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주 2일 진주 문과 순금 길 K H E
오늘의 양식
주님의 노예 2014-06-10 , 조회 (195) , 추천 (0) , 스크랩 (0)
출처
원문



아침의 누림

 

3:10 나는 그리스도와 그분의 부활 능력과 그분의 고난의 교통을 알고, 그분의 죽음과 같은 형상을 이루어,

1:19 왜냐하면 여러분의 간구와 예수 그리스도의 영의 넘치는 공급으로, 이러한 일이 결국에는 나를 구원에 이르게 할 것을 나는 알기 때문입니다.

 

조개의 상처는 작은 돌로 인해 생긴 내적인 상처이다. 이 돌은 이 상처 안에, 혹은 이 죽음 안에 남아 있을 수 있다. 이와 같이 우리는 그리스도의 죽음 안에 남아 있을 수 있다. 여러분은 오늘 어디에 머물고 있는가? 여러분은 주님을 찬양합니다! 나는 그리스도의 죽음 안에 머물고 있습니다. 주님의 죽음이 내 처소이며 내 거처입니다.”라고 말해야 한다. 여러분은 그리스도께 상처를 입힌 작은 돌이다. 상처를 입으신 후 그분은 여러분을 그분의 상처 안에 두신다. 이제 여러분은 그분의 상처 안에, 그분의 죽음 안에 머물 필요가 있다. 그분의 죽음은 우리의 가장 좋은 거처이다.

 

오늘의 읽을 말씀

우리가 화를 내는 이유는 그리스도의 죽음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우리가 집을 떠나그분의 죽음 안에 머무르지 않았기 때문에 화를 낸 것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죽음 안에 남아 있고 머문다면, 우리는 결코 성질을 내지 않을 것이다. 어디에서 죄에 대하여, 우리의 기질에 대하여, 세상에 대하여, 사탄에 대하여 승리를 얻을 수 있는가? 오직 그리스도의 죽음 안에서 뿐이다.

작은 돌은 조개에 상처를 입힌 후에 그 상처 안에 머무는데, 조개는 결코 돌을 놓아주려 하지 않는다. 조개는 돌이 낸 바로 그 상처 안에 그 돌을 꼭 붙잡아 둔다. 그래서 그 상처가 돌의 거주지와 집과 거처가 된다. 이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성취하신 바로 그 죽음이 우리의 거처가 된다.

만일 우리가 그 상처에서 멀리 떨어져있다면, 부활 생명의 분비를 누릴 수 없다. 만일 돌이 조개의 상처에서 멀리 떨어져있다면, 조개의 생명 즙의 분비를 누리는 위치에 있지 않은 것이다. 분비는 부활 생명의 움직임을 상징한다. 조개는 살아 있고 유기적이기 때문에, 돌이 상처를 입히면 즉시 그 돌 주위에 생명 즙을 분비함으로써 반응하여, 돌을 붙잡고 심지어 그 상처 안에 돌을 가둔다. 이 그림 또는 비유는 우리가 그리스도의 분비하는 능력에 의해서 그리스도의 죽음 안에 감금되었으며, 이 분비가 바로 그분의 부활 생명의 움직임이라는 것을 보여 준다.

내가 그분의 상처 안에 머무는 한 그분의 생명은 반응하고, 이 반응은 그분의 부활 생명의 분비이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단지 객관적인 것이 아니라 매우 주관적이다. 우리는 그분의 죽음과 같은 형상을 이루어야 한다. 그분의 죽음이 우리의 매일의 거처가 되어야 하며, 그분의 부활이 우리의 매일의 체험이 되어야 한다. 우리는 그분의 죽음과 부활 안에서 계속 그분과 하나 되어야 한다. 우리가 그분과 하나 되는 것은 그 영 안에서이다. 그러므로 그분의 부활의 분비는 그 영 안에, 곧 그분의 부활의 실재 안에 있다.

조개는 놀라우신 그리스도에 대한 비유이다. 그분은 죽음의 물속에서 살 수 있는 유일한 분이시다. 살아 계시고 유기적인 분이신 그리스도는 우리에 의해 상처를 입으셨고, 부활하시어 상처를 입힌 사람들 주위에 그분의 생명 즙을 분비하심으로 반응하셨다. 이 어떠한 긍휼인가! 우리가 그분께 상처를 입혔는데, 그분은 우리를 놓아 주려 하지 않으신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분의 큰 사랑 때문에, 우리가 입힌 그분의 상처가 우리의 감옥이 되었다. 그분의 갈망은 우리를 그분의 죽음 안에 가두어 그분의 생명을 분비하는 부활을 누릴 수 있게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우리에 의해 상처를 받으시고, 그분의 상처 안에 우리를 붙잡으시며, 그분의 실재이신 그 영 안에 있는 부활을 통하여 그분의 죽음 안에서 우리 주위에 그분 자신을 분비하심으로써, 우리를 진주들로 만드신다.

진주는 곧 문인데, 이 비유의 요점은 우리가 진주가 되면 될수록 더욱더 새 예루살렘 안에 있게 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주 예수님을 믿을 때 거듭났는데, 이것은 우리가 새 예루살렘 안으로 들어가는 시작이었다. 그러나 그 당시 우리는 우리의 체험 안에서 거의 새 예루살렘 안에 있지 않았다. 우리는 주님의 죽음 안에 머물면서 생명을 분비하는 부활을 누릴 때 새 예루살렘 안으로 더 들어간다. 주님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우리의 체험이 새 예루살렘 안으로 들어가는 우리의 입구가 된다.


추천 스크랩 전체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