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주 6일
아침의 누림
갈 2:20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더 이상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십니다. 이제 내가 육체 안에서 사는 생명은 나를 사랑하시어 나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의 믿음 안에서 사는 생명입니다.
요 15:4-5 내 안에 거하십시오. 그러면 나도 여러분 안에 거하겠습니다. …왜냐하면 나를 떠나서는 여러분이 아무것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행위는 생명(진설병 상의 떡 혹은 임재의 떡)이신 그리스도와 반대된다. 우리의 관점은 우리의 빛(등잔대)이신 그리스도와 반대된다. 우리의 미덕은 하나님께 드리는 우리의 향(분향단)이신 그리스도와 반대된다. 우리의 행위와 관점과 미덕은 모두 하나님의 증거(궤)이신 그리스도와 반대되는 우리의 타고난 존재와 같다. 우리가 한 줌의 재가 된다 해도 여전히 우리의 타고난 행위와 타고난 관점과 타고난 미덕을 가지겠는가? 결코 그렇지 않다. 한 줌의 재는 어떤 행위나 관점이나 미덕을 갖지 않는다. 재가 가지는 것은 무엇인가? 재는 아무것도 갖지 않는다. 재로 감소된다는 것은 아무 것도 아닌 것, 즉 무(無)로 감소되는 것이다.
오늘의 읽을 말씀
불은 우리의 온 존재가 재로 감소되어야 함을 가리킨다. 우리는 재가 되도록 태워져야 한다.
어떤 그리스도인들, 특별히 주님의 회복 안에 있는 우리들 중의 어떤 이들은 자주 천연적임에 관해서 말한다. 우리가 천연적으로 되지 않는 길은 단 하나인데, 그것은 우리가 태워져 재가 되는 것이다. 태워지지 않는다면 우리는 여전히 천연적일 것이다. 우리 앞에 나무 탁자가 있다고 가정해 보자. 그 탁자는 천연적인 상태로 있다. 그러나 탁자가 타서 한 줌의 재가 된다면 그것은 더 이상 천연적이지 않다.
두 번째 단에서 기도하는 사람들은 먼저 태워져 재가 되어야 한다. 즉 그들은 더 이상 타고난 사람이 아니어야 한다. 분향단에서 기도하고자 하는 모든 이들은 반드시 한 줌의 재가 되어야 한다.
자신이 대단한 존재라고 계속해서 생각한다면, 우리는 하나님 안에 있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아무 것도 아닌 것이 될 때, 우리는 그분 안에 있을 수 있는 자격을 갖게 된다.
우리가 자신을 여전히 대단한 존재라고 생각하고 아직 아무 것도 아닌 사람이 되지 않았다는 것을 어떻게 아는가? 여전히 타고난 행위와 타고난 시야 혹은 관점과 타고난 미덕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에 의해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어떤 형제는 자신을 아주 쾌활하고 친절한 사람으로 여길 것이다. 결혼한 어떤 형제는 특별히 자신을 그의 아내보다 아주 쾌활한 사람으로 여길 것이다. 그러나 성막 안의 분향단에서 기도하는 사람은 자신에 대해 이런 식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성막 안의 금향단에서 기도하는 사람은 재가 된 사람이다. 이것은 그가 더 이상 자신의 타고난 미덕을 소유하고 있지 않음을 뜻한다. 그의 타고난 미덕과 행위와 관점은 모두 재가 되었다.
분향단에서 중보기도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향이신 그리스도를 가진다. 그 사람은 그의 타고난 미덕을 더 이상 갖지 않는다. 그런 사람에게 그리스도는 모든 것이시다. 그리스도는 그가 합당한 행위를 할 수 있게 하는 그의 생명 공급이시고, 참된 관점을 가질 수 있게 하는 그의 빛이시며, 하나님께 올라가는 달콤한 향기를 가질 수 있게 하는 그의 미덕이시다. 이런 사람이 분향단에서 기도할 수 있는 사람이다.
첫 번째 단에서 기도할 때 우리 자신이나 우리의 상황으로 점유되지 않는 방식으로 기도하기란 아주 어렵다. 그러나 두 번째 단에서 기도할 때는 우리 자신으로 점유되는 것이 아주 어렵다. 분향단에서 드려지는 기도에는 자아가 관련되지 않기 때문에, 이 단에서 기도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먼저 재가 되어야 한다. 두 번째 단에서 중보 기도하려면 우리는 먼저 아무 것도 아닌 사람으로 감소되어야 한다.
우리가 첫 번째 단, 즉 바깥뜰의 번제단에서 기도하는 것은 어떤 것도 중보기도가 될 수 없다. 그러나 두 번째 단, 즉 성막 안의 금향단에서 기도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중보기도일 것이다. 두 번째 단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위해 많이 기도하지 못한다. 대신에 우리는 하나님의 경륜을 위해 기도하고, 하나님의 분배를 위해 기도하며, 하나님의 움직임을 위해 기도하고, 하나님의 회복을 위해 기도하며, 교회들과 성도들을 위해 기도한다. 우리는 자연스럽게 이런 식으로 중보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