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11월 14일
나는 주님의 은혜로 2014년 10월20일 2번째 로마여행을 하게 되었다.그리고 로마 기행문을 쓰는 과정에서 2000년 교회사를 연구하게 되었고. 워치만니 형제님은 20대에 2000년교회 역사를 자세하고 정확하게 알고 계셨다는 것도 알게되었다. 그리고 주님은 지나간 과거에 수원교회안에서 어떻게 움직이시고 어떻게 수원교회를 돌보셨는지를 기록으로 남겨야 한다는 느낌도 갖게되었다.우리는 역사를 통하여 계시의 소중함을 볼수있다.그리고 이러한 계시가 어떻게 확증되었는지를 볼수있는데.이것을 보는것은 우리모두에게 너무나 가치있는 일이다.또 이 일을 재고함으로서 주님께서 수원에서 어떻게 역사하셨는지를 보고 우리의 교회생활의 거울로 삼기를 주님께 기도한다.
그리고 수원교회를 세우신 분들중에는 이미 주님의 품안에 가신분들도 계신다.그래서 이번 겨울에 주님의간증을 지키며 교회생활안에 계신 한분 한분의 형제님들 과 자매님들을 만나야 할 마음을 가지게 되었다.수원교회는 1973년12월에 간증이 세워졌다.수원교회 간증의 시작은 주님께 부름받고 순수하게 주님의 사랑하는 젊은 두분의 형제님들에 의해서 시작되었다. 이윤규형제님께서는 1968년 서울 마포구 공덕동 장로신학교를 졸업하시고 양평군 청운면 신론리에서 손수 자비로 예배당 을 짓고 장로교회 목회를 하셨었다.
형제님께서는 일찍이 성경을 연구하는 가운데 출애굽기와 로마서을 통하여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빛을 보게 되어 분명한 진리를 전하셨으며.복음적인 목회를 하셨었다. 그당시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얻는 것을 전파하는 사역자가 많지않을 때 였었다.그러므로 목사님께서 설교하실때 우리는 “아무것도 할수없고 하나님께서 모든것을 하셨다.”라고 전파하셨는데 교인들 중에는 “왜 우리가 할수없다고 하지. 우리는 할수있는데”라고 말했다고 한다.이것은 이윤규목사님의 설교가 다른 목사님들의 설교와 같지 않았기 때문인데 이 목사님은 “우리는 하나님을 위해서 무었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신일을 구경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구원은 우리의 노력이나 행함으로 받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하신일을 보고 믿음으로 구원얻는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이었다.”출애굽기 14장13절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두려워말고 가만히서서 여호와께서 오늘날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이것은 하나님이 어떻게 구원을 행하시는지 구경하라는 것이었다.1970년12월 이윤규 형제님께서 수원으로 이주 하셨는데 이렇게 된것은 수원영화 감리교회에 권사님 이셨던 윤명선 형제님의 요청에 의한 것이었다. 이것은 전적으로 주님의 주권과 안배하심이었다. 윤명선 형제님은 1968년 수원으로 이주하셨다. 그리고 수원영화 감리교회권사가 되었다.이때 형제님의 나이는 30대 초반이었다.
회계장부를 맡은권사로서 지방회에 참석하였는데 그곳에서 그들의 회의는 성경적인 모습은 찿아볼수없고 정치적이고. 세상적이며. 괴상하고 이기적인다툼 을 보았고 또 감리교회의 목사님의 합당치 않은 일처리와 모함과 비방. 미움과다툼을 보고 나오게 되었는데. 이때에 주님는 성령에의한 순수하고 깨끗한 성경적인 교회를 세우고자하는 마음을 갖게 하셨다. 그래서 신론에서 목회하시던 이윤규형제님을 찿아가 “수원에 오셔서 함께 교회를 개척하는 것이 어떻게는가.” 라고 교통하게 되었다. 이렇게 된것은 이윤규형제님이 윤명선형제님의 매제였기 때문이며. 이것이 서문장로교회를 세우게 된동기가 된것이다.윤명선형제님께서는 어려서부터 주님을 믿고 구원을 받았다. 그리고 주님을 위해 살고자하였다.1968년도에 수원으로 이사와서 영화교회 권사가 되었다.그러나 영화교회의 어려움이 발생하여 생명과 말씀이 충만한 교회를 개척해야 한다는 부담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주님께 기도하였다 “주님,나는 혼자서 할수가 없읍니다.” 라고 기도하는 가운데 주님의 음성은 “신론리에 이윤규목사가 있지 않느냐”라는 음성을 들었다.그래서 1970년도에 이윤규목사님께서 수원으로 오시게 되었다.
처음에는 조그마한 집을 얻어 그곳에 간판을 걸고 서문장로교회를 시작하게 되었는데. 신자들이 많지 않았다. 그후 서문로타리에있는 큰 건물 2층에 예배당를 얻어 간판을 걸었더니 많은사람들이 보고 찿아 왔다.이윤규 목사님의설교는 우리는 하나님을 위해서 무었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신일을 구경하므로서 하나님의 구원을 받을 수있다는 말씀에 많은 사람들이 모이게 되었다.
그리고 2-3년내에 교회가 부흥이되자 (“영화감리교회에 새로부임한 목사가 윤권사가 개척하는 교회가 어떤가를 살펴보고 있을때 교회가 증가한다는 소문을 듣고 그들은 윤명선형제님에게 제안을 하게 되었는데 정남감리교회목사가 수원으로 오고. 수원의 이윤규목사는정남으로 가고 윤형제님는 영화감리교회로 오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형제님께서는 이런제안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1973년 9월 서문장로교회에서 이정태 형제님이 오셔서 부흥집회를 하였다. 집회가 끝난후 윤명선 형제님께서는 목회를 위하여 춘천으로 되돌아갔다.(윤명선 형제님은 1972년에 춘천감리교회에 목회을 위해 1년간 그곳에가 있었었다.) 얼마지나지 않아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강한 내적 강권이 있어서 집에 돌아왔는데 수원 서문장로교회에서 또 부흥집회를 한다고 하여 부흥회를 한지 얼마 안되었는데 또 무슨집회를 한다는 것인가.
그래서 어찌된일인가하여 집회에 가보았는데 그 집회는 이전과 다른 놀라운 집회였었다. 집회 후에 왕중생형제님께서 나를보시고 이윤규형제님께 누구인가 묻고서 나에게 윤형제는 축복받은사람이라고 말씀하셨다.나는 부흥집회가 있다는것을 알지 못한상태에서 이곳에 오게되었는데. 이것은 주님께서 나를 생각치도 못한집회로 인도하셔서 주님의 회복을 알게 하신 주님의 손길이었다.
거의 같은시기인 1972년 종로 감리교회에 다니시던 김명찬 형제님께서 종로감리교회의 내분으로 서로 편을 갈라 싸우는 모습을 보고 실망하였다.그러한 분열때문에 김명찬형제님은 상처를 입고 낙심이 되어 “이곳에 있으면 안되겠구나”라고 생각하여 다른 교회를 찻게 되었다.그리고 주님앞에 참된교회를 보여달라고 주님앞에 나아가 새벽마다 기도하였다.
이때 집으로 가던중 서문삼거리쪽에서 새로 개척을 시작한 장로교회를 발견하고 거기서 이윤규목사님을 만나게 되었는데. 형제님은 성경대로 하나님은 섬기는 목사님인것을 발견하고 기쁨으로 교통을 나누게 되었다.그리고 매일아침마다 주님앞에 회개하며 교회를 부흥시켜달라고 부르짓으며 기도하였다. 김명찬 집사님은 우리가 다알듯이 내적 생명을 주의하는 형제님이셨고 성령의 능력을 체험한 분이셨다.
김명찬 형제님은 1973년 2월 23일 새벽에 예배당에서 기도 할때에 주님을 만나게 되었다. 5년전에 만난 주님은 밖에서 말씀하셨는데 지금 만난 주님은 인격대 인격으로 만난 주님이었다. 주님께 물으면 주님이 설명해주시고. 내가 눈물을 흘리며 기도할때에 주님도 눈물을 흘리시는 것을 보았다. 이때 형제님는 주님의 놀라운 사랑에 감동되었다. 그리고 죄가 떠올라서 주님께 회개하였다. 그리고 “예수로 나의 구주삼고” 라는 찬송을 부르며.매일 새벽마다 주님께 나아가서 부르짖으며 기도하며 찬송하였다.
“예수를나의구주삼고 피와 성령으로 거듭나니 이세상에서 내영혼이 하늘의 영광 누리도다. 이것이 나의 간증이요. 이것이 나의 찬송일세 나사는 동안 끊임없이 구주를 찬송하리로다.”
이윤규목사님의 설교는 항상 로마서와 출애굽기였다.”너희는 두려워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날 너희를 위하여 행하신 구원을 보라.” 라는 구절을 가지고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을 구경하라는 말씀을 전하셨다. 이것은 그분의 누림이었다.
1973년 신론리 부흥회를 가기위해 1호선 전철을 타고 갈때 이윤규목사님은 나에게 “우리는 설교하러가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이 어떻게 하시는지 구경하러 가는 것입니다. 라고 말씀하셨다. (이전에 나는 구경합시다. 라는 뜻이무엇인지 알지못했으나 형제님에 대한 기록을 보면서 이것은 그분의 누림이었었구나. 하는 생각를 가지게 되었다. 이윤규형제님을 그러한중심으로 늘 설교를 하셨다.)
내가 지금까지 종로감리교회에서 본것은 싸우는 모습 과 잘 믿으면 축복받는 다는 것이었으나. 이윤규목사님의 말씀은 하나님께서 하신 것을 보라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나는 “내가 지금까지 들어온 설교가 사람에게서 나온 것이로구나.” 라고 깨닫게 되었다.
1973년 서문장로교회 근처 서문아파트에 사셨던 이상영형제님은 그때 어린 아들2명을 잃은 슬픔을 격으셨는데.이상영형제님의 두 어린아들은 서문장로교회 교회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이로인해 이윤규목사님 과 고재운 형제님은 이상영 형제님을 찿아가 주님의 위로와 구원을 전하였다.이때 이상영형제님께서는 슬픔을 딪고 일어나 서문 장로교회 생활을 하시게 되었다. 이상영 형제님께서은 복음 전하는 은사를 주님께 받았다. 형제님께서는 어는곳에서나 언제나 주님을 복음으로 전하는 분이셨다.
젊은청년이었던 신융식.호태구.박재호.고재운 형제님도 연결되어 함께 청년회 봉사를 하였다. 그러므로 이윤규목사님의 목회가 한층 강화되어 1973년도에는 인수가 80여명으로 급속하게 증가되였다.
1973년 11월 원주에서 목회하신던 황태일목사님의 연결로 왕중생 형제님께서 서문장로교회에서 복음집회를 하게되었는데 “하나님께서 거저주시는 선물로서의 구원 과 그리스도가 우리 생명이신것과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전하는 전혀새로운 말씀에 감동되었다. 왕중생 형제님는 부흥집회에서 “하나님는 하늘에만 계신것이 아니고. 우리안에 계시며. 주님은 생명의 떡”으로 오셨기때문에 우리는 “그분을 먹어야 산다” 라고 말씀하셨다. 그 집회는 우리를 놀라게 하였으며 하나님의 영과 임재가 충만한 집회였다.
왕중생형제님는 놀라운 말씀의 사역자이셨다. 복음집회가 이틀이 지난후에 왕중생형제님께서는 성경에 나타난 교회는 건물이 아니고 구원받은 믿는이들의 연합체일뿐아니라 그리스도의 몸이기 때문에 성경적이지 않은 간판은 내려야하고 내리지 않으면 나는 더 이상 집회를 할수없다고 말씀하셨다.그러므로 이윤규목사님께서는 집사님들과의 회의을 통하여 왕중생 형제님의 말씀이 성경적인 올바른 교회라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성경적이지 않은 교회 간판을 내리는 것이 옳다고 결정하였다. 그러므로 이때부터 형제님들은 한마음 한뜻으로 서문장로교회 간판을 내리게 되었으며. 정식으로 수원교회 집회소 간판을 달고 떡을 떼기시작하였다.이것이 수원교회 간증의 시작 이다.그후 어떤 집사는 간판이 내려진 것을 보고 누가 간판을 바꾸었는가 라고 하며 화를 내며 안절부절하였다. 진리에 대하여 깨달음이 없던 사람들은 스스로 안나오게 되었다.
그러므로 교인의 수가 점점 감소하여 주님께 분별된 40여명 (남은사람들 대부분은 젋은이 였다)의 성도들이 수원교회의 시작인수가 되었다.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집주인이 간판이 바뀐것을 보고 집을 빼달라고 하였다. 이렇게 된것은 간판이 바뀐후 사탄은 어떠 사람 (영락교회 다니는 장로교인으로 추측되는) 을 통하여 집회소 건물을 빼았도록 주인을 매수하여 쫓겨나게 되었다.그리고 그들은 그장소에 이름을 바꾸어 서문 밖 장로 교회라는 간판을 달았다.
그러므로 형제님들께서는 서문근처 화서동 김명찬 형제님집 마당으로 옮겨 천막집회소를 짓고 그곳에서 수원교회생활을 지속하게 되었다. 천막으로된 집회소는 여기 저기 구멍이 있었서 나무와 스레트를 덧댄 초라한 곳이었다.그리고 1974년 이런 초라한 장소에서 고재운형제님과 김영분자매님께서는 왕중생형제님의 주례로 결혼식을 하였다.비록 그장소는 비천 했지만 그 곳은 마치 주님이 태어나신 말 구유 처럼 하나님의 은헤가 있고.주님의 임재가 있는 영광스러운 곳 이었다.
그리고 이윤규목사님에게 교회가 월급을 줄수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목사님은 시멘트 브럭을 만드는 작은 공장에서 고되고 힘든일을 하였으며. 곤란한 가운데 생계를 유지할수 밖에 없었다. 이때 형제님은 4명의 자녀를 두고 있었다. 생활은 어렵고 힘들었지만 형제님께서는 주님을 의지하고 감사하는 생활을 하였으며. 주님을 위하여 사시는 분이셨다.어느날 장안동에 사시는 박진숙자매님이(남편은 삼성전자 과장이었음) 이윤규목사님께서 일하시는 모습을 보고 안타까워 않아서 눈물을 흘렸다.
만약 형제님께서 목사의 길을 계속 가셨다면 성공할수있었던 목회였을 것이다.그러나 형제님께서는 땅에 속한 부귀와 영광을 취하지 않으셨다. 주님의 목적을 위하여 고난의 길를 택하였고. 수원교회 간증을 세우신 분이시다. 이윤규목사님은 교회를 위해서 자신을 주님께 바친 것이다. 이때 이윤규형제님과 한무리의 형제님들은 주님의 길을 택하였는데 그러한 길을 가게 하신분은 주님이셨다.그러므로 수원교회의 간증은 한무리의 형제님들의 동심합의 가운데 주님의 회복이 일어난 것이다.그런데 안타갑게도 이윤규형제님께서는 1993년에 일찍히 주님의 품안으로가셨다.
1975년 수원교회는 영화동 거북시장 근처 평화 목욕탕 2층에 새로운 집회소를 마련하여 그곳에서 모이면서 서로 사랑하고 신언하며 그리스도를 누리고 기쁨에 찬 교회생활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누림의 교회생활은 3년이 지난후 형제님들 가운데 서로 하나되지못하는 상황이 싹트게 되었는데, 그것은 성경 지식이 증가 하게 되었으므로 각자의 의견과 주장이 나왔기 때문이었다.그때 집회상황은 각자가 머리가되는 상황이었다. 한 지체가 영이라고하면 다른 지체는 육이라고 말하고.서로의 주장를 내세우며 다툼이 시작되었다.
그러므로 왕중생형제님께서 오셔서 집회를 인도 하시며 공급을 해 주었다. 그때는 상황이 좋아지는 듯했으나 여전히 하나가 되지 못하여 교회가 전진하지 못하고 기쁨과 누림을 같지 못하게 되었다.그러므로 교회안에 합당한 질서를 세워야 할필요가 있으므로 왕중생형제님께서 1976년에 수원교회 직분을 안배해주셨는데 윤명선 형제님을 수원교회 대표장로로 임명하였다.
그러므로 그때부터 수원교회 인도를 윤명선형제님께서 하시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인도체계를 부인하는 몇몇 형제님들은 수원교회생활을 떠나게 되었다.1976년 왕중생형제님께서 수원교회 질서를 세우기 위해서 수원교회 직분을 세우실때 윤명선형제님과 이윤규형제님이 인도하도록 선포하셨다.복수의 장로를 세우신것이다.그러나 그때의 성도들은 윤형제님만 세워다고 생각하여 어려움이 발생하게 되었다.
한면으로 성도들의 다툼과 어려움은 그들의 육체가 드러난 것이었지만.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우리의 자아가 폭로되었고 좌절되었다. 그것은 우리를 파쇠시키기 위한 주님의 치료하시는 사랑의 손길이었다.
그리고 한국교회는 매년 일년에 2차례씩 전국특별집회가 있었는데 집회는 주로 세상명절 기간에 있었다. 그당시 전국에서 주님을 사랑하는 많은 성도들이 모였는데. 대만교회에서 봉사하시는 워치만니 형제님의 동역자(장오신.장상택) 형제님들께서 오셔서 한국교회에 많은 공급을 주었다. 대만의 동역자 형제님들의 말씀은 우리가 이전에 듣지못했던 신선하고도 새로운말씀이었기 때문에 한국교회에 새로운 생명력을 주었다.
1982 년 왕중생형제님께서 주님의 품으로 가셨다. 그리고 한국교회는 서울을 비롯하여 여러지방에서 분열되어 교회가 하나되지 못한 길을 가게 되었다.그러므로 교회는 전진하지 못했고.교회생활의 기쁨은 사라지고 복음이 전파되는데 방해가 되었다. 대만의 동역자들 과 위트니스리형제님의 도움으로 1987년부터 한국교회는 하나의 간증을 회복하였고 1988년 부터 사역을 긴밀히 따라가게 되었다.
1980대에 주님께서는 한국교회를 다루셨다.우리의 자아와 천연적인사람을 처리하셨다고 말할수있다.이러한 환경을 거치면서 한국교회는 한단계 생명이 성숙하게 되었다. 1991년 어느날 윤명선 형제님께서 나를 찿아 오셔서 목양해 주셨다. 이전에 나는 옳은 것을 주장하는 자아가 강했던 형제였었다.그래서 윤형제님과 나는 80년대에 감정의 골이 있었다. 그러나 이때 윤형제님은 이전의 윤형제님이 아니셨다. 이때의 형제님은 말년의 야곱처럼 어떤형제도 받을수 있는 마음으로 넓혀지신 분이셨다.
1994년에 있었던 사건을 하나 소개 하겠다.수원교회 초기 교회생활에서 함께 교회생활을 하였던 김진영 형제님이 계셨는데 (그당시 김진영형제님은 1980년초 교회를 떠나 다른 교회에 다니고 있었다.)두분은 가까운 친척 이였다. 그러나 윤명선형제님과 교회생활의 분열로 인해 사이가 좋지 않아서 수원교회 생활를 떠났었다. 나는 두분 형제님께서 화해 하지 못한 것으로인해 마음이 무거웠다. 그리고 이러한 상태로 주님앞에 가서는 안된다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에 나는 두분 형제님들께서 화해하여야 한다는 부담을 가지고 있었다.
1994년 어느날 두분 형제님들께서 만나게 되었다. 이때 윤명선형제님께서는 잘 잘못을 떠나서 김진영형제님께 지난 과거의 모든것을 용서해 달라고 말하였다. 그러므로 김진영형제님께서 정자동 선경마그네틱 공장앞에 있던 수원교회 집회소에 나오신적이 있었다. 그러나 김진영형제님의 수원교회생활은 회복되지 않았다.그후 10여년이 지난 어느날 김진영형제님께서 주님품으로 가셨다는 연락을 받았다.
1996년 위트니스리 형제님께서는 한국교회 장로 형제님들 60여명을 애너하임으로 초청하여 6개월의 장로훈련을 진행하셨다. 윤명선형제님께서 미국에서의 장로 훈련을 마치고 돌아오신 후 정선으로 가시게 되었다.그리고1997년 이창식형제님께서 수원교회를 인도하셨다. 그리고 얼마 안되어 부산에서 안태우형제님께서 수원에 오셨다.그리고 1998년 수원교회는 두개의 집회소로 나뉘어봉사하게 되었다.
이창식형제님께서는 1집회소에는 이창식.황영일 .황장성형제님을 안배하였고.2집회소는 고재운.강성희 안태우.김철배 형제님을 안배하여 봉사하도록 하였다. 2003년 이창식형제님께서는 갑자기 수원교회 인도직분을 내려놓으신다고 선포하셨다.
그리고 수원교회는 1.2집회소로 나뉘어 봉사하면서 성도들 사이에 1.2집회소 관념이 생기게 되었다.그러므로 아이들 조차도 서로 우리집회소 관념을 가지고 경쟁하고 시기하고 대립하는 상황이 되었다.
2004년 윤명선 형제님께서는 수원교회의 분열된 상황을 보시고 하나로 모이도록 인도해 주셨다.그리고 윤 명선형제님과 고재운형제님과 강성희 형제가 수원교회를 인도하도록 하셨고. 1집회소의 모든 봉사를 내려놓고 2집회소의 봉사체계안으로 들어가도록 선포 하게 되었다. 이렇게 하신것은 자신을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는 공과를 배우도록 인도하신것이라고 윤형제님께서 말씀하셨다.
수원교회가 하나로 모이게 된후 2005년 오유성형제님과 임홍형제님의 교통을 통하여 아주대학교 앞쪽에 학생센타와 수원교회 집회소를 구입하고 이주하게 되었다. 2008년 고재운형제님께서 안타깝게도 수원교회 봉사를 내려놓고 여주로 이주하셨다. 오랜시간동안 나는 고형제님과의 아름다운 동역이 있었지만 후에 형제님의 봉사에 누를끼친것을 후회했다.형제님께서 봉사를 지속하지 못하게 된것에 대한 나의 주님앞에 책임도 있었기 때문에 형제님께 용서를 구했으며 수원을 떠나지 마시기를 구했지만 결국 형제님께서는 여주로 이주하지 않으면 안되신것 같다.
지나온 과거 42년 수원교회의 역사를 회고 해 볼때 많은 믿는이들이 수원교회생활을 거쳐 갔지만 교회 안에 남아있는 성도들은 많지 않다. 그때마다 많은 사람들이 주님께 쓰임은 받았으나. 회복안에 있지 않고 떠나 갔다. 그리고 어려움 과 고난속에서도 간증을 지키신 분들도 계신다. 나는 간증을 지키신 분들을 통하여 많은 생명의 공급을 받고 온전케 되었으며 생명이 자랄수 있었다. 분열되지 않고 하나의 간증을 지킨다는 것이 하나님앞에 얼마나 큰 축복인지 알수 있었다. 이와같이 수원교회의 역사는 헌신의 역사였다. 어떤 고통과 어려움. 고난이 있어도. 자신의 영광과 장래를 위하여 살지않고 모든것을 주님께 다 드린 아름다운 헌신이 수원교회를 건축하게 된것이다.
(위 글은 2015년1월과 2월에 걸쳐 윤명선형제님.김명찬형제님.이창식형제님.고재운형제님,이원순자매님,윤영자자매님들로 부터 듣고 증언해주신것을 토대로 기록하였다.)
(형제님 수원교회 역사를 두개로 만들었읍니다. 공개용과 비공개 용 인데요.비공개용은 너무 자세하고 신론교회 역사도 일부 있어서 비사로 남겨두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읍니다.그리고 윤영자 자매님을 만난후 수정이 불가피 했습니다. 수원교회 역사를 정확하게 알고 계신분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고재운형제님.검토해 보시고 수정하셔서 연락 주시면 좋겠습니다.)
*위 글은 2015년 11월 윤명선형제님과 김명찬형제님의 감수를 받아 완성하였습니다.*