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림과 둠밈의 오늘날의 적용
가슴받이(흉패)에 있는 열두 개의 투명한 보석은 그리스도께서 성도들을 통해 빛을 비추심으로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시도록 성도들이 투명해야 함을 가리킨다. 가슴받이 위의 열두 보석이 투명하지 않고 불투명하였다고 가정해 보자. 더 나아가 어느 보석에도 아무것도 새겨져 있지 않고 아무 빛도 비추고 있지 않았다고 가정해 보자. 그럴 때 보석들은 새겨진 것도 없고 빛 비춤도 없이 불투명하였을 것이다. 그러한 경우에는 가슴받이를 사용하여 하나님의 뜻이나 하나님의 인도를 발견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것이 오늘날 대부분의 기독교 단체들의 상황이다. 투명함이나 새겨진 것이나 빛이 전혀 없다. 이것이 어떤 지방에 있는 교회의 상황일 수 있다.
지방에 있는 교회로서 우리가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가슴받이가 되고자 한다면, 우리 모두는 투명해야 하고 우리 안으로 새겨진 그리스도를 소유해야 한다.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영적인 알파벳의 글자이신 그리스도에 관하여 어떤 명백한 체험들을 가져야 함을 뜻한다. 그리스도에 관한 우리의 체험은 희미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그것은 분명하고 명백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를 포함하여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의 상황은 이것과 매우 다르다.
우리가 주님께 빛 비춤을 받고 주님의 권익에 관한 부담을 감당하고 있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상황으로 인해 마음 아플 것이다. 성도들과 교회들의 상황과 상태를 고려할수록 우리는 더 많은 부담을 느낄 것이다. 우리는 투명함이 부족하고 새겨진 것이 부족하고 빛이 부족한 데 대해 깊이 염려할 것이다.
교회에 관하여 주님의 인도를 받음
오늘날 우림과 둠밈을 지닌 가슴받이를 적용하기 위해서는 인도하는 이들이 성도들과 그리스도를 가슴에 품는 것이 필요하다. 이럴 때 그들은 성도들의 상태를 알 수 있고 하나님의 인도를 위한 그리스도의 완전하심을 알게 된다. 각 지방에 있는 교회 안에는 마음에 성도들과 그리스도를 품는 인도하는 무리가 있어야 한다. 이러한 인도하는 이들은 주님의 빛 비춤을 보아야 하고 성도들을 읽어 내야 한다. 그럴 때 그들은 그들의 지방에 있는 교회에 관하여 하나님의 인도를 받을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방법
우림과 둠밈을 지닌 가슴받이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방법은 우리가 기대했던 것과는 반대이다. 하나님은 빛을 내고 있는 보석들을 통해서가 아니라 어두워진보석들을 통하여 말씀하신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부정적인 상황들을 통하여 말씀하심을 뜻한다. 정상적인 상태에서 가슴받이의 열두 보석은 우림의 빛 비춤을 받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어떤 이름이 새겨진 한 보석이 어둡게 된다. 이렇게 특정한 보석이 어둡게 된 것이 하나님의 즉각적인 말씀하심이었다. 우리의 타고난 관념은 가슴받이를 통한 하나님의 말씀하심은 빛나고 있는 보석을 통해 왔으리라는 것이다. 사실 그분은 갑자기 어두워진 보석을 통하여 말씀하셨다.
바울의 서신들과 주 예수님께서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게 보내신 일곱 서신들은 모두 이 원칙에 따라 기록되었다. 이 서신들은 교회들 안에서 발견되는 긍정적인 것들에 따라서가 아니라 교회들의 부정적인 상황에 따라 기록되었다. 고린도에 보내는 바울의 첫째 서신을 예로 들어보자. 만일 고린도에 있는 교회 안에 부정적인 것들이 전혀 없었다면, 고린도전서가 기록되었을 것인지 의심스럽다. 바울은 고린도의 부정적인 상황에 관하여 그가 읽어낸 것에 따라 이 서신을 기록하였다. 그러한 상황을 고려할 때, 그는 무엇을 기록해야 하는가를 알았다. 비록 그의 기록이 부정적인 것에 근거하였지만, 이 서신 안에서 그는 교회에게 긍정적인 것, 곧 그리스도의 풍성을 공급하였다.
오늘 그리스도인들의 문제는 그들 안에 너무 많은 어둠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어둠을 드러내실 길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모든 것이 어둠 가운데 있을 때, 어둠에 있는 어떤 것을 지적하기가 어렵다.
어떤 교회 안에서 잘못된 것들이 쉽게 발견될 때 그 교회는 정상적이다. 그러나 어떤 교회 안에서 잘못된 것을 발견하기가 불가능하다면, 이것은 그 교회가 어둠 안에 있다는 표시이다. 어둠이 우세할 때에는 부정적인 것들이 드러날 수 없다. 이를 위해서는 반드시 빛이 필요하다. 빛 비춤 아래 드러난 것이 하나님의 말씀하심이다. 하나님은 부정적인 것으로 드러난 것들을 통하여 말씀하신다. 이런 종류의 부정적인 상황은 그리스도가 부족하다는 표시이다. 이런 식으로 부정적인 상황들을 읽어 낼 때, 우리는 하나님의 인도를 알게 된다. 그럴 때 우리는 우리 지방에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기 원하시는 것을 알게 되며, 그때 그분의 인도를 따라야 한다.
판결과 공급
가슴받이를 통하여 얻어지는 인도는 항상 판결을 수반한다. 이것은 가슴받이를 통한 주님의 말씀하심이 부정적인 상황을 통하여 이루어짐을 뜻한다. 만일 이 말씀하심이 단지 긍정적인 상황을 통해서만 있었다면, 모든 것이 긍정적이고 정당하였을 것이므로 판결의 필요가 전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주님의 말씀하심은 부정적인 상황을 통하여 이루어지므로, 그러한 말씀하심은 판결이다.
사도 바울은 참으로 빛을 내고 있던 사람이었다. 바울의 빛 비춤 아래 어둠이 드러났다. 바울은 어둠에 따라, 곧 교회들 안에 있는 성도들의 부정적인 상황에 따라 그의 서신의 어떤 부분을 기록하였다. 바울은 고린도에 있는 교회의 어떤 어두운 영역들, 곧 하나님의 판결의 글자들이 되었던 영역들을 보았으므로, 판결의 책인 고린도서를 쓸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서신에 담긴 모든 판결들에는 많은 긍정적인 것들, 곧 고린도에 있는 믿는 이들에게 공급된 그리스도의 풍성이 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방법이다. 구약과 신약 모두에서 하나님의 말씀하심은 부정적인 상황에 따른 것이지만, 그분의 백성을 위한 공급인 그리스도의 풍성을 수반하고 있다.
그리스도에 관한 합당한 체험의 필요성
교회인 우리가 판결 가슴받이가 되려면 우리는 어떤 요구 조건들을 성취해야 한다. 먼저, 우리는 변화되고 투명해져야 한다. 그러고 나서 영적인 알파벳 문자이신 그리스도께서 분명하고 명확하게 우리 안으로 새겨져야 한다. 이것은 그리스도에 관한 합당한 체험을 갖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그리스도를 공급하려고 애쓰지 않는다면, 우리가 얼마나 그리스도에 관해 부족한지를 깨닫지 못할 수 있다. 그리스도를 체험한 것에 대해 다른 사람들에게 말하려고 애쓸 때, 우리는 우리 자신이 체험에 있어서 매우 부족함을 발견할 수 있다. 성도들을 목양하고자 하는 사람들로서 우리에게는 그리스도에 대한 체험이 필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그리스도를 공급하는 데 필요한 합당한 영적인 어휘가 부족할 것이다. 여러 해 동안 성경을 읽고 연구해 온 까닭에, 우리는 어느 정도 성경을 가르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공급하는 것에서 우리는 부족을 느낀다. 우리 안에는 그리스도가 많이 새겨지지 못했다. 아마 우리 안에 한 문자의 일부만이 새겨져 있을지도 모른다. 이것이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의 상황이다. 그러므로 가슴받이를 통한 주님의 인도를 알기가 매우 어렵다.
변화와 투명함과 새겨진 것과 빛 비춤이 그렇게 부족하므로, 우리는 투명해지고 우리 안으로 새겨진 그리스도를 더 많이 얻으며 더 많은 빛 비춤을 체험할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한다. 그럴 때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로 충만하다 할지라도, 우리에게 부족함이 있음을 깨달을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풍성의 어느 방면이 여전히 부족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우림과 둠밈을 지닌 가슴받이라는 놀라운 그림이 말해 주는 것이다.
우리에게 더 많은 체험이 필요함을 인식함
가슴받이와 우림과 둠밈에서 우리는 두 종류의 알파벳을 본다. 한 종류의 알파벳은 새기기 위한 것이고, 다른 종류의 알파벳은 완전하게 하기 위한 것이다. 만일 우리가 아직 그리스도로 충만하지 않다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새김이다. 우리가 그분으로 충만할 때까지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으로 새겨져야 한다. 우리가 그리스도로 충만할 때, 비로소 우리는 우리에게 완전함이 필요하다는 것을 인식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로 충만하지 않을 때는 우리에게 새김을 위한 알파벳이신 그분이 필요하다. 그러나 우리가 그분으로 충만할 때 우리는 우리의 완전함을 위한 알파벳이신 그분이 필요하다. 사도 바울과 같은 믿는 이들, 그리스도로 충만한 믿는 이들도 그들에게 여전히 그리스도가 필요함을 안다. 그러나 그리스도가 부족한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할 수 있다. 오늘날 많은 미지근한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에게 얼마나 그리스도가 필요한지에 대해 아무런 인식이 없다. 우리 안으로 새겨진 그리스도를 소유할 때, 우리는 우리에게 그리스도가 여전히 부족함을 깨닫는다. 그럴 때 우리는 우리의 완전함이 되시는 그분을 추구할 것이다.
우리가 우리 안으로 새겨진 그리스도와 우리를 완전하게 하시는 그리스도에 대해 말할 수 있는 것은 분명 주님의 긍휼이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더 많은 체험이다. 오직 체험을 통해서만이 우리는 우리 안으로 새겨지는 그리스도와 우리를 완전하게 하시는 그분을 소유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이해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이러한 것들에 대해 더 많이 기도해야 한다. 나는 각 지방에 있는 교회들이 출애굽기 28장의 그림에 따른 가슴받이가 되기를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