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의 체험과 성장과 사역 - 24(2020.2.16)
교회 주보
부산교회집사실 2020-02-14 , 조회 (258) , 추천 (0) , 스크랩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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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교회 기도집회 추구 

생명의 체험과 성장과 사역 - 24

아벨 - 하나님을 위해 일하고 삶 -‘양치는 자’

   이제 우리는 새 예루살렘에서 완성되는 씨인 아벨을 보자. 아벨은 하나님을 위해 일하고 살았다. 그는 또한 하나님에 의해 살았다. 매일매일 아벨은 하나님을 위해, 하나님에 의해 살았다. 그는 하나님을 위해‘양치는 자’였다. 우리가 지난 메시지에서 지적한 대로 아벨의 시대에 양은 주로 하나님을 위한 것이었다. 그는 가인처럼 자신을 위해 일하고 살지 않았으며 하나님이 갈망하시는 대로 하나님의 만족을 위해 일하고 살았다. 그의 일생의 목적과 관심은 하나님의 방법 안에서 하나님을 만족케 하는 것이었다. 

하나님의 계시에 따라 하나님을 섬김

   아벨은 그의 관념과 사상과 방법이 아닌 하나님의 구원의 방법에 따라 제물을 드렸다. 그는 하나님의 계시에 따라 그분을 경배했다(히 11:4). 가인과 달리 아벨은 양 떼 중 첫 새끼를 드렸다. 성경에서는,“아벨도 자기의 양 떼 가운데서 첫 새끼, 특별히 그것의 기름진 부분들을 제물로 바쳤다.”(창 4:4, 원문 참조)라고 말한다. 그가 기름을 드렸을 때 제물은 죽었을 것이고 피는 흘려졌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죽지 않으면 기름을 하나님께 드릴 수 없기 때문이다. 아벨은 자신에게, 피를 흘리는 제물이 필요함을 깨달았다. 그는 자신이 타락한 부모에게서 태어났으며 하나님의 시각으로 볼 때 악하고 죄 있고 오염되었음을 알았다. 그래서 그는 구속을 위해 흘릴 피와 하나님의 만족을 위해 태울 기름이 있는 첫 새끼를 드렸다. 누가 그에게 양의 첫 새끼를 드리라고 말했는가? 의심할 것 없이 그는 부모의 가르침에 따라 이렇게 했다. 아벨의 행함은 나중에 주어진 모세의 율법의 요구와 정확히 일치되었다. 이것은 하나님을 경배하는 그의 방법이 하나님의 신성한 계시에 따른 것이며 자기의 관념에 따른 것이 아니었음을 증명한다. 
   타락한 사람인 우리가 생각하는 모든 것은 죄악된 것이다. 가장 훌륭한 사상을 생각하더라도 여전히 죄된 것이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보는 것과 말하는 모든 것이 죄된 것이다. 성 어거스틴은, 심지어 우리의 회개의 눈물에도 피의 씻음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우리는 너무나 죄악된 자들이므로 심지어 우리의 회개 자체를 회개해야 한다. 우리는 죄의 화신이다. 그러므로 우리 자신에게서, 우리의 생각에서, 우리의 말에서, 우리의 들음에서, 우리의 느낌에서 기원된 것은 모두 죄악된 것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제쳐 놓아야 한다. 우리 자신을 제쳐 놓는 것은 사실상 마귀를 제쳐놓는 것을 뜻한다. 왜냐하면 우리의 자아 안에 마귀가 있기 때문이다. 만일 자신을 던져 버린다면 우리는 자연히 사탄을 절대적으로 거절하게 된다.“내 길은 선하다. 내 생각은 뛰어나다.”라고 말하지 말라. 당신의 생각이 뛰어나더라도 그 안에 사탄이 있기 때문에 당신은 그것을 거절하고 하나님의 계시에 따른 그분의 길을 취해야 한다. 
   아벨의 제물은 그리스도의 예표였다. 민수기 18장 17절에 의하면 그리스도의 예표인 소나 양의 첫 새끼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먹을 수 없었다. 그것들은 하나님께 드려져야 했다. 그러므로 예표론에서 볼 때 아벨은 그리스도를 하나님께 드렸다. 소나 양의 첫 새끼를 드림에는 두 가지 요소가 있다. 첫째는, 구속을 위해 제단에 뿌린 피이고, 둘째는 주님의 만족을 위해 그분의 향기로운 제물로 제단에서 불태운 기름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는 이 두 가지 요소가 있다. 그분에게는 우리를 위해 흘린 피가 있으며 하나님의 갈망을 만족케 하신 기름이 있다. 하나님의 구원의 방법에 관한 부모의 말을 따른 아벨은 하나님께 그런 제물을 드렸다. 따라서 아벨은 그리스도를 덮개로 취했으며 하나님께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히 11:4, 마 23:35). 하나님에 의해 받아들여질 수 있도록, 그분을 만족케 할 수 있도록 우리에게는 우리를 씻는 그리스도의 피와 우리를 덮는 그리스도 자신이 필요하다.    
   아벨의 행동은 피로 씻음 받고 우리 자신을 부인하며 자신을 제쳐놓고 그리스도를 우리의 덮개로 취하라고 말하는 신약의 복음과 정확하게 일치한다. 우리는 죄들을 자백하고 자신을 부인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양의 첫 새끼이신 그리스도를 드릴 필요가 있으며 자신을 잊어버리고 자신을 거절하며 자신을 포기하며 자신을 제쳐놓고 그리스도를 우리의 덮개로 취함으로써, 하나님을 만족케하는 달콤함이신 그분의 기름을 드릴 필요가 있다. 만일 이렇게 한다면 우리는 그분을 위해 살뿐만 아니라 그분에 의해 살 것이다. 그리스도는 하나님께 제물일 뿐 아니라 하나님의 길이며 구속의 길이며 생명의 길이다. 히브리서 11장 4절은, 믿음 안에서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제물을 드림으로써 아벨이 선하다는 증거를 얻었음을 말한다. 이런 믿음에 의해 그는 오늘도 여전히 말한다. 

하나님의 첫 번째 제사장

   아벨은 첫 번째 제사장이었다. 그는 제물을 드리기 위해 제사장을 고용하지 않고 자신이 직접 드렸다. 모든 아벨들은 제사장이다. 다른 사람에게 당신의 제물을 드려 달라고 요구하지 말라. 천주교의 신부에게 가지 말고 성공회의 제사장이나 사역자나 목사에게 가지 말라. 당신은 희생 제물을 드리는 제사장이 되어야 한다. 교회 생활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은 제사장이다. 우리는 계속 하나님께 그리스도를 드린다.

육체 안의 경배자에 의해 박해당함

   아벨은, 자신의 길 안에서 하나님을 경배한 가인과 달리 하나님의 길 안에서 경배했기 때문에 가인에게 핍박받고 죽었다. 가인은 그의 수고의 열매를 신뢰하며 육체 안에 있었지만 아벨은 자신을 신뢰하지 않았다. 그는 제물을 신뢰했다. 예표적으로 말해서, 아벨은 육체를 신뢰하지 않았으며 그리스도를 신뢰하고 그 안에서 자랑스러워했다(빌 3:3). 육체 안에 있는 경배자들은 항상 그 영을 따라 하나님을 경배하는 자들을 반대하고 박해한다(갈 4:29). 

에노스 - 인생의 공허함을 앎

   창세기 4장에서 우리는 특별히 의미 깊은 두 이름을 본다. 첫 번째는‘공허함’을 뜻하는 아벨이다. 타락한 결과 인생은 공허해졌다. 오늘날의 사람들을 보라. 바쁘게 움직이지만 그들 안에는 공백 또는 공간이 있다. 그들 속 깊은 곳에는 허무한 느낌이 있다. 사회적인 지위에 상관없이, 아무리 재산이 많더라도, 아무리 성공했더라도 당신이 밤이나 아침 일찍 혼자 조용히 앉아 있을 때 당신 안에 공백이 있음을 알 것이다. 그런 허무감이 지금 내가 말하는 공허함이다. 이것이 바로 지혜로운 솔로몬 왕이,“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사람이 해 아래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자기에게 무엇이 유익한고”(전 1:2-3)라고 말한 의미이다. 하나님 없는 타락한 사람들인 우리는 사람의 두 번째 타락에서 벗어나기 위해 우리의 모든 어떠함과 소유한 모든 것과 행하는 모든 것이 허무하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우리는 다만 허무할 뿐이다. 

사람의 부서지기 쉬움을 인식함

   특별히 의미 깊은 두 번째 이름은‘부서지기 쉬운, 죽어야 할 사람’을 뜻하는 에노스이다. 타락한 후에 인생은 공허해졌을 뿐 아니라 부서지기 쉽고 죽게 되었다. 우리는 자신이 부서지기 쉽고 약하고 깨지기 쉬움을 인정해야 한다. 우리는 얼마나 쉽게 부서지는지! 사람은 죽게 되어 있다. 아무도 자신이 일주일을 더 살 것이라고 장담할 수 없다. 아무도 내일을 모른다. 사람의 두 번째 타락에서 벗어나기 위해 우리는 인생의 공허함과 사람의 부서지기 쉬움을 깨달을 필요가 있다. 만일 이런 깨달음이 있다면 우리는 자신을 신뢰하지 않을 것이며 하나님의 길을 벗어날 만큼 오만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 이다(I AM)”이신 여호와의 이름을 부름

   우리의 인생이 공허하고 자신이 부서지기 쉬움을 볼 때 우리는 자연히 주님의 이름을 부를 것이다. 이런 이유로 창세기 4장 26절은,“그때부터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하였다.”라고 말했다. 인류의 제 삼대인 에노스의 때에 사람들은 자신의 약함과 깨지기 쉬움과 죽을 수밖에 없음을 깨닫고 주님의 이름을 부르기 시작했다. 
   히브리어로‘주’라는 단어는 여호와이다(4:26, 출 3:14 참조).‘하나님’이라는 칭호는 주로 창세기 1장에서 그분의 창조와 관련되어 사용된다.‘여호와’라는 이름은 주로 창세기 2장에서 사람과 관련되어 사용되기 시작했다. 여호와는 사람과 친근한 관계가 되기 위해 오시는 하나님의 이름이다. 따라서 창세기 4장 26절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다고 말하지 않고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고 말한다. 사람들은 만물을 창조하신 분을 부르지 않고, 그들과 심히 친근하신 분, 그들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는 분을 불렀다. 여호와라는 이름은‘스스로 있는 자(I am that I am)’, 곧 영원부터 영원까지 계시는 분이라는 의미이다. 그분은 과거에도 계셨고 현재에도 계시고 미래에도 영원토록 계신다. 그분은 영원히 존재하시는 분이다. 부서지기 쉽고 죽어야 할 운명임을 깨달을 때 사람들은 영존하시는 분인 여호와를 부르기 시작했다. 이것이 주님의 이름을 부름이다. 심지어 이 부름은 인류의 제 삼대에서부터 시작되었다. 
   하나님에 대해 무관심할 때 우리는 그분의 이름을 부르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 살고 그분의 길 안에서 그분을 경배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을 때, 우리가 부서지기 쉬우며 죽어야 할 운명이고 우리의 인생이 공허할 뿐임을 깨달을 때, 자연히 우리는 깊은 속으로부터 기도할 뿐 아니라 주님의 이름을 부르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것을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가장 중요한 씨로 간주해야 한다. 이것은 구약과 신약에서 가장 의미심장한 일이다. 

에녹 - 하나님과 동행함

   당신은 휴거되기를 기대하는가? 그렇다면 당신은 하나님과 동행해야 한다. 우리는 주님의 이름을 불러야할 뿐 아니라 하나님과 동행해야 한다. 부름 뒤에는 동행함이 뒤따라야 한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은 하나님을 무시하지 않고, 오만하지 않고, 자신의 관념과 갈망에 따라 어떤 일을 하지 않으며, 하나님 없이 어떤 일을 하지 않는 것이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은 그분을 우리의 중심과 모든 것으로 취하는 것이며, 그분의 계시와 인도를 따라 어떤 일을 하는 것이며, 모든 일을 그분과 함께 하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을 위해 살고 하나님을 위해 일하는 것일 뿐 아니라 하나님을 따라, 하나님과 함께 살고 일하는 것이다. 에녹은 자신의 갈망과 관념을 따르지 않고 그가 살았던 시대의 조류를 따르지 않았으며 하나님을 따라, 하나님과 함께 살고 일했다. 
   다른 사람과 동행하기는 쉽지 않다. 내가 형제들이나 가족들과 거닐 때 그들은 다 내가 너무 빨리 걷기 때문에 나와 보조를 맞출 수 없다고 말한다. 그들은 내게 천천히 걸으라고 요구했다. 그런데 나는 형제들과 가족들에게 물어볼 한 가지 질문이 있다. 당신이 나와 동행하고자 하는가, 내가 당신과 동행하기를 원하는가? 먼저 누가 누구와 동행하고자 하는지를 결정하자. 만일 당신이 나와 동행하고자 한다면 나와 보조를 맞추어야 한다. 너무 빨리 걷는다고 나를 나무라지 말라. 만일 내가 너무 빨리 걷는다고 불평한다면 나를 잊어버리고 당신만큼 느린 사람과 동행하라. 그러나 나와 동행하기를 원한다면 당신은 내 표준에 도달해야 한다. 만일 내가 당신과 동행하기 원한다면 나는 당신의 보조에 맞추어 천천히 걸어야 한다. 
   내게 말해 달라. 하나님이 당신과 동행하시는가, 당신이 하나님과 동행하는가? 하나님이 에녹과 동행하셨는가,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했는가? 성경은 하나님이 에녹과 동행하셨다고 말하지 않고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했다고 말한다. 성경에서 하나님이 사람과 동행하셨다고 말한 곳을 찾기는 어렵다. 우리는 누가복음 24장에서 이런 예를 발견할 수 있다. 부활하신 날 주 예수님은 예루살렘에서 엠마오로 내려가는 두 제자와 동행하셨다. 제자들이 주 예수님과 동행한 것이 아니라 주 예수님이 그들과 동행하셨다. 언제든지 주님이 당신과 동행하시면 그것은 당신이 하향길을 걷고 있음을 뜻한다. 당신은 예루살렘에서 엠마오로 내려가고 있는 것이다. 당신이 주님과 동행하는가, 그분이 당신과 동행하시는가? 다시 말하면 당신은 올라가고 있는가, 내려가고 있는가? 
   예를 들면, 당신이 극장으로 내려갈 때에는 주 예수님이 당신과 동행하실 것이다. 많은 때에 주님은 이렇게 성도들과 함께 내려가셨다. 수많은 성도들은 주님께,“주님, 나는 당신과 함께 있을 수 없습니다. 나는 극장에 가고 싶습니다.”라고 말한다. 그럴 때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네가 극장에 가겠느냐? 나도 너와 함께 가겠다. 나도 너와 함께 내려가겠다. 왜 내가 너와 동행하는지 아느냐? 너를 다시 데려오기 위해서이다. 너는 엠마오로 가는 하향길을 걸어서는 안 된다. 나는 너희 모두가 예루살렘에 남아 있기를 원한다. 네가 하향길을 가기 때문에 나는 너와 함께 가야 한다. 나는 너를 다시 데려오기 위해 너와 동행해야 한다.”
   에녹은 하나님과 동행하여 오르막길로 행했다. 하나님께서 에녹을 데려가신 것을 갑작스럽게 일어난 일이라고 생각지 말라. 한 순간은 땅 위에 있었다가 다음 순간에 하늘에 있게 되었다고 생각지 말라. 에녹은 하나님과 오르락내리락하며 걷지 않았으며 갈 지(之) 자 모양으로 걷지도 않았다. 그는 하늘에 닿을 때까지 계속 오르막길을 걸었다. 그가 삼백 육십 오 세가 되어 거의 하늘에 도달했을 때 하나님은 그에게,“얘야, 내가 여기 있다. 이리 오너라.”고 말씀하셨다. 그리하여 에녹은 데려감을 당한 것이다.
   당신은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할 때 오르락내리락하며 걸었다고 믿는가? 당신은 에녹이 일관성 없이 동행했으며 하나님께서,“불쌍한 아이야, 빨리 올라오라.”고 말씀했다고 믿는가? 나는 하나님께서 이런 방법으로 에녹을 데려가셨다고 믿지 않는다. 에녹은 삼 세기 동안, 곧 십만 일 이상을 밤낮 하나님과 동행했다. 에녹은 매일매일 하나님과 동행했으며 전날보다 매일 조금씩 더 가까이 하나님께 나아갔다. 에녹은 상황, 환경, 사람들과 그들의 소행을 보고 모든 것이 경건하지 않음을 알았다. 그러나 그는 삼백 년 동안이나 계속하여 경건하고 거룩하게 하나님과 동행했다. 
   하나님과 동행하기 위해서 우리는 그분과 하나 되어야 한다. 우리는 자신의 생각, 사랑, 선택에 있어서 그분과 하나 되어야 한다. 당신이 주님과 동행한다는 것은 대단히 많은 것, 곧 당신 자신을 부인하고 자신의 생각과 사랑을 부인하고 자신에게 속한 모든 것을 부인함을 의미한다. 그것은 당신이 자신을 주님께 드렸으며 주님께 굴복했으며 그분께 주도권을 드렸음을 의미한다. 주님과 동행하는 것은 작은 일이 아니다. 그분과 동행하는 일은 당신을 죽일 것이다. 내 아내는 나와 동행할 때마다 고통스러워한다. 그러므로 만일 당신이 나와 동행하기 원한다면 자신을 부인해야 한다. 다른 면에서, 만일 내가 당신과 동행하려면 나는 당신과 하나 될 수 있도록 자신을 잊고 포기해야 한다. 만일 기꺼이 이렇게 하지 않는다면 나는 그 누구와도 동행할 수 없다. 
   그것은 다만 주님의 이름을 부르는 문제가 아니다. 우리가 “오, 주 예수님!”이라고 부르는 것은 놀랍고 누릴 만한 것이지만, 부른 다음에 무엇이 있는가? 만일 주님이“나를 따르라.”고 하신다면 당신은 그분을 따르겠는가? 당신은 그분과 동행하겠는가? 부름은 창세기 4장에 있고 동행함은 창세기 5장에 있음을 잊지 말라. 만일 부른 다음에 동행함이 없다면 우리의 부름은 그렇게 참되지 않은 것이다. 다음 메시지에서 우리는 동행 다음에 건축이 있음을 볼 것이다. 
   에노스는 주님을 불렀고, 에녹은 주님과 동행했으며, 노아는 동행하며 건축했다. 우리는 창세기 4장에 있는 부름에서 동행으로 전진해야 한다. 부름은 당신을 공급하겠지만 죽이지는 않을 것이다. 부름은 당신을 살아나게 한다. 그러나 동행함은 항상 당신을 죽인다. 그것은 또한 당신을 부활하게 할 것이다. 동행함은 먼저 당신을 죽인 다음 살아나서 하나님의 임재를 누릴 수 있도록 당신을 부활하게 한다. 당신은 천연적인 길 아닌 부활의 길 안에서 극도로 생생해질 것이다. 오, 우리는 얼마나 하나님과 동행해야 하는지!(창세기 라이프 스타디 메시지 25)

기도의 부담, 성도들 소식, 금주의 추구

■ 기도의 부담
1. 부산교회 안에서 복음의 구조가 세워지도록 인도해 주십시오
   (1)죄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이 모든 성도들 안으로 복사 되도록
   (2)모든 성도들이 주 1회 이상 정해진 시간에 복음을 전하는 실행을 할 수 있도록
   (3)학교, 직장, 이웃 등에서 복음친구들을 사귈 수 있도록 
2. 2020년 부산교회 봉사 목표를 위하여
   (1)2020년까지 1,000명의 인수 목표를 위하여
   (2)2020년 300명
   (3)구역별 목표 1년 50명, 소그룹별 목표 1년 5명

■ 성도들 소식
1. #2 - 침례
전훈 형제님이 2/9(주일), 침례 받았습니다.
2. #4 
① 입원 - 최영선 자매님이 손목 골절로 수술 후 마이크로 병원 702호(금정구)에 입원중입니다.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해 면회가 안 되니 빠른 회복을 위해 기도를 부탁드립니다.
② 이사(전입)
- 전만호 형제님(정은숙 자매님) 가정이 김해 장유에서 기장읍 현대아파트로 이사왔습니다.
- 정동화 형제님(김수연 자매님) 가정이 경북 청송에서 정관읍 동일스위트 1차아파트로 이사왔습니다.

■ 금주의 추구
1. 구약 성경 읽기 : 레 14:1 ~ 레 27장
2. RSG(신약 회복역) : 막 1:9 ~ 막 6:44
3. 라이프-스타디 : 로마서 M5 ~ M6
4. 금주의 소그룹 추구 진도(신약 회복역) : 행 23

알리는 말씀

■ 2020년 구역별 약정헌금 현황 (2/9 현재)        

                                                                (금액단위 : 천원)

구분

사역의

전시간

훈련

교육관

대출금

상환

합계

월구좌

월구좌

월구좌

월구좌

월구좌

월금액

1구역

39

55

38

33

165

1,650

2구역

74.5

88

81.5

61

305

3,050

3구역

50

110

46

76

282

2,820

4구역

26

34

28

22

110

1,100

5구역

35

96

48

30

209

2,090

6구역

56

78

70

63

267

2,670

(건수)

280.5

(136)

461

(137)

311.5

(123)

285

(125)

1,338

(521)

13,380

연필요액

45,000

90,267

76,363

34,125

245,755

연약정액

33,660

55,320

37,380

34,200

160,560

대비

75%

61%

49%

100%

65%

연부족액

11,340

34,947

38,983

0

85,270

※ 현재 전체 필요금액에서 약정헌금은 35% 부족합니다. 필요금액이 충분히 약정될 수 있도록 형제, 자매님들의 기도와 적극적인 동참을 바랍니다.

■ 한국복음서원 안내
1. 진리 교육 과정 6권 삼일하나님 출간 안내
▷ 가격 : 4,500원
2. 창세기 개관, 출애굽기 개관 출시 및 예약 안내
▷ 예약가 : 10,500원
▷ 정가 14,500원(창세기 개관 6,000원, 출애굽기 개관 8,500원) 두 권을 묶어서 함께 신청 받습니다. 정기 구독자들에게는 2월 신간으로 발송됩니다. 따라서 정기 구독을 하시는 분들은 별도로 신청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 신청을 원하시는 분들은 각 구역 도서봉사자들에게 신청하시기 바랍니다. 

■ 부산교회 장년 봉사자 이동 안내
 2020년 부산교회의 전진과 섞임의 원칙, 몸의 공급을 위하여 장년 봉사자 형제님들이 이동하게 되었습니다. 3월 1일부터 변동된 구역에서 봉사하오니 몸 안에서 좋은 섞임이 있기를 바랍니다. 
1구역 - 조일남,  2구역 - 김재덕,  3구역 - 하광호
5구역 - 윤갑채,  6구역 - 장기봉

■ 2020년 전반기 부산교회 성경 세미나 취소 안내
▷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와 남구학생센터 엘리베이터 공사로 인하여 전반기 성경 세미나는 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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