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의 누림
창 6:16 그 방주에 빛이 들어오도록 창문을 내되 지붕 위에서 한 규빗 아래에 내고, 방주 옆쪽에는 입구를 내라. 그리고 그 방주를 아래층과 둘째 층과 셋째 층으로 만들어라.
엡 2:18 왜냐하면 그분을 통하여 우리 모두가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가기 때문입니다.
아래층과 둘째 층과 셋째 층은 방주의 높이를 나타낸다. 성막의 세 부분은 우리 모두가 들어가야 할 깊이를 상징하고, 방주의 세 층은 우리 모두가 도달해야 할 높이를 상징한다. 한 면으로 우리는 깊어지고 다른 면으로 우리는 높아진다. 물론 방주의 세 층은 삼일 하나님을 상징한다. 우리는 항상 신격의 삼일성 안에 아버지와 아들과 영이 있다고 말한다. 삼일성의 어느 위격이 일 층인가? 둘째 분이 누구이신가를 말하기는 쉽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가 아들께서 중앙이시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버지 하나님께서 일 층이신가, 영 하나님께서 일 층이신가? 누가복음 15장에는 세 가지 비유, 곧 잃은 양을 찾는 목자와 잃은 드라크마를 찾는 여자와 돌아온 탕자를 영접하는 아버지가 있다. 첫째 비유는 아들과 관계되고, 둘째 비유는 영과 관계되고, 셋째 비유는 아버지와 관계된다. 우리의 체험에 의하면 먼저 그 영께서 우리에게 오셔서 우리를 찾아 아들께로 인도하시며 아들을 믿으라고 격려하신다. 아들을 믿은 후에 우리는 “오, 아버지!”라고 말했다. 그 영은 우리를 아들께로 이끄시고, 아들은 우리를 아버지께로 이끄신다. 우리가 아버지께 나아갈 때 우리는 셋째 층에 있는 것이다.
오늘의 읽을 말씀
방주의 일층은 그 영이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소위 성령 침례와 기적적인 것들에 대해 이야기하기를 좋아하지만, 이들은 모두 일 층에 있다. 우리 모두는 아들이신 그리스도를 알기 위해 그 영께 가야 한다. 그리스도를 아는 것은 일 층에 있는 것과 다르다. 그것은 더 높은 것이다. 어느 날, 우리 모두는 아버지 층에 도달할 것이다. 이것은 가장 높고 가장 위대하며 가장 비밀한 것이다.
가령 내게 삼 층짜리 저택이 있다고 하자. 만일 여러분이 나의 친한 친구가 아니라면 나는 여러분을 일 층에만 있게 할 것이다. 나는 여러분이 이 층으로 올라오는 것을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 여러분이 나와 극히 친근한 관계가 아니라면 나는 결코 나의 비밀들과 은밀한 것들과 감추어진 보물들을 보여 주려고 여러분을 삼 층으로 데려가지는 않을 것이다.
가령 여러분이 지금 방주에 있다 하자. 여러분은 일 층, 이 층, 삼 층 중에서 어디에 머물겠는가? 의심할 것 없이 노아와 그의 아들들과 며느리들은 삼 층에 있었을 것이다. …나는 내가 일 층을 통과했음을 간증할 수 있다. 나는 더욱더 높이 올라가기를 원한다.
그다음으로, 빛에 대해 생각해 보자. 방주에는 하늘을 향한 창문이 하나 있었다. 그것은 채광을 위한 창문이었다. ‘창문’에 대한 히브리어의 어근은 ‘정오’에 대한 단어의 어근과 동일하다. 이것은 우리가 창문 아래 있을 때 정오 시간에 있고 빛으로 가득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햇빛 아래 있으며 빛으로 충만하다. 여러분이 일 층에 있는가, 이 층에 있는가, 삼 층에 있는가는 여러분이 소유한 빛의 정도에 의해 증명된다. 나는 열렬한 많은 그리스도인들을 보았다. 어떤 면에서 그들은 불타고 있었지만 빛이 많지는 않았다. 나는 또한 함께 있기만 해도 모든 것이 분명해지게 하는 사랑스런 성도들을 만나 보았다. …많은 사람이 워치만 니 형제님과 함께 앉아 있기만 해도 어둠이 사라졌으며 모든 것이 분명해졌다고 말했다. 그의 임재는 정오였다. …빛이 많을수록 여러분은 더 높은 곳에 있는 것이며, 빛이 적을수록 여러분은 더 낮은 곳에 있는 것이다.
방주에는 창문이 하나밖에 없다. …오직 하나의 창문과 하나의 빛이 있다. 사도 바울은 자기가 전파하고 가르친 것 외에 다른 교리들은 거절해야 한다고 말했다. 하나님의 경륜과 하나님의 교회 안에는 오직 하나의 창문만 있어야 한다. 빛은 동서남북에서 들어와서는 안 되며 하늘에서만 들어와야 한다. 하나님의 건축물에는 오직 한 창문, 한 계시, 한 이상만 있어야 한다. 빛은 위에서 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