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양 - 11(2019.6.16)
교회 주보
부산교회집사실 2019-06-14 , 조회 (187) , 추천 (0) , 스크랩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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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교회 기도집회 추구

목양 - 11

선한 목자와 큰 목자와 목자장으로서 일하심

   주님은 그분의 양떼를 목양해서 교회를 건축하는 목자로서 일하고 계신다(21:15-17, 10:16). 목자인 주님은 세 면이 있는데, 그분은 선한 목자이시고(10:11) 큰 목자이시며(히 13:20) 목자장이시다(벧전 5:4). 목양하는 것은 개인적인 것이 아니고 단체적인 것이다. 단체는 교회이며 교회는 건축이다. 요한복음 21장과 베드로전서에서 우리는 목양이 교회 건축을 위한 것임을 볼 수 있다. 

그분을 향한 제자들의 사랑을 자극함

   요한복음 21장 15절에서 주 예수님은 시몬 베드로에게 “요한의 아들 시몬이여, 이 사람들보다 그대가 나를 더 사랑하십니까?”라고 말씀하셨다. 여기에서 주님은 그분을 향한 베드로의 사랑을 되찾아주고 계셨다. 베드로는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졌었지만 그는 자신의 힘, 즉 천연적인 힘을 너무 의지했다. 주님을 위한 그의 사랑은 귀한 것이지만 그의 천연적인 힘은 거절되어야 하며 처리되어야 했다. 주님은 베드로의 천연적인 힘과 자신을 의지함이 처리될 수 있도록 주님의 얼굴 앞에서 주님을 세 번 부인하는 철저한 실패를 허락하셨다(18:17, 25, 27). 더 나아가서 베드로는 주님의 부르심으로부터 뒤로 물러가는 일을 선동했다. 주님을 향한 사랑 안에 있는 베드로의 천연적인 의지 또한 이 실패로 인하여 처리 받아야 했었다. 베드로가 다소 실망할 수도 있었으므로 주님은 그분을 향한 베드로의 사랑을 되찾아 주심으로 그분의 교회를 목양하도록 권하고 순교를 준비하게 하시며 자신의 천연적인 힘으로 주님을 따르지 않게 하시려고 오셨다. 
   21장 15절부터 17절에서 주님이 베드로에게 말씀하실 때, 주님은 그의 거듭난 이름이며 거듭난 사람의 새로운 이름인 ‘베드로’라고 부르지 않으셨다. 주님은 그를 ‘시몬’이라고 부르셨다. ‘시몬’은 그의 옛 이름이며 천연적인 사람을 나타낸다. 베드로가 아직 천연적인 사람이었기 때문에 주님은 그에게 “요한의 아들 시몬이여, 이 사람들보다 그대가 나를 더 사랑하십니까?”라고 물으셨다. 주님께서 처음부터 이것을 물어보신 이유는 베드로가 주님을 배반하기 전날 밤 담대히 주님께 말하기를, 다른 모든 제자가 다 주님을 버릴지라도 그는 주님을 버리지 않겠다고 했기 때문이다(마 26:33). 베드로는 죽기까지 주님을 따르겠다고 말했었다(요 13:37, 마 26:35). 이렇게 말함으로써 베드로는 자신을 다른 제자들과 다르게 만들었다. 그렇다. 그는 다른 제자들과 달랐지만 강함에서 다른 게 아니라 약함에서였다. 주님이 “이 사람들보다 그대가 나를 더 사랑하십니까?”라고 물으셨을 때, 주님은 베드로가 어떤 사람이었는가를 상기시키고 계셨다. 그는 자신을 의지하여 자랑하는 사람이었다. 
   주님을 향한 베드로의 사랑은 귀하지만 그의 천연적인 힘은 처리되어야 했다. 베드로의 힘은 두 가지에 의해 처리되었는데, 첫째는 주님을 부인함이고 둘째는 주님의 부르심으로부터 뒤로 물러가는 일을 선동함이다. 베드로는 주님을 세 번 부인함으로써 첫 번째 시험에서 실패했고 고기 잡으러 감으로써 두 번째 시험에서 실패했다. 제자들이 고기를 잡으러 간 이유는 먹을 것이 없기 때문이었다. 아브라함이 가나안에 살 때도 역시 같은 문제로 시험받았고 굶주림 때문에 그는 애굽으로 내려갔다. 같은 원칙으로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은 바다에 고기 잡으러 감으로써 먹을 것이 부족함의 시험을 받았다. 베드로는 자신이 강하고 모든 시험, 심지어 죽음이라도 견딜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죽기까지 주님을 따르겠다고 말했었다. 그러므로 주님은 두 번 시험하셨고 베드로는 두 번 다 실패했다. 
 주님은 어떻게 베드로의 천연적인 힘을 처리하셨는가? 주님의 손이 베드로에게서 잠시 동안 떠남으로써였다. 요한복음 10장 28절에서 주님은 아무도 믿는 이들을 그분의 손에서 빼앗을 수 없다고 말씀하셨다. 베드로가 주님의 면전에서 세 번 부인함으로써 주님을 배반했다는 것은 주님의 손이 잠시 동안 베드로를 떠났다는 것을 뜻한다.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다. “베드로야, 너는 자신을 너무 의지한다. 내가 내 손에 너를 붙잡음으로 네가 서 있다는 것을 너는 모른다. 만일 내가 너를 붙잡지 않으면 너는 설 수 없다. 이제 내 손을 잠시 거둘테니까 설 수 있나 보아라.” 그리고서 주님은 약간 뒤로 물러서셨고 베드로는 넘어졌다. 당신이 설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지 말라. 아니다. 보이지 않는 손이 항상 우리를 붙잡고 계신다. 나는 많은 성도들이 수년 동안 심지어 지금도 나를 위해 기도한다는 사실에 감사드린다. 나는 영 안에서 주님과의 교통 중에, 많은 사랑스런 이들이 나를 위해 기도하는 것에 대해 깊은 느낌과 감사가 있다. 나는 스스로 설 수 없다. 나 스스로 사역할 수 없다. 나는 사역의 능력의 근원을 안다. 나는 내가 설 수 있는 능력의 근원이 내 안에 있지 않고 그분 안에 있음을 안다. 우리는 모두 이것을 깨달아야 한다. 베드로는 너무 강하고 자신을 너무 의지하기 때문에 주님은 그분의 손을 잠시 동안 거두어야 했다. 그 결과 베드로는 넘어져서 주님을 세 번 부인했다. 더욱이 베드로는 일상생활의 시험에서도 설 수 없었고 바다로 물러가는 것을 주도했다. 그 당시 주님의 공급이 없었기 때문에 베드로는 아마 그렇게 할 만한 이유가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뒤로 물러감으로써 드러났다. 주님은 그분의 손을 잠시 거두셨고 베드로는 완전히 드러났다. 이것이 주님의 처리하심이다. 
   요한복음 21장에서 베드로는 겸손했고 매우 낮았다. 의심할 바 없이 그는 매우 실망했다. 그러므로 주님은 그를 회복시키고 강하게 하고 되찾기 위해서 오셨다. 주님께서 다른 모든 제자들 앞에서 베드로에게 “이 사람들보다 그대가 나를 더 사랑하십니까?”라고 물으신 것은 매우 의미 깊다.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다. “시몬아, 네가 며칠 전 다른 모든 제자들 앞에서 그들이 다 주님을 버릴지라도 너는 나를 죽기까지 따르겠다고 말한 것을 잊었느냐? 네가 그렇게 말했었지. 이제 시몬아, 나는 네가 이것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는가를 묻는다.” 만일 내가 베드로였다면 어떤 말을 할 면목이 없었을 것이다. 베드로는 단순히 “주님, 그렇습니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라고 대답했다(15절). 베드로는 매우 당황한 상태였기 때문에 분명한 말로 주님께 대답할 수 없었다. 그는 “주여, 당신을 사랑합니다.” 혹은 “주여, 당신을 사랑하지 않습니다.”라고 말하지 않았다. 만일 당신이 베드로라면 어떻게 대답하겠는가? 당신은 “주여, 그렇습니다. 이 사람들보다 당신을 더 사랑합니다.”라고 대답하겠는가? 또는 “주여, 죄송하지만 저는 당신을 사랑하지 않습니다.”라고 대답하겠는가? 또는 “주여, 제가 장담한 대로 이루지 못해서 죄송합니다.”라고 하겠는가? 베드로는 자신을 의지함을 잃었으며, 다만 “주님, 그렇습니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라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즉 베드로는 이렇게 말한 것 같다. “내가 당신을 사랑하는지 안 하는지 모릅니다. 주여, 당신이 아십니다. 만일 내가 당신을 사랑한다고 말해도 아무 의미가 없는 줄 압니다. 이전에 내가 당신을 사랑한다고 말했으나 실패했습니다. 사실 당신께서는 내가 실패하고 세 번 부인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으며 또한 그렇게 이뤄졌습니다. 이제 주여, 당신께 달려 있습니다. 당신이 아시지 저는 모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시험을 거친 파쇄된 사람을 본다. 
   16절과 17절에서 우리는 주님께서 두 번 더 “요한의 아들 시몬이여 그대가 나를 사랑하십니까?”라고 물으신 것을 본다. 주님께서 세 번째 이것을 물으셨을 때 베드로는 깊이 슬퍼하였다. 그는 두 가지 이유로 슬퍼하였다. 첫째는 주님께서 이 질문을 세 번 하셨기 때문이다. 만일 내가 당신에게 똑같은 질문을 세 번 한다면 당신 또한 매우 걱정스러울 것이다. 베드로가 슬퍼한 두 번째 이유는 주님께서 이 질문을 세 번하심으로써 베드로가 세 번 부인한 것을 상기시키고 계셨기 때문이다. 베드로가 주님을 부인했을 때 그는 불을 쬐고 있었다(18:25). 요한복음 21장에도 역시 불이 있다. 불을 피워서 베드로를 상기시켜 주는 주님의 행동은 매우 의미 깊다. 주님은 마치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다. “베드로야, 저 불을 기억하느냐? 네가 불 쬐면서 나를 부인한 것을 기억하느냐? 너는 불 쬐면서 나를 부인했지만 나는 불 쬐면서 너를 공급한다.” 그러므로 주님은 베드로가 불 쬐면서 행했던 것을 기억나게 하셨고 그가 어떤 사람이었으며 어디 있었는가를 기억나게 하셨다. 베드로는 이 공과를 충분히 배웠다. 신약 전체에서 베드로에 대한 가장 좋은 그림은 요한복음 21장에 있다. 나는 21장에 있는 베드로 형제님을 매우 좋아한다. 여기에서 그는 부드럽고 온유하고 파쇄됐으며, 주님에 의해 시험을 거치고 파쇄되는 공과를 진정으로 배운 사람이다. 

어린 양들을 먹이고 양을 목양하라고 그들을 권하심

 주님을 향한 베드로의 사랑을 되찾아 주신 후에 주 예수님은 “내 어린 양들을 먹이십시오.”, “내 양들을 목양하십시오.”, “내 양들을 먹이십시오.”라고 권하셨다. 요한복음의 앞 스무 장은 우리로 생명을 갖게 하는 아들을 믿는 일을 강조한다(3:15). 그러나 이 장에서는 믿는 문제가 아니라 사랑하는 문제이다. 15장에서 열매 맺는 것은 안에 있는 생명의 풍성의 흘러나옴이다. 여기에서 어린 양들을 먹이는 것은 안에 있는 생명의 풍성으로 양육하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을 먹이기 위해서 우리는 주님의 거룩한 생명의 풍성을 누려야 한다. 이를 위해 주님을 사랑함이 필요하다. 주님을 믿는 것은 주님을 영접하는 것이고 주님을 사랑하는 것은 주님을 누리는 것이다. 주님은 우리에게 생명으로 오셨고 생명 공급으로 오셨다. 우리는 그분 안에서 믿음이 필요하고 그분을 향하여는 사랑이 필요하다. 요한복음에 의하면 주님께 참여하기 위해 두 가지가 필요하다. 
 어린 양들을 먹이는 것은 안에 있는 생명의 풍성으로 양육하는 것이며 양을 목양하는 것은 교회 건축을 위한 것이다. 양을 목양하는 것은 무리(10:14, 16), 즉 교회를 위한 것이다(행 20:28). 그러므로 그것은 하나님의 건축과 관계 있다(마 16:18). 후에 베드로는 그의 첫 번째 서신에서 순수한 말씀의 젖을 먹음으로 자라는 것은 하나님의 집의 건축을 위한 것이라고 말했으며(벧전 2:2-5), 장로들에게 하나님의 양 무리를 목양하라고 권함으로써 이 사실을 나타냈다(벧전 5:1-4). 양육함으로 자라는 것은 건축을 위한 것이다. 주님은 아직도 그분의 제자들과 함께 이런 방법으로 일하고 계신다. 오늘날 주님은 우리와 함께 어린 양들을 먹이고 양을 목양함으로써 교회의 건축을 위하고 계신다. 
 요한복음 10장과 베드로전서 2장과 5장의 세 장에서 우리는 어린 양들을 먹임과 양을 목양하는 것이 교회의 건축을 위한 것임을 보아야 한다. 요한복음 10장에 의하면, 주님은 그분의 양 무리가 거룩한 생명을 얻을 수 있도록 자신의 혼 생명을 내려놓으셨으며 한 무리가 되게 하셨다. 그분의 모든 양들이 한 무리가 되는 것은 진실로 건축이다. 베드로전서 2장에서 베드로는 갓난아이들인 우리가 자라서 영적인 집으로 건축되도록 순수한 말씀의 젖을 먹어야 한다고 말한다. 마지막으로 베드로전서 5장에서 장로들 중 하나인 베드로는 장로들에게 양들을 먹이고 목양함으로 보살피라고 권한다. 양 무리를 먹이는 것은 목양하는 것과 다르다. 21장 15절에서 주님은 “내 어린 양들을 먹이십시오.”라고 하셨고, 21장 16절에서는 “내 양들을 목양하십시오.”라고 하셨으며, 21장 17절에서는 “내 양들을 먹이십시오.”라고 하셨다. 목양(shepherd)은 양을 보살피는 것이고 먹인다는 것은 양에게 음식을 공급하는 것이다. 오늘날 주님을 섬기면서 우리는 그분의 양을 보살필 뿐 아니라 그들을 영적인 음식으로 먹여야 한다. 단순히 형제 자매들을 좋아하고 보살피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우리는 그들을 또한 먹여야 한다. 15절에서 주님은 “내 어린 양들을 먹이십시오.”라고 하셨고, 17절에서는 “내 양들을 목양하십시오.”라고 하셨다. 이것을 통해 우리는 어린 신자에게나 좀 더 자란 신자에게나 다 먹이는 것이 필요함을 본다. 만일 주님께서 우리에게 그분의 양 무리에 대한 부담을 위임하셨다면 우리는 그들을 먹이고 돌보는 두 가지를 반드시 이행해야 한다. 

그분을 따르는 제자들과 함께 걸어가심

죽기까지 그분을 따르라고 그들을 권함

   21장 18절부터 23절까지에서 우리는 주 예수께서 그분을 따르는 제자들과 함께 걸어가심을 본다. 주님을 위한 베드로의 사랑을 되찾아 주시고, 어린 양을 먹이고 양을 목양하라고 베드로를 권하신 후 주님은 베드로의 순교를 예언하심으로써 죽기까지 주님을 따르라고 제자들을 권하셨다. 18절에서 주님은 베드로에게 “내가 진실로 진실로 그대에게 말합니다. 그대가 젊었을 때에는 스스로 허리띠를 동여매고 그대가 원하는 곳을 다녔으나, 그대가 늙어서는 그대의 팔을 벌릴 것이고, 다른 사람이 그대에게 띠를 동여매어 그대가 원하지 않는 곳으로 데려갈 것입니다”라고 말씀하셨다. 베드로에게 이렇게 말씀하심으로써 주님은 “베드로가 어떤 죽음으로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할 것인지”를 나타내셨다. 후에 베드로후서 1장 14절에서 베드로는 이것을 언급했다. 이 장에서 주님은 베드로가 죽기까지 그분을 따르도록 준비하고 계셨으나 베드로의 어떠함이나 베드로의 뜻을 따라 하지 않으셨다.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다. “베드로야, 너는 네 말을 지키지 않으나 나는 내 말을 지키겠다. 네가 나를 위해 심지어 죽겠다고 말했으나 네 말을 지키지 않았다. 어느 날 너는 나를 위해 죽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이다. 네가 젊어서는 자유였다. 그러나 네가 늙는 날이 올 것이다. 그러면 사람이 너를 잡아서 묶고 네가 가기를 원치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갈 것이다.” 이 말씀을 들은 후 베드로는 자신이 주님을 위해 순교할 것임을 깨달았다. 그 당시의 베드로는 ‘예’ 또는 ‘아니요’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베드로의 순교를 나타내신 후 주님은 베드로에게 “나를 따라오십시오.”라고 말씀하셨다. 우리 모두는 내주하는 분이신 주님을 따라야 한다. 우리가 따르는 분이신 ‘나’는 우리 안에 계신다. 18절에 나타난 대로 우리는 자신의 뜻에 의해서가 아니라 주님의 인도에 의해 주님을 따라야 한다. 우리가 심지어 죽기까지 주님을 따르는 것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 위한 것이다(19절). 더 나아가서 우리는 다른 것들을 상관하지 말고 주님을 따라야 한다.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나를 따라오십시오.”라고 말씀하신 후 베드로는 요한에게 돌이켜서 예수님께 “주님,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습니까?”라고 말했다(21절). 여기에 대해 주님은 “내가 올 때까지 그를 남아 있게 하고자 한들, 그것이 그대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라고 대답하셨다(22절). 주님은, 요한에게 일어나는 일은 베드로가 상관할 바가 아니며 베드로는 주님을 따라야 한다고 말씀하고 계셨다. 
   이 장은 우리가 구원받고 주님으로부터 위임을 받은 후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주님을 사랑해야 하며,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끝까지 주님을 따라야 함을 우리에게 보여 주는 그림이다. 주님을 이와 같이 따름으로써 우리는 그분의 어린 양들을 먹이며 그분의 양을 목양하는 그분의 목적을 성취해야 한다.(요한복음 라이프 스타디 메시지 50)

기도의 부담, 성도들 소식, 금주의 추구

■ 기도의 부담
1. 새 길을 실행하여 새로운 부흥에 이르도록
   (1) 모든 이들이 사역의 말씀을 추구하고 조성하도록
2. 2019년 부산교회 봉사 목표를 위하여
   (1) 2020년까지 1,000명의 인수 목표를 위하여
   (2) 2019년 150명, 2020년 150명
   (3) 구역별 목표 1년 25명, 소그룹별 목표 1년 3명

■ 성도들 소식
1. #5 
(1) 이사(전출) - 여근식 형제(김수진 자매) 가정이 5/30(목),진주로 이사했습니다.
(2) 결혼 - 김갑희 자매님의 삼녀 박이숙 자매와 전제욱 군의 결혼식이 6/22(토) 오후 4시, 뮤지엄웨딩홀 1층 평화홀(서울 용산구 이태원로 29)에서 있습니다.

■ 금주의 추구
1. 구약 성경 읽기 : 대상 12:1 ~ 대상 29장
2. RSG(신약 회복역) : 롬 1:8 ~ 롬 6장
3. 라이프-스타디 : 사도행전 M7 ~ M8
4. 금주의 소그룹 추구 진도(신약 회복역) : 요 9

알리는 말씀

■ 한국 복음서원 안내
▷ 민수기 개관(하) 출시 및 예약 안내
- 예약가 : 8,500원(정가 11,000원)
※ 신청을 원하시는 분들은 각 구역 도서봉사자들에게 7/16(화)까지 신청하시기 바랍니다.

■ 2019년 영남권역 어린이 온전하게 하는 훈련 신청 및 예비집회 안내
1. 어린이 온전하게 하는 훈련
▷ 일시 : 7/26(금) 17:00 ~ 28(주일) 13:30
▷ 장소 : 마달피삼육청소년수련원(충남 금산군 제원면 용화리 74)
▷ 주제 : 신성한 꿈을 가진 합당한 사람 요셉
▷ 대상 : 어린이(유치부 포함, 유아동부 가능) 및 학부모, 봉사자, 청지기(학생 조교)
▷ 회비 : 어린이, 학부모, 봉사자 ? 80,000원 / 4세 이하 동반 자녀 ? 무료
▷ 신청 마감 : 6/22(토), 윤정숙 자매님(010-4332-9661) 
▷ 계좌 번호 : 국민은행 945201-01-359397 윤정숙
※ 각 구역 어린이 봉사자들은 취합하시어 6/22(토)까지 윤정숙 자매님에게 입금 및 신청하시기 바랍니다. 차량 안배 문제로 신청일자를 꼭 지켜주시기 바랍니다.
2. 어린이 온전하게 하는 훈련을 위한 봉사자, 학부모 및 청지기 예비집회 
▷ 일시 : 6/29(토) 14:00 ~ 17:30
▷ 장소 : 부산교회 교육관(청사포)
▷ 대상 : 훈련에서 동역하는 봉사자와 청지기, 학부모, 어린이 봉사자
※ 청지기들은 6/29(토) 예비집회에 참석하여 ‘청지기 훈련’을 받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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