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의 건축 - 1(2020.4.5)
교회 주보
부산교회집사실 2020-04-03 , 조회 (327) , 추천 (0) , 스크랩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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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교회 기도집회 추구 

교회의 건축 - 1 

봉사는 마땅히 건축을 산출해야 함

   교회의 건축은 행정과 말씀의 사역으로 말미암고, 행정과 말씀의 사역은 전적으로 ‘사람’의 상태에 달려 있다. 우리가 교회의 행정에서 문제가 없었지만 교회의 건축에 있어서는 좋은 성과를 얻지 못했을지 모른다. 지속적으로 말씀을 열어주었지만 교회의 건축에서는 그다지 좋은 성과를 얻지 못했을지 모른다. 심지어 우리가 사람들을 인도하여 구원받게 하고, 성도들을 도와 온전하게 하지만 이를 통해 교회가 더 건축되게 하지는 못했을 수 있다. 우리가 많은 일들을 하고 또 일의 성과도 거두었을지 모르나 일을 할수록 건축의 성분은 갈수록 감소될 수 있다. 바꿔 말한다면 일의 성과와 교회의 건축은 반비례할 수 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일을 건축하는 것이 아닐뿐더러 오히려 하나님의 건축의 일을 허물어뜨리는 것이다. 
   정상적인 상황에서는 일이 더 많아질수록 더 많이 건축될 것이며, 그 일은 당연히 건축의 일일 것이다. 이는 마치 어떤 사람이 복음을 전할 때, 그 일은 죄인을 구원하는 일일 뿐 아니라 교회가 건축되게 하는 일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반드시 주의해야 할 한 가지는 우리가 일을 할 수 있지만 건축과 관계없을 수 있다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빛 가운데 있다면 우리가 죄인을 구원할 수 있고 성도들을 온전하게 할 수 있지만 교회를 건축하는 것이 아닐 수 있다는 것을 분명히 볼 수 있을 것이다. 오늘 기독교 안에 있는 수많은 일들이 하나님의 건축의 일을 허물어뜨린다. 교회 안에서 하나님의 건축하시는 일을 가장 심각하게 파괴하는 것은 이방인으로부터 오는 박해나 반대 혹은 어려움이 아니라 기독교 안에서 열심을 가지고 하는 많은 일들이다. 그러한 일들은 악의나 나쁜 마음 혹은 잘못에서 나온 것이 아니며, 그 목적은 기본적으로 좋은 것이고 모두가 죄인을 구원하고 성도들을 온전하게 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일들은 교회를 건축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사탄의 계략은 봉사 가운데에서 허무는 일을 하는 것임

   하나님을 위해서 일을 하지만 하나님의 건축을 허문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예를 들면 지역을 책임지는 한 형제가 자기의 지역 집회에서 요한복음을 추구하는 것을 데살로니가전서로 바꾸는 것이 한 가지 분명한 사례이다. 그가 그렇게 다른 말씀으로 바꿔서 추구하는 것은 어쩌면 지역 구성원들을 온전하게 할 수도 있겠지만, 그의 방법은 동시에 교회에 대한 하나님의 건축을 파괴한다. 왜냐하면 그러한 방법은 결코 사람들이 육체를 인식하고 자신의 의견이 처리 받으며 또한 사람들을 도와 다른 사람에게 복종하게 하는 결과를 산출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가 그렇게 한 것은 오로지 그와 똑같은 ‘영웅호걸’을 산출할 수 있을 뿐이고, 자신을 다른 사람 아래 두기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을 산출할 뿐이다. 비록 그 형제가 선한 동기를 가지고 있고 또 다른 사람을 비평하거나 판단하지는 않지만, 그가 교회 안에서 보이지 않게 허물어뜨리는 것은 훨씬 심각할 것이다.
   장로들은 온 교회가 다 요한복음을 추구하기로 결정하였지만 이 지역 책임자는 요한복음은 스물한 장이나 되는 너무 긴 책이기 때문에 사람들이 보기만 해도 겁을 먹고 감히 성경을 추구하려 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여 데살로니가전서를 추구하는 것으로 바꾸었다. 이것은 좋은 뜻에서 시작되었지만 그 안에 많은 것들을 포함하고 있는데, 이는 그 형제 자신이 파쇄된 적이 없고 자신의 의견을 한쪽으로 제쳐 놓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하며, 봉사에 있어서 자신을 다른 사람 아래 두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한다는 것을 말해 준다. 그는 파쇄의 공과를 배운 적이 없는 사람이다. 만일 이십여 명의 지역 책임자들이 “장로들이 이렇게 일을 결정한 것은 옳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들이 결정한 것이 다 옳은 것은 아닙니다.”라고 말했다고 하자. 생각해 보라. 교회가 어떻게 전진하겠으며, 그것에서 교회가 어떻게 건축될 수 있겠는가? 이것은 “태풍이 불기 시작하면 더 이상 수습할 길이 없다.”라는 중국의 속담과 같다. 
   우리는 장로들의 결정의 옳고 그름의 여부가 우리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보아야 하며, 우리가 주의해야 하는 것은 장로들에게 복종하지 않는 일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러한 지역 책임자가 지역에서 봉사한 결과, 자아가 파쇄되는 것을 배우고 자신을 부인하며, 자신을 하나님의 손에 두고 또한 자신을 다른 사람 아래 두는 사람을 산출할 것이라고 믿지 않는다. 그가 한 일은 기껏해야 주장을 내세우고 의견을 말하며, 자신의 견해만을 붙잡고 많은 관점을 가진 사람을 산출할 뿐이다. 그러나 그러한 관점과 견해들은 오히려 교회를 파괴할 뿐 교회를 건축하지는 못한다. 
   건축은 한 돌을 다른 돌 위에 쌓아가는 것이므로 건축의 반대말은 무너뜨리는 것이다. 이것은 주님께서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아 있지 않고, 다 무너질 것입니다.”(마 24:2하)라고 말씀하실 때 사용하신 단어이다. 무너뜨리는 것은 다른 돌 위에 남아 있는 돌이 하나도 없는 것이고 건축은 한 돌이 다른 돌 위에 올려져 있는 것이다. 당신의 일은 어쩌면 많은 사람들의 칭찬을 얻었을지 모르지만 당신의 아름다운 그 일들은 교회를 돌 위에 돌 하나도 남아 있지 않게 하는 무너뜨리는 일이 아닌지를 돌아보아야 한다. 이것은 사탄의 계략이다. 우리가 대만에 온 이래로 반 년 전까지 우리의 일은 날마다 건축하는 것이었으나, 최근 반 년 동안 우리가 한 것은 날마다 무너뜨리는 것이었다. 나는 그 안에 대적의 계략이 있음을 알고 있는데, 우리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사탄에게 이용되어 건축의 일을 파괴하고 있다. 나는 어떤 형제나 자매도 악의나 혹은 특별한 의도를 갖고 건축의 일을 파괴한다고는 믿지 않는다. 그러나 배운 공과가 부족하기 때문에, 봉사를 하지만 모르는 사이에 사탄에게 이용되어 파괴하는 일을 하는 것이다. 사탄은 당신의 일을 이용하여 파괴하는 일을 하고 있다. 당신은 자신이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당신의 일이 허물어뜨리는 것임을 아는지 모르겠다. 사탄은 당신의 일을 통해 허물어뜨린다. 이로 인해 우리의 봉사와 교회의 간증은 매우 큰 손상을 받는다.

무너뜨리는 일은 성도들을 교회에서 멀어지게 하고 
교회 가운데 권위를 손상시킴

   우리는 이 반 년 동안 우리의 일이 갈수록 결실을 맺었는지, 아니면 갈수록 해체되는 방향으로 나아갔는지를 자문해 볼 필요가 있다. 함께 봉사하는 우리들이 갈수록 마음이 한 곳으로 모였는가 아니면 갈수록 흩어졌는가? 성도들의 마음이 구심점을 중심으로 모아지는 것은 건축이고 흩어진다면 그 방향은 파괴를 향하는 것이다. 만일 장로들이 사람들에게 요한복음을 추구하도록 결정했는데, 지역 책임봉사자가 짧은 서신으로 바꿔 추구하고자 한다면 알게 모르게 무너뜨리는 것이고 성도들을 교회에서 멀어지게 하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교황처럼 장로들의 권위를 세우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지방 교회 가운데 과연 행정적인 권위가 있는지에 대하여 자문해 보아야 한다. 행정적인 권위가 있다면 누구의 수중에 있는가? 그것이 항상 집회에 참석하는 천여 명의 형제자매들의 수중에 있다면 라오디게아 교회로 변질된 것이다(참조 계 3:14-22). 반대로 그것이 교황노릇을 하는 한사람의 수중에 있다면 천주교로 변질된 것이다. 지방교회의 행정은 장로들의 수중에 있다. 장로들은 하나님 앞에 엎드려 하나님을 경외하고, 두려워 떨며 교회의 행정을 수행하고 또한 강화시키기를 배워야 한다. 그들은 틀릴 것을 두려워 할 뿐 아니라 약화되는 것을 두려워해야 하고 우유부단한 것을 두려워해야 한다. 만일 어떤 지역의 집회를 중단시켜야 한다면 장로들은 우유부단해서는 안 되며, 지체하지 않고 그 일을 처리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 지역은  소규모 지방 교회가 될 것이다.
   우리가 있는 교회가 얼마나 큰지에 상관없이 봉사에 있어 사람들이 파쇄되지 않았고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으며 또한 교회 가운데 권위가 있음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이러한 교회는 바로 성도들이 중심에서 멀어진 상태의 교회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모든 사람이 일하지 않는다면 그나마 허물어지는 것이 그렇게 심하지 않을 것이지만, 모든 이들이 활발하게 일할수록 허물어지는 정도는 그만큼 더 심할 것이다. 만일 장로집회에서 결정한 사실을 지역집회에서 실행할 때, 단지 몇 개의 지역에서 다른 의견을 가진다해도 교회는 구심력을 잃게 되고, 장로실도 문을 닫아야 할 것이다. 만일 지역 책임자가 이렇다면 소그룹 책임자도 동일하게 반대하는 의견을 낼 것이다. 이러한 풍토는 몸이 파상풍균에 감염되어 결국 죽게 되는 상황과 같다. 이것이 바로 성도들로 구심점을 잃게 하고 교회를 파괴하는 것이다. 
   이러한 예를 든 것은 우리가 계속해서 일을 하고 있지만, 실상은 허물어뜨리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 주기 위한 것인데, 이것은 사탄의 심각한 계략이다. 최근 몇 년 동안 어떤 형제자매들은 주님과 교회를 위하여 많은 것들을 희생하였다. 한 면에서 우리가 주님을 위해 희생하는 것은 원래 자랑할 것이 없는 것이며, 마땅히 그렇게 해야 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다른 한 면에서 우리가 주님의 일을 위해서 희생해야 하지만 결코 사탄의 계략이 우리 가운데 들어오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만일 봉사하고 있는 우리가 날마다 성도들이 구심점을 잃게 하고 흩어지게 한다면 당연히 이 일은 더 이상 지속할 수 없다. 사탄의 가장 심각한 계략은 바로 우리 가운데 기어들어와 성도들이 구심점을 잃게 하고 흩어지게 하는 일을 하는 것이다. 
   구심점을 잃게 만드는 사탄의 일은 결코 많은 이들이 의견을 가지고 소란을 피우거나 혹은 말다툼하게 만드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대부분은 사람의 호의나 선한 마음으로 허물어뜨리는 일을 하게 하는 것이다. 이것이 대적의 계략이다. 지역 집회 책임자가 제기한 성경을 추구하는 문제는 표면적으로 성도들의 유익을 위한 것이지만 사실은 그렇지가 않다. 만일 형제들이 공과를 배웠다면, 그들은 봉사할 때 틀에 박힌 안배를 하지 않고 융통성 있게 봉사해야 하지만, 반드시 사람들을 교회 안에서 일치되게 해야 하고, 교회 안에는 하나의 움직임만 있어야 한다는 것을 배우게 해야 한다. 교회 안에는 오직 하나의 움직임만 있어야 하는데, 이것은 사탄의 계략에 빠지는 것을 피하기 위한 것이다.

성경 안에 있는 성령의 권위

   하나님은 그분의 말씀을 통해 지방교회가 얼마나 큰지에 상관없이 반드시 성령의 권위를 존중해야 함을 우리에게 보여 주신다. 예를 들면 예루살렘 교회는 유대인들 가운데서 주님을 믿는 성도 수가 몇 만 명이 되는지 모를 정도로 컸다(행 21:20). 그러나 바울과 바나바가 예루살렘에 이르렀을 때 사도행전 15장의 기록에 따르면 그들은 어떤 일을 결정할 때 큰 집회를 열어 투표로 표결에 붙이는 방식으로 처리하지 않았다. 우리는 성경에서 단지 한 무리의 사도들과 장로들이 하나님 앞에 앉아서(6, 22절), 어떤 이는 그들의 경험을 말하고 어떤 이는 그들이 본 빛에 대하여 말했으며, 그리고 난 후에 야고보가 일어나 약간의 교통을 하는 것을 본다(13절). 이것이 바로 성경 안에 있는 성령의 권위이다. 
   예루살렘에 있는 수많은 믿는 이들이 이 말을 들었으며, 또한 편지를 써서 각 지방으로 보냈다(20절). 그들은 소란스럽게 다투거나 큰 회의를 열어 모든 사람에게 의견과 느낌을 발표하게 하지 않았으며, 모든 이들이 표결에 참여한 것은 더욱 아니다. 그들이 한 것은 사도들과 장로들이 주님 앞에 앉아 사안을 결정하는 것이었다. 엄중한 문제였던 할례에 관한 사안이 일단 결정되자(15절), 비록 예루살렘 교회에 많은 사람들이 있었지만 아무도 더 이상 의견을 표시하지 않았다. 

죽음의 씨앗과 성도들을 
구심점에서 멀어지게 하는 씨앗을 뿌리지 않음

   만일 어떤 사람이 올바르지 않은 동기를 가지고, 요한복음을 추구하자고 결정한 장로들의 인도에 대하여 사람들에게 어떤 책을 추구할지에 대해 의문을 품게 하고, 또 이러한 느낌을 다른 지역 집회 책임자나 소그룹 책임자에게 교통한다면, 이것은 죽음의 요소를 퍼뜨리는 것이다. 비록 그가 틀린 것이 전혀 없는 것 같고 또한 장로들을 비방하거나 반대한 적도 없지만 사람들과 이야기할 때 단지 ‘지방교회는 독재인가?’라는 느낌만 생기게 해도, 그가 말을 하면 할수록 ’파상풍의 증상‘은 더욱 심하게 되어 심지어 교회에서 성도들이 구심점을 잃게 되는 상황에 이르게 된다. 죽음의 씨앗과 죽음의 성분이 그곳에 뿌려지고 교회에서 성도들이 구심점을 잃게 하는 씨도 그곳에 뿌려진다. 이러한 씨가 형제자매들 안에 뿌려지면 언젠가는 자라 나와서 그들을 손상시킬 것이고 최종적으로는 이로 인해 교회에서 성도들이 구심점을 잃게 되는 상태가 가득할 것인데,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일을 무너뜨리는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비록 우리가 복음 전파의 일을 하여 사람들을 구원시킬 뿐 아니라 사람들을 온전하게 하지만 우리가 온전하게 하는 일 속에 항상 알게 모르게 무너뜨리는 요소도 지니고 있다는 것을 보아야 한다. 마치 당신이 사람들에게 좋은 차 한 잔을 마시게 하지만 그 차 안에 폐결핵 균이 들어 있어 사람이 마시고 나면 폐병이 생길 수 있는 것과 같다. 어떤 형제는 당신의 도움을 얻지 못하고 당신의 온전하게 함을 받지 못했다 하더라도 교회에서 구심점을 잃지는 않았다. 그런데 당신이 그 형제를 온전하게 하자 그가 열심히 주님을 섬기기는 했는데, 문제는 그의 봉사 때문에 성도들이 구심점을 잃게 하는 성분과 무너뜨리는 요소를 가지게 되었다면 이는 하나님 앞에서 매우 엄중한 일이다. 

건축은 서로 부축하고 서로 공급하는 것임

   우리의 가장 큰 어려움은 우리 개개인이 총명하고 능력이 뛰어나 서로를 필요로 하지 않고 각자 자기의 일만 하며, 또 일을 시작하면 다른 사람의 발등을 밟는다는 것이다. 이러한 모든 것들이 무너뜨리는 것이고 구심점을 잃게 만드는 이야기이다. 그러나 건축은 이와 같지 않다. 참되게 건축된 사람은 한 가지 상태와 한 가지 느낌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은 그가 결코 단독적으로 행동할 수 없고 형제자매들이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으므로 그는 반드시 다른 사람을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그가 말씀을 전할 때, 그는 형제자매들이 그를 위해 기도해 주는 것을 필요로 하며, 형제자매들이 영으로써 그를 부축하고 그를 공급하는 것을 필요로 한다. 그 형제는 형제자매가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 같다. 오늘 우리 가운데서 이러한 영은 거의 찾아볼 수 없는 것 같다. 말씀의 사역을 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기도를 필요로 하지 않고 사람들은 부축하는 영이 없이 단지 말씀 전하는 사람이 어떻게 말하는지를 보면서 비교만 하고 있다. 이것은 우리가 가져서는 안 될 영이다. 
   건축을 무너뜨리고 성도들이 구심점을 잃게 만드는 씨앗이 이미 우리 가운데 뿌려진 것에 대해 형제들은 분명히 알고 있어야 한다. 성도들이 구심점을 잃게 만드는 그러한 씨앗이 열매를 맺을 때, 교회 전체가 무너지고 봉사와 일 전체가 와해되어 버린다. 그때 우리는 지금보다 더 영적일지는 모르겠지만 봉사는 와해된다. 당신이 행한 것이 옳고 나와 저 사람이 행한 것이 옳으며 각자가 행한 모든 것이 다 옳지만 모든 것은 와해되어 버린다. 이것이 사탄의 가장 교묘한 계략이다. 과거 우리가 했던 일의 결과를 볼 때 사람을 교회의 구심점으로 이끌었던 적이 별로 없었다. 우리는 날마다 일하지만 오히려 성도들을 날마다 구심력을 잃게 하는 상황이 증가했다. 사람들이 도움을 받을수록 오히려 교회 안에서 구심력을 잃고 갈수록 분산되며, 건축은 없고 오직 허물어지는 상황만 증가된다. 특별히 청년들을 대상으로 일하는 형제자매들 가운데서 서로 의지하는 느낌을 찾아보기 어렵다. 
   우리는 누가 말씀을 전하든 온 무리가 한 사람처럼 서로 중보 기도하고 공급하고 부축해야 한다. 함께 봉사하는 우리들에게 만일 동일한 영이 없고 하나로 일치되지 않으며, 서로 간에 다툼이 있다면 우리가 표면적으로 좋은 것처럼 가장하여도 사탄은 그 상황을 이미 알고 있으며, 말씀을 들으러 처음 온 사람도 알아 볼 것이며 심지어 어린 아이들도 알게 될 것이다.(교회의 행정과 말씀의 사역 59-70쪽)

기도의 부담

■ 기도의 부담
1. 주님께서 그분의 회복 안에 있는 모든 나라의 교회들을 강건하게 하시고 붙잡아주시고 번성케 하시어 예수님의 증거가 되게 하시도록
2. 성도들이 기도를 꾸준히 계속하도록, 성도들의 기도생활이 개인적으로나 소그룹에서나 교회집회에서나 구축되어 기도가 중단되지 않도록 
3. 2020년 부산교회 봉사 목표를 위하여
   (1)2020년까지 1,000명의 인수 목표를 위하여
   (2)2020년 300명
   (3)구역별 목표 1년 50명, 소그룹별 목표 1년 5명

성도들 소식, 금주의 추구

■ 성도들 소식
1. #1 - 개업(확장 이전)
박해은 형제님이 4/11(토), 희드라세탁소(757-6854, 수영구 광남로 252번길 1층)를 개업합니다.

■ 금주의 추구
1. 구약 성경 읽기 : 수 22:1 ~ 삿 10:5
2. RSG(신약 회복역) : 눅 22:7 ~ 요 2:22
3. 라이프-스타디 : 로마서 M19 ~ M20
4. 금주의 소그룹 추구 진도(신약 회복역) : 롬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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