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양 - 9(2019.6.2)
교회 주보
부산교회집사실 2019-05-31 , 조회 (220) , 추천 (0) , 스크랩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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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교회 기도집회 추구

목양 ? 9

깨어 있음에 대한 비유

   그리스도인의 생활에 관해서 신약은 먼저 우리가 거듭날 수 있도록 하나님의 영을 우리 영 안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필요함을 계시한다. 이어서 우리는 자라야 한다. 자라는 것은 변화되는 것이요, 변화되는 것은 주로 생각의 영 안에서 새롭게 되는 것이다. 변화와 생각의 새롭게 됨은 우리 혼 안에 성령의 내적 충만을 낳는다. 우리의 생각은 혼의 주도적인 부분이다. 생각의 영 안에서 새롭게 되는 것은 우리의 생각을 그 영으로 채우고 흠뻑 적시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의 생각을 흠뻑 적신 그 영께서 우리의 전 존재를 새롭게 할 것이다. 이렇게 해서 우리의 존재인 우리의 혼은 내적으로 충만케 하시는 그 영으로 흠뻑 적셔질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그릇 안에 여분의 기름을 담는 방법이다. 
   거듭나는 것, 즉 새로운 출생을 갖는 것은 그 영을 우리 영 안에 있게 하는 것, 즉 기름을 우리 등 안에 두는 것이다. 그 영을 우리 혼 안에 있게 하는 것은 우리가 생명 안에서 자란다는 뜻이요, 변화된다는 뜻이요, 우리의 전 존재 안에서 새롭게 된다는 뜻이요, 우리의 혼이 하나님의 성령으로 흠뻑 적셔지게 된다는 뜻이다. 이것이 기름을 그릇 안에 담는 것이다. 이것이 주님의 오심을 위해 깨어 있고 예비되는 방법이다. 그것은 또한 주님의 임재 안으로 휴거 될 수 있도록 예비되는 방법이기도 하다. 

신실함에 대한 비유

   깨어 있음에 대한 비유(마25:1-13)는 다루었으니 이제 우리는 신실함에 대한 비유로 계속 나아가자(마25:14-30). 열 처녀의 비유는 깨어 있음을 위한 것이지만, 달란트의 비유는 신실함을 위한 것이다. 
   24장을 살펴볼 때 이미 지적한 바와 같이 믿는 이들에 관한 두 면-깨어 있음과 예비됨의 방면, 신실함과 지혜로움의 방면-이 있다. 믿는 이들은 이중 신분(二重身分)을 갖고 있기 때문에 이 두 면을 갖고 있다. 이 이중 신분의 첫째 면은 생활과 관련이 있고, 둘째 면은 봉사와 관계 있다. 어느 그리스도인도 이 두 면을 소홀히해서는 안된다. 그보다 우리는 두 가지 모두에 합당한 주의를 기울여서 생활에서나 봉사에서나 합당하게 되어야 한다. 생활면에서 우리는 처녀들이고, 봉사면에서 우리는 노예들이다. 이것은 깨어 있음에 있어서 우리가 처녀들이라는 뜻이다. 이것은 우리 자신의 어떠함과 관계있다. 그러나 신실함에 있어서 우리는 노예들이다. 이것은 우리가 행하는 것과 관계있다. 
   우리는 ‘처녀들’이라는 용어는 좋아하지만 우리가 노예들이라는 말은 듣고 싶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처녀들일 뿐 아니라 노예들이기도 하다. 처녀들에게는 주님이 신랑이시나, 노예들에게 그분은 주인이시다. 이 같이 우리만 이중 신분을 가진 것이 아니라 주님도 이중 신분을 갖고 계신다. 한편으로 그분은 우리의 즐거운 신랑이시고, 다른 한편으로 그분은 우리의 엄격한 주인이시다. 때때로 그분은 우리와 더불어 매우 즐거우시지만, 종종 다른 때에는 우리를 엄격하게 대하신다. 
   처녀들에게는 내적인 것-그릇 안에 기름을 내적으로 채우는 것-이 필요하다. 그런데 노예들에게는 외적인 것-영적 재능-이 필요하다. 성령의 내적 충만은 내적인 것이지만, 영적 은사인 달란트는 외적인 것이다. 그릇으로서의 우리에게는 내적으로 기름이 필요하고, 노예로서의 우리에게는 외적으로 달란트가 필요하다. 
   그릇을 채우는 기름은 그 그릇의 맨 밑바닥까지 도달한다. 우리 존재가 새롭게 되는 것은 속으로부터이며, 변화가 생기는 것도 바로 속으로부터이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 가운데는 이러한 내적인 역사가 심히 부족하다. 오히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겉모양을 내려고 외적인 모습을 개선시키려는 데 진력하고 있다. 종교는 외적인 겉모양에 관심을 두지만, 성령의 내적 충만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 안으로 들어와서 우리를 속으로부터 변화시킨다. 내적인 기름은 외적인 화장과는 매우 다르다. 화장은 우리의 얼굴색을 금방 바꾼다. 그러나 하나님의 방법은 우리가 그 영을 마시는 것이요 그 영이 우리 존재를 흠뻑 적시는 것이다. 그럴 때 우리의 모습은 속으로부터 바뀔 것이다. 예를 들어, 내가 잘 먹고 마신다면 영양가 있는 음식이 나의 존재를 흠뻑 적실 것이다. 이것은 내게 건강한 혈색을 준다. 
   속으로부터 새롭게 되는 것이 필요하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외적인 활동이 필요 없다는 뜻이 아니다. 다섯 달란트 받은 자는 그것으로 근면하게 장사해서 또 다섯 달란트를 남겼다. 이것은 우리에게 내적인 새롭게 됨과 외적인 봉사, 즉 내적인 성장과 외적인 행동이 모두 필요함을 가리킨다. 우리는 이 원칙에 깊은 인상을 받아야 한다. 생활면에서 우리는 속으로부터 새롭게 되어야 하고, 봉사면에서 우리는 외적으로 매우 활동적이어야 한다. 때때로 우리는 외적으로 너무 활동적이어서 내적인 새롭게 됨을 소홀히 한다. 또 다른 때에는 속 생명을 너무 주의하기 때문에 충분히 일하지 않는다. 이 같이 되는 것은 뒤집지 않은 전병(호 7:8)이 되는 것이다. 한 면으로 우리는 숯처럼 타버리고, 다른 한 면으로는 날 것 그대로이다. 어느 면도 먹기에 마땅하지 않다. 우리는 뒤집어진 전병이 되어야 한다. 만일 우리가 너무 많이 일한다면 주님은 우리에게 쉬라고 말씀하실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너무 많이 쉰다면 주님은 일하라고 말씀하실 것이다. 

어떤 사람이 타국으로 감

   14절은 “천국은 마치 타국으로 떠나면서 노예들을 불러 자기 소유를 맡긴 어떤 사람과 같습니다.”라고 말한다. 이것은 이 달란트의 비유가 열 처녀의 비유처럼 천국에 관한 것임을 가리킨다. 여기서 ‘어떤 사람’은 타국, 즉 하늘로 가려고 하는 그리스도를 상징한다. 

자기 소유를 노예들에게 맡김

   14절에서 노예들에게 맡겨진 그 소유(재산)에 복음, 진리, 믿는 이들, 교회 등이 포함된다고 믿는다. 믿는 이들은 하나님의 기업, 즉 하나님의 소유이다(엡 1:18). 마태복음 24장 45절은 믿는 이들이 또한 그분의 집 안 식구임을 지적해 주고 있다. 

다섯 달란트와 두 달란트와 한 달란트를 줌

   15절은 “그가 노예들에게 각자의 재능에 따라, 한 사람에게는 다섯 달란트를, 다른 한 사람에게는 두 달란트를, 또 다른 한 사람에게는 한 달란트를 주고서 떠났습니다.”라고 말한다. 열 처녀의 비유에서 기름은 하나님의 영을 상징하는 한편, 이 비유에서 달란트는 영적 은사들을 상징한다(엡 4:8, 롬 12:6, 고전 12:4, 벧전 4:10, 딤후 1:6). 생활을 위해서 우리에게는 기름, 즉 하나님의 영이 필요하고 심지어 그분의 충만이 필요한데 이는 우리가 주님의 간증을 위해 처녀의 생활을 살 수 있기 위함이다. 봉사 곧 일을 위해서 우리에게는 영적 은사인 달란트가 필요한데, 이는 주님의 일을 성취하기 위해 좋은 노예로 장비되기 위함이다. 생활 가운데서 그 영의 충만함은 우리가 봉사에 있어서 영적 은사를 사용하기 위한 것이고 봉사 가운데의 영적 은사는 우리가 그리스도의 지체들로 온전케 될 수 있도록 생활 안에서의 그 영의 충만함과 조화를 이룬다. 14절은 그 사람이 자기 소유를 노예들에게 맡겼다고 말하지만, 15절은 노예들에게 달란트를 주었다고 말한다. 이것은 15절에 있는 달란트가 14절에 있는 소유임을 가리킨다. 달리 말해서 주님은 그분의 소유를 우리를 위한 달란트로 쓰신다. 예를 들어서, 복음은 주님의 소유이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에게 주어질 때, 그것은 우리의 달란트가 된다. 이와 마찬가지로 진리는 주님의 소유이다. 그러나 진리가 우리에게 주어질 때, 그것은 하나의 달란트가 된다. 동일한 원칙으로 모든 믿는 이들은 주님의 소유이다. 믿는 이들이 우리에게 주어질 때 그들은 우리의 달란트들이 된다. 모든 믿는 이들이 없다면, 나의 달란트는 그리 크지 않을 것이다. 더욱이 교회는 주님의 소유이다. 교회가 우리에게 주어질 때, 그것은 우리의 달란트가 된다. 주께서 그분의 소유를 우리에게 더 많이 주실수록, 더욱더 우리는 달란트를 많이 갖게 된다. 마찬가지로 주께서 우리에게 부담을 더 많이 주실수록, 우리는 더 많은 달란트를 갖게 된다. 
   이 비유에서 달란트가 은사들이라는 것을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알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그 은사들의 근원이 주님의 소유라는 것을 모르고 있다. 오늘날 주님의 소유는 주로 복음과 진리와 믿는 이들과 교회이다. 만일 당신이 이런 것들을 주의하지 않는다면 당신은 어떤 달란트도 갖지 못할 것이다. 복음이 우리의 소유가 될 필요가 있다. 진리와 믿는 이들과 교회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나의 달란트는 천연적인 것이 아니라 복음과 진리와 믿는 이들과 교회이다. 만일 당신이 나에게서 이 모든 것을 없애 버린다면, 나에게는 아무 것도 남지 않을 것이다. 나에게는 복음과 진리뿐 아니라 수십만의 믿는 이들과 수백 개의 교회들이 있기 때문에 나는 강한 은사를 갖고 있다. 이 사역이 강한 영향력을 갖고 있는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다. 
   우리는 나태하게 주님이 우리에게 무엇을 주시기를 기다려서는 안 된다. 아니다. 반드시 우리는 부지런하게 복음과 진리를 추구해야 한다. 우리는 열심히 사람의 타락과 구속과 거듭남과 구원과 피의 정결케 함, 그 영의 씻음 등을 알려고 추구해야 한다. 이 모두가 완전한 복음의 방면들이다. 복음을 많이 받을수록, 더욱더 당신은 많은 달란트를 갖게 된다. 우리는 주께서 우리로 하여금 진리를 알고 또 그것을 체험할 수 있도록 도우시기를 기도해야 한다. 우리는 교회와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과 하나님의 경륜에 관한 진리를 체험해야 한다. 결국 이 진리들이 우리의 달란트가 될 것이다 그때에 우리는 그것들을 다른 이들에게 공급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이렇게 해서 주님의 소유가 우리의 달란트로 된다. 더 나아가 우리는 기도해야 한다. “주여, 저는 성도들을 돌보고 그들의 부담을 짊어지기를 원합니다. 나의 마음은 그들을 위해 있습니다.” 만일 우리에게 성도들을 위한 마음이 있고 그들을 위해 부담을 진다면, 주님의 소유인 그들은 우리에게 달란트로 주어질 것이다. 수많은 성도들과 교회들이 나의 달란트가 되었으니 얼마나 감사한지! 
   만일 당신이 더 많은 달란트를 원한다면 반드시 성도들을 돌보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예를 들어, 누가 실직(實職)했다면, 당신은 그를 위해 기도하고 그의 짐을 져 주어야 한다. 이렇게 하는 것은 주께서 당신에게 그 사람을 달란트로 주셨다는 증거가 될 것이다. 그러나 성도들을 짊어지지 않고 그들을 돌보지 않는다는 것은 당신이 주님의 소유를 저버렸다는 뜻이다. 각 성도가 다 주님의 소유 중 귀한 부분들이다. 성도들을 관심하는 것은 작은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주님의 소유이기 때문이다. 
   주님의 소유가 그분의 손 안에 있을 때, 그것은 그분의 소유인 채로 남아 있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에게 양도될 때, 그것은 우리의 달란트가 된다. 주님이 당신에게 주신 어떤 부담도 떨어뜨리지 말라. 나는 아무리 분주해도 어떤 달란트도 떨어뜨릴 수 없다. 이는 그렇게 하는 것이 주님의 소유를 떨어뜨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주님은 그분의 회복 안에서 방대한 일을 갖고 계신다. 이 일을 위해서 그분은 그 책임을 맡기 위해 일으켜진 수많은 젊은 형제자매들을 필요로 하신다. 
   달란트는 당신이 태어나면서 지닌 그 무엇이 아니다. 그것은 전적으로 당신의 부담과 관련된다. 만일 당신이 하나의 부담을 안는다면, 당신은 하나의 달란트를 받을 것이다. 만일 당신이 한 지방 교회를 위한 하나의 부담을 갖는다면, 당신은 하나의 달란트를 가질 것이다. 그러나 당신이 다섯 교회들을 위한 부담을 갖는다면 당신은 다섯 달란트를 갖게 될 것이다. 지난 28년 동안 이 사역 아래서 280여 개 이상의 교회들이 세워졌다(1977년 12월을 기준으로 한 것임, 1988년 현재 1,000여 군데에 지방 교회들이 있음 : 역자 주). 최근에 나는 비난을 받고 비평을 받고 정죄 받았을 때 이 사역이 그릇된 것인지 아닌지를 주님께 물었다. 그때에 주님은 나무를 아는 방법은 그 열매로 아는 것이라고 내게 지적해 주셨다. 그분은 이 사역에 의해서 얼마나 많은 교회들이 세워졌고 건축되었는지 보라고 말씀해 주셨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자신들을 위해 야심을 갖고 있다면, 이 야심은 그 달란트들을 죽일 것이다. 

각각 그 재능대로

   달란트는 우리의 재능이 아니라 주님의 소유이지만 우리의 재능에 따라 주어진다. 우리의 재능(능력)은 하나님의 창조와 우리의 배움으로 구성된다. 우리의 재능의 분량은 우리 마음의 자원(自願)함에 기초를 두고 있다. 만일 우리에게 마음속의 어떤 자원함도 없다면, 우리는 달란트를 받을 수용력이 없을 것이다. 달란트를 받을 수 있는 분량은 우리 마음의 자원함에 의해 측정된다. 

다섯 달란트와 두 달란트를 가진 사람들은 
그것으로 장사함

   16절과 17절은 “다섯 달란트를 받은 사람은 즉시 가서 그것으로 장사하여 다섯 달란트를 더 벌었고, 마찬가지로 두 달란트를 받은 사람도 다른 두 달란트를 더 벌었으나,”라고 말한다. 달란트를 가지고 장사하는 것은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은사를 사용하는 것을 상징하고, 달란트를 더 남기는 것은 주님으로부터 받은 은사가 어떤 손해나 낭비도 없이 최대한으로 사용되었음을 상징한다. 
   24장에 따르면, 노예는 집안 식구들에게 양식을 공급해야 한다. 이것은 주의 집에 있는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풍성을 가진 영양가 있는 말씀을 생명공급으로 공급하는 것을 언급한다. 그러나 여기서는 달란트가 더 많이 증식되도록 달란트를 가지고 장사하는 것에 대해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의 봉사의 결과는 양면을 갖는다. 첫째 방면은 다른 사람들이 양식을 먹고 풍성한 영양 공급을 받는 것이다. 둘째 방면은 주님의 소유가 증가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우리가 복음을 더 많이 전할수록 그 복음은 더 풍성하게 된다. 그것은 진리의 경우에도 해당된다. 우리가 진리를 다른 이들에게 공급할 때, 그 진리는 더 증가된다. 또 이것은 성도들과 교회들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믿는 이들과 교회들 모두가 증가될 것이다. 이렇게 해서 다섯 달란트는 열 달란트로 증가되고 두 달란트는 네 달란트로 증가된다. 

한 달란트 가진 자는 땅을 파고 그것을 감춤

   18절은 “한 달란트를 받은 사람은 나가서, 땅을 파고 주인의 돈을 감추어 두었습니다.”라고 말한다. 이 비유에서 주된 강조점은 한 달란트 받은 자, 즉 가장 작은 은사를 받은 자에게 있다. 가장 작은 은사를 받은 자가 그 은사를 합당하게 사용하지 않기가 매우 쉽다. 
   땅은 세상을 상징하기 때문에, 땅을 파는 것은 세상으로 빠지는 것을 상징한다. 세상과의 어떤 사귐이나 어떤 연루도, 심지어 세상적인 작은 말 하나라도 주님이 우리에게 주신 은사를 파묻을 것이다. 주님의 동전을 감추는 것은 땅에 속한 어떤 구실들을 빙자하여 주님의 은사를 쓸모없게 만들고 낭비하는 것을 상징한다. 주님의 은사를 사용하지 않는 것에 대한 어떤 변명도 그것을 감추는 것이다. 이것은 언제나 한 달란트 받은 사람들, 즉 자기의 은사가 가장 적다고 여기는 사람들에게 있는 위험이다. 
   이 비유에서 한 달란트 받은 자에게는 아무런 증가도 없다. 예를 들어, 어떤 도(道)에 하나의 교회가 있다 하자. 10년 후에도 그 도에는 여전히 한 교회 밖에 없다. 혹자는 한 달란트 받은 노예가 그의 달란트를 잃지 않고 원래 주님의 소유였던 것을 그분께 돌려 드림에 있어서 잘했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한 달란트 받은 노예는 이렇게 말하는 듯하다. “주여, 여기에 당신의 것이 있습니다. 당신은 제게 한 달란트를 주셨는데, 저는 그것을 지키고 간직하고 보호하고 보존하는 데 신실했습니다. 당신의 긍휼과 은혜로 저는 그것을 지켰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봉사의 결과는 반드시 우리의 달란트가 증가되는 것이라야 한다. 주께서 주신 것을 단순히 간직하고만 있는 것은 주님의 뜻이 아니다. 만일 당신이 아무런 증가도 없이 복음과 진리와 교회를 지키는 데만 신실하다면 주님은 당신에게 게으르다고 말씀하실 것이다. 더 나아가 그분은 당신을 악한 노예라고 부르실 것이다. 주님의 눈에는 달란트를 파묻어 버리고 그것을 증가시키지 않는 것은 악한 것이다. 주님은 우리의 구실과 변명을 주의하지 않으신다. 그분은 한 달란트가 두 달란트로 증가되는 것만을 주의하신다. 이것은 심각한 문제이다. 우리의 봉사는 반드시 다른 사람들을 먹이고 만족케 하는 것과 달란트를 증가시키는 것으로 귀결(歸結)되어야 한다.(마태복음 라이프 스타디 메시지 65)

기도의 부담, 성도들 소식, 금주의 추구 

■ 기도의 부담
1. 참된 제사장 직분을 회복하도록
   (1) 희생 제물들의 실재이신 그리스도와 연결되도록
2. 2019년 부산교회 봉사 목표를 위하여
   (1) 2020년까지 1,000명의 인수 목표를 위하여
   (2) 2019년 150명, 2020년 150명
   (3) 구역별 목표 1년 25명, 소그룹별 목표 1년 3명

■ 성도들 소식
1. #3 - 침례 
온천1 소그룹 남유진, 남유찬 형제가 5/26(주일), 침례 받았습니다.

■ 금주의 추구
1. 구약 성경 읽기 : 왕하 12:1 ~ 왕하 25장
2. RSG(신약 회복역) : 행 16:11 ~ 행 22:21
3. 라이프-스타디 : 사도행전 M3 ~ M4
4. 금주의 소그룹 추구 진도(신약 회복역) : 요 7

알리는 말씀

■ 전국 봉사자, 전 성도 온전케 하는 훈련(란 캔거스 br.) 버스 운행 안내
▷ 탑승 장소 및 시간
   ① 구 남부경찰서 앞 : 6/4(화) 오전 10:30
   ② 동래 지하철 역 : 6/4(화) 오전 11:00
▷ 차비 : 1인 1만원

■ 란 캔거스br. 부울경남권역 6월 9일(주일) 특별집회 공지사항
   집회 참석 시 안내 봉사자의 안내에 따라 앞자리부터 채워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중강당에서도 실시간 영상 시청이 가능하므로 아동을 동반하신 분들은 중강당에서 시청하실 수 있습니다. 
   청사포 교육관에는 안전사고의 요인들이 많습니다. 별도 안전요원이 없음으로 자녀를 동반하신 분들은 안전관리를 철저히 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먼 거리에서 오시는 교회들을 위하여 따로 자리를 안배할 예정입니다. 이점 양해를 부탁드리며 모든 성도들에게 은혜가 넘치는 집회가 되시기 바랍니다. 
▷ 교회 승합차 운행 : 장산역 1번 출구, 오전 9시 20분부터(주차공간이 협소하오니 가급적 교회 승합차를 이용해 주시기 바랍니다.)
▷ 차량을 운행하여 집회에 오시는 성도들은 장산역 1번 출구를 경유하여 기다리는 성도들을 픽업해 오시면 고맙겠습니다.
※ 교육관 앞 대로 변에 주차하실 경우 주차단속카메라에 촬영될 수 있으니 양지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 청사포 공영 주차장을 이용하실 수 있습니다,(도보 5분 거리, 요금 발생)

■ 부산교회 6월 일정 안내
① 란 캔거스 br. 부울경남권역 특별집회 [6/9(주일) 오전 10시]
② 단기훈련생(30여명) 6구역 방문 [6/11(화) ~ 6/12(수)]
③ 청송, 안동 및 인근교회(40여명) 1구역 방문 [6/22(토) ~ 6/23(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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