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의견은 주님의 능력을 가로막으며, 사람이 끝날 때 주님께서 시작하심
네 번째 사례는 요한복음 11장에 기록되어 있다. 여기서 적어도 두 가지 큰 원칙을 볼 수 있는데, 첫째는 사람의 의견이 하나님의 능력을 저지한다는 것이고 두 번째는 사람이 끝나면 주님께서 시작하신다는 것이다. 11장에서 우리는 사람의 의견이 어떻게 주님의 능력을 저지하는 지를 볼 수 있다. 먼저 마르다와 마리아는 주님께 사람을 보내어 “주님, 보십시오.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사람이 병들어 있습니다.”라고 말씀드리게 하였다. 이것은 주님께서 오셔서 그들의 오빠 나사로를 낫게 해 달라는 그들의 의견이었다. 그들의 이러한 부르짖음은 좋은 것이었으나 주님은 응답하지 않으셨다. 주님은 그들의 이 부르짖음을 들으셨지만 계시던 곳에서 이틀을 더 머무셨다. 나사로는 병으로 죽어 매장되고 냄새까지 났는데 그때서야 주님께서 오셔서 일하셨다. 마르다가 주님께서 오시는 것을 보았을 때 가장 먼저 한 일은 주님께서 늦게 오신 것에 대한 원망이었다. 그녀는 “주님, 주님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나의 오빠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이것은 그녀가 주님께서 늦게 오신 것을 원망한 것이다. 주님은 중요한 것은 시간에 달려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 달려있다는 것을 가르쳐 주시려고 그녀에게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라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그분께서 일찍 오셨다면 나사로가 죽지 않을 수 있었지만, 그분께서 늦게 오신 것은 나사로가 죽었을지라도 부활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분은 바로 부활이시고 주님이 계시면 모든 것이 있으므로 이것은 시간의 문제가 아닌 것이다.
여기에 유익한 공과가 있지만 마르다는 잘 배우지 못했다. 주님은 그녀에게 “나를 믿는 사람은 죽어도 살 것이고, 누구든지 살아서 나를 믿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입니다. 그대가 이것을 믿습니까?”라고 말씀하셨다. 마르다가 즉시 대답했다. “주님, 나는 주님께서 세상에 오실 그리스도 곧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을 믿었습니다.” 마르다는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믿은 것이 아니라 다른 것을 믿었다. 주님은 주님의 말씀을 하시고 그녀는 그녀 나름대로 믿고 있었다. 그녀는 주님과 일치되지 않았다. 이것은 그녀의 의견이 훼방을 놓은 것이고 그녀의 의견이 그렇게 시킨 것이다. 그녀는 참으로 의견으로 가득한 사람이다.
후에 마르다가 그녀의 동생 마리아를 불러 말했다. “선생님께서 오셔서 너를 부르신다.” 이것은 주님께서 그녀에게 전하라고 하신 말씀이 아니라 그녀 자신의 주장이다. 그녀가 “선생님께서 오셨다.”라고 말한 것은 맞다. 그러나 그녀가 “너를 부르신다.”라고 말한 것은 그녀가 지어낸 것이다.
마리아도 주님 앞에 갔을 때 “주님, 주님께서 여기 계셨더라면 나의 오빠가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주 예수님은 마리아가 우는 것과 또 따라온 유대인들도 우는 것을 보시고 영 안에서 격분하시고 괴로워하셨다. 이때 주 예수님도 우셨다. 주님께서 나사로가 죽었기 때문에 우셨다고 생각하지 말라. 주님께서 우신 것은 그들이 그분을 알지 못하고 그들의 영적인 상태가 가련했기 때문이다. 그들이 죽음에 직면하고 또 영적인 어리석음이 더해졌기 때문에 주님은 우신 것이다.
사람들은 주님의 징계를 받아 고통스러운 일에 직면하고도 여전히 그렇게 어리석은 상태가 되어 주님을 인식하지 못하고 주님께서 무엇을 하시려는 지도 전혀 알지 못하며 도리어 자신의 의견으로 가득하여 이런 의견, 저런 주장을 내놓게 된다. 이런 상태는 주님을 상심하시게 할 수 있다. 유대인들은 주님께서 우시는 것을 보고 이리저리 수군거리며 여러 가지 의견을 나타냈다. 그러자 주님은 그들이 그분을 알지 못하는 것 때문에 다시 영 안에서 격분하셨다. 결국 주님께서 무덤 앞으로 가셔서 그들에게 무덤을 막고 있는 돌을 옮기라고 하셨는데 이대도 마르다는 “주님, 사 일이나 되어 벌써 냄새가 납니다.”라고 의견을 말하였다. 그녀는 참으로 의견으로 가득한 사람이었다.
11장은 특별히 사람의 의견이 어떻게 주님의 능력을 가로막는가를 보여준다. 여기서 마르다와 마리아와 유대인들의 의견이 어떻게 주님을 가로막는가를 보여 줄 뿐 아니라 주님을 따르는 제자들의 의견이 어떻게 주님을 가로막는지를 보여준다. 먼저 마르다와 마리아가 주님께 오시라고 했지만 주님은 가지 않으셨다. 그 후 주님께서 가려고 하실 때 제자들이 그분을 가지 못하시도록 막았다. 사람의 의견은 계속해서 주님께서 그분의 부활 능력을 보이시는 것을 가로막는다. 그러므로 이 장에서 우리는 한 면으로는 주님께서 일하시고 표적을 행하시며 그분의 능력을 나타내 보이셔서 죽은 사람을 부활하게 하시려고 하지만 또 한 면에서는 사람의 의견이 걸음마다 방해하고 곳곳에서 어려움을 준다는 것을 본다. 마치 주님께서 그분의 부활 능력을 나타내 보이시려면 반드시 먼저 이 의견들을 깨뜨리셔야 하는 것 같다. 주님께서 사람들 사이에서 부활 안으로 걸어가시는 이 노정에는 곳곳마다 가시나무와 엉겅퀴가 있었는데, 이 가시나무와 엉겅퀴는 바로 사람의 의견이다. 마르다와 마리아와 제자들과 유대인들 모두 의견으로 가득했다. 주님은 반드시 먼저 가시나무를 뿌리째 뽑아 버리시고, 이 사람들의 의견의 방해를 없애 버리셔야 부활 안으로 걸어가실 수 있었다. 사람의 의견은 사람이 주님을 접촉하는 일에서 엄청난 방해가 된다.
우리가 주님께 가까이 나아가 기도할 때 반드시 이 공과를 배워 우리의 의견을 완전히 멈추어야 한다. 포도주가 떨어졌든지, 사람이 죽은 지 나흘이 되었든지 간에, 우리는 주장을 내놓을 필요가 없이, 주님께 지위를 내어 드리고 그분께서 어떻게 말씀하시는 지를 들어야 한다. 주님께서 모든 것이시다. 그분은 없는 것도 있는 것으로 불러내시고 죽은 사람에게도 생명을 주시는 분이시다(롬 4:17). 우리는 이런저런 말을 할 필요가 없이 전적으로 그분의 말만 들어야 한다. 의견은 한 가지 어려움이며, 주님께 가까이 가는 많은 사람들이 배우기 힘든 공과 중의 하나이다. (기도의 의미와 목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