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주 3일
오늘의 양식
Antipas 2018-08-20 , 조회 (279) , 추천 (0) , 스크랩 (0)
출처
원문
아침의 누림
계 2:7 귀가 있는 사람은 그 영께서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어라. 이기는 이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나무를 주어서 먹게 할 것이다.’
3:20 보아라, 내가 문밖에 서서, 문을 두드린다. 누구든지 나의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 들어가 그와 함께 먹고, 그는 나와 함께 먹을 것이다.

우리의 내적 존재가 정결하게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무언가가 우리 속에 들어와야 하며, 이것이 일어날 수 있게 하는 유일한 길은 그것을 먹는 것이다. 자양분을 공급하는 음식이신 주 예수님은 최상의 씻는 요소이시다. 그분은 음식으로 우리 안에 들어오실 때, 단지 우리에게 자양분을 공급하실 뿐만 아니라 또한 내적으로 우리를 씻으신다. 그분은 우리의 손을 씻으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속 부분, 곧 우리의 존재를 씻으신다. 예수님을 먹음으로 말미암아 내적으로 씻어지는 이 문제는 마태복음 15장의 처음 두 부분을 연결하는 고리이다.
우리에게는 바로 이러한 씻음이 필요하다. 이것은 우리가 얼마나 깨끗한지를 나타내 보이기 위해 외적으로 우리의 손을 씻는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예수님을 먹음으로써 내적으로 씻어지는 문제이다. 우리는 모두 주님에 의해 이렇게 내적으로 씻어지는 것이 필요하다.(마태복음 라이프 스타디, 46장, 546-547쪽)

오늘의 읽을 말씀
예수님을 먹는 것이 이기는 비결이다. … 다른 길은 없다. 우리는 무언가를 배우는 길, 곧 가르침을 취하는 길을 선택해서는 안 된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긍휼을 베푸셔서, 우리로 하여금 이 한 길, 곧 예수님을 먹는 길을 취하게 하시기를 바란다. 날마다 우리는 그분을 생명나무와 감추어진 만나와 정찬으로 먹어야 한다. 그러면 우리는 이기는 이들이 될 것이다.
여러 해 동안 나는 성질을 이기는 비결을 알지 못했지만, 결국 주님은 나에게 그 비결을 보여 주셨다. 우리의 성질을 이기는 비결은 “오, 주 예수님!”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다만 예수님을 조금 들이마시라. 예수님은 가장 강한 ‘중화제’이시다. 그분께서 들어오실 때 즉시 우리의 화가 누그러진다. 심지어 우리가 성질을 내려고 해도 성질이 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이것을 아주 잘 안다. 이전에 나는 나를 죽은 사람으로 여기면 여길수록 더욱더 화가 났다. 그러나 이제 화가 나려고 할 때, 나는 “오, 주 예수님!”이라고 부른다. 그러면 그분께서 나의 화를 누그러지게 하신다. 더욱이 그분은 화가 변하여 찬양이 되게 하신다.(위트니스 리 전집, 1971년, 4권,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건축하기 위하여 그리스도의 풍성을 누림, 294-295쪽)
우리는 레위기 11장이 음식과 먹는 문제에 관한 것임을 보았다. 이제 우리는 이 장이 또한 죽음과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음을 볼 필요가 있다. 레위기 11장에서 ‘사체(사체들)’ 라는 단어는 열세 번 사용되었으며, ‘죽은(또는 죽다)’이라는 단어는 세 번 사용되었다.
죽음이 없다면 어떤 사체도 없을 것이다. 사실상 사체는 죽음을 가리킨다. 사체가 있는 한, 거기에는 죽음이 있다.
레위기 11장이 음식과 관련해서 죽음에 대해 말한다는 사실은 우리의 음식 곧 먹는 문제가 생명이냐 죽음이냐의 문제라는 것을 가리킨다. 우리가 정결한 것들을 접촉한다면 생명을 얻을 것이지만, 부정한 것들을 접촉한다면 죽음을 얻게 될 것이다.
죽음은 추하고 가증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죽음을 멀리할 필요가 있다. 레위기 11장은 겉으로 보기에 부정한 것을 멀리하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 장은 사실상 우리에게 죽음을 멀리하라고 말한다. 우리가 멀리해야 할 죽음은 주로 물질적인 죽음이 아니라 영적인 죽음이다.(레위기 라이프 스타디, 37장, 368-369쪽)
죽음은 사탄의 일이 갖는 특징이다. 사탄이 하는 모든 일의 궁극적인 목표는 사람을 죽음으로 가득하게 하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의 집회는 인수에 달린 것이 아니다. 우리의 집회에 더 많은 사람이 참석했다고 해서 그 집회가 더 좋은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우리의 집회에서 죽음을 이겨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죽음을 삼키고 생명을 해방하는 것이다. 집회에서 죽음이 발견되면 이것은 집회에 생명이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스도인들은 반드시 죽음보다 더 나쁜 것이 없음을 보아야 한다. 반대로 생명보다 더 좋은 것은 없다.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죽음은 가장 추한 것이며, 반면에 생명은 가장 소중한 것이다. 생명이란 무엇인가? 생명은 일종의 교리가 아니다. 생명을 받은 사람은 생명에 대한 체험이 있지만 그것을 묘사하기는 매우 힘들다. 생명은 흥분시키는 것이나 좋은 감정이 아니다. 생명은 바로 그리스도 자신이다.(워치만 니 전집, 44권, 특별 집회, 메시지 및 대화 기록(4), 218쪽)
추가로 읽을 말씀: 위트니스 리 전집, 1971년, 4권,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건축하기 위하여 그리스도의 풍성을 누림, 17장; 신약의 결론, 영문판, 279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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