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의 체험과 성장과 사역 - 8(2019.10.20)
교회 주보
부산교회집사실 2019-10-18 , 조회 (263) , 추천 (0) , 스크랩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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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교회 기도집회 추구 

생명의 체험과 성장과 사역 - 8
  
은사의 유익에는 한계가 있음

   우리가 주님을 섬길 때 은사가 가장 좋은 것은 아니다. 섬기는 일에서 은사는 하나님께서 잠시 빌려 쓰시는 것이지 영구적인 것이 아니다. 예를 들어, 한 지방의 형제자매들 대부분이 구원받은 지 겨우 이, 삼 년 된 형제자매들이었고, 몇몇 사람은 구원받은 연수가 비교적 길었지만 영적인 인식에서는 그리 깊지 않았다. 주님께서 그들 모두를 일으키시어 함께 모이도록 인도하셨는데, 집회에서 메시지를 전할 사람이 필요했다. 그래서 갈망이 있는 몇몇 형제들이 주님께 “주님! 당신께서 우리들 가운데 사람을 일으켜 말하게 하소서!”라고 기도했다. 이 기도를 주님께서 들으시기나 하신 것처럼 한 형제가 일어나서 말씀을 전했다. 처음에 말씀을 전할 때는 그럭저럭 나쁘지가 않았다. 두 번째 말씀을 전할 때는 좀 더 모습을 갖추었고, 세 번째로 말씀을 전할 때도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모든 사람은 그 형제의 메시지를 듣고는 기뻐했고, 하나님께서 그 형제를 말씀을 전하는 사람으로 세우셨다고 생각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 교회 가운데에 메시지를 전할 수 있는 한 가지 은사를 일으키신 것이다. 이 형제는 이때부터 성경을 더 많이 읽고 영적인 서적들을 반복하여 읽으며 깊이 묵상하는 것을 배웠다. 그 결과 그 형제가 메시지를 전하기만 하면 많은 사람들이 감동을 받았다. 그는 주님을 사랑하는 것에 대한 말씀과, 처리를 받는 것과 십자가의 길을 가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말씀과,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사시고 우리가 주님 안에 사는 것과 같은 말씀을 모두 전할 수 있었다. 바울이 오늘 그들에게 와서 말씀을 전한다고 할지라도 그 형제보다 더 잘 전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우리는 이 형제가 전한 말씀이 모두 은사였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는 십자가의 파쇄와 주님 안에서 사는 것을 알기는 알았지만, 실은 지식적으로만 알았다. 그 자신에게 십자가의 파쇄가 있는지 또한 실지로 주님 안에 살고 있는지는 여전히 의문이다. 
   아마도 여러분은 이렇게 물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형제가 하지 말아야 할 일을 한 것입니까?” 아니다. 그가 한 일은 전혀 틀리지 않았다. 만약 그 지방에 이 형제마저 없었다면 그들 모두는 집회 때 졸았을 것이다. 그가 그렇게 한 것은 그에게 기능이 있었기 때문이다. 주님께 세움을 받아 봉사를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사람에게는 은사밖에 없다. 그러나 주님을 섬긴 지 오래되었고 또 교회가 세워진 지 오래 되었음에도 교회에게 그리고 주님을 섬기는 사람에게 은사만 있다면 합당치 않고 문제가 될 수 있다. 주님을 섬기는 사람은 반드시 그의 은사가 사역이 되는 데까지 이르러야 교회가 건축될 수 있다. 
   십자가에 의한 파쇄를 예를 들어 말하자면, 이 형제가 비록 십자가의 파쇄에 대해 이미 이, 삼십 차례나 전했을지라도, 이 형제에게 십자가로 파쇄된 생명이 없을 수가 있다. 곧 십자가의 파쇄와 관련된 말씀이 그의 말하는 은사를 통해 전해질 수는 있지만, 십자가로 파쇄된 생명이 이 말씀을 전한 그에게 없을 수가 있다. 이것은 사흘 동안 기도한다고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기도를 통해 은사를 얻을 수는 있지만, 기도만 가지고는 사역으로 조성될 수 없다. 

은사는 사역이 되어야 함

   이 형제가 사역으로 조성되려면 반드시 그가 십자가의 파쇄의 빛을 본 그 날부터 그가 본 빛에 굴복하여 십자가의 파쇄를 받아들여야 한다. 그러한 파쇄 아래 있을 때, 어느 날 그는 십자가로 파쇄된 사람, 곧 십자가의 파쇄하는 생명이 그의 안에 조성된 사람이 된다. 그럴 때 십자가의 파쇄는 그에게 단지 한편의 메시지, 하나의 교리, 하나의 어조가 아니라, 십자가가 그의 조성과 생명, 곧 그의 존재가 되는 것이다.
   교회는 은사도 필요하고 또한 사역도 필요하다. 여러분은 교회가 세워진 지 이 년 만에 사역이 산출되기를 기대하지만, 오 년이나 십 년 심지어 이십 년이 더 필요할 지도 모른다. 만약 어떤 형제가 하나님의 성령과 생명이 그의 존재에 일하시도록 허락해 드린다면, 성령은 십자가의 파쇄가 그 안에 조성되게 하실 수 있다. 그럴 때 어느 날 이 형제가 십자가의 파쇄에 대하여 말할 때 성경을 읽거나 참고 서적을 볼 필요도 없이 그의 존재가 바로 십자가의 파쇄 자체일 것이다. 팔 년이나 십 년 동안 성령께서 그 안에서 일하시고 조성시키셨다면, 십자가의 파쇄는 그의 입에서 나오는 메시지일 뿐만 아니라 바로 그 사람의 존재가 될 것이다.
   고린도전서는 사도가 은사의 문제를 처리하는 것에 대해 말하고, 고린도후서는 무엇을 가리켜 사역이라고 하는지에 대해 말한다. 고린도인들이 은사를 너무 중시했기 때문에, 바울은 그들에게 어떤 은사도 부족하지 않다고 말했고(고전 1:7), 또한 12장과 14장에서 각종 은사에 대해 말했다. 그러나 우리는 은사를 중요시하는 사람은 어리고, 은사를 중요시하는 교회는 무질서하다는 것을 본다. 고린도 교회는 은사의 방면에서 모든 것을 갖추어 부족함이 전혀 없었지만, 고린도 교회는 무질서했고, 음행과 다툼이 있었으며, 분열이 있었을 뿐 아니라 각종 무질서한 일들이 있었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전서에서 은사를 말하지 않고 은사를 처리하는 것에 대해 말한다. 그는 고린도 교회에게 은사만으로는 교회의 필요를 채울 수 없고 교회의 어려움을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래서 그는 “왜냐하면 내가 여러분 가운데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않기로 작정하였기 때문입니다.”(고전 2:2)라고 말한다. 바울은 그들에게 은사는 어려움을 해결할 수 없고, 오직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만이 어려움을 해결하실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은사는 교회의 부분적인 필요는 채울 수 있지만 모든 필요를 채울 수는 없다. 은사는 교회에 도움을 줄 수는 있지만, 교회 안에 어려움이 생겼을 때 어려움을 해결할 수 있는 것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이다. 
   고린도후서에 와서 바울은 은사를 언급하지 않고 십자가에 못 박혀죽으신 그리스도를 살아내는 사도가 어떤 사람인지를 우리에게 보여준다. 바울은 우리에게, 그에게 은사뿐만 아니라 사역도 있었다는 것을 매 장을 통해 보여 준다. 바울은 십자가의 말씀을 전하기만 하지 않고, 매일매일 주님의 죽음이 그에게 일하시게 하고 그에게서 십자가가 나타나게 한 결과로 그의 존재가 사역이 되었다는 것을 전한다. 이때에 이르러서 바울은 사람들에게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가 교리가 아닌 생활이라고 말한다. 교리는 은사이고 생활은 사역이다. 사역은 입으로 전하는 말씀이 아니라 사람이 그 말씀 가운데 사는 것이다. 
   새롭게 일어난 교회에는 당연히 은사만 있고 사역은 없을 수 있다. 사역의 씨앗이 그곳에 뿌려졌지만 성숙되고 풍성한 열매를 맺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뒤에는 사역으로 조성될 것이다. 은사가 있는 사람은 결국 그 사람의 존재 안에 사역이 조성되어야 한다. 무엇을 가리켜 은사라고 하는가? 은사는 주님의 영께서 당신에게 임하여 당신에게 주신 영적인 역량으로서, 이것을 통해 당신은 다른 사람들이 할 수 없는 일을 하게 된다. 무엇을 가리켜 사역이라고 하는가? 사역은 당신이 성령 안에 살고, 당신이 전하는 메시지 안에 살며, 또 당신이 본 빛 안에 살 때, 성령께서 지속적으로 당신 안에 조성하는 일을 하셔서 당신이 전한 말씀이 당신 안에 연합되어 당신의 존재가 그 말씀이 되고 당신 자신이 그 말씀의 사역이 되는 것이다. 은사를 사용하여 메시지를 전하는 것은 상당히 어렵다. 성경도 많이 읽어야 하고 참고 서적도 많이 보아야 하며 심지어 일주일 내내 준비를 해야 한다. 강단에 오르면 또 두려움에 벌벌 떨다가 본론은 잊어버리고 서론과 결론만 말한다. 또 끝난 후에는 사람들을 감동시킬 수 있는 말들을 다 잊어버린 것을 생각하며 매우 후회한다. 이것은 모두 은사를 사용하여 말씀을 전할 때의 이야기이다. 은사가 사역이 된 후에는 당신이 강단에 올라 메시지를 전할 때, 무엇을 전해야 하는지에 대하여 절대로 잊어버리지 않고 어떻게 전하든 한 마디 한 마디가 진리가 된다. 왜냐하면 진리가 당신 안에 살아 있으며 당신도 진리 안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여러분은 은사를 사용하여 진리를 전하는 것이 아니라, 사역으로 진리를 확증하는 것이며 말씀으로 사역 안에서 진리를 말해내는 것이다. 
   아마도 여러분은 복음을 전하는 은사가 사역이 될 수 있는지 물을 것이다. 당연히 될 수 있다. 나는 과거에 어떤 어린 형제가 복음을 전하는 데 뛰어난 은사를 가진 것을 본 적이 있다. 그가 강단에 올라 복음을 전하자 감동을 받지 않은 이가 없었고 탄복하지 않은 이가 없었다. 그러나 강단에서 내려와서는 많은 사람들이 구원을 받지 못하는 것을 보고도 마음에 아무런 느낌이 없었다. 이것이 바로 복음의 은사만 있고 복음의 사역이 없는 것이다. 그는 강단에 서면 복음의 영이 흘러나오고 복음을 전하는 구변도 뛰어났지만, 일단 강단을 내려오면 복음의 영도 없고 복음 자체도 없었다. 이것이 은사만 있는 경우이다. 과거에 나는 서양에서 온 선교사를 본 적이 있는데, 그녀는 푸저우에서 십여 년을 살다가 노년을 상하이에서 보냈다. 당신이 그녀를 보기만 할 때는 그녀가 복음 방면에서 얼마나 은사 있는 사람인지 느낄 수가 없었다. 그러나 일단 그녀를 만나 보면 그녀의 존재 자체가 바로 복음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그녀는 오륙십 년 동안 복음으로 조성되어 그녀의 존재가 복음의 사역이 되었다. 그녀는 달리 복음 메시지를 전할 필요가 없이 복음을 전할 수 있었다. 그녀는 확실히 복음을 전하는 역량이 있었고, 복음지를 나누어 주기만 해도 그녀에게 진실한 복음의 영이 있었기 때문에 감동을 받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복음은 그녀에게 사역이 될 정도로 그녀 안으로 조성되었다. 외국어를 배우는 것을 예로 들면, 나는 유년시절부터 지금까지 줄곧 영어를 공부했지만 구변이 좋지 않아서인지 말할 때 엉망이다. 그렇지만 내가 중국어를 말할 때는 어려움이 전혀 없다. 그렇다면 내가 중국어를 말하는 것은 은사인가 아니면 사역인가? 사역이다. 왜냐하면 내가 생각할 필요 없이 바로 중국어를 말할 수 있는 것은 중국어가 내 안에 조성되어 이미 내 존재가 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영어로 말씀을 전해야 할 때면 나는 정말 나의 모든 지력을 총동원하여 참고서적들을 보며 열심히 준비해야 된다. 이것이 은사이다. 나에게 중국어는 사역이고 영어는 다만 은사이다. 따라서 은사는 여러분이 평상시에 당신 안에 조성된 것이 아니라 임시로 가져다가 사용하는 것에 불과하다. 사역은 평상시의 당신의 존재의 어떠함으로서 당신이 사역이고 사역이 곧 당신인 것이다. 고린도후서 3장 9절은 그 사역에는 영광이 있다고 말한다. 바울은 이어서 18절에서도 “우리 모두는 너울을 벗은 얼굴로 거울처럼 주님의 영광을 바라보고 반사함으로써 그분과 동일한 형상으로 변화되어 영광에서 영광에 이릅니다. 이것은 주 영에게서 비롯됩니다.”라고 말한다. 바울은 너울을 벗은 얼굴로 주님을 바라보고 반사함으로 그분과 동일한 형상으로 변화되어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렀다. 그러므로 바울의 사역은 영광이 있는 사역이다. 
   고린도 후서 4장에서 바울은 또 우리가 질그릇 안에 보배를 담고 있다고 말한다(7절). 우리는 보배를 우리 안에 담은 그날부터 외적으로 평안한 날이 없다는 것을 보아야 한다. 안에는 보배가 있고 밖에는 고난이 있는데 이것은 이 보배를 하루하루 자라게 할 뿐이다. 죽음이 우리에게서 일할 뿐 아니라 주님도 우리 안에서 일하신다. 이것은 말로 전달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생명의 말씀이 바울 안에서 사역이 된 것이다.

은사가 사역이 되지 않으면 교회는 반드시 손실을 입음

   교회 가운데는 은사가 있어야 하지만, 은사가 있는 것은 염려스러운 일이기도 하다. 고린도 교회의 어려움은 은사가 많은데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예를 들어 하나님께서 어떤 교회를 참으로 은혜로 대하셔서 말씀을 전하는 은사가 있는 두 명의 형제를 세워주셨다고 하자. 처음에는 두 사람 모두가 신선하고 주님의 축복도 있어서 많은 성도들이 은혜를 받았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두 사람 사이에 진리 방면에서 관점의 차이가 나타났다. 이를테면 첫 번째 형제가 말씀을 전할 때 주님과 함께 죽으려면 계시가 있어야 하고 보는 것이 필요하다는 말씀을 전했는데,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조리 있고 매우 훌륭했다. 한 주가 지난 뒤에 다른 형제도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 것에 대하여 말씀을 전했다. 그는 보는 것만으로는 소용이 없고 매일매일 성령을 따라 육체의 행실을 죽여야 한다고 말했는데, 그의 말 또한 상당히 일리가 있었다. 다시 한 주가 지나서 첫 번째 형제가 강단에 서서 로마서 6장을 전하면서 사람이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는 것을 보지 못하면 죽을 수 없고, 십자가에 못 박히기 위하여 자기가 자신을 못 박을 수는 없다고 말했다. 많은 이들이 듣고 그가 말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다. 또 한 주가 지나 두 번째 형제가 “골로새서는 분명히 땅에 있는 여러분의 육체의 각 부분을 죽음에 넘기라고 말하는데(3:5), 어째서 십자가에 못 박을 수 없다고 말합니까?”라고 말했다. 결국 이 강단에 욥기의 이야기가 재연되었다. 이런 식으로 이 년이 지나고 나니 형제자매들이 모두 떠나고 말았다. 한 해 전에 은사를 통해 인도된 사람들은 은사 있는 사람들이 전하는 것을 들을수록 길이 없었다. 두 사람은 강단에서 죽음을 전하면서도 아무도 자신이 죽기를 원하지 않았다. 못 박히기를 전하는 것도 좋고 못 박히지 않는 것을 전하는 것도 좋지만, 결국 두 사람 모두 못 박힌 사람이 아니었다. 두 사람 모두 십자가에 대한 말씀을 전했지만 십자가에 못 박히는 결과는 없었다. 십자가에 대한 말씀은 있지만 십자가의 생명이 없었다. 십자가에 대한 말씀은 그들의 입에서 나왔지만, 십자가의 생명은 그들 안에 조성되지 않았고 그들의 사역으로 바뀌지도 않았다.
   여기에서 우리는 은사가 사역이 되는 것이 매우 중요한 문제라는 것을 본다. 많은 형제자매들이 마음으로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을 섬기기 위하여 시간을 드리고, 그들의 장래를 완전히 포기하는 것을 볼 때, 나는 이것이 작은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 나는 한 면으로는 이것을 귀하게 여기고 기쁘게 생각한다. 그러나 또 한 면으로는 내게 염려가 있는데, 그것은 사람들이 주님을 섬기려고 나올 때 은사만 있고 사역이 없다면, 몇 년 후에 대만 전역에 있는 형제자매들에게 다툼이 일어나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이것은 공연히 하는 말이 아니다. 왜냐하면 오늘날에도, 과거의 교회 역사에도 이런 사례가 얼마든지 있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교회 역사에서 형제회가 둘로 나누어진 원인이 전적으로 교리 방면에서 은사 있는 사람들의 충돌 때문이라는 것을 우리는 보았다. 은사 있는 두 사람의 격렬한 충돌이 교회를 나누어지게 했다.
   은사가 필요한 시점은 처음 얼마 동안일 뿐이며 시간이 지난 후에는 유익이 없다. 은사가 사역이 되지 않은 상태에서 수명만 계속해서 연장 된다면 오히려 교회에 해가 된다. 은사가 교회에 해가 되지 않으려면 반드시 사역으로 은사의 생명을 끝내야 한다. 어떤 사람이 말할 수 있고 일할 수 있지만 그것을 살아내지 못한다면, 그 사람이 한 말과 일이 처음에는 교회에 도움을 줄 수 있지만 결국에는 해가 된다. 그 사람이 말하고 일한 후에 그가 말한 것과 일한 것이 생활로 바뀌지 못하고 그 사람 안에 조성되지 못하면, 그 사람이 말하고 일한 것은 모두 교회의 어려움이 된다. 은사가 있는 모든 형제자매는 교회에 은사가 필요하지만 너무 오래 지속되어서는 안 되고 그 수명이 너무 길어져서도 안 된다는 것을 보기 바란다. 은사는 누에와 같이 번데기가 되었다가 다시 나방이 되어야 한다. 은사는 속히 사역이 되어야 한다. 은사가 사역이 되지 않으면 처음에는 교회에 도움이 될지라도 나중에는 교회를 무너뜨린다.
   주님을 섬긴 첫 날부터 현재까지 이십 년 동안 내게는 동역자들이 있었다. 그러나 여러분은 내가 동역자들이 말한 것에 찬성하지 않는 메시지를 전하거나 글을 쓴 것을 본적이 없을 것이다. 여러분이 나에게 “리 형제님, 진리에 대한 형제님의 견해가 이십 년 동안 모든 동역자와 항상 같았습니까?”라고 물을지도 모른다. 나의 대답은 이렇다.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많은 부분에서 우리의 견해가 꼭 같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면 왜 논쟁하지 않았는가? 왜냐하면 우리가 일치하지 않는 부분을 전하려고 할 때마다 매번 내 안에는 나를 가로막는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여러분이 그것을 십자가라고 말해도 좋고, 주님의 처리하심이라고 말해도 좋으며, 성령의 다스림이라고 말해도 좋다. 이것은 내 안의 다툼을 죽이고 변함없이 동역자들과 함께 전진할 수 있게 한다. 그러므로 당신이 맹목적으로 은사를 의지해서 일한다면 그 결과는 매우 위험하다. 여러분은 극단적인 잘못에 빠졌으면서도 여전히 자신이 틀렸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있다. 은사를 사용할 수는 있지만 맹목적으로 그것을 의지하면 안 된다. 은사는 다만 어느 정도까지만 사용할 수 있을 뿐이다. 이후에는 사역으로 그것의 수명을 끝내야 한다.(1964년 10월 <말씀의 사역> 제 160기에서 발췌)

기도의 부담, 성도들 소식, 금주의 추구

■ 기도의 부담
1. 참된 제사장 직분을 회복하도록
   (1) 희생 제물들의 실재이신 그리스도와 연결되도록
2. 2019년 부산교회 봉사 목표를 위하여
   (1) 2020년까지 1,000명의 인수 목표를 위하여
   (2) 2019년 150명, 2020년 150명
   (3) 구역별 목표 1년 25명, 소그룹별 목표 1년 3명
3. 대입 수험생들을 위하여
   1구역 - 이재민, 김가은, 장영주, 박지현, 황수연
   2구역 - 탁준오, 오유경, 김수언, 이채린
   3구역 - 문서원, 김종욱
   6구역 - 노재연, 김준성, 손세민, 남재현, 서혜성

■ 성도들 소식
1. #2 - 결혼 
김재형 형제님(김경순 자매님)의 장남 김도형 형제와 김나은 자매(부천교회)의 결혼식이 10/26(토) 오후 3시, 더리버사이드호텔 7층 콘서트홀(서울 서초구 강남대로 107길 6)에서 있습니다.

■ 금주의 추구
1. 구약 성경 읽기 : 렘 14:1 ~ 렘 29장
2. RSG(신약 회복역) : 히 11:1 ~ 히 13:25
3. 라이프-스타디 : 사도행전 M43 ~ M44
4. 금주의 소그룹 추구 진도(신약 회복역) : 행 6

알리는 말씀

■ 2019년 전국 중고등부 봉사자 학부모 집회 안내
▷ 일시 : 11/2(토) 오후 4시 등록 ~ 11/3(주일) 점심식사
▷ 장소 : 성경진리사역원
▷ 대상 : 중고등부 봉사자와 학부모, 중고등부 봉사에 관심있는 모든 지체들
▷ 회비 : 숙박 50,000원, 출퇴근 10,000원
▷ 계좌번호 : 부산은행 278-13-000436-7 부산교회
※ 각 구역별로 취합하여 10/25(금) 오전 11시까지 상기 계좌로 입금 후, 집사실로 전화해 주시기 바랍니다. 취소 시, 신청금은 환불되지 않습니다.

■ 한국복음서원 안내
1. 한국어 회복역 성경 출간 일정 관련 안내
 2007년 한국어 <회복역 신약성경>이 출간된 이후, 십여 년의 기간을 거체 신?구약 전체가 수록된 한국어 <회복역 성경>을 출간할 수 있도록 인도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드립니다. 한국복음서원에서는 단 한자의 오탈자도 나오지 않도록 주님을 앙망하면서 최선을 다해 마지막 검토 작업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조속히 출간되어 한국어를 사용하는 모든 믿는 이에게 복된 선물이 될 수 있도록, 기도로써 함께 동역해 주시기를 요청 드립니다.
▷ 출시 일정 : 2020년 봄
2. <확증과 비평> 7호 발간 및 신청 안내
▷ 주제 : 하나님의 경륜의 최종적인 완결 - 하늘나라인가 새 예루살렘인가?(2)
▷ 가격 : 7,000원
※ 신청을 원하시는 분들은 각 구역 도서봉사자들에게 신청하시기 바랍니다.
3. <사역의 말씀 다이제스트> 1권 2호(2019년 11월호)신청 안내
▷ 가격 : 9,000원
※ 신청을 원하시는 분들은 각 구역 도서봉사자들에게 10/23(수)까지 신청하시기 바랍니다.

■ 2020학년도 아카시아우드 신입생 모집 요강
▷ 접수 기간 : 10/14(월) ~ 11/1(금) 오후 5시
▷ 대상 연령 : Grade 7 ~ 10 (중 1 ~ 고 1) 
▷ 문의 사항 : 031-283-3412 / 메일 : awisoffice@gmail.com
▷ 지원 자격 : 정상적인 교회생활을 하고 있는 자의 자녀
▷ 원서 교부 및 접수처 : 아카시아우드 행정실(경기도 용인시 기흥구 한보라1로 42-6, 4층), 우편접수 시 마감일 이전 도착 분에 한함
※ 입학서류 및 접수와 관련된 자세한 사항은 아카시아우드 홈페이지 (http://www.acaciawood.or.kr)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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