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의 체험과 성장과 사역 - 28(2020.3.15)
교회 주보
부산교회집사실 2020-03-13 , 조회 (329) , 추천 (0) , 스크랩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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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교회 기도집회 추구 

생명의 체험과 성장과 사역 - 28

몸의 인식

    영적 전쟁에 참여하기를 원하는 자는 누구나 먼저 몸을 알아야 한다. 영적 전쟁은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몸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믿는 이 개개인으로서는 대적과 싸울 수 없다. 여기에는 온 몸이 필요하다. 만일 우리가 영적 전쟁을 배우고자 한다면 우리는 먼저 몸을 알아야 한다. 

 체험 가운데서

    만일 우리가 체험 가운데서 하나라면, 우리는 하나를 의식하게 되고 하나를 접촉하게 되며, 이때 우리는 몸을 알고 몸 안에 살게 된다. 그러나 사실상 그것은 그리 단순하지가 않다. 하나님의 계획 안에서, 하나님의 창조 안에서, 하나님의 구속 안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 안에서, 생명 안에서, 교통 안에서 우리는 모두 하나이다. 우리가 이러한 문제에 있어서는 어려움이 없다. 이는 이러한 일들이 하나님 편에서 이뤄진 사실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 편에서 체험상의 하나는 개개인에 따라 다르다. 어떤 이들은 이미 약간의 체험을 한 적이 있지만 다른 이들은 체험을 한 적이 없다. 이제 우리가 강조하려는 것은 이러한 체험 상의 하나이다. 
   우선 우리는 우리의 지식과 이 하나에 대한 체험이 반드시 영적인 나이와 관련되어 있음을 알아야 한다. 어리고 미성숙한 자들의 이 하나에 대한 지식과 의식이 피상적이고 얕은 데 비해서, 체험을 지닌 성숙한 자들의 의식은 깊고 무게가 있다. 예를 들어, 새로 구원받은 어떤 형제가 어느 정도 영적인 공과를 배우게 될 때, 그 형제는 그것을 배우지 못한 형제자매들에 비해서 자신이 훨씬 뛰어나다고 느낀다. 때로는 그가 형제자매들과 같이 집회에 참석할 때, 그들의 기도하는 내용과 말이 빈약하며 좋지 못하다고 느끼게 된다. 따라서 그는 입을 열지 않는다. 다른 이와 구분하는 이러한 연속적인 느낌은 그 형제가 하나를 알지 못하며, 아직도 몸을 모르고 미성숙한 상태에 있음을 입증하는 것이다. 
   그러나 체험을 지닌 형제자매들에게 있어서는 경우가 다르다. 그들의 느낌에는 외관상 두 가지의 모순된 면이 있다. 한 면으로 그들은 이 젊은 형제자매들이 실로 그들과 판이함을 느끼지만, 또 한 면으로 그들은 자신들이 모든 형제자매들과 동일함을 느낀다. 형제자매들이 느끼는 것은 무엇이나 그들도 마찬가지로 느낀다. 미성숙한 자들은 언제나 자신들이 다른 이와 다르다고 느끼지만, 주 안에서 깊고 영적 체험이 진전된 자들은 그러한 차이를 느끼지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가 체험 가운데 하나 되지 못하는 이유는 우리가 미숙하고 얕기 때문이다. 우리가 영적 체험 가운데 이 네 번째 단계에 이르게 되면, 다르다는 느낌이 없어지고 모든 이와 하나 되는 자연스런 느낌을 갖게 된다. 이것이 몸을 아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처리에 대하여 말한다면, 몸을 아는 것은 곧 일종의 개인주의를 처리하는 것이다. 몸을 알지 못하는 자들은 모두가 개인주의자들이다. 그들의 관념과 행동과 삶과 일이 다 개인적이다. 이러한 개인주의는 모두 그들이 여전히 육체와 자아와 타고난 성분 가운데서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기생하는 덩굴처럼 나무를 감고 있는데, 육체와 자아와 타고난 성분이라는 나무가 잘려나갈 때만이 소멸된다. 오직 육체와 자아와 타고난 성분이 철저히 처리될 때만 개인주의가 제거된다. 사람이 더 이상 개인주의로 살지 않게 될 때에야 몸을 알게 된다. 
   몸을 아는 것은 말하고 들음으로써 이해할 수 있는 교리가 아니다. 몸을 아는 것은 많은 체험을 거친 결과이다. 이 모든 체험을 통과할 때 마침내 몸을 알게 된다. 우리가 어떤 유명한 곳을 방문하려고 할 때, 우리는 얼마간 여행을 하면서 마침내 목적지에 도달하여 여행의 목표물을 보게 된다. 몸을 아는 것도 마찬가지다. 만일 우리가 몸을 알고 체험 가운데서 몸의 실재를 접촉하고자 한다면, 얼마 동안 전진해 나아가서 영적인 생활 속의 경사진 곳을 올라가야 한다. 우리는 과거를 일소하는 체험에서 시작하여 죄와 세상과 양심을 처리하는 체험을 통과하고, 부지런히 한 단계에서 다음 단계로 올라가야 한다. 우리는 한 공과씩 수업을 받을 때마다 자신에게 엄격해야 한다. 특히 육체와 자아와 타고난 성분을 처리하는 데 있어서 엄격해야 한다. 오직 우리가 영적인 생명의 처음 세 단계를 체험하고 네 번째 단계에 이르게 될 때만 자연적으로 그리스도의 몸의 비밀을 알게 되는 데 이르게 된다. 
   실재적으로 어떠한 영적 지식도 체험 없이는 얻지 못한다. 모든 것이 체험에 근거를 두고 있다. 참된 영적 지식은 우리가 체험한 공과를 벗어나지 않는다. 예를 들어, 어떤 성경 진리는 우리의 제한된 체험 때문에 그 의미를 완전하게 파악하지 못할 수 있다. 우리가 가진 것이란 거기에 대하여 느끼는 조그만 느낌뿐이다. 만일 우리가 그 느낌을 따라 그것을 체험하고자 한다면, 어느 날 진리가 우리에게 밝혀질 것이다. 한 면으로 진리는 체험을 가져오고, 또 한 면으로는 체험으로 인하여 우리가 진리를 알게 된다. 이리하여 우리는 참된 영적 지식에 도달하게 된다. 
   그리스도의 몸은 교리가 아니라 실재이다. 어떤 사람이 육체가 처리되지 않고 자아를 버리지 않고, 타고난 성분이 깨뜨려지지 않았다면 그 사람은 몸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한다. 그 사람이 몸의 교리는 약간 알고 있을지 몰라도, 몸의 실재는 만지지 못한다. 
   몸을 아는 일은 우리가 간구해도, 사흘 밤낮을 기도와 금식을 해도 몸을 보지 못한다. 몸을 인식하는 것은 우리의 체험과 영적 성장의 결과이다. 풍부한 체험을 한 이후에야 자연스럽게 몸을 아는 데 이르게 된다. 
   워치만 니 형제님은 로마서 12장 앞에 로마서 8장이 있어야 한다는 사실을 거듭 강조했다. 사람은 반드시 로마서 8장에서의 육체를 죽음에 넘기는 사실을 통과해야만 로마서 12장에서의 몸을 아는 데 이르게 된다. 그러므로 자신을 처리하는 데 있어서 처음부터 우리는 특히 우리 육체와 자아와 타고난 성분에 대해서 매우 철저해야 한다. 우리는 진지하고 철저하게 로마서 8장을 체험하는 데 이르러야 한다. 우리가 로마서 8장에서의 육체를 죽음에 넘기는 체험을 한 다음에야 로마서 12장에서의 몸을 깨닫게 된다. 우리의 육체가 죽음에 넘겨질 때 그리스도의 몸이 나타나게 된다. 이것은 거짓될 수 없는 영적 실재이다. 겸손, 온유, 믿음, 사랑과 같은 다른 영적인 분야에는 거짓된 것이 있을 수가 있다. 우리는 심지어 자신을 영적인 자로 가장할 수도 있다. 그러나 몸을 아는 데 관해서는 가장(假裝)된 것이 있을 수 없다. 우리의 체험이 몸을 아는 정도에 이르게 될 때, 그것을 알게 된다. 만일 우리의 체험이 이 정도까지 이르지 못했다면, 그러한 일을 알지 못하며, 그것에 관한 많은 가르침을 들어도 아무 소용이 없다. 

우리가 몸을 아는 증거 

1. 개인주의자가 될 수 없음

   몸을 아는 것에 대한 첫째 증거는 개인주의적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앞에서 우리가 언급한 일곱 가지 항목들은-하나님의 계획 안에, 하나님의 창조 안에, 하나님의 구속 안에, 그리스도 안에, 성령 안에, 생명 안에, 교통 안에-모두가 분리될 수 없고 개인주의적일 수 없는 하나이다. 만일 우리가 실재로 주님을 알고 이 일곱 가지 사항에 포함되어 있는 하나를 깨닫는다면 개인주의는 있을 수 없다. 사람이 몸을 알기 전에는 개인주의적이 될 수밖에 없다. 그의 생활과 행위와 일과 봉사가 모두 개인주의적이다. 외적으로는 그가 형제들과 하나인 것처럼 보여도, 실재적인 동역이나 함께 짜여짐은 없다. 그가 생명 안에서 더 깊게 성장하고 어느 정도로 몸을 알게 될 때에야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 단체의 문제이며, 몸의 교통을 떠나서는 전진할 수 없고, 지체들과의 동역에서 벗어날 수도 없음을 보게 된다. 그리스도의 몸이 그에게 실재적인 문제가 된다. 
   교회 생활 안에서 그는 결코 혼자서 봉사하지 못한다. 깊은 곳에서부터 그는 자신이 다른 사람들과 함께하는 그리스도인이 될 필요를 느낀다. 크고 중요한 행사와 일에서 형제자매들을 필요로 할 뿐 아니라, 성경 읽고 기도하는 데 있어서도 다른 지체들이 없이는 할 수가 없다. 그는 형제자매들과 협력하지 않고서는 일할 수 없으며, 교회의 부축이 없이는 살 수가 없게 된다. 이 단계에서 그는 자연스럽게 모든 성도들과 함께 짜여져 한 몸이 되고, 더 이상 분리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아직도 개인주의적인 자들은 몸을 모르는 자들이며, 몸을 진실로 아는 자들은 결코 개인주의적이 될 수 없다. 

 2. 몸 안에 있지 않는 자들을 분별함

   몸을 아는 두 번째 증거는 다른 사람들이 몸 안에 있는지 있지 않은지를 분별할 수 있는 능력이다. 몸을 알게 된 자는 매우 실재적으로 몸 안에서 살 뿐만 아니라, 다른 이들이 몸 안에 살고 있는지 그렇지 않은지를 분명하게 분별할 수 있다. 
   사람이 몸을 알고 나서 갖는 이러한 분별의 능력은 절대적으로 그가 주님 안에서 갖는 교통의 깊이에 기인한다. 우리가 주님과 갖는 교통은 우리의 생명의 체험에 비례하며 영적 생명의 초기 단계에서 시작하여 네 번째 단계를 거치면서 깊이를 더하게 된다. 교통의 깊이는 생명의 체험의 진보와 같이 사람에 따라 많은 차이가 있다. 주님 안에서 교통의 깊이가 다른 두 사람이 자리를 같이할 때, 더 깊은 체험을 가진 자는 더 얕은 체험을 가진 자와 함께 교통을 나눌 수 있지만 그 교통은 후자의 체험에 제한을 받는다. 만일 이 교통이 더 깊어진다면 후자에게 조화되지 않고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되고 만다. 따라서 더 깊은 체험을 가진 자는 더 얕은 체험을 가진 자와 함께 나아갈 수 있어도, 더 얕은 자는 더 깊은 자와 함께 나아갈 수 없다. 이것이 영적 교통의 커다란 원칙이다. 
   주 안에서 깊은 자들은 얕은 자들을 알 수 있어도 주 안에서 얕은 자들은 깊은 자들을 분별하지 못하는 것은 이 원칙 때문이다. 만일 우리가 주님으로 말미암아 네 번째 단계까지 인도되고 이 단계에서 깊은 교통을 갖는다면, 우리는 교통을 통해 다른 사람들도 이 단계에까지 인도되었는지 또는 몸을 알고 있는지를 알게 된다. 하지만 만일 우리가 네 번째 단계에까지 이르지 못하고 몸을 알지 못한다면, 결코 다른 사람들을 분별하지 못한다. 
   한 가지 예를 들자면, 만일 우리가 이미 자신을 헌신하고 죄를 처리하는 체험을 했다면, 매우 쉽게 이러한 체험을 하지 못한 자들을 분별할 수가 있다. 그들의 주님과의 교통이 이 단계에 이르지 못했기 때문에, 그들은 우리가 말하는 것을 전혀 알지 못하고 답변할 수도 없다. 반대로 만일 우리가 이러한 체험을 하지 못했다면 우리 역시 그들이 헌신을 했는지 죄를 처리했는지를 분별하지 못한다. 
   우리는 교통에 의해 다른 사람이 몸을 아는지의 여부를 확인할 수 있으며, 몸을 아는 체험은 또한 본래 그 자체가 교통의 문제이다. 만일 사람이 몸 안에 있다면, 교통 안에 있는 것이고, 몸 안에 있지 않다면, 교통 안에도 있지 않은 것이다.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교통의 위치 곧 교통의 실재를 잃어버렸다. 이는 그들이 몸을 보지 못하고 몸 안에 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교통 안에 사는 것은 우리가 몸을 안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 된다. 만일 우리가 실재적으로 몸을 안다면, 다른 사람이 몸 안에 있는지 있지 않은지를 확실히 알게 된다. 어떤 사람이 몸의 실재 안에 살지 않을 때, 몸의 교통 가운데 있지 않은 것이다. 이 점에 대해서 그들과 우리 사이에는 교통의 가능성이 전혀 없다. 우리는 오직 접촉만 해도 그것을 알게 된다. 반대로 만일 우리가 다른 사람이 몸 안에 있지 않음을 감지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우리 자신이 몸 안에 있지 않은 것과 몸을 알지 못하는 것을 증명해 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들을 접촉할 때, 우리의 속 느낌은 우리가 몸을 아는지 모르는지를 우리에게 알려 준다. 

3. 권위를 인식함

    몸을 아는 세 번째 증거는 권위를 인식하는 것이다. 사람이 몸을 알고 있는지의 여부는 사람이 권위를 인식하고 있는지의 여부를 보면 알 수 있다. 권위를 인식하지 못한 자들은 몸을 모른다. 몸을 아는 일과 권위를 인식하는 일은 분리될 수 없다. 권위를 인식하는 것은 개인주의에 대하여 언급한 것과 연관이 있다. 사람이 권위를 인식하게 되면 개인주의자가 될 수 없다. 
   만일 사람이 자신이 권위를 인식하고 있는지 그렇지 않는지를 판단해 보고자 한다면, 그는 다만 자신이 아직도 개인주의자가 될 수 있는지 아닌지를 판단해 보면 된다. 그가 여전히 개인주의자로 살며, 다른 이와 협력하지 않고서 홀로 하나님을 섬길 수 있다고 느낀다면, 그 사람은 자신이 권위도 모르고 몸도 모른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권위는 오직 몸 안에서 협력하는 데에서 나타날 수 있다. 만일 한 지체가 개인주의적이고 고립되어 있다면 권위에 관한 한 그 지체는 다른 사람과 관계가 없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하나님은 한 몸을 원하시고 이 몸의 지체된 우리가 혼자서는 전진할 수 없음을 보게 된다면 우리는 권위를 인식하고 몸 안에서 자기의 위치를 지키며 모든 형제자매들과 협력하는 것을 배우게 된다. 
   권위란 무엇인가? 간단히 말해서 권위란 몸의 순서를 통해 나타난 머리이신 그리스도의 권위이다. 우리의 육신적인 몸을 예로 들어 보자. 머리는 가장 높은 부분이며 온몸의 권위이다. 머리에서부터 온몸을 통하여 몸의 순서가 표현된다. 머리 밑에는 팔, 몸통, 다리가 있다. 모든 지체가 분명한 순서를 따르고 있다. 그러므로 어떤 지체이든지 분리되지 않는 한 그러한 질서를 따른다. 몸에 붙어 있는 지체라면 틀림없이 이러한 순서 안에 놓여 있게 된다. 한 면으로 그 지체는 어떤 지체들의 권위 아래 있게 되며, 또 한 면으로 다른 어떤 지체들은 그의 권위 아래 있다. 예를 들어, 손바닥 위는 팔목이며, 그 아래는 손가락이다. 팔목은 손바닥에게 권위가 있으며, 손바닥은 손가락에게 권위가 있다. 이 권위는 몸 안에서 각각의 순서에 따른 것이며, 지체들의 순서를 통해 나타난 머리의 권위이다. 권위에 대하여 말할 때, 우리는 그리스도의 권위가 그의 몸의 순서를 통해 나타난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모두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들이기 때문에, 우리는 자연적으로 올바른 위치와 순서를 갖게 된다. 
   만일 우리가 자신의 영 안에서 가르침 받고, 실로 하나님께 인도함을 받아 육체를 알게 되며, 자아를 처리하고, 타고난 성분을 깨뜨리게 되면 우리는 즉시 형제자매들 가운데 놓인 자신의 순서를 알게 될 것이다. 우리는 우리 앞에 있는 자와 우리 뒤에 있는 자, 우리에게 권위가 있는 자와 우리가 권위를 보일 자를 알게 된다. 내 안에 있는 머리의 권위와 다른 사람 속에 있는 머리의 권위가 내 위에 있는 자와 내 밑에 있는 자를 보여 준다. 그것은 마치 한 가족의 형제자매들이 자신의 순서, 곧 누가 누구에게 복종해야 하며 누가 누구의 권위에 속해 있는가를 아는 것과도 같다. 이러한 권위는 떠맡거나 선출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직 머리이신 그리스도께서 자기 몸의 모든 지체들 속에서 나타내신, 생명의 자연스런 순서로 인한 것이다. 육체 안에서 살며 자기 의견과 타고난 성분을 따라 행하는 자들만이 권위에 대항하여 서로 경쟁하며 싸우는 일에 관련될 수 있다. 
   공과를 배운 자들은 모두 몸에 대한 머리의 권위를 인정하고 아주 자연스럽고 만족한 태도로 자신의 순서를 따라 안식을 누릴 수가 있다. 이것은 겸손이나 자만과는 상관이 없다. 권위 아래 있다는 것은 자신을 억지로 복종시키는 것과는 거리가 먼 자연스러운 절차이다. 이러한 사람들은 권위를 알고 몸을 아는 데, 이는 권위를 인식하는 것이 몸을 아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따라서 몸을 아는 이 문제는 권위를 아는 것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만일 우리가 몸 안의 순서를 모른다면, 생명의 체험에 있어서 자신이 네 번째 단계에 이르지 못하였음을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만일 처음 세 단계에서 우리가 진지하고 철저하게 각종 처리를 통과한다면-특히 육체, 자아, 의견, 타고난 생명을 처리한다면-이때 안에 계신 성령은 아주 자연스럽게 우리를 인도하여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각자의 순서를 알게 하며, 우리의 생명과 봉사로 말미암아 몸과 협력하게 하여 향기를 가득 풍기게 하신다. 그리하여 점차적으로 그리스도의 몸은 우리 가운데서 나타나게 된다. 
   결론적으로, 우리가 몸을 알게 되었을 때, 스스로 그것을 깨달을 수 있으며, 비록 우리가 이러한 인식을 언제부터 갖기 시작했는지 모른다 하더라도, 우리가 그러한 인식을 갖고 있으면 결국 그것을 깨닫게 된다. 그것은 병에서 회복되는 것과도 같다. 회복되는 정확한 시기는 분별하기 힘들지만, 회복된 것은 알게 되는데, 이는 그 느낌과 외모에 있어서 달라졌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모든 참된 영적 지식에 있어서 어느 날, 몇 시 몇 분에 우리가 인식하게 되었는지 정확히 말하기 어렵지만 그 결과는 분명히 식별할 수 있다. 그러므로 사람이 몸을 진실로 알게 되면 조만간 그 사람은 우리가 언급한 세 가지 증거를 나타내 보일 것이다.       첫째, 그 사람은 결코 개인주의자가 될 수 없고, 둘째, 그 사람은 다른 사람이 몸 안에 있는지의 여부를 말할 수 있으며, 셋째, 그 사람은 형제자매들 가운데서 어떤 특별한 노력 없이 누가 자기에게 권위를 가지고 있으며 누구에게 자신이 권위가 있는지, 즉 몸 안에서 머리의 권위가 누구에게 나타났는지를 분명히 알게 된다. 이 세 가지 사항이 몸을 아는 증거이다.(생명의 체험下  180-202쪽)

기도의 부담, 성도들 소식, 금주의 추구

■ 기도의 부담
1. 코로나19의 확산이 멈추고 속히 퇴치되게 하여 주십시오. 
   (1)위험에 처해 있을 수 있는 교회 안의 성도들과 수많은 사람들을 지키시고 보호하여 주십시오.
   (2)각종 언론매체들과 미디어들이 코로나19에 관하여 지나치게 과장된 관점을 갖지 않도록 다스려 주십시오.
2. 2020년 봄 장로들과 책임형제들을 위한 국제 훈련이 아무런 방해 없이 무사히 치러질 수 있도록 인도해 주십시오.
   (1)코로나19로 인하여 계획에 차질이 생기지 않도록 훈련을 보호해 주십시오.
   (2)몸의 필요를 채울 수 있는 최신의 말씀을 해방하여 주십시오.   
3. 2020년 부산교회 봉사 목표를 위하여
   (1)2020년까지 1,000명의 인수 목표를 위하여
   (2)2020년 300명
   (3)구역별 목표 1년 50명, 소그룹별 목표 1년 5명

■ 성도들 소식
1. #2 - 이사(전출)
영도지역의 백동근 형제님(이애자 자매님) 가정이 3/1(주일) 사직동(#3)으로 이사했습니다
2. #3 - 이사(전출)
유승룡 형제님(하창임 자매님) 가정이 경기도 동탄시로 이사했습니다.

■ 금주의 추구
1. 구약 성경 읽기 : 신 4:44 ~ 신 23장
2. RSG(신약 회복역) : 눅 6:1 ~ 눅 10:24
3. 라이프-스타디 : 로마서 M13 ~ M14
4. 금주의 소그룹 추구 진도(신약 회복역) : 행 27

알리는 말씀

■ 2020년 국제 중국어 특별 집회 취소에 따른 추구 양식 변경 안내
  2020년 국제 중국어 특별 집회가 코로나19의 영향으로 취소되었으며, 아침 부흥 양식도 출간되지 않습니다. 따라서 한국복음서원에서는 3주간 추구할 별도의 양식을 아래와 같이 출간할 예정입니다.
▷ 도서명 : 아침 부흥 양식 - 아가
▷ 금액 : 3,000원
▷ 추구 시작일 : 4/13(월)
※ 각 구역 도서봉사자들께서는 3/30(월)까지 한국복음서원으로 신청하시기 바랍니다.

■ 2020년 여름 국제 아시아 대학생 훈련집회에 대한 긴급 공지
   최근 코라나19가 전 세계적으로 빠르게 확산되고 있는 심각한 상황으로 인하여, 여름 국제 아시아 대학생 훈련집회의 진행여부에 대한 많은 고려가 있습니다. 상황이 더 악화될 경우, 훈련집회가 취소될 가능성도 있기 때문에 참가를 원하시는 분들은 아래의 내용을 확인해 주시기 바랍니다.
① 훈련집회의 진행여부는 4/25(토)까지의 상황을 보고 최종 결정할 예정입니다.
② 등록은 일단 계속 진행 중이며, 등록 마감기한[3/30(월)]도 동일합니다.
③ 항공권은 4/25(토), 최종 결정 상황을 지켜보고 구입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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