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을 생활 안으로 - 8(2019.3.17)
교회 주보
부산교회집사실 2019-03-15 , 조회 (205) , 추천 (0) , 스크랩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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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교회 기도집회 추구 
 
복음을 생활 안으로 - 8

복음의 목적

   “예수께서 베다니 문둥이 시몬의 집에서 식사하실 때에 한 여자가 매우 값진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옥합을 가지고 와서 그 옥합을 깨뜨리시고 예수의 머리에 부으니 … 예수께서 가라사대 …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온 천하에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이 여자의 행한 일도 말하여 저를 기념하리라 하시니라”(막 14:3, 6, 9)
    주님은 마리아가 지극히 귀한 나드 한 옥합을 그분께 부은 이야기가 복음과 함께 전파되도록 정하셨다. 마리아가 행한 일은 주님이 행하신 일과 항상 동행하게 되었다. 이것은 주님이 친히 하신 말씀이다. 그렇다면 이 일에서 주님은 우리로 무엇을 깨닫게 하고자 하시는가?
   나는 우리가 마리아의 이야기를 잘 안다고 생각한다. 요한복음 12장은 이 일이 그의 오라비가 다시 살아난 지 얼마 안 되어 발생한 것임을 우리에게 상세히 알려 준다. 우리는 그들의 가정이 그리 부요하지 않다는 것을 추측할 수 있다. 그들 두 자매는 가사를 돌보고 있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성경은 그 잔치에서 ‘마르다’는 일을 보았다(요 12:2, 눅 10:40 참조)는 것을 알려 주기 때문이다. 의심할 것이 없이 그들은 돈 한 푼이라도 아주 귀중하게 여겼을 것이다. 그러나 이 두 자매 중 하나인 마리아가 소중히, 감추어 놓은 옥합과 삼백 데나리온이나 되는 순전한 나드 기름을 완전히 주님의 몸에 허비하였다. 사람의 사리에 따르면, 이렇게 하는 것은 정말 너무 지나친 것 같고 그녀가 주님이 받으셔야 할 것 이상을 그분께 드린 것 같다. 그러므로 유다가 앞장서고 다른 제자들은 거기에 호응하여 마리아를 원망하여 그녀의 이런 행동을 허비라고 생각하였다. 

허비함

   “어떤 사람들이 분내어 서로 말하되 무슨 의사로 이 향유를 허비하였는가 이 향유를 삼백 데나리온 이상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 하며 그 여자를 책망하는지라”(막 14:4, 5). 나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허비’라는 단어 안에 내포된 의미를 마지막으로 한번 상고해 보라고 하시는 것이라 믿는다. 
   허비란 무엇인가? 허비는 필요 이상으로 너무 많이 준다는 뜻이다. 만일 어떤 사람에게 1실링을 주면 족한데 그에게 1파운드를 주었다면 이것은 허비이다. 만일 두 량(兩)이면 족한데 한 근(斤)을 주었다면 그것은 허비인 것이다. 만일 어떤 일을 삼 일 만에 할 수 있는데 그 일에 오 일 또는 한 주간을 사용한다면 바로 허비이다. 허비란 작은 일을 위해 너무 큰 대가를 지불했다는 뜻이다. 만일 어떤 사람이 분수에 넘치게 받았다면 이것이 바로 허비이다. 
   그러나 주님은 어디서든지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우리가 지금 말한 것을 함께 전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왜 그런가? 그것은 복음이 전파된 곳마다 마리아가 행한 일과 같은 일이 그곳에서도 있기를 주님이 원하시기 때문이다. 그 뜻은 사람이 마땅히 그분에게 와서 자신을 그분께 허비해야 한다는 것이다.
   주님께 허비하는 것에 관하여 우리는 두 각도에서 보아야 한다. 하나는 유다의 각도이고(요 12:4-6) 다른 하나는 다른 제자들의 각도(마 26:8, 9)이다. 이제 이 두 가지를 합해서 보기로 하자. 
   열두 제자들은 모두 그것을 허비라고 생각했다. 유다는 예수님을 ‘주’라고 칭한 적이 없었으며, 그가 주님께 부어지는 어떤 것도 다 허비라고 생각한 것은 당연하다. 향유뿐 아니라 심지어 물도 허비인 것이다. 여기서 유다는 이 세상을 대표한다. 세상 사람 눈에 주님을 섬기고 봉사하기 위해 우리 자신을 그분께 드리는 것은 완전히 허비이다. 그분은 그들에게 사랑을 받은 적이 없고 그들 마음속에서 그분이 자리를 차지하신 적도 없기 때문에 그분에게 무엇을 드리든지 그들은 모두 허비라고 생각한다. 많은 사람들은 “만일 누구누구가 그리스도인이 아니었다면 이 세상에서 상당히 성공했을 것이다!”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세상 사람의 눈에 상당한 재간이나 타고난 소질과 자질이 있는 사람이 주님을 섬기는 것은 수치스런 일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이런 사람이 주님을 섬기는 것을 아주 아깝게 생각한다. 그들은 “이렇게 유용한 사람이 이처럼 허비되다니!”라고 말한다. 
   나 개인의 예를 드는 것을 용서하기 바란다. 주후 1929년에 나는 상해로부터 내 고향 복주로 돌아왔다. 어느 날 나는 몸이 너무 쇠약해서 지팡이를 짚고 길을 걷고 있었다. 거리에서 나는 전에 나를 가르쳤던 대학 교수를 만났다. 그는 나를 찻집으로 데려갔다. 우리는 함께 들어가 그곳에서 한동안 대화를 나누었다. 그는 머리에서 발끝까지 다시 발끝에서 머리끝까지 나를 쳐다보면서 말했다. “자네가 대학에 다닐 때 우리는 자네를 매우 주시해 보았고 장래 크게 성공할 것이라고 생각했네. 그런데 오늘 이런 꼴을 하고 있는 사람이 바로 자네라는 말인가?” 그는 예리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면서 이러한 노골적인 질문을 했다. 내가 그의 말을 들었을 때 정말 큰 소리로 한바탕 울고 싶었던 것을 시인하지 않을 수 없다. 나의 사업, 나의 건강, 그리고 나의 모든 것이 끝난 것은 사실이다. 이러한 나에게 전에 법률을 가르쳤던 이 교수님이 “자네는 이렇게 아무 일도 성사시키지 못하고 아무 발전도, 아무 자랑할 만한 것도 없이 계속 지낼 것인가?”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 나는 하나님의 영광의 영이 내 몸에 거한다는 것을 체험하였다. 나는 그때 내 일생 중 처음으로 이 말씀의 의미를 참으로 이해했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내가 내 주님을 섬기기 위하여 내 생명을 부을 수 있다고 생각하자 내 혼 안에 영광이 충만하게 되었다. 당시 내 몸에 정말 성령의 영광이 충만하였다. 나는 얼굴을 들고서 아무 보류함 없이 “주여, 당신을 찬미합니다! 이것보다 더 아름다운 것이 없습니다. 내가 택한 길이 가장 좋은 길입니다!”라고 말했다. 나의 교수에게는 주님을 섬기는 것은 완전히 허비였다. 그러나 이것이 바로 우리에게 주님의 가치에 대한 참된 평가를 갖게 하는 복음의 목적인 것이다. 
   유다는 그렇게 하는 것이 너무 허비라고 느꼈다. “우리가 이 돈을 다른데 잘 이용할 수 있지 않느냐? 이 땅에는 가난한 사람도 많은데 왜 이 돈으로 가난한 자들을 구제하는 자선 사업을 하든가 가난한 자에게 행복을 가져다주는 사회봉사를 하지 않는가? 왜 실제적인 행동으로 가난한 자들을 돕지 않는가? 왜 그것을 예수의 발 앞에 붓는가?”(요 12:4-6 참조). 세상 사람들의 견해는 언제나 다음과 같다. “왜 당신의 생명을 더 가치 있게 쓰지 않는가? 당신은 더 좋은 일을 할 수 없는가? 주님께 자신을 완전히 드리는 것은 너무 지나치지 않는가?”.
   그러나 만일 주님이 받으시기에 합당하시다면 어찌 허비라고 말할 수 있는가? 그분은 이러한 섬김을 받기에 합당한 분이시다. 내가 그분의 포로되기에 그분은 합당하시고 내가 그분만을 위하는 것을 받기에 그분은 합당하시다! 세상 사람이 이 일에 대하여 어떻게 말하든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주님은, “저를 가만 두어라. 너희가 어찌하여 그를 괴롭게 하느냐?”라고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우리도 상관하지 말아야 한다. 세상 사람들로 그들이 좋아하는 대로 말하게 두라. 우리는 여전히 온당하게 이 입장에 서 있을 수 있다. 왜냐하면 주님이, “이것은 아름다운 일이다. 참된 일은 가난한 자들에 대한 것이 아니다. 내게 대해 한 것만이 참된 일이다.”라고 말씀하시기 때문이다. 당신의 눈이 열려서 우리 주님의 참 가치를 아는 것보다 그분을 더 기쁘게 하는 것은 없다. 유다에 관하여 나는 너무 많이 말하고 싶지 않다. 이어서 다른 제자들의 태도를 보기로 하자. 이는 그들의 반응이 유다가 우리에게 주는 영향보다 더욱 크기 때문이다. 세상 사람들이 우리를 어떻게 말해도 우리는 능히 견딜 것이다. 그러나 깨달음이 있는 그리스도인이 말한 것들은 우리가 주의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들은 유다같이 말할 뿐 아니라 거기다가 화까지 냈다. 성경은 “제자들이 보고 분하여 가로되 무슨 의사로 이것을 허비하느뇨 이것을 많은 값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줄 수 있었겠도다”(마 28:8, 9)라고 말한다. 
   우리는 그리스도인 가운데, 가장 적은 대가를 지불하고서 가장 많은 은혜를 얻으려는 아주 일반적인 태도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주의하는 것은 이 점에 있지 않고 이보다 훨씬 더 깊은 것이다. 이렇게 설명해 보겠다. 당신이 가만히 앉아서 아무것도 하지 않거나 더 많은 일을 하지 않음으로 당신의 생명을 허비한다고 비난하는 사람은 없는가? 그들은 “여기에 있는 사람들이 이런 일이나 저런 일을 한다면 인류 사회에 더욱 유익할텐데 왜 그들은 좀 더 적극적이지 않는가?”라고 말한다. 이렇게 말하는 그들의 생각은 전적으로 용도에 치중되어 있다. 그들은 어떤 것이 그들의 이해에 따라 충분히 이용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많은 사람들은 이런 이유에 근거하여 주님의 종들을 위하여 염려하고 그들이 너무 적게 일을 한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만일 그들이 어떤 곳에 가서 어떤 무리들에게 더 큰 환영과 존경을 받는다면 그들의 일이 더 확장될 수 있고 더욱 주님께 쓰임 받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내 일생에서 내게 도움을 가장 많이 주었던, 수년 동안 알아왔던 한 자매님에 대해 말한 적이 있다. 내가 그녀와 왕래하는 몇 년 동안 비록 많은 사람들은 보지 못하였으나 정말 그녀는 주님께 쓰임을 받았었다. 당시에 나는 주님이 그녀를 쓰시지 않을까봐 마음이 매우 조급했다. 나는 항상 혼자서 “왜 그녀는 나아가서 집회를 인도하지 않고 다른 지방에 가서 사역하지 않는가? 작은 한 마을에 거하니까 아무 일도 생기지 않는다. 이것은 정말로 그녀가 허비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때때로 그녀를 보러 가서 나는 외치다시피 그녀에게 이렇게 말했다. “당신과 같이 주님을 아는 사람이 없고 당신처럼 성경을 산 방식으로 읽을 수 있는 사람도 없습니다. 당신은 주위의 필요는 모르십니까? 왜 밖으로 나가서 무언가를 하지 않습니까? 여기 앉아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은 정말 시간과 힘을 허비하는 것이고 돈을 허비하는 것이며 모든 것을 허비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주님께 가장 첫째 되는 일이 아니다. 그분이, 우리가 그분에게 쓰임 받기를 바라시는 것은 변함없는 사실이다. 또한 하나님은 내가 누구에게 적극적이지 말라고 권하거나 세상의 긴박한 필요를 직면하면서도 아무것도 하지 않고 방관하는 자세를 취하는 사람을 칭찬하는 것을 금하신다. 여기서 주님도 복음이 땅 끝까지 전파되어야 한다고 분부하셨다. 그러나 문제는 무엇을 중요시하느냐에 달렸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 볼 때, 나는 주님께서 참으로 사랑스런 그 자매님을 사랑하셨음을 알 수 있다. 주님은 그녀를 통하여 복음 사역을 위하여 하나님께 훈련받는 우리 젊은이들에게 말씀하셨다. 그 자매님을 인하여 나는 영원히 하나님께 감사를 드릴 것이다!
   그러면 비결은 무엇인가? 분명한 것은, 베다니에서 주 예수님이 마리아의 행동을 칭찬하실 때 모든 봉사의 기초를 세우셨다는 것이다. 즉, 당신의 모든 소유에 더하여 당신 자신까지도 그분에게 완전히 부어야 한다는 것이다. 만일 그분이 당신에게 하도록 허락하신 것이 이것이라면 당신은 이것을 하는 것만으로도 족하다. 첫째 되는 문제는 ‘가난한 자’가 도움을 받았는가에 있지 않고 주님이 만족하셨는가에 있다. 
   우리는 많은 집회를 인도하고 많은 복음 활동에 참여할 수 있다. 우리가 이것을 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이런 일을 할 수 있고 할 수 있는 대로 최선을 다할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제일 관심하시는 것은 우리가 그분을 위하여 쉬지 않고 일을 했는가에 있지 않다. 이것은 그분이 가장 중요시하는 것이 아니다. 주님을 섬기는 것은 보이는 결과로 측정할 수 없다. 그렇지 않다. 사랑하는 형제들이여, 주님께서 가장 관심하시는 것은 우리가 ‘그분의 발 앞에 있는가’와 ‘그분의 머리에 기름을 부었는가’이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이 옥합과 같이 가장 귀한 것이고 이 세상에서 우리에게 가장 사랑스런 것일지라도-내가 말하지만 이것은 십자가를 거쳐서 흘러나온 생명이다-온전히 주님께 드려야 한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심지어 응당 이해할 수 있는 사람에게도-이것은 허비하는 것 같다. 그러나 이것은 주님이 가장 귀히 여기시며 가장 얻고자 하시는 것이다. 우리는 자주 끊임없는 봉사를 그분께 드린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를 붙잡고 있는 것이 그분 자신인지 아니면 봉사인지를 발견하도록 잠시 우리의 봉사를 보류하신다.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생활 292-298쪽)

기도의 부담

■ 기도의 부담
1. 만 명의 다음세대 제사장들을 얻도록
   (3) 고학년들이 온전케 되어 차상위봉사의 역량을 담당하도록
2. 2019년 부산교회 봉사 목표를 위하여
   (1) 2020년까지 1,000명의 인수 목표를 위하여
   (2) 2019년 150명, 2020년 150명
   (3) 구역별 목표 1년 25명, 소그룹별 목표 1년 3명

알리는 말씀, 금주의 추구

■ 2019년 전반기 전국 자매 온전하게 하는 훈련 재 안내
▷ 일시 : 3/28(목) 오후 4시 등록 ~ 3/30(토) 점심 식사
▷ 장소 : 성경진리사역원
▷ 강사 : 임홍, 데이비드 장
▷ 대상 : 각지 교회에 있는 온전하게 되기를 갈망하는 자매들(형제들도 참석 가능)
▷ 비용 : 숙박 91,500원 / 출퇴근 30,500원
※ 참석을 원하시는 분들은 3/18(월)까지 입금 후, 집사실로 전화해 주시기 바랍니다. 취소 시 신청금은 환불되지 않으니, 신중히 고려하시기 바랍니다.
(부산은행 278-13-000436-7,부산교회)

■ 2019년 복음을 위한 상공인 섞임집회  안내
▷ 일시 : 4/26(금) 19:30 ~ 4/28(주일) 12:30
▷ 대상 : 복음에 부담이 있는 기업체 임직원, 소상공인, 개인 사업자
▷ 장소 : 성경진리사역원
▷ 비용 : 숙박 - 91,500원, 출퇴근 - 30,500원
▷ 문의 : 1544 - 0031(국내 집회부)
※ 참석을 원하시는 분들은 4/15(월)까지 입금 후 집사실로 전화해 주시기 바랍니다. 취소 시, 신청금이 환불되지 않으니 신중히 고려하시기 바랍니다.(부산은행 278-13-000436-7, 부산교회)

■ 금주의 추구
1. 구약 성경 읽기 : 신 9:22 ~ 신 28장
2. RSG(신약 회복역) : 눅 7:36 ~ 눅 11:36
3. 라이프-스타디 : 요한복음 M33 ~ M34
4. 금주의 소그룹 추구 진도(신약 회복역) : 눅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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