속적으로 동행하며 위로 올라갈수록, 날마다 하나님과 더욱 가깝게 되고 더욱 하나가 되었으며, 마침내 “하나님께서 그를 데려가시므로 그가 있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