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양 - 10(2019.6.9)
교회 주보
부산교회집사실 2019-06-07 , 조회 (221) , 추천 (0) , 스크랩 (0)
출처
원문
부산 교회 기도집회 추구

목양 - 10

노예들의 주인이 와서 그들과 회계함

   “오랜 시간이 지난 후, 노예들의 주인이 돌아와 그들과 결산하였는데,”(마 25:19). 오랜 시간이란 교회 시대 전체를 상징하고, 돌아왔다는 것은 주님의 임재 안에서 공중에 오시는 것(살전 4:16)을 상징한다. 결산한다는 것은 공중에서(주님의 임재 안에서) 그분의 심판대에서의 심판(고후 5:10, 롬 14:10)을 상징하는데, 그곳에서 믿는 이들의 생활과 행위와 일이 심판을 받아 상을 받든지 벌을 받을 것이다(고전 4:5, 마 16:17, 계 22:12, 고전 3:13-15). 

다섯 달란트 받은 자와 두 달란트 받은 자는 
모두 상을 받음

   “다섯 달란트 받은 사람은 다섯 달란트를 더 가지고 나아와 ‘주인님, 나에게 다섯 달란트를 맡기셨는데, 보십시오, 내가 다섯 달란트를 더 벌었습니다.’라고 하자.”(20절). 다섯 달란트 받은 자가 왔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심판대에 왔다는 것을 언급한다. 또 다른 다섯 달란트를 남긴 것은 다섯 달란트의 은사를 완전히 사용한 결과이다. 
   “주인이 그에게 ‘잘 하였다. 착하고 신실한 노예야, 네가 적은 일에 신실하였으니, 내가 많은 일을 너에게 맡길 것이다. 네 주인의 기쁨에 참여하여라.’라고 하였습니다.”(21절). ‘적은 일’이란 이 시대에서의 주님의 일을 상징하고, ‘맡길 것’은 장차 올 왕국 안에서 다스리는 권위를 상징하며, ‘많은 일’이란 장차 올 왕국에서의 책임들을 상징한다. ‘주인의 기쁨’은 장차 올 왕국 안에서 주님을 누리는 것을 상징한다. 이것은 외적인 지위가 아니라 내적인 만족이다. 주님의 즐거움에 참여하는 것은 가장 큰 상으로서 왕국 안에 있는 영광과 지위보다 더 낫다. 여기에서 우리는 신실한 노예에게 주어지는 두 방면의 상-권위와 누림-을 볼 수 있다. 신실한 자는 왕국이 나타날 때 직접 주님의 임재 안으로 들어갈 것이다. 
   두 달란트 받은 자에게도 다섯 달란트 받은 자와 같은 상이 주어진다. 두 달란트 받은 자가 와서 또 다른 두 달란트를 남겼다고 말씀드릴 때 주님은 다섯 달란트 받은 자에게 한 것과 같은 것을 말씀하셨다(22절-23절). 비록 두 달란트 받은 자의 은사가 다섯 달란트 받은 자보다 작긴 했지만 그 두 사람에게 주신 주님의 칭찬과 상은 동일했다. 이것은 주님의 칭찬과 상이 우리가 한 일의 크기와 양에 관계되지 않고 그분의 은사를 최대한 사용하는 데 신실했는가에 관계된다는 것을 가리킨다. 만일 신실했더라면 한 달란트 받은 자에게도 동일한 칭찬과 상이 주어졌을 것이다. 

한 달란트 받은 자는 책망을 듣고 처벌받음

   “그다음에 한 달란트를 받은 사람도 나아와 ‘주인님, 주인님은 씨를 뿌리지 않으신 데서 거두시고 키질하지 않으신 데서 모으시는, 마음이 굳은 분이신 줄 알았으므로,”(24절). 주님을 위해 아무 이윤도 남기지 않은 한 달란트 받은 자도 공중에 있는 그리스도의 심판대에 왔다. 이것은 그가 구원받았을 뿐 아니라 공중으로 휴거 되기도 했음을 입증한다. 구원받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휴거 되어서 그리스도의 심판대에 나올 수 없다. 
   “두려워하며 물러가서, 주인님의 달란트를 땅에 감추어 두었습니다. 보십시오, 주인님의 것이 여기 그대로 있습니다.”(25절). 두려워하는 것은 소극적인 것이다. 차라리 우리는 주님의 은사를 사용하는 데 적극적이고 능동적이어야 한다. 만일 우리가 신실하다면 아무 것도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다. 
   한 달란트 받은 자는 나가서 그 달란트를 땅에 감추었다. 그가 이렇게 하는 것은 너무도 수동적이다. 우리는 주님의 일을 위해서 능동적이어야 한다. 그는 자기 달란트를 파묻었기 때문에 그것을 주님께 돌려 드리기만 할 뿐이었다. 그저 주님의 은사를 간직하고 그것을 잃지 않게 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반드시 우리는 그것을 사용해서 이윤을 남겨야 한다. 한 달란트 받은 자는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 “주여, 보십시오. 당신의 것이 여기에 있나이다. 나는 아무 것도 잃지 않았습니다. 저는 당신이 제게 주신 것을 지키는 데 신실했습니다.”
   “주인이 그에게 대답하였습니다. ‘악하고 게으른 노예야, 내가 씨를 뿌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키질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 알았다면,”(26절)이라고 말한다. 여기에서 주님은 그분의 일을 위해 노예들에게 요구하심에 있어서 엄격하시다는 것을 시인하신다. 어떤 의미에서 주님은 그러한 굳은 분이시다. 그분은 늘 심지 않은 데서 거두시고 키질하지 않은 데서 모으신다. 주의 회복은 무(無)에서, 아무 것도 없는 데서부터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생각해 보라. 
   어떤 의미에서 주님은 키질하지 않은 데서 모으시고 심지 않은 데서 거두시는 분이라고 말하는 그 노예의 말은 맞는 것이다. 그러나 또 다른 의미에서 그것은 진실이 아니다. 주님이 키질하지 않으셨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그분은 우리 각각에게 최소한 한 달란트는 주셨기 때문이다. 그분이 우리에게 달란트를 주시는 것은 심는 것이요 키질하는 것이다. 이제 주님은 그분이 키질하지 않은 곳에서 모으고 그분이 심지 않은 데서 거두라고 우리를 보내신다. 우리 중 아무도 주님께서 우리에게 아무 것도 주시지 않았다고 말할 수 없다. 적어도 우리는 한 달란트를 가졌다. 이 달란트는 심기 위한 씨요, 키질하기 위한 소유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께서 심지 않은 곳에서 거둬야 하며, 주님께서 키질하지 않은 곳에서 모아야 한다. 주님이 당신에게 주신 것은 산출하는 요소를 담고 있다. 어디든지 당신이 자신의 달란트를 가지고 가면 생산할 것이다. 그러나 이 생산적인 것은 당신의 실행, 곧 달란트의 사용에 달려 있다. 만일 당신이 그 달란트를 사용한다면, 그것은 생산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감추어 둔다면 그것은 아무 것도 생산하지 않을 것이다. 
   달란트를 땅 속에 감추는 것은 땅에 속한 것, 즉 그 영 외의 다른 그 무엇과 관련을 맺는 것이다. 한담하는 것은 그러한 관련의 한 예이다. 어떤 이들은 성도들을 방문할 시간이 없다고 주장하지만, 한담하는 데 상당히 많은 시간을 보낸다. 만일 당신이 한담을 멈출 수 있도록 그분의 긍휼과 은혜를 위해 그분을 바라본다면, 많은 시간이 절약될 것이므로 당신은 이 시간을 성도들을 돌보는 데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주의 회복 안에서 우리는 성도들을 돌보는 일을 하는 목사들을 두지 않는다. 이런 유형의 목양(牧羊)은 타락한 기독교로부터 나온 것이다. 주의 회복 안에서는 모든 형제자매들이 반드시 다른 사람들, 특히 젊은이들과 새 신자들을 돌보는 부담을 져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집회 후에 오직 어떤 특정한 사람들만 방문하는 데 익숙해 있다. 이렇게 하는 대신 그들은 이런 기회를 붙잡아 새로 나온 사람들, 젊은이들, 여태까지 우리가 기도해 온, 뒤로 물러선 사람들을 접촉해야 한다. 우리 모두가 이렇게 한다면 모든 젊은이들과 약한 이들이 돌봄을 받을 것이다. 비록 당신이 매우 바쁠지라도, 당신에게 그렇게 하려는 마음이 있고 또 자신의 달란트를 기꺼이 사용하고자 한다면 당신은 그래도 누군가를 돌볼 수 있다. 누구와 단 10분만이라도 보냄으로써 우리는 그에게 큰 유익을 줄 수 있다. 어떤 사람은 이런 식으로 세워진 다음에 따스함을 느낄 것이며 자신이 돌보아졌음을 알 것이다. 그러면 그는 더 많은 도움을 받기를 원할 것이다. 만일 우리 모두가 이렇게 실행한다면 아무도 소홀히 되지 않을 것이다. 모든 사람이 다른 사람들을 돌보는 기능을 발휘하기 때문에 장로들이 모든 것을 다 할 필요가 없어질 것이다. 
   기능을 발휘하는 것은 다른 이들을 돌봄으로써 그들에게 생명을 공급하는 것이다. 봉사의 주된 방면은 단순히 집회 장소를 청소하거나 뜰을 가꾸는 것이 아니고 다만 말하는 문제에 불과한 것도 아님을 지적해 주고 싶다. 
   우리 모두는 우리의 달란트를 사용해서 주님의 소유를 증가시키기를 배워야 한다. 주님은 우리 각각에게 그분의 소유 중 일부를 달란트로 주셨으므로, 우리의 부담과 의무와 책임은 이 달란트를 증가되게 하는 것이다. 자신을 변명하지 말고, 다른 사람들을 돌볼 시간이 없다고 말하지 말라. 당신이 아무리 바쁘다 해도, 설사 당신이 일주일에 한 집회만 참석할 수 있다 해도, 그래도 당신이 다른 사람들을 돌봄으로써 기능을 발휘하는 것은 여전히 가능한 일이다. 자신을 그렇게 약하다고 생각지 말라. 아마 당신은 약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더 약하기 때문에, 당신의 도움을 필요로 한다. 심지어 당신이 자신을 가장 약한 지체라고 느낀다 해도 당신의 도움이 필요한 거의 죽어 있는 지체들이 있을 것이다. 당신의 달란트를 사용할 수 있는 가장 좋은 길은 다른 사람들을 돌보는 것, 즉 다른 사람들을 관심하며 돌아보는 것이다. 이것은 당신이 다른 사람들의 사사로운 일에 관심을 가지라는 뜻이 아니다. 주님은 이런 목적으로 당신을 고용하신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돌보라고 고용하셨다. 
   만일 당신이 한 달란트를 받았다면 그것을 사용해야 한다. 집회에 오기 전에 당신은 이렇게 기도해야 한다. “주여, 저는 한 달란트를 가졌다고 믿습니다. 저는 땅에 속한 것들에 연루되어 나의 달란트를 파묻길 원치 않습니다. 오히려 나는 그것을 다른 사람들을 돌보는 데 사용하고 싶습니다.” 마음이 냉랭해진 사람들에게 약간의 사랑을 보여주라. 가서 그들을 만나든지, 그들을 집으로 초대하라. 당신이 주님과 함께 시간을 보내면서 당신이 돌봐야 될 사람에 관해 주님께 열려 있을 때, 그분은 당신에게 부담을 주실 것이다. 당신이 다른 이들을 접촉하고 그들과 교통을 나눌 때, 당신은 자연스럽게 자신의 달란트를 사용할 것이다. 주님은 매우 많은 것을 심으셨고 흩으셨다. 당신이 거두고 모아야 할 것이 많이 있다. 오! 추수할 것은 많으나 일꾼은 적다! 당신이 심을 필요가 없다. 다만 가서 거두라. 매 집회 후에 당신은 거두고 모을 시간이 있다. 이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우리의 달란트를 사용할 것이다. 이런 식으로 한 달란트는 두 달란트가 되고, 두 달란트는 네 달란트로, 다섯 달란트는 열 달란트로 될 것이다. 우리에게 위임된 하나님의 소유인 달란트가 증가될 것이다. 만일 우리가 모두 이것을 실행하는 데 신실하다면 주의 회복은 진실로 증가될 것이다. 
   “너는 마땅히 내 돈을 돈 바꾸는 사람들에게 맡겼다가, 내가 돌아왔을 때, 본전과 이자를 되찾게 해야 했다.”(27절). 돈 바꾸는 사람들에게 돈을 예금하는 것은 다른 사람들을 구원으로 인도하고 그분의 풍성을 그들에게 공급하기 위해 주님의 은사를 사용함을 상징한다. 이자는 우리가 주님의 일을 위해 그분의 은사를 사용함으로써 남기는 이윤이 많은 결과를 상징한다. 
   어떤 의미에서 우리는 모든 새 신자들과 약한 자들과 어린 자들과 뒤로 물러선 이들을 돈 바꾸는 사람들이라고 말할 수 있다. 우리는 주님의 소유를 이런 돈 바꾸는 사람들에게 예금해 둘 필요가 있다. 돈 바꾸는 사람들은 인도하는 형제들이 아니라 보다 약한 이들, 즉 문제들을 가지고 있는 이들이다. 가령 어떤 형제가 교회에 관해 이견(異見)을 갖고 있고 소극적으로 말한다 하자. 교회에 관해 소극적으로 말하는 이들은 언제나 장로들에 대해 소극적으로 말할 그 무엇을 갖고 있다. 그러한 사람은 자신을 변명하려고 이렇게 말할 것이 틀림없다. 만일 교회가 틀렸다면 그는 옳은 것이다. 그러나 교회가 옳다면 그는 틀린 것이다. 만일 특별히 장로들이 틀렸다면 그가 진실로 정당하다는 것이 입증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견을 달리하는 이 사람들은 형제들이며 주님을 사랑한다. 만일 의견을 달리하는 그러한 형제가 장로들 중 한 명이 아닌 교회 가운데 그를 사랑하고 돌보는 다른 형제와 접촉한다면 얼마나 좋을 것인가! 만일 의견을 달리하는 어떤 형제가 몇몇 다른 형제들과 접촉을 갖는다면, 마침내 그는 교회로 돌아와서 교회를 인해 주를 찬양할 것이다. 
   만일 당신이 달란트를 사용해서 이런 식으로 다른 이들을 돌본다면 당신은 달란트만 증가시킬 뿐 아니라 자기 자신이 삼층천에 있게 될 것이고 빨리 성장하여 변화될 것이다. 당신은 생각의 영 안에서 새롭게 될 것이고, 우리 가운데는 온 우주에 놀라운 몸의 간증이 있게 될 것이다. 우주는 우리가 종교적인 무리가 아니라 살아 있는 몸임을 보게 될 것이다. 이를 위해 우리 모두는 우리의 달란트, 곧 주님의 소유를 사용해야 한다. 그 결과는 번성일 것이다. 우리가 성도들과 교회들을 더 많이 돌볼수록 더 풍성하게 된다는 것을 나는 간증할 수 있다. 
   “그에게서 그 한 달란트를 빼앗아, 열 달란트를 가진 사람에게 주어라.”(28절). 달란트를 빼앗는다는 것은 장차 올 왕국 안에서 게으른 믿는 이들로부터 주님의 은사를 빼앗는 것을 상징한다. 열 달란트 가진 자에게 그 달란트를 주는 것은 신실한 믿는 이들의 은사가 증가될 것임을 상징한다. 
   “있는 사람마다 더 받아 풍족하게 될 것이지만, 없는 사람은 가지고 있는 것마저도 빼앗길 것이다.”(29절). 교회 시대에 이윤을 남기는 모든 자에게는 장차 올 왕국 시대에 더 많은 은사가 주어질 것이지만, 교회시대에 이윤을 남기지 않은 자는 장차 올 왕국 시대에 그가 가진 것조차도 빼앗길 것이다. 
   “그 쓸모없는 노예를 바깥 어둠 속으로 내던져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될 것이다.”(30절). 24장 51절에 있는 것과 같은 이 말씀은 25장 14절부터 30절까지가 주님의 일을 위해 신실한 것에 관한 말씀인 24장 45절부터 51절까지에 대한 완결임을 보여 준다. 마태복음 24장 45절부터 51절까지는 노예가 주님의 위임을 성취하는 데 신실하지 않음을 다루었지만, 노예가 주님의 달란트를 사용하는 데 신실하지 못함을 다루기 위해서는 25장 14절부터 30절까지가 여전히 필요하다. 
   24장과 25장 모두에서 우리는 상과 벌의 문제를 본다. 24장 47절에 따르면, 신실하고 지혜 있는 노예에게 주는 상은 주께서 그에게 그분의 모든 소유를 맡기시는 것이다. 자기 동료 노예들을 때리고 술 친구들과 먹고 마셨던 악한 노예는 끊어 내어지고 외식하는 자들의 받는 벌에 처해질 것인데, 그곳에서 슬피 울며 이를 갈 것이다(24:49-51). 25장에서 다섯 달란트 받은 자와 두 달란트 받은 자는 많은 것을 받게 됨으로써, 또한 주인의 즐거움 안으로 들어감으로써 상을 받게 될 것이다. 그런데 한 달란트 받은 게으른 종은 바깥 어두운 데로 내어쫓김으로써 벌을 받게 된다. 많은 그리스도인 교사들이, 바깥 어두운 데로 내어 쫓기는 것을 거짓 신자들의 영원한 멸망을 나타내는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정확한 이해가 아님을 그 문맥이 입증하고 있다. 이것은 거짓 신자들에 대한 벌이 아니라 신실하지 못한 진짜 신자들이 받는 벌이다. 그것은 영원한 멸망을 언급하는 것이 아니라 장차 올 왕국 시대 동안의 벌을 언급하는 것이다. 
   ‘슬피 울며 이를 갊’이란 말은 마태복음에서 여섯 차례 쓰인다. 그것은 거짓 신자들(13:42)과 악한 이교도(13:50)의 멸망에 관해서 두 차례 쓰였다. 13장 42절은 풀무 불 속에 던져질 가라지 곧 거짓 신자들에 관한 것이다. 풀무 불은 바깥 어두운 데가 아니라 불 못이다. 마태복음 13장 50절은 악한 이방인들, 곧 25장에 있는 염소들에 해당되는 부패한 물고기에 관한 것이다. 그들도 역시 풀무불 속에 던져질 것이다. 이렇게 해서 영원한 불 속에서 멸망하는 자들은 슬피 울며 이를 갈 것이다. 
   “왕국의 아들들은 바깥 어둠 속에 던져져,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될 것입니다.”(마 8:12). 왕국의 아들들은 틀림없이 구원받은 자들이기 때문에, 그들은 풀무불 속으로 던져지지 않을 것이다. 그보다 그들은 바깥 어두운 데로 넣어질 것이다. 나는 풀무불 속에 어두움이 있다고는 믿지 않는다. 멸망하는 자들과 패배한 믿는 이들이 다 울며 이를 갈겠지만, 패배한 믿는 이들은 불 못으로 던져지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임재의 영광스런 영역 외부에 있는 바깥 어두운 데로 내어쫓길 것이다. 
   “그러자 왕이 종들에게 말하였습니다. ‘그의 손발을 묶어 바깥 어둠 속으로 내던져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될 것이다.’”(마 22:13). 이것은 혼인 예복을 입지 않았던 자에 관해 언급하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믿지 않는 자가 아닌 구원받은 자를 언급하는 것이다. 이 구원받은 자는 불 못이 아닌 바깥 어두움 속으로 던져질 것이다. 
   이런 문구(文句)는 24장 51절과 25장 30절에서 두 번 더 쓰이고 있다. 24장 51절에 따르면 악한 노예는 주님의 임재로부터 차단되고 외식하는 자들의 받는 벌에 처해질 것인데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 것이다. 그와 쌍을 이루는 구절인 25장 30절은 게으른 노예가 바깥 어두운 데로 내어 쫓겨나고 거기서 울며 이를 갈 것이라고 말한다. 이 모든 구절들을 읽어봄으로써 우리는 거짓 신자들인 가라지와 악한 이방인들이 풀무불 곧 불 못 속으로 던져져서 그곳에서 슬피 울며 이를 갈 것임을 볼 수 있다. 그러나 8장에 있는 왕국의 아들들, 22장에 있는 혼인 예복을 입지 않은 자들, 24장과 25장에 있는 신실하지 못한 노예들 등과 같은 패배한 믿는 이들은 바깥 어두운 데로 내어 쫓길 것이다. 그곳 즉 바깥 어두운 데에서 그들은 슬피 울며 이를 가는 고통을 겪을 것이다. 이것은 영원한 멸망이 아니라 경륜적인 징계를 언급하는 것이다. 구원에 추가하여, 장차 올 왕국 시대 중에 받게 될 상과 벌의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다. 만일 우리가 주님께 신실하다면, 우리는 다음 시대에 상을 받게 될 것이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그분께 신실하지 않다면 벌을 받게 될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 안에서 매우 분명한 것이다.(마태복음 라이프 스타디 메시지 66)

기도의 부담, 성도들 소식

■ 기도의 부담
1. 만 명의 다음세대 제사장들을 얻도록
   (1) 다음세대들이 단계별로 그룹 짓도록
2. 2019년 부산교회 봉사 목표를 위하여
   (1) 2020년까지 1,000명의 인수 목표를 위하여
   (2) 2019년 150명, 2020년 150명
   (3) 구역별 목표 1년 25명, 소그룹별 목표 1년 3명

■ 성도들 소식
1. #2 - 침례 
심채린 자매가 6/2(주일), 침례 받았습니다.

알리는 말씀, 금주의 추구

■ 부산교회 청년직장인 연합집회 안내
▷ 일시 및 장소 : 6/15(토) 오후 6시 남구학생센터

■ 한국 복음서원 안내
▷ 2019년 국제 현충일 특별 집회 양식 신청 안내
한글 - 6,000원 / 영어 ? 9,000원 / 미니스트리 다이제스트 - 9,000원 / 집회 녹취 음성 SD카드(한글, 영어) - 각 12,000원
※ 각 구역 도서봉사자들께서는 6/17(월)까지 한국복음서원으로 신청하시기 바랍니다.

■ 제 1기 단기훈련 졸업식 안내
▷ 일시 : 6/15(토) 오후 2시
▷ 장소 : 성경진리사역원 중강당
※ 참석을 원하시는 분들은 6/10(월) 오후 2시까지 집사실로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 2019년 여름 훈련 실시간집회 안내
▷ 일시 : 7/3(수) 오후 4시부터 등록 ~ 7/7(주일) 오후 2:10
▷ 장소 : 성경진리사역원
▷ 내용 : 2019년 여름 훈련집회 메시지(민수기 결정 연구2)
▷ 대상 : 장로, 동역자, 전시간자, 봉사자들과 갈망 있는 모든 성도들
▷ 비용 : 숙박 211,500원 / 출퇴근 89,500원(부분참석 신청 불가)
※ 참석을 원하시는 분들은 6/21(금)까지 입금 후 집사실로 전화해 주시기 바랍니다. 취소 시, 신청금은 환불되지 않으니 신중히 고려하시기 바랍니다.(부산은행 278-13-000436-7, 부산교회)

■ 2019년 여름 훈련 비디오 훈련집회 안내
▷ 제목 : 민수기 결정 연구2
▷ 경비 : 1인당 22,000원 (기부금, 개요 및 소책자, 경비 포함)
※ 비디오 훈련은 7/8(월)부터 시작 가능하며, 각 구역별 상황에 따라 실시하시기 바랍니다.
※ 각 구역 도서 봉사자들께서는 7/1(월)까지 취합하시어 한국복음서원으로 신청하시기 바랍니다.
※ 미니스트리, 미니스트리 다이제스트, SD카드(한/영)는 별도로 신청하시기 바랍니다.

■ 금주의 추구
1. 구약 성경 읽기 : 대상 1:1 ~ 대상 11장
2. RSG(신약 회복역) : 행 22:22 ~ 롬 1:7
3. 라이프-스타디 : 사도행전 M5 ~ M6
4. 금주의 소그룹 추구 진도(신약 회복역) : 요 8


추천 스크랩 전체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