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시에 있는 티투스의 개선문>
64년에 발생한 로마제국의 수도 로마시의 대화재를 계기로
네로황제의 기독교인들에 대한 핍박이 시작되었습니다.
그 같은 해에 네로 황제는 유대지역의 신임 총독으로
플로루스를 파송하였습니다.
67년에 로마군인들에 의한 약탈과 학살이 진행되어
예루살렘의유대인 3,600명이 죽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결국 그 사건으로 말미암아 로마군데 대한 유대인들의 반란이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예루살렘과 갈릴리의 로마요새를 공격하였고,
로마 황제 네로는 베스파시아누스 장군(Titus Flavius Vespasianus)에게
6만명의 군사를 주어 그 반란을 진압하게 하였습니다.
그 군대가 예루살렘을 제외한 지역을 점령한 후
유대인들이 남아있던 예루살렘을 공격할 준비를 하고 있을 무렵
로마시에서 반란이 일어나고 네로황제가 자살하였습니다.
네로의 죽음으로
갈바(Servius Galba Caesar Augustus)가 황제에 올랐으나
그도 반란으로 권력을 잡은지 7개월 만인 69년 초에 살해당하고
로마는 내전에 빠졌습니다.
그후 결국 베스파시아누스가 황제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황제가 된 이후 그의 공식 이름은 Caesar Vespasianus Augustus 입니다.
그의 황제 취임으로 인해 새로운 폴로비우스 왕조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새황제는 그의 큰 아들 티투스(Titus)에게
유대지방의 반란을 진압하도록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그의 아들 티투스가 이끄는 로마군대에 의해
예루살렘은 70년에 함락되고 말았습니다.
그 때에 예루살렘 성전은 불에 타 무너지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예언대로 돌 위에 돌 하나도 남지 않을 정도로
온 도시와 성전은 철저히 파괴되었습니다.
무너진 그 성전의 서쪽 벽만 남았는데
그것이 지금도 유명한 소위 '통곡의 벽'입니다.
그리고 살아남은 유대인 군사들은 사해 근처의 산 위의 요새
'마사다(Masada)'로 도망하였으나 결국 모두 자결하고 말았습니다.
그것이 73년의 일입니다.
그후 베스파시아누스 황제는 79년에 죽게 되고
그의아들 티투스가 황제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티투스가 황제의 자리에 오른 후
같은 해에 발생한 베수비우스(Vesuvius) 화산폭발은
근처의 폼페이를 비롯한 근처의 도시들을 역사에서 사라지게 하였고,
오랜 세월 역사에서 잊혀진 도시가 되었습니다.
티투스는 과거에 폼페이의 총행정관이었습니다.
그 티투스는 예루살렘을 정벌후 로마시에 개선장군으로 돌아왔고,
그것을 기념하여 세워진 그의 개선문이 지금도 로마시에 남아있습니다.
로마시에 남아 있는 로마시대의 유적들 중에는 유명한 콜로세움이 있었습니다.
그 건축물은 베스파시아누스가 시작하여
그의 아들 티투스의 때에 완성한 것입니다.
그 티투스는 예수님의 예루살렘 멸망에 대한 예언이 성취될 때의 인물로서
교회사에 그의 이름을 남기게 되었습니다.
그가 황제 취임후 2년만인 81년에 갑자기 요절하였다고 합니다 .
티투스의 죽음으로 인해
그의 동생 도미티아누스가 황제의 자리에 올랐습니다.
그는 자신을 신으로 숭배할 것을 명하였고,
도미누스 에트 데우스 노스테르("우리 주와 하나님"을 의미함)라는
칭호를 취하여 사람들에게 자신을 신으로 부르고 숭배하도록 강요하였습니다.
당시 많은 신들과 황제들을 숭배하던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별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이 일에 참여할수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도미티아누스 통치 말엽에 혹독한 박해가
다시 그리스도인들에 닥쳤습니다.
아마도 사도 요한을 밧모섬으로 유배시킨 사람은 도미티아누스였다고 생각합니다.
요한 계시록은
이러한 시대적인 배경 가운데서 기록되었습니다. 그
리고 96년에 도미티아누스가 암살당하자.
그를 계승하여 원로원 의원이었던
네르바(Marcus acaocceius Nerva)가 황제가 되었습니다.
그는 그리스도인들에 대해 비교적 관대하였는데
아마도 그가 요한을 석방시켰을 것으로 생각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