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의 체험과 성장과 사역 - 29(2020.3.22)
교회 주보
부산교회집사실 2020-03-20 , 조회 (321) , 추천 (0) , 스크랩 (0)
출처
원문
부산 교회 기도집회 추구 

생명의 체험과 성장과 사역 - 29

승천의 인식

1. 그리스도의 구속을 알 필요성

   승천을 알기 위해서는 먼저 그리스도의 구속을 알아야 하는데, 왜냐하면 승천이 그 안에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구속에 관하여 많은 이들은 다만 그분이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것만을 알고 있다. 어떤 이들은 더 깊은 것을 보고서 그리스도의 구속이 부활도 포함하고 있음을 깨닫는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성경을 다시금 주의 깊게 보고 우리 체험을 살펴본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구속이 승천도 포함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의 구속은 죽음과 부활과 승천의 세 가지 주요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만일 어느 부분이라도 빠뜨리게 되면, 그리스도의 구속이 완전하다고 할 수 없다.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 그분의 구속의 종결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승천이 그분의 구속의 종결이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셨을 때 안식하셨다고 말할 수 없다. 그리스도는 죽음이나 부활 안에서 안식하지 못하고, 승천 안에서 안식하셨다. 성경에서는 주님께서 부활 안에서 앉아 계신다고 말하지 않고 하늘에 앉아 계신다고 말한다(엡 2:6). 앉아 계신다는 것은 일이 이미 이루어졌음을 나타낸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하늘에 승천하시기까지는 주님의 구속의 일이 성취된 것으로 여겨지지 않았다. 죽음과 부활은 다만 주님의 구속의 점진적인 단계라고 할 수 있다. 승천이 주님의 구속의 최종 단계이다. 주님의 죽음과 부활은 주님의 승천으로 인도하는 통로이다. 이와 같이 승천은 주님의 죽음과 부활의 종결이다. 
   주님의 승천이 그분의 죽음과 부활의 종결이기 때문에, 세 단계는 모두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주님께서 죽음에서 나와 부활 안으로 들어가셨을 때, 주님은 이미 하늘에 속한 영역에 이르셨다. 죽음과 부활 다음은 즉시 승천이다. 기독교에서는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다음 사십 일이 지나 승천하셨다고 잘못 알고 있다. 사실상 주님은 부활하신 날 아침에 하늘로 승천하셨다. 그날 아침에 주님은 막달라 마리아에게 나타나 말씀하시기를, “나를 만지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못하였노라”고 하셨다. 또 주님은 계속해서 “내가 내 아버지 … 올라간다”고 말씀하셨다(요 20:17). 그날 저녁 주님은 다시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나를 만져보라”고 하셨다(눅 24:39). 이때 주님은 사람들이 자신을 만져볼 수 있도록 하셨다. 여기에서 볼 수 있는 것은 이 일이 있기 이전에 주님은 이미 하늘로 승천하시어 부활의 신선함을 하나님께 드렸다는 것이다. 그래서 주님은 승천하시기 전에 사십 일 동안 자기 제자들에게 보이시며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라고 말씀하실 수 있었다. 이 권세는 주님께서 부활하신 날 아침에 하늘로 승천하시어 하나님께 얻은 것이었다. 이와 같이 우리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 그리스도의 승천과 관련되어 있음을 보게 된다. 이것들은 분리될 수 없다. 학업을 끝맺는 것과 졸업은 분리시킬 수 없다. 사람이 자기 학업을 마치면 졸업하게 된다. 이와 같이 주님은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셨을 때 승천하신 것이다. 
   그리스도는 승천하심으로 그분이 죽음과 부활을 통해 이룬 모든 것을 하늘로 이끄셨다. 그는 자신의 모든 구속하시는 일의 열매를 하늘로 이끄셨으며, 이로써 주님은 오늘 승천의 위치에서 그분의 구속의 효능을 사람에게 적용하신다. 주님께서 우리 죄를 사하심은 실로 십자가에서 흘리신 그분의 피에 근거를 두고 있다. 그러나 만약 주님께서 하늘에 오르지 않으셨다면, 그분은 자신의 죽음이나 피를 적용하실 수 없었을 것이다. 주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구속을 이루셨어도, 그분 자신의 구속을 적용하는 것은 승천 안에서이다. 승천의 위치에서 주님은 사람에게 구원을 주신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죄 사함을 비롯하여 승천의 체험과 각종 은사를 얻는 데까지 교회가 체험한 모든 구속의 은혜는 승천 안에서 주님으로 말미암아 실재적으로 적용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구속 안에서 승천은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죽음과 부활로 말미암아 이루신 모든 것은 적용을 위해 승천 안에 놓여 있다. 승천이 없이는 그리스도의 구원에 속한 어떤 것도 실재적으로 우리에게 적용될 수 없다. 

2. 우리 구원의 위치를 알 필요성

   승천을 알기 위해서 우리는 두 번째로 구원의 위치를 알아야 한다. 비록 우리가 구원받았을 때, 죄 사함 받아 심판 아래에서 구원을 얻게 되고, 죽은 상태에서 살아나며, 하나님의 생명을 얻게 되었어도, 죄 사함과 생명 얻는 것을 우리 구원의 위치라고 생각할 수는 없다. 에베소서 2장 5절부터 6절까지에서는 “허물로 죽은 우리를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라고 말한다. 여기에서는 구원을 받은 자는 모두 죄 사함을 받은 자이고, 죽음에서 살아나 하나님의 생명을 가진 자이며, 하늘에 앉은 승천한 자임을 보여 준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구원하실 때, 우리를 자신과 함께 일으키사 함께 하늘에 앉히신 것이다. 그러므로 승천은 사실상 우리 구원의 최종적인 위치이다. 
  우리가 얻은 승천의 위치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신 승천의 사실에 입각한 것일 뿐 아니라, 우리가 우리 안에 얻은 승천의 생명에 입각한 것이다. 골로새서 3장 1절부터 4절까지에서 사도는 “위엣 것”에 생각을 두라고 말한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우리 생명이시라는 사실에 근거를 둔 것이다. 그리스도는 하늘에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신다. 우리가 그분을 우리의 생명으로 삼았기 때문에 우리는 또한 그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져 있다. 여기에서는 그리스도의 죽음이나 부활 안에서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승천 안에서 그리스도께서 우리가 생명을 얻도록 하고 우리의 생명이 되심을 나타내고 있다. 비록 이 생명이 죽음과 부활을 통과했을지라도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이 생명을 주시는 것은 승천의 위치에서이다. 이 생명은 승천하여 하늘에 있으며 하늘로부터 주신 것이다. 그 생명은 하늘에 이르는 생명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생명을 얻게 되면, 하늘과 교통하고 하늘에 참여하게 된다. 외적인 상태를 볼 때는 우리가 여전히 지상에 살고 있지만, 내적 생명에 있어서 우리는 이미 하늘에 있다. 그것은 마치 주님께서 땅에 계셨을 때의 상황과 같다. 주님은 그때 자신이 ‘하늘에서 내려왔을지라도’ 여전히 ‘하늘에’ 있다고 말씀하셨다(요 3:13). 이것은 그분의 생명이 본래 하늘에 속했으며 하늘과 연결되었기 때문이었다. 
   예를 들어, 전구는 그 속에 있는 전류로 인해 빛을 낸다. 이 전류는 발전소에서 발생하여 발전소와 연결되어 있다. 외적으로 말한다면 전구의 빛은 이 방 안에서 빛을 내고 있다. 그러나 전구 속에 있는 전류의 위치는 발전소이다. 이와 같이 우리 구원받은 자들은 우리를 구원하고 지금 우리 안에 있는 승천한 생명으로 인하여 이 세대 가운데서 빛으로 나타날 수 있다(빌 2:15, 마 5:14-16). 이 생명은 하늘에서부터 우리에게 흘러온 것이며 또한 하늘과 통해 있다. 그 생명은 하늘에서 우리에게 흘러오고 또한 우리를 하늘로 이끈다. 하늘과 통하는 이 생명을 가질 때 우리 또한 하늘과 통하는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관점에서 승천은 그분의 구속의 종결이며, 우리의 관점에서 승천은 우리 구원의 위치이다.

3. 영적 기능을 알 필요성

   승천을 알기 위해서 우리는 세 번째로, 영적 기능을 알아야 한다. 그리스도인들의 모든 영적 은사는 주님께서 승천 안에서 주신 것이며(엡 4:8), 우리가 승천의 위치에서 적용하기 위한 것이다. 따라서 만일 우리가 승천의 입장을 모르고 그 입장 위에 굳게 서 있지 않다면, 우리는 영적 은사를 적용할 수 없을 것이다. 영적 은사의 기능은 다만 승천의 입장에서 나타날 수 있다. 창세기 1장 17절에서는 하나님께서 하늘에 빛들을 두어 땅을 비추게 하셨다고 말한다. 이 말씀은 상징적인 의미로 가득 차 있다. 해와 달과 별들은 하늘에 있기 때문에 땅을 비출 수 있다. 만약 별 하나가 하늘에서 떨어지면, 그 별은 기능을 잃어버리게 된다. 그 비추는 기능은 전적으로 하늘이라는 위치에 달려 있다. 이와 같이 우리가 복음을 전하든, 사람을 심방하든, 성도들을 가르치든, 교회를 다스리든 간에, 그 실재적인 기능은 전적으로 승천의 위치에 달려 있다. 만약 우리가 승천의 위치를 잃어버리게 되면, 틀림없이 영적인 기능을 잃어버리게 될 것이다. 
   예를 들어, 많은 형제자매들이 사람들을 심방해도 유익을 주지 못하는 이유는 그들이 이미 승천의 위치를 떠나 지상의 어떤 상황 속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사람들을 심방해서 좋은 효과를 얻는 데에는 많은 말을 하거나 많은 진리를 전할 필요가 없다. 우리가 다만 자신의 일상생활에서 승천의 위치를 유지하고, 계속 속사람 안에서 하늘을 접촉하며 하늘의 상태 안에서 산다면, 다른 사람이 접촉하게 되는 하늘의 분위기가 그들이 하늘에 속한 공급을 얻도록 할 것이다. 이것은 또한 집회에서 하는 기도에도 적용된다. 어떤 형제자매들의 기도는 공허하고 낡은 느낌을 다른 이들에게 주게 되는데, 이는 그들이 이미 승천의 위치를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그들의 기도의 미사여구가 매우 매력적일지라도 하나님 앞과 사탄 앞에서 무게가 없다. 또한 영적인 영역에서도 효과가 없다. 그러나 어떤 형제자매들은 그렇지 않다. 그들은 승천의 위치에 굳게 서서 하늘에 속한 삶을 산다. 그들의 일상생활은 하늘에 속해 있으며, 따라서 그들이 하는 기도도 하늘에 속해 있다. 그들이 입을 열면, 하늘에 속한 것을 맛보게 한다. 오직 이러한 기도만이 하늘의 보좌를 만지고 지옥의 문들을 흔들 수 있으며, 이로써 많은 영적인 결과를 낳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의 영적인 기능이 무엇이든지 상관하지 말고, 하늘의 위치에 서서 그러한 것들을 적용하며, 하늘의 영역에서 그러한 것들을 나타내도록 해야 한다. 

 4. 전쟁의 위치를 알 필요성

   승천을 알기 위해서 네 번째로 우리는 전쟁의 위치를 알아야 한다. 영적 전쟁의 위치는 절대적으로 하늘에 속해 있다. 우리가 승천의 위치를 잃어버릴 때 어떠한 영적 전쟁도 수행할 수 없게 된다. 전쟁터에서 모든 군사 전략가들은 위치의 문제에 주의를 기울인다. 언제나 저지대보다 고지대를 차지하는 자가 전쟁에 이기게 된다. 이 원칙은 영적인 전쟁터에서 더더욱 중요하다. 영적 전쟁은 단지 위치의 문제에 달려 있다고 할 수 있다. 만일 우리가 싸움에서 이기고자 한다면, 승천의 위치를 반드시 알고 지켜야 한다. 우리는 에베소서 6장에 언급되어 있는 영적 전쟁이 2장에 나오는 승천의 위치에 근거를 두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에베소서 2장에서는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에 앉아 있다고 선포한다. 그리고 6장에서는 계속해서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 대하여 씨름하는 것을 말하고 있다(12절). 여기에서 의미하는 것은 우리가 먼저 승천의 위치에 선 승천한 사람이어야 위로부터 공중에 있는 대적을 공격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땅에 속한 사람이고 승천의 위치를 잃어버렸다면, 대적의 손아귀에 떨어져 대적과 맞서 싸울 수 없게 된다. 따라서 영적 전쟁의 위치는 절대적으로 하늘에 있는 것이다. 
   창세기 3장 14절에서는 뱀이 하와를 유혹한 후, 하나님께서 뱀을 심판하사 배로 기어다니게 하시고 생명이 다하는 날까지 흙을 먹게 하신 것에 대해 말하고 있다. 배로 기어다니는 것은 그의 활동 범위가 제한되어 있음을 말한다. 뱀은 다만 땅 위를 기어다닐 뿐이다. 흙을 먹는다는 것은 뱀이 삼키는 대상을 제한시킨 것이다. 뱀은 다만 땅의 흙에 속한 것들을 음식으로 삼아 먹을 따름이다. 창세기 3장의 뱀은 사탄의 화신(化身)이다. 그러므로 뱀에게 내린 심판은 바로 사탄에게 내린 심판이다. 오늘날 사탄의 활동 범위는 땅이며, 사탄이 삼키는 대상은 땅에 속한 사람이다. 고린도전서 15장 47절과 48절은 아담과 아담에 속한 모든 자들이 땅에 속한 자들이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땅에 속한 아담의 생명으로 살 때는 언제나 우리는 땅에 속한 자이며, 또한 땅 위에서 사는 자가 된다. 우리는 사탄과 맞서 싸울 수도 없고, 사탄의 활동 영역에 떨어져 사탄이 삼키는 대상이 될 따름이다. 반대로 우리가 하늘에 속한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살 때는 언제나 하늘에 속하여 하늘에 있게 된다. 이럴 때 우리는 사탄의 활동 영역을 초월하여 더 이상 사탄이 삼키는 대상이 되지 않는다. 따라서 우리는 사탄을 공격하여 사탄을 이기게 된다. 
   이러한 전쟁의 원칙은 또한 우리의 실재적인 일상생활에 있어서도 아주 분명하다. 교회 안에 있든지 가정에 있든지 직장에 있든지 간에 우리가 죄를 접하게 되고, 세상을 사랑하고, 성질을 내며, 교묘하게 처신하고, 땅에 속한 생명으로 살 때면 대적 앞에서 강해지지 못하고 대적과 싸울 수 없게 된다. 이때 우리는 이미 땅에 속하여 대적의 손에 떨어진 것이다. 
   또 한편으로 만일 우리가 계속 주님과 교통을 가지고, 영 안에서 행하고, 하늘에 속한 생명으로 산다면 우리는 하늘에 속하여 승천의 위치에 거하게 된다. 그럴 때 우리는 낮은 땅에 맞서서 높은 땅에 거하여 사탄을 처리할 수 있게 된다. 이때 교회가 어려움에 직면한다면 우리는 하나님 앞에 힘 있는 기도를 드릴 수 있으며, 하나님께 대적을 심판하러 오시라고 구할 수 있다. 우리는 일어나 하나님께 우리의 태도를 표명하며, “우리는 이러한 일들이 교회 안에서 일어나도록 허락할 수 없습니다.”라고 말하게 된다. 우리는 또한 엄하게 사탄에게 말하기를, “우리는 이러한 것이 혐오스럽다. 우리는 이것을 대적한다.”라고 말할 수 있다. 우리가 그러한 엄격한 선포와 강한 표현을 할 때, 사탄의 온 무리는 퇴각할 것이다. 사탄의 일도 완전히 파괴될 것이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타고난 방법과 수단으로 땅에 속한 생명을 산다면 결단코 이러한 문제들을 해결할 수 없게 된다. 우리는 이미 하늘에서 떨어져 전쟁의 위치를 잃어버린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대적을 결코 처리하지 못하게 되며, 사탄의 일도 무효화할 수 없게 된다. 
   왜 승천의 위치가 우리가 전쟁에서 승리하도록 하는가? 이는 우리가 승천의 위치에 있을 때에만 하늘에 속한 권세를 얻게 되기 때문이다. 영적 전쟁을 하기 위해서 우리는 하늘에 속한 권세를 의지해야 한다. 우리가 하늘에 속한 권세를 얻을 수 있는 유일한 한 곳이 있는데, 그곳이 하늘이다. 만일 우리가 죽음과 부활을 지나 하늘의 영역에 이른다면 우리는 틀림없이 하늘에 속한 권세를 얻게 된다. 그럴 때 우리는 반드시 전쟁에서 승리하게 된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능력의 문제에 크게 관심을 두고 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를 구원하사 능력을 소유한 상태에 있게 하실 뿐 아니라 권세를 가진 위치에 머물게 하신다. 하늘의 영역에 있는 자들은 능력과 권세를 가진 자들이다. 능력을 가진 자들은 단지 다른 이들이 감동을 받게 할 수 있지만, 권위를 지닌 자들은 다른 이들이 감동을 받게 할 뿐 아니라 경외하며 두려워하게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어떤 형제자매들이 세상을 사랑하고 육체를 따라 살 때,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을 추구하고 영 안에서 사는 형제나 자매들을 보면 이들에게 대단히 경탄하고 감동을 받게 된다. 이것은 능력의 문제이다. 그러나 만일 그들이 승천의 영역에서 사는 다른 형제자매들을 만나게 되면 감동을 주는 어떠한 능력뿐 아니라 경외하게 하며 두렵게 하는 어떤 현상을 느끼게 된다. 그러한 형제나 자매들은 하늘의 영역에 있기 때문에, 하늘의 권위로 충만하다. 이로써 그들이 사람들 가운데 행할 때에, 사람들이 어떤 두려움을 갖도록 하며 그들을 경외하게 한다. 
   구약에 나오는 아가서를 읽어 볼 때, 우리는 주님을 찾는 여자가 생명 안에서 어느 정도 자랄 때 그녀의 상태가 매우 위엄 있고 두려움을 주는 것을 보게 된다. 아가서 6장 10절에서는 “아침 빛같이 뚜렷하고 달같이 아름답고 해같이 맑고 기치를 벌인 군대같이 엄위한 여자가 누구인가”라고 말한다. 여기에서 아침 빛과 달과 해는 모두 하늘에 있는 것들이다. 그러므로 이때 이 사람의 상태는 모두 하늘에 속한 것이다. 바꿔 말해서 그녀가 생명을 체험한 상태는 승천의 영역에까지 이른 것이다. 이럴 때 그녀의 상태는 다른 이들로 두려움을 느끼게 한다. 이는 그녀가 승천의 위치에서 하늘에 속한 권세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다른 이들이 두려움과 경외함을 느끼도록 하는 것은 이러한 권세로 인한 것이다. 우리가 승천의 위치에서 얻은 권세는 사탄을 처리하고 사탄을 이기는 근거이다. 
   누가복음 10장 19절에서 주님은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으며 원수의 모든 능력을 제어할 권세를 주었으니 너희를 해할 자가 결단코 없으리라”고 말씀하신다. 주님께서 언급하신 ‘뱀들’은 사탄을 말하고, ‘전갈들’은 사탄의 사자들인 악한 영들을 말한다. 이것들은 우리의 원수들이다. 그들이 가진 것은 모두가 능력이지만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은 권세이다. 주님은 우리에게 원수의 모든 능력을 처리할 수 있는 권세를 주신다. 우리는 길에 다니는 자동차로 이러한 것을 설명할 수 있다. 비록 자동차가 힘이 강하지만 교통경찰은 그에 대해 권위를 가지고 있다. 교통경찰이 호각을 불면 차는 멈춰야 한다. 또한 그것은 군대와도 같다. 군대가 큰 힘이 있어도 장군이 권위를 쥐고 있다. 장군이 명령을 내리면 군대는 순종해야 한다. 이 말은 권위가 능력 위에 있으므로 능력을 제어할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권위는 능력보다 더 크다. 그러나 권위는 전적으로 위치에 달려 있다. 위치에 있으면 권위가 있고, 위치를 벗어나면 권위도 없다. 제복을 입지 않고 지정된 위치에 서 있지 않은 경관은 차량을 통제할 권위가 없다. 임무를 떠난 장군도 군대를 통솔할 권위가 없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하늘에 속한 권위도 다만 승천의 위치에 달려 있다. 우리가 승천의 위치를 떠나면 영적인 권위도 또한 잃어버리게 된다. 그러므로 영적 전쟁에 참여하려면 먼저 승천의 위치를 알아야 하고, 두 번째로 승천의 위치를 지켜야 한다. 이럴 때만이 원수를 처리할 수 있게 된다. 
  바울은 두 번째 여행에서, 그가 빌립보에서 복음을 전할 때 점하는 영 들린 여종 하나가 바울을 따라다니며 그에게 소리 질렀다. 바울은 심히 괴로워하여 돌이켜 그 영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에게서 나오라”고 했다. 그러자 그 영이 즉시 나왔다(행 16:16-18). 여기서 바울은 승천의 위치에 서서 하늘에 속한 권세를 사용하여 원수의 방해하는 능력을 멈추게 한 것이다. 이와 같이 오늘날 만일 우리가 승천의 위치에 서 있다면, 우리는 직접적으로 환경을 명하고 어려움을 꾸짖으며 원수의 모든 일을 파괴시킬 수 있다. 
   불행하게도 오늘날 교회의 기도에는 권위적인 명령이 너무나도 없다. 오히려 대부분의 기도가 슬픈 간청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그들은 원수를 처리하지 못하며, 하나님의 긍휼에 간청할 따름이다. 이것은 우리의 실제적인 위치가 여전히 땅에 있으며 아직 하늘로 승천하지 못했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우리가 승천의 위치에 있지 않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하늘에 속한 권위도 없다. 우리는 이 문제를 속일 수 없다. 또 한편으로 어떤 사람이 승천의 실재를 가지고 있다면 자신의 힘을 과장되게 나타내거나 과장할 필요가 없다. 그 사람은 자연스럽게 하늘에 속한 모습으로 옷을 입고 있으며, 하늘의 분위기로 가득 차 있고, 달과 같은 아름다움과 해 같은 순수함으로 장식하고 있는 것이다. 이 모습은 사람들에게 두렵게 보인다. 사람들이 그를 두려워할 뿐 아니라 악한 영들도 그를 두려워한다. 다만 이런 사람만이 하늘의 위치에 서서 하늘의 권위를 사용하여 영적 전쟁에 참여할 수 있다. 따라서 승천을 알기 위해서는 전쟁의 위치도 알아야 한다.(생명의 체험下 203-214쪽)

기도의 부담

■ 기도의 부담
1. 사역의 말씀을 공급하는 동역자들의 건강을 지켜주시고, 그들의 지혜와 계시가 주 안에서 더욱 충만 하게 하십시오.
2. 2020년 봄 장로들과 책임형제들을 위한 국제 훈련(3/27-29)이 차질 없이 무사히 치러질 수 있도록 보호해 주십시오.
   (1)현재의 몸의 필요를 채울 수 있는 최신의 사역의 말씀을 해방하여 주십시오.  
3. 2020년 부산교회 봉사 목표를 위하여
   (1)2020년까지 1,000명의 인수 목표를 위하여
   (2)2020년 300명
   (3)구역별 목표 1년 50명, 소그룹별 목표 1년 5명

알리는 말씀

■ 한국복음서원 안내
▷ 사역의 말씀 다이제스트 2권 3호 신청 안내
▷ 가격 : 9,000원
※ 신청을 원하시는 분들은 3/23(월)까지 각 구역 도서봉사자들에게 신청하시기 바랍니다. 

■ 금주의 추구
1. 구약 성경 읽기 : 신 24:1 ~ 수 5장
2. RSG(신약 회복역) : 눅 10:25 ~ 눅 15장
3. 라이프-스타디 : 로마서 M15 ~ M16
4. 금주의 소그룹 추구 진도(신약 회복역) : 행 28


추천 스크랩 전체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