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의 노예 2013-11-14 , 조회 (290) , 추천 (0) , 스크랩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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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아침의 누림
창 8:20 노아는 여호와를 위해 제단을 쌓고 온갖 정결한 짐승과 온갖 정결한 새 가운데서 제물을 골라 제단 위에 번제물로 바쳤다.
9:1 하나님께서 노아와 그의 아들들에게 복을 주시며 말씀하셨다. “자녀를 많이 낳고 번성하여 땅을 가득 채워라.
방주에서 나온 사람은 여덟 명이었다. 그리스도는 주의 첫날, 즉 한 주가 지나가고 새로운 한 주가 시작되는 여덟째 날에 부활하셨다. …그러므로 숫자 8은 부활을 상징한다. 교회를 구성하는 그리스도 안의 모든 믿는 이는 그리스도의 부활 안에 포함되었기 때문에, 모두가 부활한 사람들이다.
여덟 사람은 방주가 홍수를 통과할 때에나 방주가 산 위에 멈추게 되었을 때에도 방주 안에 있었다. 그러므로 방주가 체험한 모든 것은 방주 안에 있던 여덟 사람이 체험한 것이기도 하였다. 이것은 믿는 이들이 그리스도 안에 있음으로 말미암아 어떻게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고, 또 어떻게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하였는지를 보여 준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에 그분의 체험이 우리의 체험이 된다.
오늘의 읽을 말씀
창세기 8장 20절에서 제단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대한 예표이고, 제물들은 그리스도의 여러 방면에 대한 예표이다. 제단을 쌓은 것과 그 제단 위에 제물을 바친 것은 십자가를 통하여 그리스도를 제물로 하나님께 바치는 것을 상징한다. 교회생활 안에서 우리가 해야 할 첫 번째 일은 하나님을 위해 일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로 가서 끝내는 것이다. 그러고 나서 우리는 그리스도를 체험해야 하고, 우리가 여러 방면으로 체험한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만족을 위해 하나님께 바쳐야 한다.
사람의 타락은 저주를 가져왔지만, 교회생활 안에서 십자가를 통하여 하나님께 바쳐진 제물이신 그리스도는 저주를 가져가시고 복을 가져오신다. 궁극적인 저주는 죽음이며, 최고의 복은 생명이다.
교회생활은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도록 태초로 돌아가게 한다. 태초에 하나님의 표현이 있었고 하나님의 대표가 있었다. 하나님은 사람이 그분을 표현할 수 있도록 그분 자신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셨고, 사람이 그분을 대표할 수 있도록 사람에게 그분의 통치권을 맡기셨다. 사람은 이 두 면에서 하나님을 실망시켰다. 그래서 하나님은 여덟 사람을 물을 통하여 구원하셨고 부활 안에서 그들을 새로운 시대 안으로 이끄셨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분의 목적을 부활한 인류에게 다시 말씀하셨다. 이것이 교회생활이다. 교회생활 안에서 우리는 사람이 하나님을 표현하고 대표하는 그분의 원래의 목적으로 이끌렸다.
우리는 부활한 사람들, 곧 타락에서 태초로 돌아온 사람들이다. 우리는 아담 안에서 타락했지만 그리스도 안에서 회복되었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표현하고 대표하기 위해 태초로 돌아왔다. 교회생활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표현하는 생활을 한다. 우리는 사람들에게 말할 수 있다. “당신은 하나님을 보기 원하는가? 당신은 하나님을 알기 원하는가? 교회로 오라. 그분을 볼 것이다. 교회 안에서 하나님의 표현을 볼 것이다.” 더욱이 교회는 이 시대에 이 땅에서 하나님을 대표하기 위해 권위를 위임받았다.
침례를 받은 후에 우리는 부활 안에서 새로운 사람이 된다. 부활은 장래의 상태일 뿐 아니라 현재의 과정이기도 하다. 생명의 새로움으로 행한다는 것은 오늘 우리가 부활의 영역 안에서 살고 생명 안에서 다스리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생활을 할 때 우리 안에 있는 아담에 속한 모든 것이 처리되어 우리는 완전히 변화되고 그리스도와 같은 형상이 된다.
로마서 6장 5절에서 ‘그분의 부활과 같은 모양 안에서’는 장래의 객관적인 부활이 아닌 현재의 성장 과정을 가리킨다. 침례 받았을 때 우리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같은 모양 안에서 그분과 연결되어 자랐다. 이제 그분의 죽음을 통하여 우리는 그분의 부활 안으로 자라가고 있다. 그리스도의 죽음의 요소가 오직 그분 안에 있는 것과 같이, 그리스도의 부활의 요소도 오직 그리스도 그분 자신 안에 있다. 그분 자신이 부활이시다. 합당한 침례를 체험한 후에 우리는 그리스도의 부활과 같은 모양 안에서 계속 그분과 연결되어 자란다. 이것이 바로 생명의 새로움으로 행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