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교통 - 4(2019.1.20)
교회 주보
부산교회집사실 2019-01-18 , 조회 (183) , 추천 (0) , 스크랩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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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교회 기도집회 추구

특별 교통 - 4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버림

   교회가 어려울 때 행한 일과 그때 얻은 효과는 평안할 때보다 더욱 특별하게 나타난다. 환경이 어려울 때 오히려 교회는 더욱 좋아지고 흥왕 된다. 이것은 교회가 얻은 생명이 주 예수님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한 초월의 생명이기 때문이다. 이 생명은 어려운 환경에 처해 있을수록 더욱 강인하다. 서머나 교회가 핍박을 받은 것은 로마제국 하에 핍박받은 교회를 상징한다. 역사는 우리에게, 로마제국이 핍박한 결과 그리스도인 수가 오히려 더욱 증가했음을 말해 준다. 하나님은 결코 그분의 뜻과 관계없는 일을 하지 않으신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생명은 한 번도 그 생명의 율을 위반하여 핍박아래 굴복하지 않으셨다. 하나님의 뜻 가운데서 그분은 교회로 하여금 핍박을 면케 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분은 교회가 반석이신 주 예수님 위에 세워진다고 말씀하셨고, 음부의 권세가 이러한 교회를 이기지 못한다(마 16:18)고 하셨다. 주 예수님께서 이미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여 썩지 않는 생명을 복음으로 말미암아 나타내셨기 때문에, 복음에는 큰 능력이 있다(딤후 1:11). 바로 이 때문에 주님은 “나와 복음을 위하여 … 버린 사람은”(막 10:29)이라고 말씀하신다. 
   주님은 다만 ‘나를 위하여’라고 하지 않으시고 ‘나’와 ‘복음’을 연결시키셨다. 주 예수님의 생명이 없다면, 복음의 내용은 빈 것이다. 즉, 복음은 주 예수님의 승리와 부활생명을 전파하는 것이다. 사람이 복음, 바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를 믿는다면 그의 안에 이 생명이 있게 된다. 주 예수님의 말씀은 젊은 부자의 이야기(막 10:17-22)를 언급한 후에 하신 것으로, 그 부자는 주 예수님의 요구가 사람이 할 수 없을 정도로 높다고 생각하여 근심하며 돌아갔다. 젊은 부자만 이렇게 생각했다고 말하지 말라. 심지어 제자들도 이렇게 생각 했다. 그런즉 “그러면 누가 구원받을 수 있습니까?” 이에 주님은 대답하시기를 “사람으로는 그것이 불가능하지만 하나님으로는 그렇지 않으니, 하나님으로는 모든 것이 가능합니다.”(막 10:23-27)고 하셨다. 이 단락의 말씀은 분명히 우리에게 주님을 위하지 않는 사람은 결코 복음을 위할 수 없고, 주님을 위하고 복음을 위하려면 모든 것을 버려야 함을 계시한다. 모든 것을 버리는 것을 사람으로는 할 수 없지만, 믿음으로 주 예수님의 부활생명을 얻은 우리는 할 수 있고 또한 즐거이 하게 된다.
   주님 자신도 모든 것을 버리셨다. 마태복음 13장의 보화와 진주의 비유에서 주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그분이 바로 보화(왕국)와 진주(교회)를 사기 위해 모든 소유를 파신 분임을 말씀하신다(막 10:44-46). 사도 바울도 본래 주 예수님이 부요한 자였으나 우리를 위해 가난하게 되심은 그분의 가난하게 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부요케 하려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고후 8:9). 이것이 주님의 생명이요,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복음이다. 오늘 주님의 복음을 전하는 우리들도 사람들로 하여금 함께 이 복음의 유익을 얻도록 주 예수님과 같이 모든 것을 버려야 한다.

복음이 충격력을 잃은 원인

    오늘날 복음이 당시의 돌파력을 잃어버린 이유는 모든 것을 드리지 않은 데 있다. 오늘 많은 사람들은 그들의 시간과 금전과 기타 모든 소유가 다 주님의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아마 백 명 중에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 하는 사람은 한두 명밖에 안 되고, 그 외의 사람들은 다만 입으로만 그렇게 말하지 실지로는 모든 소유가 여전히 자기 것일 것이다. 바로 이것 때문에 오늘날 복음의 돌파력이 사라졌다. 더욱이 오늘 많은 사람들은 부업으로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하는데, 그들은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을 본업으로 삼지 않는다. 이것은 순서가 뒤바뀐 것이다. 바울은 분명히 이렇게 말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합니다. 우리가 단정하는 것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셨으므로, 모든 사람이 죽었다는 것입니다. 그분께서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신 것은 살아 있는 사람들이 더 이상 자신을 향하여 살지 않고, 자기들을 대신하여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신 분을 향하여 살도록 하려는 것입니다.”(고후 5:14-15). 우리로 하여금 자신을 위해 살지 않고 주님을 위해 살도록 그리스도께서 이미 우리를 위해 죽고 부활하셨다. 그러나 오늘 주님을 위해 사는 사람은 얼마나 되는가? 많은 사람들이 이름으로는 그리스도인이나 사실상 그들의 생활은 세상 사람과 별 다를 바가 없다. 세상 사람이 명예와 지위와 학문을 추구하듯이 그리스도인인 당신도 그들과 같이 이러한 것들을 추구한다. 당신은 주님을 위해 추구한다고 하여 말이 조금 듣기 좋다뿐이지 실지로는 여전히 부업으로 그리스도인이 된다. 오늘 그리스도인에게 완전한 헌신이 결여되어 있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인 되는 것을 본업으로 삼지 않기 때문에 복음의 능력이 없다.
   교회 초기에는 모든 이가 완전히 헌신하고 동심합의 되었기 때문에, 복음의 능력이 있었다. 초기 교회 가운데 아나니아와 삽비라와 같이 거짓되게 드리는 자가 있었지만, 그 교회는 하나님 눈에 여전히 승리한 교회이다. 거짓된 것이 있기 때문에 심판이 있었고, 성령도 교회 가운데서 통제하는 역사를 하실 수 있었다. 그러므로 복음은 계속적으로 널리 전파될 수 있었고, 아주 빨리 확장될 수 있었다. 초기 예루살렘 교회는 핍박 때문에 제자들이 사방으로 흩어졌다(행 8:1). 그러나 삼십 년 후에 바울이 예루살렘에 이르렀을 때, 그곳에는 성도들이 몇 만 명이 더 추가되어 있었다(행 21:20). 중국 전역에 걸쳐 명나라 초부터 지금까지 300년이 되었지만 천주교의 인수는 300만 명밖에 되지 않고, 개신교는 마리손에서 시작되어 벌써 100여 년이 되었지만 신자가 48만 밖에 되지 않는다. 초기에 비해 오늘날 교회들은 하나님 눈에 실패했다고 말할 수 있다. 오늘 복음의 능력을 잃은 근본적인 이유는 아마 당시의 믿는 이들과 같이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본래 교회는 유대인들이 마땅히 서야할 위치에 서서 하나님의 백성 가운데의 이기는 자들을 대표해야 했다. 그런데 오늘 유대인은 망국한 지 이미 2,565년이 되었고, 교회는 아직도 승리하지 못했다. 그 이유는 당시의 온전한 헌신의 실행을 잃었기 때문이다.
   주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사역하실 때, 그분을 믿는 사람들을 의사나 상인, 일꾼이나 교사라 부르지 않고 모두 제자라 부르셨다. 교회가 일으켜진 후에는 교회 안에 의사나 상인이나 교사라 불린 자가 없고 오직 그리스도인이라 불렸다. 아마 당신은 누가는 의사가 아니냐고 물을 것이다. 물론 그는 의사였지만 사실 그는 부업으로 의사의 일을 했다.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읽을 때 나는 그가 의사라는 인상을 받을 수 없고 바울의 동역자라는 인상을 받을 뿐이다. 바울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위한 대사(ambassador)라고 했다(고후 5:20). 그는 대사(ambassador)였기 때문에 다른 직업이 없었다. 그러나 누가가 바울을 돌보았기 때문에 바울은 그를 의사 누가(Luke a doctor)라고 불렀다(골 4:14). 이것은 누가의 직업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그가 바울을 돌보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사도행전을 읽을 때, 우리는 그가 의사인지를 주의하지 않게 되고 다만 그가 바울의 동역자라는 것을 분명히 볼 뿐이다. 그에게서는 조금도 의사의 냄새가 풍기지 않는다. 이와 마찬가지로, 신약을 읽을 때 당신은 바울이 장막 짓는 사람이라는 인상을 받지 않는다. 그는 하나님이 세우신 사도이다. 당신은 바울이 장막 짓는 사람이라는 느낌을 받지 않고 하나님의 일꾼이라는 느낌을 받는다. 오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제자의 냄새를 잃어버렸고, 머릿속에 가득한 것은 완전히 상업적인 생각뿐이고, 어떻게 다른 사람의 돈을 벌까 궁리 한다. 물론 결과적으로 돈은 벌었지만, 간증은 상실해 버렸고 복음의 능력도 잃어 버렸다.
   오늘 우리가 주님의 복음을 위한다면, 우리의 직업을 던져 버리기를 배워야 한다. 그러나 이 말은 우리더러 다 직장을 갖지 말라는 것이 아니다. 많은 사람들은 여전히 직장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다만 그러한 직장이 우리로 하여금 더욱 간증을 갖게 하고 주님의 교회를 위하도록 해야 한다. 또한 자기와 다른 사람의 필요를 공급할 수 있어야 한다. 가장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믿음을 갖기보다 사람들의 사랑을 바라보는 것이다. 바울이 장막을 지은 것은 그로 하여금 더욱더 사도가 되게 했고, 그의 사도 직분을 유지하게 했다. 직업을 갖는 것은 돈을 벌기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 그리스도인의 직분을 위한 것이다. 만일 그리스도인이 오직 돈을 벌기 위해 직업을 갖는다면, 하나님의 집은 만국이 기도하는 전(殿)이 되지 못하고 아마 소와 양과 비둘기를 파는 장소가 될 것이다. 우리는 많은 돈을 버는 것을 두려워해야 한다.
   병 입구에 있은 나무마개를 뽑아내야만 병속의 보배가 흘러나올 수 있다. 우리가 물질적인 것을 붙잡고 자기를 사랑할수록 복음은 더욱 제한 받고, 주님의 생명은 흘러 나가지 못하게 된다. 복음의 돌파력이 있으려면, 우리의 병마개를 제해 버려야한다.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을 본업으로 삼음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은 완전히 헌신된 사람이어야 한다.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우리가 부업으로 할 것이 아니라 우리의 본업으로 삼아야 한다. 그러면 어떻게 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을 본업으로 하는 것인가? 먼저는 전심으로 주님과 복음을 위해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바로 크리스천(Christian)으로서 헬라어로는 "Cristianos"(크리스티아노스)인데, 그 뜻은 그리스도의 추종자 곧 전심으로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이다. 우리는 모든 사람이 전심으로 주님을 위하고 복음을 위한 사람이 되기 원한다. 이렇게 모든 이의 흥미가 같을 때,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순조롭게 해결될 수 있다. 그 다음으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을 본업으로 하는 것은 바로 실제적으로 헌신하는 것이다. 
   헌신은 말로만 하는 것이어서는 안 되고 실제적인 행동이 있어야 한다. 오순절 날 헌신의 실재가 있었을 뿐, 헌신의 교리는 없었다는 것을 기억하기 바란다. 우리는 사도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주(主)로 전파한 것 외에 또 헌신하라고 말한 것을 보지 못한다. 그러나 결과는 모든 믿는 사람이 물건을 다 공용하고, 모든 재산을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었다는 것이다(행 2:44-45). 이것은 복음의 본으로서, 사도들이 모든 것을 버렸기 때문에, 그들이 구원시킨 사람들도 헌신의 교리는 들어보지 못했을지라도 헌신하는 사람이 되었다. 우리 모두는 사도들이 가지고 있는 복음의 능력을 사모하지만, 그들이 모든 것을 버린 사람이라는 것은 소홀히 한다.
   사도행전에는 먼저 열두 사도가 있고, 그 후에 백이십 명이 있으며 그런 다음에 3,000명, 5,000명이 구원받은 것이 있다. 나중에 구원받은 이들은 모두 열두 사도의 본을 따라서 자연스럽게 모든 것을 버렸다. 새 사람이 구원을 받고 교회 안에 와서 모든 사람이 모든 소유를 버리고 주님을 따르는 것을 본다면, 자기가 다른 이들과 같지 않을 때 그는 부자연스럽거나 자신이 타락하고 떨어져 나갔다고 느낄 것이다. 그러므로 다음 세대로 하여금 모든 것을 버리게 하려면, 오늘 우리가 먼저 모든 소유를 팔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복음전파는 단지 사람들의 어깨를 두드리며 몇 마디 좋은 말을 해 주는 것에 불과할 것이다.

헌신의 원칙

   헌신의 원칙에 관하여, 서신서는 우리에게 “많이 거둔 사람도 남은 것이 없었고, 적게 거둔 사람도 부족한 것이 없었다.”(고후 8:15)라는 사실을 보여 준다. 자연히 이것은 하나님이 어떤 사람을 궁핍하게 하심으로 부유한 자의 마음을 시험하여 그들이 재물보다 주님과 형제들을 더 사랑하는 지를 시험하시려는 것이다. 하나님의 시험은 그가 어떤 사람인가를 그에게 보여주신다. 그러한 시험은 하나님에게 어떤 것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은 사람과 같은 수준으로 낮춰질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어떤 것을 원하지 않고 우리 자신, 우리의 인격을 원하신다. 헌신(consecration)은 주로 우리의 소유를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과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다. 이러한 헌신이야말로 하나님의 기뻐하심과 축복을 받을 수 있다.
   어리석은 사람은 언제나 재물을 자기 스스로 번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원칙을 따르지 않으면 많은 어려움에 부딪치게 된다는 것을 모르는 것 같다. 이 땅에 살면서 우리 믿는 이는 모든 것에서 하나님을 앙망해야 한다. 만약 하나님의 긍휼이 없다면, 실로 우리는 어떻게 생활할지 알 수가 없다. 사도는 우리에게 믿을 수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우리에게 모든 것을 풍성히 주셔서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두라고 말한다(딤전 6:17). 재물은 믿을 수 없고, 오직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만이 영원히 견고하시다. 물론 우리도 어려움을 당한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주님이 계시고, 그분이 우리의 모든 필요를 돌보실 수 있다.
   주 예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공중의 이 많은 새들을 키우실진대 우리를 더욱 키우시지 않겠느냐고 하시며, 하나님의 눈에 우리는 많은 새들보다 귀하다고 말씀하신다(마 6:26). 만약 아버지께서 허락하지 않으신다면, 참새는 한 마리도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 우리가 참새보다 귀할 뿐 아니라, 심지어 우리의 머리카락 하나에도 하나님이 모두 번호를 매겨 놓으셨기에, 몇 번째 머리카락이 떨어졌는지도 하나님의 허락하심이 있는 것이다(마 10:29,3). 그러므로 우리는 남김없이 힘을 다하여 헌신해야 한다.

모든 것을 버려야 복음의 돌파력이 있음

    구약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말 3:10). 우리가 하나님께 드려야 할 것을 자기 집에 두면, 자연히 하나님의 교회가 가난한 것을 보게 될 것이다. 만일 우리가 자신의 모든 소유를 굳게 붙잡고 있으면,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시기를 바랄 수 있겠는가? 오늘 홍콩에는 이백만의 인구가 있다. 만약 10명당 1명이 믿는 사람이라면, 20만의 신자가 있어야 한다. 우리가 온전한 십일조를 보류한다면, 교회는 복음의 능력에서 하나님이 주신 축복을 얻을 수 없게 된다. 역사에서 교회의 부흥이 있을 적마다 오순절 때처럼 모든 것을 팔고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르는 사람들이 있었다. 다비(J N. Darby)와 그로브스 여사(Groves)와 웨슬리(Wesley)와 진젠돌프(Zinzendorf) 등이 그 예이다. 그들은 모두 가난하기를 자원하며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랐기 때문에 교회의 큰 부흥을 가져왔다.
   요한 계시록 6장 1절로 2절에서 주 예수님이 일곱 인의 첫 번째 인을 떼셨을 때 흰 말이 있었는데, 그 탄자가 활을 가졌다. 활을 가졌다고 말한 것은 화살은 이미 당겨져서 없음을 나타낸다. 그렇기 때문에 이기고 또 이기었다고 말한다. 그 말 탄 자는 주님의 복음을 가리킨다. 주님이 승천하고 이기신 것이 바로 화살이 이미 당겨진 것이다. 그 결과는 바로 이기고 또 이기는 것이다. 오늘 우리 수중에 있는 것은 바로 화살이다. 만일 화살이 당겨지지 않았다면, 복음은 계속적으로 이길 수 없다.
   요한 계시록 2장, 3장의 일곱 교회 가운데서, 하나님은 오직 빌라델비아 한 교회만을 칭찬하셨다. 빌라델비아는 사데 이후의 회복이다. 사데는 살아 있는 이름은 가졌으나 실상은 죽어 있고, 조금도 능력이 없다. 빌라델비아는 능력이 있기 때문에 회복이다. 이 능력은 어디에서 온 것인가? 교회 역사는 우리에게, 매번의 부흥은 거의 다 헌신을 통해 이끌린 것이고, 매번 능력을 상실하여 사데가 된 것은 바로 교회가 재물을 너무 많이 쌓아 두었기 때문임을 보여준다. 요한 웨슬리는 세상을 떠나기 전에 이렇게 말했다. “나는 웨슬리 회에 있는 사람을 위하여 염려한다. 그들은 성실하고 부지런하며 검소하기 때문에 장래에 이 세상에서 가장 부자가 될 것이다.” 오늘 이 말은 이미 사실이 되었다. 각지 웨슬리 교파에 속한 사람들은 모두 가장 부요하다. 그러나 그들의 간증은 끝나버렸다. 웨슬리만이 아니라 진젠돌프가 가져온 모라비아 대부흥이나 다비가 가져온 형제회 운동도 동일한 결과를 가져왔다. 그리스도인이 완전히 재물에서 나와 온전히 헌신되어야만 빌라델비아가 무엇인지를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지속적인 헌신이 있어야만 사데로 떨어지지 않는다. 우리는 계속 빌라델비아가 되기를 원하는가? 세상 사람이 되는 것은 매우 간단하다. 재물을 하나님으로 숭배하면 된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오히려 아주 번거롭다. 두 가지 하나님 곧 재물과 하나님을 다 숭배할 가능성이 있다. 그러므로 사람이 참되게 그리스도인이 되고자 하고 참되게 헌신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면, 재물에서 벗어나야 한다(마 6:24).
   황 형제는 과부가 드린 두 렙돈은 다시 벌기가 쉽다고 말했지만, 나는 ‘최소한 그때 그녀에게는 믿음이 있었다. 그렇지 않다면 그녀가 그것을 드리기란 전혀 쉽지 않았을 것이다.’라고 말하겠다. 만약 하나님을 의뢰하지 않고 믿음이 강하지 않았다면, 그녀는 아마 자기 손에 오래 쥐고 있다가 연보함에 넣었을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버리는 것은 오늘 하나님의 요구하심이다. 우리가 오늘 하나님의 요구에 미칠 수 있기 바란다. 하나님의 요구를 낮추지 말고, 주님과 복음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치기 바란다.(워치만 니 전집 3집 61권, 74-86쪽)

기도의 부담, 성도들 소식

■ 기도의 부담
1. 만 명의 다음세대 제사장들을 얻도록
   (1) 다음세대들이 단계별로 그룹 짓도록
2. 2019년 부산교회 봉사 목표를 위하여
   (1) 2020년까지 1,000명의 인수 목표를 위하여
   (2) 2019년 150명, 2020년 150명
   (3) 구역별 목표 1년 25명, 소그룹별 목표 1년 3명

■ 성도들 소식
1. #6 - 침례
손수민 자매(중2)가 1/12(토), 침례 받았습니다.


알리는 말씀, 금주의 추구

■ 한국복음서원 안내
▷ 다음세대를 위한 성경(중급) 고린도전후서 신청 안내
▷ 가격 : 8,000원
※ 신청을 원하시는 분들은 각 구역 도서봉사자들에게 신청하시기 바랍니다.

■「아침부흥을 위한 거룩한 말씀」변경 안내
  1/21(월)부터 2018년 겨울 훈련 집회 양식(민수기 결정 연구 I, II)으로 변경됨을 알려드립니다.

■ 금주의 추구
1. 구약 성경 읽기 : 창 43:1 ~ 출 8:19
2. RSG(신약 회복역) : 마 12:38 ~ 마 16:20
3. 라이프-스타디 : 요한복음 M17 ~ M18
4. 금주의 소그룹 추구 진도(신약 회복역) : 눅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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