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의 체험과 성장과 사역 - 2(2019.9.8)
교회 주보
부산교회집사실 2019-09-06 , 조회 (175) , 추천 (0) , 스크랩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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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교회 기도집회 추구 

생명의 체험과 성장과 사역 - 2
  
타고난 조성의 정의
 
   여기에 쓰인 ‘조성(Constitution)’이란 “사람의 육신과 정신적인 능력의 총체”를 말한다. 성경에는 이러한 타고난 조성과 같은 용어가 없으며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도 거의 언급되지 않지만 실제 우리의 체험에는 그러한 것이 있다. 이것은 혼적인 사람의 두드러진 특징이요 옛사람에서 살아 나온 현저한 표현이다. 만일 우리가 십자가의 체험을 추구해 나가려 한다면 이 방면의 처리를 무시해서는 안 된다.
   옛사람이 살아 나올 때 그것은 성질과 육체와 자아와 타고난 조성과 같은 다양한 표현을 보여 준다. 어떤 사람들은 쉽사리 화를 내는데, 이는 그들이 성급하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들은 너무나 수다스러워 항상 자신들의 의견을 제시하는데, 이는 그들의 자아가 너무 강하기 때문이다. 또 어떤 이들은 성질을 내지도 않고 수다스럽지도 않지만 그들이 책임을 진 일에 있어서 아주 유능하다. 이들도 타고난 조성이 매우 강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타고난 조성은 인간의 능력, 소질, 지혜, 영리함, 계획, 기능 등과 관련된 옛사람이 살아 표현된 것이다. 
   자아에 대해서 말할 때 우리는 스스로 의롭다 하며 수다스러운 욥을 예로 들 수 있다. 그러나 타고난 조성에 대해 말할 때는 창세기에 나오는 야곱이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야곱에 대한 기록이 그의 교활함을 제시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사실 야곱의 전 생애에 있어서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그의 타고난 노력과 계획이다. 묘안을 짜는 자들은 모두가 교활함을 면할 수 없다. 야곱도 마찬가지이다. 그의 교활함은 피상적인 표현에 불과하며 그의 타고난 조성이 그 안에 숨어 있는 특징이다. 야곱이 장성하게 되기 전의 모든 역사는 그의 타고난 조성을 나타내 준다. 그는 유능하고 죄가 많고 묘안으로 충만하며 대단한 소질과 기교를 지닌 자였다. 그는 실로 타고난 조성이 상당히 강한 자였다. 야곱의 타고난 조성은 그가 출생하기 전에도 표현되었다. 야곱이 태중에 있었을 때, 그는 에서의 발꿈치를 잡고 먼저 나오려고 다투었다. 그가 자랐을 때 그는 또다시 영리하게 묘안을 꾸며 유리한 위치를 차지했다. 그는 술책을 써서 에서를 속이고 장자의 명분을 차지했으며 또다시 묘안을 세워 자기 아버지에게서 장자의 축복을 받았다. 그가 집을 떠나 광야로 갈 때 하나님께서 벧엘에서 그에게 나타나 축복하시겠다고 약속하자 그는 또다시 자신의 기교를 이용하여 하나님과 흥정했다. 그는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시사 내가 가는 이 길에서 나를 지키시고 먹을 양식과 입을 옷을 주사 나로 평안히 아비 집으로 돌아가게 하시오면 여호와께서 나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요 내가 기둥으로 세운 이 돌이 하나님의 전이 될 것이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모든 것에서 십분 일을 내가 반드시 하나님께 드리겠나이다”라고 말했다(창 28:20-22). 하나님은 어떠한 요구도 하시지 않고서 야곱을 축복하시겠다고 약속하셨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조건을 내걸고 하나님과 흥정했다. 단지 이 사실만 보아도 그가 얼마나 영리하고 교묘한지를 알 수 있다. 
   그가 외삼촌인 라반과 함께 있을 때에도 그는 여전히 자신의 타고난 능력으로 묘안과 계획을 꾸몄다. 오래지 않아서 그는 많은 목축과 종과 낙타와 나귀를 얻어 매우 번성하게 되었다. 얍복 강가에서 하나님께서 야곱의 환도뼈 큰 힘줄을 치시자 그 후로 그는 절름발이가 되었다. 그러나 강을 건넌 직후에도 그는 여전히 자기 형 에서를 만나기 위해서 자신의 묘안과 계교를 꾸몄다. 그는 미리 세운 계획에 따라서 사람과 양 떼와 소 떼와 낙타를 두 무리로 나누어 자기의 사랑하는 아내와 사랑하는 아들 요셉은 뒤에 두어 공격을 받을 경우에 피할 수 있도록 했다. 야곱이 그렇게 묘안을 세운 이유는 자신의 타고난 조성이 너무나 강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야곱의 전 생애를 통하여 하나님은 특별히 그의 타고난 조성을 처리하셨다. 그를 에워싼 괴로움과 고통과 어려움은 그의 타고난 조성을 부수기 위한 것이었다. 그의 일생에 있어서 위기는 하나님께서 브니엘에서 그의 환도뼈의 큰 힘줄에 손을 대실 때였다. 마침내 창세기 35장에서 하나님은, 야곱에게 벧엘로 가서, 형의 낯을 피하여 도망할 때 그에게 나타나셨던 하나님 앞에 제단을 쌓으라고 하셨다. 거기에서부터 야곱은 그의 모든 계획을 버렸으며, 그의 타고난 사람도 하나님 앞에 엎드리게 되었다. 후에 자기 아들 르우벤이 자기 침소를 더럽혔을 때에도 그는 그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어떤 행동을 취하지 않았다. 그의 아들들이 자기를 속이고 자기의 사랑하는 요셉을 이집트에 팔아 버렸을 때에도 그는 그것을 감당했다. 나중에 그는 기근을 만나자 자기 아들들이 자기를 위하여 양식을 사오도록 구걸하러 보냈다. 그의 모든 능력과 묘안과 영리함과 소질은 점점 사라지고 끝나게 되었다. 그의 전체가 완전히 변화되었다. 야곱의 타고난 조성이 철저히 부서지자 하나님 안에서 그의 생명은 장성하고 충만한 단계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그는 더 이상 야곱이 아니라 이스라엘이었다. 그는 더 이상 바꿔치기 한 자(‘야곱’의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의 왕자(‘이스라엘’의 의미)였다. 그 결과 그는 바로를 축복했고, 죽기 전에 자기 자녀들에게 풍성한 축복을 내릴 수 있었다. 
   따라서 우리가 야곱의 생애에 대한 기록을 볼 때 창세기 35장이 커다란 전환점임을 알 수 있다. 35장에 이르기 전에는 야곱이 표현한 모든 것은 옛사람에게서 살아 표현된 자신의 타고난 능력과 수단과 영리함과 소질이었다. 35장 이후로 그는 더 이상 타고난 능력과 기지와 영리함과 소질을 사용하지 않았는데 이는 그의 타고난 조성이 철저히 처리를 받아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서 사는 자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영적으로 말해서 그는 이때 완전히 타고난 것에서 구출되어 부활 안으로 들어갔다. 그의 온 생애 가운데서 하나님은 이렇게 그를 다루사 고통을 당하게 하심으로 그의 타고난 조성은 부서지고 부활한 사람이 되게 하셨다. 천연적인 사람은 하나님 앞에 쓸모가 없으며 오직 부활한 사람만이 하나님 앞에 쓸모 있다. 이러므로 타고난 조성은 부서지고 처리되어야 한다. 
   자아 처리와 타고난 조성 처리는 영적인 체험에서 매우 중요하다. 그것들은 생활과 봉사에 관련되어 있다. 자아를 처리하고 타고난 조성을 처리하는 것은 하나님께 봉사하기 위한 준비이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마음의 갈망을 따라 즐거이 봉사하고자 한다면 자아 처리와 타고난 조성 처리는 필수적이다. 엄격히 말해서 자아와 타고난 조성을 처리하지 않은 자들은 결코 하나님을 섬기지 못한다. 이 문제는 모세의 일생을 볼 때 분명히 예증되어 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쓰시기 전에 모세에게 하신 일은 그의 자아와 타고난 조성을 처리하는 일이었다. 모세가 마흔 살이 되었을 때 그의 타고난 조성은 매우 강했다. “모세는 이집트 사람들의 모든 지혜를 배워, 말과 일에서 능력이 있었습니다.”(행 7:22). 라고 성경은 말한다. 그래서 그는 자기 자신의 힘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출하고자 했다. 어느 날 그는 한 이집트인이 자기 동포 중의 한 사람인 히브리인을 치는 것을 보고 그 이집트인을 쳐 죽여 모래에 감춰 버렸다. 그 일은 자신의 타고난 능력과 계획으로 된 일이었다. 그러나 그의 이 타고난 조성은 하나님께서 쓰실 수 없었다. 하나님은 자신의 타고난 능력으로 하나님을 위해 일하고자 하는 자를 쓰실 수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환경을 일으키시어 그를 광야로 도망가게 하여 사십 년 동안이나 고통을 당하게 하고 그를 처리하여 그의 타고난 조성을 끝내셨다. 모세가 시편 90편을 썼을 때, 그는 “우리의 년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10절)고 했다. 모세의 계산에 따르면 연약하고 죽어가는 시기인 팔십이 되어서야 하나님은 그를 불러 사용하셨다. 더욱이 하나님은 그를 부르실 때 그에게 소멸되지 않는 떨기나무 불꽃의 이상을 보여 주셨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나타내 보이신 것은, 모세가 출생함으로써 얻은 연료인 타고난 조성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하는 능력이 그를 통해 나타나게 하는 것이었다. 
   우리가 모세의 일생을 살펴보면 하나님께서 그를 부르신 이후로 그는 결단코 자신의 힘과 능력을 써서 하나님을 위하여 일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가 이집트에 가서 바로를 본 때부터 느보 산에서 죽을 때까지(40년간), 그는 비록 능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것은 더 이상 타고난 것이 아니라 파쇄되어 부활을 통과한 것이었다. 더욱이 타고난 조성 처리와 자아 처리는 밀접한 관계가 있다. 능력 있고 소질이 있는 자들은 언제나 많은 의견을 가지고 있다. 만일 어떤 사람에게 의견이나 관점이 없다면, 그는 재능이 없는 사람임에 틀림없다. 모세는 그의 타고난 능력이 처리되었기 때문에 사십 년 동안 주님을 섬기면서도 자신의 의견이나 관점을 가지지 않았다. 그가 하나님께 기도할지라도 오직 하나님의 뜻을 구하였으며, 다만 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자신의 의견이나 관점을 결코 말하지 않았다. 오직 한 가지 예외는 그가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노하여 거칠게 말하며 바위를 두 번 친 때였으며, 이외에는 사십 년 동안 한 번도 실수를 하지 않았다. 그는 하나님을 자신의 힘이나 자신의 의견으로도 섬기지 않았다. 그는 진실로 자아와 타고난 조성에서 완전히 벗어난 자였다. 그러므로 그는 구약 시대에서 하나님께 가장 크게 쓰임받은 자가 되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자손들을 인도하여 자신을 섬기도록 광야로 보내실 때도 이 원칙은 동일했다. 이스라엘 자손들이 광야로 인도받게 되자 거기서 하나님은 그들이 그분을 섬기도록 하셨으며 그들에게 배우게 하신 첫 번째 공과는 그들 자신의 힘과 의견을 내려놓아야 함을 보게 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그들 자신의 힘으로나 의견으로는 하나님을 섬길 수 없었다. 그들이 하나님을 섬긴 수단은 장막과 제물이었다. 장막이 예표하는 것은 하나님의 봉사에 속하는 모든 방법과 활동이 산에서 보이신 식양과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서 이루어져야지 그들 자신의 의견대로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제물이 예표하는 바는 그들의 봉사가 그들 자신의 능력과 재능으로 말미암지 않고 제물로 드려져야 하나님께 열납되고 하나님을 만족하게 해 드릴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시내 산에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자손들이 그분 자신을 섬기도록 하셨을 때 한편으로 그들에게 장막을 주시어 그들 자신의 의견을 내려놓아야 할 필요를 보여 주셨으며, 또 한편으로 하나님은 그들에게 제물을 주시어 타고난 조성을 떠나야 할 필요를 보여 주셨다. 장막을 통한 봉사에 자기 의견이 포함되지 않으며, 제물로 인한 봉사에 타고난 조성이 포함되지 않는다. 장막과 제물이 그리스도를 예표하기 때문에 우리는 그리스도를 우리의 지혜와 길과 힘과 능력으로 취해야 하며, 우리의 자기 의견과 타고난 조성을 그분으로 대치시켜야 한다. 이로써 우리는 하나님을 섬길 수 있게 된다. 
   자아를 부인하고 타고난 조성이 하나님 앞에서 파쇄된 사람은 약하고 감소하게 되며 그리스도께서 그 안에서 증가하시게 된다. 이 일은 그 사람의 영적인 생활과 봉사에서 큰 전환점이며 하나님께서 보시기에도 매우 중대한 문제이다. 수세대에 걸쳐서 하나님의 목적은 그분의 성도들을 인도하여 타고난 조성이 파쇄되는 단계를 거치게 하시어 그리스도의 충만에 이르게 하시는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것을 성경에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은 많은 인물들의 생활 속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이 모세에게서 그러하며 아브라함과 야곱에게서도 그러하다. 아브라함의 생애 가운데 이스마엘을 낳은 전후 기간과 야곱이 밧단 아람에서 체류한 이십 년은 모세가 광야에서 지낸 사십 년과 같은데, 이 모든 것은 타고난 조성 안에서 살아온 사람의 상태를 묘사하는 것이다. 아브라함은 할례를 받았고, 야곱은 환도뼈 큰 힘줄을 맞아 위골되었으며, 모세는 팔십에 이르러서야 그의 타고난 조성이 파쇄되었다. 이러한 파쇄됨을 통과한 뒤 하나님 앞에서 그들의 상태는 크게 변화되었다. 
   하나님은 구약의 성도들을 이와 같이 인도하셨을 뿐 아니라 이 문제를 예표하시기 위해서 성경에 나오는 많은 사물과 상황도 사용하셨다. 예를 들어, 광야에서 이스라엘 자손들이 장막을 세우고 여행을 한 일은 모두가 그리스도인의 영적 체험 가운데 타고난 조성이 파쇄되는 것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음을 예표하고 있다. 먼저 바깥뜰과 성소와 지성소로 나눠진 장막의 배열을 생각해 보자. 이 세 부분은 우리의 영적 체험의 세 단계를 묘사하고 있다. 바깥뜰에는 제단과 물두멍이 있다. 제단은 십자가의 구속을 예표하는데, 이는 우리가 구원을 체험하도록 죄 문제를 해결하는 데 강조점을 두고 있다. 물두멍은 성령의 정결케 하심을 예표하는데, 이것은 우리가 새롭게 될 수 있도록 세상적인 더러움을 씻는 데 강조점을 두고 있다. 그러므로 바깥뜰은 우리의 영적 생명의 체험의 처음 두 단계에 부합되는 구원의 초기 단계를 상징한다. 
   성소에는 진설병과 금등대와 금향단이 있다. 진설병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만족과 누림을 위한 생명 공급이심을 예표한다. 금등대는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빛으로서 우리를 비추심을 예표한다. 금향단은 하나님 앞에서 우리를 받아 우리가 평강과 기쁨을 가질 수 있도록 하는 그리스도를 예표한다. 이러한 것들은 우리의 생명이신 그리스도를 체험하는 여러 상태들이다. 이러한 항목들은 예표에 있어서 더 깊은 체험을 포함하는 영적 생활의 세 번째 단계에 가깝다. 그러나 이러한 체험 속에는 여전히 혼적인 느낌의 요소가 있다. 그러므로 이 단계에 있는 자들의 영적 상태는 기복이 심하여 매우 안정적이지 못하다. 
   성소 다음에는 지성소이다. 지성소에는 증거판과 만나를 담은 금항아리와 아론의 싹 난 지팡이(히 9:4)가 들어 있는 언약궤가 있다. 증거판은 성소의 금등대에 일치되며, 빛이신 그리스도를 예표한다. 감추인 만나는 성소의 진설병에 일치되며, 생명 공급이신 그리스도를 예표한다. 아론의 싹 난 지팡이는 성소의 금향단에 일치되며,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하나님 앞에서 열납되게 하는 것을 예표한다. 따라서 언약궤 안에 있는 이 세 가지 항목은 성소에 있는 세 가지 항목과 예표하는 본성에서 동일하다. 그러나 상태는 다르다. 성소 안에는 진설병이 전시되어 있고 등대는 빛이 비치고 금향단은 향기를 발하며 이 모든 것이 밖으로 드러나 있다. 그러나 지성소 안에 이 세 가지 항목은 감춰져 있다. 전시된 진설병은 감추인 만나가 되고, 비추는 등대는 감추인 율법이 되며, 향기를 발하는 향단은 감추인 싹 난 지팡이가 된다. 지성소의 상태는 우리 영 안의 상태를 예표한다. 사람이 영으로 돌이킬 때 그는 지성소에 들어가게 된다. 그 사람은 더 이상 혼의 느낌을 따라 살지 않고 사람들 앞에 어떤 것을 드러내지도 않는다. 모든 것이 감춰져 있고 더 이상 표면적이지 않으며 깊은 속에 있다. 이때에 그 사람의 영적 생명은 성숙한 단계에 이르게 된다. 그러므로 지성소 안의 이 상태는 영적 생활에 있어서 네 번째 단계의 체험을 예표한다. 
   우리는 어떻게 바깥뜰의 얕은 체험에서 지성소의 깊은 체험 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가? 우리는 두 관문을 통과해야 한다. 먼저 우리는 성소와 바깥뜰을 분리하는 휘장을 지나야 한다. 성경에 따르면 이 휘장은 그렇게 큰 분리선이 아니며 통과하기가 그리 어렵지 않다. 그다음은 성소에서 지성소로 들어가기 위해 휘장을 통과해야 한다. 그 휘장은 커다란 관문이다. 사람이 지성소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그 휘장이 찢어져야 한다. 그 휘장이 찢어지는 것은 우리가 파쇄되는 것을 예표한다. 따라서 이 예표는 우리 자신이 찢어지고 우리 자아와 타고난 조성이 파쇄되어야 함을 나타내 주고 있으며, 이때에야 자신의 얕은 상태를 떠나 깊은 영 안에 들어가 하나님과 대면하고 교통하며, 하나님의 임재와 하나님 안에 살 수 있다. 따라서 타고난 조성이 파쇄되는 일은 우리의 영적인 진로에 있어서 큰 전환점이다. 
   마찬가지로 가나안에 들어간 이스라엘 자손들의 여정은 역시 그리스도인의 영적인 노정을 예표한다. 가나안은 하늘의 영적인 지성소에 해당되며, 가나안에 있는 자들은 지성소에 사는 자들이다. 그들은 옛 창조가 점차 사라지기까지 사십 년간을 광야에서 방황했다. 요단 강을 건너는 일은 휘장이 찢어지는 것에 부합된다. 이후로 그들의 육체가 제거되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제단에서 출발하여 계속 전진해서 어느 날 휘장이 찢어짐을 체험하고 지성소에 들어가야 한다. 우리는 또한 시내 산에서 여정을 떠나 옛 창조가 처리되는 요단에 이르기까지 전진하여 마침내 가나안 땅에 들어가야 한다. 이스라엘 자손들의 옛 세대는 우리 안에 있는 옛 창조, 즉 우리 육체와 자아와 타고난 조성에 속한 모든 것을 묘사한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자손들의 옛 세대를 거절하신 것은 영적인 의미로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옛 창조에 속한 모든 것을 거절하신다는 것을 예표한다. 여기에서 우리는 하나님 섬기기를 배우기 시작하고, 하나님은 우리가 매일 죽음을 체험할 수 있도록 죽음에 넘기게 하사 우리 안에 옛 창조에 속한 모든 것을 제하신다. 하나님은 긴 기간과 긴 여정을 통해 하나님께 은혜를 입은 ‘야곱들’과 구속함을 받은 ‘이스라엘 자손들’인 우리를 인도하사, 결국에는 육체와 자기 의견과 타고난 조성에 속한 모든 항목들을 하나하나 실제적인 체험 가운데 드러내시고, 이로써 하나하나 죽음에 넘기게 하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때때로 교회 안에서 육체와 의견이 드러남을 볼 때 두려워하거나 괴로워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드러나지 않을 때는 그러한 것들이 숨겨 있지만 일단 그러한 것들이 드러나면 구출되기 때문이다. 
   물론 육체와 자아와 타고난 조성을 처리하는 데에는 많은 시간이 걸린다. 광야에서 이스라엘 자손들은 사십 년 동안 오직 하나님만을 섬겼다. 어떤 이들은 장막을 운반하고, 어떤 이들은 양과 소를 잡고, 어떤 이들은 성소에서 진설병을 진열했다. 구름 기둥이 올라가고 나팔 소리가 들릴 때면 언제나 그들 모두는 진행했다. 그들은 옛것이 완전히 일소될 때까지 사십 년 동안을 이런 식으로 살았다. 이와 같이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인 우리도 대가를 지불하고 세상을 버리고 주님을 추구하며, 하나님의 간증을 나타내고 매일 하나님을 섬기면서 하나님과 함께 나아가야 한다. 그럴 때 다베라에서의 사건(민 11:1-3), 고라와 다단의 반역, 권위에 불복종한 미리암, 게다가 우리 안에 우리가 알지 못하는 수많은 다른 혼합된 상태가 점차 드러나게 된다. 우리가 더 드러날수록 우리는 더욱 깨끗하게 된다. 만일 우리가 이렇게 진행해 나아가 8년이나 10년이 지난 후 요단을 건너 옛 창조를 일소하게 된다면 이것은 주님의 크신 은혜이다. (생명의 체험(하) 84-104쪽)

기도의 부담, 성도들 소식, 금주의 추구

■ 기도의 부담
1. 교회들이 새 길을 실행하여 새로운 부흥에 이르도록
   (4) 교회마다 기도그룹, 활력그룹, 제사장 체계를 세우도록
2. 2019년 부산교회 봉사 목표를 위하여
   (1) 2020년까지 1,000명의 인수 목표를 위하여
   (2) 2019년 150명, 2020년 150명
   (3) 구역별 목표 1년 25명, 소그룹별 목표 1년 3명

■ 성도들 소식
1. #6 - 침례 
신영미 자매님이 9/5(목), 침례 받았습니다.

■ 금주의 추구
1. 구약 성경 읽기 : 잠 10:1 ~ 잠 29장
2. RSG(신약 회복역) : 빌 3:1 ~ 골 3:11
3. 라이프-스타디 : 사도행전 M31 ~ M32
4. 금주의 소그룹 추구 진도(신약 회복역) : 요 21

알리는 말씀

■ 2019년 국제 추수감사절 특별집회 안내
▷ 집회 일시 : 11/28(목) 오후 7:30 ~ 12/1(주일) 오후 12:30
▷ 출국 및 귀국 예정 : 11/27(수) ~ 12/3(화)
▷ 집회 장소 : 미국, 휴스턴
※ 참석을 원하시는 분들은 10/4(금)까지 신청금 300,000원을 입금 후 집사실로 전화해 주시기 바랍니다. 취소 시, 신청금은 환불되지 않으니 신중히 고려하시기 바랍니다. (부산은행 278-13-000436-7, 부산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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