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양 - 15(2019.7.14)
교회 주보
부산교회집사실 2019-07-12 , 조회 (243) , 추천 (0) , 스크랩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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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교회 기도집회 추구

목양 - 15

합당한 열매 맺음을 위한 
그리스도인의 행함을 통제하는 원칙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이 허용되지만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이 아님

   나가서 사람들을 접촉하는 것에 대한 실지적인 지침을 얻으려면, 우리는 합당한 기초를 놓을 필요가 있다. 고린도전서 6장 12절은“모든 것이 나에게 허용되지만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이 아니요”라고 말한다. 그리스도 안에는 어떤 속박도 없고, 우리는 그분 안에 있기 때문에 모든 것이 우리에게 허용된다. 많은 젊은이들은 어떤 규제도 받지 않고 자유를 누리고 싶어 할 것이다. 그러나 이 구절은“모든 것이 나에게 허용되지만”이라는 말로 끝나지 않는다. 계속해서“모든 것이 유익한 것이 아니요”란 말이 이어진다. 한 면으로 믿는 이들에게는 모든 것이 허용된다. 그러나 다른 한 면으로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이 아니다. 우리는 허용되지만 유익하지 않은 어떤 일을 할 이유가 없다. 그렇게 하면 우리의 그릇이 손상될 것이다.
   오늘날 많은 젊은이들이 담배에 맛을 들였다. 이것은 그들의 그릇을 손상시킨다. 의학적 연구에 따르면 담배는 사람들의 수명을 단축시킬 수 있다. 나는 우리 가운데 젊은이들에게 모든 것이 그들에게 허용되지만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은 아니라고 말해 주고 싶다. 그들이 담배를 피우고자 한다면 말릴 사람은 없다. 그러나 그들이 자신의 그릇을 손상시킨다면, 이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어졌음에도(창 1:26-27)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것이다. 그들은 자신이 성도요 거룩한 사람이면 하나님의 거처로서 자신의 그릇을 보존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을 필요가 있다(고전 6:19).
   건강하게 장수하려면 우리는 세 가지 기본적인 것을 주의함으로 하나님의 자연의 법칙에 따라 합당하게 사는 것을 배워야 한다. 곧 합당하게 먹고 합당하게 마시며 충분히 자는 것이다. 하나님은 사람을 창조하신 후에 사람에게 친절하고 겸손하며 인내하고 아내를 사랑하라는 말씀을 주시지 않았다. 그 밖에 다른 일을 하라고 하신 것도 아니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오직 한 가지, 곧 먹는 것에 대해서만 명령하셨다(창 2:16-17). 사람이 합당하게 먹는다면 살 것이고, 잘못 먹는다면 죽을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후에 주신 유일한 계명이었다.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이신 그리스도를 따라 지어졌다(고후 4:4, 골 1:15). 따라서 우리는 우리의 그릇을 손상시켜서는 안 된다. 흡연을 비롯한 많은 행위들이 조금도 유익이 없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조금이라도 수입이 생기면, 자신의 그릇을 손상시키는 이런 것들을 구입하느라 돈을 낭비한다. 이것은 원수가 우리를 속인 결과이다. 우리는 성도로 부름을 받았다. ‘성도’라는 말은 거룩한 사람을 말한다. 우리 성도들, 곧 하나님의 거룩한 사람들은 손상을 주는 그런 것들과 아무런 관련을 맺어서는 안 된다. 그 대신 우리는 모든 것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해야 한다(고전 10:31). 어떤 사람들은 이 말을 꾸지람이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이것은 꾸지람이 아니다. 오히려 이것은 우리 가운데 많은 사람들을 자신의 그릇을 손상시키고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데서 풀려나게 해 주는 복음이다. 
   우리에게는 지성과 분별력만이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에게는 우리의 영과 연합되신 성령도 계신다(롬 8:16). 따라서 우리는 우리의 그릇을 손상시키는 것을 포함하여 우리에게 유익하지 않은 어떤 일에 참여하는 것은, 주님께 손실이며 수치라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그리스도인의 행함은 어떤 원칙들의 통제를 받는다. 성경에는 흡연 같은 것들에 대한 규정이 없지만, 우리의 일상생활을 위한 통제하는 원칙들이 있다. 바울은 “모든 것이 나에게 허용되지만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이 아니요”라고 말했다. 이것이 우리 그리스도인의 행함을 통제하는 첫 번째 원칙이다. 우리가 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유익이 있어야 한다. 어떤 것이 유익하지 않다면 우리는 그것을 해서는 안 된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가장 지혜로운 사람들이다. 우리는 무엇을 하든 거기에 유익이 있어야 한다는 원칙에 지배 받아야 한다. 

어떤 것에도 얽매이지 않음

   두 번째 통제하는 원칙은 고린도전서 6장 12절의 두 번째 부분에 나와 있다.“모든 것이 나에게 허용되지만 나는 어떤 것에도 얽매이지 않을 것입니다.”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자유롭다. 따라서 우리는 어떤 것에도 얽매여서는 안 된다. 어떤 것에 얽매인다는 것은 그것에 노예가 되는 것이다. 믿는 이들에게는 모든 것이 허가되고 허락되며 허용되지만, 우리는 어떤 것의 지배와 통제를 받거나(노예가 되거나) 얽매여서는 안 된다. 

모든 것을 건축을 위하여 함

   세 번째 원칙은 우리가 다른 이들을 건축하는 관점을 가지고 모든 것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고린도전서 14장 26절은 “모든 것을 건축을 위하여 하십시오.”라고 말한다. 모든 것이 우리에게 허용되지만, 모든 것이 다른 사람들을 건축하는 것은 아니다. 종종 우리는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많은 것들을 건축하기보다는 허물어뜨린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 우리에게 율법과 외적인 규정이 전혀 없을지라도, 우리는 건축의 원칙을 고려해야 한다. 어떤 일을 할 때 우리는 그것이 건축하는 것인지 아니면 허물어뜨리는 것인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새 사람이 특별 집회에 왔다가 메시지를 듣고 나서 건물을 나서는데, 형제나 자매가 담배 피우는 것을 본다면 이 새 사람은 어떻게 생각하겠는가? 이 새 사람이 집회에서 두 시간 반을 보내며 건축되는 것이 있었겠지만 어떤 형제나 자매가 담배 피우는 2분 가량의 시간 때문에 모든 것이 허물어뜨려질 수 있다. 이것은 낙담스러운 일이다. 우리는 모두 주님의 회복을 위한다. 그러나 우리는 전투를 치르고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우리가 밤낮 계속해서 다른 사람들을 건축하기 위해 애쓰더라도 모든 것을 무너뜨리는 데는 단 몇 분도 걸리지 않는다. 우리는 성도들이고 하나님의 자녀들이며 그리스도의 존귀한 지체들이다. 우리는 각 지방에 있는 교회들을 위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사람들을 건축하는지 아니면 무너뜨리는지를 관심하지 않을 정도가 되도록 원수에게 속지 않기 위해 깨어서 경계해야 한다. 
   젊은 자매들에게 옷차림에 대해 특별히 한 마디 하고 싶다. 나는 자매들을 꾸짖으려는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정직하게 말하고자 한다. 성도들만이 아니라 세상 사람들도 어떤 종류의 옷은 도가 지나치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우리 가운데 어떤 사람들은 그런 옷을 입고 다닌다. 우리는 이런 옷을 디자인하는 사람들과 이런 옷을 입는 많은 사람들이, 사람들을 부도덕에 빠지게 할 요량으로 그렇게 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그리스도인 자매들이 단정하지 못한 옷을 입을 이유가 어디에 있는가? 그렇게 한다면 그것은 수치스런 일이다. 우리가 그런 옷을 입는다면 이것은 우리가 이 세상의 악한 조류를 따른다는 것을 드러낸다. 우리는 모든 것이 우리에게 허용되지만, 모든 것이 탁월하고 유익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가 주님의 회복을 위한다면, 또 주님에 대해 진지하다면, 우리의 옷 입는 방식을 다시 살펴보고 옷 입는 이 문제를 주님께 가져가야 한다. 
   우리는 영이신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영에 내주하신다고 선언할지 모른다. 그러나 이런 선언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내주하시는 것에는 결과가 있다는 것을 보아야 한다. 우리 안에 내주하시는 그리스도께 주의를 기울일 때 우리는 그분께서 시시각각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의 모든 활동에 대해 우리를 점검하신다는 것을 깨달을 것이다. 우리가 주님으로 말미암아 산다고 선언하면서도 하루가 지나고, 주가 거듭되며 달이 거듭되어도, 우리에게 아무런 변화가 없다면 문제가 있는 것이다. 자매들의 옷차림에 대해 교회가 일련의 규정을 세운다면 그것은 교회로서는 실패이다. 자매들은 이 문제를 주님께 가져가야 한다. 우리는 앞에서, 우리가 어떤 열매를 맺는가는 우리가 어떤 사람이냐에 달려 있다고 지적한 바 있다. 우리가 단정하지 못한 옷차림을 한다면 어떤 종류의 열매를 맺겠는가? 우리가 단정하지 못한 옷차림으로 사람들을 접촉한다면 그들은 부정적인 인상을 받아 우리에 대해 의문을 품을 것이다. 심지어 믿지 않는 사람들도 우리에게 뭔가 문제가 있다는 것을 그들의 양심 안에서 알아차린다.
   우리는 악한 일들을 행하는 사람들이 그것들을 가치 있게 여긴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여기 학생이 네 명 있는데 그 중 세 명은 느슨하고 나머지 한 명은 합당한 사람이라고 하자. 서로 친구 관계인 느슨한 이 세 명의 학생들은 합당한 학생을 비난하며 경멸할지 모른다. 그러나 어떤 일들이 발생할 때 이 세 명의 느슨한 학생들은 서로에게 기대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각자가 그들 모두가 엉성하고 신뢰할 만하지 못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러나 느슨한 이 세 학생들 중 한 명이 문제가 생기면, 과거에 자신과 친구들이 경멸하고 비난했던 느슨하지 않은 그 학생에게 가서 도움을 구할 것이다. 
   전신 회사에 근무하는 한 형제가 주님을 사랑했다. 그런데 그의 동료들 중 많은 이들이 그를 반대하고 조롱했다. 한 번은 그의 동료들 중 한 명이 얼마간의 돈을 받아 다른 누군가에게 맡겨 안전하게 보관하고자 했다. 이 동료는 철저하게 고려해 본 후에 경멸받던 그 형제에게 가서 정중한 태도로 요청했다.“아무개 씨, 부탁 하나 들어주시겠어요? 최근에 고모에게서 얼마만큼의 돈을 받았는데 그 돈을 좀 맡아주시겠습니까?”이 일이 있기 전에 돈을 받았던 이 사람은 다른 사람들과 함께 이 형제를 비난하곤 했는데, 이제 필요가 생기자 믿을 만한 사람이 누구인지를 깨달은 것이다. 이것은 양심의 문제이다. 
   모든 사람마다 양심이 있다. 원수가 아무리 사람을 손상시키려고 애쓰더라도 사람의 영에 있는 양심은 여전히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보존될 수 있다. 나는 성경 연구를 통해 하나님께서 사람 안에 사탄이 넘어설 수 없는 경계를 설정해 놓으셨다는 것을 발견했다. 사탄은 하나님께서 지으신 사람을 오직 몸과 혼의 범위 안에서만 손상시킬 수 있다. 그는 하나님께서 설정해 놓으신 경계를 넘어설 수 없다. 하나님은 그분 자신을 위하여 사람의 영을 보존해 두셨다. 따라서 사람이 아무리 타락할지라도 그의 양심은 여전히 자신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말할 수 있다. 한 은행 강도가, 법에 비추어 보고 자신이 곰곰이 따져 보아도 자신에게 잘못된 것이 없다고 법정에서 주장할지라도, 그의 깊은 속에서는 양심이 그에게“네가 틀렸다.”라고 말할 것이다. 믿는 이의 양심은 믿지 않는 이의 양심보다 훨씬 더 예민하다. 우리는 많은 것들에 대해서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고 옛 생활방식에 질려 있지만, 깊은 속에서 우리의 양심은 하나님에 따라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를 안다. 복음 전파는 주로 사람의 양심을 만지는 것이다. 우리의 언행이 사람들의 양심을 만지지 못한다면 그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 복음을 전할 때 우리는 사람들의 양심을 만지는 방식으로 살고 말해야 한다. 
   우리가 주님께 대해 진지하고 합당한 열매를 맺기를 갈망한다면 합당한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 이것을 위해 우리에게는 예수님의 인성이 필요하다. 사무실에서 일하는 한 젊은 자매가 오늘날의 최신 유행을 따라 옷차림을 한다고 하자. 그녀 자신을 지방에 있는 교회를 위하는 그리스도인이라고 자처할지라도, 그 사무실 사람들 중 많은 이들은 거기에 대해 의문을 품을 것이다. 그들은 최신의 유행을 따른 옷차림을 하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이 믿기 어렵다고 여길 것이다. 그들은 지방에 있는 교회라는 곳이 대체 어떤 종류의‘교회’인지 부정적으로 생각하기 시작할지도 모른다. 결국 그들은 그 자매가 주님에 대해 무엇을 말하든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 자매가 온당한 방식으로 처신하고 옷을 입는다면, 사무실에 갈 때 지방에 있는 교회를 위하는 그리스도인이라는 딱지를 자기에게 붙일 필요가 없을 것이다. 설령 어느 누구도 그녀에게 말을 걸지 않거나 그녀가 누구인지 모를지라도 그들은 서로“이 여자가 누구입니까? 그녀는 구식 스타일도 아니고 신식 스타일도 아닙니다. 그녀는 어떤 종류의 사람입니까? 그녀는 아주 색다릅니다. 그러나 다른 한 편으로 그녀는 아주 평범한 사람으로 보입니다.”그녀의 동료 모두가 그녀가 비밀스럽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런 자매는 일반적인 방식으로 동료들을 기도로 짊어질 뿐만 아니라, 또한 구체적인 한두 사람의 이름을 주님 앞에 말씀드리며 기도할 것이다. 한 동안 기도한 후 이 자매가 이름을 거명하며 기도한 동료들 중 한 명의 삶에 문제가 발생할 것이다. 얼마간 고려한 후 문제가 생긴 그 동료가 찾아 와서 이 자매와 자신의 문제에 대해 상의할 것이다. 이런 접촉은 자매에게 주님께서 그녀의 기도에 응답하시어 동료에게 일을 시작하셨다는 표시가 될 것이다. 그러한 때에 자매가 동료에게 무엇을 말하든 동료는 받아들일 것이다. 왜냐하면 자매의 말에 무게가 있고 동료는 그 자매를 좋게 평가하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우리가 복음을 갖고 다른 이들에게 다가가서 계속 남아 있는 열매를 맺는 합당한 길이다. 
   각 지방에 있는 교회들은 생명 안에 있고 생명으로 말미암은 주님의 움직임이다. 따라서 우리가 어디를 가든, 무엇을 하든, 무엇을 말하든 그것은 무게를 지녀야 한다. 그러면 다른 사람들은 우리의 인격을 높이 평가할 것이다. 그러한 생활은 계속 남아 있는 열매를 산출할 것이다. 생명으로 얻어진 인수가 운동으로 얻어진 인수에 비해 적을지라도 우리의 열매는 오랫동안 계속 남을 것이다. 우리는 장기적으로 기독교의 어떤 운동도 각 지방에 있는 교회들 안에 있는 하나님의 움직임을 능가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각 지방에 있는 교회들은 이리저리 흐르는 물결 밑에 잠겨 있는 바위와 같을 것이다. 결국 모든 물결이 말라 없어지더라도 바위는 여전히 그곳에 남아 있을 것이다.

계속 남아 있는 열매를 맺기 위해 
복음을 가지고 사람들을 접촉함

명단을 만듦

   나의 관찰과 체험에 의하면, 복음을 가지고 사람들을 접촉하여 계속 남아 있는 열매를 맺기 위한 최상의 길은 여러분 자신을 규제하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규제받는 사람들만이 최상의 열매를 맺을 수 있다. 우리는 친척과 이웃과 급우와 친구와 동료를 포함해서 우리가 아는 모든 사람들의 명단을 만들어 복음을 위한 준비를 시작해야 한다. 아는 사람들이 많지 않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아는 사람들의 명단을 만들어보면 그 수가 상당함을 발견할 것이다. 

명단의 이름을 위해 기도함

   명단을 만든 후 우리는 명단의 모든 이름을 두고 기도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이렇게 기도할 수 있다.“주님, 이 사람들 모두를 어떻게 도울 수 있을까요? 그들에게 편지를 써야 합니까? 전단지나 소책자를 보내야 합니까? 집에 초대하여 식사를 해야 합니까? 그들의 집을 방문해야 합니까? 아니면 전화를 해야 합니까?”우리는 명단의 이름들을 두고 기도하며 접촉 여부, 접촉 시기, 접촉 방법에 대해 주님께서 어떻게 생각하시는지를 여쭈어야 한다. 

사람들을 접촉할 때 주님의 인도를 받기 위해
특별한 방식으로 두세 사람을 고려함

   명단 상의 사람들을 위해 기도할 때 당장에 돌봐야 할 두세 사람이 누군지 주님의 인도를 받아 고려할 수 있도록 기도할 필요가 있다. 그러고 나서 이들 두세 사람을 위해 많이 기도하면서 그들을 접촉하기 위하여 주님의 인도를 따라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함으로써 그들을 돌봐야 한다. 우리는 주님께서 돌보라고 인도하시는 이들에 대해 빨리 무언가를 이루어 내기를 기대해서는 안 된다. 반년에서 일 년 사이에 그들이 구원받아 주님께 얻어진다면 이것은 너무 늦은 것이 아닐 것이다. 처음 두세 사람이 주님께 이끌려지면 우리는 다시 주님을 앙망하여 다른 두세 사람에 집중하여 같은 방식으로 그들에게 수고해야 한다. 

다른 사람들과 함께 수고함

   때로 복음 대상자들을 돌보는 일에서 우리는 다른 형제자매들의 도움이 필요할 수 있다. 우리는 한 명 또는 두 명의 다른 형제자매들과 함께 복음 대상자를 방문하거나 복음 대상자와 몇몇 형제자매들을 함께 집에 초대하여 식사할 수 있다. 이런 식으로 우리는 성도들과 함께 협력하여 열매를 맺을 것이고, 우리의 열매 맺음은 훨씬 더 쉬워질 것이다. 

아는 사람들을 먼저 관심함

   어떤 사람들은 우리에게 공원과 거리와 해변에 가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파해야 하느냐고 물을 것이다. 열매 맺는 일에서, 우리가 모르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선포하는 것은 좋기는 하지만 부차적인 일이다. 복음을 전할 때 우선적인 것은 아는 사람들을 관심하는 것이다. 우리에게 시간이 더 있거나 교회가 단체적으로 복음을 전파하는 시간을 갖기로 결정하면, 우리는 교회를 따라 이런 종류의 전파를 수행해야 한다. 그러나 정상적이고 규칙적이며 보통의 상황에서는 열매를 맺는 최상의 길은 아는 사람들을 관심하고 그들에게 수고하는 것이다. 이것은 명단을 만들어 기도하면서 주님의 인도를 따라 돌보아야 할 두세 사람을 선정하고 성도들과 함께 그들을 방문하거나 초대하여 만나는 방식이다. 나는 학생인 젊은 형제자매들에게 한동안 이런 식의 열매 맺음을 실행해 보라고 격려하고 싶다. 나는 그들이 대충하거나 느슨하지 않다면 긍정적인 결과가 있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우리가 묘사한 열매 맺음의 방식에 따라 일하는 학생은 분명 몇 명의 열매를 맺을 것이다. 한 사람을 얻은 후에 그는 즉시 이 사람을 도와 자신과 함께 수고하게 할 수 있다. 이 둘은 급우들에 대해 함께 일할 수 있다. 결국 그들은 점심시간이나 방과 후 시간에 소규모 모임을 가질 수 있다. 이런 모임에서 그들은 반시간 정도를 들여 새로운 이들과 교통할 수 있다. 학생들이 이런 식의 열매 맺음의 길을 취한다면, 한 학기에 두셋, 혹은 그 이상의 사람을 주님께 이끌기가 쉬울 것이다.(위트리스 리 전집 1971년 3권 201-212쪽)

기도의 부담, 성도들 소식

■ 기도의 부담
1. 교회들이 새 길을 실행하여 새로운 부흥에 이르도록
   (2) 사역의 말씀으로 부흥되고 살아있고 불타도록
2. 2019년 부산교회 봉사 목표를 위하여
   (1) 2020년까지 1,000명의 인수 목표를 위하여
   (2) 2019년 150명, 2020년 150명
   (3) 구역별 목표 1년 25명, 소그룹별 목표 1년 3명

■ 성도들 소식
1. #3 - 침례
도상협 형제님이 7/11(목), 침례 받았습니다.
2. #4 - 침례 
전덕화 자매님, 천혜경 자매님이 7/7(주일), 침례 받았습니다.

알리는 말씀, 금주의 추구

■ 한국 복음서원 안내
▷ 진리 교육 과정 1단계 제 3권 <진리> 편 출간 안내
- 가격 : 4,500원
※ 신청을 원하시는 분들은 각 구역 도서봉사자들에게 신청하시기 바랍니다.

■ 금주의 추구
1. 구약 성경 읽기 : 느 9:1 ~ 욥 3장
2. RSG(신약 회복역) : 고전 6:1 ~ 고전 11:16
3. 라이프-스타디 : 사도행전 M15 ~ M16
4. 금주의 소그룹 추구 진도(신약 회복역) : 요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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